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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스탠리 존스) (1/2)

by 말씀묵상과 영성지도 2023. 12. 9.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 스탠리 존스 ) (1/2)

 

스텐리 존스가 인도의 선교사로 18년 동안 섬기던 시점에 쓴 책이다. 저자가 쓴 29권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씌여 졌고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의 선교 초기에는 인도의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층 계급민을 위주로 선교를 했다. 인도 지식인들의 요청으로 선교의 방향을 지식인, 지도자 계층에도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힌두교인 인도 문화내에서 예수님께 반응하는 놀라운 인도인들을 경험한다. 더불어 인도인들 안에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님 처럼 살아야 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스탠리 존스, 김상근 역,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스텐리 존스는 1907년 스물 네 살에 인도에 처음 발을 딛고, 1973년 여든 아홉 살에 인도에서 생을 마쳤다. 저자가 사역하던 시기는 인도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본서에서 그들과 교제하는 예화들이 많이 나온다. 시대가 인물을 나은 걸까. 스텐리 존스 또한 1938년에 「타임」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했다.

 

스텐리 존스가 쓴 책들 중에는 「순례자의 노래」, 「원탁의 그리스도」,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하나님의 예스」 등이 있다. 1972년 여든 여덟 살에 저자가 뇌졸증 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쓴 책이 「하나님의 예스」이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를 읽으면서 스텐리 존스를 평가하는 놀라운 수식어 만큼이나 그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스」가 쓰여진 배경과 내용을 보면서[1] 저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신령한 고통은 기쁨을 낳는다”는 그의 고백에 절대 동의 한다. 말년에 본인에게 닥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맨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하루에 두 시간씩 명상(?)과 기도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보고서야 그동안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가 이해가 되었다.

 

그는 그저 논쟁 잘 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그가 책에서 고백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전 한 것 이었다.

강연에 쓸 원고를 준비하느라 책상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 논지는 기독교인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수양을 통해 인격적 완성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존경한다. 닮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게 이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이는 인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주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논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간증으로 전해진다고 주장한다. 내 삶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나눌 때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고, 도전하는 것이 간증이다. 저자는 논쟁이 아닌 간증으로 전도하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자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다. 관계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이다. 너와 나 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종교 사이에 미움과 반목이 아닌, 오래 참고 이해하는, 안아주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일성수와 세례의 문제는 뒤로하고 네 마음에 예수님이 인정이 되는가 물어본다. 형식의 짐을 지어 주기 보다 본질을 전하고자 하는 사역자의 사랑의 마음이 보인다. 사랑으로 하는 배려의 또 다른 예는 ‘기도’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무례하게 주면 기분이 나쁘다. 최근에도 많은 선교사님들이 비기독교인들과 헤어질 때 ‘제가 기도 하고 마칠께요’하고 무턱대고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한마디는 인도 뿐 아니라 내가 있던 중국에서도 거절 받지 않던 질문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사랑의 예로, 저자는 책에서 인도를 사랑한다고 여러 번 표현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부분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보다, ‘나는 인도의 양자이다’라고 표현한 곳이었다. ‘낮아짐’과 ‘타인에게 나의 소유권을 넘김’은 정말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그냥 넘겨버린 예수님의 사랑인 것 같다.

나는 ‘C국의 딸’이라고 생각해 적은 없던 것 같다. 그저 C족 선교사들 사이에서 C족 영역에 있는 선교사들을 ‘신C족’이라고는 했다. C족 학생들이 ‘교수님도 C족이에요?’하며 장난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결코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새로운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과 이어지는 주제로 선교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그들이 이해 가능 하게 그들의 몸짓(문화)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장한다. 1938년 탐바람 국제선교협회(IMC) 총회에서 스텐리 존스가 반박했던 주제인 ‘서구 문화 중심’의 기독교를 지양하고 각 문화에 맞게 해석하고 제시하는 복음을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과정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입고 있는 서구 문화가 기독교인 것 인냥,  선교지 사람들이 서구문화를 따르기를 강요했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서양 귀신이라며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스텐리 존스는 이부분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자리(HERE & NOW)에 계시다고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저 인도인이 예수님 이라고 말한다. 룽기를 입은 예수님이 인도의 길을 걷고 계시고, 갓을 쓴 예수님이 조선의 길을 걷고 계신데 선교사들은 무조건 양복에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에 우리가 성공적인 선교사라고 평가하는 허드슨 테일러나, 로띠문 같은 선교사들은 자신의 삶을 현지화, 상황화 하여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 갔고 그들에게 문화보다는 복음을, 형식 보다는 본질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1] 규장 (kyujang@kyujang.com) , “ “일어나라" 말씀에 "예스"로 일어나다,”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029,  2017 년 5 월 14 일 접속.

[2] KCM , “ Asia India Mission Map,” 「KCM」,

view-source:http://kcm.co.kr/mission/map/Asia/India/,  2017 년 5 월 13 일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