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현 목사님이나 강준민 목사님의 문체는 어릴 때부터 읽어서 그런지 대단히 익숙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좀 불편함이 있었다. 옥한흠 목사님 저서를 처음 읽는 이유도 있겠지만 오래된 책들 같은 경우 많이 재편집해서 내는데 오래된 문체나 표현 방식이 나에게 불편했던 걸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기록한 것을 훑어보면서 때로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이 불편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으니 불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편협함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었을 상황들이 생각났다. ‘편협’ 말고도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을 살폈다.
모든 저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근거자료를 들이댄다. 저자도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근거로 정리하고 많은 자료들을 보였는데 왜 나는 불편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 반론도 참 많았고, 의문도 참 많았다. 동의도 많았는데 전자가 더 많았서 그런지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있다. 이 글도 일주일이 지나면서 계속 퇴고 하고 있다.
평신도와 목회자를 평민과 귀족(?) 같은 개념으로 자꾸 나누는 부분들이 생각났고, 훈련 노하우 및 여러 가지 방법론을 설명한 곳에서 기도하고 구하는 솔루션은 하나도 없고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인본주의 적인 방법들을 제시하신 것 같았다.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선배님을 너무 비평하며 읽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방법들은 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안 먹히는 방법이다.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약간 비인격적(?, 그시대에는 맞았겠지만..)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불편했다. 그리고 자꾸 ‘인본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었다. 그래서 또 불편했다. 존경하고 싶은 분에게서 자꾸 안좋은 부분을 보게 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한국교회가 부흥을 하던 시기에 한국 교회를 비판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단하는 건강한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잘하고 있을 때 자아비판 하기는 힘드니깐. 물론 책에서 진단한 문제점은 지금도 여전히 문제인 것 같다. 1980년대 책이 쓰여지고 나서 지금까지 3허-허수, 허세(교인 많은데 세상에 영향력이 없음), 허상(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아 불신자와 구별이 없음)-는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허상 부분을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했다. 허세와 허상을 전체 크리스찬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고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한 것이 불편한 마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읽는 내내 자꾸 마음에서 반론이 올라와서 책 읽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동의되는 책은 속도가 엄청 빠른데 한 달을 다 되어 가도록 3부 초반 까지 밖에 못 읽었었다. 4부는 실전의 이야기라(여전히 반론이 일어나는 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속도가 빨라져서 다행이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훑을 뿐 아니라 ‘제자도’의 정당성과 ‘평신도’에 초점 맞추기 위해 초대교회의 설명들이 있었다. 그런데 적용 부분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이 (특별히 목회자가, 그리고 평신도 리더가) 노력해야한다는 강조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불편했고 물음표를 날렸다. 살아계시다면 마나서 여쭤볼텐데..
교회의 존재 이유를 예배라고 정의함은 다른 수업에서도 계속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제자훈련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평신도가 날마다 사회에서 성과속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을 가르치는 것” 이라고 쓰셨는데 사실상 책의 내용에서는 ‘사회에서... 제사장으로의 소명’을 수행하는 부분보다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교회의 봉사자를 키우기 위한 제자훈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가 되고, 정말 크리스찬들이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 원하며, 인격이 예수님 닮도록 한다는 취지와 다른 결과들이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앞 세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리더를 너무 중요시한 리더 중심의 교육이었다.
책 읽는 내내 내가 연변에서 하던 TEE 성경공부가 생각났다. 물론 리더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모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선생님이 되고 학생이 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위해 기도 하게 되며,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모임이 TEE였다. 저자가 말한 제자 훈련과의 차이점은 목회자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옥목사님이 살아계시다면 기도하며 훈련하고 훈련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개정판을 내시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부분은 시대적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부정적 발언에 마음 상하는 분이 없기를...^^
나는 2009년에 GMTC 훈련을 받았고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다. 선교사,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을 꼭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지... 내가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읽기에는 아직 그릇이 안 됬었을 것일까... 그동안 선교지에서 했던 잘못들이 생각나면서 이 책을 읽고 갔다면 실수들을 좀 덜하고 나를 직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의도하지 않게 책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되뇌이고 하는 시간을 갖게 됬다. 마음속으로는 ‘산둥수용소’ 리플렉션을 참 많이 썼는데 기록 할수 없을 때 한 생각들이어서 좋은 글귀들은 다 사라진 듯 하다. 글귀는 사라져도 내용은 마음에 계속 남아있다. 이 책을 읽은 3주간이 또 나에게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다시 객관적으로 나를 자주 바라보는 연습에 노출된 시간이었다.
수용소 초반 저자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기에 종교도 가진자들의 여유일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과정은 내가 20대 때 재정적, 물질적 안정감이 없던 시절(생각해 보니 지적 안정감도 없었음), 깊이 고민했었던 과정이었고, 과학(?) 하는 사람으로서 “ ‘실질적인 것’(과학기술 개발, 물질적 필요의 채움)이 중요하지 왜 철학이 중요하다고 하지?”(실사구시, 중국 공산당이 강조하는 것인데 나의 20대 때는 공산당과 사고방식이 비슷했던 것 같다.) 하던 1차적 질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연길에서 10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또 다시 생존의 문제에 봉착했다. 40대가 되어서 다시 성장기 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이상학에 집중하지 않고 ‘부르심’에 집중했다. 나의 생존이 부르심과 연결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안에 존재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처리하는데 약 1년 정도 정리와 구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전에 얼떨결에 신학교에 왔다. 신학교에서의 2년,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연습이 재미있어 진다.
수용소에서 더 이상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하나의 사회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부분을 읽을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바라시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들이 있는데(부르심, 안정감있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부모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보다 돈을 잘 벌수 있는 일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red ocean이 생기고 사람들을 소유 가치로 평가하게 된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수용소 사람들은 힘들었겠지만 저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깊이 사유한 사람들은 수용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나 또한 (수용소 만큼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에 집중하려고 다시 한번 노력하면서 자유함을 경험했다.
수용소에서 시간이 오랠수록 사람들은 점점 책임이 많은 중요한 자리는 서로 피하려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버지 제가 거기 있었다면요?’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부르심’을 생각했었다. 부르심이 있다면 내가 잘못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수용소 초반에 수녀들과 수도사들을 위주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내가 해야 할 일과 있을 곳을 알게 된다.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화장실 청소를 했을까? 수용소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초기 화장실 작업, 만약 나 혼자라면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말미에 식당이나 행정을 책임지는 일의 경우나 에릭 리들처럼 청소년들을 상대로 사역해야 하는 일들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 한 두명만 주셔도 아버지 뜻이라 생각하고 쉽게 순종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평가하며 그곳의 선교사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자주 ‘내가 지금 거기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수용소 안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타인을 수용할수 있으며, 얼마나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나? 나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만 무게를(가치) 둘 수 있는가?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상황에서의 나의 반응을 계속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길키가 평가하던 선교사들과 내가 다름이 없음을 여러 번 하나님께 회개했다. 어쩌면 그들처럼 나도 하나님의 뜻과 바램, 인류의 공영, 나의 존재의 이유 보다 지금 나의 안위와 내 배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신 지적능력과 언변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격상, 직업상, 강의 시간에 절대 집중한다. 때로 강의 시간에 컴을 쓰시는 분들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가 거슬릴 때가 있다. 짜증이 난다. 그래도 미워하면 안되니깐, 그런데 궁금하니깐 무슨 작업하나 쳐다보면 모니터는 강의와 상관없는 내용들이 있을 때가 있다. 1학년 1학기 때 그 부분을 넘어 가는게 힘들었다. ‘다들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왜 다른 사람(교수님)을 무시하지? 왜 속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들이 불쌍해 보이고 안되 보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음이 평안하다. (시끄러워서 짜증나는 건 압지께 풀고..) 내가 그분들을 정죄한다면 또 수용소의 선교사가 한명 늘어나는 것이 된다.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더 사랑해야 하겠다.
책을 읽던 중 나보다 어린 싱글 사역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첫째 나는 질문한 친구보다 정서적으로 외로움을 덜 타는 기질인 것을 솔직히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봉착해 있어서 감정이나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개발되지 않은 것이 나의 단점이자 강점이다.
둘째,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중보기도’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청중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긴장 하고 있는 내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왜 긴장하고 있지? 그냥 내가 하는 기도를 안내 하는건데?’ 하나님 앞에 머물러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청중들 때문에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정리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 여디디야’였다. 내가 한사람 앞에서 강의하건 만명 앞에서 강의하건 나는 ‘지금’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편한 부분이 없다면 내가 떨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그래서 강의 준비를 진짜 열심히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요즘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과 영성을 다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전문성과 영성이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 있으나 만명앞에 있으나 하나님앞에 한사람인 것 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책의 끝부분을 읽었다.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에야 모든 것(자신의 안위/복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이기심, 안정감, 타인과의 비교)에 초월하여 평안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나의 삶이 현재 ‘하나님 안에서 살기’ 연습을 하고 있는 시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완전 몸으로 체득되고 저자와 둘이 논쟁을 벌이 듯 읽었다. 책을 아껴서 읽는 편인데 이번 책은 저자와의 논쟁으로 깨끗하게 읽지 못했지만 자주 읽어야 할 인생 책을 만난 것 같아 감사하다.
수용소에서 모두가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할 때 (잠시) 평안이 임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떠오르는 부분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이단이 발생되는 가장 큰 원인은 정통 교리를 현재의 문화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공존과 삼위 일체 교리 였다. 문화를 잘 적용한 경우도 있었다. 저스틴은 헬레니즘안에서 공감 할 수 있도록 로고스를 변증용으로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엘리트들이 접근하기 쉬워졌으나 기독교의 주요 개념들이 플라톤 주의와 대등한 개념으로 전락되기도 하고, 기독교안에서 플라톤주의를 증대시키는 경우도 될 수 있다.
인지 종교학은 믿음의 형성과 발전을 연구하여 믿음의 기본 인지 구조 탐구가 목적이다. 이에 의하면 이단발생과 연루된 주요요인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당대의 사회문화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될 때,
둘째는 시대의 이성과 문화에서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 문화에서 성육신의 교리가 지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에 아리우스주의가 발생하고, 교부시대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문제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시기에도 논란이 되었다. 16세기에 소키누스주의로 알려진 소치니는 반삼위일체론을 제기했다. 또한 과학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단적 사고가 발생되는 등 특정 공동체와의 긴장관계가 발생하기도 한다.
셋째는 도나투스의 경우처럼 사회적 정체감이 종교적 정체성 확립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네 번째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대상 문화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의미와 용어로 바꿔서 말하게 될 때(상황화) 대상 문화에 적용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개조 하는 경우이다. 예로,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려했고, 마르키온은 유대교를 버리라고 설득한 경우이다.
다섯 번째는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윤리적 기준이 너무 관대하거나, 억압적이어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엄격한 도덕주의에 맞춰 신학을 변경했고, 터툴리안을 매혹시킨 몬타누스주의도 정통 기독교에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정의했다. 정통 기독교가 특정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 될 수 있는 문제들 이다. 터너는 이단에 대한 오중 분석을 제시했다. 희석, 절단, 왜곡, 의고체, 배출의 다섯가지 인데, 적응을 아예 거부하던지(의고체), 여러 가지 모양으로(희석, 절단, 왜곡, 배출) 사회에 동화 되는 것이다. 특정 사회(예. 전도대상 문화)와 관계를 맺고 깊이 들어가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단으로 치우 칠 수도 있는 이러한 상황들 덕에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항상 신학을 점검하며 상황화를 시도해야 한다.
2.5 정통, 이단과 권력
발터 바우어는 정통과 이단의 판정 사이에 권력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단을 ‘역사적 싸움에서 패배한 정통‘이라고 표현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정통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수 있다고 말한다. 크리스찬돔 시대에는 정치, 사회, 경제에 기독교의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이들의 주장에 힘을 더 했다. 포스트 모던사회에서 이단을 매혹적으로 생각하게 된 배경이 이러한 이유들이다.
교부시대에는 기독교가 억압받았기에 정통을 강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이 떠났다. (ex. 발렌티누스, 마르키온) 국교화 이후 정리되지 않은 기독교의 분열이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 할까 우려한 콘스탄티누스가 도나투스 논쟁과 아리우스 논쟁을 정리하는데 나서게 된 것이 발터 바우어 논지의 배경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포스트 모던에서 정통은 억압이고 이단은 자유롭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단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여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정의 되어 발도파, 존 위클리프, 후스 등이 이단으로 판정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하 개신교) 또한 위의 정의에 의해 이단으로 찍혔으나 개신교 측에서 초기의 성경해석을 회복했으므로 개신교가 정통 신앙과 정통과 이단의 견해까지 회복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후에 발생한 후안 데 발데스의 반 삼위일체론은 이단으로 정죄했다. 역사적 예가 없었던 자콥 아르미니우스의 경우는 투표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단이란 ‘교회가 용납 할 수 없는 것 으로 판단한 가르침’으로 정의된다. 이에 반해 존 밀턴은 개인의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정통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이단 결정 여부가 권력과 관계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인정되나, 권력에 의해 이단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오늘의 문화가 이단이 덜 도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매력을 느끼지만 역사속에서 몬타누스나 영지주의의 경우는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도덕적으로 엄격했다. 서양에서 이단에 대해 호의적인 이유는 이단 논쟁을 급히 마무리 하려 했다는 의심과 정통이 권력의 결과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2.6 이단과 이슬람의 기독교관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오해하고 있다. 코란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하나님, 예수, 마리아이며, 그들을 예배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기본 사상에 대한 코란의 설명은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성행했던 변종 기독교들의 영향이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이런 사상이 들어있는데 나그함마디는 아라비아 반도 가까운 곳에서 발굴 되었다. 결국 코란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이단적 견해들이다. 이런 오해들이 정리되면, 두 종교 사이의 오해가 완화 될 수 있지 않을까?
3. 후기
책을 읽으며 워드에 정리한 것이 15페이지가 나왔다. 책을 통해 배운 것도 많지만 생각도 많이 했다. 적은 지면에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책을 만났고, 좋은 믿음의 선배를 만난 것 같아 위로가 되고 이 땅에서 남은 삶을 살 용기가 생겼다.
홍정길 목사님이 작년 10월 HOPE 선교회 이사장 이임식 말씀에서 ‘인간에게 모두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신인가?’라고 말씀하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 나의 작은 시각과 사고 안에서, 이해가 안 되서 계속 묻고 조금씩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아간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 알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아는 것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많은 이단의 기원이 된 것 같다.
변하는 문화(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혹은 문화의 눈높이에 맞춰 전도하기 위해 기독교의 본질을 잘못 수정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가장 두려웠던 부분이 상황화 였다. 신학을 하지도 않은 내가 혹여 라도 잘못 전할까 항상 조심했다. 중.고등부때 선생님이, 내가 들어도 아닌 것 같은 삼위일체 설명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께 틀렸다고 지적은 못했지만 내 안에서 ‘저것은 아니다’라는 게 확실했다. 나름 쉽게 잘 설명하려던 선생님이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단과 연류 되어 있는 압박요인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상황화를 해야 하고 어디까지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가는, 철저한 신학적 배경으로, 확실한 신학적 멘토(교회)에게 검증을 받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20-30대 미혼을 주로 만나고 있는 나로서는 ‘특수한 문화 세대’인 그들에게 상황화가 필요하다. 혼전 순결과 미혼모 출산 등은 사회문제이지만 이미 중국에서 받은 문화 충격으로 개인적인 신학의 문제로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한국의 청년들, 교회 안에서도 일반화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의 현재의 청년들에게 말씀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으나, 저자 소개에서도 언급했던, 왜 알리스터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긴장의 완화를 위해 노력(p332) 하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에 관한 기독교의 관점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기독교 철학과 조직신학 수업시간에도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기독교 철학시간에 유신론적 진화론에서 많이 거론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천사에서 릭 워렌이 ‘이 시대에 저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과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하라고 했던 이야기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해가 된다. 처음에는 책을 빌려서 읽다가 결국 나도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저자는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취득후에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이야기를 조직신학 때 들었다. 약간 의아 했던 바로 그 분이 쓴 거의 400페이지 분량을 내가 읽었다니... 찾아본 자료들에서 그는 ‘천재’라 표현되었다. 과학, 신학, 문학 분야에 각각 박사를 취득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 연구의 권위자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천재성을 사용한 저자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무신론자로 대학에 입학했고 친구를 통해 신학에 흥미를 가지면서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영국에서 학위를 받고 캐나다 리전트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제임스 패커의 수제자이며, 제임스 패커와 존 스톤트를 잇는 복음주의 신학자에 속하며 청교도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 번역된 저서들로는 ‘하나님의 칭의론’,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제임스 패커의 생애‘, ’기독교 교리 이해‘ 등의 책이 있고, 이 책들로 많은 상을 받았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9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으로 개신교의 역사, 종교, 문화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미래를 진단한다. ’도킨스의 신‘, ’도킨스의 망상‘ 등을 저술하기도 하고, 도킨스와 직접 신의 문제를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 한 관계로 한 가지 큰 의문이 있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기독교관을 자세히 논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긴장이 완화되기를 바란다 했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화를 ‘굳이’ 바라는 이유가 무얼까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
2. 내용 정리
2.1 이단의 기원
1부에서는 이단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설명한다. 이단은 ‘정통이 되려다가 실패한 집단‘(53)으로서 이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고 기독교에 열심히 있었던 사람들이다. 시대와 문화에 맞추어 전도에 적합하게 교리를 조절하려고 했던 그들의 노력은 본질적인 부분을 수정하려는 바람에 이단이라고 명명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원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단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heresy 는 헬라어로 hairesis, 선택, 선호하는 경로의 의미가 있었으나 2세기에, 이단vs정통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정통에 반대되는 사상을 개발한 학파를 의미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단이고 정통이라고 결정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정당한 발전인가? 등에 대해서 이 책에서 논한다.
2.2 이단의 배경
이단의 배경이된 기독교의 다양성과 이단들의 초기 발달사를 논한다. 초기 기독교에서의 다양성이란, ‘무엇이 권위 있는 자료’인지 알수 없는 불확실성 가운데, 정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성이다. 또한 성경안에서도 같은 사건의 다양한 표현과 해석의 다양함, 예배의 다양성이 초기 이단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부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봤을 때는 기독교가 통일된 하나의 공동체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단은 외부인인가 내부인인가? 대부분의 초기 이단들은 교회가 주변에 잘 융합하고 관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하는 가운데 발생했다. 기독교가 정립되지 않았을 때는 다 같이 기독교였는데, 준비 없이 국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 정치 권력의 통일성에 저해가 될 우려가 있어서 정치적 조급함으로 교리가 정리되었다. 이런 상황을 바우어는 이단이 권력집단에 의해서 승인 받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그들의 견해가 부적절하다는 여론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이 배척받은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지, 신학적 억압으로 인한 희생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단 자료들은 로마시대에 제거되었고,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기독교의 통일성을 위해 교리를 정리하던 클레멘트, 이그나시우스, 저스틴등의 저술에 나타난 정보들이다. 이단이라는 용어도 4세기에나 사용하게 되었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지적 결함을 지닌 기독교의 한 유형으로 신앙에 파괴적 영향이 있는 가르침들’을 의미했다. 이는 기독교가 이러한 지적 결함을 가지고 미래에 살아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로 정통은 이단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이단을 결정할 것인가. 교회들이 교리를 정의함에 따라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론들을 파악 할 수 있었으며 예배와 윤리와 신학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결정 인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겉모양은 기독교의 모양이지만 본질적인 기독교 정체성과 틀린 것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3 고전적 이단들
고전적 이단은 5세기까지 교부시대에 발생된 이들로 기독교가 지리적, 지성적으로 확장되면서 그들의 문화에 맞게 기독교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과정에 생긴 것이다. 이들은 주로 신학적 탐구과 열정 때문에 발생한 이단들인 반면 중세시대에는 교황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들이 대중에게 영향력이 있을 때 교회의 위협 세력으로 결정되었다.(후스, 발도, 롤라드)
이 시대의 에비온주의는 유대교를 배경으로 예수의 정체성을 유대식으로 해석하여 낮은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헬라시대에 아리우스 주의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두 이단이 모두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는데 아리우스는 헬라식 사고방식 안에서 접근이었고 에비온주의는 유대교 사고방식 안에서 해석이었다.
도세티즘은 예수의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을 인정 할 수 없고(이슬람과 유사), 신성과 인성이 단일 존재에 공존 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의 헬렌’과 같은 방식으로 영웅을 둘로 만들어 버린 경우이다.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경험으로 하나님 아는 것을 옹호하며, 기독교 내에서 시작했지만 영지주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발전시켰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같은 예배와 성례에 참석하지만 성경 해석을 다르게 하므로 이레니우스는 이들을 교회를 위협하는 사악한 집단으로 묘사했다. 나그함마디에 세트파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발렌티누스주의가 주장하는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세트파 영지주의에서는 세트만 아담의 아들로 영적 인류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세계는 악하거나 무지한 창조자의 활동이 낳은 열매이므로 구원이란 신자들이 물리세계에서 해방된 후 빛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마르키온 주의는 구약의 하나님(열등, 결함)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므로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므로,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연관성을 모두 끊어야 성장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 리더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다른 종교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영지주의와도 연관이 있고, 예수의 인간측면을 무시하는 도세티즘과도 유사하다. 발렌티누스는 성경해석을 잘 못하고 마르키온은 성경을 마음대로 편집했다. 1921년에 독일의 폰 하르낙이 마르키온 복권을 시도했었다.
이러한 초기이단들은 물질은 악하다는 해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했으며, 모두 정경화 작업 전에 발생했다가 정통에서 거부되었다. 이러한 이단 분별은 저스틴이나 대부분의 성직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2세기 후반 정경화 작업등으로 정통이 만들어 짐에 따라 이단이 서서히 약화되었으나 기독교 국교화 이후 교리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단 논쟁이 생겼다. 로마의 사회문제이고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세워졌다. 국가의 통일성 위협을 두려워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국교인 기독교가 교리로 분열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 논쟁이나 도나투스주의 문제를 황제가 로마 원로원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아리우스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유일신론에 맞추어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예수님이 단지 피조물 가운데 으뜸인 존재로 피조물로 정의한다. 이것이 교육수준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 창조물을 구속할 수 있고,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면 그를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반박했다. 이와 같이 이단들의 특징은 겉은 신앙의 모습이지만 내적인 정체성이 부족하다.
도나투스 주의는 국교화 이후 핍박당시 배교한 성직자들에 대한 문제처리 과정에 발생했다. 베르베르 왕국을 대표하는 누미디아 사람들(원주민)은 배교한 성직자의 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가톨릭파(로마 통치 지지)는 성례는 예수님에 의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집행자인 성직자의 도덕성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리했다. 드러난 문제는, 교회 및 성례 관련 문제 인 것 같지만 그 뿌리는 은혜의 직무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공로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였다. 더불어 도나투스 주의는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문제로도 보이는데, 신학적 문제가 정치적 긴장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인간 본성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왜곡한다. 펠라기우스는 은혜를 통해 죄 없는 길을 택하며 살 수 있고, 예수님께서 이미 본을 보여 주셨으므로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련된 자기 수양을 제공하므로 로마인들에게 공감대가 있었다. 펠라기우스의 인간이 완전해 질수 있다는 주장과, 도나투스의 ‘신자는 박해에 굴하지 않는다’는 교회관은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이상적 인간관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팀켈러가 까다로운 도심의 엘리트인 젊은 화이트 컬러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청년뿐 아니라 회사 리더들의 목회적 멘토로서의 역할들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가장 먼저 접한 책이었던 ‘일과 영성’에서 본 내용들이다.
과제를 준비하면서, ‘뉴욕’의 리디머교회라는 것을 알았다. 책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신학교 졸업 후 처음 임지에서 말씀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많은 설교들을 하고 사랑으로 피드백을 받아서 오늘의 그가 되었다. 그의 책에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지 않는 답을 준다. ‘현대 일상’에서의 많은 문제들(골리앗)을 - 교회들이 약한 것(다윗)처럼 풀어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직면하고 파헤친다.
요즘 청년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유 중 에 하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장의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 이해조차 못하고 (당연히 위로도 못하고) 도리어 용기내어 직면하고 질문을 던지는 청년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직면하고 끄집어내서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답을 주셨음을 알려준다. 완전 통쾌하다. 나도 열만 내지 말고 이렇게 잘 표현 할 수 있게 준비되고 싶다.
2. 내용 정리
저자는 설교자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다고 책의 전체에서 계속 주장하고, 기억나게 해주고 있다. 첫째는 이 책의 Part 1 에서 정리하고 있는 ‘성경본문의 진리‘를 향한 책임이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말씀‘을 설교해야 하며,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강조할 뿐 아니라 저자가 계속해서 설교의 예시를 제공하고 있는데 예시들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은 두 번째 책임과 관계가 있다.
두 번째 책임은 Part 2에서 제시하는 청중의 삶을 향한 책임이다. 선포하는 말씀은 청중들의 삶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말씀이 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중에게 도덕적 책임이나, 명령이나, 억압으로 설교한다면 그들의 삶에, 말씀으로 인한 실제적 변화를 동반 할 수 없다. 나부터도 누군가 억압으로 시킨다면 그 앞에서만 잠시 바뀐 척 할 뿐이지 진짜로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중의 삶을 향한 부분‘은 그들의 마음이 변하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마음을 변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마음이 동요될 만한-일시적 감동이 아닌- 답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주는 해박한 솔루션이 아닌,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 삶의 문제의 답이 되셨음을
설교를 통해서 계속 알려주어야 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복음을, 설교자는 자꾸 현대인의 삶속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도와주어야 한다. Part 1에서 복음을 설교하라고 한 저자는 그 복음이 나의 ’현재 삶‘에 답을 준다를 것을 전하라고 Part 2에서 주장한다. 설교자 본인은 복음이 답이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중에게 이론적인 답만 줄 수는 없다.
그래서 Part 3에서는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성령에 의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진리를 향한 책임에서는 매번 복음을 설교하라는 것인데,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설교에서 함부로 다루기 힘든 부분이 문화와 시대 정신 인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하고 깊은 연구로 문화에 반응하면서 저항하라고 제안한다. 또한 Post-modern을 후기 현대주의라고 부르면서,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후기 현대주의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복음이 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신뢰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도록 도와야 한다.
설교가 마음에 머물러 청중들 안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을 대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감상 정리
책을 덮고 나니 마음에 떠오르는 주요 단어들은 청중의 마음,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는 설교, 성경 본문에 대한 책임과 청중을 향한 책임,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었다. 정리하고 보니 책의 목차와 비슷해졌지만 책을 읽자 마자 마음에 새겨진 단어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팀 켈러는 책을 잘 쓴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머리 나쁜 사람이 목차를 보지 않고도 주제어를 뽑았다니...)
빌려 읽은 관계로 기억할 곳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데 이번책은 포스트잇을 너무 많이 붙였고, 책의 중간부터는 결국 컴퓨터로 내용과 감상을 정리하면서 읽었는데 8페이지가 나왔다.
Part 2를 읽으면서는 계속 감탄했다. 내가 문과적인 지식이 얕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 주제 한 주제를 꺼내기 위해 참 많은 연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AD800년의 전사와 현재의 맨허튼의 청년 예를 들면서,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기독교 상담학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책에서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이렇게 깊이 공부하다니.. 설교 잘하시는 박학한 한국의 몇 목사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과연 나도 이렇게 깊이 연구하면서 제시 할 수 있을까... 현대 세계(과학, 지식, 문화)가 현대인에게 주지 못하는 답을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 나의 역할 일텐데, 그렇다면 저자처럼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 때에야 제대로 된 답을 제시 할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선교지의 특수한 상황이 아닌, 나에게는) 새로운 ‘정상적인 문화’로 돌아 왔을 때 느낀 것이 한국 사회가 너무 호전적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정서에 대한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 했는데 ‘5장 시대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 부분에서 답을 찾았다. 주석이 뒤쪽에 몰려있어서 읽기가 힘들었는데 일일이 주석을 보면서 근거를 찾아 갈 때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인 자애의 동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흘려보내는 ‘아가페’사랑이지만, 세속적 자애의 동기는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우월감을 돋우기 위함이라는 것(과 불의에 대한 분노라고 저자는 말한다.)이기에 그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애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물론 사회가 호전적인 이유에는 이외에도 많겠으나 많은 이유 중에 타당해 보이는 하나의 이유를 ‘개인적으로’ 찾게 되었다.)
저자는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소프트웨어 교육을 권장하면서 computational thinking(이하 CT)을 많이 교육하고 있다. CT에서의 문제분석에서는 단어의 뜻이 정확해야 문제를 정확히 풀어갈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을 정리하는 것도 그렇고,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고 정리하는 것도 그렇고, 설교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꼭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해주고 설명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웠다.
위와 같은 지적인 준비 뿐 아니라 청중의 마음에 설교가 닿게 하려면 청중의 문화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에 닿게 설교한다는 것은 인격적이고 목회적이며, 정감있고, 상상되고, 기억하기 쉽게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적용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대단히 당연한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어쩌면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지만 정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설교 뿐 아니라 목회적 상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도 목회적 상담도 이렇게 마음을 만지는 방법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기존 교회로 ‘취업’하지 않고, (교회에서 급여를 받지 않는) 선교사로 남고 싶은 이유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성도들(교회)을 나의 수입과 관련된 대상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고, 아버지가 피값 주고 대가를 치른 존귀한 영혼으로서만 대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다. 아무 이해 관계 없이 순수하게 아버지의 마음이 전달될 때,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아버지가 보낸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될 때, 사람들은 변한다.
저자는 성경본문을 text, 청중의 환경은 context, 설교자의 숨은 마음을 subtext라고 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기준은 subtext라고 했다. 요즘 ‘영성 형성’ 수업을 들으면서 더 많이 ‘나의 숨은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과 작게라도 걸림이 있는 경우들을 보면 내가 곧장 인지 하지 못하는 내안에 숨겨진 문제(부족함)와 타인의 동일한 문제가 충돌이 날 때 생긴다는 것을 점점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숨겨진 의도와 연약함이 설교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목회자는 영혼의 의사인데, 이 의사들로 준비되려는 신학생들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은 경우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어려운 중에 이 책을 읽어서 개인적으로는 위로도 되었다. 나에게 ‘그래 네가 맞아, 마음을 보살펴’라고 말씀하시는 싸인 같다고 해야 할까...
뒷 부분의 ‘강해 설교’ 뿐 아니라 앞쪽의 많은 이론(주장)들에서도 저자는 계속 예시를 두어 이해를 도왔다. 사실 저자가 제시한 이론들 보다는 예시 속에 있는 말씀들과 그 말씀들의 풀이에 많이 위로받고, 동의하고, 답을 찾아서 포스트잇을 많이 붙였던 것 같다. 수도 없이 붙인 포스트잇과는 상관없이 감상문이 작성되어서 약간 아쉽다.
나도 저자 처럼 아버지의 깊은 마음속에 있는 메시지를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서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변하게 하는, ‘생명을 전하는 작은 소리’로 살게 되길 바래본다. 내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좌충우돌 사건 사고도 많겠지만 나의 기준이 아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음으로 사명을 다 할 수 있길...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 정말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문제 해결식 성경 읽기의 부분은 너무 일상화 되어 있다. 얼마전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나의 필요에 따라 어떤 말씀을 읽고나서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답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결정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려주셨다는 ‘정당성’이 있었다. 급하게 결정하고 나서 다시 그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당황스런 해석이었다. 스스로 참 당황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내가 원하는 생각이 있었어서 전혀 상관없는 본문을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차라리 ‘저는 이게 좋아요. 이러고 싶어요’하고 결정하지.. 정말 내가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말씀으로 답을 받을 때 꼭 동역자들과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정말 내 마음대로 하던지..
5장에서는 삼위일체의 음성을 수용적 자세로 듣는 이해력과 습관을 기르라고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 혹은 교부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 오도록 현대 사람들보다 잘 반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현대보다 마음 빼앗기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지금보다 더 깊은 묵상과 통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나도 최대한 아버지의 말씀에 집중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매일, 매순간 하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너무 바쁘다. 나의, 현대인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바쁜 것을 피하고 없애 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둔 수도사이지 일상의 수도사는 될 수 없고 믿음의 공동체에 도전을 줄 수도 없었다. 도피하고 살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똑 같은 깊이로 예수님과 함께 하라는 도전은 도리어 거부감만 주게 된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으로 이 땅의 천국을 이루어 가고 싶다.
트럭기사 안토니가 부인에게 한말에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대로 살아야돼. 그래야 이해할수 있어. 밖에서는 도무지 알수 없고, 그 안에 들어가야돼. 아니면 그게 당신 안에 들어오게 하든가” 하지만 부인처럼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안토니 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나도 안토니처럼 살고 싶다.
메시지 성경의 서언에서 어떻게 그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는지 알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 유진 피터슨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모습안에서 믿음의 야성을 봤다. 바로 그 야성이, 양들을 사랑하고 아끼느라고 내는 그 화(anger)의 에너지가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내게도 하늘나라 갈 때 까지 그런 생명력 있는 야성이 있기를 바란다.
“Let it be with me just as you say”(눅 1:38)
나의 카톡의 상태에 써 있는 성경말씀이다. 연변과기대에서 사직하고 한국으로 나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마리아의 고백인 이 말씀을 보며 radical obedience 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아버지 제게 바라시는 radical obedience 는 무엇인가요?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물었던 것 같다. 오래 숙성된 후에, 결국은 radical 하게 아무 이유없이 선교지를 사직하고 나왔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기 시작한지 3년, 여전히 나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어렵지만 마리아의 고백을 매순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마 11:28-30)을 기억하면서 점점 행복해 지고 있다. 연변에 있었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푼수같은 기쁨이다. 때로는 과격하게 때로는 잠잠하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므로 내 안에 세상의 욕심이 점점 하늘나라의 욕심으로 재배치 되어 가는 것 같다. 매일 매일 조금씩 이겠지만 내 삶에 말씀이 더 살아나길 바란다.
유진피터슨의 영성시리즈 중에서 ‘영성독서’에 관한 책으로 소개 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의 말씀을 기반으로 성경 말씀을 나의 삶으로 살아내라고 강력하게 도전하면서 영적 독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구약에서부터 성경이 번역되었던 역사도 더불어 소개한다.
머리로 하는 묵상에 머무르지 말고 개와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물고 빨 듯이”, 철저한 순종으로 말씀을 삶으로 살도록 도전한다.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요한 같이 성경을 흡수하고 성경이 내안에서 작동하도록 먹으라고 한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저자(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인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나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느라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읽는다.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대체’라는 개념으로 이기적 책읽기의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삼위 일체 성부, 성자, 성령은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라는 ‘개인화된 삼위일체’로 대체되어 우리 삶을 다스린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경을 폭넓게 읽어서 그 형식을 이해하고, ‘주해’를 통해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잘 들어야 한다. 또한 성경에 순종함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내면화 하므로 거룩한 공동체에서 말씀을 살아내도록 한다.
“2부 렉치오 디비나”를 말씀이 탈인격화 하는 것을 경계하는 독서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렉치오 디비나의 4단계를 소개한다. 렉치오는 은유를 통하여 깊은 의미와 단어의 기원으로 가까이 이끄는 “읽는” 것이다. 메디타티오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한 “묵상”으로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다. 오라티오(“기도”)는하나님의문법안으로들어가는입구이며하나님과관계하는언어이다. 콘템플라티오는성경의계시에굴복하여읽는것을살아내는것으로 ‘관상’을통해삶을 “산다”는것이다.
지난 3-4년동안 일부러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통독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도전이 되었던 말씀이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이었고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기를 목표로 했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도전했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말씀을 잘 살아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과 가벼움이 이전보다 내 안에 있다. 말씀을 살아내는 유익을 아주 조금이지만 경험하고 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소개 하고 도전하고 있다. 이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가 자유케 함’을 모두가 경험하도록…
역시 유진 피터슨의 표현과 문장은 너무 재미있고 획기적이다. 방대한 읽기 재료를 적재 적소에 활용하고 탁월한 말장난과 디테일한 표현, 분석과 복선은 지겹지 않고 다음 단락을 기대하며 읽게 한다. 언어의 예술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고의 깊이와 또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 많이 부러웠다. 평소에 생각은 해봤지만 물위로 올려서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어보지 못 했던 나의 내면 깊이에 있던 것들을 여러 곳에서 풀어냈다. 읽을 때 마다 놀랐다. 또한 염화 나트륨과 건조 돼지고기 등의 비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너무 잘 써서 한숨에 마구 읽어 내려가면서도 구성에서는 약간 정리가 안 된듯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부분은 주제와 예화에 전적으로 동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동의라기 보다 이해라고 해야 할까…) 왜 이 주제에 이런 예화가 들어갔을까, 번역이 잘 못된것은 아닐까, 고민한 부분도 있다. 어떤 구성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을 여기 저기에 넣은 듯한 생각이 드는 곳도 몇 곳이 있었다. 공학도로써 구조가 딱딱 맞지 않으면 가끔 읽다가 “왜?”하고 막힐 때가 있다. 저자가 나눠 놓은 단락별로 주제잡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내가 이해를 잘 못 한 걸까? 라고 생각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적으로 동의 되기 힘든 조합의 구성도 있었다.
이 책의 중심내용으로 말하고 있는 상기의 세 가지는 간디가 기독교인들에게 제시한 네 가지를 포괄한다.
간디는 기독교인들에게
첫째, 예수님 처럼 살아라,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타협하지 말라,
셋째 사랑을 강조하라,
넷째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하고
그것들 안에서 장점을 찾을 때 타종교와 문화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다
고 제안한다. 책의 후반부에 가면 스텐리 존스는 힌두교를 연구하고 이해하여, 힌두교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해 진다는 논지를 편다. 그 뿐만 아니라 힌두교 학자도 유사한 결론을 도출한다.
처음 하는 북리뷰라서 여러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정확한 정보 공유를 위해 스터디를 같이 했으면 더 비평적으로 읽고, 나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독자인 내가 저자나 대상국가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읽는 도중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옮긴이의 말’에 저자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것을 모르고 저자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봤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 했는데, 이 책과 저자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내가 교만한 것인가, 책을 제대로 이해 못 했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그 이후로 책 읽는 속도가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대단하다고 하는 것인가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목요 채플’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대로 살고 있지 않고, 그 당시 서구 우월주의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 선교하고 있던 상황에서 저자의 발언이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피선교 국가였던 국가의 기독교인들이 볼 때 (예 : 지금의 한국 기독교인들) 이상해 보이는 과거의 선교 방식이 그 당시에는 보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수업시간에도 교수님이 여러 번 말씀 하셨다. 어쩌면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본질을 흐리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GMTC에서 선교훈련을 받을 때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선교지에서 필요한 자원은 선교지에서’라는 말로 필요한 것이 현지에서 조달된다는 뜻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필요한 인력과 재정이 선교국이나 선교사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현지에서 조달되는 경우들이 있다. 저자도 집단 토론이나 집회를 위한 비용, 장소 혹은 주최를 현지에서 감당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며 ‘선교지에서 필요한 자원은 선교지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러한 저자의 간증이 많은 이들이 선교에 도전할 수 있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본 서의 저술 당시 인도가 거의 복음화 될 것 같은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을 읽던 동학들 모두 지금 인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인도의 복음화 현황을 찾아 봤다. 세계기도정보(2010) 자료에 근거하면, 인도의 범기독교는 5.8%로, 7101만명이다. 1984년 부터는 선교사 비자도 없애 버려서 합법적으로 선교사가 입국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2]
저자가 책을 쓰던 시기는 인도에 민족주의가 성행하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자인 간디의 말이 인도인들에게 영향이 컸다. 간디가 그들 중에 있을 때는 민족주의 운동이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간디가 감옥에 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운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도인들 곁에 작은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저자에게 고백한 것 처럼 ‘예수님이 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까이에 기독교 아닌 타종교가 있다면 곧 그들에게 동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런 인도인들의 분위기를 알았던 저자가 더욱 더 인도인 중에 살고 있는 예수를 강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복음화에 대해 너무 고무적으로 쓴 저자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쩌면 믿음의 고백 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 믿음의 거장을 대단하게 만드는 본이 되는 것 같다. 나도 나의 선교 대상자들을 향한 저자와 같은 믿음과 기대의 시각으로 항상 바라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저자가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것처럼, 시간과 마음의 가장 우선 순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두고 살수 있길 바란다.
스텐리 존스가 인도의 선교사로 18년 동안 섬기던 시점에 쓴 책이다. 저자가 쓴 29권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씌여 졌고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의 선교 초기에는 인도의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층 계급민을 위주로 선교를 했다. 인도 지식인들의 요청으로 선교의 방향을 지식인, 지도자 계층에도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힌두교인 인도 문화내에서 예수님께 반응하는 놀라운 인도인들을 경험한다. 더불어 인도인들 안에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님 처럼 살아야 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스텐리 존스는 1907년 스물 네 살에 인도에 처음 발을 딛고, 1973년 여든 아홉 살에 인도에서 생을 마쳤다. 저자가 사역하던 시기는 인도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본서에서 그들과 교제하는 예화들이 많이 나온다. 시대가 인물을 나은 걸까. 스텐리 존스 또한 1938년에 「타임」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했다.
스텐리 존스가 쓴 책들 중에는 「순례자의 노래」, 「원탁의 그리스도」,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하나님의 예스」 등이 있다. 1972년 여든 여덟 살에 저자가 뇌졸증 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쓴 책이 「하나님의 예스」이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를 읽으면서 스텐리 존스를 평가하는 놀라운 수식어 만큼이나 그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스」가 쓰여진 배경과 내용을 보면서[1] 저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신령한 고통은 기쁨을 낳는다”는 그의 고백에 절대 동의 한다. 말년에 본인에게 닥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맨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하루에 두 시간씩 명상(?)과 기도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보고서야 그동안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가 이해가 되었다.
그는 그저 논쟁 잘 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그가 책에서 고백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전 한 것 이었다.
강연에 쓸 원고를 준비하느라 책상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 논지는 기독교인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수양을 통해 인격적 완성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존경한다. 닮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게 이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이는 인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주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논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간증으로 전해진다고 주장한다. 내 삶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나눌 때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고, 도전하는 것이 간증이다. 저자는 논쟁이 아닌 간증으로 전도하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자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다. 관계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이다. 너와 나 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종교 사이에 미움과 반목이 아닌, 오래 참고 이해하는, 안아주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일성수와 세례의 문제는 뒤로하고 네 마음에 예수님이 인정이 되는가 물어본다. 형식의 짐을 지어 주기 보다 본질을 전하고자 하는 사역자의 사랑의 마음이 보인다. 사랑으로 하는 배려의 또 다른 예는 ‘기도’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무례하게 주면 기분이 나쁘다. 최근에도 많은 선교사님들이 비기독교인들과 헤어질 때 ‘제가 기도 하고 마칠께요’하고 무턱대고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한마디는 인도 뿐 아니라 내가 있던 중국에서도 거절 받지 않던 질문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사랑의 예로, 저자는 책에서 인도를 사랑한다고 여러 번 표현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부분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보다, ‘나는 인도의 양자이다’라고 표현한 곳이었다. ‘낮아짐’과 ‘타인에게 나의 소유권을 넘김’은 정말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그냥 넘겨버린 예수님의 사랑인 것 같다.
나는 ‘C국의 딸’이라고 생각해 적은 없던 것 같다. 그저 C족 선교사들 사이에서 C족 영역에 있는 선교사들을 ‘신C족’이라고는 했다. C족 학생들이 ‘교수님도 C족이에요?’하며 장난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결코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새로운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과 이어지는 주제로 선교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그들이 이해 가능 하게 그들의 몸짓(문화)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장한다. 1938년 탐바람 국제선교협회(IMC) 총회에서 스텐리 존스가 반박했던 주제인 ‘서구 문화 중심’의 기독교를 지양하고 각 문화에 맞게 해석하고 제시하는 복음을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과정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입고 있는 서구 문화가 기독교인 것 인냥, 선교지 사람들이 서구문화를 따르기를 강요했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서양 귀신이라며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스텐리 존스는 이부분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자리(HERE & NOW)에 계시다고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저 인도인이 예수님 이라고 말한다. 룽기를 입은 예수님이 인도의 길을 걷고 계시고, 갓을 쓴 예수님이 조선의 길을 걷고 계신데 선교사들은 무조건 양복에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에 우리가 성공적인 선교사라고 평가하는 허드슨 테일러나, 로띠문 같은 선교사들은 자신의 삶을 현지화, 상황화 하여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 갔고 그들에게 문화보다는 복음을, 형식 보다는 본질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지, 교수님들이 커리큘럼을 잘 짠건지 8장 내용을 보면서 그동안 예배학 때 배운 것(읽은 것 포함)과 교회사 시간에 배운 것들이 머릿속에서 함께 움직여져서 감사하는 책읽기 시간이었다.
한편, 너무 재미있어서 자세히 읽으면서 출판사가 나에게 주지 않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의 책을 너무 성의 없이 출판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내가 아는 분이 번역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출판사에 오타와 중복번역 부분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성만찬에 대해서 크게 수행방법, 성만찬의 경험, 목회를 위한 조언으로 크게 세부분으로 설명하였다. 세 가지 주제 중에서 수행 방법에 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 이지만, 요즘 배우고 있는 초대교회 때 이야기부터 가장 최근 1989년의 정보까지 정리가 되고 있어서 한눈에 성만찬 방법에 대한 역사를 훑은 것 같다.
성만찬의 이해 부분에서는 1975년 브릴리오트가 제시한 감사, 교제, 기념(의미), 희생제사, 신비(임재)의 5가지와 성만찬의 두 가지 의미(성령의 사역, 종말론적 사건)가 추가 되어 정리되었다. ‘성령의 사역으로의 성만찬‘의 의미는 알고 있었는데 ’종말론적 사건으로의 성만찬‘이라는 말은 ’왜 아무도 나에게 이 의미는 안 알려 준거지?‘(알려줬는데 모르고 있었던 걸까?) 하며 읽기를 멈추고 조용히 머무르게 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초대교회처럼 성만찬의 경험 보다 지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1982년 에큐메니칼 문서를 정리한 자료에서도 신비(임재) 부분을 다른 4가지와는 다른 논조로 설명한 것 같아 보인다. 목회적인 부분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건축의 배경, 자리 배치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서 이 책이 정말 ’예배’의 모든 부분을 다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페이지 마다 질문들이 있었지만, 글을 쓰려고 정리하는 상황에서는 큰 숲을 보는 것 같다. 학문의 깊이가 깊지 않아서 단어 정의에 혼돈이 많았다. 책 한권으로 성만찬과 관계된 ‘용어’들을 다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뒷부분으로 가서는 역자가 단어에 대해서 설명을 붙여주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었지만 앞부분에서는 번역이 꼬여있는데다가 모르는 용어를 여러 단어로 표현 하는 바람에 이해하는데 힘들었고, 일부분은 이해를 포기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이쪽 분야의 학문의 짧음과, 깊이 공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시 한 번 경험 했다. 반면에 교회사 시간에 만났던 교부들, 회의들, 시대 배경이 나올 때는 많이 반가웠고 교회사에서 의문이 있었던 부분들의 의문이 해결되기도 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성만찬(주의 만찬)과 애찬(love feast, agape)의 개념과 배경을 좀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책 268-269)
7장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지고 표현되는 형식적인 부분의 변화를 시대별로 설명하고, 형식안에 포함되어 있는 신학의 의미들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앞의 두 설명에 내포되어 있는 목회적 가능성들에 대해 논했다.
교회사 수업을 통해서 교인들이 핍박을 받던 초대 교회 때의 세례 절차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례를 받기 까지 3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았다는 것도, 성찬을 길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형식을 과하게 추가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현대에도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들이 많은 형식을 만들어서 본질을 흐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때는 오랜 시간 훈련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순교를 각오하는 경우가 많았고, 성찬 시간에 성령님이 강하게 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 정죄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서 첫 번째에 거론된 형식의 변화 부분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언급했다.
최근 10년동안 나는 내가 만든 틀(형식)들을 깨는 훈련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 거론되면 우선 부정적인 느낌이 생기는 부작용을 겪고 있는데 세례 또한 사람이 만든 형식이라는 생각으로 읽던 중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방식에 순종하셨다는 부분을 읽었다. (책에서는 ‘복종’이라고 표현했다.) 세례는 이미 세례 요한 때부터 있어왔던 형식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형식에 순종하심으로 권위를 주신 것 이었다.
입교의 과정에는 교육, 신앙의 고백, 세례, 첫 성찬이 있었고 성호 긋기, 안수, 기름부음 등이 추가되기도 했다. 현대에는 특정 교파나 상황에서만 거론되는 ‘축사(축귀)’라는 단어가 초대교회의 입교의 과정에서 나와서 놀랐다. 그 당시 성행하던 이교도와 관계된 것인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으로 안내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입교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신학으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다섯가지 은유인 예수님과, 교회공동체와의 연합, 거듭남, 회개(죄의 용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 논한다. 유아세례와 견진에 대한 이해들과 세례의 의미를 어디에 많이 두는가에 대한 논의를 다루었다. 신학자들이 여러가지 시각으로 논쟁하는 내용덕에 입교의 형식과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본인은 장로교 소속이다. 어릴 때 부터 한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는 관계로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표준인 것으로 알았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세례를 확증하는 것을 ‘입교’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과제를 하면서 견진(confirmation)이라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배학 수업을 통해서 평소 생각하지 못 했던 목회와 예배에 대한 욕심들이 생긴다. ‘세례 갱신’이라는 단어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세례 갱신 예배나 재확증 예배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이번주는 부활주일로 본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한다. 지난주에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이번주가 첫 성찬식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입교식의 마지막 순서가 첫 성찬식이 되는데 그때의 감격이 우리 교회에서 첫 성찬식을 하시는 분들께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부르신 곳에서 순교를 감당하는 진짜 신자들이 되기를 바래본다.
시간을 쓴다는 것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력이 예배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가 인정된 이후에 성경에 기록된 시간과 장소에 맞는 예배가 필요해 지면서, 4세기경에 교회력이 정리가 되었다.
초대교회는 ‘시간을 조직화‘(p60)하여 부활절을 해마다의 사건이 되게 했다. 초대 교회 이후에도 16세기 개혁자들이 변화를 시도 하였고 지역별로도 많은 변화들이 시도 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순교자들의 성일까지도 절기로 지켰었는데 이런 축일들은 하나님 말씀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웨스트민트서 디렉토리, 스콜들랜드 교회) 이유로 폐지 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개신교에서도 다양하게 변화가 있었으나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대축일(Solemnities)에 대해서만 큰 틀에 합의하고 나머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교회력의 중점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과 성령님을 통해 계속 일하고 계심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교회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알려주는 ‘은총의 교회력’(p78) 이다.
초대교회의 교회력은 크게 일주일, 일년, 하루를 단위로 했는데 일주일은 매주일의 첫날을 주의 날(부활의 날)로 정하여 예배하는 날로 하고 이날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고 만찬을 나누었다. 하루 3번 주기도문을 하고 하루를 밤부터 시작하였고, 일년 중 부활절과 주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4세기의 교회력에서는 성육신의 목적전체를 표현하는 주현절(Epiphany)에 대강절(Advent)을 포함해서 크리스마스는 주현절 행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순절(Lent)은 참회의 수요일에 시작해서 사순절 첫째 주일부터 다섯째 주일까지 이며, 부활절 전야에서 시작되어 오순절에 끝나는 부활절(Easter)이 포함된다. 오순절은 부활절 후 일곱째 주일이다.
교회력이 예배를 위한 기초가 되어 예배의 고유 순서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성구집(The Lectionary)은 설교의 기초로 사용된다.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초교파적인 성구집이 생겨났고 1983년에 A,B,C 3년을 기준으로 하는 표준 성경일과(Common Lectionary)가 출판 되었다. 이러한 성경일과를 통해서 몇 달 혹은 한해 전에 예배를 미리 준비 할 수 있다.(p90)
나는 너무도 틀에 박힌 사람이었다. 본문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받아들일 때 자유롭게‘(p78)는 은혜를 선교지에 가서야 경험하고 이제 조금씩 그 틀을 벗어던지고 사랑 안으로 점점 흡수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 있다 보니 이제는 또 너무 ’틀‘을 불편해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교회력이 굳이 왜 필요할까 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대 교회의 여러 실수들, 현대 교회의 부패들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들을 우리는 자꾸 인간의 규칙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중요시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와 욕심으로 인해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믿음의 선조들이 고민했던 것처럼 이렇게 절기를 만들어서 매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을 통해 회복되고 부흥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전도한 친구들은 시간이 많이 흘러야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던데 초대교회의 새 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면 저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란 고민을 했었다. 이번 교회력 내용을 보면서 부활절 절기 기간 동안 세례를 받을 사람들에게 강도 높은(?) 교육이 병행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대는 이전처럼 사람들이 영적인 것이나 정서적인 것에 시간과 물질을 쓰기를 꺼린다. 과연 이 시대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대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께 은혜를 구한다.
문화를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사전적 의미로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이라는 것도 적절한 듯하다.
예배 또한 개인이나 집단의 정신적 산물로서 각 시대와 환경에 맞는 변화들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화”는 필요하지만 본질의 확립을 위해서 ‘기독교 예배’가 무엇인가(p20)를 분석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3가지로 접근을 했다.
첫째는 현상학적 접근으로 예배에서 하는 행동들을 분석함으로써 예배의 방법과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 공간 배열과 기본형식과 예전 형식들을 살펴본다.
둘째는 ‘예배의 본질’(p21)에 대한 분석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 어떤 행위들이다. 예배는 사람이나 하나님 혼자만이 아닌 양방의 반응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는 예배의 언어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배를 표현하거나 사용된 단어들 안에 ‘서비스’(p32, 33)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3가지 접근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예배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다양한 표현들(p39)을 분석하는데 여기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른 문화의 영향이 많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문화에 기반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예배 안에는 기본적인 형태의 일관성(p47)이 존재한다. 그럼으로 그 시대에 맞는 예배집(Service Book)(p48)들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고 이것들을 통해 공동체가 각 개인(?, 소집단?)들에게 시대에 맞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연구했지만 역시 예배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교류인 것 같다. 예배에서 두 요소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예를 들어, 보이는 사람 말고 하나님이 빠진다면 그것이 쇼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 예전에 대해서도 이전까지는 사람이 만든 틀로 인해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 왜곡된 역사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사람이 정한 형식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했지만 첫 시간 교수님의 설명이 머리에 깔려 있기도 해서 그런지 예전집들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긍정적 사고가 추가되었다.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잘못 생각한 것들이 있다면 더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감사 가득한 교통하는 예배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횃불에 와서 4번째 수업이었는데 토요일 하루 종일 앉아있고도 너무 행복한 시간이라는 마음이 들었던, 신학이 재미있다는 마음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횃불에서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길 기대한다.
책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금식 명령이라 해석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셨던 것이 자기 능력의 금식이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금식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는 것인, 금식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또 새벽 2시이다. 밤 늦게 까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부터 인가 늦게 까지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최근 두주 월요일이면 밤 늦게 까지 과제를 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사실 오늘 밤도 미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믿음으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잠을 이길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인정 때문이 아니라, 내 편의를 위해 자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의지력이 없어진 내가 이해가 안되면서도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교지에서는 일이나 수업준비를 안하고 ‘그럼 저 잘 테니깐 책임지세요’하고 자버린 후에, 정말 하나님이 자주 책임져 주셨던 기억이 많은데, 한국에 와서는 자버리고 나서 결과가 안좋았다. 특히 히브리어 수업시간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약 이주 전 부터 나에게 연구 과제로 떠오른 주제는 ‘나르시즘’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의 행복과는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사랑’에 근거한 욕심과는 구분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도 정리가 되질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는 심리학의 나르시즘 검사도 받아 봤는데 그것은 그리 관련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사람들이 창조물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제기했다. 그런데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정말 금욕하고 불편하게 산 사람들에게 은혜가 컸다. 그것도 계속 여쭤보고 있다.
나의 목표는
특별하게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누리는게 아닌
일상에서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초기 기독교의 영성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처럼 금욕하고 고생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일반인 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게 아닐까?
몇 년간의 나를 관찰해보면, 너무 속상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sign과 내가 바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에서 핀트가 안 맞는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일부 있는데 이것인가 저것인가 주저하다 추진하면, 이게 아니고 저것인 경우들이 있었다.
최근 분석 결과,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강한 ‘자기사랑’ 이었다.
나의 나르시즘 문제를 후배에게 말했더니 나도 나르시즘이 있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나도 모르게 가면을 강하게 쓰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 나를 너무 아끼고 있는 부분들을 점검하고 있다. (너무 많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을 미루고 잔다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자고 싶은 욕심의 가면일까….
Y대에 있었던 시간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한국에서 보다 많이 확보 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당시 공중 예배에서 지금 손을 들어야 할 것 같을 때 성령님께 순종하기 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부분이 컸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Y대에 있는 동안 말씀을 보던 시간이 기도가 되고,
기도로 머물렀던 시간이 예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손에서 두손으로,
두손에서
(요즘에는 앉아서 기도하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요즘은 혼자 예배에서 벌떡 일어나던 것이 공중 예배에서도 벌떡 일어나게 되어서 자리를 잡을 때 구석으로 잡거나 일어나기 편한 맨 뒷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처음 두손을 들게 됬던 때는 여러가지로 힘든 상황이었다. H* 선교회(소속 선교회) 총회로 모임 중에 찬양을 하는데 ‘왕께 만세’를 불렀다. 그때 찬양을 하면서 만세의 의미를 알았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해요.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 이후로 만세가 쉬워졌다. 경배와 찬양의 의미의 만세도 있지만 힘든 시기에 두 손을 들게 되면서 경배의 손들기도 당연히 쉬워졌 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중요성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청년 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들의 믿음의 야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예배가 힘든 이 땅에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 인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전에 당연히 여겨졌던 성경공부도 다양한 영적 모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배 전에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도 중요하고 예배 후에 각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나누고 간증하므로 자신과 타인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는 시간도 중요하다.
공동체에서의 나눔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견고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핸드폰을 이유없이 만지작거릴 시간은 있지만 이러한 모임을 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지난 금요일에 담임 목사님과 면담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말씀에 노출되어 있는 나는 주일 예배 때 부어주시는 은혜가 많다. 하지만 같은 예배이지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담임 목사님은 주중의 시간이 주일 예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말씀을 해 주셨고 책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 부분은 회중이나 인도자나,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새벽 2시이다. 마지막으로 5장 안식일 되찾기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Y대 졸업생 중 대부분이 대학원 생인 관계로 그들이 늦게까지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을 찾으라는 말을 했으면서 지난주는 내가 그렇게 못 살았다.
매 순간 아버지께 물어 보며 스케줄을 잡는데, 자기를 꼭 만나는 것이 선교사로서 맞는 것이라는 투의 후배의 말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저 끌려가듯이 만났는데, 5장을 읽으며 그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시간에 많이 쫓겨 살았다.
그만큼 내 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Y대를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며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학습해 주셨다.
한국에 와서도 강의 준비를 하는데 기름 부으심이 없어서 ‘왜 그런 가요’ 물어보며 억지로 강의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수강변경으로 강의를 안해도 되는 날이었고 결국 오랜 시간 고생해서 만든 강의안은 그날 필요하지 않았다.
만남도, 공부도, 강의도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헛고생이라는 교훈을 또 얻었다.
이 교훈을 너무 자주 배우는 건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 듯싶다.
지난 약 3-4년 동안 이루어 주시 길 간구했던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매주 토요일에 Y대 졸업생 몇명과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시작은 성경공부였는데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적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모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인가 성경공부 ‘교재’보다는 ‘교제’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지난 목요일에 횃불 오는 길에 꽃들이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토요일에 같이 꽃구경 가는 것을 제안했더니 졸업생들이 양재 시민의 숲으로 일정을 잡았다.
컴퓨터 하는 친구들이라 일을 안 할 때도 머리속에서는 계속 일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몸이 항상 피곤한데 그날 한 졸업생이 해외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자유함을 누린 시간이었다.
해외 여행을 온 것 같다고 학생이 말할 때 마다 나는 지금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이라고 번역했다. 몇 년 전에 동역자들과 함께 내몽골에 간 적이 있다. 푸른 초원을 달리는 내내 우리는 찬양을 틀고 있었다. 4명이 함께 하는 여행에 나는 홀로 예배했고 푸르고 아름다운 초원을 달리던 중 아버지의 선물과 위로 때문에 계속 눈물이 났다. 그 바람에 우리는 차를 멈추고 각자 예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글을 쓰고 며칠동안 "왜 요즘 나는 그때 처럼 길에서 예배하지 못하는 걸까" 고민하게 됬다.
바쁜 것, 분주한 것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 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데,
나는 바쁘다고 아버지를 보지 않고,
묻지 않고 혼자 뛰어간다.
혼자서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힘으로 하려는 나를 보며,
나도 힘들다.
로마서 1장 20절 말씀을 모른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을 보며 창조자를 기억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성 프란시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하늘을 보며 나무를 볼 때 창조주 앞에 조용해 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예배이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가 친밀하다는데, 이상하게도 가족이 불화하고 분열되고 한 교회안에서도 나눔과 분열이 있다. 성 프란시스는 새들, 꽃, 심지어 사람을 공격하는 늑대와도 화목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하기에 원수와도 사랑하고 이해하는 관계가 되는 것 같다. 이것이 창조세계에서 인격적으로 내가 직접 하나님을 경험 한 것의 징조이지 않을까. 프란시스 처럼 동물과, 원수와 화해 하는 것까지는 안되더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만큼 살수 있으면 좋겠다.
대니얼은 사물을 잘 관찰하라고 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을 잘 관찰한다. 그래서 각 사람의 삶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에게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묻어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럴 때 그를 환대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모두 한자녀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닐까. 대니얼이 말한 것 처럼 사람도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영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한사람 걸러 아는 사람이거나 나와 관계된 사람인 경우들이 많았다.
요즘 큐티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언약을 받으러간 사이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한다. 모세는 리더답게 중보자 답게 하나님 앞에 목숨걸고 관계회복을 위해 설득하고, 하나님은 모세가 원하는 모든것에 응답하신다. 나의 죄악중에도 아버지께서 모세에게 하신것 처럼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이 세상의 삶에서 함께 해주시길, 또한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버지께서 함께 해주시길 바라는 기도밖에 할수 없다. 범죄한 이스라엘과 결국 가나안까지 함께 해주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버리지 마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함께 해주시길…
멘토를 정해야 하는 시기에 자꾸 연락이 오던 (장)목사님이 있었다. 경험이 많으셔서 말이 많으신 분이라 이야기를 듣기 보다 많이 하신다. 영적으로 많은 진보가 있겠지만 교수님이 요구하는 조건에서 약간 벗어날 듯 하여 다른 분을 멘토로 정했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이분을 만나면서 내적으로 큰 회오리 바람이 쳤다. 그중에 하나가 ‘말씀‘이었다. 학교를 진학하고 강의자리가 생기는 휘몰아 치는 그 시기에,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받아들인 것처럼 나도 그냥 아버지와의 깊은 확인 없이 진학도 강의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1월 이후로는 말씀으로 확증 받으며 움직인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공부에 쫓기지 않고 아버지와의 만남을 최우선에 두고, 그 어떤 것도 우상으로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한 공부였지만 쫓기지는 않았어도 공부의 우선순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왔던 것 같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시즌을 만나며 ’말씀의 떡 씹기‘ 부분이 꼭 나에게 아버지께서 지금 먹여주시는 말씀인 것 같다.
말씀을 보거나 독서를 할 때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있다고, 나의 상황과 환경을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듯 말씀하실 때가 참 많았다.
교재에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습득하는 첫 단계와 통찰이 있는 두 번째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에 깊이 빠져 들어 읽어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통찰로 들어가는데 학기가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말로는 계속해서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했는데 실제로 나는 말씀 가운데 머무는 시간이 없이 형식적 말씀 읽기, 임무 완수용 책읽기였다.
여유 있는 시간과 여유 있는 장소, 나의 일정을 내려놓고 아버지 앞에서 고요히 있어야 했는데 나는 모든 시간에 ‘철저하게 타인’이 되지 못했다. 이번 독서 내용과 목사님과의 만남은 아버지의 열심의 결과 인 것 같다.
주중의 QT 본문은 출애굽기 성막 만들기 였다.
말씀을 따라 읽어 가면 대충의 도면을 그릴 수 있고 머릿속으로 상상이 가능하게 하나님께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나의 삶에서도 지금까지 그렇게 인도해 오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얼마 전 초대 교회의 역사를 공부할 때 만해도 고난에 대해서 동의 했다.
하지만 지난주 내가 한번 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당했을 때 아버지 앞에서 계속 의아해 했다. 분명히 몇 주 전만 해도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라고 나 스스로 고백했는데 삶속에서 만난 진짜 난관 앞에서 나는 ‘왜 고난이 꼭 있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지난주일 설교와 장목사님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답을 (묻지 않았는데도) 재차 듣게 되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을 디테일 하게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디테일 하게 인도하고 계시고,
나는 순종하면 된다는 믿음이 지금 내게 참 많이 필요한 시기다.
제대로 듣고 잘 순종하고 싶다.
이번엔 말로만 ‘듣겠습니다’가 아니고 진짜 아버지 앞에 깊이 머물러 듣고, 누리며 이 시기를 보내고 싶다.
자기(나)의 틀에 하나님을 끼여 맞추고 그것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내가) 기도하면서 갖는 환상인 것 같다.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도 단지 나의 느낌이 우선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에 근거한 임재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소리를 잠재우고 아버지를 깊이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작가가 말 한 대로 말씀을 읽고, 침묵가운데 머물고, 영적인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해 질 때 상처 입은 내가 치유자가 되고 상처 투성이인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작가는 영적 안내자로서 헤시카주의(p168)의 영성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헤시카주의의 순례자였던 농부는 자기 입에서 나오던 반복적인 기도에서 마음이 말하는 것에 깊기 귀 기울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함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분주함과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내 마음 깊이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집단들을 만들어내고 찾는 것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답이겠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살길이라고 알려줄 만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지난주 예배학의 과제가 안덕원 교수님이 본인의 스승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 제출하는 것이었다.
딱딱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던 예배학 수업이 내가 아버지께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맞습니까‘라고 하던 질문을 멈추고 웃게 만든 수업이었다.
그 과목의 주 교재를 쓴 분에대해 그 직속 제자가 쓴 글을 보면서 학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보다 후대들의 평가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그 글을 보면서 그제야 내가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배우는 과목에 투자하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고 자료를 만드는데 기름부으심이 없이 많은 시간이 들은 이유를 멘토와의 이야기 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은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 서있었던 내 마음의 자세가 문제였다.
MDiv 과정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공부에 기름부으심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3시간밖에 못자고 밥도 한 끼밖에 못 먹는 강행군속에서도 밤 10시까지 하는 수업에 한 번도 졸은 적이 없고 책을 읽을 때는 (전공과 다르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하기 위한 전공 수업준비는 (처음 가르치는 과목이라 공부할게 많긴 하지만..)
너무 은혜가 없고 매말라서 수업준비 할 때 마다 힘들었다.
예배학 숙제 읽기와 나의 ’강의의 고난’의 핵심은 주인이 ‘타인’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에는 밤 12시까지 하던 수업준비가 오늘은 7시경에 끝났다. 오늘 수업준비가 완벽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준비하는 과정이 예배였다.(전공 준비하면서 속상해서 운거 말고 이렇게 울어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든 삶과 순간에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더 집중하므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고 싶다. 거룩한 습관들이 내 삶에 뿌리 내리게 되면 참 좋겠다.
4장 초반에서 이야기 하는 만남에서의 긴장, 공포와 적개심이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요즘(한국 입국 2년차, 서울) 길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과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내용이다.
2001년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가 그런 적개심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이 내용을 모르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고독을 즐기며 주님과의 밀회를 우선시 하게 된 요즘 나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남에서의 긴장과 공포가 아니라 처음 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내 마음의 자리와 여유인 '환대'가 아닌가 싶다.
성인의 무릎밖에 키가 안 되는 아가가 걸어가고 있는데 아가와 상관없이 자기 길을 급히 가다가 아가를 넘어뜨릴 뻔한 아주머니 (아주머니 말로는 아들에게 우편물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아들이 중요했던 거다.)를 향해서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나를 보고 놀랐다.
5장 환대의 형태에는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치유자와 환자를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Y대(선교지의 대학)를 떠나서 일년만에 다시 학생들 앞에 서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데 책의 이 부분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10여 년전 한국의 대학생들 앞에 설 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무언가 주어야 한다'는 몰입에 빠져서 여유 없는 주인, 혹은 손님을 혼자 둔 주인이었던 것 같다.
Y대에서의 10년을 지내고, 홀로 조용히 아무것도 안하고 아버지 앞에 머무는 일 년을 지내고 난 후, 지금 학생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을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나에게 생긴 것 같다.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시간과 여유를 주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여유를 드리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 같다.
6장의 생각과 마음의 가난과 연약함을 자랑함은, 책을 처음 읽은 2001년에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고 물음표를 남발했던 부분이다. 이제는 책을 읽으며 그 물음표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2016년 한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늘의 비밀들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가난을 경험하게 하시고
더 낮아지게 하심으로
하늘나라와
더 가깝게 인도 해주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작년 한해를 돌아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큐티 본문이 출애굽기이다. 23장부터의 이번 주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며 만남(예배)을 준비하게 하신다. 매번 매일 큐티를 통해 ‘내가 할게, 내가 알려줄게’ 하시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시간동안은 혼자 분주하고 불안하다가 말씀을 떠올리며 평안을 되찾고 그 리듬을 타기(마11:28-30, 메시지성경)를 반복했던 한주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계속 ‘함께 가자’(아2:13)고 말씀 하시는 아버지께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다.
2001년 당시 나의 성격을 보여주듯이 빼족한 볼펜으로 자로 대어 줄을 긋고 포스트잇으로 중요부분에 표시를 해놓은 것이 보였다.
2017년의 나는 노란색 두꺼운 색연필로 삐뚤거리며 책에 줄은 긋고 있었고, 보고서에 남길만한 주요한 부분의 책장을 접어놓고 있었다.
나의 영적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헨리 나우웬의 책을 다시 보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큰 외로움을 아버지 앞에서의 깊은 고독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20대 때는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보호 경계선’(p33)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다. 친밀함과 자유 함이 함께 할 때 더욱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감.. 어쩌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유하지 못하고 스스로 묵여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마음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음에도 나 스스로는 인간이 만든 규칙과 철학을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처럼 묶여 있었고 그래서 더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만 머물렀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청년들의 외로움들을 보며, 외로움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들을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기 가게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서, 매체에서 답을 찾으려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헨리의 제자가 고백한 것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은 내가 바로 지금 성령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내가 먼저 그것일 잊지 않길 기도한다.
지난 주중 세계기독교 역사 수업의 과제로 초기 기독교시대의 책을 읽고 reflection 작성과 수업을 거치면서 작년 10월 부터 집중해 있던 말세 기독교인들의 고난과 믿음에 집중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친구들과 본 영화 ‘silence’, 금요심야와 청년 예배에서의 메시지가 모두 동일하였다. 말세를 준비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아버지께서 바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내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일 것이라는 마음에 지금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요즘 강의준비와 횃불의 수업과 숙제를 해야 하는 바로 지금(here), 나에게(now) 동일한 믿음으로 살 수 있겠냐고 아버지께서 물으시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문이 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이성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Ⅳ.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
본문에서는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영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는 개인의 경험과 체험을 자신의 신학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데 직관은 종교 체험에 핵심적 전제이며, 감정은 직관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심리학, 종교학,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의 경험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직관과 감정을 거론하게 된 계기를 칸트의 인식론으로 본다. 인식 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로 직관과 감정을 제시하며, 직관은 종교 체험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토대의 기초가 되며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종교 체험에 관한 핵심적 전제가 된다. 독일어에서 슐라이어마허가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直觀)은 ‘철학의 용어로,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거나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등의 생각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6년 셀링(F. Schelling)에 의해 직관이 인간의 지적 기능으로 밝혀지면서 슐라이어마허가 직관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종교를 형이상학으로부터 구분하기 어렵게 되므로 『기독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그의 후기신학에서는 직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론』에서의 직관은 피히테와 셸링의 ‘지적 직관’과 대조하여 ‘감성적 직관’으로 규정한다고 최신한은 설명한다.
『종교론』의 둘째 강연인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직관에 대해 주로 다룬다. “종교는 우주의 영원하고 이상적인 내용과 본질에 대한, 그리고 무한자와 시간적인 존재(유한자) 가운데 있는 영원자에 대한 경건한 직관이며 느낌이다.”라고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한다.
감정 없는 직관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러한 직관은 올바른 근원도, 올바른 힘도 소유할 수 없다. 직관 없는 감정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은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서로 분리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무엇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 무엇인 것이다. 모든 감각적 지각이 나타나는 저 비밀스런 순간은 직관과 감정이 아직 분리되기 전에 있으며, 여기서 감각과 그 대상은 ..서로에게 흘러들어가 하나가된다... 이 얼마나 묘사하기 어려우며 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버리는지 나는 안다.
이러한 설명 후에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데, 편집자인 오토는 이 부분을 슐라이어마허의 영원자의 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라고 설명한다.
... 이 순간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 자체이다. 빠르고도 신비스럽게 한 형상과 한 사건이 우주의 형상으로 전개된다. 이 현상이 형성됨과 같이 나의 영혼은 늘 찾아오던 사랑스런 형태로 피해 들어간다... 성스러운 존재 그 자체와 같이 포용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눕는다. 이 순간 나는 이 무한한 세계의 영혼이다.
이렇게 무한자와의 계시나 대면인 종교는 신을 기술하는 형이상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종교만의 고유한 자리로 서기 위해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에 속할 수 없다. 이는 종교를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만 도덕적인 종교라고 주장한 칸트에 대한 반박으로도 해석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기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려고 한다.
위의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에서와 같이 『종교론』에서 말하는 직관은 우주에 대한 수동적 형태로서, 우주는 라틴어“Universum"로, 세계전체(Weltall-모든 세계)로 번역된다. (이러한 의미로 범신론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그는 ”만물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범신론의 오해로 부터 벗어난다.)
창세기를 예로 들어 신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을 걸어도 그가 신에게 화답하지 않았기에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직관의 주체는 능동적 활동성을 가진 우주이며, 개별적이고, 구별되고, 직접적인 지각으로 존재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신’대신 사용하는 ‘우주’개념은 스피노자의 ‘실체’와 관계가 있다고도 해석한다. 그가 ‘신’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사용하는 신 개념이 도리어 사고를 협소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신한은 ‘우주’가 ‘신’개념을 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주’는 ‘신’ 개념을 넘어서는 진정한 ‘무한자’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 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우주와 관계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사고와 의지로는 신에게 도달 할 수 없지만 신의 영역에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직관과 감정이며, 그 것 또한 순간적으로 접촉되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도 없으며, 직관하는 개인은 무한자의 일부만 파악 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종교의 경지는 유한자와 무한자가 접촉하는 바로 이 순간이다. 진정한 생명은 유한자가 무한자와 함께 있을 때 가능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이 유무한의 합일의 순간은 감성적이다.
스피노자의 합일은 이성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성적 직관이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이면서도 고차원적이다. 또한 칸트의 이론적 직관을 능가하는 체험적 직관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감 능력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한다.(오토는 보편적인 모든 사람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한자를 직관하려는 욕구를 상실한 이는 어떠한 시금석도 소유하지 못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매 순간 우리에게 계시된다...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관과 감정이 모든 곳에서 흘러 넘치고 있으므로 겸손과 인내로 모두에게 관용적이어야 하며,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감정의 강도, 갈망이 간절할수록 중단됨 없이 무한자에게 사로잡히게 되므로 경건한 감정을 길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직관들 중 자연과 인간성 영역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개하고 독자들에게 종교를 먼저 소유하고, 그 종교를 의식해보라고 제안하므로 마무리한다.
감정에 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리했던 것들과 유사하게, 경외, 겸손, 사랑, 감사, 연민, 통회 등의 감정들을 대표적으로 말하면서 이외의 다른 모든 감정들도 종교라고 말한다. “감정이 종교의 가장 고결한 부분”인데 이러한 고결한 감정들이 생길 때 그것을 도덕의 자리에 내어주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주를 직관하면서 생기는 의식으로 직관이 무한자를 향해 개방되었다면, 감정은 직관이 심정에 남기는 흔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감정은 유한자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유한자 입장에서는 도덕적 행위로 인한 자발적 동기가 작동하지 않는 순수하게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이런 행위를 유발하려고 하고 충동질한다면 미신으로 빠지게 될 것을 경고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종교가 “교리적인 종교”가 아니고 “철저한 가슴의 종교”이며, 그에게 있어 교회는 “모든 인간 제도들과 관심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야한다”고 고백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 였던 그의 상황에서, 교리중심의 기독교로 인해 지식인들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기독교를 바르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종교는 맹목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초월적 체험이고, 그 초월적 체험을 통해 늘 무한자를 향해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영성”의 창시자인 샌드라 슈나이더스가 말하는 영성의 정의와도 맥이 통한다.
Ⅴ. 나가는 말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으로 종교를 규정하고 『기독교신앙』에서 경건한 심정과 절대 의존 감정으로 신앙을 전개하므로 슐라이어마허는 ‘경건한 감정’의 신학자가 된다. ‘기독교 영성’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기독교 신학자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단지 부흥현상의 관찰과 분석 차원에서 감정을 다루었다면, 기독교(종교)와 신앙의 정의 차원에서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기독교 영성에서 강조하는 경험과 ‘영성지도’에서 주요한 도구인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발견하였다. 앞으로 기독교 영성분야에서,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하여 연구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교양인’이 누구일까에 집중 하기 보다,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에서 교양인들의 무시를 받은 신앙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던 그의 열망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절대자와의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spiritual but not religion)라는 작금의 세대에게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 많이 오해되어 있는 슐라이어마허의 이론이 제대로 한국 교회에 소개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꾸준히 슐라이어마허를 소개해 오신 많은 신학자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종교론』에서 “세계를 직관하고 종교를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은 먼저 인간성을 발견해야”, “인간성 자체는 여러분에게 고유한 우주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성 자체가 우주에 관계하고 개별자와 일자 사이의 중간자이면서 무한자에 이르는 휴식처라는 표현으로 인간성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연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2007년 한국에서 출판된 론다 번의 『시크릿』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우주의 기운’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부류의 책들에서 말하는 ‘우주’가 슐라이어마허의 ‘우주’개념과 연결되어 있는지 조사해 보고 싶다. 슐라이어마허의 ‘우주’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같다고 했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조금 더 깊이 알기위해서는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아마 스피노자를 공부하다 보면, 론다 번이나 가브리엘 번스타인 등의 우주의 에너지와 관련된 책들과 맛닿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용어의 정의를 하고 진행하고 싶었는데 너무 다룰 것들이 많아서 일일이 정의하지 못하고 진행한 부분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논문을 접하면서 (이전에 교수님이 한번 지적하신,) 주제가 자주 산으로 가기도 했다. 실은 『기독교신앙』에서 ‘절대 의존 감정’까지 정리하던 도중에 포기했다. 너무 모르는 분야라 방대한 모든 부분을 알고 싶어 하던 나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여 논문의 질이 많이 떨어진 부분이 아쉽다. 국내의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독일어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번 슐라이어마허의 책을 읽으면서 왜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의 글에 대한, 이러저러한 다양한 해석을 읽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영감 있는 설교자로 주목 받았던” 그가 설교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생한 표현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독일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된 기간이었다.
몇 년 동안 슐라이어마허를 한번 공부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신학교 최종 졸업하는 마지막 학기에 처음으로 인간론 수업에서 정식으로 소개를 받고 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학교와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슐라이어마허, 『기독교신앙』, 최신한 역. 서울: 한길사. 2006.
슐라이어마허. 『종교론』. 최신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차자료]
Green, Barbara. “기독교 영성에서의 구약,” Arthur Holder, 『기독교 영성 연구』, 권택조 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문이 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이성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들어가는 말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 Berkeley)에서 기독교 영성학 박사과정 프로토콜의 기초를 닦은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Schneiders)는 영성의 정의를 “한 개인이 인식하는 궁극적 가치의 지평을 향한 자기 초월을 통하여, 삶의 통합을 위한 과제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험”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성에는 경험이 수반된다. 경험들이 쌓여 관계가 형성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민감한 도구들로 몸, 감정, 정신 등이 있다. 기독교 전통가운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영성지도’가 있다. 이는 어떤 개인이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의사 전달 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렇게 의사 전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고, 그 관계에 뿌리를 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타인이 개인에게 베푸는 도움이다. 영성지도에서는 개인의 기도, 말씀 묵상 등을 가지고 진행하기도 하지만 경험의 도구가 되는 몸, 감정, 정신들과 관련된 정보들을 중요하게 다룬다.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낀 감정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해석과 교리 배후에 있는 인간의 경험과 느낌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개신교 최초의 신학자이다. 본인이 전공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의 ‘영성 지도’에서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전의 논문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했고, 이번에는 신과의 관계를 직관과 감정으로 풀어낸 슐라이어마허를 연구하고자 한다.
영미권의 청교도 기반의 칼빈주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에서 두 번의 대부흥을 경험하며 참된 신앙을 이루는 여러 가지 마음의 정서들을 『신앙과 정서(The Relgious Affections)』에서 제시한다. 청교도 신학자로서, 기독교의 탄탄한 교리들과 미국 대부흥의 현장을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참된 신앙의 정서와 거짓된 신앙의 정서들을 분류한다. 에드워즈는 정서란 감정과 의지가 내포된 의미로 행위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일반 부흥사들 같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하버드의 진보적 학자들처럼 메마르지도 않았던 그는 그 둘의 긴장 관계 속에서 감정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인간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내적 감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상의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탄탄한 신학위에서 기독교에서 감정의 역할에 대해서 논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국가 종교상황에서 교리적, 형식적이 아닌 실제적 믿음의 도전으로 신학에서 감정을 화두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말하는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면서 기독교 영성과 슐라이어마허와의 접점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Ⅱ. 슐라이어마허의 생애
칼 바르트는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무엇이 그의 견해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슐라이어마허는 너무 함축적으로 말을 해서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평가된다. 그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찰스 하지(구 프린스턴 교수, 1797-1878) 또한 그의 사상이 너무 애매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도 했고, 60년 넘게 슐라이어마허 신학을 연구했던 칼 바르트도 그의 신학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할 정도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 국내에서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입장은 주재용, 최신한 등이 있으며, 개혁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부류는 목창균, 박형룡, 서철원 등의 보수 정통 신학자들이 있다. 본문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가족 배경과 성장과정, 그의 업적 등을 살펴본다.
배경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혹은 슐라이에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개혁교회 목회자 집안에 1768년에 태어 났다. 조부인 다니엘 슐라이어마허 목사는 샤움부르크의 궁정설교자였으며, 경건주의 운동을 지지했고 아버지 고틀리프 아돌프 슐라이어마허 또한 경건주의 설교자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경건주의에 대해 의심하면서 계몽주의적 관점을 가졌으며 군목으로 활동했다. 외조부와 외증조부 또한 베를린의 궁정설교자였으며, 외삼촌은 할레 대학교 신학부 교수였다. 슐라이어마허의 두 번째 이름은 조부, 세 번째 이름은 외삼촌 사무엘 에른스트 티모테우스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부친이 모라비안 공동체와의 교제를 통해 신앙적인 각성을 먼저 체험하고 1783년(약 14세 때)에 가족모두와 함께 7주간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 슐라이어마허는 회심을 체험한다. 15세에 니스키의 모라비안 교단의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철저한 경건 훈련으로 깊은 종교적 감화를 받는다. 기숙학교 입학 전 11주 준비과정동안 중요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냉철한 사람을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로 만들어주는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실체를 체득한다. 종교론에서 발견되는 ‘개인성’에 대한 강조는 개인의 내적 체험과 새로운 내면의 형성을 중시했던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청소년기의 경험에 토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학업과 업적
1785년 9월에 모라비안 교단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재학 중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비판정신에 눈을 뜨면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1787년 봄부터 할례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다. 그는 에버하르트에게 그리스 철학, 고전 문헌학,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배우면서 1788년과 1789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하고,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1789년 할레 대학 졸업 후 신앙이 흔들리고 건강도 안 좋은 상황에서 1차 목사고시를 치르고 1793년까지 백작집의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신앙도 회복되어 1794년에 2차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개혁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1796년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원목으로 부임하면서 목사고시 시험 감독관이면서 앞으로 자신의 책의 검열관이 될 쟈크, 슐라이어마허에게 영향을 끼친 동료 설교자 슈팔딩, 편지로 계속 정신적 교제를 나누게 되는 문학 살롱의 헨리에테 헤르츠, 슐라이어마허에게 학문적 자극을 주는 슐레겔 등을 만나게 된다. 슐레겔등과 베를린 낭만주의 모임과 밀접한 교분을 쌓으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독일어로 옮길 시도도 하게 되고 1799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종교론』의 열매도 맺게 된다. 『종교론』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사상이 잘 나타나있다.
1802년에 시골 도시의 개혁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독일어로 번역하므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 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고, 독일의 플라톤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플라톤 연구는 슐라이어마허 개인적으로 독창적 사상형성에 영향을 미쳐 기계론적 윤리관을 거부하고 낭만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1804년에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와 설교자로 부임하고 1806년에 『성탄축제』를 저술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프러시아 침공으로 할레대학을 폐쇄하자 1807년에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가 1808년 베를린 대학교의 건립과 관련하여 대학을 강의 중점 학교와 연구 중점 아카데미의 매개 기관으로 규정하는 『독일적 의미의 대학에 관한 단상』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중요설립자로 기여하여 1810년에 신학부의 초대학장이 된다. 1809년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로 지명되었고,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초빙된다. 1834년 2월 12일에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기 열흘 전까지 이 교회에서 설교자로 섬긴다.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와 철학부에서 강의하면서, 피히테와 헤겔의 강의보다 학생들에게 더 인기 있었다. 1821년에는 개신교 신학의 역사에 획을 그은 『기독교신앙』을 발표한다. 이렇게 교수, 학술원 회원, 설교자 외에도 정치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프로이센 개혁에 앞장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1808년에는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는 민중봉기를 준비하기도 했고 프로이센 궁정의 밀사 업무를 하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도 영향을 끼쳐 공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프로이센 교육개혁에 관한 평가서를 작성한다. 『프로이센 신문』의 공동편집자이기도 했던 그는 1813년 검열과 관련하여 정부와 갈등도 있었고 학생운동이후는 경찰의 요주의 인물까지 된다. 그의 개혁은 교회에서도 전개되어 ‘개혁교회와 루터 교회의 통합’, ‘개신교 교회제도의 개혁’, ‘예배개혁’의 세 가지 방향에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개신교회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현실정치와 교회정치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매주 삼위일체 교회의 교단을 지켰으며 대학에서도 책임시간 이상의 강의를 하고 학술회에서도 철학과 신학의 연구영역을 계속 넓혀가며, 심도있는 연구 결과를 제출했다. 그는 진정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고 평가된다.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과 성만찬을 나누며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하여 “이 성서의 말씀에 나는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내 신앙의 근거이다.”라고 고백했다. 『기독교신앙』, 『독백』, 『성탄축제』, 『신학 연구서술』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 『해석학』, 『윤리학』, 『심리학』, 『미학』 등은 강의록으로 유고로 출판되어 철학과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Ⅲ. 『종교론』
『종교론』은 1799년에 처음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 이후로 1806년, 1821년, 1831년의 3번의 개정을 거쳤다. 한국에서는 최신한이 초판의 루돌프 오토가 편집한 책을 번역하였고, 필자는 그 책을 참고하였다. 오토의 편집 본에는 매 문단마다 편집자의 주석이 있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많이 준다.
『종교론』은 서문이 없다. 그 당시의 프로이센의 분위기는 기독교서적을 검열하는 시대였다. 『종교론』은 5개의 강연으로 이루어져있는데 2개의 강연까지는 슐레겔, 노발리스, 헨리에테 헬츠 등 낭만주의 친구들과 베를린에 있을 때 작성했다.
3번째 강연부터는 당시 왕이자 국가종교의 수장인 빌헬름 3세가 출석하던 교회에 목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지역으로 이주했다. 국가종교를 반대하는 입장의 글을 쓰며 국가종교의 수장과 함께 있는 것에 많은 심리적 압박이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지지해주던 낭만주의 친구들과 자유롭게 토론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헨리에테와의 편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론』의 두 번째 강연까지의 색채와 이후의 강연의 색채, 혹은 1799년 초판과 1806년 이후로 그의 생애를 나누기도 한다. 앞부분은 반기독교적인 낭만주의적 슐라이어마허이고, 뒷부분은 친기독교적이라 평가되는 플라톤적인 슐라이어마허이다. 부제가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제의 “교양인”이 비기독교적 지성인들인지, 국가 종교적 기독교인들인지, 낭만주의자 친구들을 말하는 것인지 해석이 다양하다.
국가의 검열을 피하면서도 출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수사학적 표현들이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검열을 했던 쟈크 마저도 처음에는 그의 『종교론』을 긍정하는 입장이었으나 1800년과 1801년 사이에는 자신의 평가를 뒤집었다.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친구들도 슐라이어마허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신학의 대표자 격인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도 해석을 난해해 하는 것을 처음 읽은 필자가 해석하는 것은 시도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맛본 사람으로서 『종교론』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의 해석학은 어쩌면 자신의 저서인 『종교론』을 읽을 때 자신의 해석학을 따라서 읽어야 이해가 될 것 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결국 다섯째 강연을 마치고 그는 서문 쓰는 것을 포기한다. “서문”에는 자신의 진실한 결론을 말해야 하므로 “서문”을 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종교론』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맞도록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성경적 견해
창세기 1:31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근거로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초적 견해이다.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에서는 인간의 한계, 육체와 개체성이 죄는 아니며, 죽음이 공포를 만들어내므로 악의 원인이 되지만 죽음 자체가 악은 아니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안에 있으므로 이 또한 악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전체를 실행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있는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부분을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국가 조차도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마태복음 6:27-34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v34)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염려)임을 알려준다.
창조론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유한한 생명의 시간동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없고, 구원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초월성으로 개인의 의식이 최고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며 아무리 의식이 강하더라도 세계 전체를 종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죽음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이 있고, 그러므로 현실의 질서가 악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2) 고전적 견해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관념론과 신비주의와 혼합된 기독교 전통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하다는 성서의 견해와 다르다.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인간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벌로 유한적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이론은 죄의 상징과 결과가 성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죄와 악을 무지와 동일시한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무지가 죄라고 가르쳤고, 글레멘스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과 무지가 무의식적으로 충동질 하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헬레니즘과 성서를 조화시켜 죄의 본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연(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누군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신적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바울의 신학과 니버의 주장
바울의 신학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롬 5:12)라고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를 동일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죽음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음에도,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항상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연결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 불확실성과 의존성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고 의존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38-29절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처럼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죄의 근원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인데 죄를 유발하는 것의 큰 특징은 두려움이다.
죽음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랍비 전통에 따라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너는 흙이니”(창3:19)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를 형벌로 해석한다면 혹시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은혜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이 유한적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설명하지만,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었다고 믿게 함으로 인간 실존의 역설을 왜곡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으로서 유한성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을 근거로 한 정통 교리는 헬레니즘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이 기독교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적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 운명의 끝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죄가 아니다.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4.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
니버는 인간의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유혹과 불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가 인간을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구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첫째 마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에서 발생했으며, 둘째 마귀가 인간 타락 전에 먼저 타락했다는 것 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악의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해석 된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마귀에게 유혹된 원인은 인간 안에 탁월함과 연약함, 무한과 유한한 지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무지를 감추려는 노력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불안을 은폐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을 받게 되지만 불안이 죄는 아니다. 단지 불안은 죄를 발생시키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 받기가 쉬운데, 인간의 양면성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모르므로 발생한다.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측정 불가하므로 자신이 존재해야 할 것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완벽에 대한 불안)과 존재해야 할 것으로 존재하지 못 할 것으로 인한 불안(존재의 불안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가운데 자신에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할 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존적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때 육욕(sensuality)에 빠지게 된다.
2)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로 교만과 육욕에 대해서 말한다. 더불어 집단적 교만과 개인의 교만을 고려한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를 함께 논해 보고자 한다.
A. 교만의 죄
기독교에서는 교만이 근본적인 죄이며 육욕은 교만에서 기원됨을 주장해 왔다. 교만이 죄라는 견해를 인간의 행위와 연관시켜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교만으로 분류했다.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 못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권력의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것을 거짓 안정이라고 했고, 이들에게 있을 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불안감에 기반한 권력의 교만은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힘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삶을 희생하는 죄를 범한다. 권력의 남용, 정복 등으로 표현되는 탐욕은 불안감을 숨기려는 야망의 표현인데, 인간의 야망이 끝이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교만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것이 지적 교만이다. 자신의 지식이 역사를 초월한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교만이며, 이 교만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려 할 때도 지적 교만이 드러난다.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고,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지식이기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여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지적 교만이다. 지적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시간 속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지적 교만과 관련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도덕적 가치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독선적 태도인데, 기준을 자신이 설정하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롭다고 하는 경우는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인종, 민족, 종교, 사회적 갈등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교만은 네 번째의 영적 교만으로 발전된다.
영적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종교적 죄와 관련된다. 자기미화와 신격화와 관계되는데, 본인이 계시를 받았으며, 더 많이 회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의 죄를 가중 시키며, 회개가 교만의 도구가 된다. 가톨릭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가 교만의 도구가 되게 한다. 또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도 자기 신격화의 위험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의 교만이 인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다.
교만과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 신격화는 부정직(기만)과 관계가 있다.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것도 동반하게 된다. 더불어 자아의 연약함을 숨기는 과정에서 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교만과 기만은 자아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
B. 육욕(sensuality)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되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죄의 본질을 육욕으로 간주 하려는 것에 니버는 문제를 제기한다. 니버는 육욕과 이기심을 구분하자고 한다. 육욕은 폭식, 술 취함, 성적 향락 등의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기심은 은폐되고 포장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욕이 이기심보다 사회적으로 더 비판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의거하여 육욕의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원적 죄의 결과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형벌이라고 하므로 두사람은 육욕을 죄의 결과이자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욕을 자기 사랑의 근원적 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육욕이 자아의 우상숭배인지 대안적 우상숭배의 발견인지는 분명한 답변이 없다. 종족 보존을 넘어서는 인간의 과도한 성적 충동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충동은 불안한 인간이 불안을 상쇄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성 행위는 내 삶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거나, 타인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적 연합의 절정은 자기 창조성의 절정도 되지만 죄성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는 성이 죄 자체여서가 아니라 성생활이 자기 신격화의 원초적 죄의 도구이면서, 타인을 신격화 함으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격과 무관한 성적 충동은 상업화된 악을 만들 수 있다. 도피를 위한 성적 격정은 그 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육욕은 자아 혹은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함으로 도피를 하려는 노력이고, 죄 때문에 생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무의식적인 실존의 형태로 도피하는 노력이다.
C.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 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3)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권력자나 지혜 자나 혹은 선한 자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동일한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약자에 비해 교만과 불의에 책임이 더 크다. 성경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이 드러나고, 교만과 불의에 빠지게 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도 고려된다. 부유한자나 권력이 있는 자 등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아가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수평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더 강한 오만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식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학자로 인정하게 하고, 권력자들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왕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덕으로 위장해서 권력욕을 숨기고, 관대함으로 위장해 불의를 감춘다. 역사 안에서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들의 죄책은 모든 기준을 초월하는 궁극적 분석으로 폭로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5. 결론
니버의 기독교 인간론 분석을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의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면서 죄인 된 인간을 강조했지만 전체적으로 니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므로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근대주의 인간관에서 했던 실수처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양면성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니버 신학의 특징인 역설의 연장이기도 하다.
니버가 기독교적 인간론을 근대의 인간론으로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안에서 이미 다른 인간이해들의 문제점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당시, 미국의 현실 가운데 낙관주의적 기독교는 답을 주지 못 했다. 공산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 역시 실망하고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특히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자세하고 깊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유혹당할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죄를 설명한다. 니버의 죄론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 이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위장하고 있는지 인지하게 도와준다.
약간 아쉬운 점은 6장의 ‘하나님의 형상’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만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책 전체가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두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하게 해석한 논의들은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 날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인간의 자유와 초월성에 대한 사고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한 한국어 번역이 부분적으로 아쉬웠는데 그 덕에,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니버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니버의 글과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버의 논지는 항상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간관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설의 긴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유혹과 교만을 유발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기대하므로 안정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