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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간> 17장. 포스트휴머니즘과 기독교 신앙 (2/2)

by 말씀묵상과 영성지도 2024. 1. 11.

<인간> 17장. 포스트휴머니즘과 기독교 신앙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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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머니즘

Ⅲ. 레이 커즈와일이 전망하는 포스트휴먼 시대

Ⅳ. 인공지능

Ⅴ.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 브라이도티를 중심으로

Ⅵ.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Ⅶ.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대책

   1. 과거에 대한 반성

   2. 미래를 위한 제안

Ⅷ. 결론: 포스트휴먼 시대의 기독교 신앙

   1.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섭리

   2.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의 형상

   3. 유한성과 은혜의 원리

 

윤철호 저.  <인간>.  새물결플러스 . 2017.

Ⅳ.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인간이 규칙을 가지고 정보를 주어서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반응 할 수 있도록(예 : 자율주행) 하는 자율성과 빠른 계산 뿐 아니라 추론 및 전략적 사고(알파고)까지 가능하다.(머신러닝, 클라우드, 빅데이터) 2017년 EU에서는 지능형 자율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킬 스위치(kill switch)’를 작동하는 것과 함께, ‘전자 인간’의 지위를 부여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21년 4월에 일론 머스크는 pager 라는 원숭이가 조이스틱 게임을 하는 동안 뇌의 정보를 학습해서 조이스틱 없이도 게임이 가능한 실험을 했다.* 이것으로 신체 마비 장애인이 뇌파만으로 핸드폰을 사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후에는 하반신 마비 환자들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양자 컴퓨터는 슈퍼컴퓨터가 1만년이 걸리는 것을 200초 안에 해낼 수 있다. 양자 컴퓨터와 일론 머스크의 센서 칩이 연결되면 앞으로 공부도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있다.

증기기관으로 인한 1차 산업혁명, 전기로 인한 2차 산업혁명,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인공지능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의 초기에는 모두가 코딩을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코딩보다 생각하는 법(“컴퓨팅 사고력”)을 배워야 하는 시대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일자리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을 예측한다.

 

* https://twitter.com/khbae/status/1382196330630582281,

일론 머스크의 원숭이 영상 리트윗, 2021. 5. 26일 접속 (1:33초에 신경망 학습 기록)

Ⅴ.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 브라이도티를 중심으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비이원론, 지역 주체적 보편주의를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 등이 있다.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에 대한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시작되었다. 한편 그녀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과학 기술의 발달 등의 휴머니즘의 가치들을 도입하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할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기계들이 자율적으로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기계 윤리와 법적인 문제들은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한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자아와 타자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확장된 의식을 제안”하는데 개인은 타자들과의 상호 흐름 안에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유대관계를 제안하면서 “세계시민적 유대”를 갖기 위해 각 주체들의 자리를 명확히 알도록 하는 것을 비판적 포스트휴먼 이론의 과제로 보고 있다.

 

Ⅵ.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포스트휴머니즘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마음대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존엄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화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미래가 머지 않았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야 좋겠지만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는 피조물의 유한성과 관계된다.

 

  포스트 휴머니스트들은 “컴퓨터의 인간화 또는 인간의 컴퓨터화를 정당화”한다. 인간의 뇌를 컴퓨터 같은 지적 장치로 이해하며 정신과 뇌의 관계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계로 인식하는 이원론적 접근법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인간의 노화와 질병은 “존중되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불행”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들은 인간의 몸을 컴퓨터의 2진 코드의 정보로 환원하고자 하는 환원론적이다.

 

  2004년의 신경학 연구는 인간 정신이 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인간 정신은 육체, 환경, 타자와의 상호작용으로 작동하는데 컴퓨터에게 이것이 있을까를 문제로 제기한다. (2021년까지의 발달 상황을 본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사랑’등의 감정이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지는 모르겠지만 학습을 통해서 표현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발제자의 입장이다. 지난 2016년 MS의 챗봇 ‘테이’(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학습하는 채팅 프로그램)가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여성비하와 유색인종 비하등의 내용이 학습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양자 컴퓨터 기술이 적용된다면 기계학습의 결과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Ⅶ.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대책

1. 과거에 대한 반성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 졌는가 측정은 불가능하다. 기술발달로 혜택을 누리지만 인간의 고통의 총량이 줄었다고 할 수 있는가? 소득 대비 우울증과 자살률은 어떤가? 도덕, 사회, 정치적으로도 점점 살기가 좋아졌는지? 이에 비해 눈에 보이는 빈부격차, 생태계 오염 등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포스트휴머니티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존중’하고 ‘윤리적 자세를 생각’하며, 현재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윤리적 가치가 잘 지켜질 것인지를 고민이 필요하다.

 

2. 미래를 위한 제안

  저자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현실의 과제라고 표현한다.(과연 가능할지.. 기준이 '행복'이라는 것에 발제자는 동의되지 않는 내용이다.) 헤일즈는 인류의 지속적 생존을 위해 포스트휴먼의 창조에는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이 육제척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도와줄 수 있지만 인류 전체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으므로 어디까지 허용 할 것인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경제적 이유로 기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혜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규범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인간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불멸을 획득할 수 있더라도 인간의 유한성에 동의하므로 기술의 사용을 스스로 제어 하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의 영역에서 대안을 제안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과연 가능할까?**

 

*영화 '승리호'에서 "악마의 거래"

**영화 '블랙머니'(론스타 펀드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에서 김나리 변호사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이 불법임을 밝힐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의 돈도 외환은행 헐값 매각에 투자된 사실을 아는 순간 사실을 덮어버린다. 김나리 변호사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으로 인한 투자수익으로 국제통상업계에서 한국을 도울 로펌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Ⅷ. 결론: 포스트휴먼 시대의 기독교 신앙

1.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섭리

  저자는 창조질서 내에서의 과학의 발전은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는 원칙이 필요하므로, 과학 철학과 기술 윤리에 이 원칙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말하므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오버하는 바리새인이나 포스트휴먼을 막으려 하는 자세나 마찬가지 아닌가.)

"확신 하는 순간부터 왜곡이 발생한다.“

 

2.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진화과정 중 창발되었다는 주장은 모순이 없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12장에서 언급되었던 '공감적 사랑'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므로 이것이 인간의 참된 존엄성의 원천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포스트휴먼은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기독교 인으로서 주어진 분야에서 먼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공격적인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을, 혹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어디까지 '공감적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혹은 받아들일수 있을까가 발제자의 고민이다.)

 

3. 유한성과 은혜의 원리

  피조물로서 인간은 유한하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라 유한성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악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니버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학 기술의 발전은 좋은 것이지만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포스트휴먼을 만든다면 문제가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 생명연장의 기술이 있음을 알면서도, 생명이 위급한 자신의 자녀에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기독교인 부모가 몇이나 될까? 이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쓸 것 같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인생을 삶으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성취하는데 인생의 의미를 두라고 제안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라고 부른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처럼 자신의 기술이 어려운 사람들 도울 수 있다면 기술자는 열심히 기술을 개발 할 것이고(side effect 때문에 만들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고쳐서 살릴 수 있는데 그 기술을 쓰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만들어진 기술이 하나님의 "은혜"일수 도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물물교환에서 돈으로, 돈에서 카드로 카드에서 가상화폐로 변하는 문화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보다 너무 빨리 변해서 (앞으로 변화의 속도는 지금까지의 변화보다 더 빠를 것이라고 예측된다.)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하며 사는 삶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이 아닐까...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이 쳇봇을 학습시켰던 것처럼 포스트휴먼 사회가 된다면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공감적 사랑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