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15, 16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5장 공통적인 어려움의 영역들 & 16장 영성지도의 잠재적 유익들
15장은 영성지도의 공통적인 어려움들로 나도 어렴풋이 경험하고, 또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더 깨어있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이었다. 대부분 직접 피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바라지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을 영성지도자로 대치하거나 영성지도자의 여정을 의도하지 않게 복사하고 닮아가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닮아가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만남을 가진 경우에는 어쩔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긴하다. 그래서 이전 장들에서 말했듯이 영성지도자와 기간을 정하고 지도를 받는 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책에서는 양자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두라고 했는데 나의 경우는 상호 의존으로 인한 위험 가능성을 줄인 것 같다. 책에서는
성령안에서의 자유의 여부로
관계 이상을 점검하고,
性의 문제 부분은 ‘인식’으로
계속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라
고 조언하고 있다. 참 좋은 답인 것 같다. 실망이나 분노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면’과정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실망이나 분노의 ‘감정’을 인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크리스찬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많은 만남에서 그들이 감정의 문제를 ‘인지’하도록 돕는 이 땅의 영성지도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교회에 오래 다니신 어른들 중에서도 율법의 틀에 매여서 젊은이들과의 소통도 막고, 본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못들어 가는 경우를 많이 보는 것 같다.
16장에서는 영성지도의 잠재적 유익들을 말하고 있다. 인식이 증대되고 신뢰가 깊어지고(누구와? ^^ 아래 나옵니다~), 영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인식 증대로 인해 타인들은 쉽게 못 느끼는 것을 느껴서 민감해지는 불편함도 있지만 15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망이나 분노 등 감정의 인지는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이므로 나의 영에게 결국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이 풀어지므로 감사할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고 감사할수 있고 그것이 (상담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신뢰’의 문제와 연결이 된다. 자신이나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요인이 있다고 상담학에서는 말한다. 영성지도를 통해 나와 타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점점 높아지면 결국 나의 안정감이 높아지므로 긴장감이나 쓸데 없는 감정적 소모없이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바라보고 처리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마태복음 11:26-28절이 아닌가 싶다.
‘교육목회‘과목에서 사역자가 건강해야 제대로 사역할수 있다고 했다. 나는 중국에 있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온 2016년도에 나의 갈길을 몰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래서 많이 위축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의 상태와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들이 있었다. 3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야 나의 상태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닳아 가고 있다.
매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의식을 성찰하고
내가 지내온 오늘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때,
내 안에, 내 삶에 살아계신 성령님을 보고
거기서 안정감과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거나 나의 필요나 상황등에 꼬여 있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 같다. 주 1일 유통회사에 가서 IT업무를 돕고 있다. 나의 재정을 채우시기 위해 회사에 보내셨나 하는 내 입장만을 고려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 가고 나서 알았다. 하나님은 그곳의 영혼들 때문에 마음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안정감을 찾게 되길.. 풍성히 누리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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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기독교 훈련들
횃불에 와서 많은 수확이 있었지만 이번학기 영성형성 과목의 책을 빠지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나에게 은혜가 되었다. 그동안 나의 영적 여정을 검증 해주고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도전을 준다. 항상 감사하다. 책을 읽으므로 그동안 지나왔던 과정들에 대해 ‘확증’을 받고 말로 표현 못하던 부분들에 대해서 글로 보면서 정리가 되었다.
훈련은 전인을 위한 것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위로가 되었다. 사실 신학적으로 근거를 찾지 못한 채, 나의 임상만을 가지고 청년들에게 했던 이야기 들이 이 책에 정리 되어 있어서 감사했다. 항상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아야 한다고 부담 갖는 청년들은 피곤한 몸으로 인해 아버지 앞에 있는 것을 잘 유지 하지 못한다. 대게 기도하다가 잠들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에 많이 죄책감을 느낀다고 나눈다. 그래서 어떤 친구에게는 집에서
가장 편한 장소와 자세로
그렇게 앉아서 아버지께 말을 하라
고 지도해 준적도 있었는데 책에도 딱 그 부분이 나왔다. 책 읽기 전날 만난 A라는 청년도 살이 쪄서 힘들어서 퇴근하고 운동하는데 운동하는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많은 기도를 하게 된다고 했다. 가장 집중하는 기도.. 나 또한 물속에서 홀로 있는 수영하는 시간이나 운동 할 때 아버지께 집중이 푸욱 될 때가 있어서 가장 기도하기,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또한 감정이 상하거나 힘들 때면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께 자주 머물렀고 집중했었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직면 하는 경험들을 했었는데 ‘의지’ 부분에서도 그런 설명이 있었다. 상관도 없는 것들 혹은 아주 옛날 것이 떠오르는 것들을 통해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경험들이 생각났다.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떠오를 때 당황하고 짜증내기도 했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자발적인 훈련"은 정말 유익이 되는 것 같다.
21세 때, 그렇게도 갈망하던 교회에서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청년부 목사님이 정시기도를 제안하셨다. 그때 하던 정시기도를 아직도 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올 때 까지는 30분 이상 아버지 앞에 머물렀는데 한국에 들어와서는 많이 자유하며 그 시간을 누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매일 말씀을 3장씩 꼭 읽었는데 신학교에 와서는 말씀 보다는 다른 책들을 읽느라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 어렵다.
책을 읽기 전날도 몇 년간 나를 피하고 만나지 않던 과기대 졸업생 A와 만났다. A의 영적 상태가 바닥을 치고 진로가 흔들거릴 때 만났었다. 모든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이야기는 안하고 우선 좋은 공동체에 소속해 있기만을 부탁했다. 그리고 A는 온누리 서빙고 중국어 예배에 갔다. 그곳에는 우리학교, 우리학과 졸업생들이 많다. 그 졸업생들은 나를 만나고 있었어서 그 친구들을 통해서 꾸준히 A가 양육을 잘 받고 공동체에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부탁 했었다. 이번에 A는 양육도 받고 여러 가지 아픈 과정들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조금씩 찾아간 것 같았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욕심을 갖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분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영적 진보이다. 또한 A가 어려울 때 티 안나게 A를 돕던 선배들이 이제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다. 이제 A가 그들 옆에서 티 안나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건강한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A도 만남 속에서 자기가 이제 형들을 기도로 도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책을 읽으면서 전날 A와의 만남이 계속 생각났다. 임상과 이론과 실습을 병행케 완벽한 학습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래의 내용은 12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12장 내용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2장 기도
지난주 떼제 기도회였는데 어떻게 이번주 읽기가 ‘기도’일까... 하나님의 섭리? 책에서 말한 대로 기도는 태도가 되고 고스란히 행동이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되는 것 같다.
정시기도를 시작했던 20살 무렵부터 내가 할 이야기가 끝나면 하나님께 ‘제가 무얼 기도할까요’ 항상 물어봤었다. 때로는 그 물음 이후로의 기도가 더 길고 깊다. 그래서 그 질문이 참 좋다. 나랑 상관없는 상황에 대한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고 계시고 그러기 위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황"을 다스리고 계시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의 유익과 이해관계는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이해관계 속에
내가 함께 있다.
이런 황홀한 기도의 방법이 이번 12장에 있었다. "기도의 종류와 기도의 전환" 부분에서 요즘 나의 ‘기도 상태’를 점검 할 수 있었다. 기도 시간에 오래 앉아있지 못해서 나의 상태를 봤을 때 불안했었다. 그런데 책에서 그런 기간이 있다고 써 있어서 놀랐다. 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는 것일까.. 정말 횃불 입학이후 영성과목은 내게 많은 답을 준다. 감사하다.
20대부터 주변의 영적 친구, 선후배들은 내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대언이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 여쭤볼 때 마다 내가 방언을 한다고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답답했다. 이십년이 지난 이제서야 나는 임상으로 조금씩 나의 묵상 기도가 나의 방언인 것을 알아가고 있다.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 시점에 바로 12장에서 방언의 종류가 음성, 묵상, 관상에 존재한다고 정확히 적혀있다.
개인의 개성과 기호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인식에 영향을 준다
고 했는데 어쩌면 묵상 기도를 하는 나의 기호에 따라 방언도 그렇게 주신 것 같다.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성향을 인정해주시고 한걸음씩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책에서 관상기도가 하나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안에서 쉼을 갖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지난 목요일 떼제에서 그 경험을 했다. 연변에 있을 때부터 떼제에 다녀오신 분이 나에게 몇 개월 떼제에 다녀오면 좋겠다고, 나랑 딱 맞을 것 같다고 하셨었는데.. 그 떼제를 횃불에서 처음 만났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나는 주 3일 신학교에 오고, 주 2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주 1일 회사에 풀타임으로 근무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사시간은 조선족 청년들과 만난다. 주 1일 가는 회사는 도와드리기로 하고 가고 있다. 여직원이 7-8명 있다. 20-30대로 이루어진 그 여직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계속 여쭤보며 한 두달 회사의 업무들을 익혔다. 내가 맡은 부분은 업무의 전산화 이다. 방학 때 처음 2일 동안 도와주러 갔다가 노가다를 해서 눈도 몸도 많이 상했다. 이런 노가다는 20대나 할 일이지 싶기는 했는데 노가다를 하는 내내 이거 프로그램으로 하면 2-3시간에 끝낼텐데 왜 수작업을 할까 계속 고민하면서 16시간을 일했다. 회사에 처음 갔으니 내가 주도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떼제 기도회때 묵상 기도 시간에 갑자기 회사가 내 안에서 올라오고 하나님께서 그 회사의 주요 멤버들을 너무 안타까워하신다는 마음에 꺼이꺼이 울음이 터졌다. 숨을 참지 못할 정도의 눈물이었다. 온몸이 흔들리는 눈물이었다. 조용한 시간인지라 참았는데 그 부어진 마음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회사를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 그 두 사람. 하나님이 너무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이전에 한번도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초점은 그분들 이었다.
금요일 저녁 교회의 심야 기도회. 같은 기도의 자리이고, 동일하신 하나님인데 왜 여기서는 그 하나님을 못 만날까... 의문을 남긴다. 매일 매순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교수님의 모의영성 지도가 진행된 며칠 후에야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었다. 그 시간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서 내가 평소에 사람들과 하는 대화 방식을 다시 한번 깨닳았다. 피지도자가 영성지도 시작 전에 본인의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그런데 영성 지도 시간에 오래도록 나눈 이야기는 자신이 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지도자였다면 그렇게 사역의 열매가 보여지는 시기인데 왜 상태가 안 좋다고 했냐고 직격탄(나는 그렇게 생각안하지만 청자는 그렇게 느낄 듯..)을 날렸을 것 같다.
결국 지도자인 교수님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피지도자안에 가장 큰 덩어리인 아버지와의 관계 껀이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이것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리라...
말하는 가운데, 표현하는 가운데, 회중 앞에서 꺼내는 가운데, 치유와 답을 주시길 계속 기도했다. 멋있다. 아버지 하시는 일은!! 이번주도 압지께서 나를 여러번 돌아보게 하시는 은혜(고로 어려움과 아픔이^^)를 주셨다. 교육목회 시간에 게임을 했는데 옛 자아가 불쑥 올라와서 자리를 크게 잡았다. 항상 압지 앞에 깨어 있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자주 나를 바라보면 정말 창피하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그래서 한주 내내 들으면서 울었던 곡이 제이어스의 ‘내 모습 이대로’이다. 이글을 쓰기 전에도 한탕 하고...
책을 늦은 시간에 읽었는데 너무도 와 닿아서 집중해서 읽었다. 성경의 언어에서 하나님의 이름, 우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로서의 이름들이 참 많다.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학생이고 그러면서 선교사이고 직장인이다. 오늘 아침에는 어제 학교에서 늦에와서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하나님께서 직장인들의 힘듦과 고난을 이해하라고 주 1회의 직장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생각을 했다. 도리어 선교단체에 있을때는 내 공부도 하고 설렁설럼 시간을 보냈는데 일반인들의 직장은 점심시간 한시간 빼고(사실 이때도 나는 거의 회의를 하긴한다...) 8시간 내내 초 집중모드이다. 심지어 오늘은 야근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이런 역할의 이름들에 앞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름은 사랑스런 딸(여디디야 ^^)로 불리고 싶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로 모든 곳에서 자리매김하고 싶다.
성경의 가르치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항상 중요한 고비마다 말씀으로 2중, 3중으로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이 생각 났다. 더불어 연결되어 성경의 많은 이야기 들은 지금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드러낸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읽은 모든 성경이 마음에 박히는 게 아니니깐...
또한 최고로 하나님과 친밀하셨던 예수님이 최고의 영성지도자이심을 책을 통해 상기했다. 모든 상황에서 “Focus on GOD”.
예수님처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향할수 있길.. 그리고 두려움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순종할수 있도록 도울수 있길 바란다. 신학을 하고 한국에서 청년부 사역을 하고 있는 언니가 오늘 너무 힘든 일이 있었다. 업무 중 언니의 글을 보고나서, 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언니의 그 반복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나 회사에서는 무언지 정확히 모르고 ‘압지 뜻있는 것 같다’고만 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수면위로 올라오는 은혜들이 있었다. 열일하고 저녁 늦게 만난 만남도, 또 늦은 시간 언니를 위한 하나님의 위로도 내게는 정말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아가게 하는 부르심의 은혜이다. 나도 그렇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도 그렇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더욱 깊어질수 있길 바란다.
다시 교회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코로나가 50명 100명만 넘어도 온 나라가 난리 였는데 지금은 수천, 수 만명이 발생하는데 교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에게 왜 그런 격리의 상황들이 있었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다시 교회들이 문을 여는 이때, 나는 부활절을 기준으로 예배와 공동체에 대해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마음의 태도”.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그 “마음의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함을 『멈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윗이 궤를 옮겨 오려고 했던 것도(그래서 웃사의 죽음에 하나님께 감히 분을 내었던 것도..), 모방 욕망으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추구하는 것도, 교회에 지체들을 미워하면서도 교회봉사에 열심인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를 직면하여 보는 광야의 시간 없이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멈춰 있을 때는 달리지 못해서 불안해 하고, 다시 달릴 수 있을 때는 생각 없이 뛴다. 깊은 호흡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모든 것을 멈출 때 욕망이 아닌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는데.... 성령께 내어드릴 시간이 없다.
성공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제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쁘고 급할수록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려
상황의 주인 되신 분께,
그리고
이 상황을 허락하신 분께
마음과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최대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 이겨내야 하는게 우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사는 사람을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수가 옳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전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사는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해진다. 모교회 담임목사님이 40일 금식을 하셨다. 금식 전에 금식을 계획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금식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모임 제한도 풀린 이 시점에 담임 목사님은 더욱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전처럼 어렵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광야에서 사선의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결과이다. 40일의 금식을 통한 경험으로, 일상에서도 생명의 매순간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긴 금식의 결과 매순간, 일상에서의 예배(‘라트레이아의 예배’, 23)가 회복되어 코로나가 풀렸다고 달려나가는 다른 교회들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달리지 않고 세대를 거슬러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며 기다릴 용기와 믿음이 생겼다. 멈출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또한 멈추어야 내 갈망의 기저를 볼 수 있다. 333의 의식성찰 시간은 무언가 이루기 위함이아니라 내 마음을 잘 살펴 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시간이다. 혼인 잔치집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저 상황을 말씀드리듯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버지께 그저 말씀드리고 아버지 손에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손에 들려 드렸을 때에 그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와 닿았고, 예화와 말씀 풀이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두 번째 읽었는데도 또 와 닿았다. 르네지라르의 이론과 다윗의 삼하 11-12장의 내용은 이미 수업을 통해 들었어서 더 풍성했다. 슈필라움(자기 틀)에서 스피리추얼 라움(영적자리)로, 새날을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날인 어둔 밤으로, 길도 물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광야의 자리로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수시로 돌아가는 깊은 호흡의 매일을 삶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 영적 삶의 3단계(정화, 조명, 신비적 연합)가 체계화 되면서 엘리트주의, 분리적 평가
. 실제 영적 3단계는 동시적이며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
(7) 20c 후반
. 거룩함으로의 보편적 부름 확인 – 영성신학이 영성으로 대체됨 (2차 바티칸 공의회)
. 영성 : 기독교 뿐 아니라 타종교 및 종교 무관한 여러 실천가들도 혼용
. 기독교 영성 구별 : 기독교 종교 전통에 뿌리가 있음 -> 신학적 영성 vs 영성신학
. 신학적 접근시 유의점 : 기독교 영성에는 신학적 믿음 이상의 것이 있음
. 다양한 공동체 / 복잡한 인간 / 다층적 차원 –> 신앙의 적용과 표현의 특수화
∴ 기독교 영성을 일반적 이론이 포괄하거나 구체화 할수 없는 경우 있음
☞ 영성이 신학을 낳고, 신학은 영성의 경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 (신학⊂영성)
. 영성의 학제간 연구 필요 이유 : 다른 분야의 도움을 받을 때 적절하게 탐구 가능
3) 인류학적 접근
[postmodernism에서 영성의 정의]
a. 인류학적 상수
b. 인간 구성의 한 차원 (인간적인 특성) ∴실존적으로 종교보다 앞섬
. 기독교 영성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이므로 타기관에서의 ‘영성’ 연구와 공유 필요
. 역사학적 차원, 신학적 차원 + 미, 언어, 심리, 천문학도 고려
. 시대가 가지고 있는 경험의 중요한 측면에 영향 받음
. 종교나 제도적 종교를 외면하는 구도자의 영성에도 관심
. 종교 신학 속에서 작업 (전제 2가지)
a. 기독교 영성의 첫째는 인간, 다음이 그리스도인
b. 영성은 존재론적으로 역사학과 신학보다 먼저
. 해석학적 방법론 강조
a. 이해와 설명(지식의 확장)
b. 적용(주체의 확장) : 조사자 개인의 인성의 확장 (영적으로 풍성하고 심오하게 됨)
. 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기독교 영성
. 기독교 영성이 통제 할 수 없는 대화에 참여
. 이 시대가 질문하는 것에 대답하기 위한 집중 (ex) 시민 평등권운동은 영적 현상인가?
cf. 역사나 신학적 접근은 그 기준(틀)에 따라 풀어감
. 인류학적 접근의 기여
a. 개방성 : 영성분야에서 다양하고 넓은 범위의 이슈들 연구가능
b. 공적 대화의 장에 기독교 영성을 드러낼 수 있다.
c. postmodern적 의제와 감성에 친화적
∴ 인류학적 접근 방법의 연구는 기독교 본질에 집중하면서, postmodern의 유혹을 이겨야..
4) 세 가지 접근의 상호작용
. 상기 3가지는 기독교 영성 분야의 모든 질문에 관련해서 필요한 도구
. 배타적이지 않음 : 3가지의 적절한 사용 (대학의 연구, 목회와 신학교 상황, 대학원 연구)
3. 자기 참여(self-implicatiion)의 문제
1) 경험의 비판적 사용
. 영성은 경험에 대한 연구 이므로 연구자의 경험이 이해를 위해 필요 (ex) 심리학
. 영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영적 삶을 가져야 한다. : 경험 깊어질수록 타인의 경험 이해 커짐
. 주의 : 연구자가 너무 깊이 연관되면 연구 망침 (객관성 필요)
2) 자료로서의 개인적 경험
. (예) ‘기도’ : 숙제 ?
a. 연구의 방식인 실습일수 있음
b. 숙제(연구)를 통해 기도의 경험 혹은 기도하고자 하는 동기 유발
c. 경험을 통해 기도를 연구할 경우 : 신중할 경우 본인이 기도에 관여하는데 도움이 됨
3) 영성 연구가 가져다 주는 변화의 가능성
. 경험의 영향력 : 진정한 연구는 변화를 낳는다. (Weil)
. 자기 참여적 특성의 중요점 : 연구와 개인의 성장의 상호작용
[토론질문]
* 영성 고전에는 경험한 사람들이 정리해서 적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정리한 것인데 표현이 잘 안됬다.
우리는 그들을 책으로만 만났기 때문에
인성이 어느 정도 성숙한지는 그들에 대해 논한 몇몇 타인의 글들로만 알 수 있다.
* 궁극적 진리와 씨름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된다.(소크라테스)
* 누군가와 오래 지내면 닮아간다. (ex) 예수님
* 범위를 좁혀가서 현대 한국 기독교 영성 – 공부하는 우리 – 관심있는 나...
많이 배우면서 (연구하는) 자로서 자기가 배운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
(ex) 좋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자기 영성이 그런 줄 아는 것처럼
* 영성은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전반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본인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착각
- 안전장치 : 의식 성찰
case1. 의식성찰을 오래해도 자기의 틀에서 못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누리지 못해 괴로워 하면서도 여전히 영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착각 할 수 있는 우리 연구자들의 폐단은 어떻게 검증하고 피할 수 있을까?
case2. 교회안에서, 영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도와주는 귀한 축복의 통로로 쓰이는 데도 불구하고 개인적 인격의 문제로 성도들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누군가 조언을 해주어도 자신이 매일 성찰하고 있다며 타인의 조언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격의 약한 부분을 고치지 않으려는 경우들... (영성의 역동성)
하나님에 대한 오해.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의 청년들을 보고 느낀 것 이었다. 어쩌면 청년 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들 하나님을 두려워했고(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묻기를 피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 더러 갖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기저에는 하나님은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고, 내가 바라는 것을 싫어 하실것이라는 “확신”(믿음) 때문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보내신 분이, 자기가 대신 죽으신 분을 믿는 믿음이 완전 기대와 다른 부정적 믿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탄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잘도 속여먹고 잘도 이겼구나...
10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많은 예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로 삶을 메여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므로 삶이 풍성한(소유의 문제가 아님) 사람들의 예를 많이 기록해 두었다. 책에서 신자가 아닌데 모임 중에 치유된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치유되길 원한다고 앞으로 나갔고, 그에 따라 치유 되었기에 치유에 자신이 행한 몫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선배의 남편은 자신편에서 하나님께 한 행동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낮에 침대위에 뒹굴 거리고 누워있었을 뿐이었고,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기를 옷깃처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때 형부는 알았다. 자기의 불치병이 나은 것을... 그 이후로 형부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평안함이 있었다. 반면, 오래 동안 교회서 자라고 선교사 헌신까지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안이 없이 산다.(생각해 보니 대표적으로 나네...)나의 틀(유교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아 틀이 너무 많다..)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과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의 차이다. 아이러니 하다. 책에서도 거론 되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는 치유가 항상 동반하는 것 같다.(단지 내 개인의 통계 내용일수도 있겠지만^^)
[자연묵상1] 자연묵상으로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이기로 한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길에 떨어진 낙엽들에 눈이 자꾸 가는데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가에 혼자 서있을 수가 없어서 가까운 벤치에 편히 앉았다.(하나님하고 이야기 할때 항상 최대한 집중 할수 있는 편한 자세를 고수한다. 이것도 편견일까^^) 아직 까지도 의문이고 계속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계속 눈물이 낫다는 것이다. 며칠간 계속 되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연묵상2]몇 년전 비바람이 치는 장백산(백두산)에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 또 들었다. 자연묵상 때에야 왜 그날 그렇게 비바람이 치고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 되었다. 장백산의 여러 등산로 중에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길로 장백산을 갔던 날 엄청 비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쪽 길에는 풀들 사이에 풀보다 더 작게 땅에 붙어 있는 꽃들이 엄청 많았다. 그 무서운 비바람(사람도 날라 갈 것 같고 우비는 다 찢어지는) 속에서 요동없이 땅에 딱 붙어 있는 꽃들을 보며 하나님이 내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다. ‘땅에 딱 붙어 있어. 포복해. 일어나면 다친다. 바닥에 붙어 있어라’ 장백산에서도 내내 감동이 있었는데... 자연묵상의 날 또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자연묵상3]지난 금요일에 치과에 가서 어금니를 뽑았다. 선교사가 거지인가. 다른 치과 가야 하나. 내가 선교사처럼 안보이나. 내가 뻔히 선교사인 것을 알면서도 뽑기 힘든 어금니를 앞두고 의사샘은 기도하라 했다. 어금니 발치가 처음이라 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압지께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하고 있었고 의사샘 손에 함께하시길 구하며 의사샘 손도 잡았었다.(단지 소리내어 기도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이 두 번만에 뽑았다. 난 압지께 감사했다.(단지 소리내어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은 그 영광을 자기가 갖았다. ‘이거 쉽게 뽑히는거 아니에요. 이거 원래 힘들게 뽑는 거에요. 아무나 이렇게 뽑지 않아요.’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아버지 저 선교사라고 안하고 그냥 직장 다니면서 선교사로 살까바요. 선교사가 거지인가요?’ (치과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던것 같다.) 마구 짜증냈는데 자연묵상 하는 중에 예배시간의 위로가 떠올랐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나의 부르심의 근원, 나의 존재의 근원이신 내 아버지가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하신다. 오늘도...
사람은 자기가 생각이 가득한 것을 말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담임 목사님께 멘토링을 받는 시간은 (너무 궁금한 것 들이 있어서 곧장 물어보는 경우도 있지만) 평안하게 머물러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러면서 나도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간을 갖는다.
책에서도 대화의 흐름은 우리의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영성지도 시간은 지도자나 피지도자 모두에게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있다. 8장 초반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버리려고 노력한다고 했지만 그것들이 영성지도의 대화의 내용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대화의 재료들이 줄줄이 나온다. 피지도자로 하여금 방해 없이 충분히 길게 말하도록 할 때 2-3시간이 지나서야 본심과 어려움들이 스멀스멀 나올 때가 있다. 주로 Y대 졸업생이나 교회 청년들을 만나는데 3-4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마음의 바다 밑 이야기가 나온다. 나 혼자 기도하면서 진행해서 그런 것 일까... 영성지도에서 1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너지가 존재해서 그런 것 일까... 사실 나에게 주어진 낮과 저녁 시간들은 대부분 만남에 쓰이는데 ‘자발적 기다림’과 ‘하나님의 낭비’가 바로 그 만남의 시간에 적용된다.나는 숙제도 해야 하고, 강의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이 부족한데, 학생들은 나를 만나면 기본 3시간이 지나야 말문이 트인다. 이것은 성격이 급한 나도 훈련하시는 도구가 된다. 혹시 그 시간에 피지도자들도 기도하는 모드가 되면 우리의 만남이 더 효율이 생길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친구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나자고 하면 안 그래도 그들에게 만나기 부담스러운 내가 더 부담스러워질 것 같다. 성령님께서 아이들에게 직접 알려주시기를 또 조용히 구해야 겠다.
집단 영성지도를 진행함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p256)했는데 이것은 횃불에 와서 몇 학기 동안 영성과목과 상담과목을 들으며 내가 받은 위로이다. 혼자 아버지 앞에서 정리한 것들에 대해서 ‘왜 목사님들은 이런 내용을 안 알려주실까? 내가 이상한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와서 학문적으로 정리된 것들을 많이 찾았다. 한동안 가까이에 있는 Y대 졸업생들중 믿는 친구들과 매주 그룹으로 모였었는데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내가 준비한 이벤트는 없었는데 모임 가운데서 서로 역동적으로 성령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그룹 자체가 영성지도자 였다. 나 혼자 였다면, 1:1로 만났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함께 하는 은혜와 안정감을 누린적이 있었다. 9장을 읽으면서 횃불의 동기들 안에서 함께 갈수 있는 건강한 영적 모임을 3-4명이라도 정기적으로 갖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현재 어쩌다 모인 몇몇이 식사 모임으로 만나고 있는데 거기서도 살짝의 역동적인 반응들이 있다. 아버지께서 만나게 하시고 모이게 하신 것이라 믿고 기대하며 즐겁게 식사를 한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지만 기대를 해본다.
성찰을 위한 질문이나 책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나에게 객관적으로 하게 된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가끔은 내가 영적지도를 받고 있는 듯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최근 이 주간 다른 과목(교육목회)의 강의 내용과 내가 고민하고 정리한 부분에 대한 내용이 동일하게 정리되어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신이 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에 새벽 3-4시까지 잠을 안자고 일을 한다.(왜 나는 일을 해도 해도 많은 걸까?)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재우시면 (어떻게든 안자고 일을 하려고 버둥거리는 성향의 나 였는데...)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신뢰함으로 접고 자는 훈련을 지난 2-3년동안 했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내 계속 새벽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를 못한다. 책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부재하신다고 느끼는 것?’ 의 질문을 보면서 요즘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불안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못 찾았는데, 정리하며 글을 쓰는 동안 알았다. 시간이 많이 부족한 이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지금은 나로 깨어 있는 은혜를 주시는 시간인가 보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기대한다.
특히 6, 7장에서는 개인적인 내용이 많아서, 읽기가 난해하실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표현력이 짧은 공대생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6장 영성지도자 선택 & 7장 영성지도 관계형성
6장에서도 살짝 거론되었지만, “7장 영성지도의 관계 형성”에서 ‘영성지도 비용‘이 거론 되어있다. 나도 담임 목사님께 멘토링 받으러 갈 때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시작한다. 내가 Y대 졸업생들을 만날 때도 대부분은 내가 밥을 사주면서 만난다. 7장을 읽으며 돈을 받고 영성지도를 한다면 ’그 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돈 벌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것은, 물론 선교사로서 계속 한국에서 선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 사역을 하려다가 내려둔 것은 내 능력이 주일사역 까지 안 되는 이유도 있지만, 주일 사역(교회 사역)을 통해서 학비를 일부 대주기로 계약하고, 급여를 주기로 한다는 것이 영적인 일에 물질적 가치를 매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이라도 재정을 채우기 위한 이유로 내가 시간을 쓴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을 왠지 맘몬에게 일부 허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은 저의 부르심과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독자들께서는 불편하지 않으시길!!) 그래서 주 1회 나가서 도와주는 회사에서도 돈을 안 받고 하겠다고 했다. 돈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하면 돈과 내 노력을 비교하며 계산하는 내 욕심도 믿을 만 하지 못하고 맘몬에게 내 시간을 나눠주고 싶지도 않았다. 현재 시간강사로 일하는 것도 시작할 때부터 그 부분 때문에 마음이 안 편했다. 그래도 나는 더 의미 있는 부분, 강의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의 영혼과 삶을 위해 강의 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강의료로 생기는 재정으로 인해 개인의 의식주 부분이 해결되는 것에 감사했다. 책의 재정 부분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성도에게 비용을 받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말에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위로를 받았다.
아침 큐티도 그렇고 6장에서도 영성지도는 사람편에서 들일 노력은 거의 없고 ‘성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 ‘내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마 11:28-30)는 예수님 말씀의 풀이인 것 같다.
7장을 읽으며 영성지도 관계를 마무리 하는 것에 대해서 정리해 두었는데, 이부분을 읽으며, 나를 심령술사 처럼 느끼고 불편해한 제자 한명이 생각이 많이 났다.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생각나서 곧장 기도하게 되는 사람들은 아직 가족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가족에게는 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 그냥 생각나면 곧장 기도가 나오는데, 다른 관계들은 먼저 '왜'가 떠오른다. 한국에 와서 주로, 내게 집중해서 하시는 훈련이 "기도" 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도 7장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하여간 생각났던 제자와의 마무리가 그 친구가 불편해 하는 것 때문에 ‘내가 너무 섯불리 마무리 한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제자가 내가 심령술사 처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투영당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 당시에는 나를 만나기를 꺼려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도 인도자가 피인도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영성지도를 시작하기 꺼려한다는 말이 있었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약한것 같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알수 있는게 없는데도,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 하는것 같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또한 하나님께 나의 삶을 올인하는 마음으로 영성지도 비용을 따로 책정하지 않습니다. 재밌고 흥미 진진한 이 믿음의 모험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2.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데레사가 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가장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도 모두 다가 갈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은 길로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마태복음 6:25-32절을 근거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과거에 메이지 말고 내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어린아이가 후회와 걱정 없이 지금을 살듯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길’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자에게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다. 데레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지켜지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행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1) 겸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에서 ‘어린아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처럼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겸손의 길’이다.
위대한 성인들처럼 완덕을 구하던 데레사는 완덕이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더불어 생명도, 재능도,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기숙학교 시절 사람의 호감을 살줄 몰라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행복한 무능(無能)’ 이라고 표현하며, 언니들과의 이별을 사람의 애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 할 수 있는 은혜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아픔, 가난, 불완전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또한 수련생들을 도와주는 부수련장으로 섬길 때 자신을 시기하며 타인보다 본인부터 지도하라고 말한 수녀에게 “아 수녀님, 수녀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잘 아는 것이 참다운 겸손이다. 데레사는 겸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수투성이다’라고 생각하거나 고백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신뢰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이며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에서 가장 핵심 주제이다.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인지하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엄마에게 달려가 뽀뽀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엄마가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데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신뢰를 알고 있었다. 데레사는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항상 먼저 달려가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데레사가 표현한 예화에서, 임금이 사냥에서 토끼를 잡으려고 사냥개를 풀었는데 토끼가 사냥개를 피해서 왕의 품안에 달려들어서 왕은 그 토끼를 보호하고 친히 먹이를 주며 키웠다는 것이다. 정의(사냥개)가 우리를 쫓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심판주 되신 주님의 팔에서 피난처를 찾으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위험한 순간에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세요.. 소박한 사랑과 신뢰의 길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랍니다.
(3) 사랑
깊은 신뢰가 가능한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영적 어린아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데레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예수님을 맞이하고, 삶속에서 제자로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린다.
이제는 제가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아픈 것이 만약 하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평생 아프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픈 상태로 제 생명이 무척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단 하나의 은혜는 사랑으로 인해서 부서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4) 복음
인간은 스스로 구원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바램을 이룰 수 없다. 데레사가 성모의 미소로 원인 모를 병에서 회복되고, 성탄절에 10년 동안 기다리던 마음의 건강이 되찾아 진 것처럼 우리는 못 느끼고 있는 사이에 겨자씨 비유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시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 같이 스스로 무언가 하겠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같이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레사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이사야 55:8)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말씀을 근거로, 공로란 많이 행하고 많이 주는 게 아니라, 많이 받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고 해석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들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이 귀여워합니다. 의사들이 수술할 때에는 환자들을 재웁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시 103:14)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우리 본성의 감정과 어긋나는 것입니까! 은총의 도움 없이는, 그 교훈을 실행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Ⅲ. 결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신뢰와 사랑으로 갈수 있는 길이며, 겸손으로 가능한 길이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인 복음의 길이다. 데레사의 전체 삶에서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데 데레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가며 작은 데레사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데레사의 편지글들과 자서전을 통해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폴린 언니가 있어서 수녀원에 가려는 열망이 있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께 활짝 열어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깨끗한 영혼이다. 왜 그렇게 빨리 완덕을 바라고 왜 그렇게 빨리 예수님께 가고자 했을까. 그 모든 열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믿고 데레사는 힘을 빼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다. 14세에 가르멜에 들어가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교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15세에야 입소 할 수 있었다. 그 여정이 힘들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여정이 없었더라면 데레사는 엘리베이터 이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임금님인 아빠가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며 더욱 하늘을 소망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작은 고통 하나에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영적으로는 더 어린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수련자들을 맡아 교육하는 부수련장의 업무도 감당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자신을 살폈다.
이러한 데레사의 모습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보여지는 내 모습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며, 가면을 쓴 채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는 데레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드린 것 같이 해야 겠다. 둘째,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가치를 두었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가치가 덜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진짜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데레사는 안정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을 거야’ 혹은 ‘내게 갈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신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할 수 있다는 신뢰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안정감을 두었으므로 자신에게 몰아치는 고난들을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작은 꽃이지만 잔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큰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현대의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뿌리 내린 신뢰가 있어야 겠다.
데레사 자서전의 뒷 부분으로 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면서, 아가서 인용이 많이 나온다.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깊어질수록, 삶에서 점점 더 성숙해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1600년대의 잔느 귀용이 자꾸 생각났다. 일상에서 내면의 대화로 하나님과 소통 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1600년대 잔느 귀용은 이단판정을 받았고, 1800년대 봉쇄 수녀원에 있던 데레사는 교회 박사가 된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기회가 된다면 두 사람의 믿음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로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는 봉쇄 가르멜 수녀로 24세의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얀세니즘이 팽배했던 프랑스에 사랑의 하나님을 회복하게 하는 그녀의 가르침은 신비 체험이나 신학적 난제풀이가 아닌 일상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본 논문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그 길을 발견했는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녀가 남긴 자서전과 편지들을 통해 관찰해 보고자 한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5세(1888년 4월 9일)에 가르멜 수녀로 입회하고, 24세(1897년 9월 30일)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년 후 1997년 10월 19일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데레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짧은 생을 봉쇄 수도원에서 살던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교회 박사로 인정되었다.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작은 데레사가 성인들처럼 하나님께 도달(완덕)하고 싶은 갈망 중에 찾게 된 길이다. 다른 성인들은 큰 고난이나 성흔들을 받아 하나님께 도달했는데 어리고 작은 자신은 그렇게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완덕의 갈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길을 알려주실 것이라 믿었다. 성경을 읽는 중 잠언과 이사야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온전히 예수님의 팔에 의지해서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신뢰의 길이며, 예수님만 바라보고 인정하는 겸손의 길이며, 신뢰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길이며 이 모든 것을 총괄하여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이루는 복음의 길이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데레사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그의 가정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로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녀에게서 배우고 현재에 적용할 부분을 고찰해 본다.
데레사는 언니인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의 지시로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있을 때 까지, 자서전을 기록했다. 또한 성심 수녀회에 있는 큰언니 마리와 다른 지인들과의 많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데레사 선종 1년 후 가르멜 수녀회는 관습대로 데레사의 자서전을 비공식 출판해서 여러 가르멜 수녀원으로 보냈는데, 공식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10여년 만에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의 자서전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고 표현했다. 이 당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얀세니즘의 영향으로 정의의 심판관의 이미지였던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데레사의 성물들이 전쟁에서 군인들을 보호하고, 침체되었던 선교지에 생명력이 전해지는 등의 1950년 까지 데레사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가톨릭에서는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사후 50년을 기다리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 선종 26년만인 1923년 4월 29일 시복을 하고 1925년 5월 17일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했다.본 논문에서는 그녀의 자서전과 편지글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Ⅱ. 본론
2.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아버지 루이 마르탱(1823년생)은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꼼꼼하고 논리적 이었다. 22세에 고독한 삶을 꿈꾸며 수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라틴어를 몰라서 거절당하고 알랑송에서 시계공으로 지내면서, 35세에 젤리 게랭을 만난다. 어머니 젤리 게랭(1831년생)은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던 레이스 기술을 배웠다. 그녀 또한 수도자의 삶을 꿈꾸어 오텔디외 수녀원을 찾아 갔지만 거절 당하고 27세에 마르탱과 결혼하게 된다. 데레사의 부모 두 사람은 모두 수도자 생활을 원했었다. 신혼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고해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들에게서 아홉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다섯 명의 딸이 살아남았고, 네 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어머니 게렝은 종교적 신념이 충실하고 믿음이 깊었으며 일에 열정도 있었다. 작은 일에도 성심을 다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돌보았다. 친척들과 편지로 소식을 자주 나누었는데 많은 서신에서 막내인 데레사의 어린 시절의 정보들이 있다. 데레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할 때, 어머니의 편지를 참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데레사가 4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것은 데레사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된다.
데레사에게는 4명의 언니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던 큰언니 마리는 데레사의 대모였으며, 작은 언니 폴린은 어머니 사후 데레사의 ‘두 번째 엄마’가 되었다. 몸이 많이 아팠던 레오니와 데레사의 단짝 친구인 셀린 언니가 있다. 마리는 성모 방문 수녀회로, 폴린(예수의 아녜스 수녀로 데레사에게 자서전을 기록하도록 한 당시 원장 수녀)과 셀린 그리고 데레사는 가르멜 수녀회로 입회한다. 아버지는 말년에 금치산자 판정을 받기 까지 했지만, 2015년 10월에 데레사의 부모도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이름이 올랐다.
(2)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식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부모와의 심리적 관계가 사람들과의 심리적 관계 및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데레사의 부모는 가정에서 기도, 아침 미사, 주일의 저녁 기도 등 일상생활이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마르탱 부인은 병든 하녀를 돌보고 아버지 마르탱은 가난한 사람, 임종 환자를 도왔다.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스스로 자신의 내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눈다. 철 들 때부터 엄마가 돌아가신 때까지 알랑송에서의 생활(1873-1877), 엄마가 돌아가신 4살 반부터 열 네살 까지 뷔소네의 시간, 그리고 열 네살, 크리스마스의 은혜의 시간 이후로 나눈다.
첫째 시기의 데레사는 밝고 명랑하고 고집이 세고, 괄괄하고 순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데레사는 이 시기에 이미 사물에 대한 판단 수준이 글을 쓰고 있는 23세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표현한다. 큰언니 마리의 말은 절대로 거슬리지 않았고, 둘째 언니 폴린은 자신의 마음의 이상(理想)이었다고 고백한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등장하듯이 자신이 잘못한 것은 항상 모두에게 고백하고, 특히 아빠에게는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마리에게 전하게 해서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백 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어린 데레사에게 있었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 내용 중에 “저번에 데레사는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단다. 아주 얌전하게 굴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응, 그럼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지옥에 가겠네... 그렇지만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가 천국에 갈 때 같이 올라갈 거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아 줄 텐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붙잡아 가실 수 있겠어?’ 엄마 품에 숨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데레사의 눈에서 똑똑히 보았단다...”어쩌면 네 살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이 20대에 이야기할 ‘사랑의 엘리베이터’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자신의 아빠에게 ‘나의 왕’, ‘사랑하는 임금님’이라고 불렀고, 마르탱은 자신의 막내딸인 데레사에게 ‘나의 작은 여왕’이라고 애칭했다.
마르탱 부인의 사후, 데레사의 성격이 변한다. 수줍어 하고 얌전해 졌으며 특히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 져서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어야 편했고 낯선 사람과 함께 있기 힘들었다. 그러기에 가족들은 더욱더 데레사를 잘 보살피려고 했으며, 아버지 마르탱은 예민한 데레사를 섬세하게 보살폈다. 이 시기에는 아빠와 낚시도 하러 다니고, 고해 성사를 기쁘게 하고, 엄마가 가르쳐 준 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렸다. 이러한 관상적 묵상과 기도들로 이때부터 데레사는 ‘이 세상이 귀양지처럼 여겨지고 하늘 나라를 꿈꾸게’ 되고, 참된 본향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8살이 되었을 때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너무 우수해서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2년 만에 학교를 도중 하차 한다. 9살이 되었을 때(1882년 10월) 두 번째 엄마인 폴린이 ‘가르멜’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고, 자신도 가르멜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해 말부터 두통이 계속 되다가 1883년 부활주일(3월) 이후에 아이들은 걸리지 않는 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그해 성령강림 주일(5월)즈음, 고통 중에 성모의 미소를 보고 몸이 낫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데레사는 이때의 고통이 자신이 꽤병은 아니었나 하는 마음에 가르멜에 입소해서도 고해 성사를 할 정도였다.
데레사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깊은 마음의 기도를 했는데 수도원에 입소하면 어떤 이름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기 예수님이 떠올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불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언니를 면회 간 길에 원장 수녀가 데레사에게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이름을 하자고 해서 예수님의 친절한 마음씨를 느꼈다.독서와 성화(聖畫)보기를 즐기면서 묵상 가운데 점점 더 예수님을 모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영성체를 받은 날에는 갈2:20절 말씀을 되뇌었는데, 예수님께서 많은 십자가를 지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이 큰 은혜를 받은 위로로 느꼈다.
1885년 5월 12살 무렵 피정 동안에 무서운 세심증이 생겼고 그 이후로 약 1년 반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이 무렵 기숙학교를 도중하차 한다. 세심증으로 인해 마리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마음이 편했는데 마리 언니마저 수녀원을 결정하면서, ‘오직 하나 뿐인 벗’은 예수님 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데레사는 또래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만은 모든 것을 말했다.
데레사에게 두 번의 기적은 앞서 기록한 투병중의 성모의 미소와 크리스마스의 은총이다. 데레사의 세심증과 타인에게 섬세한 반응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것 때문에 가족들은 힘든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데레사는 눈물을 흘렸다. 13세였던, 1886년 성탄절에 데레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다 하던 행사를 앞두고 아빠가 내년에는 데레사가 수녀회로 들어가니 ‘자, 다행히 올해로 끝이구나!’라고 한 말을 데레사가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데레사는 또 울음을 터뜨리고 크리스마스를 망칠 수 있었으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잃었던 마음의 힘을 되찾아 분위기 좋은 크리스마스를 지낼 수 있었다. 10년 동안 고치고 싶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 이 후로 데레사는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 져서 공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공부와 암송들 속에서 데레사는 여러 계시들을 경험한다.
2.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저는, ‘아주 작은’것 밖에는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는 ‘아주 작은 영혼’입니다. 게다가 마음에 많은 평화를 주는 이런 자그마한 희생조차 자주 놓쳐 버립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평화를 좀 덜 누리게 될 것을 참으며 다음에는 더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데레사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하느님, 저는 모두 선택합니다. 반쪽짜리 성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 선택’하오니, 저의 의지를 받아주소서”“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욕구를 불어넣으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작은 나도 성덕을 열망할 수 있어... 하지만 아주 곧고 짧은,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을 통해 하늘에 갈 방법을 찾고 싶어”
위대한 성인들처럼 되고 싶은데 그들처럼 되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서 그들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 올라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데레사는 자신을 많은 꽃 중 작은 꽃,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많은 붓 중에 작은 붓, 발에 밟히는 작은 모래 같다고 표현한다. 예수님 계신 곳 까지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로마 여행 중 보았던 엘리베이터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엘리베이터에 해당하는 말씀을 찾는다. 그녀는 잠언 9장 4절의 “누가 ‘아주 작은 자’이어거든 내게로 오라“라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품으로 자신을 초대한다고 보았다.또한, 이사야 66장 12-13절을 통해서 자신을 하늘에 올려줄 엘리베이터는 예수님의 팔이라고 해석했다. 이 ‘사랑의 엘리베이터’는 예수님께 안기어 은혜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히려 큰 사람이 될 필요가 없이 ‘작은’채로 있어야 했고, 점점 작아져야 했다.이것은, 막내였던 자신의 작음과 약함이 부모님과 언니들의 사랑을 받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했고, 불완전과 작음이 예수님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엄마 품에 안겨 천국에 가겠다던 그 꼬마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데레사는 자신의 작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의 바탕이 되며,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 문법 공부할 때 영적위로에 사로잡혀 공부 할 수 없을 정도 여서 단계적으로 묵상하면서 유혹이며 거짓 위로 라는 것을 파악하고 단호하게 결단 내렸을 때 유혹에서 벗어났다.
. 악한 영의 의도는 악한 지향을 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경험되는 거룩한 생각들은 거짓이 아닐수도 있다. 영 자체나, 영에 의해 발생된 생각이나 감정들은 선하거나 악한 경향이다. 악한 영이 위로를 드러냈다면 진행과정이 악으로 기울어 가는 것이지 위로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 없다. (위로 동안 경험되는 거룩한 생각, 느낌, 욕구들을 믿음의 행위로 표현하면 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정체가 파악되는 것이 중요하다. 위로 중 경험한 생각, 느낌, 충동은 버릴 필요가 없다.)
∴ 위로가 거짓임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
. 거짓 위로에 대한 분별은 더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 : 분별, 의지적 선택은 개인의 결단
. 악한 영의 속임수는 초반 감지 난이 ∴양심 성찰로 인지 가능
∴ 영적 분별 :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내면 성찰로 성숙해 가고자 선택하는 사람들의 몫
Ⅳ. 이냐시오의 영적분별의 전제와 한계
. 이냐시오의 사상과 영성의 요지 :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 “보다 더”
(1) 분별의 목적은 보다 나은 선택/하나님께 더 큰 영광/보다 나은 삶에 초점이 있다.
∴ 분별의 근본 목적 :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것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더 큰 영광
[토론 질문] 이것이 ‘욕심’으로 작용해서 오용/악용되지 않을까 (본인의 고민^^)
. 하나님의 영광
A. 하나님의 부르심의 삶/변화된 생명에 참여 → 기도와 관상
B. 하나님 나라 : 현재의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과정, 나는 하나님의 협력자
∴ 분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헌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며, 섬김의 삶을 추구)
. 선택의 조건 : 그 자체로 (중립적이거나)선한 것, 교회안에서 도움
(2) 자신의 강약, 성숙한 정도를 고려하여 개인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 성취되는 ‘하나님의 영광’ → 분별의 중요한 기준
. 이냐시오 분별의 한계 (Toner) : 개인의 성숙과정에 초점 둘 때, 분별의 의미가 풍성해진다.
(1)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2) 자유로운 선택 가운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선택의 범위 안에서
(3) 결단과 선택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
Ⅴ. 결 론
. 영적 분별 : 성숙의 과정에 분별의 경험에 부름 받음
. 결과보다 과정에 비중
. 분별 대상보다 분별하고 있는 자신이 중요
. 분별은 하나의 과정 : 선택과 결단에 메이지 말 것 (잘잘못을 따질 때 분별의 의미가 사라짐)
. 7가지 분별 도입 항목 : 기억, 직관, 몸, 상상력, 생각, 느낌 (←인간 내부), (인간 외부 →) 자연
. 자연을 통한 분별 질문의 의미 : 분별의 새로운 각도 (다른 피조물 앞에서, 피조물로써의 질문)
. 10장의 목적 (1) 기도할 때 자연 사용하는 것 편히 하기 (2) 자연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제공
[수련1] 자연 통해 분별에 접근하기 : 자연에 기반 한 분별 실습 (야외 혹은 자연 물체의 활용) (1) 하나님 원하시는 것 갈망, 내적 자유함 구하기 (2) 주변의 사물(생물, 무생물)에 관심 갖고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3) 분별하려는 결정을 다시 말하기, 물체와 함께 있는 동안 분별 질문도 함께 머물도록하기 : 수련2에서 계속 (4) 자연이 하는 말 들어보기, 영성일지 기록하기 (5) 자연 앞에서의 경험이 나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6) 결정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겠다는 갈망으로 가져가기 (7) 임시 결정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 7개 중에서 여러개가 같은 결정이면 확증과정의 시작
Ⅰ. 그리스도인은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가? (by Sallie McFague)
.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을 사랑하지 않고 지금도 그렇다. (자연에 대한 기독교 양면성과 영성생활과 연관성)
1.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함에 대한 연구 예
(1) 생태학자, 루터목사 Paul Santmire : 자연관점에서 기독교가 취한 두 노선(인간 영의 위치)
A. 자연 보다 위에 : 자연에 덜 호의적
B. 자연 안에 : 자기의식이 체화(embody?)된 자아가 생물학적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축하
(2) 신학자, 종교교수 Mark Wallace
. 기독교인과 자연사이 벌어진 틈 메우기 위해 성령에 대한 성경적 전통을 되살리려 하는 시도
(3) 수학, 철학, 관상가 Beatrice Bruteau : 우주기원 ~ 의식(신경 생물학) 연구 : 성육신과 삼위일체 신학숙고
2.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땅 안에, 땅위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by 성육신)
→(성육신 신학 확장) ‘성령이 모든 생명체의 가슴 안에서 그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힘으로 거주‘
(1)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성육신은 지금 여기(HERE&NOW)에서 성령의 체현(embodiment)로 나타남
(2) 본래 부모originary parent(하나님)을 기억나게 함 ∴삼위의 모든 위격들이 창조와의 긴밀한 연결
. 그리스도인들 안에 자연에 대한 인식 (1) 자연의 청지기 (2) 자연사랑? : 무의식적 불편함 (ex) 우상숭배의 장
3.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 (관점 변화) 자신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김→ 피조물의 작은 부분인 나를 알게 함
■ 기독교 영성의 정의 (아서 홀더 편집, 『기독교 영성 연구』 아서 홀더 편집, CLC, 2017)
“자신이 인식하게 된 궁극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경험” (the experience 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
(a) 궁극적 가치 :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 (b) 통합 : 전체로서의 인간 (영, 정신, 몸,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책임) . 믿음과 제자도의 삶 : 기독교 영성의 실존적 현상을 구성 (c) 경험 : 개인적이지만 내면적이지만은 않다. : 자기(self) 전체가 실재(reality)와 관련
4. 자연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 자연을 사랑하려면 자연을 알아야 한다.(관심, 듣고, 배우고, 존중)
- 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다가가기 → “자연을 통해 분별에 접근“의 기초 제공
- 자연 안에서 자연 통하여 하나님 찾기(실습이 필요한 경우도 있음) :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자체로 알고, 작은 풀잎에도 감사하는데 익숙해지면 이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하게 됨
[수련2] 자연으로부터 오는 계시 받아들이는데 초점 (상상력 통해서 대화하기) (1) 물체와 조용히 앉기 (2) 역사에 대해 묻기 : 태생, 어디에 있었나, 누가 만졌나/집었나/스쳐지나갔나, 어떻게 여기에 왔나.. (3) 내적 생활과 영성에 대해 묻기 : 연약함, 부드러움, 밀도, 다른 사물과의 관계 (4) 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인가? : 나의 직관에 대해, 깊은 내면에 대해 (5) 하나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A. 수련2의 요지 : 하나님은 모든 순간마다 창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분별의 성질이 달라진다. B. 수련2의 위험 : 실용주의 (무엇을 얻기 위해 자연을 이용함,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존중)
Ⅱ. 자연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자연의 정의)
: 모든 생명이 일어나는 곳, 의존하는 곳 (∴겸손하게 대하기)
. 성경 : 인간은 자연의 일부 (창1:1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자연(땅) : 하나님에 의해 창조, 피조물들로 구성되는 영역, 인간을 포함 (by 샌트마이어)
→ 자연은 과학에 의해 연구되고 성경적 신학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므로 분별 실습의 근거가 될 만함.
Ⅲ. 자연에 관하여 성경 전통이 가르쳐 주는 것 : “다스리다”
. 창세기 : 자연 안에 속한 인간, 독특한 책임 부여 – 질서와 평화 유지 (인간 with 다른 피조물들)
. 노아 이후 하나님과 동물 사이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 정지 : 자신의 보호와 식욕위해 동물 죽임
. 하나님의 본래 의도 : 동물 절대로 죽이지 않는 것
.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돌보심, 비옥함(신명기 약속의 땅, 광야에서 먹이심, 홍해, 시내산, 시편, 묵시, 신약)
Ⅳ.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자연 (자연에 대한 양면성) :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1) 이레네우스 vs 영지주의자(구원으로 안내하는 특별한 지식 소유함 주장)
. 자연 :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집 (“좋은 땅으로의 이주“ : land는 창조주가 새롭게 하신 earth)
(2) 아우구스티누스 : 영혼과 자연사이의 위계 구분 “새 땅으로의 이주”
. 피조물 :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 피조물 통해 하나님의 섭리 관상 ∴분별의 중요한 기초와 도입
(3) 칼뱅 : 죄로 인한 무질서가 창조에 침입했으나 하나님은 피조물에 진실하심
∴ 인간이 누리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합법적 공간
자연 관상 “오랫동안, 진지하고 신실하게 마음으로 살피며 반복해서 숙고“ 하며 하나님 관상으로 천천히..
→ 영혼에게 초점, 자연은 인간의 활동 무대로 정의 (분별의 도입 항목)
Ⅴ. 공동-창조자로 창조된 인간 (created co-creators) : 인간의 창조성
.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과 자유 의지로 주변 환경 안에 다른 것을 만듦으로 자기의 환경을 조성
.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 사역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 (ex) 산업혁명....
. 분별의 목표 : 어떻게 이 창조의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창조주와 뜻을 같이 하여 창조할 것인가?
토론질문1. 자연에서 분별 or 하나님 찾기가 불편한 이유가 교재에서는 우상숭배의 원인에 있다고 했다. 본인에게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어떤 이유일까?
토론질문2. 주변이나 본인이 자연에서 분별 or 하나님 찾기 경험 중 오버 했거나 오해 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보자.
영성지도와 신뢰를 읽으면서 ‘영적 발돋움’의 ‘환대’가 생각이 났다. 책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신뢰하면 환대하게 되고 환대가 가능하다면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또한 "누가 영성지도의 책임자인가"라는 것과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신다"는 것이 모든 상황에서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자존감과 안정감의 뿌리는 온전히 예수님을 향한 신뢰에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훈련하다가, 선교사가 된 이 후에야 인지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것중에 하나가 이 책에서 말한 ‘나를 신뢰함’인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하나님을 신뢰한 오랜 경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감지하는 다양한 방식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감지하는 ‘나를 신뢰함’도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책의 예에서는 주차장에서 ‘잠시 머무름’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한 방식이라고 했다. 어느 순간 나도 그 훈련에 돌입하면서 사실 행동이 이유 없이 많이 느려졌다. 매번 점검하고 물어보고 확인하고, 상황이 끝나고 나면 또 다시 이건 어떤 경우였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건지, 내 욕심인지, 사탄이 주는 마음인지.. 돌아보고 확인하고, 패턴을 분석한다.
월, 금요일에 강의를 나간다. 월요일은 2과목 6시간이라 미리 준비해야 해서 가능하면 주일 저녁은 시간을 비워두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 평소에 강의 준비를 못하는 관계로 주일 저녁이라도 강의를 준비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다. 토요일 저녁 평소에 연락 안하던 두 제자와 연락이 되면서 그중 여학생이 주일 저녁에 당장 보자는데 이미 몇 번 미뤄서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원망 했겠지만 그 동안의 패턴 분석이 있는 관계로 조용히) 하나님께 여쭤봤다. ‘이거 제 욕심으로 보는건가요? 압지의 타이밍인가요?’ 만나봐야 안다. 잔뜩 기대하는 마음과 엄청 피곤한 육체로 여학생을 만났는데 내가 던진 처음 질문의 답에서부터 아버지가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일 저녁에 대단히 늦게 집에 들어가면서 강의 준비에 은혜를 구했으나 강의 준비중 약 40%를 제대로 못하고 월요일 강의에 갔다. 이미 학생을 만났을 때 우리의 만남이 압지의 뜻 가운데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 마음 안에는 '제가 순종했으니까 지금 제게 필요한 은혜도 주세요!!!'가 있었다.) 강의에도 은혜가 있기를 구했다. 그런데 두 번째 강의에서 아는 것을 틀리게 말하고 실수하고... 스멀스멀 원망이 올라왔다. 밥도 못 먹고 6시간 연강에 두 번째 강의는 죽 쓰고 나니, 아버지께 심통이 났다. ‘너무 하시는거 아닌가요...’
월요일 저녁 약속장소로 이동 중에 ‘시험 때문에’ 출애굽기 강의를 들으려고 틀었는데 ‘하나님께 순종이 궁극적으로 은총이지만 과정은 고난일수 있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심통 부렸다고 아버지께서 금방 답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은 궁극적으로 은총‘인 것을 알지만 그 신뢰에 자주 금이 가는 것 같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나를 향한 사랑의 확증인 예수님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다. 어쨌거나 나로 하여금 오래 불평하지 못 하도록 강의를 듣게 하시고 저녁식사에서 만난 교회 안다니는 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는 말을 듣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한다. 강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수업이다. 수업 때 실수나 내 생각 대로 안되거나 평안함이 없으면 하나님께 심통을 부린다. 지난번도 마찬가지였는데 믿지 않는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내가 수업 잘 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저 깊은 곳의 나의 욕심을 들여다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계속 ‘무지’가 걸렸었는데 역시나 마지막 장면, ‘무지’가 깊이 마음에 남았다. 후기까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남아서 일부러 책을 읽은지 12시간이 지나서 글을 쓰는데도 ‘무지’의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느 책에서 인지 목사가 된 아들이 자신을 전도하고 가르친 부모님께 다시 복음을 전했을 때 ‘무지’와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부모님은 아무도 자신들에게 그렇게 복음을 이야기 해준 적이 없다며 왜 자기들은 이제야 복음을 듣게 된 건지 억울해 하셨다는 부분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무지’이야기를 읽을 때 여전히 교회에 다니고 교회의 리더이지만 ‘무지’와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팠다. 혹은 누군가 나를 봤을 때 ‘무지’와 같지 않을까? 건강한 리더와 공동체 안에서 나를 다듬어 가시기를 구한다.
7장에서는 허망시장에서 신실이 믿음을 증거하다가 먼저 천성으로 들어간다. ‘그 청년 바보의사’같은.. 참 믿음의 사람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보면서 ‘살아서 믿음을 잘 증거 할 만한 “착한” 사람들은 왜 먼저 데리고 가시고 (나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허울만 있고 고칠꺼 투성이인 욕심쟁이들은 세상에 남겨두시는 걸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어쩌면 먼저 떠난 이들은 먼저 선택 받았다는 생각을 해봤는데 신실이 떠나는 장면에서 남아 있는 자의 고난과 고통을 생각해보면, 신실의 경우는 더 복된 것 같다. 이 부분에서 더 큰 감동은 신실이 떠났지만 신실의 믿음의 고백으로 소망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생명을 얻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8장에서는 두마음, 세상집착, 돈사랑, 노랭이들과의 대화에서 ‘의도’와 ‘선택’의 미묘한 관계를 아버지 앞에서 잘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언가 결정할 때, 생각할 때 정말 ‘의식성찰’의 과정이 없이는 순간 선을 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는 매일 점검하지 않으면 매일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매일이 쉽지 않지만, 매일이 은혜일 수밖에 없는... 세겜 사람들 처럼 모두 잃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에게 또 기회를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한다.
9장에서는 데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생명수의 강‘에서 쉼을 얻고 10장에서는 언약의 열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거인에게 당하다가 벗어나게 된다. 나의 매일도 약속의 말씀이 없이는 살기 힘들다. 나의 ’두 마음‘의 실수 였을지 부르심을 따라 간 곳에서의 상처였을지...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하루 동안 마음이 정지된 적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말씀을 보는 것 뿐이어서 통독하던 대로 전도서를 읽는데 7:21에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회복 될 수 있었다.
11장에서 만난 목자들에게 위로와 경고와 지도(map)를 받고 예루살렘의 문을 보고 희망에 가득찬다. 12장에서 드디어 무지와 만나고 작은믿음이 강도 만난 이야기를 나눈다. 작은믿음이 어려움에 당한 이유를 생각하며 ’믿음‘이 중요하다고 시를 지었던 크리스찬이 15장의 성문 앞 강을 건너면서 자신의 행위와 죄에 더 집중하는 것이, 나와 같아 보였다. 평소에는 믿음의 승리자 인 것처럼 지내다가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중심이 내가 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크리스천 옆에 소망이 있었던 것처럼, 함께하는 좋은 공동체와 기도 동역자들이 천성 가는길에 함께 하기를 구한다. 13장에서는 목자들이 준 지도를 보지 않고 아첨쟁이를 따라 갔다가 그물에 갖혀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음을, 나의 마음도 매 순간이 이와 같음을 생각했다. 천사의 채찍을 기억하고, 마법의 땅을 무사히 통과한다. 14장에서 다시 무지와 만나지만, 역시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기만, 자신의 선으로 의롭다고 믿는 율법, 공로주의에 빠진 무지를 돕지 못 한다. 뒷걸음질 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서 제시하는 증상들이 내게 발생하는지 항상 점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가 아주 미묘해서 인지하기 힘들더라도 좋은 공동체 내에서 나를 계속 점검하며 그 나라 가기까지 건강한 믿음을 만들어 갈수 있는 은혜 주시길 기대한다.
영국의 평신도 설교자 존 번연(1628-1688년, 영국 엘스토우)은 10살에 청교도주의에 영향을 받고, 존 기퍼드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계속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1660년부터 1672년까지 베드포드 감옥에 있을 동안 이 책을 집필했다. 1678년에 1부 출판이후 1692년에 아내와 네아들의 순례이야기인 2부를 발표했다.원작 중 많은 부분이 없어져서 1862년에 George Offor가 편집하여 만든 것이 지금 까지 전해지고 있다.
2. 책 소개
저자는 서문에서 본인이 작정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표현한다. 단지 성도들의 걸어간 길을 기록하려던 것이 계속 머리에서 떠올라서 쓰다 보니,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가는 길에 관한 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천로역정의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이 버전은 편집자가 현대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다듬고 일러스트를 넣었다. 개인적으로 이전에 읽었던 천로역정 버전과 달라서 책 뒤쪽의 편집자 노트 읽기가 번거롭긴 했지만 편집자의 주석에 더 큰 은혜가 있었다. 지면관계상 자세히 나누지 못해 아쉽다.
3. 천로역정 (1~6장까지)
꿈속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꿈속에서 시작되는 배경이 ‘멸망의 도시’이고 주인공인 ‘크리스천’이라는 설명도 없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나오게 되는데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에서 나와서 처음에는 ‘좁은 문’을, ‘좁은 문’을 지나서는 ‘좁은 길’을 따라 ‘안전한 피난처인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1장은 ‘멸망의 도시’에서 말씀을 깨닫고 자신을 직면한 ‘크리스천’이 괴로움으로 인해 자신에게 익숙하고 안정된 멸망 받을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다. 2장에서는 유순한이나 옹고집처럼 세상길을 선택하지 않고 힘들지만 ‘좁은 길’을 선택 하고,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저절로 짐이 벗어지는 은혜를 맛보게 된다. 4장에서는 겸손의 골짜기를 건너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5장에서는 ‘신실’이라는 동역자와 함께 순례과정에 간증을 나눈다. 6장에서는 ‘허풍선’과의 만남을 통해 삶으로 열매 맺는 믿음을 이야기 한다.
4. 나의 이야기
‘신실’을 만났을 때 두 순례자가 같은 길을 지나왔지만, 각자 다른 어려움을 만났음을 알았다. 현대에서 믿음의 삶도 같은 성도라지만,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 어려움이나 해결해야 하는 "시험"이 다르므로 그에 따른 믿음의 결단이나 내용도 달라진다. 선교지 철수 후 한국에 들어와서 1년간 계속 아버지께 물어보는 시간을 갖다가 어찌어찌하여 신학교에 왔고 한국생활 3년차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아 재미있고 행복한 믿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로 ‘신실’과 ‘크리스천’이 같은 길에서 다른 상황을 겪었던 것을 읽고 있을 즈음에 나의 믿음의 색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딱 그 부분을 읽고 있던 시점이 아니었다면,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점검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했을 것이다. 고후 10:18절 말씀을 기대하며.....
2장을 읽었던 시간은, 영적으로 너무 고갈되어 있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시기였다. 방학중 바쁜 일정으로 하나님과 깊이 단둘이 머무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는데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또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으로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사울왕의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지난주 목사님과 멘토링 때 목사님께 새벽기도 회복 여부에 대해서 문의했는데 다시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신 것이, 최근 나의 상태는 나의 행위로 인한 영적 결과물이라는 ‘죄책감’이 생긴 것 같다. 책에서 ‘기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라도 기꺼이 계속 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구하고자 하는 자발성’(p62)이 영성지도의 본질적 요소라고 했다.
마음이 어려울 때 생각나는 동역자들에게 연락해서 기도 부탁을 한다. 그럼에도 수련회 전날 밤 너무 피곤한 채로 아무것도 못하고 잠들면서 지금으로서의 해결책은 휴학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께 올려 드렸다. 해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한 ‘나의 두려움’인지 휴학에 대한 아버지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검증이 필요했다. 두려움이면 직면하고 아버지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수련회 점심시간에 Y 대 졸업생과 약속이 있었다. 이 친구는 만날 때 마다 자신에게 있었던 영적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 개강이 월요일이었는데 일정이 꼬여서 주일 밤 늦게 까지 강의 준비가 안됬었다. 이 친구에게 기도 부탁을 밤늦게 했는데 그 전까지 이 친구는 최근 자기에게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기와 같아서 싫은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그런지 계속 머리가 아팠었다고 했다. Y대에서 나를 만났을때, 나의 이미지는 학생들이 보기에 1분도 흐트러 트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마져도 그 친구에게 시간이 없다 기도해 달라는 문자를 보내니..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 안하는 네 모습이야’라고 알려주셔서 머리 아픔 없이 꿀잠을 잘수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자유케 해주심에 감사하면서도 그 친구에게 ‘그럼 하나님이 나한테도 하실 말씀이 있을텐데...’ 휴학을 고려하고 있는 상황까지 같이 나누고 기도부탁을 했다. 그리고 수련회 찬양 중 ‘i’m no longer a slave to fear, I am a child of GOD’ 여기서 터졌다. 아버지께서 두려움 때문이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았고, 이제 부르심대로 일어나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다음곡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였다.) 그런데 분과 모임시간에 교수님이 예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못 하시던 분이면 하나님께 그 이미지가 투영되서 하나님이 무얼 주겠냐는 상태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에서 또 터졌다.
나의 믿음의 싸움을 보면 대게 시간과 재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훈련하는 분이냐고 반문할 정도로 그런 간증이 많다. 왜 그 부분만 그렇게 훈련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아빠의 이미지가 하나님께 영향을 못 미쳤다고 평소에 감사했는데 시간과 재정에 관해서는 나를 꽉 묶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의 특별한 훈련의 과정에 대한 답이 공동체 안에서 찾아졌다. 횃불은 나에게 주신 귀한 공동체이다. 이번학기에 더 이상 휴학 질문은 없다. 이번학기도 부르심대로 아버지와 함께 풍성히 누리게 되길 기대한다.
장로교 교회에서 자라난 나는 당연히 장신대를 가게 될줄 알았다. 극적으로 횃불에 2017년에 입학하게 되면서 이곳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왜 횃불인가요? 왜 지금인가요?’라고 자주 묻고 있다. 여러 가지로 답을 많이 주셨다.
책을 읽으면서도 굳이 내가 왜 횃불에 왔어야 했는가에 또 동의가 되었다. 2006년부터 2016년 2월까지 Y대에서 학생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그러면서 상담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혼자 맺었다. 상담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경험들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많이 변화시키셨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것들은 어디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라 ‘하나님 저 이단이에요?’ 계속 물었고, 책을 통해서라도 설교를 통해서라도 알려달라고 졸랐다. 어쩌면 횃불의 시간이 이때 질문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시간인 것 같다.
‘영성지도’의 의미와 목적 등을 읽으며,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성령님과 함께 하므로 신자와 불신자 상관없이 서로에게 영성지도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성지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지도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상담자가 결국 성령님이시기에 두 사람은 성령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대화는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므로 결국 지도자나 피지도자나 결국 성령님으로부터 얻게 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1학년 때 멘토링 때문에 담임목사님께 월1회 멘토링 받던 것을 지금도 받고 있다. 혼자 사역하는 나에게 학교와 목사님의 멘토링은 바로미터가 되어준다. 정기적 멘토링이 1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얼마 전 목사님께서 나와의 만남을 통해 본인도 깨닿는 부분이 있어서 기대가 된다고 하셨다. 항상 목사님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죄송했는데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학생들과 만날 때도 학생들이 변하게 되는 부분 뿐 아니라 내가 알게(경험하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어제밤 책을 이 읽고 있는데, 매주 만나던 A가 ‘다윗의 노래’를 보내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바로 그전 정시기도 시간에 월세 보다 십일조를 내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있는 돈을 털어서 십일조를 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아버지가 기대되고 신뢰가 되었다. 그런 마음이 생긴 것에 감사하고 기도를 간단히 마쳤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나보다. 신뢰한다고 하지만 또 이번 믿음의 모험이 나에게는 두려움이 수반되는 것이었는지 찬양을 틀면서 부터 울컥 눈물이 솟았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아버지 앞에 머물렀다. 작고 흔들리는 믿음이지만 믿음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믿음의 친구들을 곁에 주셔서 감사했다. A랑은 1년 남짓 만났다. A와 만나면서 하나님이 A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A가 자유케 되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게 하셔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목격하게 해준 하나님과 A에게 고마웠다. 그런데 A는 자기를 참아주고 기다려준 하나님과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웠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A를 통해 나를 위로하신다. 영적지도는 나이와 거리를 넘어 soul mate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에서 1906년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프로이센 궁정목사였던 할아버지인 가정배경에서 태어났고, 1945년에 사형당했다. 제자의 길과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참모습을 가르쳤다.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모인 고백교회의 목사후보생 교육기관의 책임자로 섬겼었고, 미국에 망명할 기회도 있었으나 독일로 돌아왔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43년에 체포되어 45년에 교수형 당했다. 칼바르트와 니버의 제자로도 알려졌다.
나치의 억압가운데 목사후보생 훈련원과 ‘형제의 집’이 폐쇄된 것이 이 책을 저술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정치, 교회, 개인적으로 긴장이 컸던 상황에서 저자는 4주간의 휴가 중에 이 책을 단숨에 저술하게 되었다.
2. 신도의 공동생활
천재 신학자라는 별명답게 이 책의 단락별 주제가 명확했다.
머리말에서는 간단하게 공동체의 문제는 교회적 책임이고,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만 해결될수 있는 문제임을 밝힌다. 첫장 ‘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영적 공동체와 정신적 공동체를 비교 설명하며 영적 공동체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여서 그런지, 아니면 히틀러가 사회에 보이고 있는 영향 때문인지 정신적 공동체를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명확하고 피부로 와 닿았다.
두 번째 장 ‘함께하는 날’에서는 공동생활의 아침 모임(시편 기도, 찬송, 성서읽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단음으로 함께 부르는 찬송과, 공동체 대표기도의 의미 등에 대해서 동의 하며 읽는 부분이 참 많았다. 식탁 교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신 것을 기억하고 실제 우리의 식탁 교제뿐 아니라 예수님의 성만찬, 하나님나라의 식탁 교제까지를 의미함을 상기시킨다. 식탁 교제를 통해 노동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뿐 아니라 노동의 열매를 주심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와 노동이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한다. ‘프랭크 루박’의 24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것과 통하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노동과 함께 하므로 기도와 노동은 서로에게 시너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말, 행동, 노동은 모두 기도가 된다고 한다. 점심 식사 시간은 짧은 휴식으로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하루를 위한 기도를 한다. 또한 저녁 식탁 교제와 마지막 기도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이 저녁 기도 시간에는 그날 하루의 상처를 치유하고, 잠 들었을 때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기를 구한다.
세 번째 ‘홀로 있는 날’에서는 전적으로 말씀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의 중요성을 말하고 네 번 째‘섬김’은 혀를 훈련하며 지체의 소중함을 발견하라고 조언한다. 공동체를 유지하지 위해서는 구체적 섬김이 필요하다. 마지막 장‘고해와 성만찬’에서는 타인에게 나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성만찬에 참여하라고 한다. 바로 여기서 교회의 기쁨이 완전해 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침시간은 괴롭힘 당하면 안 된다는 말에 대단히 동감했다. (물론 동감한 부분이 참 많은 책이어서 다른 책에 비해서 책에 별표를 마구 긋긴 했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 시간과 저녁에 마무리 하는 양쪽은 정말 나도 사수하고 싶은 시간이다. 저녁시간이 아직 바다가 완전히 고요해지지 않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창조 때 처럼 성령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시간과 같아서 그 시간에 부어지는 은혜가 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아침 시간은 절대 분주해 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공동 기도회 때는 아침 저녁으로 구약 한 장과 신약 반 장 이상을 함께 읽으라고 권면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참 꿈같은 가정 공동체를 상상했다. 자녀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말씀을 봉독하는 마음으로 깊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 아버지 제가 만나는 모든 가정이 이런 가정이, 이런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기도를 하게 되지요? 가끔 기도하다가 '내가 왜 이런 기도를 하지?' 할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여러가지 생각이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경험들을 잘 기록해 두어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러 크리스찬이 영적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있지만 서로 나누지 않아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이 깊은 이야기를 점검 해 보고 싶을때 당신에게는 이런 경험을 나눌 만한 친구가 있나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눌 만한 공동체가 있다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면 영성 지도자(Spiritual Director)를 만나실수 있습니다. 성령님과 셋이 함께 그 경험을 다시한번 들여다 볼때 하나님께서 모임을 통해 분별할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할수 있습니다.
영성 지도(여러가지로 불리지만 영어 번역을 직역한 '영성 지도'로 사용하겠습니다.)는
■ 상담이 아닙니다.
전문 심리 상담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경험한 것을 다시한번 기술하고 함께 하나님의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영성 지도자는 이런 과정에 훈련된 사람이고 자신도 영성 지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 영성 지도자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궁금한 것을 가지고 와서 답을 달라고 하시거나, 신학적인 설명을 요청할때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 갈때 아주 작은 신학적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당신이 찾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성 지도자도 영성 지도 시간에 어떤 대화가 이루어 질지 전혀 알수 없습니다. 영성 지도 시간은 성령님이 직접 지도하시고, 영성 지도자는 오랜 경험자로서 당신이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돕는 도우미 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님 앞에 머물러 성령님을 기대하면 됩니다.
3. 진행 방법
일대일로 하는 방법도 있고 그룹으로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커플일 경우 커플과 지도자가 함께 성령님 앞에 머물수 있습니다.
. 아래의 여러가지 방법들은 참여 인원에 따라 소요시간이 변동될수 있습니다.
. 모든 영성 지도자가 아래의 방법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영성 훈련(자연 묵상, 그림 묵상, 침묵 훈련, 예배, 의식 성찰, 호흡 기도, 금식 등...)들이 도구가 될수 있습니다.
. 영성 지도자는 처음 몇 회를 만나고 당신과 지도자가 잘 맞으면 기간을 정하고(대부분 6개월-12개월) 만나도 됩니다. 정기적으로 다양한 영성 지도자를 만나는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당신을 경험하므로, 다양하게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 방법 1. 만남의 시간에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약 30분) 그 말씀으로 영성 지도를 진행합니다. (약 20분-30분)
■ 방법 2. 일주일 혹은 일정 기간 말씀을 묵상하고 영성 일기를 기록하고 일기 내용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영성지도자와 만납니다. (약 50분)
■ 방법 3.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의식성찰) 영성 일기를 기록하고 일기 내용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영성지도자와 만납니다. (약 50분)
■ 방법 4. 만남의 시간에 함께 의식성찰을 하고 (약 30분) 의식 성찰한 내용으로 영성 지도를 진행합니다. (약 20분-30분)
■ 방법 5. 특별한 분별이 필요한 시간에 걸림이 있는 말씀이나 기도의 내용으로 영성 지도를 진행 할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분별은 어느 날 갑자기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과 친밀 할때 저절로 반복적으로 훈련되며, 특별한 분별의 시기에 크게 흔들림 없이 분별할수 있게 됩니다. 혼자서 일상에서의 훈련이 안될때 영적 공동체가 함께 하면 좋지만, 그런 환경이 안될때 영성 지도자를 정기적으로 만남으로 영적 근육이 쌓여 갈수 있습니다. 점 치듯이 어느날 갑자기 분별하겠다고 할 때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모르고 혼돈 스러워 하게 되기도 합니다.
방법 1, 4의 경우 혼자서 말씀을 집중해서 볼수 없고, 하나님과 친하고 싶은데 잘 안될때 시도해 보실 수 있습니다.
4. 영성 지도의 목표
4.1 하나님의 시각과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될수는 없습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말씀에 잠식되어 갈때, 말씀이 나를 점점더 점령하고 성령님의 반응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 곁에서 말씀하고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훈련이 되지 않아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영성 지도를 받다보면 점차 일상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타인을 나를 이해하고 일게 되는 당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4.2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것과 같은 자유로운 은혜의 리듬을 배우므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살다가 '천국'에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시는 본을 보이신 것은 저희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 처럼 하나님과 함께 자유로운 은혜의 리듬을 배우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8-30, 유진피터슨 메시지성경)
4.3 '하나님 나라'의 확장 입니다. 각 개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게 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 개인이 모여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우리의 차세대 들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남편과 아내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아빠가
세상의 모든 상사와 직원들이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제가 먼저 매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연습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청하시면
당신의 영적 동반자로
당신의 영적 여정에
작은 길동무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갈망하는 분들에게 재정 부담 없이 무료로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