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의 불확실의 시대(AD500-1500) 인물연구 ==

탁발 수도회_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2/2)

일자 : 2009. 4. 30 (목)

 

 

3. 인물중심의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 [13]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1226년) : 로마가톨릭 수도사

-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식 표현) 등으로도 음역

- 13세기 초에 프란체스코회(프란체스코 수도회) 설립으로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끈 교회개혁가[14]

- 1181년 이탈리아의 아시시 출생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

- 1202년 페루지아 전쟁에서 포로로 1년 생활

- 1204년 아풀리아 군사 원정 참전

- 1207년 아버지와 결별, 빈민 & 교회 재건 시작

- 1208년 마태복음 10:7-10절 말씀으로 정비

- 1209년 수도회 승인 (교황 이노센트 3세)

- 1212년 프란시스 시리아 선교시작, 클레어 수녀회 시작   

- 1216년 도미니크 수도회 시작

- 1219년 이집트의 회교군주(술탄)을 개종시도

- 1219년 프란시스회 북아프리카에 파송   

- 1220년 수도회 지도자 자리 사임           

- 1221년 ~ 기도와 찬송과 명상에 몰두 [15]

- 1226년 10월 3일 사망

- 1228년 성인 칭호 받음

- 1245년 프란시스 수도회 재산 소유 시작

  (엄수파(Rigorists, 스스로 성령파라 부름)들 리더쉽에서 제외되기 시작)

- 1255년 클레어 성인 칭호 받음

- 1256년 어거스틴 수도회 (교황 알렉산더 4세)

- 1540년 예수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4. 동시대 다른 인물과 대조, 비교, 종합

  프란시스와 동시대에 ‘도미니쿠스회’를 창립한 도미니쿠스가 있다. 도미니쿠스회와 프란시스회는 거의 무한한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의 사역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이 크게 강화 되었고 동시에 주교와 일반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축소 되었다. 도미니쿠스는 프란시스에 비해서 조직력은 뛰어났으나 프란시스회의 급속한 성장은 따를 수 없었다. 프란시스회는 대학 도시들에 자리를 잡아 저명한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나 도미니쿠스보다 더 가난한 자들의 수도회로 남았다.[16]

(클라라는 2.2에서 거론됨)

 

5. 선교적, 개인적 적용

  여러 책이나 웹싸이트에서 보아온 프란시스의 유명한 시[17]나 어록들이 있다. 최근 어떤 책[18]에서 “언제나 복음을 전하되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는 프란시스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았다. 짧지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었다.  4년 전부터 자주 들으면서 ‘자아’를 죽이는데 도움이 되던 CCM이 있다. 강명식의 ‘승리’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고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라는 곡이다. 프란시스가 사용한 말과는 약간 차원이 다르지만 바로 이 곡으로 나의 급하고 불 같은 성격이 조금씩 사그라 들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것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다. 어쩌면 그렇게 조금씩 주인되신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한걸음이 되고, 삶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작은 시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내 방법, 내가 급한데로 ‘논쟁’으로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기대하고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많이 필요함을 느꼈고, 프란시스의 말에 많은 동감이 되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 예수님도 결코 논쟁하지 않으셨고 단지 ‘진리를 증거’(요한복음 18:37)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만 하셨다. 나의 삶에서도 많은 말이 아닌 나의 삶으로 ‘진리를 증거’할 수 있기를 이번 과제를 하면서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래본다.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수확이 있었다.

  프란시스의 경건 생활과 그 경험에 대해 자주 접하게 되면서, 그에게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faith mission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안에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된다. ‘탁발 수도승’으로서, 아주 작은 것 조차 소유할 때 생기게 되는 인간의 욕심을 싹부터 잘라버리려던 그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본다.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나의 각오와는 달리, 세상과 비교하면서 나의 각오를 조금씩 타협하면서도 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기대했었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 있던 나를 프란시스의 삶과 얼마전의 큐티(롬12:3-8)말씀과 더불어 다시 세상과 비교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디모데후서 3장과 같이 경건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더라도 프란시스와 같이 경건의 능력이 삶에서 드러나는 한 사람, 그런 선교사가 되고 싶다.

 

 



[1] 세계선교역사, J. 허버트 케인, 기독교 문서 선교회

[3] 기독교 선교 역사 개관, 남전우, (web site download)

[4]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5] 영화를 찾아서 보고 과제를 하려고 찾다가 결국 웹에 있는 일부 만 볼 수 있었다.

[6] 교회사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7]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8] 중세교회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은성출판사

[9] 영화에서는 인노센트 3세가 프란시스의 발에 입맞추며 부와 권력의 횡포를 부린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10] 당시 교황 인노센트3세의 고백과 프란시스 수도회가 승인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의 돈과 명예를 멀리하려는 프란시스의 삶과 그의 흔적들, 당시 대중이 프란시스 개인과 수도회에 보인 존경,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프란시스의 신비한 경험들을 많이 다룬 것 등.

[11] 영화(Brother Sun, Sister Moon)에서는 클레어가 원래 프란시스의 약혼녀였다고 표현되어 있고 ‘예언자적대화의 선교(크리스천헤럴드)’에서는 클레어가 어릴 때부터 영적은사가 있었고, 클레어의 수녀원이 지역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2] http://www.francis.or.kr :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홈페이지

[13] 동시대의 주요한 수도회의 설립 연도 함께 표기 (볼드체)

[14] ‘프란시스 본인은 그런 생각이 있었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는 후대가 내린 평가가 아닌가 한다.

[15] 이 기간 중 성흔(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를 받았고 죽을때 까지 그 상처의 통증이 컸다고 한다.

[16] 기독교회사, 윌리스턴 워커,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7] “평화의 기도”는 모 교회에서 몇 년간 예배의 마지막에 부르기도 했다.

[18] 21세기 제자도 사역핸드북, 스티브&로이스 레이비, 복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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