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1장.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인간론 (2/2)

더보기

목차

 

Ⅰ. 성서에 나타난 인간이해

Ⅱ.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론

Ⅲ. 고대 그리스 철학과 초기 교회의 인간론

Ⅳ. 중세의 인간론 : 토마스 아퀴나스

Ⅴ.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 : 인간론 보다 “중간기” 에 대한 논쟁

Ⅵ. 16-17세기 개혁교회의 인간론

Ⅶ. 근대 이후의 인간론 : 이원론적 인간론에 대한 도전

윤철호 저.  <인간>.  새물결플러스 . 2017.

Ⅳ. 중세의 인간론 :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 가톨릭 신학의 대부, 1225-1274)

. 아퀴나스의 인간론 =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적 인간론 +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론

. 아리스토텔레스 인간론 : 형상(form)과 질료(matter) 두 형이상학적 원리의 연합으로 실체구성

  - 형상과 질료는 홀로 존재 불가능

  - 질료를 조직하여 인간을 생성하는 원리, 인간 기 인간은 질료(흙, 공기, 불, 물)로 만들어짐

  - 형상(영혼)은 능과 능력을 현실화 함

 

(1)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 질료-형상론에 의해 영혼을 몸의 형상으로 봄

  . 몸(동물, 인간본성의 부분) + 영혼(자연의 한 부분) = 완전한 인격체 (실체적 통일성)

(2) 아우구스티누스 이론 : 영혼은 독자적 실체로 몸의 사후에 영혼은 생존 가능

  . 영혼 : 몸의 형상, 지성적 실체, 영혼은 몸 없이 존재 가능

 

. 가톨릭 교회 인간론 : 아퀴나스의 견해 따름+몸과 영혼의 연합 강조

  - 영혼은 몸의 형상이지만 영과 물질은 하나의 본성을 형성

  -  사후에 몸과 분리된 영혼은 생존함 (이원론)

  -  “죽음, 즉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될 때, 인간의 몸은 썩고,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된 자신의 몸과의 재연합을 기다린다.”

 

Ⅴ.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 : 인간론 보다 “중간기”에 대한 논쟁

. 몸과 영혼이 따로 존재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중간기에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의식을 갖고 있는가 : 루터(잠잔다.), 칼뱅(깨어있다.), 가톨릭(깨어있다.)

 

1. 마르틴 루터의 인간론

: 철학적으로 숙고하는 인간

: 작용인(하나님)과 목적인(영생) 관계에서 신학적으로 숙고하는 인간 사이의 구별 중요

. 교회전통 인간론 정의 수용 : 인간은 이성, 감각, 몸을 가진 동물이다.

  - 이성 : 인간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함,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요소

.“인간은 육체와 살아 있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고 죄가 없으며, 따라서 번성하고 창조세계를 지배하며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인간의 두 영역 :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하나님과의 삶이 예정되어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 영원한 생명을 향한 삶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삶을 위해 창조됨)

. “영원한 생명, 두려움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 모든 선한 것을 포함하는 가장 탁월한 어떤 것”

.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므로 지성, 의지, 기억, 육체적 능력의 기형화와 죽음에 이름

. 죄는 인간의 근원인 하나님과 자신의 운명인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표시

. 복음 :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원래 인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3:28, 인간의 정의) →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로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이 가능해 진다.

 

2) “칭의” : 교부들의 성육신 기독론을 적용

. 이레나이우스 : “그리스도를 우리처럼 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분처럼 되도록 하기 위함“

→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된 것은 우리도 예수님 처럼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함

. 그리스도는 (인격에 있어서) 참 하나님이다. : “하나님의 진노를 그 자신 안에서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피조물의사역이 아니라 신적 능력의 사역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자신 안에서 정복하는 그리스도는 본성상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 루터의 칭의 “행복한 교환” :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붙듦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2. 칼뱅의 인간론

. 모든 지혜는 두 부분으로 나뉨 : 하나님에 대한 지식 & 자신에 대한 지식

.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일깨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을 잡아 끌어 그분에게로 인도한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 : 이 두 지식은 서로 뒤얽혀 있으나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먼저 요구 한다.

 

a. 두 가지 계약 아래 있는 인간 →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율법과 복음은 하나가 된다.

. 이중적 지식 : 인간에 대한 성서의 지식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이중적 지식

  - 율법 : 인간 본래 모습(율법)과 비교하여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함 → 영생의 필수 전제조건

  - 복음 : 인간 실제 모습 뿐 아니라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도록 거듭나게 함

b. 영혼과 몸, 하나님의 형상

. 아우구스티누스 이원론적 인간론 계승

. 영혼(형체 없는 실체로, 몸 안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 불멸)과 몸은 형이상학적으로 구별

. 영혼은 죽음 후 즉시 안식, “그리스도와 교제”(중간기)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을 기다림

. 인간의 본성 :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온전함. 인간의 악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부패’로 발생

. 하나님의 형상 : 영혼이 가장 적절한 자리이나, 영혼에 제한하지 않고 전체 인격→죄로 파괴

인간 안에, 심지어 몸 자체 안에, 불꽃이 빛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 타락한 인간의 상태 (모호) : 하나님의 형상이 미미하게 남아있다? or 남아 있지 않다?

. 회복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 회복 (“그리스도가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같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참된 경건, 의, 순수함, 지성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Ⅵ. 16-17세기 개혁교회의 인간론

1. 두 가지 계약 아래 있는 인간

. 개혁교회 전통은 칼뱅의 이중적 이해에 기초하여 두 가지 계약 관점에서 이중적인 인간 이해

(1) 창조계약(율법계약, 행위계약)

.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됨, 율법과 행위로 존재

. 자연으로부터 알려짐

. 이스라엘의 존재는 행위계약으로 발생함

. 조건적(지키면.. 안지키면.., 8), 지상에서의 문제가 아니고 의와 영원한 하늘의 기쁨과 관계

 

(2) 은혜계약

. 타락 때문에 창조계약이 성립 안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생명)

.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됨

 

(3) 율법 : 창조계약 안에서 만족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단순히 무죄 선고 할 수 없다.→JC의 순종

.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적 의를 반영한다.

.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을 반영하는 인간 내면의 의, 거룩함, 순종 포함

 

(4) 예수 그리스도 : JC의 순종(인간 JC, 둘째 아담)

→ 아담과 인간의 모든 불순종을 총괄 갱신 하고 은혜계약 성취

. 예수는 행위계약 성취한 신실한 이스라엘이며 우리는 그 승리로 은혜계약의 약속을 상속받음

. (호튼) “둘째 아담에 의해 창조계약이 성취되어야만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실현되며, 은혜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2.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형상” 정의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아담이 창조될 때 부여받은 “참된 의와 거룩함”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 의, 참된 거룩함을 부여받은 인간이며,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인간이며,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또한 이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율법을 위반 할 수 있는 인간이다...“

 

(2)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 (우르시누스) 일부 상실, 일부 잔여

. (존 머레이, 칼뱅주의) 인간은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몸이다.

. (튜레틴, 칼뱅주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이지만 몸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몸도 불멸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남자는 여자 위에 있다고 주장.(고전 11:7)

. (루터파)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 : 타락으로 형상(본질, 의지, 지성) 상실

. (개혁파)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 : 타락 후에도 일부가 남아 스스로 결정력을 지닌 이성적 존재

. (베르카워) 중간입장 : 인간의 본질, 의지, 지성은 상실되지 않았지만, 초자연적 의와 거룩함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 되었음을 전제 한다.

 

Ⅶ. 근대 이후의 인간론 : 이원론적 인간론에 대한 도전

1) 데카르트 : 이원론적 상호주의 또는 통일주의

. (전통적 이원론적 인간론) “몸과 참으로 구별되며 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 : 물질 (연장된 실체?)

. 영혼 : 자아의 본질을 구성하는 형체 없는 (의식적, 사고적) 실체, 몸의 사후에도 생존

. 살아 있는 동안 몸과 영혼은 상호작용하며 통일된 전체를 형성한다.

 

2) 전통적 이원론에 대한 도전

. 신경생물학 : 정신 능력이 뇌와 유기체에 의존하므로 뇌의 특정 부분의 손상은 정신 능력의 장애, 손실 초래한다. ∴ 정신 현상이 뇌의 결과물이라면 영혼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음.

. 성서학 : 영, 혼 개념들은 몸 없이 존재 불가능하다고 주장. 이원론은 헬레니즘의 산물로 간주

  . 히브리인들에게는 (루아흐), (프쉬케)이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호흡, 생명의 힘과 연관됨

  . (오스카 쿨만) 성경에서 이원론을 가르치지 않음. 기독교의 사후 희망은 예수와 같은 몸의 부활

  → 비이원론적 기독교 인간론의 성서적 근거 제공

 

<인간> 1장.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인간론 (1/2)

더보기

목차

 

Ⅰ. 성서에 나타난 인간이해

Ⅱ.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론

Ⅲ. 고대 그리스 철학과 초기 교회의 인간론

Ⅳ. 중세의 인간론 : 토마스 아퀴나스

Ⅴ.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 : 인간론 보다 “중간기” 에 대한 논쟁

Ⅵ. 16-17세기 개혁교회의 인간론

Ⅶ. 근대 이후의 인간론 : 이원론적 인간론에 대한 도전

Ⅰ. 성서에 나타난 인간이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성서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표현된다.(시 8:4-5) 그 이유는 구약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창 1:26-27) 이러한 구절은 기독교 인간론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한다.

 

윤철호 저.&nbsp; <인간>.&nbsp; 새물결플러스 . 2017.

1. 초기 교회 교부

. 창조자가 직접 주신 인간의 영혼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네샤마,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 living soul)이 되니라 )

. 영혼과 몸의 분리 (플라톤의 이분법)

. 유스티누스 :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이성적 동물

. 고전적 기독교 인간론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 플라톤적 개념인 ‘이성적 영혼’과 동일시 함.

. 플라톤적 인간 개념 : 영혼만이 참된 자아

.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이며, 생명의 원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 정신-육체의 통일체로 이해했으나, 인간의 영혼은 스스로 존재,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음

 

2. 구약성서

. 네페쉬 하야(생령, 살아있는 영혼) : 몸과 분리될 수 없는 몸의 생명 원리

. 네페쉬 : 영혼, (해부학적)목구멍, 목, 위장 / 활력, 생명력 / 비물질적 부분이 아닌, “전체 인격” 나타냄 ∴ 비물질적 실체인 ‘영혼’보다 인격, 자아, , 나 자신 등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합

. 영혼(네페쉬)은 하나님의 영을 필요로 함

. 하나님의 영은 은유적으로 숨(생기, 네샤마) 이나 바람(루아흐)로 표현

  : 영혼(네페쉬)를 생기(animate)있게 하므로 몸을 생기 있게 ∴ 생명의 기원은 신적 영에 있다.

  : ‘생령’(살아 있는 영혼(존재))이 되는 것은 오직 영을 통해서 이다.

.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 다른 동물들도 네페쉬를 지니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속에 존재하고, 다른 피조물에 대해 ‘창조주를 나타내도록 부름 받았다’

 

3. 지속적 창조와 진화 (창발적 진화*)

*창발적진화 : (네이버 국어사전) 진화는 각 단계마다 그 전 단계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면서도, 그 전 단계에 있었던 요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이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며 발전한다는 학설 

 

. 창 1장의 창조기록은 BC 6, 바빌로니아의 지혜로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증언 한다.
  ∴ 현대의 자연과학으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증언 할 것이 요구됨

. “성서는 진화의 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화를 통해 출현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진화 개념이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속적 창조(사48:6 ) 개념과 양립되기 위해서는 진화 과정에서의 새로움과 우연성의 요소를 인정해야 한다.”(p24)

. 생물학자 로이드 모건의 “창발적(emergent, 유기적 organic) 진화“ 개념 : 진화 단계에서 과거 조건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창발’, 진화 과정의 변이 보다 유기 조직의 새로운 설계필요

. 판넨베르크(1928.10-2014.9, 독일 개신교 루터교회 신학자)는 진화론을 생명이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창발 과정으로 이해할 경우 신학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 창발적 진화 개념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요소가 진화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활동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 창발적 진화론은 다윈의 기계, 환원주의적 진화론의 방식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 개념과도 양립 가능 (인간 영혼의 유신론적 창발론, 후성적 진화 개념 )

 

 

Ⅱ.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론

. 구약성서 : 히브리적 일원론적 인간론 (통일체)

. 신약성서 :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영향 존재 (플라톤)

∴ 서구 기독교 역사는 이원론과 비이원론이 공존하므로 통일적이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역사 속 이원론적 영혼 불멸사상

(1) 이원론적 영혼 불멸사상 : 몸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하나님께 간다.

(2) 몸이 부활한다.

→ (종합) 몸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며 마지막 날에 영혼은 부활한 (혹은 변화된) 몸을 받는다.

 

1. 낸시 머피 (Nancey Murphy) : 기독교에서 인격 구성에 대한 3시기

(1) 히브리에서 주변 지중해로 퍼져가는 시기 : 비이원론 (통일체)

(2) 아리스토텔레스 부흥기 : 이원론, 영혼 중심 이지만 육체와 밀접한 관계

(3) 성서 비평학과 비판적 교회 역사학에 대한 응답의 시기

  (예) 18-19C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 (계몽주의 확산 시기) : 기적의 역사성이 의심받고 사후 영혼 불멸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희망 (영혼-몸 이원론에서 영혼의 가치 )

 

2. 로빈슨 (Wheeler Robinson) - 20C 초

(1) 구약(히브리적) 인격 이해 : 영혼이 아니고 생기 있는 몸(animated body)

(2) 신약 인격 이해 : 일원론적 (통일적) -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psyche, pneuma)은 존재한다는 믿음.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몸 없이 일시적 존재(완전하지 않음)

 

3. 신정통주의자(칼 바르트) & 성서신학 운동가 (20C 중반) : 히브리적 사고지지

4. 불트만 : 인격을 가리키기 위해 바울이 몸(soma)을 사용

 

5. 쿨만 : 성서에서는 전체적 죽음과 전체적 부활을 말함

 

 

Ⅲ. 고대 그리스 철학과 초기 교회의 인간론

1. 히브리의 인간 이해

. 긍정적, 통전적 인간 이해

. 인간의 몸과 영혼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았다고 믿음

. 영혼은 몸과 분리 할 수 없는 관계 (생명의 원리로 이해)

 

2. 그리스-로마의 인간 이해

. 이원론 : 몸과 영혼을 대조적이며, 역설적으로 결합된 존재로 이해 (구원 : 영혼의 해방)
. 플라톤 : “불멸의 영혼이 사멸하는 몸에 갇혀있다“ 영혼의 3계층이 조화 될 때 인간은 행복함
   (1) 이성 (지배 계급) : 이성적 영혼은 죽음 후에 이데아(형상, 영원한 실재)로 돌아감
   (2) 영 (군인 계급) : 동물도 소유
   (3) 욕구 (소비자 계급)
. 아리스토텔레스 : 영혼은 인간의 속성을 제공해 주는 생명의 원리 (형상>영혼>이성>누스)
    . 영혼 : 영양적(성장, 번식의 힘), 감각적(운동과 지각의 힘), 이성적(인간만이 가진)힘이 있음 (p31)
    . 누스(nous, 이성의 한 부분) : 사후에도 존재, 비인격적, 이성적 능력이므로 불멸과 관계없음
    . 영혼과 몸은 시력과 눈의 관계이므로 영혼(몸의 기능을 위한 원리)은 몸과 함께 죽음
    . 모든 물질은 물질(몸)과 형상(영혼)으로 구성
    . 형상 : 물질적 존재의 본질적 성격, 힘을 부여하는 내재적 원리 (영혼은 형상의 하나)

 

3. 초기 교회 교부 : 신구약 중간기에 헬레니즘의 영향이 커짐 → 신약성서, 초대교회에 이원론 영향

A. 교부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플라톤 주의자들 (몸은 죽고 썩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는 믿음)
B. 초기교회 : 삼분설과 이분설


(1) 삼분설(삼원론) : 몸, 혼(영과 몸 중재하고 연결), 영(하나님과 관계 갖는 본질적 자아)

.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교회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이론 : 현대 신학적 인간론 수립에 중요한 방법론적 함의 제공
  - 인간에 대한 진리가 모든 이성적 인간을 위한 진리가 되야 하므로 하나님 형상의 기독교 인간 이해를 그리스-로마 철학과 과학, 의학에서의 인간 이해와 연결시키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이해(식물적, 동물적, 지성적 힘으로 구분)를 받아들임
  - 바울이 몸, 혼, 영으로 구별한다고 주장(살전 5:23)

(2) 이분설(이원론) : 서로 다른 형이상학적 실체인 영혼과 몸으로 구성
. 라틴 교부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 서방 교회의 표준적 인간론
. 아우구스티누스 이론 : 별개의 두 실체인 영혼(참된 인간의 자리)과 몸(도구)으로 구성
  - 인간의 자아는 영혼과 동일(플라톤), 몸에 갇혀 있지 않은 영혼은 불멸한다.

  - 영혼 : 의지, 지성, 욕구의 계층적 질서를 이루며, 몸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몸을 움직일수 있게 하며,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 구원의 수단으로 몸에 갖혀 있는 영혼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 가질 수 있도록 계발. 몸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은 의존하지 않으며, 영적 실체로 영혼은 몸의 사후에도 불멸한다.

 

C. 인간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인간 존재,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중)

 

D. 교부들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중심 (다른 피조물과 구별/그레고리오스)

 

E.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 여러 관점에서 이해

(1)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정신적, 영적 존재 (자연의 일부이지만 다른 피조물과 구별)

-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정신(영혼)의 활동 : 하나님 알고 사랑 하기

- 아우구스티누스 : 영혼만 하나님의 형상. 정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때 하나님께 이끌림

(2) 하나님을 유비적으로 나타냄 : 인간의 정신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동일성이 있음

- 아우구스티누스 : 삼위일체와 동일성을 인간 정신 안에서 발견(인간의 기억, 이해, 사랑(의지))

- 모든 교부들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정신에만 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몸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는 않았음.

(3) 인간의 자유 : 신적 본성이 인간의 본성에 각인된 것 (그레고리오스)

- 자유의 본질 :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 되는데 있음. 의지에 의해 자유가 행사된다. 의지는 삶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며, 탁월함(덕)과 번영을 지향하도록 한다. 덕이 성장함에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므로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4) 죄와의 관계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발견 : 죄로 인해 흐려지고 망가짐 (훼손, 손상)

(5)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다.

- “첫 번째 창조에 나타난 인간과 완성의 때에 나타날 인간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스)

- 형상과 모양 구별 : “형상”창조 때의 인간, “모양”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 회복된 인간

- 신화(theosis, divinization, deification) : 인간이 하나님 “같이(like)“되는 것

  ∴ 인간 삶의 목적 : 하나님과 교제, 신적 삶의 공유

  →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만 가능“

. 동방:”우리가 신적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아타나시오스

. 서방:“하나님이었던 그가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었던 자들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 아우구스티누스 (바울의 양자 개념과 유사)

(6)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연결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육체를 중요시 하였다.

- 그레고리오스 : 영혼은 육체 없이 생명을 가질 수 없다. 영육은 함께 만들어짐.“동일한 시작”

- 막시무스 : 영육이 전인적 인간을 위한 분리 할 수 없는 부분이다.

- 신앙고백(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육체적 부활로 육체의 중요성 강조

- 아우구스티누스 : 몸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속한다.(p37) 몸과 연합하지 못하는 동안 영혼은 자신이 되지 못함

- 부활신학 : “영혼이 다시 이 몸을 받을 때에만..영혼은 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갖게 된다.”

정신-육체 통일체로서의 기독교 인간론의 토대가 됨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2/2)

더보기

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성경적 견해

창세기 1:31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근거로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초적 견해이다.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에서는 인간의 한계, 육체와 개체성이 죄는 아니며, 죽음이 공포를 만들어내므로 악의 원인이 되지만 죽음 자체가 악은 아니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안에 있으므로 이 또한 악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전체를 실행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있는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부분을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국가 조차도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마태복음 6:27-34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v34)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염려)임을 알려준다.

창조론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유한한 생명의 시간동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없고, 구원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초월성으로 개인의 의식이 최고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며 아무리 의식이 강하더라도 세계 전체를 종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죽음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이 있고, 그러므로 현실의 질서가 악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2) 고전적 견해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관념론과 신비주의와 혼합된 기독교 전통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하다는 성서의 견해와 다르다.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인간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벌로 유한적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이론은 죄의 상징과 결과가 성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죄와 악을 무지와 동일시한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무지가 죄라고 가르쳤고, 글레멘스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과 무지가 무의식적으로 충동질 하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헬레니즘과 성서를 조화시켜 죄의 본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연(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누군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신적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바울의 신학과 니버의 주장

바울의 신학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롬 5:12)라고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를 동일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죽음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음에도,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항상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연결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 불확실성과 의존성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고 의존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38-29절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처럼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죄의 근원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인데 죄를 유발하는 것의 큰 특징은 두려움이다.

 

죽음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랍비 전통에 따라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너는 흙이니”(창3:19)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를 형벌로 해석한다면 혹시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은혜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이 유한적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설명하지만,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었다고 믿게 함으로 인간 실존의 역설을 왜곡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으로서 유한성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을 근거로 한 정통 교리는 헬레니즘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이 기독교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적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 운명의 끝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죄가 아니다.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4.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

니버는 인간의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유혹과 불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가 인간을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구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첫째 마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에서 발생했으며, 둘째 마귀가 인간 타락 전에 먼저 타락했다는 것 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악의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해석 된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마귀에게 유혹된 원인은 인간 안에 탁월함과 연약함, 무한과 유한한 지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무지를 감추려는 노력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불안을 은폐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을 받게 되지만 불안이 죄는 아니다. 단지 불안은 죄를 발생시키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 받기가 쉬운데, 인간의 양면성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모르므로 발생한다.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측정 불가하므로 자신이 존재해야 할 것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완벽에 대한 불안)과 존재해야 할 것으로 존재하지 못 할 것으로 인한 불안(존재의 불안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가운데 자신에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할 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존적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때 육욕(sensuality)에 빠지게 된다.

 

2)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로 교만과 육욕에 대해서 말한다. 더불어 집단적 교만과 개인의 교만을 고려한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를 함께 논해 보고자 한다.

 

A. 교만의 죄

기독교에서는 교만이 근본적인 죄이며 육욕은 교만에서 기원됨을 주장해 왔다. 교만이 죄라는 견해를 인간의 행위와 연관시켜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교만으로 분류했다.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 못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권력의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것을 거짓 안정이라고 했고, 이들에게 있을 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불안감에 기반한 권력의 교만은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힘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삶을 희생하는 죄를 범한다. 권력의 남용, 정복 등으로 표현되는 탐욕은 불안감을 숨기려는 야망의 표현인데, 인간의 야망이 끝이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교만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것이 지적 교만이다. 자신의 지식이 역사를 초월한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교만이며, 이 교만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려 할 때도 지적 교만이 드러난다.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고,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지식이기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여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지적 교만이다. 지적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시간 속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지적 교만과 관련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도덕적 가치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독선적 태도인데, 기준을 자신이 설정하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롭다고 하는 경우는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인종, 민족, 종교, 사회적 갈등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교만은 네 번째의 영적 교만으로 발전된다.

영적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종교적 죄와 관련된다. 자기미화와 신격화와 관계되는데, 본인이 계시를 받았으며, 더 많이 회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의 죄를 가중 시키며, 회개가 교만의 도구가 된다. 가톨릭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가 교만의 도구가 되게 한다. 또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도 자기 신격화의 위험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의 교만이 인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다.

교만과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 신격화는 부정직(기만)과 관계가 있다.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것도 동반하게 된다. 더불어 자아의 연약함을 숨기는 과정에서 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교만과 기만은 자아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

 

B. 육욕(sensuality)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되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죄의 본질을 육욕으로 간주 하려는 것에 니버는 문제를 제기한다. 니버는 육욕과 이기심을 구분하자고 한다. 육욕은 폭식, 술 취함, 성적 향락 등의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기심은 은폐되고 포장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욕이 이기심보다 사회적으로 더 비판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의거하여 육욕의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원적 죄의 결과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형벌이라고 하므로 두사람은 육욕을 죄의 결과이자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욕을 자기 사랑의 근원적 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육욕이 자아의 우상숭배인지 대안적 우상숭배의 발견인지는 분명한 답변이 없다. 종족 보존을 넘어서는 인간의 과도한 성적 충동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충동은 불안한 인간이 불안을 상쇄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성 행위는 내 삶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거나, 타인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적 연합의 절정은 자기 창조성의 절정도 되지만 죄성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는 성이 죄 자체여서가 아니라 성생활이 자기 신격화의 원초적 죄의 도구이면서, 타인을 신격화 함으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격과 무관한 성적 충동은 상업화된 악을 만들 수 있다. 도피를 위한 성적 격정은 그 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육욕은 자아 혹은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함으로 도피를 하려는 노력이고, 죄 때문에 생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무의식적인 실존의 형태로 도피하는 노력이다.

 

C.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 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3)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권력자나 지혜 자나 혹은 선한 자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동일한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약자에 비해 교만과 불의에 책임이 더 크다. 성경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이 드러나고, 교만과 불의에 빠지게 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도 고려된다. 부유한자나 권력이 있는 자 등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아가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수평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더 강한 오만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식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학자로 인정하게 하고, 권력자들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왕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덕으로 위장해서 권력욕을 숨기고, 관대함으로 위장해 불의를 감춘다. 역사 안에서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들의 죄책은 모든 기준을 초월하는 궁극적 분석으로 폭로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5. 결론

니버의 기독교 인간론 분석을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의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면서 죄인 된 인간을 강조했지만 전체적으로 니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므로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근대주의 인간관에서 했던 실수처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양면성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니버 신학의 특징인 역설의 연장이기도 하다.

 

니버가 기독교적 인간론을 근대의 인간론으로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안에서 이미 다른 인간이해들의 문제점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당시, 미국의 현실 가운데 낙관주의적 기독교는 답을 주지 못 했다. 공산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 역시 실망하고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특히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자세하고 깊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유혹당할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죄를 설명한다. 니버의 죄론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 이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위장하고 있는지 인지하게 도와준다.

 

약간 아쉬운 점은 6장의 ‘하나님의 형상’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만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책 전체가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두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하게 해석한 논의들은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 날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인간의 자유와 초월성에 대한 사고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한 한국어 번역이 부분적으로 아쉬웠는데 그 덕에,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니버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니버의 글과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버의 논지는 항상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간관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설의 긴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유혹과 교만을 유발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기대하므로 안정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6. 참고서적

1차 자료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2차 자료

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서울: 복있는 사람, 2019.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Ⅱ』.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장혜선.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거지왕자.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http://m.blog.daum.net/gangseo/12243001. 2020 년 6 월 25 일 접속.

15장_트렌스-포스트 휴머니즘과 신학적 인간론

 

■ 저자소개 : 정대경

. 어린 시절 접했던 진화 과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렸다가, 회심 체험 후 그리스도인

. 장로회신학대학교(Th.B.),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M.Div.),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Ph.D.)에서 조직신학, 과학신학을 전공하면서 신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

. 숭실대학교 교수 및 교목으로 봉직,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실재성을 변증

. 신학과 과학 학제 간 연구의 최신동향과 실태를 조사하고 분석한 연구

 

■ 이종성(春溪 李鐘聲, 1922-2011)의 인간이해

. 통전적 신학 추구 : 신앙과 삶을 통전적으로 결합

.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론적, 교회론적, 종말론적으로 즉 통전적으로 다루었다.

. 인간의 4중 상태로 인간론 접근 : 이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적으로 타락된 인간, 중생된 인간, 완성된 인간

. 하나님, 타자, 자기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관계의 통전성을 가진다.

. 칭의와 성화의 동시성 안에서 성장한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값없이 의롭게 된 중생한 자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성으로, 세상을 속으로 즉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세상과 사회 안에서의 삶 역시 중시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선교를 해야 하며, 세상은 교회의 선교를 받아 더 나은 세상이 된다.

. 신자는 천국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 기독교인은 종말론적 지평 아래에서 현재의 삶을 산다.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살고, 현재 안에는 미래가 약동한다.

 

. 「조직신학대계」 (1975년~1993년, 12권 완간) : 연역적 방법으로 조직신학에 부족함을 느껴 귀납적 방법을 택하게 됐는데 그것이 「신학적 인간학」으로부터 시작한 계기가 됨

.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논하고 그리스도를 논할 수 있겠는냐는 주장

. 인간에 대해 먼저 탐구하고 그 인간, 즉 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써 나간 귀납적 방법 택함

 

1. 서론

. 스티븐 호킹의 ‘수퍼휴먼들’(superhumans) : 유전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전기술을 사용할 뿐 아니라 지적능력 등 인간의 속성 향상 시키기 위해 기술 적용으로 발생된 인간

 

. 기존 인간과 새로운 인간의 공존 → 누가 사람이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 트렌스휴머니즘 : 포스트휴먼(수퍼휴먼) 실현하는 사조이자 운동

. 기술진보가 인간의 생물학적 문제로부터 해방, 삶의 웰빙 실현

. 과학기술 그 이상 : 휴머니즘과 계몽주의 잇는 사조

. 신념 : 인간의 본질은 이성 → 개인은 자신의 진화 역사 디자인하고 주도해야 함

→ 핑크 빛 휴머니즘, 역사의 수레바퀴 (대학살, 세계대전, 불평등....)

특징 문제 제기 신학의 대안 제시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 강조 탈 체현화 경향성 체현된 주체
이성 통한 문명의 진보 문명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 인간 실존의 모호성
개별적 자율성의 강화 개인주의적 경향에 관한 문제 케노시스

 

∴ 신학의 트랜스휴머니즘에 기여 : 기술 발전의 방향과 적용에 반성적 성찰할 계기 마련

 

. 신학적 인간 이해

(1) 체현된 주체 : 이성적 존재 이상, 심신상관적 존재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체현하면 삶

(2) 인간 실존의 모호성 강조 : 기술 발전이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윤리적 모호함)

(3) 자기 제한과 자기 비움 : 타자와의 관계서 안에서 자기 제한과 비움으로 공동체 형성

→ 기술 남용에 따른 부정적 결과 예방에 기여

 

2. 트랜스휴머니즘이란?

. 과학 기술로 인간의 신체, 정신적 웰빙을 실현 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과학기술, 철학, 문화)

. NBIC (Nanotech. + Biotech. + Information tech. + Cognitive Science) 융합기술

. 생물학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 감성, 정신적 속성들 향상

 

(1) 과학기술 운동 : 과학기술로 인간의 속성 변형

. 변형된 인류도 호모 사피엔스 인가?

. 트랜스휴먼 : 현 인류와 새 인류 사이 과도기적 인류

. 포스트휴먼 : 새로운 인류 (누가 사람인가?)

 

(2) 철학적, 문화적 운동

. 인간의 내재적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실행하여 인간 스스로 미래 진화를 결정하는 것이 책임이자 운명이다. 이성의 빛 안에서 나은 삶을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이 인간의 웰빙을 실현해 줄 것이며, 이 믿음이 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정의 (줄리언 헉슬리)

. 인간이 상태와 조건 향상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초학제간 시도..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본성이 교정 될 수 있다. (닉 보스트롬)

. 트랜스휴머니스트

. 창시자 :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 1887 – 1975, 영국의 생물학자)

. 철학자 : 맥스 모어(Max More),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 노화방지 기술 : 오브리 드 그레이 (생물의학자, 노인학자), 죽음은 노화로부터

 

 

p389 의식/정신 신체
기계 (1) 마인드 업로딩, 초지능, 가상현실 (3) 나노 봇, 웨어러블 로봇
생명 (2)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뉴럴 임플란트, 누트로픽스
(4) 냉동 보존술, 맞춤 아기

 

3. 트랜스휴머니즘과 기술

(1) 기계 지향, 정신 변형 기술

. 마인드 업로딩 : 두뇌 업로드 온라인의 지식들과 상호작용, 초지능 (너의 몸은 어디에..?)

. 가상현실 : 망자와의 만남 - 오용?

 

(2) 생명 지향, 정신 변형 기술 : 육체 보존 하면서 지능향상과 확장 추구

. BCI : 두뇌와 사물을 무선 통신기술로 연결, 생각만으로 사물 통제

a. 비침습적 방법 : 뇌파 측정으로 구현

b. 침습적 방법 : 두뇌에 직접 칩 이식(뉴럴 임플란트) - 역이용?

. 누트로픽스 : 기억력, 지능, 인지능력 향상 약물 - 향상 시키는 능력?

 

(3) 기계 지향, 신체 변형 기술

. 나노봇 : 생명공학기술과 결합, 질병 극복, 노화 방지, 수명 연장

. Prosthesis, Wearable Robot : 신체기관과 기능 보조용 인공 신체 (미군 탈로스, 아이언맨)

 

(4) 생명 지향, 신체 변형 기술

. 냉동 보존술 : 생명연장 실현 될 때 까지 인간 냉동

. 맞춤아기 : 생식세포 계열의 유전자 편집 (취약 유전자 치료) - 누가 수혜를 받는가?

 

(5) 인공지능

. 인간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반응 할 수 있도록(예 : 자율주행) 하는 자율성과 빠른 계산 뿐 아니라 추론 및 전략적 사고(알파고)까지 가능(머신러닝, 클라우드, 빅데이터)

. ‘킬 스위치(kill switch)’ 와 전자인간 지위부여 : 2017년 EU에서는 지능형 자율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위험한 상황에 사용, ‘전자 인간’의 지위를 부여 하는 결의안을 통과

. 2021년 4월에 일론 머스크의 원숭이 실험 : 신체 마비 장애인이 뇌파만으로 핸드폰을 사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후에는 하반신 마비 환자들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

. 양자 컴퓨터는 슈퍼컴퓨터가 1만년이 걸리는 것을 200초 안에 해낼 수 있다. 양자 컴퓨터와 일론 머스크의 센서 칩이 연결되면 앞으로 공부도 없어지지 않을까 - 누가 수혜를 받는가?

. 인공지능에 의한 4차 산업혁명 : 코딩보다 생각하는 법(“컴퓨팅 사고력”)을 배워야 하는 시대 일자리에 많은 변화 - 로봇이 모든 일을 다한다. 기본생활비 지급?

 

4. 트랜스휴머니즘과 이념

. 목표 :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로부터 해방하고 인간 웰빙의 실현

. 과학기술 통한 인간 이성이 가능하게 할 것임 ∴ 인간이 인류 진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 계몽주의 휴머니즘과 유사한 인간에 대한 낙관적 신념을 가진 트랜스휴머니즘

 

(1) 인간 본성의 불완전성

. 인간 본성이 진화과정 중에 있으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재구성 할 수 있다.

. 인간의 능력과 욕망을 계속 증대시키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

 

(2)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

.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해방하고 자율성을 증진해 줄 것이다.

. 휴머니즘이 미신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한 것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이 생물학적 사슬로부터 자유케 하리라 – 신체와 정신의 한계로부터 자유케함

 

(3) 개인의 자율성 고취

. 이성에 대한 신뢰

. 기술의 적용에 대한 의사결정이 개인에 의해 이루어 져야 한다.

. 기술로 지능이 향상되면 더욱 옳고 좋은 선택이 가능해 진다. (p399)

∴ 개인의 자유 보장되면 문명의 진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5. 트랜스휴머니즘과 신학적 인간론 : 대화를 위한 신학적 평가와 제안

5.1 신학과 동일 입장

(1) 인간은 미완성이므로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 기술 발전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로 이해될 수 있다.

. 인간은 공동 창조자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도록 지음 받았다.

 

(2) 웰빙을 추구한다.

. 예수님의 사역도 질병치유와 죽음 극복의 방향성이 있었다.

 

5.2 신학적 인간론에서 보는 문제점

(1) 탈체현화 경향성 : 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정신의 우위 상정

. 레이 커츠와일(Ray Kurzweil) , 한스 모라백 : 패턴 존속 (신경, 생물학)

→ 신학적 인간론 : 심신상관적 존재 (통전적&인격적, 신체적&정신적), 탈체현화를 통해 지적능력을 강화 할 수 있겠으나 인간의 개별성, 독특성, 타자성을 쇠약하게 됨 (2개 자아?)

 

(2)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

a. 불멸성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가 포함됨 : “계시 없는 종교”(1927년, 헉슬리)

b. 발전에 대한 믿음과 낙관적 입장 : 성과 or 파괴 (인간의 이기심)

→ 신학적 인간론 (틸리히 : 실존 – 인간의 유한성)

. 인간의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겠지만 불멸 실현은 불가능?(자살, 전쟁 등)

. 물리적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유한(모호) : 인류가 힘을 가질수록 자기파괴성 증가

 

(3) 개인주의적 경향성

. 기술 발전과 적용의 문제를 개인 양심과 자유 시장 경제에 맡기자

→ 신학, 철학적 입장 : 사회, 경제적 불평등 심화 예측

→ 신학적 인간론 :

a. 이상적 인간의 모습 :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인간의 목표이자 방향 (타자를 위한 자기 증여와 자기 희생) → 케노시스적 삶

b. 공동체적인 인간 : 관계 안에서의 증여, 타자를 받아들임, 유한성 깨닫고 공존하기

 

∴ 신학적 인간론의 제언을 참고하여

(1) 기술발전으로 초래할 다양한 문제점을 줄이고

(2) 공적 차원에서 기술발전과 적용에 공감대 형성해야 한다.

(기술 개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생태계와 인간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

 

6. 논의 사항

(1) 기술진들이 모두 트랜스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과학에, 일상에 철학이 필요하다.

 

(2)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 향상인가...

. 유전체분석, 암 유발 변이 유전자 찾음(스티브 잡스, 브로드 연구소): 10만달러 → 100달러

→ 돌연변이 조작 → 초인류 만들기

. 혈압치료제 비아그라, 성형수술은 1차 세계대전 부상자 얼굴 치료

14장_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

사랑과 배려와 환대의 관계

다양한 인간학 연구 중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를 ‘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한다. 신학적 인간학은 신과의 관계 안에서 규명되며 인간 존재의 기원을 신에 두고,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의 위상을 갖지만,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며 죽음에 이르는 유한성의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특별한 위치가 있지만 또한 인간은 모두가 죄인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가 신학적 인간학의 공통 특징이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학은 전통적 신학적 인간 이해가 남성 중심적으로 위계질서를 정당화 하면서 여성을 비하, 차별, 억압, 공적 영역에서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해가 자연과 연관되어 자연을 착취하고 남용하거나 그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옹호해왔다고 비판한다.

 

하나님 형상인 인간을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가부장주의적인 신학적 인간론이 여성의 정체성을 남성의 아래 두었다. 가부장주의적 신학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등한 피조물로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이 관계에는 오직 사랑과 배려의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적 세계관 이후로 하나님과 세계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으로 관심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철학자들은 지식위에 신의 자리를 마련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와 의심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근본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라는 기본 명제를 발견하고, 인간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식론적 주체, 지식의 대상으로서 세계는 객체인 이원론으로 구분했다. 그 위에 칸트는 ‘초월적 이성’, 헤겔은 ‘절대 이성’으로 이성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영적인 남성과 육적인 여성으로 구분하면서, 근대이후는 물질적인 여성의 위상과 자연에 대한 인식은 더 격하되었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은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 인간의 ‘영적인 몸’ 혹은 ‘육화된 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상호 관계 맺을 수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죄의 원인은 ‘관계의 왜곡’(로즈마리 류터)이며 관계를 파괴하는 억압, 착취, 전쟁 등 파괴적 관계를 죄라고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여성과 남성으로, 곧 관계적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정체성은 관계성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페리코레시스’로 서로의 위격 안에서 인격체로 내주하시며 돌보는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신다. 사랑과 배려와 환대의 관계적 하나님과 같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동료 인간과 자연세계와 관계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초대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자연 세계 역시 하나님의 관계적 방식으로 배려하고 돌보아야 한다.

 

옳은 말씀만 하고 있지만, 이 관점을 남성 신학자(몰트만 ?)들이 말하지 않고 여성∙생태신학분야에서 크게 거론된다는 것이 신학에서 조차도(모든 학문이 마찬가지 겠지만..)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13장 위르겐 몰트만의 인간 이해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해를 중심으로]

이미 창조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인적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지만 인간의 두려움과 관계의 왜곡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비극으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중재자임을 말하는 것이고, 창1:28에 근거하여 피조물을 지배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도 강조한다.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인자(人子)는 인간을 인간적인 존재로 해방하므로 그의 나라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된다. 이것은 이 땅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된다.

 

교회는 예수의 인간성을 그의 수난에서 보고, 자신의 새로운 인간성을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받는다. 인자는 인간의 고통과 죄악과 심판을 친히 감당함으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에게 세계 지배를 넘겨주셨다. 세상에서 추방된 자들이 인자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아둘람 공동체가 생각났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은 창조시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으로부터 ‘그의 형상이 되도록’ 인간을 규정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결정 되었으며,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죄인이며,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형상이라고 정리한다. 인간은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속성이 아니라 인간 전체, 인류 공동체, 자연과 연결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얼굴에 집약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므로 ‘관상학적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는 생육의 축복을 위한 성적인 구별과 사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귐 속에서 체험되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이들은 예수의 뒤를 따름으로 메시아적 형태로 자란다. 칭의는 영화의 현재적 시작이고 영화는 칭의의 미래적 완성으로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있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하나님은 선택, 소명, 칭의, 영화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이면서 임무,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인간은 이과정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 되라는 인간의 종말론적 소명이 인간을 종말론적인 새 창조로 인도한다.(소명-칭의-성화-영화의 단계)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특정 본질이나 기능이 아닌 ‘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고 종말론적 특징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창조되었다.(선물이면서 과제) 그러므로 이 땅 위에 현현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본다.

 

특이하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인식되는 부분을 얼굴이라고 했고(347),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를 성적차이와 사귐(347, 348)으로 본 것이, 관계로 해석한 것과 비슷하지만 느낌상으로 크게 다르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형상을 되어져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므로 부분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는 듯 하다. 짧은 지면에 깊은 이론들을 소개하시느라 고생하신 저자들의 노고가 귀하고 감사하다.

[인간론_11장 판넨베르크의 인간에 대한 이해]

역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초월로 향하는 죄인

판넨베르크의 가장 큰 공헌은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 안에서 인간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신학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신학이 타학문에서도 보편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학을 ‘기초-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하여 타학문의 방법론과 인간에 관한 연구결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역사-신학적으로 개념화(298) 하여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하며,(296-297) 부활을 통해 예수안에서 인간의 운명이 실현되었다.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 부활에 대한 소망 안에서 살수 있으며, 고유한 인격성에 도달하는 것은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참여로 가능하다.(305)

 

쉘러, 플레스너,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의 인간 본성에 관한 개념을 수용하여, 인간을 ‘세계 개방적 존재’로 규정하고 세계 개방성의 근거를 신(Gott)로부터 찾는다. 그러므로 세계 개방성은 핵심은 ‘신 개방성’이고 세계 개방성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형성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인간 운명 및 본성의 완성이다.(294) 인간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과 연결된다.

 

쉘러의 세계 개방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헤르더의 인간 이해인 철학적 인간학을 토대로 신학적 인간학을 설립했다. 헤르더는 미숙함에서 형성의 과정을 통과하는 성장하는 인간인데 이것을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한다.(296-297) 동시에 인간은 ‘죄인’이다. 판넨베르크는 죄를 욕망(죄의 형식, 결과)과 동일시 한다. 세계 개방성과 자기 중심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이지만 이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극복된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두려는 욕망에 끌릴 때 죄의 힘이 인간을 지배한다. 죄와 죽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므로 죽음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이다.(295) 인간의 운명의 완성은 미래의 희망을 통해서 가능하다. 희망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며,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므로 희망이 가능하다. 이것은 예수의 순종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구원의 미래와 연결된다.(307)

 

하나하나 보면 떨어져 있는 개념 같은데 결국 세계 개방성-신개방성-죄인-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자기 중심-그리스도에게 자기를 내어드림-성령의 활동-구원(희망)이 쭈욱 연결되는 그림이 그려졌다. 디테일 부분에서는 군데군데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지만 아마도 짧은 지면에 표현하느라 거론되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의 인간이해는 기독교 영성의 개념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어서 반가웠다. 기독교 영성(이전의 ‘영성신학‘)의 문자적 정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영성 훈련에 참여할 때 얻는 경험과 그에 대한 개인, 공동체적 반응”이다. “4. 인간과 역사”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간의 선취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부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스스로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훈련하므로 경험하게 되는 기독교 영성과 동일한 언어로 표현되는 부분이 반가웠다. 조금더 연구해보고 싶었으나, 2002년 한국방문 공개 강연회 자료를 나중에 읽어보는 것으로 반가움을 달래야 할 듯 하다.

[10장 폴 틸리히의 인간론 연구]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폴 틸리히는 인간 이해를 가장 심층적으로 탐구한 신학자 이며, 실존적 물음과 계시적 대답을 연관 짓는 상관관계 방법론과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집중한 문화의 신학, 경계선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론에서 물음은 ‘실존적 소외’이고 대답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은 신학적 대답인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본질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이며 실존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다.(257) 그래서 실존은 소외의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전이’한 것으로 해석한다.(258)

 

‘창조와 타락은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실존이 현실화 될 때 본질로부터 분리 되기 때문이다.(260) 타락의 결과로 실존적 소외상태가 되고 이는 불신앙, 교만, 욕망으로 묘사된다.(261) 죄(소외)의 결과 자기-파괴구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악‘이며 이것으로 자아와 세계의 상실이 발생한다.(262)

 

인간의 유한성은 실존적 소외 속에서 자기-파괴로 변형된다. 유한성은 비존재(죽음)을 악의 화신으로 만든다. 소외의 결과로 고난, 고독, 의심, 무의미가 발생한다. 고독한 존재는 자기파괴나 타자파괴로 발전한다.(264) 여기서 ’구원‘은 소외와 죽음의 극복으로 본질과의 재연합이며, 화해이며, 소외를 극복하는 존재의 치유로 해석한다.(276) 바로 그 화해를 위한 새로운 존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결과인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다.(265-267) 그리스도는 치유와 구원의 궁극적 기준이다.(277) 또한 그리스도의 존재가 사역이고 그 사역이 그의 존재(새로운 존재)가 된다.(278)

 

새로운 존재란 실존 속에 있는 본질적 존재이며, 본질과 실존사이 분열을 극복한 존재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함으로 성령에 의해 단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수 있다.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에 대한 종속’으로 상징이 사건과 결합하여 상징화된 것이고, 부활은 ‘실존적 소외에 대한 승리’로 부활의 경험에서 사건과 결합하며 사건화된 것이다.

 

속죄는 객관적 요소(신적행위)와 주관적 요소(인간적행위)가 모두 필수적인데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으로 주-객 통일적 사건이며 중생(참여), 칭의(받아들임), 성화(변화) 모두 그렇다.(279)

 

문화의 신학과 경계선 신학으로 틸리히를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10장을 발표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 장을 읽으며 인간론에 대해서는 틸리히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게다가 이렇게 내용이 어려울 줄이야.. 개념 설명에는 이해 못하겠다고 썻다가 개념에 따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는 것 같았다가 두 번째 읽으면서 정리할 때는 또 모르는 것 같았다가 글로 다시 정리하면서는 안다고 착각했다가...

 

틸리히의 깊이있는 정리에 기존에 틸리히에게 느꼈던 매력보다 더 크게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틸리히와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해서 소논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틸리히를 좀 미리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틸리히의 이론이 너무 깊다. 지금 읽은 교재중에 틸리히(10장)에서 가장 많이 줄을 쳤다. 과연 틸리히에서 내가 인간론의 주제를 찾고 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상담학에서도 폴 틸리히 연구가 국내에 논문으로 몇 개 있긴 했다.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도 2003년에 있었는데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잘 모르는데 논문 주제를 잡을 수 있을지.. 공부는 할수록 어려워지고 작아진다...

[9장 에밀 브루너의 인간이해]

 

궁극적 빛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에밀 브루너를 읽으며 만남(관계), 모순, 책임, 위로부터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떠오른다.

 

들어가는 말에서 최신기술들을 거론하면서 시작하시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복잡한 인간에 대해 ‘인간론’이라고 대 놓고 책을 쓴 신학자는 (교과서에서 제공한 정보들을 근거로 볼 때) 에밀 브루너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연과학, 철학, 신학적 관점을 종합(231)하면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더 분석하기 힘들어진 시점에 ⌜모순속의 인간(그리스도교 인간론)⌟은 말씀중심의 신학, 책임적 존재로서 인간, 기원과 종말을 포함하는 신학의 관점으로 저술되었고, 9장에서는 종말에 비추어본 책임적 존재의 주제를 다루었다.

 

부버의 ‘나’와 ‘너’의 ‘만남’ 기반으로 한 ‘만남으로서의 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되려는 모습과 실제 모습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분리되어 있어 관계적 존재이지만 모순 속에 있다. 관계적 존재의 인간에 기반해서 ‘위로부터’ 규정되는 존재이다. 타락이후에도 인간에게 은총과 소통의 가능성이 남아있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답하는 존재로서 관계적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235)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고 단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원의를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234)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며 그들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다.(238) 더불어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양심’을 고려했던 본인도 이 부분에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브루너의 요약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관계’, ‘공동체’, ‘계시 중심’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말의 빛에 서있는 존재’에서, 칼 바르트의 영원과 죽음을 설명한 부분이 떠올랐고, 관계의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존재로 설명한 부분도 비슷했다. 하나님의 형상(235)이 관계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240)이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마음과 영에서 영을 인격으로 보고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개인으로 살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실존을 말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물론 앞의 많은 신학자들이 따로 많이 언급했겠지만), 에밀 브루너에게서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제도 아닌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몇 주동안 만났던 신학자들과의 만남이 계속 올라와서 자꾸 정리하고 싶어서 시간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호모데우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에밀 브루너 같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질문]

.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이미 (위로부터) 질문이 주어진 존재로서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중예정설은 부인한다고 했는데 예정설과 맥이 통하는 곳일 까?

. (223) 브루너 신학의 핵심구조중 하나인 ‘성서적 인격주의’는 계시를 “나와 하나님(당신)의 만남이라는 개념” 혹은 “인격적인 하나님(it 이 아닌)“으로 해석해도 될까?

. 마음, 영(인격, 240), 지성.. 등은 강조하는데 몸에 대한 언급은 ‘일시적이며 인간의 죄 된 실존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과학과 연결시키는 부분 밖에 없던 것 같다.(243-244)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8장_칼 바르트의 관계론적 인간론 (2/2)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인간

.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의 이중적 틀

(1) 하나님을 위한 인간 : 하나님의 뜻을 역사에 펼친 구원자

  . “인간이 됨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뜻함” → 하나님 없는 인간 ‘존재론적 불가능성’억지?

  .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받은 인간, 부름 받은 책임 있는 존재

 

(2) 다른 인간을 위한 인간 : 철저히 타자를 향하고, 타자와 함께하며, 타자를 섬긴 인간

   . 자아가 전적으로 타자와 관계 속에서 온 것임

   . 예수께서는 낯선 인간 존재에게 자신을 개방하시고 인류가 자신을 규정하게 하심

   ∴ 타인의 ‘동료 인간’으로 존재 : 동반자, 동지, 친구, 동료, 도우미로서의 관계 (인간성)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관계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관계적 존재임

∴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 타자와의 만남, 개방성으로 형성

 

[토론] 이미 이론이 정립되어 있겠지만, 기독교 상담학에서는 칼 바르트의 ‘관계적 인간론(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학문적으로 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ex) 자녀의 인격 형성

 

. 만남속의 존재’ : 상호교환으로 사람간의 관계가 풍성해진다. → 현실에서는 왜곡

(1) 눈으로 응시하고 (2) 말을 건네고 (3) 도움을 주고 받고 (4) 기쁨으로 함께 함

 

[토론] ‘나와 너의 만남이 파괴될 때 삶에 비인간화 발생’(p.204)는 상담에서 많이 발생되는 문제일 듯

 

. 인간성의 근원적 형태 : 남자와 여자의 만남 (결정적, 필연적, 창조부터 관계)

(1)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은 구체적, 실제적 타자로서 다양한 만남에서도 적용된다.

(2) (창2) 남자는 ‘여자를 향해’존재하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오는’존재로 설명

→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차이 속에서 서로에게 개방되고, 필요하므로 관계적 존재가 됨

(자기 부인이 필요하지만 ‘나’혼자서 있을 수 없는 ‘너’로 인한 기쁨 수반되는 성숙의 과정)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 성서는 인간을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제시

. 예수님 인간의 차이점

   . 성령과 고유한 관계를 맺으시므로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의 참모습을 현실화 함

   . 육신을 취하셨지만 몸이 성령 안에서 변화하여 영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심

      ∴ 인간이 그리스도처럼 변화해 가는 것을 지향하는 역동적 인간이해

 

[질문] (p.207 가운데) “몸은 성령안에서 변화하여 아무 죄를 행하지 않을 정도로 영혼과 완벽한 조화”.. 칼 바르트도 몸과 혼의 통일체로 말했지만 육체를 죄에 가까운, 영혼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본 것일까?

 

→ 기독론으로부터 인간 본질의 기본 구조 정리 : 영혼과 육체, 성령

(1) 영혼과 몸 존재 (육체적) : 세계내 존재

   . 영육 : 통일성 속의 역동성

(2) 성령과의 관계(생명 주시는 관계) : 하나님께 개방된 존재

 

바르트의 인간론은 그리스도론적이지만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

.성령 : ‘선물’로서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의 원리

(1) 하나님의 생명을 인류에게 전하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

(2) 인간 몸과 영혼의 통일성의 기반 : 둘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붙잡으심

   - ‘특정한 몸의 영혼’, ‘영혼이 깃든 몸’ → 영혼과 몸의 연관성과 구분을 드러내심

   - 영혼(의식에 가까움) : 행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 몸 : 오감으로 감각 받아들이고, 세계 안에서 주체가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데 참여 → 현대 철학과 심리학과 같은 맥락

 

. 지각이론 (‘지각의 신학적 중요성)

: 신체를 가진 인간이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신체가 감지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영적으로 뿐 아니라 몸으로도 하나님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또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신체적 능력에 호소 하신다고 할수 있다.

. 지각의 존재로서 인간 :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고유성), 세계 안의 존재(타자와의 관계)

주체의 형성 : (판단, 활동의 근원이 아니고) 세계안의 복잡 한 관계 망에서 서로를 지각하는 상호 작용으로 형성

 

∴ 세계 안의 존재이자 지각의 존재로 인간은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뤄지는 관계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HERE&NOW :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영광의 무대

 

. 신학적 미학 : 하나님을 안다는 것(지식)은 아름다운 세계를 지각함으로 체험하는 ‘미학적’요소 수반 (지각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인지)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 인간의 유한한 삶(시간)과 그 너머의 ‘영원’ : 영원은 과학에서 해석 할 수 없으므로 근대에는 시간이나 역사에 초점을 맞춤

. 바르트의 과제 : (1)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 (2) 영원의 의미

 

.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 :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현실화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자신을 이루어 감(시간에 의미 부여) ∵ ‘시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 시간 :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 아니라 제한되어 있음. → 시간의 끝 : 죽음 (심판)

  A. 창조와 함께 등장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 경계

  B.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반영하는 배경

. 죽음 :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삶이 시작부터 끝까지 죄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

. 죄 : 하나님이 설정하신 경계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죽음-심판의 표지)

죽음, 심판, 구원의 관계 :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심판자로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의 성격이 신적 은혜로 변환되었다.

예수님이 루이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 받으심으로 죽음을 우리 뒤에 두셨고, 부활 하심으로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해칠수 없도록 한계가 정해졌다.

  ∴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주를 두려워하므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음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마음이 안식을 찾게 되는 이유)

  “우리 죽음은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우리 죽음의 한계이다.”

. 죽음(바르트) :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 피조물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으로 은혜가 됨

. 부활 : 40일 동안 ‘인간의 시간’에 속하면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시간’을 가지심

. 하나님의 영원 : ‘하나님의 고유한 시간성

  -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시간을 하나님이 감싸 안으심 : 시간론적 의미의 칭의

 

. 종말론적 시간 이해를 인간론과 결합 →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현존재를 제안

cf) (하이데거)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실존구조 분석 (불안의 정서)

     (바르트) 죽음과 부활을 포괄하는 인간론적 구조 (희망과 기쁨의 정서)

∴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라 ‘부활을 향한 존재’ 이므로

   시간은 HERE & NOW 영원에 참여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삶의 배경

 

 

7. 나가는 말

. ‘절대적 인간’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신화화

. 피조물로서 인간 이해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부터 신학적 인간론 구성

. 관계 유비: 자아&타자, 영혼&몸 사이 유기적 관계, 시간적 존재로서 영원과의 조화 관계

 

. 바르트 인간론 비판에 대한 답변

(1) 바르트는 남녀의 창조를 동료 인간성의 관계로 보았으나, 남녀의 결혼으로 이해되면서 남녀사이 위계상정한 것으로 오해됨 : 예수께서 여성을 포함한 여러 타자를 환대 한 복음서를 언급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로 풀어내서 생긴 오해

  → 우월이거나 권력 행사 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음

(2)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교회, 남자와 여자의 유비 : 영혼과 몸의 ‘상하 위계’ 정당화로 보임

  →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과 몸의 수행의 필요성을 함께 강조하는 포괄적인 신학의 틀

  (수련에 몰두하므로 육체를 등한히 함 vs 몸 자체를 우상화 함)

  ∴ 몸을 영혼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성령과의 교제 안에서 조화롭게 되도록 함

(3) 구체적 현실적 인간 이해 추구를 위해 참 말씀이자 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서술의 출발점/기준점으로 삼는 그리스도론 중심적 입장이 학제간 대화를 막고 신학의 우월성을 전제한 것은 아닌가

  → 예수는 구체적 역사적 인간인 동시에 인류를 포함한 창조의 기원이다. ‘구체성’이 예수로 채워질 때 그 구체성은 포용과 개방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된다.

  ∴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것은 타 인간론과 구분 되면서도 더 나은 인간 이해를 찾아간다.

 

[정리]

. “관계적 인간” 이면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동반자가 되기로 하신 은혜의 신적 결정이 있다.

  (1) 절대 타자 하나님 : 자비로운 아버지의 관계

  (2) 인간 타자 : 동료 인간으로서 관계 (두려움과 경쟁의 대상이 아님)

  (3) 시간의 한계 : 하나님의 영원과 만남

 

→ 바르트의 인간상 :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여유와 배려, ‘유머를 가지고 더불어 사는 존재로 빚어지는 것

8장_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인간됨의 신비 : 칼 바르트의 관계론적 인간론 (1/2)

자유주의 신학 : 이성(과학, 윤리학)으로 기독교 해석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신학

. 18C 계몽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바탕의 신학

. 정통 신학(only 성경, 전승)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짐

. 슐라이어마허(1768-1834, 독일)에 의해 시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보편 해석학)

. 식민주의, 산업화, 세계대전으로 의문시 됨 (인간의 야만성)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루너, 폴 틸리히, 니버 형제 (라인홀드 니버 1892-1971)

. 하나님의 계시 강조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년 스위스 바젤 출생 (1968년 82세, 바젤 사망)

.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 스위스 자펜빌 교구 목사

. 1914년 독일의 스승들이 전쟁에 찬성하면서 자유주의와 결별

. 1918년(1922년) ⌜로마서 주석(2판)⌟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

. 독일 대학에서 교직 중 나치로 인해 1935년 스위스 바젤 대학 신학교수

. 1962년 은퇴

. ⌜교회 교의학⌟(1921-1959), ⌜복음주의 신학 입문⌟(1962)

. 말씀의 신학자, 계시 중심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칼 바르트

 

■ 아돌프 슐라터(1852-1938) 독일 개신교 내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독일 신학자 니체로부터도 배웠으나 그것이 학문적 엄밀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동시에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옹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적 성품을 지닌 교수(불트만, 하르낙과 동시대)로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해 보여준 통찰과 본보기를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가 따랐다.(개혁신학 용어 사전, p72)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1. 들어가는 말

. 칼 바르트 : 20세기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 (대표적 업적)

  .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

   .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 그리스도 중심적 교의학 전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강조 ∴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시했다는 평가

→ ⌜교회교의학⌟Ⅲ/2 인간론 할애 했으나 인간독립적 주제로 나타나지는 않음

. 인간 : (1) 불완전한 피조물 (2) 자기 기만적인 죄인

   ∴ ‘인간이란 무엇인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인간을 알수 있음.

 

(1)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된 인간 :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2)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개방된 관계적 구조 가진 존재 :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3) 통일체(영혼+몸)로 창조 세계에 참여 :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4) 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 :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2. 근대의 ‘절대적 인간’비판

. 18세기 절대적 인간 : 이성, 합리, 계몽주의 시대 과학 혁명, 기술발전, 자연정복 등

. 절대주의 시대 :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18세기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이면에 ‘절대주의’)

. 절대주의 : “인간 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 위에 기초한 삶의 시스템... ”(p195)

. 절대주의 인간 : “잠재력..절대적이라고 스스로 간주한다.... 절대적 인간은 18세기의 인간이다.”(p195)

. 절대주의의 영향력 : 인간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학문, 정치, 문화, 신학에도 ‘인간화’의 흔적 남김

. 인간화 : “하나님을 제거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절대 권력을 가진 인간의 자기의식 영역에 포함하고... 실재를 내적으로 경험되고 이해되는 실재로 변환”

. 개인주의화 : “인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의미...하나님 밖의 모든 것에 행사하는 감춰진 권위를 받았음을 의미.. ” (p196)

. 인간화의 영향 (유럽) : 문화 개신교주의(서유럽 자유주의 신학) 등장 배경

   . 교파의 민족주의화

   . 교회의 부르주아화

   . 신앙의 사사(私事) (개인주의화에 상응하는)

   . 학문으로서 신학의 정체성 변화

신학적 인간론의 변화

   .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언어와 논리로 인간 본성 이해 하려 함

   . 진리 판단 기준이 ‘인간 경험’에 권위 부여하는 인간론적 패러다임

⇒ 세계대전, 식민주의, 사업화 등 비인간적 광기로 절대주의의 붕괴

⇒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등장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 절대적 인간 VS 피조물 인간 → 바르트의 독특성 : 인간론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

(1) 피조물 인간의 본성

(2)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3) 인간이 창조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 질문하고, 현대의 인간학적 도전을 함께 대화 할 수 있는 개방적 신학적 틀 제안

. 바르트의 다른 철학의 인간론 분석 (p198)

  특징/중요점 한계
자연주의 피조물 중 하나 다른 피조물 사이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함
관념론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 하나님의 존재를 잘 성명하지 못함
실존주의 초월의 존재 자기 폐쇄적인 자아상을 만듦
유신론 타자와의 만남의 존재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실패

∴ 추론이나 관찰로 꿰뚫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말씀으로만 알려 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계시됩니다. 그분 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 성서 : 하나님의 피조물

.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께 묶여 있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먼저 묶으심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론의 기초로 삼음

   (1) 인간에 대한 현실적, 포괄적, 참된 이해 가능

   (2) 철학은 각자의 방법론으로 특정 부분을 설명하지만, 계시에서 시작하지 않으므로 인간 본성까지 다룰 수 없음 (비판적 건설적 대화)

 

. 인간론의 시작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 (신적결정)

→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서

   (1) 참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신실한 파트너

   (2)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파트너

. 신적결정 :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응하도록 창조

. 관계의 유비(類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결정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신앙의 유비)하게 된다.

. 관계의 유비에서 나사렛 예수와 피조물 인간사이의 다층적 인간론 구조

   (1) 예수그리스도 : 하나님과 인간을 향함 – 영혼과 몸 – 시간의 주님으로 역사에 나타내심

   (2) 인간 : 타자를 향함 – 영혼과 몸의 통일체 – 시간적 존재

. 바르트 인간론 구성 4관계 : 하나님, 타자, 영육으로의 자신, 시간과의 관계

7장_슐라이어마허의 경건한 존재로서 인간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정말 방대한 양의 내용들을 짧은 지면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신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또한 2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하느라고 고생했을 저자들에게도 고맙긴 한데 고민이 되는 문장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 의문이 남는 부분들이 많았다. 정말 인간론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를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은 『시크릿 Secret』 (론다 번, 2007)이었다. 요즘에는 비슷한 종류의 책이 더 많이, 더 자세히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우주’랑 관련된 책들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가브리엘 번스타인, 2018) 등으로 유튜브에도 많은 비슷한 맥락의 많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슐라이어마허를 기반으로 하는 걸까?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사실 『시크릿 Secret』을 한국에서 처음 보고 선교지로 들어갈 때 전도용으로 사용하려고 여러 권 사가지고 갔다. 그리고 학생들과 이 책으로 토론하면서 무신론 기반인 선교지에서 우주를 활용해서 유신론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했다.(선교지 같은 무신론 기반 세계는 우선 유신론으로 들어가야 예수님 설명이 된다.) 그러다가 한국 기독교 사이트에서 『시크릿』을 엄청 비판하는 글을 읽고 놀랐다. ‘이거 하나님 대신 우주라고 쓴 건데 왜 이걸 전도에 사용안하지?’ 나에겐 의문만 남았다. 당시 신학을 안했던 나는 목사님들이 쓰지 말라니깐 사용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더 이상 전도의 도구로 이 책을 쓸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와 토론할 기회나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7장을 읽으며 슐라이어마허 또한 ‘우주’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게 하려 했다는 부분을 읽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크릿』도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도 모두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사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한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구] 슐라이어마허에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찾았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부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속’인 예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왜 필요한지.. 슐라이어마허를 더 연구해 봐야 할것 같다.

 

[연구]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역사적 예수’란 해석학(?)에서 예수님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셨던 분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실존하셨던 예수를 강조하는 말로 본인은 해석했다.(p187 명제 9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목사님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로 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기독교 입장에서 부정적인?)였을까? 아직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단어의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쪽이었을까 갸우뚱 되었다.

 

[연구]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을까? 공격을 받았을 것 같긴 한데...

 

5장_칼뱅의 인간론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신학서적이나 철학 서적이나 읽다보면 무조건 수긍이 가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직 넓고 큰 시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논리의 빈약한 부분이나 이상한 부분을 못 찾아 내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지만 이러다 보면 견고하고 건강한 뿌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조직신학과 철학을 평생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칼뱅을 여러 관점에서 보면서 다양하게 평가하는데 저자는 그 모든 의견을 모아 칼뱅을 삼위일체 신학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칼뱅의 신론은 인간론이며, 인간론은 신론이다. 칼뱅의 이러한 인간론을 죄와 관계된 인간 이해로 인간의 상태를 무흠, 부패, 은혜, 영광의 4중 상태론에서 다룬다.

 

칼뱅은 인간의 영혼도 모든 창조물과 같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영혼으로 영적 세계에 참여하고, 육체로 감각 세계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4중 상태론중 무흠(순전한)의 상태란 타락하기 이전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불순종했고 다음 상태인 부패 상태의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다른 피조물, 순전한 상태의 자기 자신, 그리고 타자와의 4중 소외가 발생했다. 죄란 본성의 부패로 유전되며, 전인격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은 부패 상태이며 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인간은 자발적,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캘빈은 인간이 선천적,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정의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용하며 죄와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는 타락 이후 상실 됬지만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죄를 짓는 자유가 남아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그는 전적 부패를 주장하며 지상의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성령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고 고귀한 존재로, 긍정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중적 지식은 타락 전 무흠의 상태를 아는 것과 자신이 순전한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아는 두 가지 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 지식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인간의 악한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어 소멸되는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 또한 성령은 신자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돕는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어 처음 창조시기보다 더 좋은 상태가 된다. 여기가 은혜 상태이며 죄를 지을 수 없음에 참여함으로 선택할 수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광의 상태에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은 의지에 은총이 부여되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영적이며 부재로 현존하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찬에서도 영적임재설을 주장한다. 또한 신자의 개인 종말인 죽음과 보편 종말인 몸의 부활을 구별하여 죽음은 죄와의 결별이며,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중간상태에서 쉼을 누리며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칼뱅이 말하는 영광의 상태는 은혜의 완성된 상태로서 은혜에 사는 이들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므로, 미래의 소망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상태와 분리된 영광의 상태는 위험하다.

 

[토론] (p131, 아래서5줄) “은총 있을 때는 선을 없을 때는 악을 선택하는”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른 이론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예정론의 맥락일까? 이글에서만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악하게 내버려두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듯...

 

[4장 마틴루터의 인간론]

최고의 선물이면서 유한한 이성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루터는 개혁의 선두에서 인간론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가망 없고, 스스로 불안을 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펼친다.(‘신학적 인간론’)

 

1536년 『인간에 관하여』에서, 4-19는 철학적 논제이고 20-31은 신학적 논의로 구분되어 진행하면서, 로마서 3:28절의 ‘사람’을 그의 인간론의 기초로 삼는다.

 

(3. 이성의 동물) 먼저 스콜라 철학에서 처럼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 철학은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서만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정의에 루터는 ‘감추고 우상을 만들고 꾸며댈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4. 신학적 인간학) ‘인간론’의 시작은 스콜라주의와 같게 했으나 다른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에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에서는 은총의 효력이 남아 노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으며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 이다. 자기를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 아래서 가능하다. 인간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 루터의 신학적 인간론의 기반은 로마서 3:28절 이다.

 

(5.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에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이다. 관계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이성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은 이웃과의 관계까지 깨어진다. 루터에게 ‘죄’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뜨리는 본성“이다. 율법아래서 인간은 죄인이지만 복음으로 인해 의로운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점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도 거론된 부분이지만 이러한 믿음의 전환은 평생의 과정이며 방향이다.

 

(6. 종교적 존재) 칸트는 순수한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으며, 다윈 또한 진화론은 신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몰아냈다. 루터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신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구부러져 탐욕에 빠진 존재”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관계가 있다.

 

(7.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에게는 ‘칭의론’이 핵심이라 할 수 있으나 루터는 ‘칭의’를 “죄인을 자유케하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칭의론’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언제나 사랑이 뒤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웃 안에 산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종교 행위보다 내면의 양심과 신앙을 강조했으므로 자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칭의는 자유와 사랑의 조화로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루터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 같은데 미세한 차이점들을 공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토론] 칭의론과 ‘자유’

2장_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4년 동안 히포의 주교로 활동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에서 살았다.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인간에 대해서 본장에서는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니교, 아카데미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을 거치고,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등과 논쟁하며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2장에서는 『고백록』의 구조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기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는 인간의 틀로 인간 이해를 풀어간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에 의해 훼손 되고 은총으로 다시 형성 될 수 있지만, 상실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악은 선의 결핍(존재의 결핍)이며, 모든 존재는 다 선하므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여기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체로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서 발견 되고, 영혼이 생명의 주요 요소이며, 사유의 중심이라고 보면서 “육체를 다스리는 데 적합한 합리적 실체”로 정의한다. 처음에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회심 과정에서 점차 이원론을 버리게 된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영혼을 육체보다 탁월하게 보지만,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멸이 행복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정신을 깊게 탐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안의 정신에 속하는데,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삼위일체)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해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정욕과 습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치유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고백록』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을 향하도록’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심오한 분”(p61)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좋다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탐험이 출발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을 탐구하는데 정신이 신적 조명(은총)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게(p65) 되지만, 부활(불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직관에 도달하는 종말에 완벽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는 신학, 철학, 심리학적으로 큰 영향을 남겼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경향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와 종말론적 전망에서의 재해석도 필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더 깊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은혜와 인간 선택의 시작점이 항상 애매모호함으로 남는다. 실천적 신학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항상 질문으로 남는다.

 

1장_성서의 인간론으로서의 전인적 인간론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의의 해석이 아닌 전적으로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론을 해석하고자 한 애씀이 있다.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인간론>. 대한기독교서회. 2022.

 

1장에서 말하는 성서에서의 전인적 인간론이란 육체와 영혼을 따로 다루는 이원론이 아닌 육체자체가 인간이고 영혼자체도 인간이라는 전제로 죽음과 부활을 재정의 한다.

 

구약에서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네페쉬, 빠사르, 루아흐, 레브와 신약에서의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의 단어의 뜻을 고찰하면서 신구약에서 표현된 이 단어들은 모두 제유법적 표현으로 결국 전인적 인간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전인적 인간론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전인적 인간론들은 죽음과 부활에서 다시 이원론적 인간론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전인적 인간론에서의 ‘죽음’은 영혼의 분리가 아닌, ‘전적 죽음 이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가 전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그리스적 죽음과 성서적 죽음의 차이를 설명했다. 죽음을 이렇게 전적 죽음으로 해석하면서 부활과 연결 될 수 있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하지만 신자들은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이는 심판받을 죄인인 옛 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이다.(골3:1-11) 전인적 인간론으로 심판 전후의 인간을 성서적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인적 인간론은 영과 혼의 분리가 아닌, 죽는 전인, 부활하는 전인, 영생하는 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신학에서는 그동안 플라톤에 영향을 받아 해석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성서에 기반을 둔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창3:15-16절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성서적 죽음)이라는 것 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인적 죽음, 전인적 부활과 연결된 다고는 생각 못하고 이 땅에서의 죽음 부분이 약간 애매모호하게 남아있었는데 그 부분에 여명이 비춰진 것 같긴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각에....) 논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부분들도 있고, 신구약에서의 단어 사용례에서는 히브리 사고를 좀 더 강조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으로 해석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려고 해도 이렇게 무언가 조각 조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 하는게 맞는 것 같다.

 

(p37) 중간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로핑크라는 학자의 연구에서 저자도 지적했지만 6-7번에서 갑자기 비약이 일어나는거 같다. 중간상태의 로핑크 이론 이후의 설명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 부분과 연결이 되어 이해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