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성을 통해 은유를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은유는 ‘1차적 생각의 도구’인 범주화를 통해 생겨난 첫 번째 도구이며 다른 도구들의 모태가 된다. 범주화의 능력이 교육 받은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은유도 교육받은 사람이 더 잘 사용한다. 글보다 그림이 더 영향력 있는 것처럼 은유를 잘 쓰는 것이 더 영향력 있을 수 있으므로 어릴 때부터 은유 훈련을 시킴으로써 표현과 설득,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다섯 개의 뿌리 : (2) 관찰과 사고를 통한 ‘원리’
관찰을 통해 원리를 찾아내어 기하학, 천문학, 기상학을 연구한 탈레스와 셜록 홈즈, 제갈공명이 원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로 소개된다. 이러한 ‘원리‘를 도출하므로 더 깊은 사고체계나 학문을 쌓아 갈수 있지만 이러한 ’원리‘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관찰과 치밀한 사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관찰과 사고를 통해 ’원리‘를 도출하는 과정에 많이 사용된 것이 ’가추법‘이다. 이러한 ’가추법‘을 훈련하는 적절한 시기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사춘기 이후이다. 사춘기 때에 탐정소설을 많이 읽는 것이 가추법을 훈련하는 좋은 방법이다.
다섯 개의 뿌리 : (3)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로고스’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완결된 내용을 ‘문장’이라고 정의한다면 ‘문장’이 정신도 표현하고 만들어 간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거짓말’의 의미였으나 철학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지식인의 언어로 규정된다. 로고스의 의미가 수백년에 걸쳐 변함으로써 로고스는 문자의 생성에서부터 운문, 산문의 발생, 문화의 발달까지 연결되는 과정이다. 산문의 발달 이후 문장 개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소피스트들이고 대표적으로 프로타고라스가 있다. 이들은 수사(rhetoric)를 연구하고 가르쳤는데 이 시기에 문장은 논리학과 수사학으로 나뉘어 발전한다. 결국 문장으로 자신의 논리를 표현하게 되므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또한 문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문장이 정신을 만들어 갈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뇌 가소성을 거론한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고 따라 쓰면 뇌 가소성에 의하여 뇌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재편성한다는 것이다.
다섯 개의 뿌리 : (4) 문명의 기둥 ‘수’
숫자가 발생하기 전부터도 수의 개념은 사용되었다. 피타고라스 이전까지 수는 단지 ‘생활의 도구’였다. 피타고라스는 대장간의 망치소리는 망치의 무게에 따라 다르다는 분석을 통해 화성학을 수학으로 표현하였고, 만물의 원리가 수라고 했다. 그러므로 수에 의해 자연과 조화하자는 것이 피타고라스의 주장이다. 피타고라스처럼 수학을 ‘생각의 도구‘로 사용 할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경험적 추상과 성찰적 추상이 순환적 작용을 하도록 한다. 아이들이 흥미와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경험과 성찰의 순환을 경험하게 함으로 논리 수학적 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다. 결국 ’수‘또한 ’관찰‘을 통해 패턴을 인식하고 분류하는 사고체계이다.
다섯 개의 뿌리 : (5) 설득을 위한 도구 ‘수사’
수사의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수사의 종류와 기법들이 소개되는데, 고대보다 더 많이 수사의 기법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가 광고문구와 프리젠테이션이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에 더 수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퀸틸리아누스가 유년시기부터 성인시기까지 언어, 문법, 수사의 3단계의 학습과정을 나눈 것과 피아제의 인지 발달과정이 비슷하므로 교육의 시기를 이와 맞추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뇌 가소성에 의해서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들을 낭송하고 암송함으로써 뇌에 수사적 구조를 구축하라고 제안한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조화로운 융합을 위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들은 기본적으로 ‘관찰’을 통해 수행 된다. ‘관찰’을 통해 유사성을 발견하고, 융합한다. 이게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소통’의 방법일 것 같다.
처음에는 생각의 도구들에 집중해서 책을 읽었고 두 번째는 너무 조기교육으로 몰아간다는 편협한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현대의 다양한 문화 안에서 ‘다른’ 우리들이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 시대에도 폴리스의 소통 방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기교육을 운운 한건, 기성세대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건강하게 잘 소통하고 더 잘 융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꺼라 해석하고 싶다. (너무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간 서평이다.)
저자가 1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 두 번째 융합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대 융합’의 시대에 첫 번째 융합의 시대에 두 문화가 어떻게 융합 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두 번째 융합의 결과를 기대(히 11:6)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융합의 시대에 기독교가 (생각지도 못한) 그리스 철학으로 기독교 교리를 만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융합으로 새로운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이미 다양한 학문에서 융합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아쉬움과 기대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비판적 서평을 작성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에 완전히 무지했던 공대생이 호메로스의 영향력을 조금 알게 되었고 고대 그리스 문화의 그림자를 멀리서 본 느낌이다. 쓰고 싶은 내용도, 생각한 내용도 많았지만 기준에 맞추어 작성하다 보니 아쉽게도 삭제 한 내용들이 많다. (강의 시간을 통해 들은 내용들이 있어서 책읽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금하고 모르는 내용은 더 많았다.)
앞으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책들과 만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넓은 시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래본다.
철학을 공부한 신학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던 정보는 독일에서 오래 동안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집에서 딸을 키우며 책을 썼다는 것 이었다. 아내는 밖에 일을 하고 본인은 육아(?, 교육?)를 전담하며 집에 있었다고 했는데 자녀 교육법이 내게 기억에 남았다. 딸과 함께 시를 외우고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했다. 『생각의 시대』를 읽으며 왜 딸에게 시를 외우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3부의 내용은 어쩌면,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들을 어릴 때부터 잘 개발 시켜서 조금 더 사회를 잘 이해하고, 잘 소통하는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소개한 것 같다.
꼭꼭 숨어라
책을 읽으며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손을 놓을 수 없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종교철학 강의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나올 때 반가웠고 재미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와, 그 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설명 하는 부분에서는 나의 돌이 깨지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이 정리하여 제시한 이론들의 대부분이,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 한 것 들일 때가 많다. 그래서 철학 수업 시간에 철학자들이 정리한 것들을 보며,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라고 교만했다가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정리하지 않은 것을 인지하게 도와준 공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생각의 기원이라고 저자가 내놓은 다섯 가지 도구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때로는 그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놓치게 되는 것들이다. (어릴 때 탐정 소설을 읽다가 당연한 단서들을 놓쳐서 문제를 못 푼 경우가 있다. 대학 때는 간단하게 짤 수 있는 알고리즘을 복잡하게 짠 경우들이 생각의 도구들을 잘 사용하지 못 했던 대표적인 기억이었다. 요즘에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무궁무진 하지만...)
이 다섯 가지 도구는 요즘 내가 가르치고 있는 computational thinking에서 제안하고 있는 방법들의 기원이다. 생각의 도구들이 대개 기원전 철학자들로 부터 정리되었지만 현대에도 (저자가 많은 예로 보이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를 다스리고 조종하는 뼈대가 된다. 결국 computational thinking 안에 ’생각의 도구‘들이 숨어 있었다. 원석을 건진 느낌이다.
현대에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건강하지 않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불통’이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잘 소통하고 공감하게 되면 많은 가정들이 깨지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프로그래밍을 알게 되는 것 뿐 아니라 computational thinking으로 잘 “소통”하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다. 고대 폴리스의 사람들이 서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소통‘했던 것 처럼...
우선 이 책에서 사용하는 단어부터 정리를 하면, ‘생각’은 언어적, 기호적 사고인 ‘고차적 의식’을 말하고, ‘지식’은 생각의 결과로 정의한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1부 지식의 기원에서는 지식의 폭발과 융합을 통해 지식이 생성되는 배경을 소개한다. 지식은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을 움직이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발전한다. 이를 보편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서양에서는 로고스라 불리고 동양에서는 도, 법이라 불린다. 보편성을 원리, 아르케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원전 8-3세기는 첫 번째 ‘지식의 폭발’ 시대로 ‘축의 시대’라고 불린다. 야스퍼스는 이때부터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 변하면서, 삶이 달라졌다고 표현한다. 동양의 제자백가 서양의 호메로스 등의 시인과 철학자, 기하학자와 의학, 물리학자들이 활동한 시기이다.
그리스에서의 지식의 폭발과 기독교의 출현으로 2~4세기의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이 첫 융합의 시대에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으로 교리를 만들었고 이로서 서양 문명의 틀이 정립되었다.
첫 ‘지식의 폭발’ 시대가 보편성을 추구했다면 두 번째 ‘지식의 폭발’시대인 17-20세기는 과학기술을 통한 확실성을 추구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두 번째의 지식의 대 융합이 예측되고 있다.
소통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생각의 도구들이 준비되고 만들어진 시기를 호메로스(bc800?~)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시기로 본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의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고, 무역하면서 생기는 모순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연설, 토론, 논쟁으로 해결하면서 그리스어는 정확하고 명료하게 발달하게 되었고, 이러한 언어의 발달은 사고를 효율적으로 표현하도록 도왔다. 이러한 배경 하에 첫 지식의 폭발이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의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를 발생하게 했다.
2부 생각의 기원에서는 호메로스가 야만인과 시민을 구분함으로서 시민의 도덕적 보편성의 기준을 보여준다. ‘보편성’이라는 틀로 공동체를 생존하고 번영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생각의 은밀한 욕망’이 아닐까?
호메로스가 만든 작품들이 그 시대의 사람(그리스 시대를 넘어 그리스 문화가 영향을 미친 서구 전체) 모두를 ‘사회적 기준’이라는 ‘보편화’의 도구로 옭아 멘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과거로 갈수록 다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보통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대에는 그러한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잘 찾아가는 문화가 만들어 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지켜야 하는 법과 도덕적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부류가 생기면서 과거에 없던 사회, 문화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보편화된 법과 윤리적 범주가 아닌 ‘진리’가운데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가 건강해 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일까...
<신앙과 정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3부를 자세히 읽으면서 정말 속도를 내어서 읽을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하며 읽었다. 그중에 가장 큰 수확은 그동안 계속 읽고 싶었던 책인데 왜 이제야 자세히 읽게 되었을까 답을 찾은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지평서원.
지난 선교의 10년과 한국에 입국해서의 4년은 내 안에 하나님 보다 강하게 있었던 프레임(틀)을 깨는 시기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이하 저자)는 같은 증상(?)이라도 다른 경우들이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증상에 대해서 다양하게 해석하므로,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중간 중간 저자의 프레임(?)이 보였고, 계속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더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없었던 거 같다. 아마 나의 틀이 깨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라면 저자의 글에 무조건 동의한다고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저자는 대부분의 경우 잘 정의하려고 하지만 정의되지 않은 많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지난주에 발제 하셨던 목사님이 참고하셨던 것처럼 다른 번역본을 같이 봐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자의 방대한 독서 분량과 성경 말씀의 활용은 놀라웠다. 나에게도 이렇게 적재적소에 말씀들로 증거하고 해석 할 수 있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한편 어떤 부분은 저자가 성경 본문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역시나 문화 안에서 해석(예를 들어 몸을 경시하고 영혼이 중요하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음.)되어 질 수밖에 없는 기독교를 생각하며, 나 또한 문화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요즘 너무 논문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저자가 이론이나 말씀의 받침 없이 (혹은 일부분 편협하게 해석한 서적을 근거로 하여) 본인의 논지를 무조건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3부의 1장에서는 ‘말씀이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 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다행히 내 생애에서는 나 혼자만 떠오른 말씀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여러 번 거론이 되면서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확인되어 그 말씀들이 나를 견고히 하는 통로가 되었다.(석사 논문 작성 때 오병이어 말씀, 선교 훈련 후 선교지 2차 파송 전 여호수아 말씀) 저자의 시대에 그런 경우는 없었는지 사례에서 그런 부분을 내심 기대하다가 없어서 아쉬웠다. 역시 신앙 경험은 귀를 열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님을 더 광대하게 경험하는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질문] 영성지도자로서 떠오르는 것을 조심스럽게 나누도록 배웠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신앙과 정서>를 읽으면서 계속 영성지도를 할 때 과연 영성지도자로서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 아래의 내용은 <신앙과 정서> 1, 2부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1, 2부
지난 학기 소논문을 신앙 정서와 상담심리학과 관련하여 작성하던 관계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과 논문을 참고하게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 어쩌면 그는 가장 차가운 기독교 지성의 선봉이 었는데, 그가 부흥의 한가운데서 가장 뜨거운 가슴을 연구하고 표현한 것 같다. 물론 그의 표현 도구들은 여전히 차가워 보이는데(기술 형식이나 구조 등) 내용은 정말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지평서원.
에드워즈는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연구하였다. 1720년 에드워즈는 뉴턴이나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 “원자에 대하여”(Of Atoms, 1722), “존재에 대하여”(Of Being, 1722), “마음”(The Mind, 1724) 등의 과학적 저술을 했고, 존 로크의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식들은 감각이나 경험으로 만들어 진다고 했다. 과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인해, 예방접종을 적극적으로 함으로, 1758년 1월 뉴저지 대학 학장으로 취임한지 한달 만에 천연두 예방 접종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지금 시대(2021년 현재, 코로나 당시)에 너무 나도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이다.
지난 학기 논문을 준비 할 때도 ‘정서’의 정의에서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한국에서 번역된 두 개의 책도 속 시원한 개념을 설명 할 수 없었다. 이후의 내용들을 보고 한국어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1장만 3번째 읽는 것 같다. 왜 읽어도 읽어도 새롭게 줄칠 부분들이 계속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1장 “정서의 본질과 신앙에서의 정서의 중요성에 관하여”에서는 “마음의 정서(affections of mind)”란 무엇인지 정의하고, 참된 신앙의 큰 부분을 이루는 여러 가지 정서들과 교리에서 추정해 낸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참된 신앙의 큰 부분을 이루는 여러 가지 정서“를 설명하는데 10가지로 분류를 하고 있고 특히나 그중 4번째인 “참된 신앙의 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정서“는 9가지의 정서들을 분류하고 설명한다. 바로 이런 부분이 서두에서 언급한 ”차가운“이라고 표현한 이유이다. 정서들을 분류하고 갈갈이 찢어서 자리매김을 했다. 왠만한 심리학자들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일까? 두번의 부흥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기도와 연구를 했을지 상상이 간다.
과학적 지식을 기저에 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성적인 부분을 측량할 단어들이 없어서 많은 부분 “바른 정서”나 “참된 신앙”등의 용어를 사용하므로, 이에 대해 명확히 정의를 안 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은 읽을 때 마다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요즘 몸의 반응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저자가 몸을 무시하는 부분들은 살짝 불편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질문1] p22에서부터 나오는 사탄이 사용하는 ‘이 방법’ 이라는 것은 참 신앙과 모조 신앙이 구별되지 않은 채 혼재 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질문2] 몸과 마음에 관한 질문. p38) 1번째 줄, ‘사람의 몸은.. 사랑, 증오, 기쁨, 슬픔, 두려움, 소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라고 했으나 단정 할 수 없는 이유는 p73 아래서 두 번째 줄 “체질이 마음의 현재 기분을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p64 아래서 두 번 째 단락 처음에 “몸의 정서”와“영혼의 정서”를 나누었는데, 몸은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몸의 정서”는 무엇일까...
★★ 아래의 내용은 <영적분별의 길> 4, 5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영적분별의 길> 4장 기억의 안내 & 5장 직관적 지식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분별의 길>. 이강학 역. 좋은씨앗
4장 “기억의 안내”를 읽으며, 지난 주 분별 시간에 수업과 상관없이 2년 전의 11월이 떠오르며, 지난주 갑작스런 진로 변경이 2년 전과 똑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을 깨닳았다.
‘톰’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비슷할 것 같다. 2년 전에도 영성지도와 영적 분별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고, 그 당시 주변에서 교회사역을 이야기 했을 때 저항감이 있었으나 영성지도 시간을 통해 러브콜 있으면 가겠다고 했는데 정말 먼저 연락 온 곳이 있어서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래서 ‘제도적 교회는 내 부르심이 아니다’를 확신했는데 2021년 11월 또 다른 곳에서 러브콜이 왔다. 내게는 2년 전의 기억으로 저항이 있었고 그래서 지원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딱 2일간의 일정으로 러브콜, 영성지도, 원서접수, 면접이 이어지고 지원한 부서가 아닌 새로운 부서로 합격했다. 그리고 화요일 분별 수업시간이 끝나면서 내안에 2019년과 2021년의 11월이 오버랩 되었다.
내안에 저항이 커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2년의 시간을 기다리시고, 21년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나의 마음을 만지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 교회가 "현재 나의 부르심의 자리"임을 인지하고 동의하게 되었다. 2년 전에도 이 책을 읽었음에도 기억의 실습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지만, 지난주 성찬식에서도 지난주 수업에서도 저절로 기억을 통한 은혜를 누린 것 같다.
직관적 사람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훈련을 많이 하고(스스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표였을 것 같다^^) 삽질도 많이 해서 현재는 S수치가 많이 줄어든 S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있는 S의 성향이 자주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고 관계 가운데 실수를 자주 유발하기도 한다. 때로는 직관이 있을 때 조차도 그것을 의심하고 분석하는 나를 본다. 다행히 책(p154)에서 솔크의 경우에서도 과학적 연구나 철학, 신학적 성찰이 수반된 이성의 추론 작용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두 번째 문장에서도 ‘직관에만 의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과연 직관만으로 의사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에 어떻게 따를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질문] S의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이분법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직관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책에서도 다른 정보들을(p154) 고려해서 의사 결정하라고 하지만 직관만으로 빠르게 의사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에 어떻게 따를 수 있을지...
* 위의 글을 쓴지 2년 후 : 지금에 와서는 위의 질문이 그렇게 크게 동의되지 않게 되었다.
목요일 “영성지도“ 수업시간에 피지도자로 실습을 했다. 지도자는 상담전공 선생님이었는데 정확히 ”양가 감정“의 존재를 알아내게 도와주셨다. 사실 영성지도를 끝내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많았는데 영적 분별 과제를 읽으며 여러모로 정리하고 돌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높은 불안지수를 더 수시로 확인하고 관찰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책에서의 실습을 통해서 진짜 나의 ‘갈망’을 더 관찰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 이었다. 분별을 위해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 불편심과 부르심의 파악, 더 큰 갈망도 중요하지만 이번 주 나의 주제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경험이 가장 부각되었던 것 같다.
마음의 갈망 찾기 실습에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 번의 반복된 질문에서 비슷한 갈망이 나왔다. 어쩌면 그래서 내 안에 양가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 길로 갈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갈망 아래에 더 근본적인 갈망’의 탐색의 과정이 있었기에 앞의 두 질문에서 비슷한 대답을 한 것 같다. 목요일 영성지도 수업니 끝나고 나서 78-79페이지의 내용이 많이 위로가 되었고 나를 볼 수 있는 명확한 문장들이 많이 보였다.
“갈망 들 중 가치가 있는 것”,
“서로 충돌하는 온갖 갈망의 덩어리”라는 표현이
나의 양가 감정 때문에
스스로 정죄하려는 자세에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로
바뀔 수 있었다.
(개인사 기억하기 실습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보기”)
최근 4-5년의 여정은 진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씨름하고 탐색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부르심을 입은 공동 창조자이지만, 양가 감정이 존재하는 죄인이다. 어쩌면 이것이 불안의 요인일수 있으면서도, ‘완벽’하다는 착각을 하지 않게 하는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피조물이기에 항상 위태 하지만 안정을 구하지 않고 그 위태로움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편향되지 않으려고(불편) 아버지께 시선을 집중하며, 부르심을 따라 공동창조자로서의 자유함을 누리고 싶다.
[생각 해 볼 부분]
“우리의 수단과(모든 다른 피조물들) 목적(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 이라는 부분에서 좀 불편해서 오래 머물렀다. ‘다른 피조물들’이라 함은 사람을 포함한 것 일 텐데.. 사람조차도 우리가 ‘수단’으로 대해야 할 것인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라서 그런 의미라면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 으로 해석한다면 약간 불편한 부분이 남는다.. 표현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6장에서는 실망의 시기에 기도, 묵상, 더 깊은 성찰, 적당한 고행의 4가지 수단을 더 매진하라고 말한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는 할 수 있다’고 하고,
영적 실망에 빠진 나에서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가 되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에너지가 있으면 좋겠다.
머리로는 알지만 쉬운가...싶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영적 실망의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목이 자주 막히는 문제에 걸쳐 있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 공부를 하면서,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 더 깊이 기도하고 다양하게 기도하는 과정을 훈련 받는 듯 하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이고, 영적 실망을 통해 회개, 배움, 겸손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 같다. (책에서는 영적 실망이지만 현재 나의 상황에서는 건강의 문제로 자꾸 변형해서 읽힌다.^^)
영적 실망의 상태를 통해 ‘온 종일 주님을 찾는 일상(p259)’을 주님이 만들어 가신다고 했는데, 이번학기 중에 나는 통증을 통해서 매순간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어서(이전에 아무리 혼자 훈련하려고 해도 안 되던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난 학기 『영신 수련』을 읽으면서는 다 맞는 말 인거 같은데 문맥간의 연결 없이 써 있어서 맥락이 이해가 안가거나, 너무 간단해서 ‘이게 쉽나’했었는데 이냐시오의 자서전을 참고 한 것이나 갤러허의 해석이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대로 살기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점점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이루지 못했다는 겸손한 자세로 점차 이루어 가는 생을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큰 바위 얼굴"(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주인공 처럼...
[질문] 『영신 수련』이 오래 읽히고 수도사들에게 정기적으로 훈련된 것으로도 아는데(피정? 등으로?) 그렇다면 개개인의 변화 등에 대해서 기록하거나 『영신 수련』의 반복학습에 대한 장기적 관찰 결과 등에 대한 자료들도 있지 않을까?
‘내적 감지의 3가지 유형’을 말하는 17번의 심리적, 도덕적, 영적 감지의 갤러허의 설명에서 심리적 설명에서 ‘의식성찰’이 떠올랐다. 도덕적 감지가 마음에 가장 어려웠다. 행동, 말, 관계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가“(p68)..라는 문장에서 매일 깨어 있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나를 또 돌아보게 된다. 매순간 그렇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신 방법대로 살고 싶어서 어쩌면 나또한 이냐시오의 민감한 영적 감수성이 나의 매일의 목표이다. 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목표에 집중하느라 사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해내던 내가 roaming의 나날을 보내느라 실적이 별로 없고 제한시간에 턱에 닿아 일을 끝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매일을 경험한다.
그래서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간다.
내가 생각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예수님이 선택한 안전지대 안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훈련 중이다.
일상 중에도 관상적 태도를 유지하고 싶으나 수시로 본성이 먼저 나타난다.
『영신수련』을 읽을 때 너무 단문이어서 이해하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했었고 여러모로 의문도 가고 했던 부분들이 많았다. 『영의 식별』을 구입하면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을 구매 할까 하다가 말았는데 『영의 식별』을 읽으면서 자서전을 근거로 한 설명들 때문에 『영신수련』이 더 이해되고 동의 되었다.
[생각해 볼 내용]
주님을 사랑하고 제자로 살아가고 많은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지만, 도덕적 감지(p68-69)가 너무 높을 때도 있는 반면, 수시로 너무 선을 넘어 바닥으로 떨어진 경우들도 보았다. 이러한 경우는 인지의 문제일까? 어릴 때 상처의 문제일까?
[생각해 볼 내용]
이냐시오는 계속 세속과 거룩,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거 같다. 나 또한 그런 고민의 과정 중에서 정리된 것이 있어서 ‘이분법’은 인간이 편하자고 만든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냐시오는 그 시대의 철학을 기반으로 생각해서 이분법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지금의 우리도, 거룩과 세속, 선과 악을 열심히 분별하면서 ‘세속’의 것을 피하며 살아야 할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선을 긋는 것도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판단하는거 같아 때로는 불편할 때도 있다.
[생각해 볼 내용]
p28의 이냐시오의 ‘민감한 영적 감수성’에 집중하느라 지난 주중 ‘영성지도’ 실습과목 수행 중에 온전한 통로로 민감하고 싶어서 이성을 빼고 머리도 마음도 작동시키지 않았었는데, 통로가 되는게 아니라 혼돈이 되어 버렸다. 결국 피드백 시간에 되돌아 보니 ‘논리’대로 가면 되는 거 였는데 내가 논리를 버리고 진짜 통로가 되겠다고 다 버린거 였다. 이냐시오 자서전에 보면 생각의 길, 정감(감정?)의 길.. 이렇게 가는데, 생각(이성)을 비우는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나의 이성(생각)을 들려서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횃불트리니티 대학원대학교 ‘기독교 영성’석사과정 입학(면접) 시험의 질문에 왜 입학(?공부?)하려고 하는가가 있었다. 이상하게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나를 더 알고, 하나님을 더 알아 이 땅에서 자유롭고 가볍게 살고 싶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수잔 S 필립스. <촛불> 영성지도를 조명하는 빛. 최상미 역. 에스오에이치피(SOHP). 2015년.
실제로 선교지에 있던 10년 중 앞부분은 나에 대한 고뇌가 많았다. ‘과연 예수님이 안에 계신 사람으로서 나의 이 사고 방식이 맞는 것일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내 안에 있는 이 분노는 무엇인가?’ ‘같은 선교사인데 나는 왜 저 사람을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걸까?’ 사역에 너무 집중하고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자꾸 올라오는 이러한 질문들을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든다.
『촛불』을 읽으면서 공통적인 내용에 줄을 쳤다. ‘나의 모든 존재, 나의 평강 그리고 나의 행복이 걸려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토마스 머튼, p37), ‘하나님께서 나를 나 되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찰스, p247), ‘내 자신을 볼 수 있게 도우시지요’ (짐, p255), ‘내가 나 되게 하는 것’ (레아, p346).. 아홉 명의 피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찾고자 했고, 자신들을 알고자 했다. 이것은 어쩌면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고자 하는 나의 갈망과 같았고, 내가 앞으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촛불』을 읽던 도중, 『거룩한 초대』 10장을 먼저 펼쳤다. 10장의 앞부분, 아빌라의 테레사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낭비하시는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글을 보았다. 책을 펴기 전에 한 제자가 하나님 나라를 더 구해야 하는데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가 면접 시험에서 붙기를 간구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카톡을 보냈었는데 답변을 안한 것이 기억났다. 사실 레위기의 음식 규정을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길게 써야 해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나서 테레사의 글을 찍어서 보냈다. 제자가 면접 간다고 기도 부탁 할 때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니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네가 생각한 것 보다 더욱 넘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전했는데도 그 말은 하나도 먹히지 않고도리어 제자는 ‘이런 것을 기도 해도 되나요?’라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책을 찍어 보냈더니 학생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에 줄을 쳐서 다시 나에게 보내면서 지금 까지도 소망한 것 보다 더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라며 면접을 가기 전에 평정을 찾았다. 오늘의 이 경험을 통해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도(내게 허락하신 학업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사실 『촛불』을 읽고 나서는 가슴이 콩당 콩당 뛰며 영성지도자로서의 나의 부르심을 확신한다고 글을 쓸 뻔 했다. ‘영성지도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부르심에 대해 성찰’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주제를 여러 번 읽으면서 과연 책에서 그것들이 나올까 고민하며 읽었다. 『촛불』은 그 주제들을 쥐어 짜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나로 하여금 ‘영성지도’를 갈망하고 사모하게 만들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곧장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신 것 같다.) 그런데 글 완성이 늦어지면서 ‘혹시.. 아닌가?’ 하는 마음에 겸비하여 더 점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좋아서 하는 착각은 아닌지..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닌지.. 나는 왜 영성지도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촛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적분별’과목의 『신앙과 정서』 2부를 읽으면서, "마음에서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은혜의 정서가 아니다"라는 2부의 다섯 번째 표지에서 나도 모르게 ‘영성지도자로서 조심, 확인 작업’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었다. ‘영성 지도’과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부분을 읽을 때 마다 나도 모르게 ‘영성지도자’로서 조심할 것 들, 하지 말아야 할 것 들 을 정리하고 있었다.
A. 영성지도에 대한 이해
나의 현재 시간표는 내안의 악과 어두움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9가지의 사례들을 읽으며, 결론 부분으로 갈수록 ‘인간론’ 수업시간에 만났던 라인홀드 니버의 ‘피조물 인간, 불완전한 인간’이 맴돌았다.
피조물인 인간이므로 우리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불안정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안정을 찾고,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는 정리를 다시 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피조물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선’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경계선’에 있는 그 불안정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생각을 해봤다.(폴 틸리히, <경계선 위에서>) 내 안에 악을 직면하는 시간이 점점 뒤로 미뤄지면서, 어쩌면 이 악을 허락하신 분의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라는 다른 관점도 생겨나고 있다. 어쨌거나 여러 명의 영성지도자들을 통해 하모니를 이루듯 성도의 연합과 오랜 시간을 통해 내 안에 악을 인지하게 되었는데, 현재 인지한 상태에서 직면을 미루고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미뤄지고 있다. 심지어 이 은혜의 시간에 집중하고자 휴학까지 생각했었다. 피조물인 인간이 내 계획대로 할 수 있을까. 신학 공부를 하느라 내게 주신 은혜의 시간(내면 직면)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신학에 집중하는 일은 위로부터 비처럼 내리는 은혜를 주목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p235) 부분에서 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나를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 반하여,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제한 시간 안에 해 내야 할 일들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피조물 인간으로서 제한된 시간에 대한 쫓김 그리고 게으름과 머무름 사이의 전쟁에서.. 멜리사의 복잡한 생각들이나 나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p292) 저자가 멜리사와 같은 어려운 경우들을 나눔으로써, 때로는 빈손으로 피지도자를 기다리는 것이 피조물 인간인 영성지도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 부분에 가서야 저자는 영성지도는 양방향(p361) 모두에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교수님의 바쁜 시간을 내가 뺏은 것 같은데 내게 영성지도를 해주시는 교수님은 마칠 때 마다 교수님께도 은혜가 있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나 또한 내가 만나는 분들과의 대화 가운데 그 분의 문제 때문에 만난 경우 일지라도, 내게 더 큰 울림이 있고,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을 때가 있다. 영성지도자와 피지도자는 함께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것 같다.
B. 부르심에 대해 성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자의 영성지도 사례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영성지도의 여러 가지 기술들을 체크했다. 감동은 감동대로 받으면서 한편으로 기술들을 챙기는 나를 보며 너무 방법론에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짝 고민도 되고, 내가 정말 영성지도를 갈망하는가라는 생각도 되었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 없다. 집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저자의 사무실을 나가는 그렌트의 장면(p241)에서 YUST 내 사무실에서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아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다른 학생이 들어오기 전까지 앞 학생의 상황에 눈물 나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다시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단둘이 만나는 일을 할 수 있게 될까...내가 너무 저자에게 투사를 하고 있나...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었다. 내가 진짜 이 그림을 갈망하고 있구나.. 내가 그 감동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구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었던 사무실에서의 그 은혜, 하나님의 숨겨진 큰 사랑을 보고, 짧지만 그 시간에 머물 수 있었던 사무실에서의 그 시간을 내가 너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완전 향수에 빠졌다.
존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여정이 동부로 가면서 완성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나도 같이 눈물이 났고(p329), 저자를 통해 존도 데이빗도 영성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p341), 나 또한 많은 만남들을 통해 비슷한 여정을 가는 사람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만나게 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앞선 분들을 만나면서 준비 할 수 있었고, 꿈을 꾸고, 기대 할 수 있었고, 뒤에서 오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여정의 앞길이 보여서 기도로 도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므로, 모두가 친밀하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결론 부분에서 특히 눈물이 난 곳이 많았다. 존의 여정(p329), 상황과 상관없이 감사하는 레아에서 눈물에서(p351), 룻의 마지막 성찬에서도(p364), 속을 알 수 없었던 찰스가 결론 부분에서는 자유와 가벼움의 은혜가 표현되는 곳에서도(p357), 칼이 학생들을 대하는 것(p206-208)에서도...
내가 영성지도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감동을 계속, 전적으로 누리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제자의 두려움과 불안에 나의 공부(책)가 도움이 되어 제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유케 된 것처럼 나도 그를 통해 주님 안에서 치유되고 자유케 되고, 그도 나를 통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치유되고 자유케 되어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계속 보고 싶다.
. 피지도자의 정서, 정신적 장애의 가능성 고려 but ‘영적’통찰들을 낮게 평가하게 될 수도 있음
. 정신의학이 육군에 적용되기 전에 육군에는 정신장애가 없었음. (p186)
. 정신의학의 의학적 이름붙이기(naming)에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개인에게 영향 미치는 무의식적 ‘결정인자’들을 이해하고 있을수록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이름들은 정확하지만 결국 이름 뿐이다. 특징, 조건을 기술하지만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적절한 균형감각을 위해 기본적 정신의학적 이해 필요 (분별 vs 진단)
(1) 성격이론
(2) 진단 범주 : 장애에 부여된 이름과 기술, 원인, 치료법 (성격의 발달과 문제의 발현 파악)
1. 분별과 진단
. 분별(분리시키는 것) vs 진단(“지식”을 통해 구별 짓는 것)
분별
진단
지식 필요 / 은사 필요 (통찰) 성향 구별함으로 적절한 방향으로 도와줌 관계를 통한 은혜의 선물 (애착 없는 친밀함) 신비에 반응 위해 신비에 대한 체험을 구별
지식 아주 중요 (통찰보다 명명) 질병을 바로잡기 위해 이름 붙이기 최고 수준의 진단에 통찰 필요 신비를 깨뜨리기 위해 해결책 찾아 나서기
2. 정신의학적 분류
(1) 명명법(nomenclature) : 질병과 증후군의 명명
(2) 질병분류학(nosology) : 진단과 치료목적으로 장애들을 분류하고 구분
- DSM(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 정신 장애 분류와 명명 체계
- 대부분의 장애들은 원인이 불분명한 문화적으로 결정된 증상의 기술일 뿐
- 증후군 : 정신 분열은 여러 원인을 가진 장애로 보고 공통적 증세들을 가진 장애의 집합
- 문화 안에서의 결정 (예) 동성애, 신경증, 조울병 (p191~)
→ 영성지도에서 진단하려 하는 용도가 아닌 충분한 관점의 소유 (영성지도와 관련있는 사항만)
2.1 어린 시절에 처음 발견되는 장애 : 정신 지연 (IQ 70이하) 및 신체 증후군
2.2 기질적 정신 장애
. 뇌의 기질적 화학적 변화와 관련된 장애 : 치매 (유사치매)
. 뇌와 관련 있지만 다른 원인 : 섬망(환각, 착각), 중독
2.3 물질 사용 장애 → 거룩한 질병 (은혜와 의지력 사이의 대면)
(1) 약물 남용 : 기능을 손상시키는 장기간의 약물 사용
(2) 약물 중독(의존) : 내성 증가, 사용 중지시 금단 증상 나타날 때
- 알콜의 경우 남용이나 의존이 있다면 중독
- 기도에 방해, 깨어있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면, 남용이고 중독이다.(p196)
2.4 정신분열적 장애 : 정신 기능의 파편화, 심한 붕괴 등...으로 망상, 환각 등의 동반
(1) 긴장형 정신 분열 : 움직임, 몸동작
(2) 붕괴형 정신분열 : 생각과 감정의 붕괴가 뚜렷
(3) 편집성 정신분열 : 적대적 감정과 관련 (과대망상)
(4) 미분화형 정신분열 : 위의 다양한 증상들의 혼합 발생
. 종교적 환각, 망상, 집착, 편집증적 과대 망상과 신비 경험
→ 약물과 지지 치료(봉합 학파) vs 최소한의 약과 많은 시간 투자, 통찰지향 치료(훈습 학파)
(1) 지지적 심리치료 : 약물, 환자가 일상 과제와 스트레스 잘 다루도록 돕고, 사고재형성 격려
(2) 통찰, 역동적 치료 : 무의식을 인식으로 끌어올리고 방어의 이면 조사 (신경증 치료)
‘횃불 트리니티’에 입학 하는 과정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과정이었다. 입학 한 그 학기부터 수업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그 동안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의아해 했던 것들이 수업시간에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해 얻게 된
가장 첫 번째 유익은 ‘내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서 자유롭고 가벼워 졌다. 두 번째는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에게 알려주고 계셨다는 확인이 되면서 ‘안정감’이 생겼다.
2013년부터 나에게 목표가 된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이 조금씩 구현되고 있었다. ‘횃불 트리니티’와의 만남은 내게 말씀의 구현이다.
1. 수퍼비전 소감 및 알아차린 것
첫째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 정리되고 알게 된 부분들이 있지만 가장 큰 수확은 교재를 통해서 자유케 된 부분이다.
6장 ‘주어진 것과 선물‘ 부분에서 그동안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에로스 부분을 다룬다. 내가 계속 경험했던 것은 성경을 깊이 읽고 말씀 안으로 빠져 들고 있을 때 내 몸을 감싸는 느낌, 부부생활을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럴 때 마다 죄책감이 들었고 죄책감이 들면 하나님께 물어보기 보다 무조건 대적 기도를 했다. 내가 당당하고 성적인 부분이 자유하다면 ’제가 왜 이런가요? 저한테 성적인 필요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하고 하나님께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나와, 내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서 나도 모르게 이런 반응이 오는 건가 싶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반응이 말씀 읽을 때 여서 당황스러웠다. ’말씀의 귀한 선물이 쏟아지는 시간에 이런 역 반응을 하다니’ 이런 죄책감에 하나님께 죄송했고, 대적기도를 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기간은 정말 오래 되었다. 그래서 혹자가 ‘독신이 부르심이냐’는 질문에 ‘아닌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메리 로즈 범퍼스 외.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7
그런데 6장을 읽고 나서 놀랐다. 대적기도 할 것이 아니고 내가 고스란히 하나님께 반응하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라니.. 대부분의 여성 싱글들이 경험하지 않을까 싶어서 동기 전도사님 중 싱글 여자분께 아무 이야기도 안하고 ‘이 부분만 한번 읽어보세요’하고 건넸다. 그 당시 그분은 다른 과제로 바쁠 시기였는데 그 부분을 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고맙다고 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싱글 성도들이 경험하는 부분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는 성경을 읽을 때 그런 반응이 생기면, 너무 기쁘고 감사가 나왔다. 왕상 7-9장 솔로몬의 성전 제작과 봉헌 부분에서 머릿속으로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면서 본문에 더 깊이 빠져들면서 읽을 수 있었다. ‘아 하나님의 뜻은 이런 거 였구나...’ 레노바레 성경으로 읽는데 왕상 8:10-11 부분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구름 때문에 제사장이 섬기기 힘들다는 11절 말씀을 중심으로 한 적용이 있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비가지적 표징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날도 성경을 읽으며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비가시적 표징을 그동안 몰랐고 잘 못 반응했던 것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런 경험들이 있을 텐데 ‘이 증상은 무엇인가요?’하고 물어 보기보다 내가 정한 좋은 것과 ‘나쁜 것 같은 것’의 규칙에 따라 반응하고 있지 않을까?
둘째, 강의 전에는 정리되지 않은 영성지도가 이제는 이전보다 조금 더 정리되고 안정 되어 가고 있음을 인지한다. 성격상의 문제로 피지도자를 기다려주기 보다 먼저 성급히 이야기 할 경우가 많았다. 이는 피지도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주눅 들게 하고, 더 표현하기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피지도자의 반응을 기다려주고 여지(pause)를 줄 때 피지도자가 먼저 반응을 보이고,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하나님께 집중해서 물어보고 있던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피지도자의 반응과 진행을 경험했다. 그러한 경험으로 하나님께서 피지도자를 많이 사랑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피지도자의 진술에 질문이 많이 생긴다. 피지도자의 말을 끊거나 혹은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해서 본론에서 멀리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러나, 지도자의 질문이 본인의 궁금함인지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영성지도 중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셋째, 피지도자가 깊숙이에서 꺼낸 문제가 내게도 존재하는 것들을 이번학기에야 인지했다. 항상 피지도자들의 문제에 깊이 공감되고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것이 은혜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학기에 성찰보고서와 대화록을 여러 번 작성하면서 인지한 것이 피지도자가 꺼내온 이슈가 나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지도가 피지도자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동일한 부분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넷째, 위에서 인지한 부분을 강의시간에 피지도자 이슈로 가지고 갔다. 영성지도 전에 약 2주 동안 혼자 물어보고 머물 면서 명확하지 않게 답을 받은 듯도 했다. 그런데 영성지도 실습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자 마자 두 개의 그림이 떠올랐다. 너무 놀랐다. 그러나 해석이 되지 않아서 이제 그만 기도할까요 묻고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 지도자를 통해서 도움을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성지도자가 한마디의 기도를 했다. 그러자 마자 두 장의 그림이 이해가 되었다. 이 답변을 받고 나서 이 것이 오래기다리신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바쁜가’는 질문은 십년도 넘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취업준비를 하느라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느라고 바쁘기는 했다. 그러다가 20대에는 바쁜게 당연한거라 생각했고, 30대 이후 선교지에서 부터 ‘왜 나만 바쁘지’ 묻기 시작했다. 선교지에서는 대개가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아무래도 능력이 있던 분들이라 많은 일들을 여유롭게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잘 못 된 건가? 열심히 하는 게 나쁜 건가...“
이 두 그림은 상기에서 언급한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이 내 삶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 답으로 기대가 되고 감사했다. 수퍼 비전에서 교수님께서는 나의 이슈('나는 왜 바쁜가')에서, 공생애동안 바쁘셨던 예수님이 떠올랐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환대와 응원이 느껴졌다. 그동안 바쁜 것은 내 죄의 근원이고 내 열심이고 하나님 보다 앞서 가는 것이고, 내 열심이라는 상담 쪽의 정죄 메시지를 들어왔다. 그래서 스스로 정죄감이 많이 들었다. 30대 후반에야 그것이 상처이기도 하지만 그 상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고 정리를 했다. 그래서 ‘바쁨’ 또한 부르심이라 생각하고 내게 허락된 ‘바쁨’ 가운데서 ‘은혜의 리듬’(마 11:28-30)을 누리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래도 항상 ‘하나님 보다 내가 앞서는가?’하는 긴장감으로 매번 점검 했다. 슈퍼비전을 진행하던 중, 교수님의 말씀에 완전 놀라고 그 이후로 일상과 사역 모두에 안정감이 더해졌다. 정말 바쁘게 몰아치는 기말 기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응원을 경험함으로 ‘존재적 안정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영성지도의 유익인 것 같다.
<영성지도자들을 위한 수퍼비전>. 목차
2. 강점
강점과 약점은 항상 양면이 있다. 경계를 잘 지키면 약점도 강점이 되고 경계를 지나치면 강점이 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번학기 영성지도를 하면서 알게 된 강점은 피지도자의 상황이 빨리 인지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빨리 인지되었다고 먼저 발언하면 안 되고 피지도자가 직접 하나님께 듣도록 최선을 다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여쭤보지 않고 내가 피지도자에 대해 발견한 것을 나누었을 때 아직 피지도자가 받아들일 만한 때가 아닌 경우들이 있다. 내가 먼저 발언해 버리므로 피지도자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나만 민망해 진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좋은 경험으로 그 이후로는 최대한 발언을 줄일 수 있었고 더 기도에 집중 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인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로 피지도자를 더 집중해서 도우라고 주시는 은혜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거하는 훈련이 내게 진행되고 있었고, 피지도자에게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 깊어지는 훈련이 동시에 진행된다. 함께 지어져(엡 2:22) 가고 있었다.
약점 또한 빨리 인지 되는 것인데 그래서 깊이 머물지 않고 ‘휘리릭’ 지나가 버린다. 화요일에 영성지도(강의시간 실습)를 받고 수요일에 상담을 받았는데 인생의 큰 그림들이 휙휙 그려졌다. 그런데 깊이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려서 결국은 상담이 끝날 무렵에 남은 것이 없었다. 상담선생님도 나도 무언가 이상했다. 상담 선생님의 분석은 내가 빨리 인지하는데 깊이, 오래 머물러 숙성시키는 시간이 없어서 결과가 정리가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3. 도전과제
인생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겠지만 현재 시간표는 내 인생에서 무언가 변혁이 있는 중요한 시간표인 듯이 느껴진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데 현재 나는 그에 못지 않은 상황에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리 저리 튈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더 본질 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정리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만나는 청년들과 나이가 10-20년 차이가 나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하나님 앞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인 것 같다. 내 마음속의 진짜 바램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을 알고 가고자 하는 나의 “못 된 안정감”이 나의 진로를 방해 하는 걸까? 또 다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인데 하나를 알아가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힘들지만 이 과정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과정이라면 어려워도 가야할 길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간에 신학교에 두신 것 같다. 3학년이 되어서야 횃불에서 시간은 내가 인큐베이팅 되는 시간 이란 생각이 든다.
‘바쁨’과 연관된 것이 내 안에 ‘화(anger)’와 연관되어 있음을 살짝 인지 했다. ‘화’와 관련된 부분은 30대 초반부터 연구하고 싶던 주제였다. 그것이 내 안에서 화두가 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남은 두 번의 상담을 통해 알게 되기를 구하고 있다. ‘화’라는 주제도 나에겐 10년이 넘은 주제인데 이 주제에 답을 찾게 되고 더 가볍고 자유케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년도 새롭게 대두되는 이슈는 성속의 구분이다. 성경을 읽을 때 성적인 반응이 내 몸에 나타나면, 스스로 ‘잘못된 반응’이라고 결정하고 반응했던 것처럼 내 안에 스스로 잘잘못과 옳고 그름과 성속을 구분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님과 멘토링을 하는데, 대화중에 매달 반복되는 말씀이 ‘너무 따지지 마세요’였다. 5월이 되어서야 나의 이번년도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디모데전서 4:4)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씀과 멘토링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앞에서 질풍 노도의 시기처럼 진로를 두고 묻고 있다는 부분이 이것이다. 선교지에서 돌아와서 계속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사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두 학기가 지날 무렵부터 주변의 연변과기대 졸업생들은 내가 교회를 하면 다니겠다고 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 홀딱 해서 교회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참 예배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그리던 이머징 예배가 현실화 되어 있는 것도 보면서, 예배 공동체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지금도 방학이면 예배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3년, 학비 때문에 고군 분투 하는 시간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과연 하나님이 내게 사역하라고 하시는게 맞는가?’란 질문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나올 때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들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사역으로 진로를 결정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내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지 않는 그림엔 손대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현재 강의 하고 있는 학교의 강의도 자연스럽게 먼저 연락이 와서 시작하게 되었고 일부러 더 이상의 강의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학중의 재정난을 통해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업을 하라고 하시는 건가?‘ 물어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담임 목사님은 내가 어디에 있어도 선교사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강조하신다. 하나님도 그러실까?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무엇일까?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것이 내게 남겨진 커다란 도전 과제이다. 재정 때문에 진로를 바꾼다면 그것은 맘몬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사업도 하고, 강의도 하고, Th.M 과정도 듣고, 예배 공동체도 시작한다면 난 다시 ’바쁨‘을 선택하는 것이다.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가능하다고 하시는 걸까... “예수님과 함께 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
책을 빌려보는 관계로(이 당시에 빌려보다가 결국 구매함^^) 컴퓨터로 내용을 정리하며 읽었는데 p168까지는 정리한 내용이3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뒷부분은 읽는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정리한 분량이 5페이지가 되었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목차 (2/2)
순결에서는 대부분 육적인 것을 죄로 정의 하고 풀어갔다. 수도사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역상의 문제였을까…?)
마음이 하나님께 순결한 것, 또 서로에게 신실한 마음도 순결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란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이 교정 수단이라고 제시하는데 최근 몇 년 청년들의 감정을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감정을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밝은 곳에 꺼내놓고 다른 것으로 승화 시키는것이 건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가 달라서 일까…?
무감각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면 "어미"와 싸울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어미"이기에 본인이 무감각해졌다는 것만 발견해도 큰 수확이 있을 것 같다. 요즘 관계 안에 무감각에 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대부분 본인들이 원인을 알면서 안풀고 있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장 바꿔놓고 보니 나도 답을 알면서 안 풀고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성령님이 알려주시지만 이렇게 무시하고 사니… 이래서 인간 멘토가 필요한거 같다.(수도사와 수도원장 같은 관계? 하지만 현대에 그런 신실한 믿음의 관계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 이 글을 쓴지 5년 후에 블로그에 올리는 중이다. "가능하다"는 결론을 맺고 그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
순종에게서 자라나는 통회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 교만이다라는 정의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학기 초에 내게 있던 많은 은혜들 때문에 어쩌면 내 마음에 교만이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페이퍼를 제출할 때 마다 ‘아? 이상하다?’하고 뭔가 알면서도 안 풀고 넘어갔고 그 무감각이 오늘의 쓰나미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렵지만 이렇게 나로 무감각에서일어나고교만에서나오려는의지가생기게해주신것에감사한다.(하지만마음은어렵다.^^)
겸손과분별에서많은페이지를할애했는데분별은거의정념, 죄죽이기의내용이어서왜그럴지궁금했다.
29번째사다리에무정념이정리되어있어서도전이되었다. 분별을읽는즈음, 담임목사님과멘토링할때 (금식같은) 스스로불편함에처하는것을선택하라는주제가있었는데중복되는내용이었어서책을읽을때내게하시는말씀같았다. 내가즐거이선택한삶자체가고난이라고주장했는데,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세상에한발을들여놓고있었고, 오늘의일이 그 열매였다. 진작에불편함에처하라는조언을들었다면실수가없지않았을까싶다. 하나님이여러번내게경고해주셨는데내가반응하지않은거같다는생각이글쓰는순간생각났다. 아인간이란이리느릴까…
극도의 피로가 육체의 정욕을 일으킬수 있다는 경고,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포기하는게 흙과 금을 바꾸는 것,
기도시간과 나의 일(조급한 마음)을 맞바꾸려는 순간 생각이 나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책읽는 한순간이 아니라 계속 나를 깨워 기도시간에 머물게 하기를 기대한다.
2016년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도전 된 말씀이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18:29)”였는데 무정념 부분에서 종말이 되기전에 성에 도착하지 못 한 사람(성을 넘지 못한 사람은) 사막에서 야영해야 하기 때문에 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리가 되었다. 놀라웠다. 몇 년간 뛰어 넘을 생각만 했지 왜 뛰어 넘어야 하는지는 정리가 안됬었는데 유레카!!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
디히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성(城)에서 나오는 성주(城主)처럼
의연하고 유쾌하며 당당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의 모습은
마치 사령관이나 되는 것처럼
자유롭고 유쾌하며 확고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내 스스로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 불과한가?
마치 새 장엔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갈망하며 병든 나
마치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
빛깔, 꽃, 새들의 노래에 굶주리고
친절한 말과 인간적 친밀함에 목마르고
변덕스런 폭정과 아주 사소한 비방에 분노하여 치를 떨고
근심에 눌리고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사건들을 기다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고
지치고 허탈한 채 기도하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연약하여 이런 것들 모두를 포기할 준비가 된 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인가 아니면 저런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애처롭게 우는 비열한 심약자?
이미 승리한 전투를 앞두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도망치는 패배한 군대,
그것과 나의 내면세계가 다를 바는 무엇이랴?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이런 고독한 질문들로 나를 조롱(嘲弄) 한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글, Dietrich Bonhoeffer / 번역, 김희수목사 (월드비전선교센터장, 서울북노회)
베네딕트규칙서에서도 수도원장의 부담과 그 역할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순종 부분에 나온 수도원장들의 행동은 내가 그라면 저렇게 했을까.. 싶은 행동들도 많았다. 원장들의 어떠함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수도사들에게 촛점이 옮겨졌다. 순종하는메나스, 아바키루스, 회계형제.. 관계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정받으려하지 않음등의내용이바로책을읽는그날아침내가고민하고행동하려고했던것들에대한답이되었다. 이상하게그날아침어떤두사람에게그들이나에게인격적으로잘못하고있다는사실을어떻게부드럽게표현할것인가를하나님께물었다. 하지만예화를읽으면서나의내면(기분 나쁨)에집중하기보다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한다는생각이떠올랐다. 그리고바로그날저녁나를유령인간취급하던한젊은이와도맞닥트릴일이있었는데그와보냈던 6개월동안, 더욱 더하나님의주권에집중했던것을떠올리게되었다. 미움받는사람보다미워하는 마음을 가진사람이더괴롭다는것을알기에그친구를위해더기도했었고그렇게밖에행동할수없었던그의깊은아픔들을아버지께서알려주시는거같아서더마음이안쓰러웠었다. 정서적으로어려울때는하나님의주권을잘기다리고살다가, 어려움이없는지금에는 ‘나의의’로반응할뻔했다. 이책을통해막아주신거같아많이감사했다. 책에서말한것처럼온전한순종을통해분별의은사를얻기를기대해본다.
애통에서는 개인 감정으로 인한 눈물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애통을 말한다고 표현했다. 그로인해 세상의 즐거움과 육체의 소욕을 버릴수 있다는 표현이 어쩌면 내가 지금 받고있는 훈련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이책을 읽으면서 강의시간에 제기되었던 "일상에서 수도원처럼 살수 있는가"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지금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 수도원에서의 삶과 같이 살기를, 계속 말씀하고 계신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예수전도단에서 90년대 조이도우슨을 통해 도전되었던 ‘반대정신’도 이미 이 책에서 제안되었던 내용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양을 달리 했을뿐이지 시대가 변해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