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1/2)

by 말씀묵상과 영성지도 2023. 11. 1.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1/2)

 

더보기

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1. 서론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문화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 기독교적, 근대적 개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정리되면서 혼란들을 야기했다. 고전적 인간관은 그리스 철학을 전제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반이 된다. 이성적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합리주의와 육체를 악으로, 마음은 선한 것으로 양분하는 이원론 그리고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스토아 철학이 바탕이 된 개념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인간 개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초월성을 가진 인간 개념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하는 인간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근대적 인간관은 자연주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사상이 되면서 고전적 개념과 기독교적 개념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생명력과 존재 양식을 초월하는 해석 원리 없이 부분적 진리들이 끝없이 논쟁하는 혼란을 야기했다. 근대적 인간관의 두 번째 혼란은 자연의 산물이면서 정신의 산물인 인간의 개체성의 근거를 없애 버린 것이다. 세 번째 혼란은 근대적 인간관이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함으로 악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다룬 것이다.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세 가지 혼란이 발생한 원인은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편협(이성이거나 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맞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근대성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존재양식, 개체성, 악의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한다. 이는 근대적 인간론에서 당면한 혼란이다.

 

혼란 중 첫째는 인간 본성의 생명력과 그 존재양식에 대한 해석 원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은 창세기 1: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두 번째 혼란인 인간의 개체성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과 유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은 정신의 산물이며,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산물로써 인간의 개체성을 형성한다.

 

세 번째 혼란은 낙관적으로 해석한 악의 문제였다.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성서적 근거,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비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칼뱅과 루터의 이론을 살펴보고 니버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막스 셀러의 이론을 보면서 니버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개념을 정리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크게 기독교적 견해와 고전적 견해, 그리고 바울의 신학에 나타난 견해와 그에 대한 니버의 주장을 본다.

 

셋째, 죄인으로서의 인간에서는 죄의 기원과 죄의 형태 그리고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을 정리해 봄으로 니버의 인간론을 마무리 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1) 성서적 근거

인간에 대해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증언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 도덕성, 종교성, 언어 능력, 자유 등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범주로 연구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중요하게 보는 히브리 사상이 드러나 있다. 히브리어에서 ‘숨’이라는 의미의 ‘라우흐’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기관의 특수한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라우흐’(숨)에 의해 생기를 받았다. 히브리어의 ‘네페쉬’(바람)는 인간의 피 속에 있다고 믿어졌는데, 영혼이나 마음(ψυχή)을 포함한 인간 안에 있는 생명과 동일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양성경에서 라우흐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정신으로서 영혼과 구분되는 프뉴마(πνεῦμα)가 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것 처럼 정신과 영혼도 개념들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 철학에서 합리적을 이성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 누스(νοῦς)와 구별하여 정신을 지칭하는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에게 있는 ‘상대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 성경에서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토대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지성적인 관점에서 정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몸, 영혼, 정신, 영혼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으며, 정신은 신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신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정신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고자 하는 신학에서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프뉴마(πνεῦμα)와 사르크스(σάρξ)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의 정신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사르크스(σάρξ)는 육체 보다 죄의 근원을 의미함으로 사용했다.

 

2)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던 중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합리적 피조물로 보는 것 이었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플라톤의 합리주의에 성서적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사람에게도 있어서 사랑이 하나님 형상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했다. 오리게네스 또한 플라톤 주의의 영향으로 가득차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전생의 타락을 속죄하는 타락한 천상의 정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성서적 개념이 포함된 설명을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아니고 지성적인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천사들이 인간보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형상”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신학자로 인정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을 포함하는 그 이상의 것 으로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혼의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축복을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이 있었으나, 그들과 기독교와의 조화를 최선의 상태로 공유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아의식의 신비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초월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인 기억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초월의 힘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적 신앙에 기반 하여, 기독교적 계시를 강조하므로 자아의식을 신격화하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초월능력은 자신의 너머를 지향하게 하지만, 스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 영역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해 이렇게 명확히 진술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임에도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들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칼뱅과 루터 두 사람을 주요하게 다룬다. 칼뱅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그들을 능가하는 인간의 탁월한 본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영혼을 총체적 인간이라고 정의하지 않지만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구조라는 것과 원래는 완전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는 두 관점에서 정의 한다. 이성은 의지의 자발적 결정(self-determination)과 초월성을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이성이 가지는 초월성이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마음이다. 또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의지도 인간에게 있으므로 인간은 원래 고상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성, 오성,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칼뱅은 히브리적 인간 이해에 근거하여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몸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거한다고 했다. 더불어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향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고 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이론의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루터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마음 또는 지성과 의지”이상의 어떤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였으나 죄에 의해 손상되었으므로 현재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며 이에 더하여 루터는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에 치중했다.

 

5) 막스 셀러와 니버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 ~ 1928년)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정립하고 ‘철학적 인간학’, ‘지식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문화 사회학의 시조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누스’(νοῦς)와 구별되는 단어인 독일어의 ‘정신’(Geist)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정신’(Geist)은 이성이라는 뜻 뿐 아니라 원인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이해 방식도 포함하고, 정서적 능력과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셸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의 독특한 자질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과 자유를 초월하며 시공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셸러는 원숭이와 에디슨을 비교했는데 이에 대해 니버는 기술적 지성이 추상화 능력과 일반화 능력에 의존하는데 이 두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초월적 능력에서 유래되므로 원숭이는 에디슨의 기술적 지성에 다다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셸러가 이성을 초월하는 정신(Geist)을 강조 하고 정신(Geist)이 이성을 포함한다는 것에 니버도 동의하는 바이다.

 

셸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자기 결정력을 말한다. 자기 결정력은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한한 존재 가능성을 가지지고 무언가 선택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설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 다 계시하므로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 했지만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 안에 존재했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인간은 자유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풀어갈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 할 경우,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논리적 일관성을 의미의 원리로 할 경우 의미를 합리와 동일시 하려는 모든 것은 이성의 신격화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인간 안에서 작용되어지므로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신앙을 통해 이해되는데, 신앙은 이성에 종속 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진다. 반면, 우상숭배의 죄를 피하고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게 하는 초월적 시각이 인간에게 있다. 이러한 유한성과 자기초월의 양면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피조물의 교리로, 자유와 자기 초월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 두 가지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 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