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내용은 <내면의 성> 1,2,3 궁방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아빌라의 테레사 <내면의 성> 1,2,3 궁방
저자인 테레사 수녀(1515-1582, 스페인)는 서문의 교황 바오로 6세의 자료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1970년에 학자(박사)의 칭호를 받기도 했지만 ‘스페인의 이단 심문 시기’(1478-1834)에 활동함으로써 많은 오해와 어려움을 경험했다.
아빌라의 테레사 <내면의 성> . 황혜정 역. 요단출판사. 2011년.
20세에 입회했으나 건강의 문제로 죽을 고비와 전신 불수의 시간을 보내고 완쾌되어 27세에 본격적으로 영성생활을 시작하고, 여러 영적 체험을 하고 ‘완덕의 길’, ‘영혼의 성’에서 그 경험들을 정리했다. 테레사가 쓴 책들을 거의 가르멜 수녀들에게 읽히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영혼의 성’도 수녀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영혼의 성’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우리 영혼을 말하는 것으로 아주 많은 방들이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있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성을 말한다. ‘영혼의 성’은 7개의 궁방들(각각은 복수의 방들로 표현된다) 을 지나 성의 중심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성의 중심을 향해 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자아의 깊은 곳으로 이해된다.
제 일 궁방은 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첫장은 ‘기도’가 이성을 들어가는 문이라고 알려준다. 2장에서는 죄를 지을 때 영혼의 상태를 알게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하게 된다는 강조를 하고, 마음안에서 되어 가는 일들,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제 이 궁방에서는 사탄의 방해가 크다는 이야기로 ‘인내’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꼭 기도하라고 강조한다. 제 삼 궁방의 1장과 2장에서는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 <내면의 성> . 두 번째 성채 (이궁방)
이 책을 읽기 전 주에 기독교 상담학 과목의 수업에서 교수님께서는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라고 강조를 하셨고, 몇 나이든 학생들이 반발을 했다. 내면에 집중하며, 나를 돌아보면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과 나의 추함 등을 발견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반발에 마음이 상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그것만 옳다고 하려는 모습이 나에게도 있었다. 연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여디디야야, 내마음은 이건데…’ 하며 나를 이해 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나의 틀을 하나씩 벗고 있는 과정이다. 여전히 틀 속에 있는 분들의 강한 반응이 내 안에 틀과 반응하여 마음이 많이 상한것 같다. 어쨌거나 그 사건 후, 아버지께 계속 물어보고 있던 차에 ‘영혼의 성’을 읽기 시작했다.
일 궁방의 2장에서 ‘자아인식’을 익히라고 강조하는 내용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아버지 내가 틀린게 아니죠? 그 분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런데 지난 목요일 채플메시지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 가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 책과 목요일 메시지로 상한 마음이 위로 받고 답을 얻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얼 써야 할지 몰라 기도했다’ 초반의 이런 말들로 시작해서 약간 당황스러웠는데, 때맞춰 보내주신 교수님의 정리 자료와 검색을 통해 이 책이 테레사의 영적 경험들을 정리하기 위해 쓰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는 이해가 됬다. 번역이나 사용하는 단어의 차이로 약간씩 읽는 속도가 늦춰지고 몇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겸손을 강조하는 삼 궁방을 읽던 날은 본디오빌라도 재판 본문이 큐티 였다. 내내 마음에 본디오 빌라도와 내가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삼 궁방에서 그렇게 타협(?)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왔다. 저자는 강하게 자신의 마음을 확 드러냈다.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2.1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2.2 스데반의 순교와 신화 비교 Ⅲ. 나가는 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페스트를 퇴치하는 아폴로니우스의 투석 이야기와 비교하여, 사도행전 6-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순교를 본 논문의 배경으로 하고자 한다.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서(6:7) 스데반이 자신들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유대 역사의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7:51-53), 그것에 마음이 찔려 분노하여(7:54) 스데반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3의 길인 자신을 ‘모든 것을 알고 죽는 희생’ (Intelligent victim)에 내어 드림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를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주제어 : 르네 지라르, 모방욕망, 희생양, 신화, 예수 그리스도, 스데반
Ⅰ. 들어가는 말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이론으로 스데반의 순교 상황을 보고자한다. 르네 지라르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필로스트라토스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를 소개하며 아폴로니우스가 죄 없는 거지를 에페소스 시민들이 투석함으로 페스트를 퇴치하는 사례를 보인다. 성경 안에서 동일한 투석 상황인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신화와는 다르게 복음이 모방 욕망을 극복한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7절에서 보면,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의 반열에 자기들의 세력인 제사장들 까지 합류하면서, 유대 사회에서 자신들의 안정권의 기반인, 성전과 회당 체제에 영향이 있을 것을 예측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스데반이 성령으로 말함을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행 6:10) 그가 유대 역사의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 그것에 마음이 찔려 분노하여(행7:54) 공회라는 이름으로 집단 폭력 한다. 여기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3의 길인 자신을 ‘모든 것을 알고 죽는 희생’ (Intelligent victim)에 내어 드림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스데반의 사건은 르네 지라르 모방 욕망의 삼각형이론에 근거해 볼 때 유대 근본주의자들이 주체가 되고,매개자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대상은 유대사회에서의 기득권과 인기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유대 근본 주의자들은 로마치하의 이스라엘 상황에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사회의 안정이라는 핑계로 그리스도인들을 사회에서 처단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에 서 있던 스데반은 유대 근본주의자들에게 희생양으로 적절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모든 상황을 알면서(행 7:55-56)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행 7:60) 죽음을 맞이한다. 다른 문학에서와 같이 희생양 이후의 폭력의 악순환이나 신화화가 아닌 공동체를 살리는 죽음이 된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자리에, 이후에 바울이 될 사울이 있었다고 밝힌다.(행 7:58)
본 논문에서는 먼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 대해 알아보고, 스데반의 죽음이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관점에서 일어난 일인지 고찰해 본 후, 아폴로니우스의 투석 상황과 비교해 보므로 둘 사이의 차이점으로 신화와 복음의 차이점을 살펴 본다.
Ⅱ. 본론
2.1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문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종교학 뿐 아니라 신학과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르네 지라르는 1972년 『폭력과 성스러움』 출판 전까지는 문학 비평에 집중하다가 그 후부터 철학, 신학 등을 연구하였다. 인간 사회의 폭력 문제에 대한 답을 구약과 신약에서 찾게 되면서 그 자신이 회의주의적 무신론자에서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에 의하면 원시 사회에서부터 인류는 폭력과 연결되어 왔다. 인간 심리 깊은 곳의 모방 동기와 그로 인한 모방 갈등을 폭력의 원인으로 본다. 사람들은 특정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직접적이며 자발적인 욕망이란 없다. 지라르는 이러한 관계를 욕망의 삼각형으로 표현한다. 욕망하는 자기, 욕망의 대상인 타인, 매개된 욕망이다. 자기(모방자)와 타인(피모방자)의 차이가 현저히 나는 경우 둘 사이는 구별되고 사회 질서는 체계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모방자가 피모방자를 완전히 모방하여 둘이 동등하게 되면 짝패(double)가 되어 갈등과 투쟁으로 사회의 질서가 깨지면서, 공동체가 위험에 휩싸이게 된다. 짝패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사회 질서의 붕괴로,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원시사회에서는 ‘희생제의’를 만들었다. 힘의 균형이 팽팽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투쟁의 상태에서 공동체는 지배 문화와 다르면서, 비난을 피해갈수 없는 무력한 경계선의 사람, 이방인, 힘없는 자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인 희생양(scapegoat)으로 만든다. 이렇게 공동체의 폭력적 욕구가 한 희생자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희생 기제(the surrogate victim mechanism)라고 부른다.
...이 희생양을 매개로 하여 사탄은 사탄을 물리친다. 사탄은 희생양 매커니즘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은 또한 인류 문화를 지배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이 바로 이 살해에 있기 때문이다. 카인의 문화뿐 아니라 모든 인류 문화의 기원에는 결국 악마, 달리 말하면 나쁜 모방이 있다.
-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116.-
이러한 희생양 기제 뒤에는 “나쁜 모방“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라르는 그것을 악마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집단 폭력의 희생양을 은폐하기 위해 신화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러한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고 희생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을 지라르는 발견하고, ”복음서는 신화의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모든 종교들과 문화의 기원은 감추어져 있는 모방 폭력에 기반 하지만, 성서는 신화들 처럼 살인자들이 나오지만 신화에서처럼 그들의 범죄가 정당화 되지 않고 그들의 죄를 명백히 밝힌다.이러한 위대한 문학 작품인 성서가 자신을 기독교로 회심하게 만들었다고 지라르는 고백한다. 지라르의 실존적 신앙 고백으로 인해 인문학계에 데리다와 라깡 같은 철학자들 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원시 문명부터 자본주의 사회까지 연구범위가 광범위하다. 지라르 이론을 통해 유럽 철학계의 바티모, 아감벤, 지젝등의 철학자들이 기독교와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지젝이나 바티모 등은 지라르를 통해, 기독교와 자신의 철학 사이 대화를 발전시키고 있다.지라르는 이렇게 인류학이 신학에까지 확대되는 것은 신학자들이 복음서의 인류학 영역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 스데반의 순교와 신화 비교
스데반의 순교의 나레이션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많아지므로 인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리할 일곱 명을 뽑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점점 많아지고 있고(행 6:1, 7), 더욱이 제사장들 까지도 예수의 도에 복종하고 있다. 더불어 일곱 명 중에 한명인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서 행하고 있다.(행 6:8)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할 경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당하지 못하여 이기는 사람이 없기 까지 했다.(행 6:10) 이러한 배경에서 결국 스데반은 공회라는 이름으로 투석 당한다.(행 7:60절) 스데반은 왜 죽었을까? 스데반의 죽음의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 6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배경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도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유대 지배계급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고, 스데반의 경우도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그들에 의해 대제사장 앞에 끌려와 있다.(행 7:1) 예수님도 스데반도 공회에 잡히는 과정이 거짓 증거에 근거했다.(행 6:1-13) 그리고 예수님도 스데반도 죽음 앞에서 도리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있다.(행 7:60)
지라르는 예수님의 죽음이 모방 욕망에 의한 희생적 죽음이지만 희생양 기제를 끊기 위한 ‘순전한 희생양’이라고 해석한다.스데반의 경우도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이론에 따라가 보자.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늘어나 자신들의 안위와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분위기가 위협받을 것을 불안 해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 계급들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증가하여 회당에서 자신들이 아닌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용납 할 수 없었다. 유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안정감과 인기를 위해서 라이벌인 예수의 제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예수를 처리할 때처럼, 거짓말을 해서라도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스데반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삼각형 구도에 욕망하는 자기는 유대지도자들이었고 욕망의 대상인 피모방자는 예수의 제자들이었으며, 매개된 욕망은 예루살렘에서의 인기와 안정된 기득권이었다. 여기에서 예수의 제자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인기에 위협을 느낀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예루살렘 사회의 안정을 위해 회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스데반을 희생양으로 선택한다.스데반은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2)라며 지라르가 말하는 역사에서 반복되다가 예수님까지 살인한 유대 지도자들의 희생양 기제를 밝힌다. “십자가의 승리는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완전한 포기의 결과다.... 이 정도로 예수는 전면적으로 폭력을 포기한 것이다.“예수님과 같이 스데반 또한 그들의 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의 사함을 구하며(행 7:60)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을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 근거한 죽음으로 볼 때, 여기서 한 가지 신화와 비교해 볼 사례가 있다.
2세기경 유명한 정신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가 에페소스에서 페스트를 퇴치한 과정을 소개한 책인 필로스트라토스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가 있다. 에페소스에서 페스트가 창궐하고 막을 방법이 없자 유명한 아폴로니우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폴로니우스는 에페소스 사람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 거지 한명이 장님처럼 눈을 껌벅이며 빵 부스러기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아폴로니우스는 거지를 ‘신의 적’이라며 거지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고 에페소스 사람들은 자선을 구하는 애처로운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인다는 것에 분노하며 아폴로니우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 이냐고 반문했다. 아폴로니우스는 거지가 모든 신의 적이니 돌을 던지라고 사람들을 몰아붙였고 몇 사람이 거지에게 돌을 던지자 돌을 맞은 거지가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날카롭게 쳐다 보았다. 그 눈을 보고서야 에페소스 사람들은 거지가 악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돌을 던져 거지는 돌 무더기에 쌓이고 그 자리에 수호신의 흉상을 세워주게 된다. 사람을 돌로 죽이는 투석형은 고대 그리스의 오래된 종교 관습인 ‘파르마코스(속죄양)’ 희생양 제의이다.스데반도 거지도 사회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투석형을 당했다. 신화에서는 가해자들의 입장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석하고 신상을 세웠지만, 성경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스데반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 무고하게 죽었음을 밝힌다.(행 6:11-13)
철저하게 폭력을 포기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천년이 넘게 생존해 있고, 철저하게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행 7:56) 스데반의 죽음 바로 앞에 기독교의 이방인 전도의 사도가 될 바울이 있었다.
Ⅲ. 나가는 말
스데반의 순교 상황을 분석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이 르네 지라르가 주창한 모방 욕망에 근거한 사건이었는지 고찰하고, 신화적 모방 욕망과 스데반의 순교를 비교했다.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아폴로니우스의 거지도 스데반도 동일하게 모방 욕망의 삼각형 구도 안에서 투석 당했다. 마찬가지로 지라르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모방 욕망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가해자 입장에서 기술되는 신화 읽기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진실을 밝혀 내므로 모방 욕망을 끊어내는 것으로 신화와 복음의 차이점을 읽어 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희생이 아닌, 제의로 읽어낸 서구문화는 기독교를 신화로 만들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 하므로, 기독교 서구문화가 제국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지라르는 말한다.예수님을 철저한 비폭력주의라고 고집하는 경우나, 폭력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 등 지라르의 이론에서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부분들도 있지만 그가 분석한 대로 대부분의 문화와 신화들이 모방 욕망에 뿌리를 두고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계속해서 모방 욕망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짝패가 팽팽해져 무질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회가 동의하는 ‘모방적 만장일치’를 통한 희생양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 이다.예수님을 통해 이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에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폭력을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자발적 희생의 자리에 섬으로 사회에서의 모방 폭력을 드러낼 수 있을까. ‘모방적 만장일치’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혼자 옳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폴로니우스의 거지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드는 것이 아닌, 스데반처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진실을 밝히며 희생을 선택 할 수 있을까...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역사 가까이에 있는 김구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자주 국가로 세워지기를 주장했고 미국에도 소련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누군가 타협하지 않고 옳은 것을 고수하고 싸워야 할 것 같은 상황에 김구 선생님은 미국과 소련의 등을 업고(짝패형성) 국가를 세우려는 지인에게 자신의 죽음을 허락한다. 예수님 같은 자발적 희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꿈이 아직 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문화 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의 바램 대로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 아시안 증오범죄 퇴치와 관련하여 백악관에서 바이든과 BTS가 만나는 현시점에 김구 선생님의 희생적 죽음을 생각해 본다. 민족끼리 싸우지 말자고 했던 김구 선생님이 자기민족에게 죽음을 당했으나, 김구 선생님의 문화 선진국의 꿈을 기억하며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2022년, 한국의 젊은이 들이 있다.
■ 참고문헌 ■
[일차자료]
지라르, 르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이차자료]
金九. 『白凡逸志』. 서울: 敎文社, 1980.
박만. "폭력과 속죄 죽음: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의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53.1(2007): 111-140.
박종균.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 의 성서적 종교와 비폭력.”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4.1(2004): 269-296.
이경희. "눅 24 장, 지라리안 (Girardian), 성서영성: 모방 폭력의 위기에서 변화를 경험케 하는 내러티브의 힘." 「신학과 실천」 78(2022): 207-232.
정일권.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의 기독교 변증론.” 「조직신학연구」. 14(2011): 107-126.
★★아래의 내용은 Schneiders, Sandra M. "Biblical spirituality."중
렉시오 디비나 부분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논문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성경적 영성_렉시오 디비나
by 샌드라슈나이더스
저자가 논리적으로 잘 정리한 것도 기억에 남지만, 교수님이 강의하시면서 들어주신 예들과 저자가 제시한 예제들이 마음에 남아있다. 설교, 예식, 소그룹, 사회적 참여(회심적 사회정의, 약자와 함께 하기)와 제일 마지막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말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성경적 기원을 사도행전 간다게의 이야기라고 한다.
Schneiders, Sandra M. "Biblical spirituality." Interpretation (2002): 139.
렉시오 디비나는 집중해서 읽고, 기억에 남겨 심사 숙고하며 깊게 들어가면서 깊은 묵상에서 기도로 이어져서 관상으로 진행된다. 솔직히 정말 다른일 하나도 안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도피일까 싶기도 하다.
2주일에 한 번씩 수업하는 ‘개인 영성지도 실습’에서 매주 3개씩의 본문이 주어진다. 개강과 사순절을 맞아 순탄하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에게 그 말씀들은 너무 귀하다.
때로는 통독하고 있는 말씀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나에게 이펙트를 주기도 하고,
묵상했던 말씀이 갑자기
병원에서 산책길에서 툭툭 튀어져 나와
나를 평화로 뒤흔든다.
렉시오 디비나는 신중하게 읽고 읽으라고 했는데 여러 번 읽을 동안 무언가 뽑아내려는 나의 의지 때문에 아무 일이 안 일어나다가 무의식 가운데 있을 때 말씀들이 살아서 올라올 때 소환되는 기억이 있다. 아무데서나 하늘 아버지와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 가끔 ‘그 말씀’을 혼자 오해하고 있는 걸까 싶을 때도 있다. 불신일까, 망상일까..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교제로 부르심을 느낀다.
★★아래의 내용은 15, 16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5장 공통적인 어려움의 영역들 & 16장 영성지도의 잠재적 유익들
15장은 영성지도의 공통적인 어려움들로 나도 어렴풋이 경험하고, 또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더 깨어있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이었다. 대부분 직접 피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바라지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을 영성지도자로 대치하거나 영성지도자의 여정을 의도하지 않게 복사하고 닮아가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닮아가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만남을 가진 경우에는 어쩔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긴하다. 그래서 이전 장들에서 말했듯이 영성지도자와 기간을 정하고 지도를 받는 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책에서는 양자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두라고 했는데 나의 경우는 상호 의존으로 인한 위험 가능성을 줄인 것 같다. 책에서는
성령안에서의 자유의 여부로
관계 이상을 점검하고,
性의 문제 부분은 ‘인식’으로
계속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라
고 조언하고 있다. 참 좋은 답인 것 같다. 실망이나 분노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면’과정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실망이나 분노의 ‘감정’을 인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크리스찬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많은 만남에서 그들이 감정의 문제를 ‘인지’하도록 돕는 이 땅의 영성지도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교회에 오래 다니신 어른들 중에서도 율법의 틀에 매여서 젊은이들과의 소통도 막고, 본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못들어 가는 경우를 많이 보는 것 같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16장에서는 영성지도의 잠재적 유익들을 말하고 있다. 인식이 증대되고 신뢰가 깊어지고(누구와? ^^ 아래 나옵니다~), 영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인식 증대로 인해 타인들은 쉽게 못 느끼는 것을 느껴서 민감해지는 불편함도 있지만 15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망이나 분노 등 감정의 인지는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이므로 나의 영에게 결국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이 풀어지므로 감사할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고 감사할수 있고 그것이 (상담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신뢰’의 문제와 연결이 된다. 자신이나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요인이 있다고 상담학에서는 말한다. 영성지도를 통해 나와 타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점점 높아지면 결국 나의 안정감이 높아지므로 긴장감이나 쓸데 없는 감정적 소모없이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바라보고 처리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마태복음 11:26-28절이 아닌가 싶다.
‘교육목회‘과목에서 사역자가 건강해야 제대로 사역할수 있다고 했다. 나는 중국에 있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온 2016년도에 나의 갈길을 몰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래서 많이 위축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의 상태와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들이 있었다. 3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야 나의 상태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닳아 가고 있다.
매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의식을 성찰하고
내가 지내온 오늘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때,
내 안에, 내 삶에 살아계신 성령님을 보고
거기서 안정감과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거나 나의 필요나 상황등에 꼬여 있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 같다. 주 1일 유통회사에 가서 IT업무를 돕고 있다. 나의 재정을 채우시기 위해 회사에 보내셨나 하는 내 입장만을 고려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 가고 나서 알았다. 하나님은 그곳의 영혼들 때문에 마음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안정감을 찾게 되길.. 풍성히 누리게 되길 바란다.
★★아래의 내용은 15, 16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4장 기독교 훈련들
횃불에 와서 많은 수확이 있었지만 이번학기 영성형성 과목의 책을 빠지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나에게 은혜가 되었다. 그동안 나의 영적 여정을 검증 해주고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도전을 준다. 항상 감사하다. 책을 읽으므로 그동안 지나왔던 과정들에 대해 ‘확증’을 받고 말로 표현 못하던 부분들에 대해서 글로 보면서 정리가 되었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훈련은 전인을 위한 것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위로가 되었다. 사실 신학적으로 근거를 찾지 못한 채, 나의 임상만을 가지고 청년들에게 했던 이야기 들이 이 책에 정리 되어 있어서 감사했다. 항상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아야 한다고 부담 갖는 청년들은 피곤한 몸으로 인해 아버지 앞에 있는 것을 잘 유지 하지 못한다. 대게 기도하다가 잠들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에 많이 죄책감을 느낀다고 나눈다. 그래서 어떤 친구에게는 집에서
가장 편한 장소와 자세로
그렇게 앉아서 아버지께 말을 하라
고 지도해 준적도 있었는데 책에도 딱 그 부분이 나왔다. 책 읽기 전날 만난 A라는 청년도 살이 쪄서 힘들어서 퇴근하고 운동하는데 운동하는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많은 기도를 하게 된다고 했다. 가장 집중하는 기도.. 나 또한 물속에서 홀로 있는 수영하는 시간이나 운동 할 때 아버지께 집중이 푸욱 될 때가 있어서 가장 기도하기,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또한 감정이 상하거나 힘들 때면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께 자주 머물렀고 집중했었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직면 하는 경험들을 했었는데 ‘의지’ 부분에서도 그런 설명이 있었다. 상관도 없는 것들 혹은 아주 옛날 것이 떠오르는 것들을 통해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경험들이 생각났다.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떠오를 때 당황하고 짜증내기도 했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자발적인 훈련"은 정말 유익이 되는 것 같다.
21세 때, 그렇게도 갈망하던 교회에서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청년부 목사님이 정시기도를 제안하셨다. 그때 하던 정시기도를 아직도 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올 때 까지는 30분 이상 아버지 앞에 머물렀는데 한국에 들어와서는 많이 자유하며 그 시간을 누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매일 말씀을 3장씩 꼭 읽었는데 신학교에 와서는 말씀 보다는 다른 책들을 읽느라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 어렵다.
책을 읽기 전날도 몇 년간 나를 피하고 만나지 않던 과기대 졸업생 A와 만났다. A의 영적 상태가 바닥을 치고 진로가 흔들거릴 때 만났었다. 모든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이야기는 안하고 우선 좋은 공동체에 소속해 있기만을 부탁했다. 그리고 A는 온누리 서빙고 중국어 예배에 갔다. 그곳에는 우리학교, 우리학과 졸업생들이 많다. 그 졸업생들은 나를 만나고 있었어서 그 친구들을 통해서 꾸준히 A가 양육을 잘 받고 공동체에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부탁 했었다. 이번에 A는 양육도 받고 여러 가지 아픈 과정들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조금씩 찾아간 것 같았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욕심을 갖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분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영적 진보이다. 또한 A가 어려울 때 티 안나게 A를 돕던 선배들이 이제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다. 이제 A가 그들 옆에서 티 안나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건강한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A도 만남 속에서 자기가 이제 형들을 기도로 도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책을 읽으면서 전날 A와의 만남이 계속 생각났다. 임상과 이론과 실습을 병행케 완벽한 학습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래의 내용은 12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12장 내용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2장 기도
지난주 떼제 기도회였는데 어떻게 이번주 읽기가 ‘기도’일까... 하나님의 섭리? 책에서 말한 대로 기도는 태도가 되고 고스란히 행동이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되는 것 같다.
정시기도를 시작했던 20살 무렵부터 내가 할 이야기가 끝나면 하나님께 ‘제가 무얼 기도할까요’ 항상 물어봤었다. 때로는 그 물음 이후로의 기도가 더 길고 깊다. 그래서 그 질문이 참 좋다. 나랑 상관없는 상황에 대한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고 계시고 그러기 위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황"을 다스리고 계시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의 유익과 이해관계는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이해관계 속에
내가 함께 있다.
이런 황홀한 기도의 방법이 이번 12장에 있었다. "기도의 종류와 기도의 전환" 부분에서 요즘 나의 ‘기도 상태’를 점검 할 수 있었다. 기도 시간에 오래 앉아있지 못해서 나의 상태를 봤을 때 불안했었다. 그런데 책에서 그런 기간이 있다고 써 있어서 놀랐다. 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는 것일까.. 정말 횃불 입학이후 영성과목은 내게 많은 답을 준다. 감사하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20대부터 주변의 영적 친구, 선후배들은 내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대언이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 여쭤볼 때 마다 내가 방언을 한다고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답답했다. 이십년이 지난 이제서야 나는 임상으로 조금씩 나의 묵상 기도가 나의 방언인 것을 알아가고 있다.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 시점에 바로 12장에서 방언의 종류가 음성, 묵상, 관상에 존재한다고 정확히 적혀있다.
개인의 개성과 기호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인식에 영향을 준다
고 했는데 어쩌면 묵상 기도를 하는 나의 기호에 따라 방언도 그렇게 주신 것 같다.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성향을 인정해주시고 한걸음씩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책에서 관상기도가 하나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안에서 쉼을 갖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지난 목요일 떼제에서 그 경험을 했다. 연변에 있을 때부터 떼제에 다녀오신 분이 나에게 몇 개월 떼제에 다녀오면 좋겠다고, 나랑 딱 맞을 것 같다고 하셨었는데.. 그 떼제를 횃불에서 처음 만났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나는 주 3일 신학교에 오고, 주 2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주 1일 회사에 풀타임으로 근무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사시간은 조선족 청년들과 만난다. 주 1일 가는 회사는 도와드리기로 하고 가고 있다. 여직원이 7-8명 있다. 20-30대로 이루어진 그 여직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계속 여쭤보며 한 두달 회사의 업무들을 익혔다. 내가 맡은 부분은 업무의 전산화 이다. 방학 때 처음 2일 동안 도와주러 갔다가 노가다를 해서 눈도 몸도 많이 상했다. 이런 노가다는 20대나 할 일이지 싶기는 했는데 노가다를 하는 내내 이거 프로그램으로 하면 2-3시간에 끝낼텐데 왜 수작업을 할까 계속 고민하면서 16시간을 일했다. 회사에 처음 갔으니 내가 주도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떼제 기도회때 묵상 기도 시간에 갑자기 회사가 내 안에서 올라오고 하나님께서 그 회사의 주요 멤버들을 너무 안타까워하신다는 마음에 꺼이꺼이 울음이 터졌다. 숨을 참지 못할 정도의 눈물이었다. 온몸이 흔들리는 눈물이었다. 조용한 시간인지라 참았는데 그 부어진 마음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회사를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 그 두 사람. 하나님이 너무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이전에 한번도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초점은 그분들 이었다.
금요일 저녁 교회의 심야 기도회. 같은 기도의 자리이고, 동일하신 하나님인데 왜 여기서는 그 하나님을 못 만날까... 의문을 남긴다. 매일 매순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교수님의 모의영성 지도가 진행된 며칠 후에야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었다. 그 시간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서 내가 평소에 사람들과 하는 대화 방식을 다시 한번 깨닳았다. 피지도자가 영성지도 시작 전에 본인의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그런데 영성 지도 시간에 오래도록 나눈 이야기는 자신이 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지도자였다면 그렇게 사역의 열매가 보여지는 시기인데 왜 상태가 안 좋다고 했냐고 직격탄(나는 그렇게 생각안하지만 청자는 그렇게 느낄 듯..)을 날렸을 것 같다.
결국 지도자인 교수님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피지도자안에 가장 큰 덩어리인 아버지와의 관계 껀이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이것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리라...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말하는 가운데, 표현하는 가운데, 회중 앞에서 꺼내는 가운데, 치유와 답을 주시길 계속 기도했다. 멋있다. 아버지 하시는 일은!! 이번주도 압지께서 나를 여러번 돌아보게 하시는 은혜(고로 어려움과 아픔이^^)를 주셨다. 교육목회 시간에 게임을 했는데 옛 자아가 불쑥 올라와서 자리를 크게 잡았다. 항상 압지 앞에 깨어 있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자주 나를 바라보면 정말 창피하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그래서 한주 내내 들으면서 울었던 곡이 제이어스의 ‘내 모습 이대로’이다. 이글을 쓰기 전에도 한탕 하고...
책을 늦은 시간에 읽었는데 너무도 와 닿아서 집중해서 읽었다. 성경의 언어에서 하나님의 이름, 우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로서의 이름들이 참 많다.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학생이고 그러면서 선교사이고 직장인이다. 오늘 아침에는 어제 학교에서 늦에와서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하나님께서 직장인들의 힘듦과 고난을 이해하라고 주 1회의 직장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생각을 했다. 도리어 선교단체에 있을때는 내 공부도 하고 설렁설럼 시간을 보냈는데 일반인들의 직장은 점심시간 한시간 빼고(사실 이때도 나는 거의 회의를 하긴한다...) 8시간 내내 초 집중모드이다. 심지어 오늘은 야근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이런 역할의 이름들에 앞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름은 사랑스런 딸(여디디야 ^^)로 불리고 싶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로 모든 곳에서 자리매김하고 싶다.
성경의 가르치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항상 중요한 고비마다 말씀으로 2중, 3중으로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이 생각 났다. 더불어 연결되어 성경의 많은 이야기 들은 지금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드러낸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읽은 모든 성경이 마음에 박히는 게 아니니깐...
또한 최고로 하나님과 친밀하셨던 예수님이 최고의 영성지도자이심을 책을 통해 상기했다. 모든 상황에서 “Focus on GOD”.
예수님처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향할수 있길.. 그리고 두려움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순종할수 있도록 도울수 있길 바란다. 신학을 하고 한국에서 청년부 사역을 하고 있는 언니가 오늘 너무 힘든 일이 있었다. 업무 중 언니의 글을 보고나서, 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언니의 그 반복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나 회사에서는 무언지 정확히 모르고 ‘압지 뜻있는 것 같다’고만 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수면위로 올라오는 은혜들이 있었다. 열일하고 저녁 늦게 만난 만남도, 또 늦은 시간 언니를 위한 하나님의 위로도 내게는 정말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아가게 하는 부르심의 은혜이다. 나도 그렇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도 그렇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더욱 깊어질수 있길 바란다.
다시 교회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코로나가 50명 100명만 넘어도 온 나라가 난리 였는데 지금은 수천, 수 만명이 발생하는데 교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에게 왜 그런 격리의 상황들이 있었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다시 교회들이 문을 여는 이때, 나는 부활절을 기준으로 예배와 공동체에 대해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경희. 멈춤. 동연.
“마음의 태도”.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그 “마음의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함을 『멈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윗이 궤를 옮겨 오려고 했던 것도(그래서 웃사의 죽음에 하나님께 감히 분을 내었던 것도..), 모방 욕망으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추구하는 것도, 교회에 지체들을 미워하면서도 교회봉사에 열심인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를 직면하여 보는 광야의 시간 없이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멈춰 있을 때는 달리지 못해서 불안해 하고, 다시 달릴 수 있을 때는 생각 없이 뛴다. 깊은 호흡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모든 것을 멈출 때 욕망이 아닌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는데.... 성령께 내어드릴 시간이 없다.
성공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제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쁘고 급할수록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려
상황의 주인 되신 분께,
그리고
이 상황을 허락하신 분께
마음과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최대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 이겨내야 하는게 우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사는 사람을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수가 옳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전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사는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해진다. 모교회 담임목사님이 40일 금식을 하셨다. 금식 전에 금식을 계획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금식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모임 제한도 풀린 이 시점에 담임 목사님은 더욱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전처럼 어렵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광야에서 사선의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결과이다. 40일의 금식을 통한 경험으로, 일상에서도 생명의 매순간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긴 금식의 결과 매순간, 일상에서의 예배(‘라트레이아의 예배’, 23)가 회복되어 코로나가 풀렸다고 달려나가는 다른 교회들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달리지 않고 세대를 거슬러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며 기다릴 용기와 믿음이 생겼다. 멈출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의식성찰
또한 멈추어야 내 갈망의 기저를 볼 수 있다. 333의 의식성찰 시간은 무언가 이루기 위함이아니라 내 마음을 잘 살펴 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시간이다. 혼인 잔치집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저 상황을 말씀드리듯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버지께 그저 말씀드리고 아버지 손에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손에 들려 드렸을 때에 그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와 닿았고, 예화와 말씀 풀이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두 번째 읽었는데도 또 와 닿았다. 르네지라르의 이론과 다윗의 삼하 11-12장의 내용은 이미 수업을 통해 들었어서 더 풍성했다. 슈필라움(자기 틀)에서 스피리추얼 라움(영적자리)로, 새날을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날인 어둔 밤으로, 길도 물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광야의 자리로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수시로 돌아가는 깊은 호흡의 매일을 삶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 영적 삶의 3단계(정화, 조명, 신비적 연합)가 체계화 되면서 엘리트주의, 분리적 평가
. 실제 영적 3단계는 동시적이며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
(7) 20c 후반
. 거룩함으로의 보편적 부름 확인 – 영성신학이 영성으로 대체됨 (2차 바티칸 공의회)
. 영성 : 기독교 뿐 아니라 타종교 및 종교 무관한 여러 실천가들도 혼용
. 기독교 영성 구별 : 기독교 종교 전통에 뿌리가 있음 -> 신학적 영성 vs 영성신학
. 신학적 접근시 유의점 : 기독교 영성에는 신학적 믿음 이상의 것이 있음
. 다양한 공동체 / 복잡한 인간 / 다층적 차원 –> 신앙의 적용과 표현의 특수화
∴ 기독교 영성을 일반적 이론이 포괄하거나 구체화 할수 없는 경우 있음
☞ 영성이 신학을 낳고, 신학은 영성의 경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 (신학⊂영성)
. 영성의 학제간 연구 필요 이유 : 다른 분야의 도움을 받을 때 적절하게 탐구 가능
3) 인류학적 접근
[postmodernism에서 영성의 정의]
a. 인류학적 상수
b. 인간 구성의 한 차원 (인간적인 특성) ∴실존적으로 종교보다 앞섬
. 기독교 영성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이므로 타기관에서의 ‘영성’ 연구와 공유 필요
. 역사학적 차원, 신학적 차원 + 미, 언어, 심리, 천문학도 고려
. 시대가 가지고 있는 경험의 중요한 측면에 영향 받음
. 종교나 제도적 종교를 외면하는 구도자의 영성에도 관심
. 종교 신학 속에서 작업 (전제 2가지)
a. 기독교 영성의 첫째는 인간, 다음이 그리스도인
b. 영성은 존재론적으로 역사학과 신학보다 먼저
. 해석학적 방법론 강조
a. 이해와 설명(지식의 확장)
b. 적용(주체의 확장) : 조사자 개인의 인성의 확장 (영적으로 풍성하고 심오하게 됨)
. 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기독교 영성
. 기독교 영성이 통제 할 수 없는 대화에 참여
. 이 시대가 질문하는 것에 대답하기 위한 집중 (ex) 시민 평등권운동은 영적 현상인가?
cf. 역사나 신학적 접근은 그 기준(틀)에 따라 풀어감
. 인류학적 접근의 기여
a. 개방성 : 영성분야에서 다양하고 넓은 범위의 이슈들 연구가능
b. 공적 대화의 장에 기독교 영성을 드러낼 수 있다.
c. postmodern적 의제와 감성에 친화적
∴ 인류학적 접근 방법의 연구는 기독교 본질에 집중하면서, postmodern의 유혹을 이겨야..
4) 세 가지 접근의 상호작용
. 상기 3가지는 기독교 영성 분야의 모든 질문에 관련해서 필요한 도구
. 배타적이지 않음 : 3가지의 적절한 사용 (대학의 연구, 목회와 신학교 상황, 대학원 연구)
3. 자기 참여(self-implicatiion)의 문제
1) 경험의 비판적 사용
. 영성은 경험에 대한 연구 이므로 연구자의 경험이 이해를 위해 필요 (ex) 심리학
. 영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영적 삶을 가져야 한다. : 경험 깊어질수록 타인의 경험 이해 커짐
. 주의 : 연구자가 너무 깊이 연관되면 연구 망침 (객관성 필요)
2) 자료로서의 개인적 경험
. (예) ‘기도’ : 숙제 ?
a. 연구의 방식인 실습일수 있음
b. 숙제(연구)를 통해 기도의 경험 혹은 기도하고자 하는 동기 유발
c. 경험을 통해 기도를 연구할 경우 : 신중할 경우 본인이 기도에 관여하는데 도움이 됨
3) 영성 연구가 가져다 주는 변화의 가능성
. 경험의 영향력 : 진정한 연구는 변화를 낳는다. (Weil)
. 자기 참여적 특성의 중요점 : 연구와 개인의 성장의 상호작용
[토론질문]
* 영성 고전에는 경험한 사람들이 정리해서 적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정리한 것인데 표현이 잘 안됬다.
우리는 그들을 책으로만 만났기 때문에
인성이 어느 정도 성숙한지는 그들에 대해 논한 몇몇 타인의 글들로만 알 수 있다.
* 궁극적 진리와 씨름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된다.(소크라테스)
* 누군가와 오래 지내면 닮아간다. (ex) 예수님
* 범위를 좁혀가서 현대 한국 기독교 영성 – 공부하는 우리 – 관심있는 나...
많이 배우면서 (연구하는) 자로서 자기가 배운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
(ex) 좋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자기 영성이 그런 줄 아는 것처럼
* 영성은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전반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본인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착각
- 안전장치 : 의식 성찰
case1. 의식성찰을 오래해도 자기의 틀에서 못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누리지 못해 괴로워 하면서도 여전히 영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착각 할 수 있는 우리 연구자들의 폐단은 어떻게 검증하고 피할 수 있을까?
case2. 교회안에서, 영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도와주는 귀한 축복의 통로로 쓰이는 데도 불구하고 개인적 인격의 문제로 성도들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누군가 조언을 해주어도 자신이 매일 성찰하고 있다며 타인의 조언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격의 약한 부분을 고치지 않으려는 경우들... (영성의 역동성)
하나님에 대한 오해.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의 청년들을 보고 느낀 것 이었다. 어쩌면 청년 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들 하나님을 두려워했고(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묻기를 피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 더러 갖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기저에는 하나님은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고, 내가 바라는 것을 싫어 하실것이라는 “확신”(믿음) 때문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보내신 분이, 자기가 대신 죽으신 분을 믿는 믿음이 완전 기대와 다른 부정적 믿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탄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잘도 속여먹고 잘도 이겼구나...
10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많은 예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로 삶을 메여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므로 삶이 풍성한(소유의 문제가 아님) 사람들의 예를 많이 기록해 두었다. 책에서 신자가 아닌데 모임 중에 치유된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치유되길 원한다고 앞으로 나갔고, 그에 따라 치유 되었기에 치유에 자신이 행한 몫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선배의 남편은 자신편에서 하나님께 한 행동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낮에 침대위에 뒹굴 거리고 누워있었을 뿐이었고,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기를 옷깃처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때 형부는 알았다. 자기의 불치병이 나은 것을... 그 이후로 형부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평안함이 있었다. 반면, 오래 동안 교회서 자라고 선교사 헌신까지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안이 없이 산다.(생각해 보니 대표적으로 나네...)나의 틀(유교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아 틀이 너무 많다..)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과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의 차이다. 아이러니 하다. 책에서도 거론 되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는 치유가 항상 동반하는 것 같다.(단지 내 개인의 통계 내용일수도 있겠지만^^)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자연묵상1] 자연묵상으로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이기로 한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길에 떨어진 낙엽들에 눈이 자꾸 가는데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가에 혼자 서있을 수가 없어서 가까운 벤치에 편히 앉았다.(하나님하고 이야기 할때 항상 최대한 집중 할수 있는 편한 자세를 고수한다. 이것도 편견일까^^) 아직 까지도 의문이고 계속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계속 눈물이 낫다는 것이다. 며칠간 계속 되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연묵상2]몇 년전 비바람이 치는 장백산(백두산)에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 또 들었다. 자연묵상 때에야 왜 그날 그렇게 비바람이 치고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 되었다. 장백산의 여러 등산로 중에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길로 장백산을 갔던 날 엄청 비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쪽 길에는 풀들 사이에 풀보다 더 작게 땅에 붙어 있는 꽃들이 엄청 많았다. 그 무서운 비바람(사람도 날라 갈 것 같고 우비는 다 찢어지는) 속에서 요동없이 땅에 딱 붙어 있는 꽃들을 보며 하나님이 내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다. ‘땅에 딱 붙어 있어. 포복해. 일어나면 다친다. 바닥에 붙어 있어라’ 장백산에서도 내내 감동이 있었는데... 자연묵상의 날 또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자연묵상3]지난 금요일에 치과에 가서 어금니를 뽑았다. 선교사가 거지인가. 다른 치과 가야 하나. 내가 선교사처럼 안보이나. 내가 뻔히 선교사인 것을 알면서도 뽑기 힘든 어금니를 앞두고 의사샘은 기도하라 했다. 어금니 발치가 처음이라 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압지께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하고 있었고 의사샘 손에 함께하시길 구하며 의사샘 손도 잡았었다.(단지 소리내어 기도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이 두 번만에 뽑았다. 난 압지께 감사했다.(단지 소리내어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은 그 영광을 자기가 갖았다. ‘이거 쉽게 뽑히는거 아니에요. 이거 원래 힘들게 뽑는 거에요. 아무나 이렇게 뽑지 않아요.’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아버지 저 선교사라고 안하고 그냥 직장 다니면서 선교사로 살까바요. 선교사가 거지인가요?’ (치과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던것 같다.) 마구 짜증냈는데 자연묵상 하는 중에 예배시간의 위로가 떠올랐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나의 부르심의 근원, 나의 존재의 근원이신 내 아버지가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하신다. 오늘도...
사람은 자기가 생각이 가득한 것을 말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담임 목사님께 멘토링을 받는 시간은 (너무 궁금한 것 들이 있어서 곧장 물어보는 경우도 있지만) 평안하게 머물러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러면서 나도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간을 갖는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책에서도 대화의 흐름은 우리의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영성지도 시간은 지도자나 피지도자 모두에게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있다. 8장 초반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버리려고 노력한다고 했지만 그것들이 영성지도의 대화의 내용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대화의 재료들이 줄줄이 나온다. 피지도자로 하여금 방해 없이 충분히 길게 말하도록 할 때 2-3시간이 지나서야 본심과 어려움들이 스멀스멀 나올 때가 있다. 주로 Y대 졸업생이나 교회 청년들을 만나는데 3-4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마음의 바다 밑 이야기가 나온다. 나 혼자 기도하면서 진행해서 그런 것 일까... 영성지도에서 1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너지가 존재해서 그런 것 일까... 사실 나에게 주어진 낮과 저녁 시간들은 대부분 만남에 쓰이는데 ‘자발적 기다림’과 ‘하나님의 낭비’가 바로 그 만남의 시간에 적용된다.나는 숙제도 해야 하고, 강의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이 부족한데, 학생들은 나를 만나면 기본 3시간이 지나야 말문이 트인다. 이것은 성격이 급한 나도 훈련하시는 도구가 된다. 혹시 그 시간에 피지도자들도 기도하는 모드가 되면 우리의 만남이 더 효율이 생길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친구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나자고 하면 안 그래도 그들에게 만나기 부담스러운 내가 더 부담스러워질 것 같다. 성령님께서 아이들에게 직접 알려주시기를 또 조용히 구해야 겠다.
로즈마리 도어티. 그룹 영성지도. 이만홍 외 옮김. 로뎀.
집단 영성지도를 진행함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p256)했는데 이것은 횃불에 와서 몇 학기 동안 영성과목과 상담과목을 들으며 내가 받은 위로이다. 혼자 아버지 앞에서 정리한 것들에 대해서 ‘왜 목사님들은 이런 내용을 안 알려주실까? 내가 이상한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와서 학문적으로 정리된 것들을 많이 찾았다. 한동안 가까이에 있는 Y대 졸업생들중 믿는 친구들과 매주 그룹으로 모였었는데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내가 준비한 이벤트는 없었는데 모임 가운데서 서로 역동적으로 성령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그룹 자체가 영성지도자 였다. 나 혼자 였다면, 1:1로 만났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함께 하는 은혜와 안정감을 누린적이 있었다. 9장을 읽으면서 횃불의 동기들 안에서 함께 갈수 있는 건강한 영적 모임을 3-4명이라도 정기적으로 갖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현재 어쩌다 모인 몇몇이 식사 모임으로 만나고 있는데 거기서도 살짝의 역동적인 반응들이 있다. 아버지께서 만나게 하시고 모이게 하신 것이라 믿고 기대하며 즐겁게 식사를 한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지만 기대를 해본다.
성찰을 위한 질문이나 책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나에게 객관적으로 하게 된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가끔은 내가 영적지도를 받고 있는 듯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최근 이 주간 다른 과목(교육목회)의 강의 내용과 내가 고민하고 정리한 부분에 대한 내용이 동일하게 정리되어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신이 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에 새벽 3-4시까지 잠을 안자고 일을 한다.(왜 나는 일을 해도 해도 많은 걸까?)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재우시면 (어떻게든 안자고 일을 하려고 버둥거리는 성향의 나 였는데...)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신뢰함으로 접고 자는 훈련을 지난 2-3년동안 했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내 계속 새벽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를 못한다. 책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부재하신다고 느끼는 것?’ 의 질문을 보면서 요즘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불안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못 찾았는데, 정리하며 글을 쓰는 동안 알았다. 시간이 많이 부족한 이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지금은 나로 깨어 있는 은혜를 주시는 시간인가 보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기대한다.
특히 6, 7장에서는 개인적인 내용이 많아서, 읽기가 난해하실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표현력이 짧은 공대생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6장 영성지도자 선택 & 7장 영성지도 관계형성
6장에서도 살짝 거론되었지만, “7장 영성지도의 관계 형성”에서 ‘영성지도 비용‘이 거론 되어있다. 나도 담임 목사님께 멘토링 받으러 갈 때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시작한다. 내가 Y대 졸업생들을 만날 때도 대부분은 내가 밥을 사주면서 만난다. 7장을 읽으며 돈을 받고 영성지도를 한다면 ’그 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돈 벌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것은, 물론 선교사로서 계속 한국에서 선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 사역을 하려다가 내려둔 것은 내 능력이 주일사역 까지 안 되는 이유도 있지만, 주일 사역(교회 사역)을 통해서 학비를 일부 대주기로 계약하고, 급여를 주기로 한다는 것이 영적인 일에 물질적 가치를 매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이라도 재정을 채우기 위한 이유로 내가 시간을 쓴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을 왠지 맘몬에게 일부 허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은 저의 부르심과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독자들께서는 불편하지 않으시길!!) 그래서 주 1회 나가서 도와주는 회사에서도 돈을 안 받고 하겠다고 했다. 돈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하면 돈과 내 노력을 비교하며 계산하는 내 욕심도 믿을 만 하지 못하고 맘몬에게 내 시간을 나눠주고 싶지도 않았다. 현재 시간강사로 일하는 것도 시작할 때부터 그 부분 때문에 마음이 안 편했다. 그래도 나는 더 의미 있는 부분, 강의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의 영혼과 삶을 위해 강의 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강의료로 생기는 재정으로 인해 개인의 의식주 부분이 해결되는 것에 감사했다. 책의 재정 부분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성도에게 비용을 받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말에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위로를 받았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아침 큐티도 그렇고 6장에서도 영성지도는 사람편에서 들일 노력은 거의 없고 ‘성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 ‘내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마 11:28-30)는 예수님 말씀의 풀이인 것 같다.
7장을 읽으며 영성지도 관계를 마무리 하는 것에 대해서 정리해 두었는데, 이부분을 읽으며, 나를 심령술사 처럼 느끼고 불편해한 제자 한명이 생각이 많이 났다.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생각나서 곧장 기도하게 되는 사람들은 아직 가족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가족에게는 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 그냥 생각나면 곧장 기도가 나오는데, 다른 관계들은 먼저 '왜'가 떠오른다. 한국에 와서 주로, 내게 집중해서 하시는 훈련이 "기도" 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도 7장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하여간 생각났던 제자와의 마무리가 그 친구가 불편해 하는 것 때문에 ‘내가 너무 섯불리 마무리 한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제자가 내가 심령술사 처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투영당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 당시에는 나를 만나기를 꺼려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도 인도자가 피인도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영성지도를 시작하기 꺼려한다는 말이 있었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약한것 같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알수 있는게 없는데도,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 하는것 같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또한 하나님께 나의 삶을 올인하는 마음으로 영성지도 비용을 따로 책정하지 않습니다. 재밌고 흥미 진진한 이 믿음의 모험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빈손. 콘라드 드 메스떼르 저. 가톨릭출판사. 2010.
2.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데레사가 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가장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도 모두 다가 갈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은 길로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마태복음 6:25-32절을 근거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과거에 메이지 말고 내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어린아이가 후회와 걱정 없이 지금을 살듯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길’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자에게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다. 데레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지켜지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행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1) 겸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에서 ‘어린아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처럼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겸손의 길’이다.
위대한 성인들처럼 완덕을 구하던 데레사는 완덕이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더불어 생명도, 재능도,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기숙학교 시절 사람의 호감을 살줄 몰라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행복한 무능(無能)’ 이라고 표현하며, 언니들과의 이별을 사람의 애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 할 수 있는 은혜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아픔, 가난, 불완전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또한 수련생들을 도와주는 부수련장으로 섬길 때 자신을 시기하며 타인보다 본인부터 지도하라고 말한 수녀에게 “아 수녀님, 수녀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잘 아는 것이 참다운 겸손이다. 데레사는 겸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수투성이다’라고 생각하거나 고백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신뢰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이며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에서 가장 핵심 주제이다.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인지하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엄마에게 달려가 뽀뽀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엄마가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데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신뢰를 알고 있었다. 데레사는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항상 먼저 달려가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데레사가 표현한 예화에서, 임금이 사냥에서 토끼를 잡으려고 사냥개를 풀었는데 토끼가 사냥개를 피해서 왕의 품안에 달려들어서 왕은 그 토끼를 보호하고 친히 먹이를 주며 키웠다는 것이다. 정의(사냥개)가 우리를 쫓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심판주 되신 주님의 팔에서 피난처를 찾으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위험한 순간에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세요.. 소박한 사랑과 신뢰의 길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랍니다.
(3) 사랑
깊은 신뢰가 가능한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영적 어린아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데레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예수님을 맞이하고, 삶속에서 제자로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린다.
이제는 제가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아픈 것이 만약 하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평생 아프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픈 상태로 제 생명이 무척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단 하나의 은혜는 사랑으로 인해서 부서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4) 복음
인간은 스스로 구원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바램을 이룰 수 없다. 데레사가 성모의 미소로 원인 모를 병에서 회복되고, 성탄절에 10년 동안 기다리던 마음의 건강이 되찾아 진 것처럼 우리는 못 느끼고 있는 사이에 겨자씨 비유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시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 같이 스스로 무언가 하겠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같이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레사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이사야 55:8)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말씀을 근거로, 공로란 많이 행하고 많이 주는 게 아니라, 많이 받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고 해석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들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이 귀여워합니다. 의사들이 수술할 때에는 환자들을 재웁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시 103:14)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우리 본성의 감정과 어긋나는 것입니까! 은총의 도움 없이는, 그 교훈을 실행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Ⅲ. 결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신뢰와 사랑으로 갈수 있는 길이며, 겸손으로 가능한 길이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인 복음의 길이다. 데레사의 전체 삶에서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데 데레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가며 작은 데레사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데레사의 편지글들과 자서전을 통해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폴린 언니가 있어서 수녀원에 가려는 열망이 있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께 활짝 열어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깨끗한 영혼이다. 왜 그렇게 빨리 완덕을 바라고 왜 그렇게 빨리 예수님께 가고자 했을까. 그 모든 열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믿고 데레사는 힘을 빼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다. 14세에 가르멜에 들어가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교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15세에야 입소 할 수 있었다. 그 여정이 힘들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여정이 없었더라면 데레사는 엘리베이터 이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임금님인 아빠가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며 더욱 하늘을 소망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작은 고통 하나에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영적으로는 더 어린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수련자들을 맡아 교육하는 부수련장의 업무도 감당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자신을 살폈다.
이러한 데레사의 모습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보여지는 내 모습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며, 가면을 쓴 채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는 데레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드린 것 같이 해야 겠다. 둘째,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가치를 두었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가치가 덜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진짜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데레사는 안정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을 거야’ 혹은 ‘내게 갈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신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할 수 있다는 신뢰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안정감을 두었으므로 자신에게 몰아치는 고난들을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작은 꽃이지만 잔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큰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현대의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뿌리 내린 신뢰가 있어야 겠다.
데레사 자서전의 뒷 부분으로 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면서, 아가서 인용이 많이 나온다.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깊어질수록, 삶에서 점점 더 성숙해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1600년대의 잔느 귀용이 자꾸 생각났다. 일상에서 내면의 대화로 하나님과 소통 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1600년대 잔느 귀용은 이단판정을 받았고, 1800년대 봉쇄 수녀원에 있던 데레사는 교회 박사가 된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기회가 된다면 두 사람의 믿음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로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는 봉쇄 가르멜 수녀로 24세의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얀세니즘이 팽배했던 프랑스에 사랑의 하나님을 회복하게 하는 그녀의 가르침은 신비 체험이나 신학적 난제풀이가 아닌 일상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본 논문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그 길을 발견했는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녀가 남긴 자서전과 편지들을 통해 관찰해 보고자 한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5세(1888년 4월 9일)에 가르멜 수녀로 입회하고, 24세(1897년 9월 30일)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년 후 1997년 10월 19일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데레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짧은 생을 봉쇄 수도원에서 살던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교회 박사로 인정되었다.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작은 데레사가 성인들처럼 하나님께 도달(완덕)하고 싶은 갈망 중에 찾게 된 길이다. 다른 성인들은 큰 고난이나 성흔들을 받아 하나님께 도달했는데 어리고 작은 자신은 그렇게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완덕의 갈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길을 알려주실 것이라 믿었다. 성경을 읽는 중 잠언과 이사야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온전히 예수님의 팔에 의지해서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신뢰의 길이며, 예수님만 바라보고 인정하는 겸손의 길이며, 신뢰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길이며 이 모든 것을 총괄하여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이루는 복음의 길이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데레사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그의 가정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로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녀에게서 배우고 현재에 적용할 부분을 고찰해 본다.
데레사는 언니인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의 지시로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있을 때 까지, 자서전을 기록했다. 또한 성심 수녀회에 있는 큰언니 마리와 다른 지인들과의 많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데레사 선종 1년 후 가르멜 수녀회는 관습대로 데레사의 자서전을 비공식 출판해서 여러 가르멜 수녀원으로 보냈는데, 공식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10여년 만에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의 자서전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고 표현했다. 이 당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얀세니즘의 영향으로 정의의 심판관의 이미지였던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데레사의 성물들이 전쟁에서 군인들을 보호하고, 침체되었던 선교지에 생명력이 전해지는 등의 1950년 까지 데레사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가톨릭에서는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사후 50년을 기다리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 선종 26년만인 1923년 4월 29일 시복을 하고 1925년 5월 17일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했다.본 논문에서는 그녀의 자서전과 편지글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Ⅱ. 본론
2.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아버지 루이 마르탱(1823년생)은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꼼꼼하고 논리적 이었다. 22세에 고독한 삶을 꿈꾸며 수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라틴어를 몰라서 거절당하고 알랑송에서 시계공으로 지내면서, 35세에 젤리 게랭을 만난다. 어머니 젤리 게랭(1831년생)은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던 레이스 기술을 배웠다. 그녀 또한 수도자의 삶을 꿈꾸어 오텔디외 수녀원을 찾아 갔지만 거절 당하고 27세에 마르탱과 결혼하게 된다. 데레사의 부모 두 사람은 모두 수도자 생활을 원했었다. 신혼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고해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들에게서 아홉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다섯 명의 딸이 살아남았고, 네 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어머니 게렝은 종교적 신념이 충실하고 믿음이 깊었으며 일에 열정도 있었다. 작은 일에도 성심을 다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돌보았다. 친척들과 편지로 소식을 자주 나누었는데 많은 서신에서 막내인 데레사의 어린 시절의 정보들이 있다. 데레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할 때, 어머니의 편지를 참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데레사가 4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것은 데레사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된다.
데레사에게는 4명의 언니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던 큰언니 마리는 데레사의 대모였으며, 작은 언니 폴린은 어머니 사후 데레사의 ‘두 번째 엄마’가 되었다. 몸이 많이 아팠던 레오니와 데레사의 단짝 친구인 셀린 언니가 있다. 마리는 성모 방문 수녀회로, 폴린(예수의 아녜스 수녀로 데레사에게 자서전을 기록하도록 한 당시 원장 수녀)과 셀린 그리고 데레사는 가르멜 수녀회로 입회한다. 아버지는 말년에 금치산자 판정을 받기 까지 했지만, 2015년 10월에 데레사의 부모도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이름이 올랐다.
(2)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식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부모와의 심리적 관계가 사람들과의 심리적 관계 및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데레사의 부모는 가정에서 기도, 아침 미사, 주일의 저녁 기도 등 일상생활이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마르탱 부인은 병든 하녀를 돌보고 아버지 마르탱은 가난한 사람, 임종 환자를 도왔다.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스스로 자신의 내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눈다. 철 들 때부터 엄마가 돌아가신 때까지 알랑송에서의 생활(1873-1877), 엄마가 돌아가신 4살 반부터 열 네살 까지 뷔소네의 시간, 그리고 열 네살, 크리스마스의 은혜의 시간 이후로 나눈다.
첫째 시기의 데레사는 밝고 명랑하고 고집이 세고, 괄괄하고 순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데레사는 이 시기에 이미 사물에 대한 판단 수준이 글을 쓰고 있는 23세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표현한다. 큰언니 마리의 말은 절대로 거슬리지 않았고, 둘째 언니 폴린은 자신의 마음의 이상(理想)이었다고 고백한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등장하듯이 자신이 잘못한 것은 항상 모두에게 고백하고, 특히 아빠에게는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마리에게 전하게 해서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백 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어린 데레사에게 있었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 내용 중에 “저번에 데레사는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단다. 아주 얌전하게 굴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응, 그럼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지옥에 가겠네... 그렇지만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가 천국에 갈 때 같이 올라갈 거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아 줄 텐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붙잡아 가실 수 있겠어?’ 엄마 품에 숨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데레사의 눈에서 똑똑히 보았단다...”어쩌면 네 살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이 20대에 이야기할 ‘사랑의 엘리베이터’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자신의 아빠에게 ‘나의 왕’, ‘사랑하는 임금님’이라고 불렀고, 마르탱은 자신의 막내딸인 데레사에게 ‘나의 작은 여왕’이라고 애칭했다.
마르탱 부인의 사후, 데레사의 성격이 변한다. 수줍어 하고 얌전해 졌으며 특히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 져서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어야 편했고 낯선 사람과 함께 있기 힘들었다. 그러기에 가족들은 더욱더 데레사를 잘 보살피려고 했으며, 아버지 마르탱은 예민한 데레사를 섬세하게 보살폈다. 이 시기에는 아빠와 낚시도 하러 다니고, 고해 성사를 기쁘게 하고, 엄마가 가르쳐 준 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렸다. 이러한 관상적 묵상과 기도들로 이때부터 데레사는 ‘이 세상이 귀양지처럼 여겨지고 하늘 나라를 꿈꾸게’ 되고, 참된 본향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8살이 되었을 때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너무 우수해서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2년 만에 학교를 도중 하차 한다. 9살이 되었을 때(1882년 10월) 두 번째 엄마인 폴린이 ‘가르멜’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고, 자신도 가르멜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해 말부터 두통이 계속 되다가 1883년 부활주일(3월) 이후에 아이들은 걸리지 않는 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그해 성령강림 주일(5월)즈음, 고통 중에 성모의 미소를 보고 몸이 낫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데레사는 이때의 고통이 자신이 꽤병은 아니었나 하는 마음에 가르멜에 입소해서도 고해 성사를 할 정도였다.
데레사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깊은 마음의 기도를 했는데 수도원에 입소하면 어떤 이름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기 예수님이 떠올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불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언니를 면회 간 길에 원장 수녀가 데레사에게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이름을 하자고 해서 예수님의 친절한 마음씨를 느꼈다.독서와 성화(聖畫)보기를 즐기면서 묵상 가운데 점점 더 예수님을 모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영성체를 받은 날에는 갈2:20절 말씀을 되뇌었는데, 예수님께서 많은 십자가를 지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이 큰 은혜를 받은 위로로 느꼈다.
1885년 5월 12살 무렵 피정 동안에 무서운 세심증이 생겼고 그 이후로 약 1년 반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이 무렵 기숙학교를 도중하차 한다. 세심증으로 인해 마리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마음이 편했는데 마리 언니마저 수녀원을 결정하면서, ‘오직 하나 뿐인 벗’은 예수님 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데레사는 또래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만은 모든 것을 말했다.
데레사에게 두 번의 기적은 앞서 기록한 투병중의 성모의 미소와 크리스마스의 은총이다. 데레사의 세심증과 타인에게 섬세한 반응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것 때문에 가족들은 힘든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데레사는 눈물을 흘렸다. 13세였던, 1886년 성탄절에 데레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다 하던 행사를 앞두고 아빠가 내년에는 데레사가 수녀회로 들어가니 ‘자, 다행히 올해로 끝이구나!’라고 한 말을 데레사가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데레사는 또 울음을 터뜨리고 크리스마스를 망칠 수 있었으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잃었던 마음의 힘을 되찾아 분위기 좋은 크리스마스를 지낼 수 있었다. 10년 동안 고치고 싶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 이 후로 데레사는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 져서 공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공부와 암송들 속에서 데레사는 여러 계시들을 경험한다.
2.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저는, ‘아주 작은’것 밖에는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는 ‘아주 작은 영혼’입니다. 게다가 마음에 많은 평화를 주는 이런 자그마한 희생조차 자주 놓쳐 버립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평화를 좀 덜 누리게 될 것을 참으며 다음에는 더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데레사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하느님, 저는 모두 선택합니다. 반쪽짜리 성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 선택’하오니, 저의 의지를 받아주소서”“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욕구를 불어넣으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작은 나도 성덕을 열망할 수 있어... 하지만 아주 곧고 짧은,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을 통해 하늘에 갈 방법을 찾고 싶어”
위대한 성인들처럼 되고 싶은데 그들처럼 되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서 그들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 올라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데레사는 자신을 많은 꽃 중 작은 꽃,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많은 붓 중에 작은 붓, 발에 밟히는 작은 모래 같다고 표현한다. 예수님 계신 곳 까지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로마 여행 중 보았던 엘리베이터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엘리베이터에 해당하는 말씀을 찾는다. 그녀는 잠언 9장 4절의 “누가 ‘아주 작은 자’이어거든 내게로 오라“라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품으로 자신을 초대한다고 보았다.또한, 이사야 66장 12-13절을 통해서 자신을 하늘에 올려줄 엘리베이터는 예수님의 팔이라고 해석했다. 이 ‘사랑의 엘리베이터’는 예수님께 안기어 은혜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히려 큰 사람이 될 필요가 없이 ‘작은’채로 있어야 했고, 점점 작아져야 했다.이것은, 막내였던 자신의 작음과 약함이 부모님과 언니들의 사랑을 받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했고, 불완전과 작음이 예수님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엄마 품에 안겨 천국에 가겠다던 그 꼬마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데레사는 자신의 작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의 바탕이 되며,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B.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1932-1996) : 신부, 작가, 미국 하버드대학교 강사,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목회신학, 영성), 전 세계를 대상 교구로, 마지막에 캐나다 토론토 소재 라르쉬(L’arche)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독교 영성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음. [저서] 상처입은 치유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 발돋움, 영성 수업, 마음의 길, 분별력 등 다수..
. 통합된 인격과 영성을 함께 추구하는 일은 일시적 깨달음, 고속 성장, 자기 실현, 자기 강화, 통합을 향한 욕망(현대의 문화적 특징들)으로 이루어 질수 없다. 나우웬은 항상 번민했고(분별력), 외로워했고, 자신의 목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묵상, 저술, 그리고 공동체의 삶 가운데 애를 썼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점증하는 신뢰를 가지고 불완전의 삶을 살아갔음“
∴ 영성 : 완덕의 성취가 아니라 불완전에 대한 인식과 수용
. 어두운 측면, 분열된 마음, 욕망과 같은 인간의 물질 혹은 현실과 직면하게 도움
. 전통적 금욕주의와 달리 욕망(desires)과 정념(passions)의 인식, 수용으로 하나님을 알아감
2. 욕망의 영성 (spirituality of desire) *욕망 : 쉘드레이크의 불완전의 영성에서 중심적인 위치
. 욕망 :
. 인간 인격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경험
. 자신의 욕망에 관심을 두는 것은자신에 대한 존재적 자각의 시작
.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존재)의 심층에 거하므로 욕망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하나님 경험
. 욕망이 진실해질수록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존재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와 접촉
. 진실한 욕망 :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자유롭게 운동하는 곳(깊은 내적 우물)
. 가장 깊은 욕망은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을 넘어 자기-희생(self-giving)으로 인도
ex) 기독교 영성을 전공으로 선택한 우리, 문지영 피아니스트
. “본질적 자기” : 욕망이 진실할수록 하나님의 실재와 만날 가능성이 커짐
. 진실한 욕망과 접촉 : ‘내적 우물’ 여정에서 필수, 하나님을 향한 갈망(‘아가페 사랑’)의 표현
. 하나님의 신비 경험 안에서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은 일치
(기독교 전통에서는 분리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경험을 방해함.)
. 폴 틸리히의 「사랑, 권력, 그리고 정의」 (Love, Power, and Justice)
. “하나님 사랑의 에로스적 특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불가능한 개념이 되고 마침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순종으로 대체될 수 있다. 참된 사랑, 참된 성애(eroticism)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의’ 경험이다. 하나님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성애적 힘이요(God is erotic power) 인간 사이의 성애적 힘이다.”
. 인간적인 욕심이 섞이면서 사랑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성애적 힘에의 끌림(친밀함으로의 초대, 자기 개방(?))은 인간적 사랑의 모험 안에서 보편적인 하나님 사랑(아가페 사랑)을 발견
예) 성(성적 결합)은 성만찬의 특성(예전) : 사랑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서 영적인 중심으로 안내 (ex) 바베트의 만찬 : 맛있는 음식, 풀어지는 마음
. 쉘드레이크의 하나님 이미지 : 한정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재
. 인간의 심층(depth, 무의식 까지 포함, 원초적인 욕동을 포함하는 상징적 장소)
- 하나님의 실재와 접촉할 수 있는 곳 : ‘내면의 우물’(심층), ‘마음’(the heart, 기독교 영성 전통)
but 하나님의 실재는 이성 or 사랑 감수성으로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만 남는다.
∴ 부정의 하나님 인식이 하나님을 향한 중단 없는 사랑의 욕망과 역동적 영적 여정 조성
- 욕망의 정의 : 자신이 아닌 혹은 가지지 않은 것 ∴ 불완전함이라는 조건이 내재되어 있음
∴ 욕망의 영성 = 불완전에 대한 감각, 무한을 향한 개방 (영구적 한계선 상태 )
3. 신비적 방랑자의 삶
. 한계선상에서 살아가는 영성은 불안한 상태에서도 과감하게 헌신 가능
.“모세식 사유 학파”(Moses school of thinking) 영성 (cf) “다윗왕 학파”
: 안정(정착)에 대한 영적인 유혹을 민감하게 인식하므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신뢰
. 신비가 : “알 수 없고 소유될 수 없으며 고정되거나 최종적이지 않은 것에 의해 이끌려서... 욕망의 삶을 사는 사람” (「신비주의 우화」(The Mystic Fable), 드 세르토/실레시우스의 ‘방랑자’)
. 신비적 방랑자
.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타자와 만남에서 자기초월을 경험하면서 계속해서 어딘가를 향하여 걸어가지만 한 곳에 정주하지는 않는 사람” (p377) (ex) “텅 빈 무덤“으로 상징
. 경계선 혹은 한계 위에서 살아감
. 성령(신비가를 끊임없이 욕망에 끌려가게 하는 힘, 존재의 힘과 의미 통합)에 사로잡힌 사람
.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를 초월하여 경계 지어진 영역 너머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p377)
C. 불완전의 영성은 완덕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론적 전제 아래 자기의 불완전을 인정하고, 인간적 욕망을 점증적으로 인식하면서, 신비적 방랑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다.(불안정의 안전성 : 피조물인 인간으로 불안정(죽음, 두려움)을 막기/피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닌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임)
(ex) 문법 공부할 때 영적위로에 사로잡혀 공부 할 수 없을 정도 여서 단계적으로 묵상하면서 유혹이며 거짓 위로 라는 것을 파악하고 단호하게 결단 내렸을 때 유혹에서 벗어났다.
. 악한 영의 의도는 악한 지향을 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경험되는 거룩한 생각들은 거짓이 아닐수도 있다. 영 자체나, 영에 의해 발생된 생각이나 감정들은 선하거나 악한 경향이다. 악한 영이 위로를 드러냈다면 진행과정이 악으로 기울어 가는 것이지 위로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 없다. (위로 동안 경험되는 거룩한 생각, 느낌, 욕구들을 믿음의 행위로 표현하면 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정체가 파악되는 것이 중요하다. 위로 중 경험한 생각, 느낌, 충동은 버릴 필요가 없다.)
∴ 위로가 거짓임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
. 거짓 위로에 대한 분별은 더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 : 분별, 의지적 선택은 개인의 결단
. 악한 영의 속임수는 초반 감지 난이 ∴양심 성찰로 인지 가능
∴ 영적 분별 :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내면 성찰로 성숙해 가고자 선택하는 사람들의 몫
Ⅳ. 이냐시오의 영적분별의 전제와 한계
. 이냐시오의 사상과 영성의 요지 :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 “보다 더”
(1) 분별의 목적은 보다 나은 선택/하나님께 더 큰 영광/보다 나은 삶에 초점이 있다.
∴ 분별의 근본 목적 :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것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더 큰 영광
[토론 질문] 이것이 ‘욕심’으로 작용해서 오용/악용되지 않을까 (본인의 고민^^)
. 하나님의 영광
A. 하나님의 부르심의 삶/변화된 생명에 참여 → 기도와 관상
B. 하나님 나라 : 현재의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과정, 나는 하나님의 협력자
∴ 분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헌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며, 섬김의 삶을 추구)
. 선택의 조건 : 그 자체로 (중립적이거나)선한 것, 교회안에서 도움
(2) 자신의 강약, 성숙한 정도를 고려하여 개인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 성취되는 ‘하나님의 영광’ → 분별의 중요한 기준
. 이냐시오 분별의 한계 (Toner) : 개인의 성숙과정에 초점 둘 때, 분별의 의미가 풍성해진다.
(1)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2) 자유로운 선택 가운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선택의 범위 안에서
(3) 결단과 선택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
Ⅴ. 결 론
. 영적 분별 : 성숙의 과정에 분별의 경험에 부름 받음
. 결과보다 과정에 비중
. 분별 대상보다 분별하고 있는 자신이 중요
. 분별은 하나의 과정 : 선택과 결단에 메이지 말 것 (잘잘못을 따질 때 분별의 의미가 사라짐)
. 7가지 분별 도입 항목 : 기억, 직관, 몸, 상상력, 생각, 느낌 (←인간 내부), (인간 외부 →) 자연
. 자연을 통한 분별 질문의 의미 : 분별의 새로운 각도 (다른 피조물 앞에서, 피조물로써의 질문)
. 10장의 목적 (1) 기도할 때 자연 사용하는 것 편히 하기 (2) 자연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제공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수련1] 자연 통해 분별에 접근하기 : 자연에 기반 한 분별 실습 (야외 혹은 자연 물체의 활용) (1) 하나님 원하시는 것 갈망, 내적 자유함 구하기 (2) 주변의 사물(생물, 무생물)에 관심 갖고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3) 분별하려는 결정을 다시 말하기, 물체와 함께 있는 동안 분별 질문도 함께 머물도록하기 : 수련2에서 계속 (4) 자연이 하는 말 들어보기, 영성일지 기록하기 (5) 자연 앞에서의 경험이 나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6) 결정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겠다는 갈망으로 가져가기 (7) 임시 결정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 7개 중에서 여러개가 같은 결정이면 확증과정의 시작
Ⅰ. 그리스도인은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가? (by Sallie McFague)
.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을 사랑하지 않고 지금도 그렇다. (자연에 대한 기독교 양면성과 영성생활과 연관성)
1.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함에 대한 연구 예
(1) 생태학자, 루터목사 Paul Santmire : 자연관점에서 기독교가 취한 두 노선(인간 영의 위치)
A. 자연 보다 위에 : 자연에 덜 호의적
B. 자연 안에 : 자기의식이 체화(embody?)된 자아가 생물학적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축하
(2) 신학자, 종교교수 Mark Wallace
. 기독교인과 자연사이 벌어진 틈 메우기 위해 성령에 대한 성경적 전통을 되살리려 하는 시도
(3) 수학, 철학, 관상가 Beatrice Bruteau : 우주기원 ~ 의식(신경 생물학) 연구 : 성육신과 삼위일체 신학숙고
2.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땅 안에, 땅위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by 성육신)
→(성육신 신학 확장) ‘성령이 모든 생명체의 가슴 안에서 그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힘으로 거주‘
(1)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성육신은 지금 여기(HERE&NOW)에서 성령의 체현(embodiment)로 나타남
(2) 본래 부모originary parent(하나님)을 기억나게 함 ∴삼위의 모든 위격들이 창조와의 긴밀한 연결
. 그리스도인들 안에 자연에 대한 인식 (1) 자연의 청지기 (2) 자연사랑? : 무의식적 불편함 (ex) 우상숭배의 장
3.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 (관점 변화) 자신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김→ 피조물의 작은 부분인 나를 알게 함
■ 기독교 영성의 정의 (아서 홀더 편집, 『기독교 영성 연구』 아서 홀더 편집, CLC, 2017)
“자신이 인식하게 된 궁극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경험” (the experience 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
(a) 궁극적 가치 :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 (b) 통합 : 전체로서의 인간 (영, 정신, 몸,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책임) . 믿음과 제자도의 삶 : 기독교 영성의 실존적 현상을 구성 (c) 경험 : 개인적이지만 내면적이지만은 않다. : 자기(self) 전체가 실재(reality)와 관련
4. 자연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 자연을 사랑하려면 자연을 알아야 한다.(관심, 듣고, 배우고, 존중)
- 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다가가기 → “자연을 통해 분별에 접근“의 기초 제공
- 자연 안에서 자연 통하여 하나님 찾기(실습이 필요한 경우도 있음) :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자체로 알고, 작은 풀잎에도 감사하는데 익숙해지면 이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하게 됨
[수련2] 자연으로부터 오는 계시 받아들이는데 초점 (상상력 통해서 대화하기) (1) 물체와 조용히 앉기 (2) 역사에 대해 묻기 : 태생, 어디에 있었나, 누가 만졌나/집었나/스쳐지나갔나, 어떻게 여기에 왔나.. (3) 내적 생활과 영성에 대해 묻기 : 연약함, 부드러움, 밀도, 다른 사물과의 관계 (4) 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인가? : 나의 직관에 대해, 깊은 내면에 대해 (5) 하나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A. 수련2의 요지 : 하나님은 모든 순간마다 창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분별의 성질이 달라진다. B. 수련2의 위험 : 실용주의 (무엇을 얻기 위해 자연을 이용함,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존중)
10장 자연의 관점
Ⅱ. 자연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자연의 정의)
: 모든 생명이 일어나는 곳, 의존하는 곳 (∴겸손하게 대하기)
. 성경 : 인간은 자연의 일부 (창1:1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자연(땅) : 하나님에 의해 창조, 피조물들로 구성되는 영역, 인간을 포함 (by 샌트마이어)
→ 자연은 과학에 의해 연구되고 성경적 신학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므로 분별 실습의 근거가 될 만함.
Ⅲ. 자연에 관하여 성경 전통이 가르쳐 주는 것 : “다스리다”
. 창세기 : 자연 안에 속한 인간, 독특한 책임 부여 – 질서와 평화 유지 (인간 with 다른 피조물들)
. 노아 이후 하나님과 동물 사이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 정지 : 자신의 보호와 식욕위해 동물 죽임
. 하나님의 본래 의도 : 동물 절대로 죽이지 않는 것
.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돌보심, 비옥함(신명기 약속의 땅, 광야에서 먹이심, 홍해, 시내산, 시편, 묵시, 신약)
Ⅳ.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자연 (자연에 대한 양면성) :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1) 이레네우스 vs 영지주의자(구원으로 안내하는 특별한 지식 소유함 주장)
. 자연 :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집 (“좋은 땅으로의 이주“ : land는 창조주가 새롭게 하신 earth)
(2) 아우구스티누스 : 영혼과 자연사이의 위계 구분 “새 땅으로의 이주”
. 피조물 :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 피조물 통해 하나님의 섭리 관상 ∴분별의 중요한 기초와 도입
(3) 칼뱅 : 죄로 인한 무질서가 창조에 침입했으나 하나님은 피조물에 진실하심
∴ 인간이 누리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합법적 공간
자연 관상 “오랫동안, 진지하고 신실하게 마음으로 살피며 반복해서 숙고“ 하며 하나님 관상으로 천천히..
→ 영혼에게 초점, 자연은 인간의 활동 무대로 정의 (분별의 도입 항목)
Ⅴ. 공동-창조자로 창조된 인간 (created co-creators) : 인간의 창조성
.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과 자유 의지로 주변 환경 안에 다른 것을 만듦으로 자기의 환경을 조성
.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 사역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 (ex) 산업혁명....
. 분별의 목표 : 어떻게 이 창조의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창조주와 뜻을 같이 하여 창조할 것인가?
토론질문1. 자연에서 분별 or 하나님 찾기가 불편한 이유가 교재에서는 우상숭배의 원인에 있다고 했다. 본인에게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어떤 이유일까?
토론질문2. 주변이나 본인이 자연에서 분별 or 하나님 찾기 경험 중 오버 했거나 오해 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