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의 직관과 감정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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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슐라이어마허의 생애

Ⅲ. 『종교론』

Ⅳ.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

Ⅴ. 나가는 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문이 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이성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Ⅳ.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

본문에서는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영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는 개인의 경험과 체험을 자신의 신학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데 직관은 종교 체험에 핵심적 전제이며, 감정은 직관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심리학, 종교학,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의 경험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직관과 감정을 거론하게 된 계기를 칸트의 인식론으로 본다. 인식 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로 직관과 감정을 제시하며, 직관은 종교 체험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토대의 기초가 되며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종교 체험에 관한 핵심적 전제가 된다. 독일어에서 슐라이어마허가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直觀)은 ‘철학의 용어로,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거나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등의 생각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6년 셀링(F. Schelling)에 의해 직관이 인간의 지적 기능으로 밝혀지면서 슐라이어마허가 직관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종교를 형이상학으로부터 구분하기 어렵게 되므로 『기독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그의 후기신학에서는 직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론』에서의 직관은 피히테와 셸링의 ‘지적 직관’과 대조하여 ‘감성적 직관’으로 규정한다고 최신한은 설명한다.

 

『종교론』의 둘째 강연인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직관에 대해 주로 다룬다. “종교는 우주의 영원하고 이상적인 내용과 본질에 대한, 그리고 무한자와 시간적인 존재(유한자) 가운데 있는 영원자에 대한 경건한 직관이며 느낌이다.”라고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한다.

 

감정 없는 직관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러한 직관은 올바른 근원도, 올바른 힘도 소유할 수 없다. 직관 없는 감정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은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서로 분리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무엇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 무엇인 것이다. 모든 감각적 지각이 나타나는 저 비밀스런 순간은 직관과 감정이 아직 분리되기 전에 있으며, 여기서 감각과 그 대상은 ..서로에게 흘러들어가 하나가된다... 이 얼마나 묘사하기 어려우며 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버리는지 나는 안다.

 

이러한 설명 후에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데, 편집자인 오토는 이 부분을 슐라이어마허의 영원자의 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라고 설명한다.

 

... 이 순간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 자체이다. 빠르고도 신비스럽게 한 형상과 한 사건이 우주의 형상으로 전개된다. 이 현상이 형성됨과 같이 나의 영혼은 늘 찾아오던 사랑스런 형태로 피해 들어간다... 성스러운 존재 그 자체와 같이 포용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눕는다. 이 순간 나는 이 무한한 세계의 영혼이다.

 

이렇게 무한자와의 계시나 대면인 종교는 신을 기술하는 형이상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종교만의 고유한 자리로 서기 위해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에 속할 수 없다. 이는 종교를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만 도덕적인 종교라고 주장한 칸트에 대한 반박으로도 해석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기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려고 한다.

 

위의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에서와 같이 『종교론』에서 말하는 직관은 우주에 대한 수동적 형태로서, 우주는 라틴어“Universum"로, 세계전체(Weltall-모든 세계)로 번역된다. (이러한 의미로 범신론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그는 ”만물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범신론의 오해로 부터 벗어난다.)

 

창세기를 예로 들어 신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을 걸어도 그가 신에게 화답하지 않았기에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직관의 주체는 능동적 활동성을 가진 우주이며, 개별적이고, 구별되고, 직접적인 지각으로 존재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신’대신 사용하는 ‘우주’개념은 스피노자의 ‘실체’와 관계가 있다고도 해석한다. 그가 ‘신’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사용하는 신 개념이 도리어 사고를 협소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신한은 ‘우주’가 ‘신’개념을 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주’는 ‘신’ 개념을 넘어서는 진정한 ‘무한자’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 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우주와 관계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사고와 의지로는 신에게 도달 할 수 없지만 신의 영역에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직관과 감정이며, 그 것 또한 순간적으로 접촉되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도 없으며, 직관하는 개인은 무한자의 일부만 파악 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종교의 경지는 유한자와 무한자가 접촉하는 바로 이 순간이다. 진정한 생명은 유한자가 무한자와 함께 있을 때 가능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이 유무한의 합일의 순간은 감성적이다.

 

스피노자의 합일은 이성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성적 직관이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이면서도 고차원적이다. 또한 칸트의 이론적 직관을 능가하는 체험적 직관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감 능력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한다.(오토는 보편적인 모든 사람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한자를 직관하려는 욕구를 상실한 이는 어떠한 시금석도 소유하지 못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매 순간 우리에게 계시된다...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관과 감정이 모든 곳에서 흘러 넘치고 있으므로 겸손과 인내로 모두에게 관용적이어야 하며,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감정의 강도, 갈망이 간절할수록 중단됨 없이 무한자에게 사로잡히게 되므로 경건한 감정을 길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직관들 중 자연과 인간성 영역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개하고 독자들에게 종교를 먼저 소유하고, 그 종교를 의식해보라고 제안하므로 마무리한다.

 

감정에 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리했던 것들과 유사하게, 경외, 겸손, 사랑, 감사, 연민, 통회 등의 감정들을 대표적으로 말하면서 이외의 다른 모든 감정들도 종교라고 말한다. “감정이 종교의 가장 고결한 부분”인데 이러한 고결한 감정들이 생길 때 그것을 도덕의 자리에 내어주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주를 직관하면서 생기는 의식으로 직관이 무한자를 향해 개방되었다면, 감정은 직관이 심정에 남기는 흔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감정은 유한자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유한자 입장에서는 도덕적 행위로 인한 자발적 동기가 작동하지 않는 순수하게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이런 행위를 유발하려고 하고 충동질한다면 미신으로 빠지게 될 것을 경고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종교가 “교리적인 종교”가 아니고 “철저한 가슴의 종교”이며, 그에게 있어 교회는 “모든 인간 제도들과 관심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야한다”고 고백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 였던 그의 상황에서, 교리중심의 기독교로 인해 지식인들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기독교를 바르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종교는 맹목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초월적 체험이고, 그 초월적 체험을 통해 늘 무한자를 향해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영성”의 창시자인 샌드라 슈나이더스가 말하는 영성의 정의와도 맥이 통한다.

 

Ⅴ. 나가는 말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으로 종교를 규정하고 『기독교신앙』에서 경건한 심정과 절대 의존 감정으로 신앙을 전개하므로 슐라이어마허는 ‘경건한 감정’의 신학자가 된다. ‘기독교 영성’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기독교 신학자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단지 부흥현상의 관찰과 분석 차원에서 감정을 다루었다면, 기독교(종교)와 신앙의 정의 차원에서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기독교 영성에서 강조하는 경험과 ‘영성지도’에서 주요한 도구인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발견하였다. 앞으로 기독교 영성분야에서,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하여 연구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교양인’이 누구일까에 집중 하기 보다,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에서 교양인들의 무시를 받은 신앙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던 그의 열망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절대자와의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spiritual but not religion)라는 작금의 세대에게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 많이 오해되어 있는 슐라이어마허의 이론이 제대로 한국 교회에 소개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꾸준히 슐라이어마허를 소개해 오신 많은 신학자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종교론』에서 “세계를 직관하고 종교를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은 먼저 인간성을 발견해야”, “인간성 자체는 여러분에게 고유한 우주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성 자체가 우주에 관계하고 개별자와 일자 사이의 중간자이면서 무한자에 이르는 휴식처라는 표현으로 인간성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연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2007년 한국에서 출판된 론다 번의 『시크릿』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우주의 기운’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부류의 책들에서 말하는 ‘우주’가 슐라이어마허의 ‘우주’개념과 연결되어 있는지 조사해 보고 싶다. 슐라이어마허의 ‘우주’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같다고 했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조금 더 깊이 알기위해서는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아마 스피노자를 공부하다 보면, 론다 번이나 가브리엘 번스타인 등의 우주의 에너지와 관련된 책들과 맛닿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용어의 정의를 하고 진행하고 싶었는데 너무 다룰 것들이 많아서 일일이 정의하지 못하고 진행한 부분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논문을 접하면서 (이전에 교수님이 한번 지적하신,) 주제가 자주 산으로 가기도 했다. 실은 『기독교신앙』에서 ‘절대 의존 감정’까지 정리하던 도중에 포기했다. 너무 모르는 분야라 방대한 모든 부분을 알고 싶어 하던 나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여 논문의 질이 많이 떨어진 부분이 아쉽다. 국내의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독일어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번 슐라이어마허의 책을 읽으면서 왜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의 글에 대한, 이러저러한 다양한 해석을 읽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영감 있는 설교자로 주목 받았던” 그가 설교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생한 표현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독일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된 기간이었다.

 

몇 년 동안 슐라이어마허를 한번 공부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신학교 최종 졸업하는 마지막 학기에 처음으로 인간론 수업에서 정식으로 소개를 받고 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학교와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슐라이어마허, 『기독교신앙』, 최신한 역. 서울: 한길사. 2006.

슐라이어마허. 『종교론』. 최신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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