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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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1. 서론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문화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 기독교적, 근대적 개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정리되면서 혼란들을 야기했다. 고전적 인간관은 그리스 철학을 전제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반이 된다. 이성적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합리주의와 육체를 악으로, 마음은 선한 것으로 양분하는 이원론 그리고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스토아 철학이 바탕이 된 개념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인간 개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초월성을 가진 인간 개념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하는 인간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근대적 인간관은 자연주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사상이 되면서 고전적 개념과 기독교적 개념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생명력과 존재 양식을 초월하는 해석 원리 없이 부분적 진리들이 끝없이 논쟁하는 혼란을 야기했다. 근대적 인간관의 두 번째 혼란은 자연의 산물이면서 정신의 산물인 인간의 개체성의 근거를 없애 버린 것이다. 세 번째 혼란은 근대적 인간관이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함으로 악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다룬 것이다.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세 가지 혼란이 발생한 원인은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편협(이성이거나 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맞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근대성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존재양식, 개체성, 악의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한다. 이는 근대적 인간론에서 당면한 혼란이다.

 

혼란 중 첫째는 인간 본성의 생명력과 그 존재양식에 대한 해석 원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은 창세기 1: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두 번째 혼란인 인간의 개체성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과 유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은 정신의 산물이며,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산물로써 인간의 개체성을 형성한다.

 

세 번째 혼란은 낙관적으로 해석한 악의 문제였다.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성서적 근거,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비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칼뱅과 루터의 이론을 살펴보고 니버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막스 셀러의 이론을 보면서 니버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개념을 정리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크게 기독교적 견해와 고전적 견해, 그리고 바울의 신학에 나타난 견해와 그에 대한 니버의 주장을 본다.

 

셋째, 죄인으로서의 인간에서는 죄의 기원과 죄의 형태 그리고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을 정리해 봄으로 니버의 인간론을 마무리 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1) 성서적 근거

인간에 대해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증언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 도덕성, 종교성, 언어 능력, 자유 등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범주로 연구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중요하게 보는 히브리 사상이 드러나 있다. 히브리어에서 ‘숨’이라는 의미의 ‘라우흐’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기관의 특수한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라우흐’(숨)에 의해 생기를 받았다. 히브리어의 ‘네페쉬’(바람)는 인간의 피 속에 있다고 믿어졌는데, 영혼이나 마음(ψυχή)을 포함한 인간 안에 있는 생명과 동일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양성경에서 라우흐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정신으로서 영혼과 구분되는 프뉴마(πνεῦμα)가 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것 처럼 정신과 영혼도 개념들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 철학에서 합리적을 이성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 누스(νοῦς)와 구별하여 정신을 지칭하는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에게 있는 ‘상대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 성경에서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토대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지성적인 관점에서 정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몸, 영혼, 정신, 영혼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으며, 정신은 신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신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정신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고자 하는 신학에서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프뉴마(πνεῦμα)와 사르크스(σάρξ)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의 정신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사르크스(σάρξ)는 육체 보다 죄의 근원을 의미함으로 사용했다.

 

2)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던 중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합리적 피조물로 보는 것 이었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플라톤의 합리주의에 성서적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사람에게도 있어서 사랑이 하나님 형상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했다. 오리게네스 또한 플라톤 주의의 영향으로 가득차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전생의 타락을 속죄하는 타락한 천상의 정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성서적 개념이 포함된 설명을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아니고 지성적인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천사들이 인간보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형상”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신학자로 인정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을 포함하는 그 이상의 것 으로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혼의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축복을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이 있었으나, 그들과 기독교와의 조화를 최선의 상태로 공유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아의식의 신비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초월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인 기억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초월의 힘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적 신앙에 기반 하여, 기독교적 계시를 강조하므로 자아의식을 신격화하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초월능력은 자신의 너머를 지향하게 하지만, 스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 영역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해 이렇게 명확히 진술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임에도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들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칼뱅과 루터 두 사람을 주요하게 다룬다. 칼뱅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그들을 능가하는 인간의 탁월한 본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영혼을 총체적 인간이라고 정의하지 않지만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구조라는 것과 원래는 완전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는 두 관점에서 정의 한다. 이성은 의지의 자발적 결정(self-determination)과 초월성을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이성이 가지는 초월성이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마음이다. 또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의지도 인간에게 있으므로 인간은 원래 고상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성, 오성,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칼뱅은 히브리적 인간 이해에 근거하여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몸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거한다고 했다. 더불어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향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고 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이론의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루터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마음 또는 지성과 의지”이상의 어떤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였으나 죄에 의해 손상되었으므로 현재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며 이에 더하여 루터는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에 치중했다.

 

5) 막스 셀러와 니버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 ~ 1928년)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정립하고 ‘철학적 인간학’, ‘지식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문화 사회학의 시조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누스’(νοῦς)와 구별되는 단어인 독일어의 ‘정신’(Geist)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정신’(Geist)은 이성이라는 뜻 뿐 아니라 원인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이해 방식도 포함하고, 정서적 능력과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셸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의 독특한 자질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과 자유를 초월하며 시공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셸러는 원숭이와 에디슨을 비교했는데 이에 대해 니버는 기술적 지성이 추상화 능력과 일반화 능력에 의존하는데 이 두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초월적 능력에서 유래되므로 원숭이는 에디슨의 기술적 지성에 다다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셸러가 이성을 초월하는 정신(Geist)을 강조 하고 정신(Geist)이 이성을 포함한다는 것에 니버도 동의하는 바이다.

 

셸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자기 결정력을 말한다. 자기 결정력은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한한 존재 가능성을 가지지고 무언가 선택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설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 다 계시하므로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 했지만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 안에 존재했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인간은 자유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풀어갈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 할 경우,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논리적 일관성을 의미의 원리로 할 경우 의미를 합리와 동일시 하려는 모든 것은 이성의 신격화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인간 안에서 작용되어지므로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신앙을 통해 이해되는데, 신앙은 이성에 종속 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진다. 반면, 우상숭배의 죄를 피하고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게 하는 초월적 시각이 인간에게 있다. 이러한 유한성과 자기초월의 양면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피조물의 교리로, 자유와 자기 초월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 두 가지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 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6장.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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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이 다른 견해들과 다른 부분이다.

    (1) [생명력과 형식] “하나님의 형상“교리에서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2) [개체성] 인간의 유한성이 악의 근원이 아니며, 인간의 신성과 피조성이 통일됨을 본질로 하므로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3) [인간의 본성]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이다. 이 결과로 불확실성을 더 악화시키게 된다.

2) 기독교적 인간관의 논리를 분명하게 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검토하고

3)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이 제시하는 것들이 적합함을 입증함으로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

 

 

1. 성서적 근거 Biblical Basis of the Doctrines : 창세기 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토대 없음.

. 구약성경에서는 육체(라우흐, 숨)와 영혼(네페쉬, 바람)이 통일성을 이루는 히브리 사상이 표현된다.

. 신약성경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프뉴마 : 성령, 정신)과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 사도바울 : 프뉴마(자연적 능력 이상의 어떤 것 의미)와 사르크스(죄의 근원)를 대비해서 사용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몸이 아니라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인간 정신에 있는 자기 초월 능력에 관심을 두었다. ‘기억’이 시간과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을 기술하면서 자아의 한계는 자아 밖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자아의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가까워 질수 있다고 표현하고, 신비주의도 공유하지만 성서에 바탕을 두므로 자아의식이 하나님을 지향한다. 그는 계시를 강조하고 자신 너머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련성과 차이) 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으로 보고 이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데 까지 이르는 능력과 삶을 창조자에게 복종하므로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 칼뱅은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아담이 창조자의 탁월함을 닮았을 때의 완전성(원래는 완전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고 했다.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 인간을 이해하여(히브리 인간 이해) ‘인간의 몸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 루터는 원죄론 재정립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지금은 상실되었음을 입증하는데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형상은 죄에 의해 손상되고 더럽혀 졌다고 주장했다.

 

.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데 인간의 합리적 능력 이상을 암시하는 영향을 주었다.

 

. 하이데거는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자라는 ’초월‘개념.. 합리적 존재자 이상의 존재자라는 초월 개념”으로 정의했다.

 

. 막스 셀러는 ’누스‘와 구별하여 ’Geist(정신)‘을 사용하여 사유능력, 개념 파악 등의 독특한 이해방식과 정서적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Geist(정신)‘는 인간의 본성과 독특한 자질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순환과정을 초월하는 것 뿐 아니라 절대적 목표를 선택하는 것으로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선택의 자유“ 이상(이하)의 자유를 갖는다.

궁극적 실체에 못 미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한되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자연(창조)에 의해 자신에게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도 선택 할 수 없다.

 

.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절대자이며 영원한 인격체 이며, 자신이 가장 추상적이지만 가장 구체적인 자유라고 했다.

 

. 니버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다 계시하듯이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한 이후 십자가 죽음에서 사랑이 구현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 인간은 자유(정신, 의식)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구축할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의 문제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한다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자연의 인과율은 하위 원리중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인과율을 통해서만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세계는 기계적 통일성에 의해 이해되는데, 기계적 통일성은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또 다른 예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합리적 원리는 인과율보다는 어느 정도 고차원적이긴 하지만 의미를 합리성과 동일시 하려는 모든 노력은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의 교리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 피조물로서의 인간 The Doctrine of Man as Creature

. 피조물이 선하다는 기독교의 견해는 창1:31(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절 말씀에 기초 하고 있다. 또한 삶과 역사에 관한 성서의 모든 해석은 창조된 세계는 그의 유한성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유한성, 의존성,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므로 존경과 겸손함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것들은 악이 아니다.

 

. 인간 삶의 단편성이 악은 아니다. 단편들이 전체와 연결되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 악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의지할 때 발생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와 유한성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수 있다.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은 유한성이나 의존성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 신약에서는 피조물의 유한성과 의존성이 강조되는 것은 (도덕적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하는 것은 신적 통일성과 영원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와의 절대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 기독교적 인간관 안에서 창조론의 중요성은 개체성에 관한 견해에서 나타난다. 개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피조물이지만 그 생애동안 가능성을 완전히 성취 할 수 없고 여전히 의존적이다.

 

. 기독교 사상에서 자아의 유한, 의존적, 불완전한 근본적 특성과 자아가 본질적으로 선함을 일관되게 견지하지는 않았다.

  (1) 초기에는 관념론과 신비주의 오류를 기독교 사상과 혼합했다. 오리게네스는 인간이 타락의 대가로 가변적이고 유한적이게 되었고 성욕을 죄의 상징과 결과로 간주했다. 성욕이 육욕적 본능 일 뿐 아니라 생식이 유한한 실존에 필연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의 불완전함이 그들의 불충분성과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며 인간 본성이 자연환경과 필연성에 의해 제한되고 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

  (2) 그 영향으로 헬레니즘 기독교의 이단들에 의해 주장된 양성생식이 타락의 결과라는 것은 현대 그리스 정교회에 까지 이어진다.

  (3)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4) 성경은 유한성을 악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죽음은 죄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는 대부분 영적인 죽음을 표현한 것(엡2:1, 고전15:56)임에도 헬레니즘의 이원론과 유사한 점들이 있다.

 

. “죽음”에 대해 성경이 특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의 운명의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삶의 완성을 바라는(부활의 소망) 기독교는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과 같다.

 

. 죄의 원인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 아니라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 있다. (7장으로의 연결)

라인홀드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5장. 기독교적 인간관의 적합성

 

□ 5장의 위치 : 1~4장 까지 내용

A. 근대적 인간관(본성) : 1) 고전적 개념 2) 기독교적 개념 3) 근대적 개념

B. 혼란들 (요약)

1) 생명력과 형식 (2장) : 생명력과 형식에 있어 모순된 결론

2) 개체성에 관한 확신 (3장) : 개체성의 근거 없음

3) 본성의 선함에 관한 확신 (4장) : 도덕관념에 대한 낙관적 평가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을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 인간관에는 여러 개념들(A)이 합쳐지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와 혼란(B)들이 발생했다. 문제들을 3가지로 요약하고 2장~4장 까지에서 다룬다.(p.64)

기독교적 인간관이 근대의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 5-6장이다.(p.73)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합치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죄다.(p.80) 책의 목적중의 하나는 죄에 대한 기독교의 의미를 분석하고 양심의 가책이 기독교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본성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위상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역설가운데 있다. (p.63)

 

[keyword] 계시, 창조자, 심판자, 죄인, 구원자, 화해, 그리스도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3가지 문제는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1) 편협(이성or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2) 형이상학적 견해로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즉 자유와 필연성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유한한 한계 때문에 신비주의가 계속 등장했다.

 

5장. 기독교적 인간관의 적합성

1.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Individual and General Revelation 개별적(개인적)인 일반계시

2. 계시로서의 창조 Creation as Revelation

3. 역사적이고 특수한 계시 Historical and Special Revelation 역사적인 특별계시  

 

1. 개별적(개인적)인 일반계시 Individual and General Revelation

. 기독교를 예언자적 종교, 묵시적 종교, 계시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계시종교는 개인적, 사회-역사적 경험(역사)을 통해서 세상의 기초가 되는 영원한 목적과 의지를 드러낼 것이 기대된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계시종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세계초월성과 세계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 신비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신비를 깊이 통찰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한하고 역사적인 세계에 자신을 계시한다.

 

. 계시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동시에 강조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의 관계가 설명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본질적으로 선(善)하다는 것을 이해 할수 있다.

 

. 이러한 계시는 양면적인데, 1) (일반)인격적-개인적인 경험과 2) (공적)사회적-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공적 계시가 없다면 개인적 경험은 검증되지 않은 감정에 불과하다. 특수한 개별적 계시가 없다면 공적이고 역사적 계시는 개인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상호보완)

 

. 슐라이마허는 하나님 경험을 절대적인 의존 경험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님 경험의 측면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 저편으로부터 관찰되고, 명령되고, 심판되고, 인정받는다는 인격적 느낌이다.

인간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개인의 경험들은 ‘양심’과 관련이 있다. 양심은 사회적 의무와 판단 혹은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의무와 판단일수도 있다. 이에 대한 성서적 해석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명령, 의무감, 심판받는 느낌 같은)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인데, 인간에게 요구하고 심판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다. 보편적 경험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성경적 신앙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성경적 신앙이 전제 된다면 경험의 주체가 하나님이 라는 것은 경험의 모든 요인들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유일한 토대가 된다. 인간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관점이 없다.

 

우리가 다른 인격체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분석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의 필요성과 성격을 유비적으로 알 수 있다. ‘너’와의 관계에서 ‘너’가 우리에게 ‘말’해서 분명 해 질 때 까지는 이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는 말로 인해

(1) 동물적 존재와는 다른 영역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 알려주고

(2)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인격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경험된 실체(‘너’)가 그 자체로 주체라면, 그 실체가 주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 속성을 경험한 우리는 단순히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특수한 경험을 밝혀내는 원리가 “계시”이다. ’너’로 만나는 하나님이 그의 속성에 관한 특별한 계시들로 확증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해 될 수 없다.

 

. 구체적인 계시(specific revelations)들은 특정한/특별한(particular)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특정한/특별한(particular) 구원사적 관점에서 보면 구체적인(specific)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목적을 드러내 보여주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s)이다.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에 의한 해석의 원리가 없으면 일반계시는 개인을 향한 평가나 ‘최선의 자아’ 경험으로 왜곡된다. (In Biblical faith these specific revelation are apprehended in th contest of a particular history of salvation in which specific historical events become special revelations of the character of God and of His purpose. Without the principle of interpretation furnished by this “special revelation” the general experience or the general revelation involved in conscience becomes falsified, because it is explained as facing his won “best self”. (p.220) )

 

. 기독교 신앙이 인간 이해를 위해 중요한 이유 :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대면할 때 인간의 실상과 자유를 깨닫게 되며,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육체를 평가 절하하며,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악을 다루지 못하는 인간이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2. 계시로서의 창조 Creation as Revelation

. 인간 의식 안에서 전적 타자와 대면하는 경험의 3요소는 의존감정, 심판의 경험, 화해의 갈망인데 여기서 창조자, 심판자,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이 정의된다.

(1) [의존감정/창조자] 절대적 권위에 대한 존경심과 존재의 궁극적 근원(실체)에 대한 감정으로 창조자와 창조라는 개념으로 하는 ‘일반’계시에 의해 보완된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당신’이 전 세계의 근원이자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2) [심판의 경험/심판자] 도덕적 의무감과, 신 앞에서 느끼는 도덕적 무가치성을 말한다. 이는 역사에서 예언자적-성서적 심판 개념으로부터 보완된다.

(3) [화해 갈망/구원자] 심판 이후에 화해를 갈망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관계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본질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는 결정적 계시인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다. 인간이 화해는 갈망하지만 화해의 집행은 하나님 편에 있다.

. 하나님의 계시의 세 가지 유형들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정의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존되어 있다.

.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계시의 범주에 속한다. 온 세계는 어떤 존재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롬1:20) 창조에 대한 설명은 계시론을 위한 토대가 된다.

 

3. 역사적인 특별계시 Historical and Special Revelation (특별계시)

개인 경험과 세계에서 계시된 초월적 하나님은 성서의 역사적 계시가 형성된 토대이다. 역사적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자비의 속성과 관련(심판자, 구원자)된다.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신앙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고, 신앙의 눈은 개인적인 도덕적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것을 발견한다. 도덕적 경험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된 도덕적 의무감으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 인간에게 가해지는 심판과 반역으로 생긴 하나님과 인간 사이 화해의 필요성으로 구성된다.

도덕적 의무감은 하나님과 백성사이 언약에 뿌리가 있다. 인간 역사에 대한 성서의 근본적인 견해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을 악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악의 본질은 자신의 연약함, 유한성,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능력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과 피조물의 한계를 넘는 덕과 지식을 가장하려는 것에 있다. 인간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이 세계를 초월하고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식이 완전하다고 과대평가하며 존재에 대해 자만한 것이 죄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시 하려는 유혹에 빠진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이나 심판의 도구인 각 제국들이나..) 역사의 대재앙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교만을 징계하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예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의 죄를 처벌하면서 동시에 치료 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가?(심판과 자비의 문제)

→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적 계시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심판과 자비와 관련된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한다. (대속과 칭의) 대속은 하나님의 신적 자발성으로 인간에게 먼저 화해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자유가 스스로 신적 희생을 선택함으로 인간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다. 하나님의 자유

* 창조자, 심판자 하나님은 일상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일반계시를 통해 알려져 있다.

* 구원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따라서 심판을 초월하는 사랑과, 인간의 죄를 대속할 방도가 있다는 특별계시이다. 특별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속성이 이해되면,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코로나 상황 같은 개인의 일상적 경험에서 이 속성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시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걸어오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의 말이라는 확신이다.

 

*결론

. 근대의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와 자기 초월은 시간과 자연을 넘어서므로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어떤 규범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은 “궁극적 실체의 본성“(하나님)에서만 진정한 규범을 발견 할 수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계시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가 동시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계시로 간주된다.

 

.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1) 인간의 죄 문제 이며, 인간이

  (2) 자연의 변화의 과정을 피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육신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계시) 화해 이다.

 

그러므로 대속과 칭의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 이해에 절대적 전제이다.

 

. 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 단명했는가? 근대에 시간-영원의 차원을 제거하였고, 성서에서 중요시 하는 죄가 성서적 관점을 더 어렵게 함으로 근대에 성서적 인간관의 관점들이 발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서적 인간관의 의미 정리가 먼저 필요하다. (6장으로의 연결)

 

[인간론] 인간, Great Mystery(과학과 신, 그리고 의미를 탐색하는 인간)

길 위에 있는 ‘기이한 작은 배’ (2/2)

 

3. 인류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다루면서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한 죄의 문제가 화두가 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황을 직면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데 현실을 직면하지 않음으로 과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류의 문제도 직면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계속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과 ‘죄’의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흙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죄’는 신학적 개념으로서 이 단어가 발생된 이유는 선조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결국 오래된 이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을 행할 수 도 있고 ‘죄’로 인해 악도 행할 수 있다는 둘 사이의 긴장을 간직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순진한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휴머니즘의 현재 의미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 대신 인간의 성취와 열망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시기 휴머니즘의 기원은 기독교에 근거한 문화와 교육 운동이었다. 현대의 휴머니즘(세속 휴머니즘)이 포괄하는 신무신론은 하나님은 악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주장하며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런 종교를 만들어 낸 인간의 비합리성과 부도덕함을 더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문제의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좀 더 정의롭고 인도적으로 살게 되려면 교육이 모종의 답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그러나 교육만으로 죄인인 인간의 성향을 조절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인간의 본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므로 인간을 상품화 하거나 착취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GDP가 상승하고 과학이 더 발전하는 진보를 경험할수록 인간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다윈의 선택 번식 개념이나 트랜스휴머니즘(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간 변화론을 주장하는 운동), 기후 조정 등이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결과가 좋기만 하지는 않다. 또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화와 죽음을 피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가 있다.

 

결론

저자는 맺는말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유한함으로 첫째, 인간은 위대한 존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은 무언가 볼 수는 있지만 전체를 명확히 다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만과 만족의 양면을 다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이다. 둘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적인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현대 시대는 계속해서 바뀌므로 확실한 것이 없는 불안하고 복잡한 상태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최소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셋째, 우리가 아는 것이 많을지라도 아직도 알아야 할(발견해야 할)것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우리의 시각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발코니가 아닌 길 위에 있다. 우리는 ‘컴컴한 강물 위’에서 항해 하는 ‘기이한 작은 배’임을 잊지 말자

[인간론] 인간, Great Mystery(과학과 신, 그리고 의미를 탐색하는 인간)

길 위에 있는 ‘기이한 작은 배’(1/2)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22세에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2년 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패커의 제자로 캐나다의 리전트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을 가르쳤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변증학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사제이면서 기독교 신학자 이다. 과학적 무신론자였던 그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무신론을 대표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기독교를 변증하는 기독 지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논중 한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이란 무엇인가』 『C. S. LEWIS』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복 있는 사람),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기독교 변증(국제제자훈련원),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IVP),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도킨스의 신(SFC) 등이 있다.

 

본서의 기획은 2015년 이언 램지 과학과 종교 센터의 콘퍼런스에서 기조 강연한 내용을 기초로, 컨퍼런스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추가하여 책으로 구성한 것이다. 컨퍼런스에서는 인류학, 생물학, 철학, 심리학, 신학 전문가들이 ‘인간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를 논했다.

 

많지 않은 분량의 책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3개장 12개의 흐름으로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인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해 최대한 예의와 존중을 하려는 노력이 보이며, 실제로 저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책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과학과 신학을 섭렵하는 변증가로서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고 상대의 논지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는 저자의 지혜가 놀랍다. 또한 논증을 위해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책들을 거론하고 있으며, 전문 서적 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 한다. 대부분의 이론들에 대해서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편집에 있어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의 영어이름과 생존시기를 밝혀 주어서 독자들이 시대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도 돋보였다.

 

서론

철학에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는 ‘생의 의미‘에 대해 저자는 과학과 종교에서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안내한다. 과학 조차도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 살만 루슈디의 이론을 수용하여 인간 내면의 영적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각 개인의 삶은 표현된다. 이러한 의미의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종교의 능력을 인식한다면, 과학과 신앙을 함께 엮어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과 신학 두 분야를 소재로 인간의 정체와 의미에 대해, 인간 본질의 ‘큰 그림’을 전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힌다. 첫 번째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번째 생의 의미에 대해, 세 번째 미래에 대해 논한다.

 

 

1.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이 왜 그렇게 ‘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몰두하는 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의 본질은 물리, 화학, 생물, 사회적 차원으로 구성되어있고 또한 각 차원은 복잡한 실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간단히 말 할 수 없지만 우선 이 책에서는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인간의 본질과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인류학 연구를 사용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현재까지 영향력 있었다고 알려진 4가지 이론을 제시함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중요성에 주목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르네상스의 서막을 알린 인간 존엄에 관한 연설 에서 창의성을 강조한 지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입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보호막 안에 감금되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하기에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해방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이리스 머독의 관점이다. 네 번째는 인간 유전자의 기질이 이기적이므로 이기심 성향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이기심(탐욕)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해석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관점이다. 네 가지 관점은 인간의 본질 뿐 아니라 각 관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이 제기 된다. 답은 없고 질문만 생성되는 상황에서 저자는 중요한 질문들로 되돌아가보자고 제안하며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2. 생生의 의미에 대해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춰 존 알렉산더 매케이의 ‘발코니와 길’과 C.S.루이스의 순례자의 귀향 을 예로 들면서 인간을 길 위에서 ‘큰 그림’을 찾는 순례자로 표현한다. 의미를 찾는 동물로서 ‘의미’란 것이 인간의 번영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종교와 과학 분야에서 이야기 한다. 종교에서는 인간에게 경험과 삶을 해석 할 ‘틀’을 제공하여 주므로 의미를 분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여 더 큰 무언가와 관계 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에서 의미의 문제에서는 제한된 지침만 줄 수 있다는 것을 19세기 이성의 시대를 통해 경험했다. 그러므로 ‘생의 의미’의 문제는 과학의 답변 능력을 넘어서는 질문이다. 또한 우리가 중요시하는 ‘사실’은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는 재해석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실’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지식의 소재로서의 ‘사실’이 해석되고 이해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이야기이다. 카를 융은 ‘인간의 경험과 행동의 기저가 되는 어떤 “보편적 심리구조”가 있다’고 했다. 한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 심리구조”를 형성하는데 이야기가 사용 되는데, 예를 들면 ‘신화’는 의미를 전달하고 이성에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창작해 낼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톨킨은 말한다.

우리가 장대한 이야기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에 참여 할 때 이다. 장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해석해 주는 의미의 틀이 되는데,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은 신봉자들이 그 이야기에 참여할 때 이야기의 진행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기독교의 이야기 안으로 내가 들어가겠다는 결단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잠시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다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며 ‘대안적 가설들’에 대해 말한다. ‘의미’라는 것을 인간이 조작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이 생긴 이유는 어떤 직관에 의해 신념이 먼저 채택되고 그 후에야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것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진지하게 보자고 한다. 그의 가설을 무시한다면 자신의 세계관이 그의 가설을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상상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파헤친다. 토마스 네이글의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그런 우주를 원치 않는다’는 글로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표현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편히 쉴수 없습니다.’ 문장으로 자신의 이론을 나타낸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욕망의 논리’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욕망은 하나님은 우리가 발견하고 만나야 할 분으로 만들며, 토마스 네이글의 경우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워줄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니체, 자크 데리다, 리처드 로티 등이 의미와 도덕은 자신의 기대에 따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자는 사회규범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기득권자에 의해서 조작되기 쉽다고 밝힌다. 결국 평가의 준거는 한 사회의 합의와 관행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가 만들어낸 준거로 우리가 만들어 낸 의미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의미에 대해서는 ‘객관적 근거가 있되 적용은 주관적으로’ 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미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의미를 이해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쇠렌 키에르케고르) 개인적으로 체험하므로, 인간이 진리와 만났을 때 내면이 변화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와 루이스의 주장이며, 저자 본인도 이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예로 든다. 이와 같이 생의 의미 혹은 목적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영역 내에 있지 않지만 찾으려고 하면 발견될 것이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존로크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신이 없다는 도킨스나 저자의 신념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발코니에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설명도 가능하고 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C.S.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헤아려본 슬픔 을 예로 들면서 추상적 개념(신학)과 사실적 경험(경건)의 차이를 설명한다. 바로 이것이 발코니에 있는 것과 길 위에 있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인간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저자는 ‘세계의 의미’로 화두를 돌린다.

의미의 문제가 시작되는 곳은 호기심이다. 자연(세계)을 궁금해 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과학으로 가서 관찰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되어서 연구하다 보면 때로는 경이감을 잃게 되기도 하고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보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계시‘에 의해 우리의 이성이 보완 될 수 있다. ’계시‘는 우리 힘으로는 알아낼 수 없지만 우리의 현실을 납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큰 그림‘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을 창조하신 분의 아름다움까지 알수 있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고전적 개념이다. 도킨스와의 논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준다.

세계를 이야기 하면서 자연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시야를 우주로 돌린다. 우주의 기원과, 인간이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는가(편안한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암시한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시는 여행자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가 길에서도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살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향하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5장_트렌스-포스트 휴머니즘과 신학적 인간론

 

■ 저자소개 : 정대경

. 어린 시절 접했던 진화 과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렸다가, 회심 체험 후 그리스도인

. 장로회신학대학교(Th.B.),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M.Div.),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Ph.D.)에서 조직신학, 과학신학을 전공하면서 신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

. 숭실대학교 교수 및 교목으로 봉직,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실재성을 변증

. 신학과 과학 학제 간 연구의 최신동향과 실태를 조사하고 분석한 연구

 

■ 이종성(春溪 李鐘聲, 1922-2011)의 인간이해

. 통전적 신학 추구 : 신앙과 삶을 통전적으로 결합

.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론적, 교회론적, 종말론적으로 즉 통전적으로 다루었다.

. 인간의 4중 상태로 인간론 접근 : 이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적으로 타락된 인간, 중생된 인간, 완성된 인간

. 하나님, 타자, 자기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관계의 통전성을 가진다.

. 칭의와 성화의 동시성 안에서 성장한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값없이 의롭게 된 중생한 자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성으로, 세상을 속으로 즉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세상과 사회 안에서의 삶 역시 중시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선교를 해야 하며, 세상은 교회의 선교를 받아 더 나은 세상이 된다.

. 신자는 천국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 기독교인은 종말론적 지평 아래에서 현재의 삶을 산다.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살고, 현재 안에는 미래가 약동한다.

 

. 「조직신학대계」 (1975년~1993년, 12권 완간) : 연역적 방법으로 조직신학에 부족함을 느껴 귀납적 방법을 택하게 됐는데 그것이 「신학적 인간학」으로부터 시작한 계기가 됨

.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논하고 그리스도를 논할 수 있겠는냐는 주장

. 인간에 대해 먼저 탐구하고 그 인간, 즉 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써 나간 귀납적 방법 택함

 

1. 서론

. 스티븐 호킹의 ‘수퍼휴먼들’(superhumans) : 유전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전기술을 사용할 뿐 아니라 지적능력 등 인간의 속성 향상 시키기 위해 기술 적용으로 발생된 인간

 

. 기존 인간과 새로운 인간의 공존 → 누가 사람이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 트렌스휴머니즘 : 포스트휴먼(수퍼휴먼) 실현하는 사조이자 운동

. 기술진보가 인간의 생물학적 문제로부터 해방, 삶의 웰빙 실현

. 과학기술 그 이상 : 휴머니즘과 계몽주의 잇는 사조

. 신념 : 인간의 본질은 이성 → 개인은 자신의 진화 역사 디자인하고 주도해야 함

→ 핑크 빛 휴머니즘, 역사의 수레바퀴 (대학살, 세계대전, 불평등....)

특징 문제 제기 신학의 대안 제시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 강조 탈 체현화 경향성 체현된 주체
이성 통한 문명의 진보 문명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 인간 실존의 모호성
개별적 자율성의 강화 개인주의적 경향에 관한 문제 케노시스

 

∴ 신학의 트랜스휴머니즘에 기여 : 기술 발전의 방향과 적용에 반성적 성찰할 계기 마련

 

. 신학적 인간 이해

(1) 체현된 주체 : 이성적 존재 이상, 심신상관적 존재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체현하면 삶

(2) 인간 실존의 모호성 강조 : 기술 발전이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윤리적 모호함)

(3) 자기 제한과 자기 비움 : 타자와의 관계서 안에서 자기 제한과 비움으로 공동체 형성

→ 기술 남용에 따른 부정적 결과 예방에 기여

 

2. 트랜스휴머니즘이란?

. 과학 기술로 인간의 신체, 정신적 웰빙을 실현 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과학기술, 철학, 문화)

. NBIC (Nanotech. + Biotech. + Information tech. + Cognitive Science) 융합기술

. 생물학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 감성, 정신적 속성들 향상

 

(1) 과학기술 운동 : 과학기술로 인간의 속성 변형

. 변형된 인류도 호모 사피엔스 인가?

. 트랜스휴먼 : 현 인류와 새 인류 사이 과도기적 인류

. 포스트휴먼 : 새로운 인류 (누가 사람인가?)

 

(2) 철학적, 문화적 운동

. 인간의 내재적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실행하여 인간 스스로 미래 진화를 결정하는 것이 책임이자 운명이다. 이성의 빛 안에서 나은 삶을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이 인간의 웰빙을 실현해 줄 것이며, 이 믿음이 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정의 (줄리언 헉슬리)

. 인간이 상태와 조건 향상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초학제간 시도..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본성이 교정 될 수 있다. (닉 보스트롬)

. 트랜스휴머니스트

. 창시자 :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 1887 – 1975, 영국의 생물학자)

. 철학자 : 맥스 모어(Max More),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 노화방지 기술 : 오브리 드 그레이 (생물의학자, 노인학자), 죽음은 노화로부터

 

 

p389 의식/정신 신체
기계 (1) 마인드 업로딩, 초지능, 가상현실 (3) 나노 봇, 웨어러블 로봇
생명 (2)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뉴럴 임플란트, 누트로픽스
(4) 냉동 보존술, 맞춤 아기

 

3. 트랜스휴머니즘과 기술

(1) 기계 지향, 정신 변형 기술

. 마인드 업로딩 : 두뇌 업로드 온라인의 지식들과 상호작용, 초지능 (너의 몸은 어디에..?)

. 가상현실 : 망자와의 만남 - 오용?

 

(2) 생명 지향, 정신 변형 기술 : 육체 보존 하면서 지능향상과 확장 추구

. BCI : 두뇌와 사물을 무선 통신기술로 연결, 생각만으로 사물 통제

a. 비침습적 방법 : 뇌파 측정으로 구현

b. 침습적 방법 : 두뇌에 직접 칩 이식(뉴럴 임플란트) - 역이용?

. 누트로픽스 : 기억력, 지능, 인지능력 향상 약물 - 향상 시키는 능력?

 

(3) 기계 지향, 신체 변형 기술

. 나노봇 : 생명공학기술과 결합, 질병 극복, 노화 방지, 수명 연장

. Prosthesis, Wearable Robot : 신체기관과 기능 보조용 인공 신체 (미군 탈로스, 아이언맨)

 

(4) 생명 지향, 신체 변형 기술

. 냉동 보존술 : 생명연장 실현 될 때 까지 인간 냉동

. 맞춤아기 : 생식세포 계열의 유전자 편집 (취약 유전자 치료) - 누가 수혜를 받는가?

 

(5) 인공지능

. 인간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반응 할 수 있도록(예 : 자율주행) 하는 자율성과 빠른 계산 뿐 아니라 추론 및 전략적 사고(알파고)까지 가능(머신러닝, 클라우드, 빅데이터)

. ‘킬 스위치(kill switch)’ 와 전자인간 지위부여 : 2017년 EU에서는 지능형 자율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위험한 상황에 사용, ‘전자 인간’의 지위를 부여 하는 결의안을 통과

. 2021년 4월에 일론 머스크의 원숭이 실험 : 신체 마비 장애인이 뇌파만으로 핸드폰을 사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후에는 하반신 마비 환자들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

. 양자 컴퓨터는 슈퍼컴퓨터가 1만년이 걸리는 것을 200초 안에 해낼 수 있다. 양자 컴퓨터와 일론 머스크의 센서 칩이 연결되면 앞으로 공부도 없어지지 않을까 - 누가 수혜를 받는가?

. 인공지능에 의한 4차 산업혁명 : 코딩보다 생각하는 법(“컴퓨팅 사고력”)을 배워야 하는 시대 일자리에 많은 변화 - 로봇이 모든 일을 다한다. 기본생활비 지급?

 

4. 트랜스휴머니즘과 이념

. 목표 :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로부터 해방하고 인간 웰빙의 실현

. 과학기술 통한 인간 이성이 가능하게 할 것임 ∴ 인간이 인류 진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 계몽주의 휴머니즘과 유사한 인간에 대한 낙관적 신념을 가진 트랜스휴머니즘

 

(1) 인간 본성의 불완전성

. 인간 본성이 진화과정 중에 있으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재구성 할 수 있다.

. 인간의 능력과 욕망을 계속 증대시키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

 

(2)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

.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해방하고 자율성을 증진해 줄 것이다.

. 휴머니즘이 미신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한 것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이 생물학적 사슬로부터 자유케 하리라 – 신체와 정신의 한계로부터 자유케함

 

(3) 개인의 자율성 고취

. 이성에 대한 신뢰

. 기술의 적용에 대한 의사결정이 개인에 의해 이루어 져야 한다.

. 기술로 지능이 향상되면 더욱 옳고 좋은 선택이 가능해 진다. (p399)

∴ 개인의 자유 보장되면 문명의 진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5. 트랜스휴머니즘과 신학적 인간론 : 대화를 위한 신학적 평가와 제안

5.1 신학과 동일 입장

(1) 인간은 미완성이므로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 기술 발전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로 이해될 수 있다.

. 인간은 공동 창조자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도록 지음 받았다.

 

(2) 웰빙을 추구한다.

. 예수님의 사역도 질병치유와 죽음 극복의 방향성이 있었다.

 

5.2 신학적 인간론에서 보는 문제점

(1) 탈체현화 경향성 : 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정신의 우위 상정

. 레이 커츠와일(Ray Kurzweil) , 한스 모라백 : 패턴 존속 (신경, 생물학)

→ 신학적 인간론 : 심신상관적 존재 (통전적&인격적, 신체적&정신적), 탈체현화를 통해 지적능력을 강화 할 수 있겠으나 인간의 개별성, 독특성, 타자성을 쇠약하게 됨 (2개 자아?)

 

(2)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

a. 불멸성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가 포함됨 : “계시 없는 종교”(1927년, 헉슬리)

b. 발전에 대한 믿음과 낙관적 입장 : 성과 or 파괴 (인간의 이기심)

→ 신학적 인간론 (틸리히 : 실존 – 인간의 유한성)

. 인간의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겠지만 불멸 실현은 불가능?(자살, 전쟁 등)

. 물리적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유한(모호) : 인류가 힘을 가질수록 자기파괴성 증가

 

(3) 개인주의적 경향성

. 기술 발전과 적용의 문제를 개인 양심과 자유 시장 경제에 맡기자

→ 신학, 철학적 입장 : 사회, 경제적 불평등 심화 예측

→ 신학적 인간론 :

a. 이상적 인간의 모습 :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인간의 목표이자 방향 (타자를 위한 자기 증여와 자기 희생) → 케노시스적 삶

b. 공동체적인 인간 : 관계 안에서의 증여, 타자를 받아들임, 유한성 깨닫고 공존하기

 

∴ 신학적 인간론의 제언을 참고하여

(1) 기술발전으로 초래할 다양한 문제점을 줄이고

(2) 공적 차원에서 기술발전과 적용에 공감대 형성해야 한다.

(기술 개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생태계와 인간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

 

6. 논의 사항

(1) 기술진들이 모두 트랜스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과학에, 일상에 철학이 필요하다.

 

(2)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 향상인가...

. 유전체분석, 암 유발 변이 유전자 찾음(스티브 잡스, 브로드 연구소): 10만달러 → 100달러

→ 돌연변이 조작 → 초인류 만들기

. 혈압치료제 비아그라, 성형수술은 1차 세계대전 부상자 얼굴 치료

14장_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

사랑과 배려와 환대의 관계

다양한 인간학 연구 중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를 ‘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한다. 신학적 인간학은 신과의 관계 안에서 규명되며 인간 존재의 기원을 신에 두고,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의 위상을 갖지만,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며 죽음에 이르는 유한성의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특별한 위치가 있지만 또한 인간은 모두가 죄인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가 신학적 인간학의 공통 특징이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학은 전통적 신학적 인간 이해가 남성 중심적으로 위계질서를 정당화 하면서 여성을 비하, 차별, 억압, 공적 영역에서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해가 자연과 연관되어 자연을 착취하고 남용하거나 그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옹호해왔다고 비판한다.

 

하나님 형상인 인간을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가부장주의적인 신학적 인간론이 여성의 정체성을 남성의 아래 두었다. 가부장주의적 신학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등한 피조물로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이 관계에는 오직 사랑과 배려의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적 세계관 이후로 하나님과 세계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으로 관심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철학자들은 지식위에 신의 자리를 마련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와 의심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근본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라는 기본 명제를 발견하고, 인간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식론적 주체, 지식의 대상으로서 세계는 객체인 이원론으로 구분했다. 그 위에 칸트는 ‘초월적 이성’, 헤겔은 ‘절대 이성’으로 이성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영적인 남성과 육적인 여성으로 구분하면서, 근대이후는 물질적인 여성의 위상과 자연에 대한 인식은 더 격하되었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은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 인간의 ‘영적인 몸’ 혹은 ‘육화된 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상호 관계 맺을 수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죄의 원인은 ‘관계의 왜곡’(로즈마리 류터)이며 관계를 파괴하는 억압, 착취, 전쟁 등 파괴적 관계를 죄라고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여성과 남성으로, 곧 관계적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정체성은 관계성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페리코레시스’로 서로의 위격 안에서 인격체로 내주하시며 돌보는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신다. 사랑과 배려와 환대의 관계적 하나님과 같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동료 인간과 자연세계와 관계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초대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자연 세계 역시 하나님의 관계적 방식으로 배려하고 돌보아야 한다.

 

옳은 말씀만 하고 있지만, 이 관점을 남성 신학자(몰트만 ?)들이 말하지 않고 여성∙생태신학분야에서 크게 거론된다는 것이 신학에서 조차도(모든 학문이 마찬가지 겠지만..)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13장 위르겐 몰트만의 인간 이해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해를 중심으로]

이미 창조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인적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지만 인간의 두려움과 관계의 왜곡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비극으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중재자임을 말하는 것이고, 창1:28에 근거하여 피조물을 지배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도 강조한다.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인자(人子)는 인간을 인간적인 존재로 해방하므로 그의 나라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된다. 이것은 이 땅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된다.

 

교회는 예수의 인간성을 그의 수난에서 보고, 자신의 새로운 인간성을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받는다. 인자는 인간의 고통과 죄악과 심판을 친히 감당함으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에게 세계 지배를 넘겨주셨다. 세상에서 추방된 자들이 인자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아둘람 공동체가 생각났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은 창조시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으로부터 ‘그의 형상이 되도록’ 인간을 규정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결정 되었으며,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죄인이며,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형상이라고 정리한다. 인간은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속성이 아니라 인간 전체, 인류 공동체, 자연과 연결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얼굴에 집약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므로 ‘관상학적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는 생육의 축복을 위한 성적인 구별과 사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귐 속에서 체험되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이들은 예수의 뒤를 따름으로 메시아적 형태로 자란다. 칭의는 영화의 현재적 시작이고 영화는 칭의의 미래적 완성으로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있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하나님은 선택, 소명, 칭의, 영화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이면서 임무,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인간은 이과정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 되라는 인간의 종말론적 소명이 인간을 종말론적인 새 창조로 인도한다.(소명-칭의-성화-영화의 단계)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특정 본질이나 기능이 아닌 ‘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고 종말론적 특징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창조되었다.(선물이면서 과제) 그러므로 이 땅 위에 현현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본다.

 

특이하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인식되는 부분을 얼굴이라고 했고(347),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를 성적차이와 사귐(347, 348)으로 본 것이, 관계로 해석한 것과 비슷하지만 느낌상으로 크게 다르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형상을 되어져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므로 부분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는 듯 하다. 짧은 지면에 깊은 이론들을 소개하시느라 고생하신 저자들의 노고가 귀하고 감사하다.

[인간론_11장 판넨베르크의 인간에 대한 이해]

역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초월로 향하는 죄인

판넨베르크의 가장 큰 공헌은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 안에서 인간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신학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신학이 타학문에서도 보편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학을 ‘기초-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하여 타학문의 방법론과 인간에 관한 연구결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역사-신학적으로 개념화(298) 하여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하며,(296-297) 부활을 통해 예수안에서 인간의 운명이 실현되었다.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 부활에 대한 소망 안에서 살수 있으며, 고유한 인격성에 도달하는 것은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참여로 가능하다.(305)

 

쉘러, 플레스너,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의 인간 본성에 관한 개념을 수용하여, 인간을 ‘세계 개방적 존재’로 규정하고 세계 개방성의 근거를 신(Gott)로부터 찾는다. 그러므로 세계 개방성은 핵심은 ‘신 개방성’이고 세계 개방성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형성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인간 운명 및 본성의 완성이다.(294) 인간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과 연결된다.

 

쉘러의 세계 개방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헤르더의 인간 이해인 철학적 인간학을 토대로 신학적 인간학을 설립했다. 헤르더는 미숙함에서 형성의 과정을 통과하는 성장하는 인간인데 이것을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한다.(296-297) 동시에 인간은 ‘죄인’이다. 판넨베르크는 죄를 욕망(죄의 형식, 결과)과 동일시 한다. 세계 개방성과 자기 중심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이지만 이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극복된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두려는 욕망에 끌릴 때 죄의 힘이 인간을 지배한다. 죄와 죽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므로 죽음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이다.(295) 인간의 운명의 완성은 미래의 희망을 통해서 가능하다. 희망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며,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므로 희망이 가능하다. 이것은 예수의 순종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구원의 미래와 연결된다.(307)

 

하나하나 보면 떨어져 있는 개념 같은데 결국 세계 개방성-신개방성-죄인-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자기 중심-그리스도에게 자기를 내어드림-성령의 활동-구원(희망)이 쭈욱 연결되는 그림이 그려졌다. 디테일 부분에서는 군데군데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지만 아마도 짧은 지면에 표현하느라 거론되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의 인간이해는 기독교 영성의 개념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어서 반가웠다. 기독교 영성(이전의 ‘영성신학‘)의 문자적 정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영성 훈련에 참여할 때 얻는 경험과 그에 대한 개인, 공동체적 반응”이다. “4. 인간과 역사”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간의 선취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부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스스로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훈련하므로 경험하게 되는 기독교 영성과 동일한 언어로 표현되는 부분이 반가웠다. 조금더 연구해보고 싶었으나, 2002년 한국방문 공개 강연회 자료를 나중에 읽어보는 것으로 반가움을 달래야 할 듯 하다.

[10장 폴 틸리히의 인간론 연구]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폴 틸리히는 인간 이해를 가장 심층적으로 탐구한 신학자 이며, 실존적 물음과 계시적 대답을 연관 짓는 상관관계 방법론과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집중한 문화의 신학, 경계선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론에서 물음은 ‘실존적 소외’이고 대답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은 신학적 대답인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본질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이며 실존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다.(257) 그래서 실존은 소외의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전이’한 것으로 해석한다.(258)

 

‘창조와 타락은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실존이 현실화 될 때 본질로부터 분리 되기 때문이다.(260) 타락의 결과로 실존적 소외상태가 되고 이는 불신앙, 교만, 욕망으로 묘사된다.(261) 죄(소외)의 결과 자기-파괴구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악‘이며 이것으로 자아와 세계의 상실이 발생한다.(262)

 

인간의 유한성은 실존적 소외 속에서 자기-파괴로 변형된다. 유한성은 비존재(죽음)을 악의 화신으로 만든다. 소외의 결과로 고난, 고독, 의심, 무의미가 발생한다. 고독한 존재는 자기파괴나 타자파괴로 발전한다.(264) 여기서 ’구원‘은 소외와 죽음의 극복으로 본질과의 재연합이며, 화해이며, 소외를 극복하는 존재의 치유로 해석한다.(276) 바로 그 화해를 위한 새로운 존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결과인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다.(265-267) 그리스도는 치유와 구원의 궁극적 기준이다.(277) 또한 그리스도의 존재가 사역이고 그 사역이 그의 존재(새로운 존재)가 된다.(278)

 

새로운 존재란 실존 속에 있는 본질적 존재이며, 본질과 실존사이 분열을 극복한 존재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함으로 성령에 의해 단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수 있다.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에 대한 종속’으로 상징이 사건과 결합하여 상징화된 것이고, 부활은 ‘실존적 소외에 대한 승리’로 부활의 경험에서 사건과 결합하며 사건화된 것이다.

 

속죄는 객관적 요소(신적행위)와 주관적 요소(인간적행위)가 모두 필수적인데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으로 주-객 통일적 사건이며 중생(참여), 칭의(받아들임), 성화(변화) 모두 그렇다.(279)

 

문화의 신학과 경계선 신학으로 틸리히를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10장을 발표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 장을 읽으며 인간론에 대해서는 틸리히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게다가 이렇게 내용이 어려울 줄이야.. 개념 설명에는 이해 못하겠다고 썻다가 개념에 따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는 것 같았다가 두 번째 읽으면서 정리할 때는 또 모르는 것 같았다가 글로 다시 정리하면서는 안다고 착각했다가...

 

틸리히의 깊이있는 정리에 기존에 틸리히에게 느꼈던 매력보다 더 크게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틸리히와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해서 소논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틸리히를 좀 미리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틸리히의 이론이 너무 깊다. 지금 읽은 교재중에 틸리히(10장)에서 가장 많이 줄을 쳤다. 과연 틸리히에서 내가 인간론의 주제를 찾고 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상담학에서도 폴 틸리히 연구가 국내에 논문으로 몇 개 있긴 했다.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도 2003년에 있었는데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잘 모르는데 논문 주제를 잡을 수 있을지.. 공부는 할수록 어려워지고 작아진다...

[9장 에밀 브루너의 인간이해]

 

궁극적 빛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에밀 브루너를 읽으며 만남(관계), 모순, 책임, 위로부터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떠오른다.

 

들어가는 말에서 최신기술들을 거론하면서 시작하시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복잡한 인간에 대해 ‘인간론’이라고 대 놓고 책을 쓴 신학자는 (교과서에서 제공한 정보들을 근거로 볼 때) 에밀 브루너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연과학, 철학, 신학적 관점을 종합(231)하면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더 분석하기 힘들어진 시점에 ⌜모순속의 인간(그리스도교 인간론)⌟은 말씀중심의 신학, 책임적 존재로서 인간, 기원과 종말을 포함하는 신학의 관점으로 저술되었고, 9장에서는 종말에 비추어본 책임적 존재의 주제를 다루었다.

 

부버의 ‘나’와 ‘너’의 ‘만남’ 기반으로 한 ‘만남으로서의 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되려는 모습과 실제 모습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분리되어 있어 관계적 존재이지만 모순 속에 있다. 관계적 존재의 인간에 기반해서 ‘위로부터’ 규정되는 존재이다. 타락이후에도 인간에게 은총과 소통의 가능성이 남아있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답하는 존재로서 관계적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235)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고 단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원의를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234)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며 그들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다.(238) 더불어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양심’을 고려했던 본인도 이 부분에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브루너의 요약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관계’, ‘공동체’, ‘계시 중심’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말의 빛에 서있는 존재’에서, 칼 바르트의 영원과 죽음을 설명한 부분이 떠올랐고, 관계의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존재로 설명한 부분도 비슷했다. 하나님의 형상(235)이 관계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240)이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마음과 영에서 영을 인격으로 보고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개인으로 살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실존을 말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물론 앞의 많은 신학자들이 따로 많이 언급했겠지만), 에밀 브루너에게서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제도 아닌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몇 주동안 만났던 신학자들과의 만남이 계속 올라와서 자꾸 정리하고 싶어서 시간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호모데우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에밀 브루너 같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질문]

.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이미 (위로부터) 질문이 주어진 존재로서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중예정설은 부인한다고 했는데 예정설과 맥이 통하는 곳일 까?

. (223) 브루너 신학의 핵심구조중 하나인 ‘성서적 인격주의’는 계시를 “나와 하나님(당신)의 만남이라는 개념” 혹은 “인격적인 하나님(it 이 아닌)“으로 해석해도 될까?

. 마음, 영(인격, 240), 지성.. 등은 강조하는데 몸에 대한 언급은 ‘일시적이며 인간의 죄 된 실존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과학과 연결시키는 부분 밖에 없던 것 같다.(243-244)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8장_칼 바르트의 관계론적 인간론 (2/2)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인간

.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의 이중적 틀

(1) 하나님을 위한 인간 : 하나님의 뜻을 역사에 펼친 구원자

  . “인간이 됨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뜻함” → 하나님 없는 인간 ‘존재론적 불가능성’억지?

  .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받은 인간, 부름 받은 책임 있는 존재

 

(2) 다른 인간을 위한 인간 : 철저히 타자를 향하고, 타자와 함께하며, 타자를 섬긴 인간

   . 자아가 전적으로 타자와 관계 속에서 온 것임

   . 예수께서는 낯선 인간 존재에게 자신을 개방하시고 인류가 자신을 규정하게 하심

   ∴ 타인의 ‘동료 인간’으로 존재 : 동반자, 동지, 친구, 동료, 도우미로서의 관계 (인간성)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관계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관계적 존재임

∴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 타자와의 만남, 개방성으로 형성

 

[토론] 이미 이론이 정립되어 있겠지만, 기독교 상담학에서는 칼 바르트의 ‘관계적 인간론(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학문적으로 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ex) 자녀의 인격 형성

 

. 만남속의 존재’ : 상호교환으로 사람간의 관계가 풍성해진다. → 현실에서는 왜곡

(1) 눈으로 응시하고 (2) 말을 건네고 (3) 도움을 주고 받고 (4) 기쁨으로 함께 함

 

[토론] ‘나와 너의 만남이 파괴될 때 삶에 비인간화 발생’(p.204)는 상담에서 많이 발생되는 문제일 듯

 

. 인간성의 근원적 형태 : 남자와 여자의 만남 (결정적, 필연적, 창조부터 관계)

(1)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은 구체적, 실제적 타자로서 다양한 만남에서도 적용된다.

(2) (창2) 남자는 ‘여자를 향해’존재하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오는’존재로 설명

→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차이 속에서 서로에게 개방되고, 필요하므로 관계적 존재가 됨

(자기 부인이 필요하지만 ‘나’혼자서 있을 수 없는 ‘너’로 인한 기쁨 수반되는 성숙의 과정)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 성서는 인간을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제시

. 예수님 인간의 차이점

   . 성령과 고유한 관계를 맺으시므로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의 참모습을 현실화 함

   . 육신을 취하셨지만 몸이 성령 안에서 변화하여 영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심

      ∴ 인간이 그리스도처럼 변화해 가는 것을 지향하는 역동적 인간이해

 

[질문] (p.207 가운데) “몸은 성령안에서 변화하여 아무 죄를 행하지 않을 정도로 영혼과 완벽한 조화”.. 칼 바르트도 몸과 혼의 통일체로 말했지만 육체를 죄에 가까운, 영혼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본 것일까?

 

→ 기독론으로부터 인간 본질의 기본 구조 정리 : 영혼과 육체, 성령

(1) 영혼과 몸 존재 (육체적) : 세계내 존재

   . 영육 : 통일성 속의 역동성

(2) 성령과의 관계(생명 주시는 관계) : 하나님께 개방된 존재

 

바르트의 인간론은 그리스도론적이지만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

.성령 : ‘선물’로서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의 원리

(1) 하나님의 생명을 인류에게 전하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

(2) 인간 몸과 영혼의 통일성의 기반 : 둘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붙잡으심

   - ‘특정한 몸의 영혼’, ‘영혼이 깃든 몸’ → 영혼과 몸의 연관성과 구분을 드러내심

   - 영혼(의식에 가까움) : 행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 몸 : 오감으로 감각 받아들이고, 세계 안에서 주체가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데 참여 → 현대 철학과 심리학과 같은 맥락

 

. 지각이론 (‘지각의 신학적 중요성)

: 신체를 가진 인간이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신체가 감지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영적으로 뿐 아니라 몸으로도 하나님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또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신체적 능력에 호소 하신다고 할수 있다.

. 지각의 존재로서 인간 :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고유성), 세계 안의 존재(타자와의 관계)

주체의 형성 : (판단, 활동의 근원이 아니고) 세계안의 복잡 한 관계 망에서 서로를 지각하는 상호 작용으로 형성

 

∴ 세계 안의 존재이자 지각의 존재로 인간은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뤄지는 관계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HERE&NOW :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영광의 무대

 

. 신학적 미학 : 하나님을 안다는 것(지식)은 아름다운 세계를 지각함으로 체험하는 ‘미학적’요소 수반 (지각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인지)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 인간의 유한한 삶(시간)과 그 너머의 ‘영원’ : 영원은 과학에서 해석 할 수 없으므로 근대에는 시간이나 역사에 초점을 맞춤

. 바르트의 과제 : (1)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 (2) 영원의 의미

 

.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 :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현실화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자신을 이루어 감(시간에 의미 부여) ∵ ‘시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 시간 :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 아니라 제한되어 있음. → 시간의 끝 : 죽음 (심판)

  A. 창조와 함께 등장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 경계

  B.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반영하는 배경

. 죽음 :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삶이 시작부터 끝까지 죄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

. 죄 : 하나님이 설정하신 경계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죽음-심판의 표지)

죽음, 심판, 구원의 관계 :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심판자로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의 성격이 신적 은혜로 변환되었다.

예수님이 루이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 받으심으로 죽음을 우리 뒤에 두셨고, 부활 하심으로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해칠수 없도록 한계가 정해졌다.

  ∴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주를 두려워하므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음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마음이 안식을 찾게 되는 이유)

  “우리 죽음은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우리 죽음의 한계이다.”

. 죽음(바르트) :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 피조물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으로 은혜가 됨

. 부활 : 40일 동안 ‘인간의 시간’에 속하면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시간’을 가지심

. 하나님의 영원 : ‘하나님의 고유한 시간성

  -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시간을 하나님이 감싸 안으심 : 시간론적 의미의 칭의

 

. 종말론적 시간 이해를 인간론과 결합 →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현존재를 제안

cf) (하이데거)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실존구조 분석 (불안의 정서)

     (바르트) 죽음과 부활을 포괄하는 인간론적 구조 (희망과 기쁨의 정서)

∴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라 ‘부활을 향한 존재’ 이므로

   시간은 HERE & NOW 영원에 참여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삶의 배경

 

 

7. 나가는 말

. ‘절대적 인간’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신화화

. 피조물로서 인간 이해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부터 신학적 인간론 구성

. 관계 유비: 자아&타자, 영혼&몸 사이 유기적 관계, 시간적 존재로서 영원과의 조화 관계

 

. 바르트 인간론 비판에 대한 답변

(1) 바르트는 남녀의 창조를 동료 인간성의 관계로 보았으나, 남녀의 결혼으로 이해되면서 남녀사이 위계상정한 것으로 오해됨 : 예수께서 여성을 포함한 여러 타자를 환대 한 복음서를 언급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로 풀어내서 생긴 오해

  → 우월이거나 권력 행사 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음

(2)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교회, 남자와 여자의 유비 : 영혼과 몸의 ‘상하 위계’ 정당화로 보임

  →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과 몸의 수행의 필요성을 함께 강조하는 포괄적인 신학의 틀

  (수련에 몰두하므로 육체를 등한히 함 vs 몸 자체를 우상화 함)

  ∴ 몸을 영혼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성령과의 교제 안에서 조화롭게 되도록 함

(3) 구체적 현실적 인간 이해 추구를 위해 참 말씀이자 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서술의 출발점/기준점으로 삼는 그리스도론 중심적 입장이 학제간 대화를 막고 신학의 우월성을 전제한 것은 아닌가

  → 예수는 구체적 역사적 인간인 동시에 인류를 포함한 창조의 기원이다. ‘구체성’이 예수로 채워질 때 그 구체성은 포용과 개방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된다.

  ∴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것은 타 인간론과 구분 되면서도 더 나은 인간 이해를 찾아간다.

 

[정리]

. “관계적 인간” 이면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동반자가 되기로 하신 은혜의 신적 결정이 있다.

  (1) 절대 타자 하나님 : 자비로운 아버지의 관계

  (2) 인간 타자 : 동료 인간으로서 관계 (두려움과 경쟁의 대상이 아님)

  (3) 시간의 한계 : 하나님의 영원과 만남

 

→ 바르트의 인간상 :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여유와 배려, ‘유머를 가지고 더불어 사는 존재로 빚어지는 것

8장_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인간됨의 신비 : 칼 바르트의 관계론적 인간론 (1/2)

자유주의 신학 : 이성(과학, 윤리학)으로 기독교 해석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신학

. 18C 계몽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바탕의 신학

. 정통 신학(only 성경, 전승)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짐

. 슐라이어마허(1768-1834, 독일)에 의해 시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보편 해석학)

. 식민주의, 산업화, 세계대전으로 의문시 됨 (인간의 야만성)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루너, 폴 틸리히, 니버 형제 (라인홀드 니버 1892-1971)

. 하나님의 계시 강조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년 스위스 바젤 출생 (1968년 82세, 바젤 사망)

.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 스위스 자펜빌 교구 목사

. 1914년 독일의 스승들이 전쟁에 찬성하면서 자유주의와 결별

. 1918년(1922년) ⌜로마서 주석(2판)⌟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

. 독일 대학에서 교직 중 나치로 인해 1935년 스위스 바젤 대학 신학교수

. 1962년 은퇴

. ⌜교회 교의학⌟(1921-1959), ⌜복음주의 신학 입문⌟(1962)

. 말씀의 신학자, 계시 중심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칼 바르트

 

■ 아돌프 슐라터(1852-1938) 독일 개신교 내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독일 신학자 니체로부터도 배웠으나 그것이 학문적 엄밀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동시에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옹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적 성품을 지닌 교수(불트만, 하르낙과 동시대)로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해 보여준 통찰과 본보기를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가 따랐다.(개혁신학 용어 사전, p72)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1. 들어가는 말

. 칼 바르트 : 20세기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 (대표적 업적)

  .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

   .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 그리스도 중심적 교의학 전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강조 ∴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시했다는 평가

→ ⌜교회교의학⌟Ⅲ/2 인간론 할애 했으나 인간독립적 주제로 나타나지는 않음

. 인간 : (1) 불완전한 피조물 (2) 자기 기만적인 죄인

   ∴ ‘인간이란 무엇인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인간을 알수 있음.

 

(1)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된 인간 :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2)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개방된 관계적 구조 가진 존재 :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3) 통일체(영혼+몸)로 창조 세계에 참여 :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4) 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 :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2. 근대의 ‘절대적 인간’비판

. 18세기 절대적 인간 : 이성, 합리, 계몽주의 시대 과학 혁명, 기술발전, 자연정복 등

. 절대주의 시대 :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18세기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이면에 ‘절대주의’)

. 절대주의 : “인간 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 위에 기초한 삶의 시스템... ”(p195)

. 절대주의 인간 : “잠재력..절대적이라고 스스로 간주한다.... 절대적 인간은 18세기의 인간이다.”(p195)

. 절대주의의 영향력 : 인간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학문, 정치, 문화, 신학에도 ‘인간화’의 흔적 남김

. 인간화 : “하나님을 제거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절대 권력을 가진 인간의 자기의식 영역에 포함하고... 실재를 내적으로 경험되고 이해되는 실재로 변환”

. 개인주의화 : “인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의미...하나님 밖의 모든 것에 행사하는 감춰진 권위를 받았음을 의미.. ” (p196)

. 인간화의 영향 (유럽) : 문화 개신교주의(서유럽 자유주의 신학) 등장 배경

   . 교파의 민족주의화

   . 교회의 부르주아화

   . 신앙의 사사(私事) (개인주의화에 상응하는)

   . 학문으로서 신학의 정체성 변화

신학적 인간론의 변화

   .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언어와 논리로 인간 본성 이해 하려 함

   . 진리 판단 기준이 ‘인간 경험’에 권위 부여하는 인간론적 패러다임

⇒ 세계대전, 식민주의, 사업화 등 비인간적 광기로 절대주의의 붕괴

⇒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등장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 절대적 인간 VS 피조물 인간 → 바르트의 독특성 : 인간론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

(1) 피조물 인간의 본성

(2)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3) 인간이 창조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 질문하고, 현대의 인간학적 도전을 함께 대화 할 수 있는 개방적 신학적 틀 제안

. 바르트의 다른 철학의 인간론 분석 (p198)

  특징/중요점 한계
자연주의 피조물 중 하나 다른 피조물 사이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함
관념론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 하나님의 존재를 잘 성명하지 못함
실존주의 초월의 존재 자기 폐쇄적인 자아상을 만듦
유신론 타자와의 만남의 존재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실패

∴ 추론이나 관찰로 꿰뚫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말씀으로만 알려 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계시됩니다. 그분 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 성서 : 하나님의 피조물

.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께 묶여 있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먼저 묶으심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론의 기초로 삼음

   (1) 인간에 대한 현실적, 포괄적, 참된 이해 가능

   (2) 철학은 각자의 방법론으로 특정 부분을 설명하지만, 계시에서 시작하지 않으므로 인간 본성까지 다룰 수 없음 (비판적 건설적 대화)

 

. 인간론의 시작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 (신적결정)

→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서

   (1) 참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신실한 파트너

   (2)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파트너

. 신적결정 :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응하도록 창조

. 관계의 유비(類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결정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신앙의 유비)하게 된다.

. 관계의 유비에서 나사렛 예수와 피조물 인간사이의 다층적 인간론 구조

   (1) 예수그리스도 : 하나님과 인간을 향함 – 영혼과 몸 – 시간의 주님으로 역사에 나타내심

   (2) 인간 : 타자를 향함 – 영혼과 몸의 통일체 – 시간적 존재

. 바르트 인간론 구성 4관계 : 하나님, 타자, 영육으로의 자신, 시간과의 관계

7장_슐라이어마허의 경건한 존재로서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정말 방대한 양의 내용들을 짧은 지면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신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또한 2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하느라고 고생했을 저자들에게도 고맙긴 한데 고민이 되는 문장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 의문이 남는 부분들이 많았다. 정말 인간론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를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은 『시크릿 Secret』 (론다 번, 2007)이었다. 요즘에는 비슷한 종류의 책이 더 많이, 더 자세히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우주’랑 관련된 책들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가브리엘 번스타인, 2018) 등으로 유튜브에도 많은 비슷한 맥락의 많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슐라이어마허를 기반으로 하는 걸까?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사실 『시크릿 Secret』을 한국에서 처음 보고 선교지로 들어갈 때 전도용으로 사용하려고 여러 권 사가지고 갔다. 그리고 학생들과 이 책으로 토론하면서 무신론 기반인 선교지에서 우주를 활용해서 유신론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했다.(선교지 같은 무신론 기반 세계는 우선 유신론으로 들어가야 예수님 설명이 된다.) 그러다가 한국 기독교 사이트에서 『시크릿』을 엄청 비판하는 글을 읽고 놀랐다. ‘이거 하나님 대신 우주라고 쓴 건데 왜 이걸 전도에 사용안하지?’ 나에겐 의문만 남았다. 당시 신학을 안했던 나는 목사님들이 쓰지 말라니깐 사용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더 이상 전도의 도구로 이 책을 쓸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와 토론할 기회나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7장을 읽으며 슐라이어마허 또한 ‘우주’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게 하려 했다는 부분을 읽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크릿』도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도 모두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사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한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구] 슐라이어마허에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찾았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부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속’인 예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왜 필요한지.. 슐라이어마허를 더 연구해 봐야 할것 같다.

 

[연구]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역사적 예수’란 해석학(?)에서 예수님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셨던 분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실존하셨던 예수를 강조하는 말로 본인은 해석했다.(p187 명제 9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목사님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로 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기독교 입장에서 부정적인?)였을까? 아직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단어의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쪽이었을까 갸우뚱 되었다.

 

[연구]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을까? 공격을 받았을 것 같긴 한데...

 

5장_칼뱅의 인간론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신학서적이나 철학 서적이나 읽다보면 무조건 수긍이 가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직 넓고 큰 시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논리의 빈약한 부분이나 이상한 부분을 못 찾아 내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지만 이러다 보면 견고하고 건강한 뿌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조직신학과 철학을 평생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칼뱅을 여러 관점에서 보면서 다양하게 평가하는데 저자는 그 모든 의견을 모아 칼뱅을 삼위일체 신학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칼뱅의 신론은 인간론이며, 인간론은 신론이다. 칼뱅의 이러한 인간론을 죄와 관계된 인간 이해로 인간의 상태를 무흠, 부패, 은혜, 영광의 4중 상태론에서 다룬다.

 

칼뱅은 인간의 영혼도 모든 창조물과 같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영혼으로 영적 세계에 참여하고, 육체로 감각 세계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4중 상태론중 무흠(순전한)의 상태란 타락하기 이전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불순종했고 다음 상태인 부패 상태의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다른 피조물, 순전한 상태의 자기 자신, 그리고 타자와의 4중 소외가 발생했다. 죄란 본성의 부패로 유전되며, 전인격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은 부패 상태이며 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인간은 자발적,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캘빈은 인간이 선천적,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정의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용하며 죄와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는 타락 이후 상실 됬지만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죄를 짓는 자유가 남아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그는 전적 부패를 주장하며 지상의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성령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고 고귀한 존재로, 긍정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중적 지식은 타락 전 무흠의 상태를 아는 것과 자신이 순전한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아는 두 가지 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 지식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인간의 악한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어 소멸되는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 또한 성령은 신자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돕는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어 처음 창조시기보다 더 좋은 상태가 된다. 여기가 은혜 상태이며 죄를 지을 수 없음에 참여함으로 선택할 수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광의 상태에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은 의지에 은총이 부여되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영적이며 부재로 현존하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찬에서도 영적임재설을 주장한다. 또한 신자의 개인 종말인 죽음과 보편 종말인 몸의 부활을 구별하여 죽음은 죄와의 결별이며,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중간상태에서 쉼을 누리며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칼뱅이 말하는 영광의 상태는 은혜의 완성된 상태로서 은혜에 사는 이들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므로, 미래의 소망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상태와 분리된 영광의 상태는 위험하다.

 

[토론] (p131, 아래서5줄) “은총 있을 때는 선을 없을 때는 악을 선택하는”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른 이론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예정론의 맥락일까? 이글에서만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악하게 내버려두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듯...

 

[4장 마틴루터의 인간론]

최고의 선물이면서 유한한 이성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루터는 개혁의 선두에서 인간론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가망 없고, 스스로 불안을 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펼친다.(‘신학적 인간론’)

 

1536년 『인간에 관하여』에서, 4-19는 철학적 논제이고 20-31은 신학적 논의로 구분되어 진행하면서, 로마서 3:28절의 ‘사람’을 그의 인간론의 기초로 삼는다.

 

(3. 이성의 동물) 먼저 스콜라 철학에서 처럼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 철학은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서만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정의에 루터는 ‘감추고 우상을 만들고 꾸며댈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4. 신학적 인간학) ‘인간론’의 시작은 스콜라주의와 같게 했으나 다른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에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에서는 은총의 효력이 남아 노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으며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 이다. 자기를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 아래서 가능하다. 인간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 루터의 신학적 인간론의 기반은 로마서 3:28절 이다.

 

(5.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에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이다. 관계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이성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은 이웃과의 관계까지 깨어진다. 루터에게 ‘죄’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뜨리는 본성“이다. 율법아래서 인간은 죄인이지만 복음으로 인해 의로운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점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도 거론된 부분이지만 이러한 믿음의 전환은 평생의 과정이며 방향이다.

 

(6. 종교적 존재) 칸트는 순수한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으며, 다윈 또한 진화론은 신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몰아냈다. 루터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신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구부러져 탐욕에 빠진 존재”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관계가 있다.

 

(7.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에게는 ‘칭의론’이 핵심이라 할 수 있으나 루터는 ‘칭의’를 “죄인을 자유케하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칭의론’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언제나 사랑이 뒤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웃 안에 산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종교 행위보다 내면의 양심과 신앙을 강조했으므로 자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칭의는 자유와 사랑의 조화로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루터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 같은데 미세한 차이점들을 공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토론] 칭의론과 ‘자유’

2장_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4년 동안 히포의 주교로 활동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에서 살았다.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인간에 대해서 본장에서는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니교, 아카데미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을 거치고,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등과 논쟁하며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2장에서는 『고백록』의 구조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기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는 인간의 틀로 인간 이해를 풀어간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에 의해 훼손 되고 은총으로 다시 형성 될 수 있지만, 상실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악은 선의 결핍(존재의 결핍)이며, 모든 존재는 다 선하므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여기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체로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서 발견 되고, 영혼이 생명의 주요 요소이며, 사유의 중심이라고 보면서 “육체를 다스리는 데 적합한 합리적 실체”로 정의한다. 처음에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회심 과정에서 점차 이원론을 버리게 된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영혼을 육체보다 탁월하게 보지만,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멸이 행복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정신을 깊게 탐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안의 정신에 속하는데,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삼위일체)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해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정욕과 습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치유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고백록』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을 향하도록’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심오한 분”(p61)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좋다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탐험이 출발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을 탐구하는데 정신이 신적 조명(은총)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게(p65) 되지만, 부활(불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직관에 도달하는 종말에 완벽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는 신학, 철학, 심리학적으로 큰 영향을 남겼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경향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와 종말론적 전망에서의 재해석도 필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더 깊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은혜와 인간 선택의 시작점이 항상 애매모호함으로 남는다. 실천적 신학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항상 질문으로 남는다.

 

1장_성서의 인간론으로서의 전인적 인간론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의의 해석이 아닌 전적으로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론을 해석하고자 한 애씀이 있다.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1장에서 말하는 성서에서의 전인적 인간론이란 육체와 영혼을 따로 다루는 이원론이 아닌 육체자체가 인간이고 영혼자체도 인간이라는 전제로 죽음과 부활을 재정의 한다.

 

구약에서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네페쉬, 빠사르, 루아흐, 레브와 신약에서의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의 단어의 뜻을 고찰하면서 신구약에서 표현된 이 단어들은 모두 제유법적 표현으로 결국 전인적 인간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전인적 인간론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전인적 인간론들은 죽음과 부활에서 다시 이원론적 인간론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전인적 인간론에서의 ‘죽음’은 영혼의 분리가 아닌, ‘전적 죽음 이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가 전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그리스적 죽음과 성서적 죽음의 차이를 설명했다. 죽음을 이렇게 전적 죽음으로 해석하면서 부활과 연결 될 수 있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하지만 신자들은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이는 심판받을 죄인인 옛 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이다.(골3:1-11) 전인적 인간론으로 심판 전후의 인간을 성서적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인적 인간론은 영과 혼의 분리가 아닌, 죽는 전인, 부활하는 전인, 영생하는 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신학에서는 그동안 플라톤에 영향을 받아 해석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성서에 기반을 둔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창3:15-16절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성서적 죽음)이라는 것 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인적 죽음, 전인적 부활과 연결된 다고는 생각 못하고 이 땅에서의 죽음 부분이 약간 애매모호하게 남아있었는데 그 부분에 여명이 비춰진 것 같긴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각에....) 논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부분들도 있고, 신구약에서의 단어 사용례에서는 히브리 사고를 좀 더 강조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으로 해석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려고 해도 이렇게 무언가 조각 조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 하는게 맞는 것 같다.

 

(p37) 중간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로핑크라는 학자의 연구에서 저자도 지적했지만 6-7번에서 갑자기 비약이 일어나는거 같다. 중간상태의 로핑크 이론 이후의 설명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 부분과 연결이 되어 이해 되었다.

  필립 쉘드레이크.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의 책 7장 내용의 정리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혹시 책 내용중에서, 제가 오해하거나 오독한 경우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장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2/2)

더보기

1. 영성에 대한 영향

2. 예언적-비판적 유형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3. 해방 영성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4. 페미니스트 영성

5. 화해의 영성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8. 동방 정교회 영성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운동,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10. 결론

필립 쉘드레이크.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 정병준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4. 페미니스트 영성 (1880년대 시작)

.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광범위하게 영향 끼친 해방주의 영성의 다른 형태

(1) 서유럽, 북아메리카의 투표, 재산, 대학 학위 획득위한 여성운동

(2) 유럽의 정치적 혼란 및 미국 민권운동에서 여성의 두드러진 역할

(3) 1970~80년대 학문 분야로 등장 →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 영성에 영향

. 대표 신학자 : (북아메리카) 샌드라 슈나이더스(영성에 민감한 성서연구), 조안 왈스키 콘, 로즈메리 류터, 엘리자베스 존슨(삼위 일체 신학에 대한 정교한 재해석), 캐서린 다크먼(『영신수련』의 여성들의 연구), 앤 카, 도로테 죌레, (독일) 엘리자베트 몰트만 웬델, (영국) 메리 그레이, 그레이스 잔첸(고전의 재해석, 기독교 신비주의 연구)

. 페미니스트 영성 근본 주장

   (1) 영적 실행에 대한 접근법이 성차에 의해 영향 받는다.

      . 성차 : 생물학적 성, 주어진 문화, 역사, 시대 안에서 구성되는 방법

   (2) 인간성과 가치가 훼손되는 근본적인 방식의 확인 : 전통적 영성의 중요한 요소들에 의해 제한됨

   (3)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이해, 제자직의 실행에 대한 대안적 방법 재구성

      . 재구성의 방법

         A. 경험의 타당성을 우선으로 신학의 기초를 확증 : 하나님을 경험 할 때 하나님 깨닫기 시작 → 여성의 경험과 방법의 구체적인 특징이 영적 지혜의 핵심 원천

         B. 성경과 전통의 빛으로 경험을 성찰

 

4.1 여성주의 영성 : 아프리카계 미국인

4.2 무제리스타 영성 : 라틴, 히스패닉 여성

   . 이사시-디아스 : 윤리학으로 신학 전공하여 대학교수(쿠바 난민), 가톨릭에서 여성 서품위한 운동에 관여, 진정한 영성은 구체적 관계와 정의 위한 투쟁에 몰두하는 능력에 의해서 측정

 

5. 화해의 영성 : 기독교 신앙의 중심, 영성의 중심

. 전쟁, 후기 식민주의, 인종 갈등, 사회 정의와 해방 등으로 화해가 중요주제

. 존 드 구루취(남아프리카 신학자) : 화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의 영감이며 초점’

. 화해의 수평적 차원 :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타자’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갈등의 극복 시도)

. 샬롬 : 영적, 물질적 조화와 웰빙의 상태 ∴ 부정의와 불화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위한 기독교 사역

(1) 마틴 루터 킹, 하워드 서먼(신비주의자, 급진적 사회적 행동의 영성을 발전시킴 : 기도와 고난이 기반)

(2)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예수회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 과학과 종교의 조화 노력

. 종교적 영역에서의 화해 이슈

(1) 20c 초 기독교 에큐메니즘

(2) 20c 세계화 과정에 태어난 종교간 대화 VS 폐쇄적인 기독교 영성의 영향력 증가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 기독교 에큐메니즘 : 기독교 세계화와 교회의 정체성과 영성의 중심에 공동 선교가 있음의 이해

(1) 1910년 에든버러 선교 대회

(2) 세계교회 협의회 설립 (1948) vs 유엔 설립

(3) 가톨릭교회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1960년대에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

. 로제 슈츠(개혁 교회 목사)의 떼제 공동체 (1940) : 기독교 에큐메니즘과 인간 화해의 영적 토대 가운데 상징적

   . 배경 : 프랑스와 독일 사이 유대인 난민 도우려는 소명으로 수도원 모델로 매일 기도하는 일과 시작

   . 1944년 화해의 선교에 헌신 : 범유럽 평화 → 종교, 사회, 세계적 전망

   . 초기에는 개신교에서 가톨릭 회원 들어온 이후로 광범위 기독교 출신의 100여명의 회원

   . 특징 『떼제 규칙』 (1953) : 관상과 사회적 참여의 연결 실습

      (1) 공동생활 안에서 화해의 가능성, 고통 증거 (각자 종교의 순전성 유지)

      (2) ‘잠정성’ : 신앙적 민감성으로 굳어진 태도와 고정 방식에 대해 이끄시는 하나님 방법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 하나의 큰 재단 대신 세계에 필요한 곳에 잠정적으로 작은 규모 공동체 이식

      (3) 적극적 참여와 관상적 삶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헌신, 사회 정의와 화해 위한 투쟁

      (4) 청년들을 위한 순례와 영적 탐험의 장소 (EX) 반복 찬미, 영적 안내 등으로 화해 분위기 조성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 종교간 대화 : 기독교&불교, 기독교&힌두교 → 토마스 머튼 : 수도원 생활은 종교간 만남과 영적 실천의 경험을 나누는 유익한 상황

   . 베네딕트회 데샤네 : 요가에 친숙, 명상중 신체의사용 회복에 기여

   . 베네딕트회 존 메인 :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고대 기독교 수도원 실행 하시 관계발견 (존 카시안)

   . 예수회 회원들이 일본 선의 권위자가 되어 선불교와의 대화에 참여

. 인도에서의 모델들

(1) (영국)베네딕트회 비드 그리피스 : 인도 영성 발전을 위한 대표적 기독교 집단

. 관상 공동체의 비전 → 서양의 합리주의에 맞서 직관적, 관상적 삶의 회복에 중점

. 이전 예수회 회원들이 설립한 아쉬람(암자, 샨티바남이라는 장소)에서 생을 마감

. 기독교와 힌두교 관계에 특별한 접근 방식 사용 : 양쪽 다 이해

   . 아드바이딕 : 보편적 조화와 통일성 강조하는 교리

   . 신성 안에 있는 궁극적 단일성에 대한 믿음과 삼위일체 교리 (불가해한 통일성이 구별 속에 균형)

   → 힌두교는 개인이 절대 정체성과 완전 하나가 된다고 보지만 기독교는 절대자의 깊음 안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관상적 과정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

(2) 샨티바남 : 힌두교 아쉬람에 영감 받아 생활양식과 예배를 인도식 모델에 적용한 기독교 공동체

   . 환경과 예배는 모두 인도식

   . 기독교, 힌두교 방문자들에게 모두 인기

 

8. 동방 정교회 영성

: 아토스산의 수도원 개혁과 러시아 영성의 중요인물들로 혁명 전후

. 아토스 산 : 그리스 마케도니아 산악 반도, 남성 수도원 정착지

   . 헤지카즘(정교회 관상 전통)이 발전 → 1917년 러시아 혁명 결과로 수도원 감소 → 쇠퇴 → 세계대전 후 서방내에서 정교회 영성에 대한 관심 증가, 1960년대 그리스어 『필로칼리아』 → 아토스로 초심자들의 유입

. 러시아 영성 : 정치, 사회적 영향

1) 성 요한 (1829-1909) : 혁명 이전 정교회 평신도에게 중요한 영향

   (1) 매일의 성체성사는 삶의 중심이므로 평신도가 성찬에 참여하도록 함

   (2) 자선이 참된 기독교 경건의 본질 : 소외 계층위한 사역으로 표현

   (3) 개인기도의 실천을 세밀하게 기획하여 해박한 영적 일기를 남김

2) 블라디미르 로스키 (1903-1958) : 평신도 신학자,

   . 러시아신학연구소(파리) 설립,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 신화(神化)를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고,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

   . 신비주의와 신학은 떨어질 수 없고, 기도와 전례는 신학의 토대, 신학은 신앙생활 발전에 관한 것

3) 마더 마리아 스코츠소바 (1891-1945) : 러시아 귀족 출신, 문학가, 수녀, 2차 세계 대전 순교

   . 러시아에서 파리로 망명, 이혼 후 수도원 서원

   . 지적, 종교적 토론의 중심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곳

   .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레지스탕스가 되어 유대인 도피 돕다가 1945년에 가스처형

. 20c후반 이후로 정교회의 세계화 : 유럽의 종교, 영적 주류의 일부가 될 듯

→ 전례와 신비신학의 중요성을 알려줌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 영성의 민주화 : 성직자나 수사들 같은 종교 권력과 영적 엘리트만의 영성이 아님

 

9.1 피정 운동

. 기원 : 예수님이 휴식과 기도 위해 제자들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신 신약의 기록

. 『영신수련』 이후 제도화된 피정 개념, 17C 피정의 집, 19C 중반부터 성공회에서 피정 시작, 20C 미국의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 → 사제들이 설교하는 다수를 위한 단체 피정

. 영적 안내 : 타인의 안내, 멘토, 동반자 역할을 하는 광범위한 영적 안내

   . 기원 : 초기 수도원 때부터 기원 → 중세 고해신부의 역할로 제도화 → 16C 트렌트에서 제도화

   . 비제도적 형태의 영적 안내 : 바론 폰 휘겔(가톨릭)과 에블린 언더힐(성공회) 같은 평신도

. 갱신 :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피정과 영적 안내의 민주화 (진정한 영적 안내는 하나님의 은사)

 

9.2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 기원 : 사도행전 성령 감동에서 셰이커 까지 발전

. 오순절 교회 : 1906년 LA 아주사 거리 윌리엄 시모어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부터 시작

  . 핵심요소 : 성령세례(방언), 예언의 은사 및 해석

   .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성령님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심

   . 과도하게 형식적, 건조하고 지성적 신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령 충만의 경험이 정서적 형식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었다.

. 가톨릭에서의 은사 운동 : 대중적, 평신도적, 공동체적 영적 운동 (영적 민주주의)

 

10. 결론

. 20C 특징

1) 다양, 절충적, 에큐메니컬하고 근본적으로 다원적

2) 교인 수는 감소하지만 영적 지혜와 실행이 크게 요구됨

3) 서양에서는 세속화와 종교의 소멸에 관한 이론 유행

4) ‘후기 세속주의’, 영성의 뉴 에이지 시대 준비하기

  필립 쉘드레이크.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의 책 7장 내용의 정리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혹시 책 내용중에서, 제가 오해하거나 오독한 경우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장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더보기

1. 영성에 대한 영향

2. 예언적-비판적 유형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3. 해방 영성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4. 페미니스트 영성

5. 화해의 영성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8. 동방 정교회 영성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운동,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10. 결론

필립 쉘드레이크.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 정병준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서론]

. 20C는 다방면으로 변화의 시기로, 포스트모더니티 시대로 불림

. 모더니티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자신감) → 정돈된 세계관, 인간 발전에 대한 믿음, 낙관주의 출현

. 배경 : 계몽주의 시대, 산업 혁명의 진보로 강화된 세계관

. 위기 : 진화론, 마르크스의 도전, 심리학의 탄생, 세계대전, 전체주의,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 변화 : 유럽의 종말, 소련의 상승과 하락, 식민주의 종식, 유엔 유럽 연합 등 국제 기구 설립, 국제 여행, 통신 혁명

. 포스트 모더니티 : 단순한 낙관주의가 통하지 않는 문화, 고정된 사고와 행동 체계 붕괴, 다원적 이해,

 

1. 영성에 대한 영향

. 20C 상황의 변화는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끼침,

(1) 유럽에서의 제도적 종교 감소 ← 신뢰 상실의 결과

(2)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를 구분 짓던 경계 붕괴 :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종교간 대화로 확장

(3) 기독교는 진정한 세계적인 종교가 됨

. 20C의 다양성 안에서 기독교 영성의 분위기 드러내는 소수 인물과 운동 추려보기

 

2. 예언적-비판적 유형

* 주석 :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에서는 연대기별로,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수덕적-수도원적, 신비적, 능동적-실천적, 예언적-비판적 유형이다.

 

. 20C 영성의 특징 : 영성에 대한

    (1) 신비적 접근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SBNR)

    (2) 예언적-정치적 접근에 대한 추구가 두드러짐

[토론]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적 특징들을 종합한 것,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부름, 정적주의적 해석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사회적으로 비판적 영성을 옹호하여 종교나 국가 권력과 갈등이 있거나 주변부에 밀려난다.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2.1 샤를 드 푸코 (1858-1916, 프랑스-사막-알제리, 샤를 드 예수 수사)

. 1901년 이후 영성에 영향

. 귀족, 쾌락주의, 불명예 제대 후 모로코 탐험

. 영적 안내자 아베 위블랭에 의해 회심 후 (시토회) 영적 절박함으로 나사렛에서 은수사로, 클라라 수녀원의 정원사, 사제 서품 받은 후 사하라 사막 베니 수도원을 거쳐 알제리의 투아레그족과 함께 살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사전 만들고, 문화를 배우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삶, 묵상기도에 근거하여 홀로 관상적 삶을 살다 프랑스 식민 세력에 대항한 베두인에 의해 비극적 살해

. 새로운 수도 공동체 설립에 열망 있었으나 사후에 새로운 영적 운동에 대한 영감이 되어 사후 발전

  → (예수의 작은 형제회, 자매회) 세계대전 후, 4-5명씩 개발 도상국이나 가난한 지역에서 이웃과 함께 그들을 위해 사는 ‘관상적 환대의 현존’의 삶(공동기도와 침묵으로 시작과 끝, 생계 유지)

 

2.2 에블린 언더힐 (1875-1941, 영국, 성공회-가톨릭)

.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비주의 저자, 신비주의에 ‘대중적’이해 촉진 및 전달이 목표

. 영국 피정 운동 개척자, 국교회 첫 여성 유력자, 세계대전 사이에 성공회 영성 유지

. 사회주의에 대한 교감, 영성의 사회적, 윤리적 차원 주장, 헌신적 평화주의자

. 국교회에서 태어나 성공회 교인이 되고, 가톨릭 평신도 지성인 바론 폰 휘겔(신비주의 작가, 모더니스트, 신학과 영성을 현대와 대화하게 하려고 노력함 p266) 에게 영성지도 받음

. 긴밀한 영적 관계 : 서머셋 워드(성공회 영성 지도자), 존 채프먼(대수도원장)

. 『신비주의』(1911~1930년판), 『영성 생활과 현실 생활』 (1922, 삼위일체기반 신비주의 접근+심리학),『교회의 신비주의자』(1925), 『예배』 (1936, 공동, 전례적 예배, 에큐메니컬적 민감성)

. 특징 :

    (1) 세계 종교의 신비주의에 관심 갖지만 제도적 종교에서의 해석과 분리하지 않음

    (2) 기독교 신비주의를 탐구

    (3) 신비주의의 목적은 실천적임을 밝힘

 

2.3 디트리히 본회퍼 (1906-1945, 독일, 루터교, 나치의 정치적 순교자, 예언적-비판적 영성의 대표 예)

. 20세기 영성과 신학의 연결 대표인물

    . 가톨릭 : 칼라너,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 개신교 : 위르겐 몰트만, 판넨베르크,

    . 성공회 : 로완 윌리암스

. 『값비싼 제자직』 : 독일 교회가 루터의 기본 신학과 영적 통찰을 훼손한다고 독일 교회에 비판적,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자의 희생적 의무로부터 분리(정치 참여 없는 독일 기독교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 기도와 공동체의 훈련이 있는 삶 +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는 것

. 영국 미르필드(성공회 수도 공동체) 영향으로 핑켄발데에 수도 공동체 설립, 비공식 신학교 설립

. 『성도의 공동생활』 훈련 : 루터교회가 상실한 중요한 영적 도구의 회복 열정, 정기적 성경읽기 묵상

. “종교성 없는 기독교”, “미친 운전사가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운전사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 사는 삶

 

2.4 시몬 베유 (1909-1943, 프랑스 유대인, 기독교 경계선의 무세례자)

. 1938년 조지 허버트의 시 “사랑은 나에게 환대하라고 명령했다”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적 체험

. 1942년 도미 후 런던에서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영양실조로 사망

. 『뿌리내림』, 『신을 기다리며』(‘주의(attention) 영성’ : 주의력은 기도의 핵심, 고통 받는 이웃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능력의 핵심,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주의력) 경향, 구원은 기다림)

.‘자아

    . 자기 내어줌으로 온전해 지고 자율적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

    . 진실한 자아의 발견 : 삼위일체의 자기 포기 안에서 발견

    . 참된 자아의 창조 : 성령이 영혼 안에 떨어진 씨앗이 되면 그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 희생의 영성 발생 ∴ 그리스도 십자가 참여는 타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도록 부름 받은 것

. 프랑스의 동료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살다가 영양실조로 사망

. 기독교는 고통에 대처하는 초자연적 도구

 

2.5 도러시 데이 (1897-1980, 미국)

. 사회 정의의 영성을 촉진시키는데 가장 영향 끼친 인물

. 노동 운동가, 언론인, 임신 중에 가톨릭 개종하므로 대인관계 단절

. 급진적 정치는 소외를 드러내고,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 해결책을 제시함 (사욕 없는 사랑과 포괄적 공동체)

. 피터 모린(프랑스 철학자)의 영적 조언, 독서 지도 → ⌜가톨릭 노동자⌟ 운동 시작 (1933)

. 그리스도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도록 나타나야 하는 분으로 사회 정의가 핵심이 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영성

. 환대의 집 : 자발적 가난 수용한 회원(평신도)들, 성찬과 공동 기도가 생활 규칙 중심, 공식 교회 승인 없음 ← 베네딕트 『수도규칙』, 프란체스코의 자발적 가난, 리지유의 테레사의 “작은 길”

 

2.6 토마스 머튼 (1915-1968, 프랑스, 로마 가톨릭, 루이스 신부)

. 2차 세계 대전 중 아내와 자녀 사망 → 가톨릭 개종, 시토회(테라피스트) 입회 → 겟세마네 수도원

. 영성과 신학의 재통합, 현대인 위한 관상, 수도 생활, 기독교 신비 전통 명료한 소개, 문학적 재능있는 저자, 에큐메니컬 우정, 기독교와 불교간 대화에 공헌, 사회 정의와 세계평화 문제에 대한 헌신

. 『칠층산』(1948),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1966) 세계를 관찰하는 탐구자, 방랑자의 삶

. 자서전식 글쓰기, 거짓 자아로부터 진정한 자아로 가는 여정에 대한 몰두, 개인주의에 맞서 타자와 교제와 연대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삶의 양식 재해석 (1960년대초 두 번째 회심)

∴ 영적 삶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관상적 자각

    i) 철저한 독거의 삶으로 은수 생활

    ii) 예언자적 입장을 강화한 저작 : 민권운동지지, 냉전 비판, 베트남 전 반대 로비

    iii) 아시아 종교(불교)에 대한 관심

 

3. 해방 영성

. 사회 정의에 관심 갖는 영성 (20C에 발생)

. 로마 가톨릭에서 사회 교육 시작 : 1891년 레오 13세의 노동회칙, 1931년 비오 11세 회칙에서 강화 1960년대 초 요한 23세 ‘시대의 징조 읽기’, 1971년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모든 사역, 선교 및 영성의 핵심에 정의가 있다는 것을 확립 → 교회의 선교 중심에 사회 분석이 중요함을 지적

. 해방 신학과 영성의 특징 (1960년대 후반 라틴 아메리카 ~ 1970년대 발전)

    . 불의한 구조에 대한 비판과 극복하려는 투쟁에 근거한 성찰과 실천

    . 이러한 실천이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이며 사회 정의를 촉진시킨다

    . 특정 범주의 사람들의 존엄성 손상시키는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 경제적 빈곤, 인종 문제, 성 불평등, 지구 환경 책임 문제

    . 핵심 : 성경(새로운 출애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견되는 죽음에 대한 승리)

 

3.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1928- , 페루, 도미티칸, 노트르담 대학교(Notre Dame)교수, 해방신학)

. 라틴 아메리카 해방 영성의 지도적인 대표자, 『해방신학』 (1971),

. 가톨릭 대학교와 리마 교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신학적 성찰

. 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상을 사회 정의 촉진이라는 차원으로 적용 라틴 아메리카 메데인 주교회의

.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 영성, 신학, 사회적 실천의 연속성(가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경험)

(1) 엘리트주의와 과도한 내면성의 경향과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게 될 새로운 영성 탐구

(2) 모든 기독교 영성의 기초(제자직) 설명

(3) 해방영성의 특징 :

   ① 회심과 연대

   ② 호의와 효과가 있는 사랑

   ③ 기쁨(순교와 고통의 승리)

    ④ 영적 어린아이(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

    ⑤ 공동체

. 『욥기 :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 : 관상과 대면의 밀접한 연결

   . 신학과 사회 참여 연서에 있어서 기도와 관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

    . 욥의 친구들 : 자신들의 생각에 근거해 추상적 원칙

    . 욥

        . 하나님과 대면하여 답변 추구 → 영적 추론으로 하나님께서 무상의 사랑으로 행하심 인지

        .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기 포기로 하나님의 넓고 깊은 은혜 안에 정의(正義) 둠

        ∴ 기도와 관상은 실천에서 분리되지 않는 실천의 내적 요소

★ 아래의 내용은  <영적 지도의 실제>  11장의

내용의 정리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혹시 책 내용중에서, 제가 오해하거나 오독한 경우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1장_영적 지도의 관리

영적 지도는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장하는 것을 도울 목적으로 영적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관계를 맺는 단순한 관계 같지만, 인간관계는 성장하거나 약해 질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의식 성찰을 통해 의도적으로 선택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원인을 인식하지 못 한 채 변화가 발생한다.

영적 지도자는 피지도자와의 관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관리이다. 영성지도에서 ‘관리’는 영신수련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검토나 조직적 발전이 없었다.

심리나 정신분석학 분야의 관리 이론과 실천을 적용하고 있다. 관리의 초점은 관리를 받는 사람에게 맞추어지고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성장에 맞추어 진다.

윌리엄 베리&코놀리. <영적 지도의 실제>.&nbsp; 김창재/김선숙 옮김. 분도출판사

1. 영적 지도에서의 관리

1) 목적 : (p218) 피지도자가 하나님 체험을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도와주는 능력 키워주기

  A.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B. 영적지도자가 더 효율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돕고

  C. B를 막는 저항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

     “영적지도자의 개인적 성장을 돕는 것” : 영적 지도자를 유능하게 되도록 도와주는 것

 

. 관리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경우

  (1) 특정한 피지도자로 인한 문제

  (2) 영적 지도를 잘하고 있다는 확인

  (3) 관리자의 영적 지도 방법 알기 위해

 

2) 방식 : 영적 지도 하는 방식과 유사 (체험과 믿음의 삶에 초점 맞춤)

   (1) 체험 : 영적 지도자의 영적 지도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2) 믿음의 삶 : 피지도자를 향한 영적 지도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믿음에 초점

 

3) 관계에서 중요한 것 : 신뢰

   .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모험 (결핍, 평가에 대한 두려움) : 성령, 자신, 관리자를 신뢰 해야 함

   (1) 관리자 : 영적 지도자에게 질문할 때 화를 내거나 지적할 가능성 있음

   (2) 영적 지도자 : 관리자에게 화를 내거나 방어적 태도, 장점과 한계까지 관리자에게 노출 → 하나님과 관리자와 깊이 있는 관계 맺어야 건강

 

4) 협력관계형성에 필요한 전제조건 : 동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성장 추구한다는데 동의)

. 예 : 영적지도자로서 개인적 성장과 자신에 대한 확신 가지는 것 → 6주 이후 안정권

   (관리자) 체험을 표현하도록 돕기, 영적 지도자의 저항 느낌

   (영적 지도자) 관리자의 조급함, 직선적 표현 → 내면의 두려움과 믿음의 부족 직면, 인정

 

2. 관리에서 발생 할 수 있는 문제

1) 저항과 전이 반응

   - 저항을 파악하여 대처하므로 도리어 도움이 된다.

   - 개방과 경이의 태도 : 심문하는 태도에 반대되고, 성장하려는 분위기 조성

   - 관상적 태도의 초대 : 영적 지도자의 동요, 감정 쉽게 감지 (i-message, p216-217)

2) 피지도자의 체험에 초점 맞추기 : 교훈적 면담, 영적지도자로서의 자각은 성장되지 않음

   - 영적 지도자의 내면(선악) 대면, 지도시에 갖게 되는 자신의 체험을 대면하는데 도움이 안됨

   ∴ 관리의 초점 : 영적 지도자의 지도 체험과 체험 표현 방법

   (영적 지도시에 영적 지도자가 어떻게 듣고 어떻게 반응 했는가)

   - “why” : 분별을 위한 질문 활용으로 자신을 예리하게 자각하도록 돕기

   (그런 반응했을까/질문했을까 등 영적 지도자의 체험 관찰 )

 

3. 관리의 방법

1) 훌륭한 관리자는 영적 지도자에게 도전, 격려, 사기를 북돋아 준다.

2) 영적 지도의 면담 보고서 작성 : 영적 지도자는 면담 이후 성찰하고, 진행 사항 기록, 관리 받을 것을 위해 피지도자와의 대화를 재구성(영적 지도 실제 과정 파악하는 최상의 방법)하여 보고서 중심으로 관리 진행

 

 

4. 관리의 결과 →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영적 지도자의 믿음을 더함

   . 예 :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옳은지 염려한다. (자아 몰두)

1) 관리를 통해 지도자가 성령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염려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체험을 자연스럽게 사용 가능해짐

2) 지도자가 피지도자의 얘기를 들을 때 자기 자신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 예 (p222)

   (1) 지도자가 슬픔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슬픈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함

   (2) 지도자 자신이 하나님을 불신한 것을 알게 됨

   (가치 없다고 느끼는 슬픔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다고 믿음)

   → 지도자가 편하게 슬픔과 두려움을 듣게 되면서 피지도자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됨

. 지도자는 무의식적으로 피지도자의 특정 체험 듣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관리를 통해 지도자의 장애를 알아내고 제거하도록 돕는다.

 

5. 관리의 또 다른 방식

1) 동료 그룹 관리 (peer group supervision)

   (1) 신뢰 형성의 문제 : 조력자와 함께 나누기

   (2) 비밀보장 : 신원 보호 등을 하고 발표를 가상화 해서 진행 할 수 있음.

   (3) 장점

      . 중요한 문제를 피하기 어려움 (누군가는 발견) ex) 친밀한 관계에 대한 질문은 ‘간섭’인가

      . 초점이 피지도자로 옮겨질 때 누군가 지적함

2) 사례발표 회의 (case conference) : 여러 번의 지도에 대한 개략 내용을 발표하여

   . 영적 지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 발표

   . 자신의 영적 지도 활동 평가

   . 피지도자에 대한 감정적 반응 파악

   . 참석자들은 영적 지도의 넓고 다양한 과정 배움

   . 사변신학과 실천신학 사이 결실 있는 상호 관계

 

 

(p217) 영적지도자 자신의 내면의 악(혹은 상처, 제한)에 대한 인지와 처리에 대한 경험, 사례

 

  메리 로즈 범퍼스.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의 책 5장 내용의 정리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혹시 책 내용중에서, 제가 오해하거나 오독한 경우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장 관계 안에 나타나는 인격의 다양한 차원들과 수퍼비전 실습 (2/2)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4. 감정

. 중세신비주의자 : 감정의 강조

. 계몽주의 : 이성을 최고로 평가 (느낌 불편)

. 20C 중반 : 생각을 중요시함

. 1960년대 이후 : 느낌 중시 → 감정과 감각 선호 (생각 의심)

한 가지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실수

 

1) 피지도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표현된 감정들

. 감정을 다루는데 익숙한 피지도자들은 과거 경험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감정들을 말해주고, 회기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관련된 감정들을 새로이 경험하기도 함

. 그러나 피지도자가 과거 감정을 말하는데 머물기를 원하고, 현재감정을 표현하는 위험을 피하려 할 때 ‘그 일에 대해 지금 무엇을 느끼시나요?’물어보므로 현재 순간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새로운 기회를 주도록 한다.

. 감정 또한 혼돈 야기 가능 : 너무 한쪽에 묶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함 (피지도자, 리에네우스)

→ 경험의 단면만을 진리의 유일한 길로 삼고, 하나님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의 위험함 (어떤 것을 우위에 두고 의식적인 선택을 할 때 그것에 압도당하고 갇힌다.)

. 한 없는 눈물을 흘리는 피지도자의 경우의 예에서 “생각에 매몰된 사람에게 감정에 눈뜨게 하고, 감정에 매몰된 사람에게 생각에 눈뜨게 하는 것이 중요”

 

2) 지도자들이 경험하는 감정들

. 감정은 내면 뿐 아니라 회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주의가 필요한 감정이 있을 경우, 감정은 회기 동안 다시 떠오르는데 피지도자의 이야기 안에서 연관성을 분별해야 한다. (ex) 할아버지와 강둑 걷는 소년 : 잠시 슬픔, 강한 슬픔, 계속 슬픔 (161)

 

3) 수퍼비전에서의 감정들

. 회기의 특정 순간 경험했던 감정들을 기억하는 것이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됨

   a. 아무 감정 없는 것도 검토 필요

   b. 회기동안 일어난 감정을 불신하는 지도자들의 경우 이유를 찾아보기

. 회기 중 경험한 감정 분별하기 위한 노력에는 열매가 있다. (혐오감의 예, 162)

   A. 지도자의 삶과 관련된 것인지

   B. 회기 중에 일어난 일과 관련된 것인지

   C. 피지도자와 나의 관계와 관련된 것인지

   D. 앞 3개의 조합인지

 

5. 생각들

. 영성지도에서 생각 사용법 : 피지도자가 ‘자기 생각에 갇혀’있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피지도자가 경험하는 생각들 (by 칼 라너) : 이미 경험했으나 말로 표현해 보지 못한 영역

. 피지도자는 자기 경험, 아는 지식을 아무 감정 없이 다 말할 수 있다.

. 자기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과정에 참여하면 하나님 경험이 찾아옴 : 피지도자들이 경험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로 풀어내려 애쓰고, 느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묘사하려 애쓸 때 신비와 발견의 세계에 들어간다. 영성지도에 놀라움과 경외의 순간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 임재 경험)

 

2) 영성지도자가 경험하는 생각들

. 지도자의 다른 소명에 따른 반응을 하고 싶어지는 유혹 (교사, 의사, 부모..) → 주의를 흩뜨리는 여러 생각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분주해질 때

   a. 모든 생각을 내쫓아 버리는 반응으로 피지도자에게 도움이 될 생각을 놓쳐버린다.

      . 지도자에게 올라오는 많은 생각 중 어떤 것이 피지도자와 하나님께 반응에 도움이 되는지 결정하는 것 : 지도자에게 필요한 분별 기술 (166)

   b. 해석을 하는 경우 : 지도자들은 의미하는 바에 대한 확고부동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단지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 말 것.

 

3) 슈퍼비전에서의 생각들

. 생각, 개념, 설명, 이론, 규칙, 해석, 교리 설명으로 가득찬 회기 : 지도자의 반응을 탐색하고 실제 대화를 할 수 있는 전략 학습 가능 → 대화중에 끼어들어 피지도자의 경험과 연관시키기

. 해석들로 가득찬 회기

   a.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지도자에게 물어볼 수 있음.

   b. 해석이 중요했는지 함께 분별해 보기

   c. 수퍼바이저와 지도자가 역할극 해보기

   d. 지도자들이 열린 해석을 내리는 기술 연습하도록 훈련하기

   e. 해석을 마음에 간직한 채 반응 제시하는 기술 연습하기

 

6.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경험들

. 감각, 감정, 생각에 자신을 개방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더 잘 의식하게 되며, 한 가지 이상의 차원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경험

. 이미지와 은유, ‘아하!’의 이해의 순간, 갈망을 휘젓는 일등이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문을 제공

 

1)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피지도자들의 경험들

. 피지도자들이 경험할 때 지도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 신체, 기분, 에너지의 변화, 한숨, 눈물, 침묵 등 (기질에 따라 다른 반응)

 

2)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영성지도자들의 경험들

. 영성지도자가 경험할 경우 나눌 것인지, 어떻게 나눌 것인지 분별 필요

   . 나눌 경우 에너지가 지도자로 옮겨지지 않도록 할 것

   . 피지도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주제로 넘어 갈 것

 

3) 수퍼비전에서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경험들

. 피지도자들을 침묵 속에 있게 하거나, 경험의 다양한 차원을 강조해 주거나, 경험을 마무리하고 원래 대화로 돌아가기

. 경험들을 고무하기 위한 기술들로 지도자들과 역할극 해보기

   (ex) 피지도자의 열망에 대해 묻는 것은 생각, 감정, 감각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것

   * 열망 : 하나님에 대한 피지도자의 갈망을 일깨우고, 피지도자가 상상력을 사용하도록 자극

 

7.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만나기

. 관계에 의해 유발되는 내 안의 반응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 경험에 도움이 된다.

.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낸다.

   (피지도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공적 기도 모임에서 경험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

∴ 모든 범주의 관계에 걸쳐 있는 모든 차원의 인간 경험 포괄하는 영성지도 모델은 지도자와 수퍼바이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 이런 경우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특정 경험 뿐 아니라

   + 그 경험이 해당하는 범주에 대한 부분에도 귀를 기울임

   ex) 산에서 하나님의 위로 경험한 것 → 결혼생활, 직장, 교회 관계에 영향

   ∵ 한 가지 관계에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다른 모든 관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

   + 어떤 차원의 경험에 해당하는지 숙고하고 생각, 느낌, 감각에 대해 되짚어 보도록 요청가능

   ∵ 생각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감정과 감각에서도 경험토록 이어질 수 있다.

. 지도자들은 피지도자들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경험의 차원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감정이나 감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패턴들을 피지도자와 나누면서 반응에 변화를 주도록 도울 수 있음

 

[결론]

영성지도와 수퍼비전에서,

1.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를 아우른다는 것을 전제

2. 지도자들의 몸, 감정, 감각들이 영성지도 시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들

→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로 주의를 기울이며 세상과 관계하는 기술을 연습하는 장이 될 것이다.

 

 

  메리 로즈 범퍼스.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의 책 5장 내용의 정리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혹시 책 내용중에서, 제가 오해하거나 오독한 경우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장 관계 안에 나타나는 인격의 다양한 차원들과 수퍼비전 실습 (1/2)

. 살아 가는 모든 순간은 기적이다. 호흡, 배변 등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전에는 기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의식할 때나 의식하지 못할 때나 우리 삶과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계시다”(144)

∴모든 것을 채우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경이와 은혜이다.

이렇듯 우리 몸의 생리학적 요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세상에 대한 경험들 역시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과 경험을 관상적으로 보기.

 

. 주제 : 세상과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 여러 방법을 탐색하고 이런 이해가

(1)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

. 모든 범주의 인간 관계에 있는 모든 차원의 경험 포괄하는 영성지도 모델

(2) 영성지도 수퍼비전 실습에 대한 이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

 

. 경험 : 생각, 감정, 감각 모두 하나님께서 의사소통하실 때 사용하시는 차원이다.(163)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1. 가정들

1)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한 핵심 가정

   .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나 자신, 우리, 세상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임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증거한다. 성육신은 악의 존재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에 계속 참석해야 할 필요성도 인정한다.

   . 인간이 그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일상과 세상 속에 현존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

   . 지적, 정서적, 신체적 반응을 더 의식하게 될수록 세상 속에 계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능력이 자라고, 하나님의 통치에 더 풍성히 참여하게 된다.

 

2) 수퍼비전에 관한 가정

   . 수퍼비전의 목적 : 영성지도자들을 도와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도록

   . 수퍼비전의 초점 : 각 회기는 영성지도자들의 특정 지도 회기에 대한 구체적 사실 다루기

   . 수퍼바이저들은 자신의 신체, 정신, 감정 등을 도구로 회기와 관련된 동력들과 조화 이름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이 회기와 관련된 동력들을 잘 인식하고, 지도자의 심리 상태와 경험들이 동력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 수퍼비전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회기에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 하기 위해 노력하게 돕는다.

   . 수퍼바이저들은 역할극, 예시 통해 배울수 있도록 기술들을 몸소 보이기도 한다.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과 함께 협의 질문들을 놓고 논의한다.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이 잘하고 있는 부분을 인식하고 기뻐할수 있도록 돕는다.

 

2. 인간 경험의 차원들 : 감각, 감정, 생각, 융합

“세상은 하나님의 장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

 

.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1) 우리 관계가 우리에게 도전하고 움직여 가는 곳

   (2)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곳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믿음의 렌즈로 세상을 볼 때,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세상에 참여할 때 거룩을 감지하고 반응할수 있다. → 타인과 동시에 자기의 인식(?) : 친구와 이야기, 산책, 그림 감상 등... 하나님 경험

 

“인간의 경험을 영적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타자들에게 현존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바로 이런 능력”(칼 라너)

 

. 공동체, 사람, 예술 작품, 자연과 관계중의 상호작용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호출

. 그 당시이든 회상의 시간이든 시선이 하나님께 이끌리고 있음을 감지할 때 자신을 더 풍성히 알게 되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자기 인식 능력이 자람)한다.

→ 임재를 의식적으로 더 경험하고, 풍성한 믿음을 향유하게 됨

. 수퍼비전 받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시선을 둠과 동시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경험을 파악할 수단(?)들 파악(중요한 질문들) : 몸, 감정, 정신 등에서 어떤 정보를 감지할 수 있는가? 혹은 피지도자들의 특징을 아는가? 그들의 몸, 정신, 감정에서 어떤 것을 감지하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가? (150)

→ 몸은 이러한 탐색의 과정을 통해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므로, 몸은 임재를 구하는 민감한 도구이다.

. 뇌 : 생각의 생성기, 감정의 자리, 신경계의 통제자 * 대장과 뇌의 관계 (최근 연구)

∴ 감정과 생각도 몸과 긴밀한 관계 : 뇌 영상법으로 감정, 생각, 감각의 위치 밝힘

 

3. 감각

. 몸 언어 : 피지도자의 표현과 말의 다름, 특정 피지도자를 대하는 지도자 자신의 자세

 

1) 피지도자가 말해주는 감각들

a. 감각을 인식하고 말하는 피지도자

   . 감지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격려

   . 현재 경험의 감지를 넘어 경험을 되돌아보게 됨 “몇번 이야기 한거 같아요” 등..

   → 임재 경험의 가능성 열기

b. 감각을 인식하지만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피지도자

c. 감각을 거의 인식 못하는 피지도자

   . 감각과 관련된 질문들로 감각을 대화의 주제로 삼을수 있을지 검토 (153)

d. 피지도자들이 감각에 지나치게 지배된 경우(ex. 키스에 대한 오해) 피지도자가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는지 살펴볼 필요 있음

 

2) 지도자들이 경험하는 감각들

   . 자신의 감각에 주의 기울이기 : 경청, 분별의 시간에 감각을 사용 할 수 있으나 지나친 신경은 역효과 일수도 있다. 생각과 감정, 감각에서 의미 있는 정보 얻을 수 있다.

 

3) 수퍼비전에서의 감각들

. 특정 감각의 의미와 감각을 일으키는 상황이 다양하다. (같은 감각 다른 상황 : 임재 VS 긴장)

   a. 수퍼비전에서 지도자들에게 회기 중에 어떤 감각을 경험했는지 질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감각들을 관상해 보면서 회기의 여러 동력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b. 하나님 경험시에 느껴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요청하는 것도 필요

   c. 주의사항 : 감각이 특정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기도 함. 단지 하나님의 신비 앞에 마음 열기

   d. 감각의 해석은 꿈 해석과 유사

      (ex) 어려운 상황에서 오는 위통증.. 만성일 때는 위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

 

 

10장 장애인들을 위한 영성지도_“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라”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셨는데... 때로는 "내가 너의 열망을 안다"는 듯이 주제 넘게 행동했던 상황들을 되돌아 보게 했다. 책에서는 육체적 장애 부분에 대해 주로 거론 한 것 같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정서적 장애를 가진 경우들이 있고 나 또한 유사한 장애가 있기에 장애를 가진 타인을 잘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열망을 다 안다는 듯 주제 넘게 실수 하는 경우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나 또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시절이 있어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너무 현실에 틀에 박힌 내 스키마적 기도를 한 때를 떠올린다. 정말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영성지도자의 역할 같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돌보는 사람이 돌봄을 받는 사람과 얼마나 조화하느냐에 따라 그 질이 결정된다는(347)말에 2016년에 뇌졸중 제자의 훈련을 돕던 시기가 생각난다. 내가 먼저 내안에 스트레스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처리 하지 않은 상태로 타인을 돕겠다고 나섰던 경우이다. 결국 제자를 잘 도와사회에 복귀하긴 했지만 우리 둘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어쩌면 내안에 처리되지 않은 스트레스들이 제자를 돕는 돌봄 상황에서 비인격적으로 발현되었을 꺼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비행중에 사고가 났을때, 산소 마스크를 보호자가 먼저 써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의 영성지도 또한 어쩌면 영성지도자들이 넘어야 할 산인 것 같다. 자신은 항상 안정적인 장소에서 피지도자를 맞았다면 피지도자는 그 장소가 안정적이 되기 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영성지도자가 어디서나 환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훈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더 관상적으로 만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나 다워지는 연습은 어디에서건 마음을 놓고 경청하는 영성지도자로 준비되는 과정에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장애피지도자의 경우는 p350에서처럼 피지도자에게 편하고 불편한 것을 미리 말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지도자가 실수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안전장치인 듯 하다. 이는 장애가 아닌 경우에도 중요한 부분인 듯 하다. 사람마다 아킬레스 건은 다르니까...

 

영성지도 수퍼비전을 주제로 책을 읽으면서 이번 장에서처럼 지도자와 수퍼바이저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이 감동스럽고,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p370에서 저자가 수퍼바이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영성지도 시간에 자신의 모습을 창을 통해 바라보는 부분이 꼭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 수퍼바이저는 영성지도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분에서 내 마음에 희망이 느껴졌다. 나는 나를 잘 모르지만 영성지도를 통해, 그리고 영성지도 수퍼비전을 통해 내안에 인지하지 못하는 나를 다양한 상황에서 인지하고 알 수 있게 해주어서 내가 더 이 땅에서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마 11:29-30, 메시지성경) 익힐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지도와 영성지도 수퍼비전의 유익을 누리길 바란다.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9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9장 수퍼비전에서 “공동문화”개념 사용하기

최근 대한민국에도 해외 유입인력이 엄청 많아지면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사람들이 많이 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도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이 (특히나 노동자로 왔을 때) 힘들꺼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사회가 꿈을 찾아온 그분들을 잘 안아주고 바르게 인도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그러면서도 9장에 있는 내용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좀 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은 또 내가 앞서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림에 살 때 낮에 도림천에 나가보면 외국인 어린 엄마들이 아가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고, 그들끼리 마실 나온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공부 할 때는 또 다르게 생각하는 나의 이중 잣대를 발견했다.

 

책에서는 다중문화에서 오는 공동 문화개념을 이야기 했는데, 요즘은 같은 20대 안에서도 문화가 다른 것 같다. 20대 후반들과 나눈 이야기 중에 누군가는 호감을 갖게 되고 누군가는 비호감을 갖게 되는 경험을 했었다. 그래서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이 다문화 상황에서 뿐 아니라 동질 집단이라 생각되는 가운데서 진행 해봐도 서로 참 다른 문화에 있음을 인지하게 도와줄 것 같다.

 

공동문화를 정의하고 가치와 행동양식을 탐색하고 내가 가진 특권과 억압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공동문화는 학습된 생활양식이라고 했는데 (p311, 313.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문화권 내에서라도 서로의 다른 점과 유사점을 찾아보는 것이 첫걸음 이다.

 

공동 문화 지도를 그리고 핵심 문화를 정의하고 핵심 가치관과 행동 목록을 정리해 보는 것은 그동안 당연하게 해왔던 자신의 일상을 분석해 보고 객관적으로 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 그래서 공동문화 지도에서 내적 갈등 영역이 밝혀 질수 있는 것 같다.(p319, 자기인식)

 

얼마 전 만난 제자가 나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했다. 너무 뉴스도 문화도 관심 없고 신학과 공부에 치우쳐서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하나님 아닌 것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누군가는 좀 하나님 쪽으로 치우쳐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책에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가치 인식하기”(p321)가 있었다.

 

나는 내가 가치를 두는 것에 나의 모든 시간을 쓰기로 한 것이고,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책을 근거한다면) 뛰어난 인간이 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특권과 억압에서 억압을 인지 못하는 것도 불쌍하지만,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p327) 슬픈일 이라는 생각을 했다. 감사 할 수 없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으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배우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도 슬프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인이 보기에 더 누리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 우울증에 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히틀러가 있고, 자신의 특권을 남용하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 할 수 있는데 문화 지도를 그리는 것은 자신을 직면하는 도구가 되는 것 같다. 직면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책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문화의 기원을 탐색할 때 하나님과 더 친밀해진다고 표현한다.(p340)

 

문화는 안경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영성지도를 하다보면 분명히 피지도자를 내 시각에 맞춰보려고 하므로 그를 관상적으로 보는 것에 방해가 될 것 이다. 최대한 내 안에 틀을 확장하고 안경이 하나님의 안경이 되도록 하여 어떤 피지도자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피지도자가 알아갈 수 있는 그런 영적 동반자가 되고 싶다.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8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8장 수퍼비전, 지평을 넓히기

두 개의 차원을 대단히 복잡하게 설명했는데 뒷부분의 예화에서 개념이 거의 잡혔던 것 같다. (그래도 어떤 부분은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고...)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안드레아와 메리의 대화록을 읽으며 이상한 부분을 못 느꼈다. 아트가 295페이지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다시 가서 읽어 보았다... 메리의 조급함이 내안에도 있음을 느꼈다. 나의 이슈도 항상 ‘조급함’이었다... 머물러 있기 보다 달리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영성지도를 실습하면서 많이 직면하게 된 부분이고 나 자신을 알아가게 된 부분이다.

 

불안정한 가운데 누리는 안정감.

 

수퍼비전의 하이라이트는 메리가 안드레아에게 갈등 상황을 열어주어 진짜 안드레아가 ‘착한 이미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으로서 관계에 있어서 직면하는 연습을 많이 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악역을 많이 했지만, 그래서 가장 많이 싸웠던 학번과 10년이 넘도록 가장 자주 연락하고 친하게 지낸다. 갈등을 자주 만나봐야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긴장하거나 화내지 않고 이성적으로 반응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메리 안에 이런 부분을 발견한 것이 신기하고 메리를 통해서 선교지에 있을 동안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머무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 나도 영성지도자의 자리에 있다면 매일 ‘성과’가 있는 영성지도를 위해 피지도자에게 자유를 주지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안드레아의 그 작은 사례에서 이렇게 많은 역동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발을 못 뺄 것 같다.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7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7장 윤리적 예측으로 흔히 일어나는 곤경을 막기

한국 안에 아직 영성 지도가 많이 보편화 되지 않은 상황이라 법적 자료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초반에 영성 지도의 길을 닦고 계신 많은 교수님들이 힘써야 할 부분이 참 많겠다는 생각도 들고, 선구자의 자리가 쉽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생각 외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참 많다는 생각도 들고, 지역적으로 혹은 분야적으로(특히나 횃불트리니티 출신으로 영성지도 분야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어서 사례에 나오는 일들이 발생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예측이 들었다. 서로 조심해야 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잘 소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성지도 시작 할 때(2회기) 작성하는 서류를 꼼꼼히 잘 만들어야 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교회에서 인사할 때 공동체 내에서 허그는 가능하지만, 영성 지도시에 허그는 하지 않는 다는, 무언가 피지도자들에게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지도자가 최선을 다해야 겠다. 가장 당황했던 부분이 ‘비밀보장 및 익명성’부분이었다. 작은 사회에서 진행되는 영성 지도와 수퍼비전으로 인해 인력들의 교차지점(지인들이 연결될수 있음. 한다리 건너 지인)이 있다는 것은 항상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도덕적 문제와 위탁의 부분(246-249)은 가능하면 그런 경우들이 안생기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하며 읽었다. 참 경계가 애매모호 할 수 있는 부분이겠다.

 

[토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을 읽으면서도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을 돌아볼 때도 믿음과 심리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 또한 심리적, 인성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말씀의 사역(개인적 해석)이나 편협한 기도 등이 발생하지만 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것 같다. 지도자가 인지하고 알 때 영성지도로 알려 줘야 하는지(직접화법 아니고)? 혹은 영성지도 식으로 알려주려고 할 때, 문제 되는 부분에 피지도자가 머물려고 하지 않고 다른 쪽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는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적 문제와 영성지도의 문제 사이에 경계선이 애매한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6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6장 주어진 것과 선물 : 성과 하나님의 에로스

MDiv 시절에 영성석사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많은 비밀들을 발견했었다. 어느 책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수녀님이 성경 묵상 중에 경험한 내용이 스쳐지나 듯 적혀 있는 부분이 있었고(어느 책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별 시간이었던 것 같은) 또, 바로 이 부분이 나에게 엄청 가벼움과 자유함을 주었다. 

 

그 전인지 후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성’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나서 학생들을 만났을 때 (학과 특성상 남학생들이 많은데..) 학생들의 말 못할 ‘성’의 이야기들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었다.

 

6장에서도 지도자가 먼저 성과 하나님의 에로스 부분에 열려 있을 때 피지도자의 반응에 당황하지 않고 관상적 경청이 가능했던 것처럼 나의 경험에 대한 답을 책에서 해석하고 나서야 나도 더 자유롭고 가볍게 대화에 임할수 있었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선교지에서 항상 혼자 말씀 보는 시간은 너무 달콤하고 항상 에너지가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깨끗한 방에서 말씀 묵상하기를 항상 갈급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묵상 중에 나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분별시간에 읽은 책의 내용과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30대 후반, 호르몬이 풍성했던 내게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다가오실 수 있었다는 답을 찾았다. 그 당시는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대적기도하고 난리도 아니던 중.. 어느 시점엔가 (나에게 특정한 마음이 있는 남성 대상이 없었던 관계로) 말씀을 볼 때 마다 느껴지는 그 느낌이 혹시 하나님이신가? 하는 의문을 갖지는 했지만 누구도 나에게 알려준 적이 없고, 누구도 나눠준 적이 없어서 나도 어디서 말할 곳도 없었다.

 

이 책의 내용 또한 기혼자들의 내용에 집중되어 있다. 나에게 경험하게 하시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책을 통해 나의 경험에 대해서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말씀에 깊이 빠져 읽을때 느꼈던 경험을 이제 젊은 여성 싱글들에게 내가 먼저 나눠줄 수 있을 것 같다.

 

[토론] 지도자의 경험의 크기가 중요한 것 같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계하고 피하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스키마를 벗어나는 피지도자를 만나면 어떨까...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4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4장 초보 영성지도자들을 지지해 주기 : 댄스에 참여하기

초보자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과 가이드 vs 하나님과 피지도자를 위하는 상황내의 결정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점점 답을 찾아가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영성지도자로서는 많은 경험이 없지만, 초를 켜놓고 형식적으로 시작하고 끝이라는 선이 명확한 영성지도가 사실은 대단히 불편하다. 나에게 그런 자리가 베풀어지고, 전문적으로 영성지도가 나의 전업(?)이 되어 피지도자들도 동의가 된다면 사무실에서 그렇게 해 볼만 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형식적 영성지도를 받으러 온 사람들 보다는 대개가 자주 만나야 몇 개월에 한번, 때로는 몇 년만에 한번 만나는 친한(?)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쌍방으로 진행되는 영성지도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영성지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대부분 지인들이 (나는 알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께 깊은 질문과 갈망을 가지고 있을 경우인데, 그때는 정말 나도, 그도 의도하지 않게 대화가 그쪽으로 이끌려 가게 되어서 만남이 마무리 될 때는 쌍방이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에 놀랄 때도 많고,(p.110, 놀라움의 하나님) 때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지나는 경우도 많다.(p.111, 무지의 경험) 

 

지인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때 우리 만날 때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어야 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 춤추는 방법에 너무 몰두하므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나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었다. 이러한 방법은 나의 인격(무형식의 형식 선호?, 자유로운 가운데 성령의 일하심 보기?)과 내게 있는 은사들(아직 명확히 모르지만..)과 나의 기도 제목(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되서 교만하게 되지 않게 해달라는)이 녹아 나는 상황들이다.(p.111-113, 지도자의 인격과 선물 지지해주기) 

 

그저 모든 만남과 대화의 중심에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은혜가운데 머물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책에서는 “사역에 너무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성령의 활동을 놓친다고 했는데 나는 혹시 그래서 사역을 놓치고 있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p.114)

 

침묵 부분에서는 이전 사역하던 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과 설교 후 침묵기도 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은 그 침묵의 시간이 불편해서 반주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학생들은 잘 따라오고, 때로는 침묵 후에 내가 짧게 나누는 내용들(p.132, 적절한 자기 공개)이 다음 침묵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학생도 있었다.(놀랍다. 중2가... 주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자기 내면을 관찰하다니...)

 

감지하는 능력은 점차 자라간다고 하는데, 여전히 내안에 내가 많아서, 때로는 내 의식인지 발견인지, 내 머리의 반응인지 몰라서, 피지도자에게 나누어야 할지 한참 머물다가 반응하는 경우들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항상 관상적 반응이 아니라 두뇌적, 논리적 반응을 할 때(이 경우로 일하시는 경우도 많다.)는 상대에게 말을 꺼낼 때 더 조심스러운데, (영성지도의 방법이 아닌 듯 해서...)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꺼내다 보니 상대가 더 마음을 여는 경우들이 많다.

 

바로 최근에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자기를 개방한 지인이 있었던 관계로 4장을 읽는 재미가 많았다. 나는 의도 없이 원래 개방적이라 자유롭게 이야기를 했는데, 지인은 그 부분을 감추려고 하다가 내가 확~ 개방해 버리는 바람에 자기도 개방해서 자유로워졌다고 표현했다. 그날의 만남은 짧았지만, 참 이벤트가 많은 날이었다.

 

[토론] 자기 공개... 저는 워낙 개방적이라 개방이 편한데, 개방 자체를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신학교에 와서 알았습니다. 개방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래의 내용은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3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3장 명확성을 지니고 보기 : 수퍼비전 작업 정의하기

지난주 수업 때 교수님의 "하나님만 신뢰하는 모드"의 수퍼비전이 계속 가슴에 남아 그런지 이번 부분을 읽을 때 계속 자발적 유약함(p97, ‘힘 빼고 하나님 바라보기, 기대하기’), 진정한 겸손이 계속 뇌리에서 돌고 있었다. 영성지도도 수퍼비전도 하나님이 마음 두시는 곳에 함께 해야 하는데 항상 나의 정의가 먼저 고개를 들고 내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기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서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어제도 왜 이렇게 질문이 아무거나 나오나? 하며 대화의 초점이 휙휙 바뀌었는데 피지도자가 그때 마다 주제에 따른 깊은 성찰을 나눠주어 나만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내가 보기에는 불안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5년 만에 만난 두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신 것 같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이번 장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이 많이 부각되었다. 지도자도 수퍼바이저도 자신을 알 때 피지도자를 더 잘 도와 줄 수 있게 된다. 사실 나는 하나님을 더 알고 경험하고 싶어서 나를 더 알고 싶었고 그래서 기독교 영성 공부를 더 하게 되었다.

 

3주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지난주 캘빈, 이번 주 수퍼비전 작업정의에서 계속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끊임 없이 알려주시는 것 같다.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서 나를 돌아보고(성찰) 아버지의 시각으로 나를,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은혜가 내게 항상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저자가 ‘자기만의 기도와 실습 영역‘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은혜를 노력으로 살수는 없지만 시간과 마음을 아버지께 향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의지의 표현이 이러한 훈련이 아닐까 한다.

 

이전에도 ‘도구상자’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자는 기술적인 부분(?)을 표현한 것 같았으나 본인은 성령님께서 다양한 도구를 꺼내 쓰실 수 있도록 나를 열어놓고 배우는 마음의 자세가 ‘도구상자’전에 선행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개방은 언제나 공격받을 위험도 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열 때, 일부 다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 믿음의 모험에 모험 없이는 경험해 볼 수 없는 더 큰 은혜와 믿음의 진보가 있을 것을 기대해본다.

 

[토론] 나는 맞지 않다(p104하단, 배경, 세계관, 상황 등...)는 마음이 들어서 편히 다른 지도자에게 가도록 피지도자에게 길을 열어주었으나 피지도자가 계속 하기를 바랄 때는 나를 성찰하면서 계속 만나야 할지, 혹은 피지도자의 다른 마음 때문(나와 계속 관계를 유지 하는 것의 이점이 생길 경우)에 나와 회기를 계속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인지하도록 도와야 할지.. 이 부분이 ‘통제’(p99)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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