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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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2 경교의 기원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3.2 원나라 때의 경교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4.2 원나라 때의 경교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5.2 외부적 원인

6. 마치는 말

7. 참고도서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845년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으로 불교를 탄압할 뿐 아니라 세 종류의 오랑케 종교인 이슬람, 조로아스트교, 네스토리안을 강제로 환속 했다. 기독교인은 대략 2천 여명의 사제를 환속시키고 불교는 약 26만의 불승을 강제로 환속했다. 이후 878년 황소의 난 때는 많이 목숨을 잃었다. 네스토리안은 대략 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송나라로 이어지면서 중국인들이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회복의 일환으로 ‘고유 종교 부흥운동’을 함으로 외래 종교를 소멸시킨 이유도 있었다. 더불어 750년 이후 해양 실크로드의 주도권이 이슬람에게 넘어가면서 수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네스토리안의 교세는 줄고 이슬람이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독교내 외세의 지원도 줄어들면서 네스토리안은 점차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타슈켄트 동북쪽의 이시크 쿨 호수에서 600여개의 네스토리안 비석들이 발견 되므로 네스토리안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향했을 것으로 예상 된다. 여기에는 시리아어로 씌어진 것으로부터 투르크어 까지 858년부터 1345년까지의 네스토리안 기독교 정보를 발견 할 수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초기의 네스토리안 공동체는 시리아어를 사용하다가 소그드어를 사용하고 점차적으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사무엘 H. 마펫, 김인수 역, 『아시아 기독교회사』,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4.2 원나라 때의 경교

  원나라때 경교가 다시 활발해 진 이유 중에 하나는 몽골제국과 원나라가 모든 종교에 관용정책을 편 이유도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쫓겨나서 중앙 아시아에서 생명력을 키운 경교가 원나라와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모든 종교에 관대 했기 때문에 원나라 세조 이후에 티벳의 라마 불교가 중국에 영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지배 종교로 정착되었다.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상기의 자료와 시리아 교회의 선교 방법을 보면 계속해서 시리아 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중국내에서 외래 종교로 남아서 토착화 되지 못한 것이 경교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로 크게 손꼽힌다. 또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내용에서 보았을 때 타종교의 요소들이 너무 많이 침입되었다. 물론 초기 번역자들이 도교나 불교의 용어를 채택하므로 상황화하여 번역 하려고 노력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佛) 또는 “천존”(天尊)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상황화를 벗어나는 심한 신학적 타협이었다. 또한 선교 방법론에 있어서 지나친 정교밀착(政敎密着)이 있었다. 당대나 원대의 황실과의 지나친 밀착이 교세를 확대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또한 교세가 죽는데도 큰 영향이 있었다. 경교가 정교밀착(政敎密着) 상황에 있었기에 원대에서 경교가 사라진 원인에 하나로 대두 되는 것은 가족의 개종이다. 기독교 일가족이 중국내에서 성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인 유교로 넘어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경교로 지낸 웅구트족은 칭키스칸의 동족으로 지배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내에서 사회적 상향(上向)을 유지하기 위해 유교화 되었다.

 

5.2 외부적 원인

  경교가 중국에서 두 번이나 쇄퇴하게된 사회적 원인으로 첫 번째는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한 전멸과 기독교 공동체의 붕괴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불교 인데도, 불교는 아직까지 중국에 남아있다. 두 번째 원인은 상기에서 기술한 송나라때 내부지향적인 종교분위기 조성으로 인한 것이다. 당나라때 외부 유입 종교로서 경교가 인정되고 황실에서의 위상이 높아 되면서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있었다. 송나라때 ‘고유 종교의 부흥운동’에 의해 경교가 소멸되었다. 내부적 요인에서 언급한대로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토착화에 집중했다면 송나라때의 이런 상황에서 경교가 살아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슬람의 등장으로 수로가 막혀서 더 이상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교류가 없던 것도 경교 쇠퇴의 원인이 될수 있었다.

 

6. 마치는 말

  경교의 기원과 종말은 더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분야였다. 경교가 두 번이나 중국내에서 사라진 이유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 오랜 시간동안 외래 종교로 남아서 토착화 되지 못함

. 상황화를 훨씬 벗어난 신학적 타협과 표현의 토착화 (예) 하나님의 이름

. 타종교의 요소들과 융화나 타협이 과도했음

. 황실과의 지나친 밀착을 통한 교세 확대 추구 (정교밀착)

.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한 전멸, 공동체 붕괴 (불교의 경우 살아남음)

.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자존심과 체면과 긍지 회복의 일환으로 ‘고유 종교의 부흥운동’에 의해 소멸 시킴(민족적 자긍심에 의해 희생됨)

. 중국으로 오는 외래인들 중 네스토리안은 줄고 이슬람이 많아짐 (네스토리안 교세 줄어듦, 외세 지원도 줄어들면서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도피)

. 중앙 아시아로 전파 과정 중 각 부족의 소수 민족 종교로 탈바꿈

 

  본 연구와 조직신학 수업을 통해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심각한 오해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속에 복잡한 의문들은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네스토리우스에 관련된 책 한권 안 읽고 다른 사람들이 쓰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내가 아는 것처럼 말 한 것도 많이 창피하다. 그러나 또 책한권 제대로 안 읽어보시고 글을 쓰신 분들도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 사무엘 마펫의 책이 가치있는 고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들에서 찾지 못한 자세한 내용들을 마펫의 책에서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계속해서 생기는 질문은 중앙 아시아로 간 네스토리안 공동체는 시리아어로부터 점차 그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리아 교회 선교 방법과 관련된 자료에서 시리아 교회가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시리아어와 현지 어를 모두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라반 바르 사우마도 여러 개 언어를 했다.) 중앙 아시아로 쫓겨 나갈 때는 이미 중국에서 200년을 지난 시간이었는데 그 동안도 계속 시리아어를 공용으로 사용한 것인지 궁금했다.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해 경교가 전멸되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수(數)적으로 봤을 때 불교가 받은 타격은 더 컸다 그러나 아직도 불교는 남아있다. 이유는 무얼까? 차이점은 무얼까?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위해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이기지 않으셨다. 40일 금식 후 광야에서 사탄이 유혹하지 않아도 드실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사람의 입장이 되어 고스란히 고난을 감당하는 것을 선택하심으로 승리하셨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교의 중국 진출의 역사에서 (고난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황실의 힘을 빌어 성장 했을 때 황실의 쇠퇴와 함께 경교도 쇠퇴했음을 보게 된다. 더불어 네스토리안이 된 가족들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위해 유교로 넘어가는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자신의 유익에 따라 황실과 손잡고 의지한 모습이 그대로 답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알게 되면서 나또한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원하시지 않은, 주시지 않은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보고 선교사들이, 목회자들이 배워야 하겠다. 무조건 팽창하는 것이, 거대해지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선교에서 항상 대두되는 문제 이지만 어디까지 상황화 하고 어디부터 현지에 이양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첫번 선교사들의 번역의 문제가 있었겠지만 동일한 번역의 문제가 이후에도 계속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추측이 든다. 당나라에서 중앙 아시아 초원으로 네스토리안들이 퍼저 나갈 때 웅구트 족과 같은 열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경우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기독교가 심하게 상황화 하는 바람에 결국은 그들의 종교와 융합되거나 변형되었다.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깨어 있어 항상 주님과 함께 함으로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지혜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것 밖에는, 항상 은혜를 구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상황을 다시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대에는 기독교를 향한 타종교와 문화의 공격 또한 무시 못 한다. 보이지 않는 큰 적이 힘이 세다고 좌절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선택 할 것이 죽음 뿐이라면 주님을 신뢰하며 죽을 수 있는 초대 기독교의 영성.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길 바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 사람 편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하나님만을 갈망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겠다. 나를 비롯한 기독교 사역자들이 오직 주님만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응원한다.

 

  더 깊이 많이 공부하고 제대로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언어의 장애(외국어 실력 부족)와 체력의 부족으로 깊이 공부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7. 참고도서

(1) 김상근,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왜 중국에서 사라졌는가?,” 「신학논단」 43, 2006.2,

(2) 사무엘 마펫, 『아시아 기독교회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 이장식, 『아시아고대 기독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4) 이재화,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고대교회 - 망각과 투쟁의 역사, 랍반 바르 사우마의 생애를 중심으로,” 「Muslim-Christian Encounter」 10(2), 2017.9,

(5) 이현모. "경교는 실패한 선교 모델인가?." 복음과 실천 43.1 (2009).

(6)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7) 편집부, "이야기 교회사/ 경교로 불려진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 교육」 (통권401호(2002년 10월)),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8) 김광수, “경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293, 2018년 11월 24일 방문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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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2 경교의 기원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3.2 원나라 때의 경교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4.2 원나라 때의 경교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5.2 외부적 원인

6. 마치는 말

7. 참고도서

 

1. 시작하는 말

  아시아 교회사를 수강하면서 알지 못하던 많은 기독교의 역사들을 알게 되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열심히 찾아가면서 매주 읽기 자료를 읽었고, 이어진 강의 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려지지 않았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알로펜의 이야기나 라반 사우만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였고, 강의를 들은 후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니,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자료들을 보게 되었다.(물론 강의시간에도 교수님이 언급하셨다.) 600년대에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자료가 남아있다니.. 그렇다면 그 전에도 들어올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특히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를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는데 계속 의문이 남았다. 그 기원을 찾아 보고 싶었으나 학기말의 페이퍼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를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경교와 네스토리안의 관계를 조금씩 알아갈 계획이다.

 

  수강 신청할 때 한 치의 고민도 안하고 아시아 교회사를 선택했는데 그 배후에 이렇게 나의 학구열을 자극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아시아 교회사는 고전 자료가 아니고는 최근의 도서로 출판된 것이 많지 않아서 강의로 듣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과제를 하면서 한국인이 쓴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나 다른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여러 책과 논문을 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 본다.

 

사무엘 H. 마펫, 김인수 역, 『아시아 기독교회사』,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용어에 대해서는 중국내에서는 네스토리안 보다는 경교라는 말이 (개인적으로) 익숙해서 주로 경교라고 했다.(물론 중국내에서는 3가지 명칭으로 불렸기에 통일해서 네스토리안이라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경교人일 경우는 네스토리안이 편하므로 중국내에 있는 경교人의 경우는 네스토리안이라고 했다. 용어를 섞어 사용함으로 인해 이해해에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2. 경교의 기원

  국내에 나와 있는 동방 기독교자료나 아시아 기독교 자료들은 경교에 대해서 아래의 두 가지 내용으로 소개한다. 네스토리우스의 후예들이 시련과 박해 속에서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중앙아시아로 향했다는 주장과 네스토리우스 사건 이후로 정치적인 문제로 동방 시리아 교회가 로마 제국내의 교회들과 결별한 이후의 교회들을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381∼451)가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주장하고 마리아 신모설을 반대한 이유로 이단으로 몰렸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이집트에서 유배 생활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따르던 사람들이 페르시아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을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5] 조금더 자세한 내용으로는 페르시아의 열정적인 대감독 바르사우마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페르시아에 네스토리우스의 신앙고백을 공포하므로 페르시아 교회가 네스토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로마제국내의 교회들이 동서 분열이 일어나기도 훨씬 전에 사산왕조 영내에 있는 동방 교회는 로마제국 교회와 나뉜다. 이러한 시리아 교회는 동방 시리아 교회(이하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교회로 나누는데, 동방 경교는 중앙아시아, 중국 등으로 동진한 경우이고, 서방 시리아 교회는 페르시아, 터키, 중근동에 현재까지 활동 중인 시리아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 동진한 동방 경교는 왜 사라졌으며 서방 시리아 교회는 어떻게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공부해 보는것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교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시기인 16세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와 중국 안에서 파사교(波斯敎), 경교(景敎), 에르케운(也里可溫)이라고 불렸던 기독교 신앙공동체 전체를 통칭하여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사교(波斯敎), 경교(景敎), 에르케운(也里可溫)의 문헌들을 연구해 봤을 때 이들이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연구이다. 도리어 상기한 중국의 기독교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전 ‘원시 기독교’의 모습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 마테오 리치 이전에 전해진 기독교를 통칭해서 부를 때 네스토리우스와 상관없이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635년 페르시아 시리아 교회에서 파송된 알로펜이 당 수도 장안에 도착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당태종의 적극적 지원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교회를 건립하고 21명의 사제들이 활동했다. 고종때는 경교 사원이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685년부터 섭정했던 불교도인 측천무후에 의해 경교는 첫 번 시련을 경험한다. 이후 713년에는 도교에 의해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현종 즉위 이후에는 아라비아로부터 기독교 사절단이 입국하기도 하는등 중흥을 이룬다. 그러던 중 756년에 당나라 황실의 문제거리였던 안록산의 난을 정벌하는 과정에 경교인 이사 장군이 공을 세운다. 또한 이사 장군은 티벳군대의 공격으로 당대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다. 이것으로 황실에서는 경교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이었으며, 바로 이때 이사 장군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건립을 계획한다. 그는 경교 선교의 150여년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이것이 중국 고대 교회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 이다. 이 비문은 주교였던 경정(景淨)이 작성했으며 실재로 경정(景淨)의 존재는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이 된다.

 

3.2 원나라 때의 경교

  경교는 9세기 후반부터 중국에서 사라지고 경교인들은 중앙아시아로 도주하면서, 소그드인과 투르크인에 의해 유지되기 시작했다. 744년에서 842년까지 중앙아시아 평원을 지배했던 위그루는 마니교가 국교였고, 이후 케레이트와 나이만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이들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경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 전체를 재패했을 때는 이미 칭기스칸의 민족인 웅구트 족은 기독교였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중국에서 도피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개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칭기스칸이 세력을 확장하고 쿠빌라이칸이 원나라를 세울 때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있이었고 그들은 에르케운(也里可溫)으로 불렸다. 원나라의 황실이 기독교이므로 경교는 다시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13세기 중반 유럽의 수도회 신부들이 원나라에 도착했을때 네스토리안과 다양한 접촉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네스토리안 존재와 활동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제국과 원나라는 경교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용 정책을 폈기 때문에 경교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2에서 계속)

 

[참고도서]

(1) 김상근,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왜 중국에서 사라졌는가?,” 「신학논단」 43, 2006.2,

(2) 사무엘 마펫, 『아시아 기독교회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 이장식, 『아시아고대 기독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4) 이재화,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고대교회 - 망각과 투쟁의 역사, 랍반 바르 사우마의 생애를 중심으로,” 「Muslim-Christian Encounter」 10(2), 2017.9,

(5) 이현모. "경교는 실패한 선교 모델인가?." 복음과 실천 43.1 (2009).

(6)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7) 편집부, "이야기 교회사/ 경교로 불려진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 교육」 (통권401호(2002년 10월)),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8) 김광수, “경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293, 2018년 11월 24일 방문

영성지도 실습 소감문
(피지도자로서 영성지도 실습을 통하여 어떤 도움을 얻었는가?)

 

이번 학기 피지도자로 2번의 영성지도 실습을 하였다. 지도자이거나 관찰자 일 때는 모두 열심히 기록했다. 그런데 피지도자로 임 할 때는 기록을 해놓지 않았다. 타인을 관찰 할 때는 엄격하게 하면서 나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이것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수업시간을 맞으면서도 계속 떠오르는 단어가 ‘교만’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두주동안 아팠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내가 참 교만하다’라는 것이었다. 학기 초를 시작할 때도 떠오르는 단어가 ‘교만’이었고, 이제 학기를 마무리 하며 한 학기를 되돌아보면서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교만한 나 임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 동안 은혜가 컸다.

 

첫째, 개인영성 형성 과목의 매주 교재를 읽을 때 마다 주시는 답과 위로가 있었다. 이번학기 너무 많은 과목을 듣는 바람에 교육목회라는 과목의 책을 못 읽었는데 그 과목의 책들을 통해서도 주실 답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통해 알려주시기를 바라시는(아모스 3:7) 하나님을 꾸준히 경험한 한 학기 였다.

 

둘째, 물어보는 모든 것에 답해주신 한 학기 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이번학기 신학교를 휴학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었다. 갑자기 많아진 스케줄로 인해서 체력에 무리가 되었다. 스케줄이 생기고 조정될 때 마다 하나님께 여쭤보고 함께 한다고 했는데 너무 늘어나서 이번학기는 일주일에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었다. 학기 휴학신청하기 전에 계속 여쭈면서 학교를 휴학하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업그레이드 하시기 위한 시간인데 “내가”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쉼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학교 목요 채플시간에 나를 통해 받으시고자 하는 찬양(사 43:21, 찬송가 288장)을 부르게 하시기 위함이고 내가 두려움에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심을 알려주셨다. 더불어 ‘시간’과 엮여 있는 내 안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함을 질책이나 혼냄, 권면이 아닌 직면함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학교 수련회 목요 채플과 세미나가 있던 날 나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었다.

 

이날 이후로 에너지가 확보되어 오늘(기말) 까지 물리적으로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누리며 지낸 것 같다. 그날 전까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그날이 지나도 체력이 힘든 것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날 전까지는 체력이 힘들어도 끝까지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하려고 했다면, 그날 이후로는 아버지의 쉬라는 말씀으로 알고 푹 쉴 수 있었기에 오늘까지 큰 실수 없이 한 학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기말고사 인데 밤늦게 까지 깨어 있을 수도 없고, 몸에 계속 염증이 생겨서 통증이 와서 잠을 안 잘 수가 없는 구조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 하므로 한 번에 하루씩(마태복음 6:34) 사는 것을 연습하는 학기가 될 수 있었다.

 

이런 훈련이 나에게도 유익이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익도 있다. 그들은 ‘내가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죠’, ‘시간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질문이 엄청 많이 쏟아진다. 만약 내가 이번학기에 임마누엘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왜 순종 안하냐며 정죄하고 답했을 텐데 웃으며, 그들을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 마음 나도 알아요. 나도 그랬어요’

 

 

또 기억에 남는 답이 있다. 지난학기 부터 같은 반 같은 나이의 전도사님 중에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한명(A) 생겼다. 동갑이어서 나는 그분이 더 편했던 것 같은데, 참 착하고 선해보였던 A는 여전히 다른 분들께는 활짝 웃어주면서 나에게는 찬바람이 쌩했다. 약간 당황했지만 방학이 지나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혹시 나에게 서운했던 것을 말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새 학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새 학기가 되어도 동일한 상황이 계속 되었다.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나는, 어떤 공동체에서도 이런 경우는 계속 하나님께 묻고 답을 받지 않으면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단히 힘들어 한다. 대부분 내가 속한 공동체는 영적인 공동체 인데 공동체 내에서 이렇게 막힌 부분이 있으면 은혜의 파이프가 막힌 듯한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막혀 있어도 내가 아프게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내가 우리학번 은혜의 파이프의 한가운데를 막고 있었다. 크게 보면 학교라는 파이프이고 더 크게 보면 신학교라는 파이프이고, 더 크게 보면 하늘나라 성도들의 파이프이다. 잘못은 분명히 내가 해서 A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텐데 나는 아버지께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왜 이런 일이 생겼냐고... 알려주시고 이해시켜주시고 풀어주시지 않으면 나 1:1로 대면하겠다고... (상대가 아직 준비 안 됬을 때 내가 이렇게 밀고 들어가는 것은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앞에서 거론한 수련회 이후에 건강검진이 잡혀 있었다. 건강검진에는 심리 검사도 포함되어 있어서 MMPI 검사를 하고 건강검진하면서 30분을 심리검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심리 검사에 들어가자 마자 선생님의 질문에 긴 답을 했다. 선생님이 MMPI 검사 결과는 모두 표준 안에 있다고 하시면서 설명을 안 해주셨다. 평균 안에 있으면서도 그래프가 높은 두 개가 있어서 ‘이 두 개는 어떤 항목인데 높은 건가요‘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지금 들어와서 내가 나눈 이야기가 이것을 대변한다고 하면서, 하나는 스트레스 반응 지수이고 하나는 자존감 지수라고 했다. 둘다 높아서 다른 사람이 100으로 느끼는 스트레스를 나는 10-20정도밖에 안 느낄 것이라고 하셨다.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딱 맞는 은혜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내 주변에 두 개 수치가 나와 반대인 사람은 나를 대단히 힘들어 할 수 있고, 잘못의 원인을 모두 나에게 돌릴 수도 있을 꺼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바로 그때 나의 눈을 안쳐다보고 나를 불편해하는 A가 생각났다. 그리고 A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부터는 A를 이해하고 내가 피해주고, A를 위해 더 기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동기중에서 아버지께서 마음을 주셔서 특별히 자주 만나는 B가 있는데 B가 바로 나를 불편해 하는 A에게 사역을 하고 있었다. B가 기도할 때 A가 생각났고 그래서 둘이 만났을 때 A가 하나님과 관계에 대한 부분을 등한히 하고 하나님과 사역만 했다는 것을 직면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나도 B도 한 번도 A에 대해 서로 언급한 적이 없는데, 지난주에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가 나왔다.

 

A는 드러나는 기도사역자 인데 아직도 하나님과 관계 부분은 없이 그저 사역만 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아버지께 죄송했다. 세상에는 나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큰데 내가 혼자 누리고 있었다는 마음에 죄송하기도 하고, 어렵게 짜내듯이 사역하는 많은 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자세히 알고 나서 A를 위해 기도하고 A를 배려하는게 도리어 A에게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주로 영성지도 입장에 많이 있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영성지도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제가 삶속에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번학기 어쩌면 교회 안에서 영성지도에서 피지도자로 내가 두 번 받게 된 것이 나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 피지도자일 때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성지도 시간에 은혜를 나눌 수 있었는데 도리어 그것이 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15분 동안 너무 내 이야기만 떠들 어서 지도자에게 기회를 안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피지도자 경험은 갑자기 하게 되었는데, 지도자도 준비 없이 너무 갑자기 하게 된 경우라 지도자가 너무 자신감이 없어 해서 나도 편히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피지도자인 내가 너무 교만한 것도 지도자에게 자신감이 없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이번학기 주제가 결국 교만으로 시작해서 교만으로 끝난다. 그 사이 은혜가 아주 많았고 매순간 아버지의 돌보심이 있었으나 그것 때문에 내가 참 교만했다는 마음이 든다. 방학동안 조용한 시간을 내어 다시 한 학기와 일년을 돌아보며 아버지께서 일구시는 새로운 2019년을 준비하게 되길 바란다.

영적 침체 (마틴 로이드 존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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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영적침체 개관

3. 영적침체 진단 내용

4. 영적침체 처방 내용

5. 사역의 적용 및 마치는 말

-원제 : 영적침제의 원인과 치료-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정상윤 역, 복있는 사람

 

4. 영적침체 처방 내용

18장까지의 매 장에서는 영적 침체의 원인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빠져나올수 있는가가 뒷부분에 조금씩 설명되어 있다.

 

바르지 않은 신학으로 인한 침체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므로 침체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과거의 일로 인한 후회로 침체를 맞은 경우는 현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벗어날 수 있고, 과거의 끊지 못하는 죄에서 허덕이는 경우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약속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미래 두려움으로 인한 침체일 경우는 자신의 은사를 기억하고 내안에 계신 성령이 어떤 분인지 자신에게 일깨워주라고 제시한다. ‘믿음의 고난’ 가운데서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권면한다. 또한 모든 상황에서 가장 많은 침체를 벗어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가 결국 자기 부모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우리도 이해할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나 하나님의 징계라고 느껴지는 어려움 상황속에서 우리가 바라 볼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초유의 관심은 ‘나‘ 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겠다.

 

19장부터 21장에서 제시하는 처방 방법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아래에 내용들은 각장에서 제시하는 처방 방법과 많이 일치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바울의 치료법인 기도, 간구, 감사를 제안한다.(빌4:13)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다. 원망이나 불평 등의 상황에서는 내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환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다. 21장 마지막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말씀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기반이다. 그러나 침체의 상황에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계속 시도함으로 매순간 영적 수혈을 받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순종하고 방해 되는 것들을 잘라 내고 피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영적 규칙을 세우고 매일의 영적 건강을 유지한다면 바울 같이 핍박 중에서도 평온 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5. 사역의 적용 및 마치는 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무거운 책을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읽었던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화두가 되었다. 내가 일부러 꺼낸 경우는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상황이 하필이면 읽었던 부분과 연관되어 있었다.

 

처음 만난 20대 청년의 경우는 딱 책의 6, 7장의 내용에 해당되었다. 책의 내용을 소개 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답을 잘 알려 줄 수 있냐며 놀랐다. 책을 읽었을 뿐이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선배들이 걸어온 길이고, 수 십년 전에 정답 까지 다 정리해 놓은 것을 사람들이 안 읽는 것 뿐 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무리 책을 알려줘도 읽을 힘이 없고 의지가 없다.

이 세대는 정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 같다.

그래서 참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은 설교집이었기에 만연체로 되어 있어서 나 처럼 요지를 빨리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은 읽으면서 깔끔하게 정리가 빨리 안 되서 힘들다. 말을 꽈서 하기도 하시고 이론을 돌려서 설명하기도 하셔서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책이다. 하지만 한번 읽은 내용이 머리에 깊이 남았다. 또한 정리한 내용이 현대인의 삶에서 너무 필요한 내용들이 많았다. 역자는 이런 글을 한국 기독교 정서에 맞게 전달함이 필요하다고 했다. 더 깊이 고전들의 뜻을 알아서 내가 만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라도 잘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자는 심리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싫어한다고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인간의 깊은 심리적 부분을 본인이 많이 직면해서 그런지 참 잘 표현한다. 약간 아쉬운 점은 저자가 정신적 어려움의 어느 정도 깊이 까지 가봤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은 본인이 우울증을 깊이 앓았다. 그래서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안다. 또 그 아픔의 가치도 안다. 하지만 우울증의 깊은 골을 건너는 사람에게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아픈 분이 그 시간을 잘 넘기도록 기다리고 기도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너무 아플 때는 아무것도 못한다. 체력이 아예 없으면 앉아있지도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게 힘든 청년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들은 나를 만나면 ‘기도하라고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아픈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좋은 것 먹고 기쁘게 놀다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마련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치유해주시길 혼자 구한다. 아픈 사람이 스스로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이라도 생겨야 말씀을 읽을 힘이 생긴다. 말씀이 머리에 들어간다. 그래서 저자의 책이 현대에 맞게 재통역 되야 하는 것 같다.

 

더불어 이번 학기를 지나면서 방향을 정한 부분이 있어 남기고자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부흥의 흥망성쇠를 모두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한다. 부흥의 시기에는 감사하며 급류를 열심히 탔고 쇠퇴기에는 무릎으로 하나님께 간구 했다. 그런데 현대 한국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없는 것 같다. 숫자와 상황에 휘둘리고 사람과 재정에 매여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성공’이라고 부르고 많지 않으면 ‘실패’라고 칭한다. 이번학기 들었던 어떤 과목에서 교수님이 한국교회가 망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그분의 의도는 알겠지만 초반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꾸 내안에서 ‘화(火)’가 올라왔다. 나는 사춘기 때부터 ‘화(火)’가 많았던 사람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인이 되시고 나서는 내면의 화를 인지하면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간다. 그 수업에서도 내게 올라오는 ‘화(火)’의 원인에 대해 여쭤봤을 때 나와 똑같이 한국 교회에 ‘화(火)’를 내고 있는 교수님 모습에 ‘화(火)’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모습을 보면 반응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리했다. 한국 기독교는 나의 아군이다. 아군에게 총을 쏘면 안 된다. 이상한데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된다. 총부리를 정확히 겨냥해서 쏴야 한다. 그래서 이번학기 청교도 수업을 기반으로 크게 내가 방향을 잡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에

함부로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희일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 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을 우상으로 삼은 것이다.

 

어렵다는 이 시기에도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이 땅의 교회를 위해 열심히 하고 계신 일 들을 보고 싶고, 함께 참여하고 싶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살리는 사역에... 단 한명의 기독교인이라도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고,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기도 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이번학기 또 큰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영적 침체 (마틴 로이드 존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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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영적침체 개관

3. 영적침체 진단 내용

4. 영적침체 처방 내용

5. 사역의 적용 및 마치는 말

-원제 : 영적침제의 원인과 치료-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정상윤 역, 복있는 사람

 

1. 들어가는 말

신학교에 와서 관심이 커진 분야가 청교도 였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 수업을 피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강좌를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청교도의 쇠퇴였는데 한국어로 자료를 찾다 보니 적합한 자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른 주제로 하려고 하다보니 ‘영적침체’ 발표 당시 할당된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조금 더 자세히 ‘영적 침체’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 보기로 했다. 

 

2. 영적침체 개관

1964년 저자가 웨스트민스터 교회 주일 오전 예배에 썼던 설교를 모든 설교집이다. 자신이 불행하면서 타인에게 전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없다고 서두를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나에게는 선교지에서 이것이 큰 화두였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으로 만족 할 수 없다면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가?

나는 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는가?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는데

나랑 예수님은 무슨 관계인가?

 

아이러니칼 하게도 선교 훈련에는 이런 과정이 없다. 당연히 선교사 지망생은 이런 것들을 직면하고 인지하고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훈련 받을 당시에도 많은 선교사 지망생들이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더 필요하지만) 멍에가 무거웠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속이 시원한 이유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알 것 이라고 ‘치부’하고 지나가는 많은 사항들에 대해서 콕 찝어 준다. 얼렁뚱땅 넘어가고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직면하게 도와준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의사 답게 초반에는 영적 침채의 원인을 분석하고, 뒷 부분에서는 치유 방안을 제시한다. 영적 침체의 일반적인 원인으로는 심리적, 기질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본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심리학을 ‘감정 억제’정도로 치부한다. 감정을 억제 하는 것이 내적 불안의 상태보다 더 심각하다고 하며 심리학을 신뢰하지 못하고 바울 심리학이라고 본인이 칭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영적 침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상태, 그리고 마귀의 존재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마귀가 계속 적으로 영혼을 공격하므로 침체에 빠지는데 저자는 이것을 불신앙으로 정의한다.

저자의 직면하는 자세나 깊은 묵상과 끌어올림 등에는 많이 동의했지만 역자가 말한 것 처럼 우리시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이 깊은 우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많은 ‘통역’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영적침체 진단 내용

영적침체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들을 설명한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은 알지만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어들이 정확히 삶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 또한 알더라도 의지가 (혹은 마음이) 분열되어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예화로 다 말씀하신 부분이다.

 

결국 이러한 부분은 교리와 관련 되는 부분 인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알려하지 않고, 마음을 닫고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해 하더라도 결단하고 따라야 하는데 더불어 결단하지 않는 것도 영적 침체의 원인이다. 이것은 정신과 마음의 의지가 약한 것 으로 연결 되는데 저자는 또한 이것 또한 침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지은 특정한 죄나 그 죄가 남긴 모습과 결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원인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또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의지가 약한 것 과도 연결이 된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이전의 실수나 결과로 계속된 후회를 하는데 이것은 6장과 7장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 원인들은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첨예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감정으로 인한 침체 부분에서는 ‘비참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존할수 없는 두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4장부터 7장까지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는 내용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들어 낼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라고 조언한다.

 

9장부터는 ‘믿음의 시련’으로 인한 침체에 대해 논한다. 12장 부터는 두려운 마음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한 침체, 14장 부터는 다시 ‘믿음의 시련’에 관련된 침체 내용이다. 매 장에서도 침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디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19장부터 21장 까지의 내용은 침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영적침체> 20장 자족하기를 배움1

21장 궁극적 치료

■원제 : Spiritual Depression : It's cause and cure / 영적침제의 원인과 치료

. 웨스트민스터 교회 주일 오전 예배 강해 설교문 (1964)

. 불행하다고 느끼는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기독교를 권장 할 수 없다.

.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쁨은 복음 전파에 가장 강력한 요인

.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의 불행, 고난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게 되면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정상윤 역, 복있는 사람

 

20장 자족하기를 배움 (빌 4:10-12)

- 배경 : 빌립보 교회에게 감사표현 but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없음

- 어떤 형편에든 자족함 (육체의 가시, 감옥) => 환경에 지배받거나 좌우되지 않음

ex) 행 16장 바울과 실라 : 감옥의 악조건이 두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함 (행16:25 기도하며 찬미하더라)

- 최선을 다해 환경을 개선 할수 없다면 환경에 지배 받지 말라 (환경이 행불행을 결정하지 않도록)

- 삶의 최대 과제 : 원망, 불평, 심령의 쓰라림 없이 비천의 상황을 참는 법, 걱정 근심하지 않는 법

- 바울은 “배웠다”고 주장함(v11) : 시련과 환난에서 영향 받지 않음

- 그리스도인의 삶 : 환경이 내적 평안과 기쁨에 영향 주도록 허용하지 않으면서 사는 법

 

1. 바울의 자족하는 상황

2.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나... : “배우게 됨”

   . 육체의 가시 3번의 간구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경험으로 이해에 이르게 됨

   . 바울의 자족함 배움의 단계 : 요16:32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 경험

(2) 논리적 추론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 하나님과의 관계, 주권인정, 신뢰,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3) 개인적인 친밀한 지식이 쌓임

 

결론. 배우기

(1) 예수님 의지하기를 / 그리스도 알기를 / 영적 교통을 가지기를 / 그 안에서 나의 즐거움을 발견하기를

(2) 모든 상황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존해서 살기 :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으로 다른 모든 것에 초연

☞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 : 이러한 복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의 야망이 되길!!

 

21장 궁극적 치료 (빌4:13)

- 그리스도인 :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 (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_henry scougal )

,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들어가서 생명과 능력이 있는 사람(인간의 승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에 기초 한다)

-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 나, 그분의 바른 위치 깨닫기 :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바른 관계와 균형

 

. 잘못된 관계의 경우

  A. 我 강조 : 스토아, 힌두교, 불교 신자의 정신수양, 의지력 개발 (시간적 여유 있어야 가능)

  B. 我 무시(無我) ≠ 나의 인격이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할 수 있다._갈2)

. 그리스도와이 만남과 교제 유지하기, 아는데 전념하기, 그가 말씀하시는 바 순종하기, 방해 되는것 피하기

. 기본적 영적 규칙들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능력은 없을 것이다.

.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 핍박 중에도 바울같이 평온하기 원하면 그처럼 살아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영적침체> 16장. 시련

18장 하나님의 훈련장에서

19장 하나님의 평강

 

■원제 : Spiritual Depression : It's cause and cure / 영적침제의 원인과 치료

. 웨스트민스터 교회 주일 오전 예배 강해 설교문 (1964)

. 불행하다고 느끼는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기독교를 권장 할 수 없다.

.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쁨은 복음 전파에 가장 강력한 요인

.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의 불행, 고난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게 되면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정상윤 역, 복있는 사람

 

16장 시련 (베드로전서 1:6-7)

- 모순 : 기뻐하고 vs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근심

- 예수 믿은 후로 완전 평안하고 고민 없다는 경우 : 신약적 기독교가 아님(이단 주장 내용)

- 그리스도인 생활의 영광 : 자연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것

- 과업을 놓고 있을 때 여러 경험을 통과 해야 한다. : 요셉, 바울(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험과 시련의 때)

- 대원칙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대원칙에서 출발)

- 믿음 : 아래와 같은 믿음의 중요성 때문에 완전하기 원하심

   ∴ 신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함

. 사람과 하나님 연결하는 특별 원리

. 이세상과 오는 세상의 결합

. 죄로 죽은 인생을 그리스도안의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놀라운 신비적 원리

- 참된 믿음 (진짜 신뢰) : 신뢰의 요소가 개발 되는 것은 시련 통해서 가능

. 시련은 잠시 다녀가는 것일 뿐 ∴ 모순 상황 : 잠깐 시험이지만 크게 기뻐함

-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옷 입혀 주심 : 믿음이 클수록, 순전할수록 (고후 5:10 믿음으로 살았는가!!)

 

18장 하나님의 훈련장에서 (히 12:5-11)

- 성화 : 피동적인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님

1. 시련과 환난과 징계에 대한 잘 못된 반응 : 세 가지 중 하나에라도 걸리면 고난이 유익 되지 않음

  1) (v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 주님께로 향하는 주의를 기울이기를 거절하는 것

   2) (v5)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낙심의 상태

   3) (v15)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 쓴 뿌리

2. 시련과 환난과 징계에 대한 올바른 반응

   1) A. (v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 어린 아기가 아닌 아들같이 행동하기 (☞ 기억하기 )

      B. (v5)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 말씀 기억하기 (불신자와의 차이점)

   2)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라

   3) 논증하라 : 성경이 나를 이론적으로 설복하도록 하라

3. 말씀 토대에서 생각할 것들

   1) 자신 검토, 직면 : 왜 이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나는 어딘가에 잘못 되었나 (시 119 )

   2)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기

   3) 구체적 훈련 시작하기 (v12-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고침을 받게 하라

   4) 모든 힘을 다 기울여 거룩함을 열렬히 사모하라 (v14)

 

19장 하나님의 평강 (빌 4:6-7)

주님의 기쁨을 뺏아가는 환경의 폭군 : 평안히 눕고 잘 수 없음 (cf) 다윗의 임마누엘

 

- 바울의 환경과 여건의 폭군 다루는 방법

1)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부정적 금지 명령)

2) (v6) 너희 구할 것을..하나님께 아뢰라 : 기도, 간구, 감사

3) 하나님의 약속 기억 !!

. 복음의 영광 :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

∴ 환경과 상관없이 나는 바로 서 있을 수 있고 여전히 전진 할 수 있다는 “사실”

 

. 약속 : 구할 것을 아뢰라.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 마음과 생각(불안과 근심 생산) > 하나님의 보호(수비, 경계) > 나의 생활

백범일지 (김구/이펍코리아)

* 이펍코리아의 백범일지를 기반으로 정리한 자료입니다.

 

◆ 인적사항

. 본명 : 김창수 ( 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 호 : 백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전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바램)

. 가족관계 : 딸 2 (死), 아들 2 (큰 아들 死), 아내 일찍 死, 어머니가 아들들 키워주심

. 주요업적 :

  . 18세 동학 황해도 선봉장

   . 교육사업 : 무료 교육

   . 무관학교 설립 : 감옥 17년형 – 감형 5년 (도둑떼 기술 배움)

   . 임시정부 대표 2회

 

김구의 <백범일지> 시리즈, 이펍코리아

1. 성품

(1) 긍정적

. 단점이나 오점이 될 것도 모두 드러냄 : 집안의 추한 내력, 자신의 어린시절 잘못 모두 밝힘

. 과거시험 떨어지고, 관상도 나쁘고...그렇다면 마음좋은 사람이 되기로 함.

. 일재시대 조선 경찰들이 아직은 민족성이 있다고 감옥에서도 계속 칭찬, 감탄 (그럴 상황이 아닌거 같은데..)

-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19살에 일본 장군 죽인 경력을 30대에 교육사업으로 붙잡혔을 때 이전 죄목이 없음

. 일본 관원들 보면서 큰 인물을 못알아봄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게 되었다.

. 17년형 받고 ‘몸은 왜의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했다’

 

(2) 착함

. 마음 좋은 사람의 기준...

(정의란 무엇인가...: 탈옥할 때 혼자 조용히 나갈수 있었는데...)

 

(3) 겸손

. 모든 높은 자리 진짜 사양 : 결혼, 임시정부, 동학 선봉장 등등..

 

(4) 용기

. 최대한 같은 민족사람에게, 타인에게 해를 안주는 방향으로 자기가 감당

. 재판 자리에서 일본인에게 호령 (논리로 싸움)

. 대동강 2월 언강 지날 때 ‘어머니 저는 안 죽습니다’ : 바울 같이 (국모원수 갚으려고 왜놈을 죽였노라)

( 죄수의 몸, 병사들의 인정, 서울 도착 전 까지 말하지 않기, 바울 같은 감옥생활)

. 긴급한상황에서 정신차림 : 왜놈죽이기

 

(5) 주제파악

. 못생기고 무식하니깐 분수에 맞는 것 이상을 원하지 않음

. 임시정부 청원시 문파수로 신청 : 몰래 공무원 문제 풀어봤는데 합격권에 못 들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 한다. 나는 감옥에서 청소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나라가 독립해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6) 자기 객관화

. 감옥에서 자신의 심리가 점차 변하는 것을 느끼고 기록

(예수님 따라 용서 -> 일본은 무조건 미워하고 반항, 파괴하려는 결심)

.

2. 관계 : 가족, 일...etc

(1) 가족

. 부모 : 두 번의 옥중생활 부모님의 인정과 옥바라지 (부모님의 자랑스러워함)

. 아내 : 결혼하고 금방 옥중생활 2-3년 같이 있을 동안도 부부싸움, 넷째 아들 출산후 병사(상해)

. 자녀 : 첫딸은 7개월, 둘째는 7살, 큰 아들도 중국에서 병사, 임시정부 관계로 어머님이 아들 돌봄

(백범일지 1편은 어린 아들들에게 남기는 아버지의 행적)

(2) 연합

. 임시정부 시절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계속된 분열에서 일당 통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

. 탈옥 때 의리 지킴

 

3. 기술

(1)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

. 19살 때 일본 장군을 파선해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객방에서 한번에 죽임

. 감옥 탈옥시 미리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음. 벌써 탈옥할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안하고 있었음.

(평정심, 결단력, 관찰력)

. 일본의 항복으로 임시정부 거쳐 불명확 할 때, 국민앞에 정부를 바칠 때 까지 임시정부 유지함을 결정

(그러나 남쪽의 미국정부에서는 임시정부의 이름이 아닌 개인으로 입국하라고 함. 그것도 아랑곳 없음)

 

(2) 친구를 잘 사귐

. 어디서나 마음으로 먼저 다가감

. 중국어 못해도 길에서 중국 사람과 친구 되고 (의형제)

. 독립투사인데 도둑 우두머리랑 친해져서 큰 조직을 꾸리는 방법을 배우고 싸움 기술도 배움

 

(3) 논리적, 설득의 기술

. 재판관, 회중, 분열된 인사들을 내편으로 만들기

 

(4) 확고한 기준

. 배우자 선택 기준

. 일할 때 목표와 방향의 기준 : 청렴

 

4. 비전

(1) 환경에 맞는 나라를 만들라

. 주자도 아니고 마르크스도 아닌 우리의 역사와 민족과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

. 자기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만 따르지 말라

 

(2)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을 높이지 않고는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3) 목숨은 빼앗아도  정신은 빼앗지 못한다.

평신도를 깨운다 (옥한흠)

오정현 목사님이나 강준민 목사님의 문체는 어릴 때부터 읽어서 그런지 대단히 익숙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좀 불편함이 있었다. 옥한흠 목사님 저서를 처음 읽는 이유도 있겠지만 오래된 책들 같은 경우 많이 재편집해서 내는데 오래된 문체나 표현 방식이 나에게 불편했던 걸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기록한 것을 훑어보면서 때로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이 불편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으니 불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편협함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었을 상황들이 생각났다. ‘편협’ 말고도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을 살폈다.

 

모든 저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근거자료를 들이댄다. 저자도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근거로 정리하고 많은 자료들을 보였는데 왜 나는 불편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 반론도 참 많았고, 의문도 참 많았다. 동의도 많았는데 전자가 더 많았서 그런지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있다. 이 글도 일주일이 지나면서 계속 퇴고 하고 있다.

 

평신도와 목회자를 평민과 귀족(?) 같은 개념으로 자꾸 나누는 부분들이 생각났고, 훈련 노하우 및 여러 가지 방법론을 설명한 곳에서 기도하고 구하는 솔루션은 하나도 없고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인본주의 적인 방법들을 제시하신 것 같았다.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선배님을 너무 비평하며 읽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방법들은 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안 먹히는 방법이다.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약간 비인격적(?, 그시대에는 맞았겠지만..)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불편했다. 그리고 자꾸 ‘인본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었다. 그래서 또 불편했다. 존경하고 싶은 분에게서 자꾸 안좋은 부분을 보게 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한국교회가 부흥을 하던 시기에 한국 교회를 비판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단하는 건강한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잘하고 있을 때 자아비판 하기는 힘드니깐. 물론 책에서 진단한 문제점은 지금도 여전히 문제인 것 같다. 1980년대 책이 쓰여지고 나서 지금까지 3허-허수, 허세(교인 많은데 세상에 영향력이 없음), 허상(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아 불신자와 구별이 없음)-는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허상 부분을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했다. 허세와 허상을 전체 크리스찬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고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한 것이 불편한 마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읽는 내내 자꾸 마음에서 반론이 올라와서 책 읽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동의되는 책은 속도가 엄청 빠른데 한 달을 다 되어 가도록 3부 초반 까지 밖에 못 읽었었다. 4부는 실전의 이야기라(여전히 반론이 일어나는 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속도가 빨라져서 다행이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훑을 뿐 아니라 ‘제자도’의 정당성과 ‘평신도’에 초점 맞추기 위해 초대교회의 설명들이 있었다. 그런데 적용 부분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이 (특별히 목회자가, 그리고 평신도 리더가) 노력해야한다는 강조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불편했고 물음표를 날렸다. 살아계시다면 마나서 여쭤볼텐데..

 

교회의 존재 이유를 예배라고 정의함은 다른 수업에서도 계속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제자훈련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평신도가 날마다 사회에서 성과속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을 가르치는 것” 이라고 쓰셨는데 사실상 책의 내용에서는 ‘사회에서... 제사장으로의 소명’을 수행하는 부분보다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교회의 봉사자를 키우기 위한 제자훈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가 되고, 정말 크리스찬들이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 원하며, 인격이 예수님 닮도록 한다는 취지와 다른 결과들이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앞 세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리더를 너무 중요시한 리더 중심의 교육이었다.

 

책 읽는 내내 내가 연변에서 하던 TEE 성경공부가 생각났다. 물론 리더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모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선생님이 되고 학생이 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위해 기도 하게 되며,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모임이 TEE였다. 저자가 말한 제자 훈련과의 차이점은 목회자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옥목사님이 살아계시다면 기도하며 훈련하고 훈련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개정판을 내시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부분은 시대적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부정적 발언에 마음 상하는 분이 없기를...^^

산둥 수용소(랭던 길키)

 

‘왜 GMTC(한국선교훈련원)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안 한거지?’

내내 질문이었다.

나는 2009년에 GMTC 훈련을 받았고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다. 선교사,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을 꼭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지... 내가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읽기에는 아직 그릇이 안 됬었을 것일까... 그동안 선교지에서 했던 잘못들이 생각나면서 이 책을 읽고 갔다면 실수들을 좀 덜하고 나를 직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의도하지 않게 책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되뇌이고 하는 시간을 갖게 됬다. 마음속으로는 ‘산둥수용소’ 리플렉션을 참 많이 썼는데 기록 할수 없을 때 한 생각들이어서 좋은 글귀들은 다 사라진 듯 하다. 글귀는 사라져도 내용은 마음에 계속 남아있다. 이 책을 읽은 3주간이 또 나에게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다시 객관적으로 나를 자주 바라보는 연습에 노출된 시간이었다.

 

수용소 초반 저자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기에 종교도 가진자들의 여유일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과정은 내가 20대 때 재정적, 물질적 안정감이 없던 시절(생각해 보니 지적 안정감도 없었음), 깊이 고민했었던 과정이었고, 과학(?) 하는 사람으로서 “ ‘실질적인 것’(과학기술 개발, 물질적 필요의 채움)이 중요하지 왜 철학이 중요하다고 하지?”(실사구시, 중국 공산당이 강조하는 것인데 나의 20대 때는 공산당과 사고방식이 비슷했던 것 같다.) 하던 1차적 질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연길에서 10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또 다시 생존의 문제에 봉착했다. 40대가 되어서 다시 성장기 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이상학에 집중하지 않고 ‘부르심’에 집중했다. 나의 생존이 부르심과 연결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안에 존재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처리하는데 약 1년 정도 정리와 구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전에 얼떨결에 신학교에 왔다. 신학교에서의 2년,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연습이 재미있어 진다.

 

수용소에서 더 이상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하나의 사회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부분을 읽을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바라시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들이 있는데(부르심, 안정감있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부모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보다 돈을 잘 벌수 있는 일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red ocean이 생기고 사람들을 소유 가치로 평가하게 된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수용소 사람들은 힘들었겠지만 저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깊이 사유한 사람들은 수용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나 또한 (수용소 만큼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에 집중하려고 다시 한번 노력하면서 자유함을 경험했다.

 

수용소에서 시간이 오랠수록 사람들은 점점 책임이 많은 중요한 자리는 서로 피하려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버지 제가 거기 있었다면요?’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부르심’을 생각했었다. 부르심이 있다면 내가 잘못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수용소 초반에 수녀들과 수도사들을 위주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내가 해야 할 일과 있을 곳을 알게 된다.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화장실 청소를 했을까? 수용소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초기 화장실 작업, 만약 나 혼자라면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말미에 식당이나 행정을 책임지는 일의 경우나 에릭 리들처럼 청소년들을 상대로 사역해야 하는 일들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 한 두명만 주셔도 아버지 뜻이라 생각하고 쉽게 순종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평가하며 그곳의 선교사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자주 ‘내가 지금 거기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수용소 안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타인을 수용할수 있으며, 얼마나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나? 나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만 무게를(가치) 둘 수 있는가?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상황에서의 나의 반응을 계속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길키가 평가하던 선교사들과 내가 다름이 없음을 여러 번 하나님께 회개했다. 어쩌면 그들처럼 나도 하나님의 뜻과 바램, 인류의 공영, 나의 존재의 이유 보다 지금 나의 안위와 내 배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신 지적능력과 언변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격상, 직업상, 강의 시간에 절대 집중한다. 때로 강의 시간에 컴을 쓰시는 분들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가 거슬릴 때가 있다. 짜증이 난다. 그래도 미워하면 안되니깐, 그런데 궁금하니깐 무슨 작업하나 쳐다보면 모니터는 강의와 상관없는 내용들이 있을 때가 있다. 1학년 1학기 때 그 부분을 넘어 가는게 힘들었다. ‘다들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왜 다른 사람(교수님)을 무시하지? 왜 속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들이 불쌍해 보이고 안되 보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음이 평안하다. (시끄러워서 짜증나는 건 압지께 풀고..) 내가 그분들을 정죄한다면 또 수용소의 선교사가 한명 늘어나는 것이 된다.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더 사랑해야 하겠다.

 

책을 읽던 중 나보다 어린 싱글 사역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첫째 나는 질문한 친구보다 정서적으로 외로움을 덜 타는 기질인 것을 솔직히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봉착해 있어서 감정이나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개발되지 않은 것이 나의 단점이자 강점이다.

둘째,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중보기도’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청중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긴장 하고 있는 내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왜 긴장하고 있지? 그냥 내가 하는 기도를 안내 하는건데?’ 하나님 앞에 머물러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청중들 때문에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정리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 여디디야’였다. 내가 한사람 앞에서 강의하건 만명 앞에서 강의하건 나는 ‘지금’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편한 부분이 없다면 내가 떨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그래서 강의 준비를 진짜 열심히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요즘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과 영성을 다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전문성과 영성이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 있으나 만명앞에 있으나 하나님앞에 한사람인 것 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책의 끝부분을 읽었다.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에야 모든 것(자신의 안위/복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이기심, 안정감, 타인과의 비교)에 초월하여 평안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나의 삶이 현재 ‘하나님 안에서 살기’ 연습을 하고 있는 시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완전 몸으로 체득되고 저자와 둘이 논쟁을 벌이 듯 읽었다. 책을 아껴서 읽는 편인데 이번 책은 저자와의 논쟁으로 깨끗하게 읽지 못했지만 자주 읽어야 할 인생 책을 만난 것 같아 감사하다.

 

수용소에서 모두가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할 때 (잠시) 평안이 임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떠오르는 부분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HERESY_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Alister McGrath)

교회가 신앙을 지켜온 치열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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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저자소개 

2. 내용 정리

  2.1 이단의 기원

  2.2 이단의 배경 

  2.3 고전적 이단들

  2.4 이단의 발생 원인

  2.5 정통, 이단과 권력 

  2.6 이단과 이슬람의 기독교관

3. 후기

 

 

2.4 이단의 발생 원인

이단이 발생되는 가장 큰 원인은 정통 교리를 현재의 문화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공존과 삼위 일체 교리 였다. 문화를 잘 적용한 경우도 있었다. 저스틴은 헬레니즘안에서 공감 할 수 있도록 로고스를 변증용으로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엘리트들이 접근하기 쉬워졌으나 기독교의 주요 개념들이 플라톤 주의와 대등한 개념으로 전락되기도 하고, 기독교안에서 플라톤주의를 증대시키는 경우도 될 수 있다.

 

인지 종교학은 믿음의 형성과 발전을 연구하여 믿음의 기본 인지 구조 탐구가 목적이다. 이에 의하면 이단발생과 연루된 주요요인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당대의 사회문화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될 때,

둘째는 시대의 이성과 문화에서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 문화에서 성육신의 교리가 지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에 아리우스주의가 발생하고, 교부시대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문제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시기에도 논란이 되었다. 16세기에 소키누스주의로 알려진 소치니는 반삼위일체론을 제기했다. 또한 과학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단적 사고가 발생되는 등 특정 공동체와의 긴장관계가 발생하기도 한다.

셋째는 도나투스의 경우처럼 사회적 정체감이 종교적 정체성 확립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네 번째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대상 문화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의미와 용어로 바꿔서 말하게 될 때(상황화) 대상 문화에 적용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개조 하는 경우이다. 예로,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려했고, 마르키온은 유대교를 버리라고 설득한 경우이다.

다섯 번째는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윤리적 기준이 너무 관대하거나, 억압적이어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엄격한 도덕주의에 맞춰 신학을 변경했고, 터툴리안을 매혹시킨 몬타누스주의도 정통 기독교에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정의했다. 정통 기독교가 특정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 될 수 있는 문제들 이다. 터너는 이단에 대한 오중 분석을 제시했다. 희석, 절단, 왜곡, 의고체, 배출의 다섯가지 인데, 적응을 아예 거부하던지(의고체), 여러 가지 모양으로(희석, 절단, 왜곡, 배출) 사회에 동화 되는 것이다. 특정 사회(예. 전도대상 문화)와 관계를 맺고 깊이 들어가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단으로 치우 칠 수도 있는 이러한 상황들 덕에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항상 신학을 점검하며 상황화를 시도해야 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HERESY, 교회가 신앙을 지켜온 치열한 역사>,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5 정통, 이단과 권력

발터 바우어는 정통과 이단의 판정 사이에 권력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단을 ‘역사적 싸움에서 패배한 정통‘이라고 표현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정통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수 있다고 말한다. 크리스찬돔 시대에는 정치, 사회, 경제에 기독교의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이들의 주장에 힘을 더 했다. 포스트 모던사회에서 이단을 매혹적으로 생각하게 된 배경이 이러한 이유들이다.

 

교부시대에는 기독교가 억압받았기에 정통을 강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이 떠났다. (ex. 발렌티누스, 마르키온) 국교화 이후 정리되지 않은 기독교의 분열이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 할까 우려한 콘스탄티누스가 도나투스 논쟁과 아리우스 논쟁을 정리하는데 나서게 된 것이 발터 바우어 논지의 배경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포스트 모던에서 정통은 억압이고 이단은 자유롭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단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여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정의 되어 발도파, 존 위클리프, 후스 등이 이단으로 판정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하 개신교) 또한 위의 정의에 의해 이단으로 찍혔으나 개신교 측에서 초기의 성경해석을 회복했으므로 개신교가 정통 신앙과 정통과 이단의 견해까지 회복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후에 발생한 후안 데 발데스의 반 삼위일체론은 이단으로 정죄했다. 역사적 예가 없었던 자콥 아르미니우스의 경우는 투표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단이란 ‘교회가 용납 할 수 없는 것 으로 판단한 가르침’으로 정의된다. 이에 반해 존 밀턴은 개인의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정통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이단 결정 여부가 권력과 관계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인정되나, 권력에 의해 이단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오늘의 문화가 이단이 덜 도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매력을 느끼지만 역사속에서 몬타누스나 영지주의의 경우는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도덕적으로 엄격했다. 서양에서 이단에 대해 호의적인 이유는 이단 논쟁을 급히 마무리 하려 했다는 의심과 정통이 권력의 결과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2.6 이단과 이슬람의 기독교관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오해하고 있다. 코란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하나님, 예수, 마리아이며, 그들을 예배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기본 사상에 대한 코란의 설명은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성행했던 변종 기독교들의 영향이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이런 사상이 들어있는데 나그함마디는 아라비아 반도 가까운 곳에서 발굴 되었다. 결국 코란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이단적 견해들이다. 이런 오해들이 정리되면, 두 종교 사이의 오해가 완화 될 수 있지 않을까?

 

3. 후기

책을 읽으며 워드에 정리한 것이 15페이지가 나왔다. 책을 통해 배운 것도 많지만 생각도 많이 했다. 적은 지면에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책을 만났고, 좋은 믿음의 선배를 만난 것 같아 위로가 되고 이 땅에서 남은 삶을 살 용기가 생겼다.

 

홍정길 목사님이 작년 10월 HOPE 선교회 이사장 이임식 말씀에서 ‘인간에게 모두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신인가?’라고 말씀하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 나의 작은 시각과 사고 안에서, 이해가 안 되서 계속 묻고 조금씩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아간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 알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아는 것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많은 이단의 기원이 된 것 같다.

 

변하는 문화(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혹은 문화의 눈높이에 맞춰 전도하기 위해 기독교의 본질을 잘못 수정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가장 두려웠던 부분이 상황화 였다. 신학을 하지도 않은 내가 혹여 라도 잘못 전할까 항상 조심했다. 중.고등부때 선생님이, 내가 들어도 아닌 것 같은 삼위일체 설명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께 틀렸다고 지적은 못했지만 내 안에서 ‘저것은 아니다’라는 게 확실했다. 나름 쉽게 잘 설명하려던 선생님이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단과 연류 되어 있는 압박요인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상황화를 해야 하고 어디까지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가는, 철저한 신학적 배경으로, 확실한 신학적 멘토(교회)에게 검증을 받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20-30대 미혼을 주로 만나고 있는 나로서는 ‘특수한 문화 세대’인 그들에게 상황화가 필요하다. 혼전 순결과 미혼모 출산 등은 사회문제이지만 이미 중국에서 받은 문화 충격으로 개인적인 신학의 문제로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한국의 청년들, 교회 안에서도 일반화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의 현재의 청년들에게 말씀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으나, 저자 소개에서도 언급했던, 왜 알리스터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긴장의 완화를 위해 노력(p332) 하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에 관한 기독교의 관점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HERESY_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Alister McGrath)

( 교회가 신앙을 지켜온 치열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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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저자소개 

2. 내용 정리

  2.1 이단의 기원

  2.2 이단의 배경 

  2.3 고전적 이단들

  2.4 이단의 발생 원인

  2.5 정통, 이단과 권력 

  2.6 이단과 이슬람의 기독교관

3. 후기

 

1. 저자소개

기독교 철학과 조직신학 수업시간에도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기독교 철학시간에 유신론적 진화론에서 많이 거론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천사에서 릭 워렌이 ‘이 시대에 저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과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하라고 했던 이야기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해가 된다. 처음에는 책을 빌려서 읽다가 결국 나도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저자는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취득후에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이야기를 조직신학 때 들었다. 약간 의아 했던 바로 그 분이 쓴 거의 400페이지 분량을 내가 읽었다니... 찾아본 자료들에서 그는 ‘천재’라 표현되었다. 과학, 신학, 문학 분야에 각각 박사를 취득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 연구의 권위자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천재성을 사용한 저자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무신론자로 대학에 입학했고 친구를 통해 신학에 흥미를 가지면서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영국에서 학위를 받고 캐나다 리전트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제임스 패커의 수제자이며, 제임스 패커와 존 스톤트를 잇는 복음주의 신학자에 속하며 청교도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 번역된 저서들로는 ‘하나님의 칭의론’,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제임스 패커의 생애‘, ’기독교 교리 이해‘ 등의 책이 있고, 이 책들로 많은 상을 받았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는 9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으로 개신교의 역사, 종교, 문화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미래를 진단한다. ’도킨스의 신‘, ’도킨스의 망상‘ 등을 저술하기도 하고, 도킨스와 직접 신의 문제를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 한 관계로 한 가지 큰 의문이 있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기독교관을 자세히 논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긴장이 완화되기를 바란다 했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화를 ‘굳이’ 바라는 이유가 무얼까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HERESY, 교회가 신앙을 지켜온 치열한 역사>,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 내용 정리

2.1 이단의 기원

 

1부에서는 이단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설명한다. 이단은 ‘정통이 되려다가 실패한 집단‘(53)으로서 이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고 기독교에 열심히 있었던 사람들이다. 시대와 문화에 맞추어 전도에 적합하게 교리를 조절하려고 했던 그들의 노력은 본질적인 부분을 수정하려는 바람에 이단이라고 명명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원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단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heresy 는 헬라어로 hairesis, 선택, 선호하는 경로의 의미가 있었으나 2세기에, 이단vs정통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정통에 반대되는 사상을 개발한 학파를 의미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단이고 정통이라고 결정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정당한 발전인가? 등에 대해서 이 책에서 논한다.

 

2.2 이단의 배경

이단의 배경이된 기독교의 다양성과 이단들의 초기 발달사를 논한다. 초기 기독교에서의 다양성이란, ‘무엇이 권위 있는 자료’인지 알수 없는 불확실성 가운데, 정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성이다. 또한 성경안에서도 같은 사건의 다양한 표현과 해석의 다양함, 예배의 다양성이 초기 이단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부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봤을 때는 기독교가 통일된 하나의 공동체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단은 외부인인가 내부인인가? 대부분의 초기 이단들은 교회가 주변에 잘 융합하고 관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하는 가운데 발생했다. 기독교가 정립되지 않았을 때는 다 같이 기독교였는데, 준비 없이 국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 정치 권력의 통일성에 저해가 될 우려가 있어서 정치적 조급함으로 교리가 정리되었다. 이런 상황을 바우어는 이단이 권력집단에 의해서 승인 받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그들의 견해가 부적절하다는 여론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이 배척받은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지, 신학적 억압으로 인한 희생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단 자료들은 로마시대에 제거되었고,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기독교의 통일성을 위해 교리를 정리하던 클레멘트, 이그나시우스, 저스틴등의 저술에 나타난 정보들이다. 이단이라는 용어도 4세기에나 사용하게 되었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지적 결함을 지닌 기독교의 한 유형으로 신앙에 파괴적 영향이 있는 가르침들’을 의미했다. 이는 기독교가 이러한 지적 결함을 가지고 미래에 살아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로 정통은 이단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이단을 결정할 것인가. 교회들이 교리를 정의함에 따라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론들을 파악 할 수 있었으며 예배와 윤리와 신학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결정 인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겉모양은 기독교의 모양이지만 본질적인 기독교 정체성과 틀린 것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3 고전적 이단들

고전적 이단은 5세기까지 교부시대에 발생된 이들로 기독교가 지리적, 지성적으로 확장되면서 그들의 문화에 맞게 기독교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과정에 생긴 것이다. 이들은 주로 신학적 탐구과 열정 때문에 발생한 이단들인 반면 중세시대에는 교황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들이 대중에게 영향력이 있을 때 교회의 위협 세력으로 결정되었다.(후스, 발도, 롤라드)

 

이 시대의 에비온주의는 유대교를 배경으로 예수의 정체성을 유대식으로 해석하여 낮은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헬라시대에 아리우스 주의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두 이단이 모두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는데 아리우스는 헬라식 사고방식 안에서 접근이었고 에비온주의는 유대교 사고방식 안에서 해석이었다.

 

도세티즘은 예수의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을 인정 할 수 없고(이슬람과 유사), 신성과 인성이 단일 존재에 공존 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의 헬렌’과 같은 방식으로 영웅을 둘로 만들어 버린 경우이다.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경험으로 하나님 아는 것을 옹호하며, 기독교 내에서 시작했지만 영지주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발전시켰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같은 예배와 성례에 참석하지만 성경 해석을 다르게 하므로 이레니우스는 이들을 교회를 위협하는 사악한 집단으로 묘사했다. 나그함마디에 세트파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발렌티누스주의가 주장하는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세트파 영지주의에서는 세트만 아담의 아들로 영적 인류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세계는 악하거나 무지한 창조자의 활동이 낳은 열매이므로 구원이란 신자들이 물리세계에서 해방된 후 빛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마르키온 주의는 구약의 하나님(열등, 결함)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므로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므로,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연관성을 모두 끊어야 성장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 리더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다른 종교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영지주의와도 연관이 있고, 예수의 인간측면을 무시하는 도세티즘과도 유사하다. 발렌티누스는 성경해석을 잘 못하고 마르키온은 성경을 마음대로 편집했다. 1921년에 독일의 폰 하르낙이 마르키온 복권을 시도했었다.

 

이러한 초기이단들은 물질은 악하다는 해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했으며, 모두 정경화 작업 전에 발생했다가 정통에서 거부되었다. 이러한 이단 분별은 저스틴이나 대부분의 성직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2세기 후반 정경화 작업등으로 정통이 만들어 짐에 따라 이단이 서서히 약화되었으나 기독교 국교화 이후 교리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단 논쟁이 생겼다. 로마의 사회문제이고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세워졌다. 국가의 통일성 위협을 두려워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국교인 기독교가 교리로 분열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 논쟁이나 도나투스주의 문제를 황제가 로마 원로원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아리우스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유일신론에 맞추어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예수님이 단지 피조물 가운데 으뜸인 존재로 피조물로 정의한다. 이것이 교육수준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 창조물을 구속할 수 있고,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면 그를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반박했다. 이와 같이 이단들의 특징은 겉은 신앙의 모습이지만 내적인 정체성이 부족하다.

 

도나투스 주의는 국교화 이후 핍박당시 배교한 성직자들에 대한 문제처리 과정에 발생했다. 베르베르 왕국을 대표하는 누미디아 사람들(원주민)은 배교한 성직자의 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가톨릭파(로마 통치 지지)는 성례는 예수님에 의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집행자인 성직자의 도덕성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리했다. 드러난 문제는, 교회 및 성례 관련 문제 인 것 같지만 그 뿌리는 은혜의 직무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공로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였다. 더불어 도나투스 주의는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문제로도 보이는데, 신학적 문제가 정치적 긴장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인간 본성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왜곡한다. 펠라기우스는 은혜를 통해 죄 없는 길을 택하며 살 수 있고, 예수님께서 이미 본을 보여 주셨으므로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련된 자기 수양을 제공하므로 로마인들에게 공감대가 있었다. 펠라기우스의 인간이 완전해 질수 있다는 주장과, 도나투스의 ‘신자는 박해에 굴하지 않는다’는 교회관은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이상적 인간관이다.

팀켈러_설교

1. 서론 및 저자소개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팀켈러가 까다로운 도심의 엘리트인 젊은 화이트 컬러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청년뿐 아니라 회사 리더들의 목회적 멘토로서의 역할들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가장 먼저 접한 책이었던 ‘일과 영성’에서 본 내용들이다.

과제를 준비하면서, ‘뉴욕’의 리디머교회라는 것을 알았다. 책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신학교 졸업 후 처음 임지에서 말씀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많은 설교들을 하고 사랑으로 피드백을 받아서 오늘의 그가 되었다. 그의 책에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지 않는 답을 준다. ‘현대 일상’에서의 많은 문제들(골리앗)을 - 교회들이 약한 것(다윗)처럼 풀어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직면하고 파헤친다.

 

요즘 청년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유 중 에 하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장의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 이해조차 못하고 (당연히 위로도 못하고) 도리어 용기내어 직면하고 질문을 던지는 청년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직면하고 끄집어내서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답을 주셨음을 알려준다. 완전 통쾌하다. 나도 열만 내지 말고 이렇게 잘 표현 할 수 있게 준비되고 싶다.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두란노

 

2. 내용 정리

저자는 설교자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다고 책의 전체에서 계속 주장하고, 기억나게 해주고 있다. 첫째는 이 책의 Part 1 에서 정리하고 있는 ‘성경본문의 진리‘를 향한 책임이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말씀‘을 설교해야 하며,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강조할 뿐 아니라 저자가 계속해서 설교의 예시를 제공하고 있는데 예시들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은 두 번째 책임과 관계가 있다.

 

두 번째 책임은 Part 2에서 제시하는 청중의 삶을 향한 책임이다. 선포하는 말씀은 청중들의 삶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말씀이 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중에게 도덕적 책임이나, 명령이나, 억압으로 설교한다면 그들의 삶에, 말씀으로 인한 실제적 변화를 동반 할 수 없다. 나부터도 누군가 억압으로 시킨다면 그 앞에서만 잠시 바뀐 척 할 뿐이지 진짜로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중의 삶을 향한 부분‘은 그들의 마음이 변하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마음을 변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마음이 동요될 만한-일시적 감동이 아닌- 답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주는 해박한 솔루션이 아닌,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 삶의 문제의 답이 되셨음을

설교를 통해서 계속 알려주어야 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복음을, 설교자는 자꾸 현대인의 삶속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도와주어야 한다. Part 1에서 복음을 설교하라고 한 저자는 그 복음이 나의 ’현재 삶‘에 답을 준다를 것을 전하라고 Part 2에서 주장한다. 설교자 본인은 복음이 답이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중에게 이론적인 답만 줄 수는 없다.

 

그래서 Part 3에서는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성령에 의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진리를 향한 책임에서는 매번 복음을 설교하라는 것인데,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설교에서 함부로 다루기 힘든 부분이 문화와 시대 정신 인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하고 깊은 연구로 문화에 반응하면서 저항하라고 제안한다. 또한 Post-modern을 후기 현대주의라고 부르면서,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후기 현대주의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복음이 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신뢰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도록 도와야 한다.

 

설교가 마음에 머물러 청중들 안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을 대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감상 정리

책을 덮고 나니 마음에 떠오르는 주요 단어들은 청중의 마음,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는 설교, 성경 본문에 대한 책임과 청중을 향한 책임,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었다. 정리하고 보니 책의 목차와 비슷해졌지만 책을 읽자 마자 마음에 새겨진 단어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팀 켈러는 책을 잘 쓴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머리 나쁜 사람이 목차를 보지 않고도 주제어를 뽑았다니...)

 

빌려 읽은 관계로 기억할 곳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데 이번책은 포스트잇을 너무 많이 붙였고, 책의 중간부터는 결국 컴퓨터로 내용과 감상을 정리하면서 읽었는데 8페이지가 나왔다.

 

Part 2를 읽으면서는 계속 감탄했다. 내가 문과적인 지식이 얕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 주제 한 주제를 꺼내기 위해 참 많은 연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AD800년의 전사와 현재의 맨허튼의 청년 예를 들면서,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기독교 상담학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책에서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이렇게 깊이 공부하다니.. 설교 잘하시는 박학한 한국의 몇 목사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과연 나도 이렇게 깊이 연구하면서 제시 할 수 있을까... 현대 세계(과학, 지식, 문화)가 현대인에게 주지 못하는 답을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 나의 역할 일텐데, 그렇다면 저자처럼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 때에야 제대로 된 답을 제시 할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선교지의 특수한 상황이 아닌, 나에게는) 새로운 ‘정상적인 문화’로 돌아 왔을 때 느낀 것이 한국 사회가 너무 호전적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정서에 대한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 했는데 ‘5장 시대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 부분에서 답을 찾았다. 주석이 뒤쪽에 몰려있어서 읽기가 힘들었는데 일일이 주석을 보면서 근거를 찾아 갈 때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인 자애의 동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흘려보내는 ‘아가페’사랑이지만, 세속적 자애의 동기는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우월감을 돋우기 위함이라는 것(과 불의에 대한 분노라고 저자는 말한다.)이기에 그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애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물론 사회가 호전적인 이유에는 이외에도 많겠으나 많은 이유 중에 타당해 보이는 하나의 이유를 ‘개인적으로’ 찾게 되었다.)

 

저자는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소프트웨어 교육을 권장하면서 computational thinking(이하 CT)을 많이 교육하고 있다. CT에서의 문제분석에서는 단어의 뜻이 정확해야 문제를 정확히 풀어갈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을 정리하는 것도 그렇고,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고 정리하는 것도 그렇고, 설교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꼭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해주고 설명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웠다.

 

위와 같은 지적인 준비 뿐 아니라 청중의 마음에 설교가 닿게 하려면 청중의 문화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에 닿게 설교한다는 것은 인격적이고 목회적이며, 정감있고, 상상되고, 기억하기 쉽게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적용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대단히 당연한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어쩌면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지만 정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설교 뿐 아니라 목회적 상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도 목회적 상담도 이렇게 마음을 만지는 방법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기존 교회로 ‘취업’하지 않고, (교회에서 급여를 받지 않는) 선교사로 남고 싶은 이유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성도들(교회)을 나의 수입과 관련된 대상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고, 아버지가 피값 주고 대가를 치른 존귀한 영혼으로서만 대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다. 아무 이해 관계 없이 순수하게 아버지의 마음이 전달될 때,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아버지가 보낸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될 때, 사람들은 변한다.

 

저자는 성경본문을 text, 청중의 환경은 context, 설교자의 숨은 마음을 subtext라고 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기준은 subtext라고 했다. 요즘 ‘영성 형성’ 수업을 들으면서 더 많이 ‘나의 숨은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과 작게라도 걸림이 있는 경우들을 보면 내가 곧장 인지 하지 못하는 내안에 숨겨진 문제(부족함)와 타인의 동일한 문제가 충돌이 날 때 생긴다는 것을 점점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숨겨진 의도와 연약함이 설교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목회자는 영혼의 의사인데, 이 의사들로 준비되려는 신학생들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은 경우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어려운 중에 이 책을 읽어서 개인적으로는 위로도 되었다. 나에게 ‘그래 네가 맞아, 마음을 보살펴’라고 말씀하시는 싸인 같다고 해야 할까...

 

뒷 부분의 ‘강해 설교’ 뿐 아니라 앞쪽의 많은 이론(주장)들에서도 저자는 계속 예시를 두어 이해를 도왔다. 사실 저자가 제시한 이론들 보다는 예시 속에 있는 말씀들과 그 말씀들의 풀이에 많이 위로받고, 동의하고, 답을 찾아서 포스트잇을 많이 붙였던 것 같다. 수도 없이 붙인 포스트잇과는 상관없이 감상문이 작성되어서 약간 아쉽다.

 

나도 저자 처럼 아버지의 깊은 마음속에 있는 메시지를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서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변하게 하는, ‘생명을 전하는 작은 소리’로 살게 되길 바래본다. 내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좌충우돌 사건 사고도 많겠지만 나의 기준이 아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음으로 사명을 다 할 수 있길...

<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삶으로 살아라 (2/2)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개인화된 삼위일체’ 부분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 정말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문제 해결식 성경 읽기의 부분은 너무 일상화 되어 있다. 얼마전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나의 필요에 따라 어떤 말씀을 읽고나서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답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결정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려주셨다는 ‘정당성’이 있었다. 급하게 결정하고 나서 다시 그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당황스런 해석이었다. 스스로 참 당황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내가 원하는 생각이 있었어서 전혀 상관없는 본문을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차라리 ‘저는 이게 좋아요. 이러고 싶어요’하고 결정하지.. 정말 내가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말씀으로 답을 받을 때 꼭 동역자들과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정말 내 마음대로 하던지..

 

5장에서는 삼위일체의 음성을 수용적 자세로 듣는 이해력과 습관을 기르라고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 혹은 교부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 오도록 현대 사람들보다 잘 반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현대보다 마음 빼앗기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지금보다 더 깊은 묵상과 통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나도 최대한 아버지의 말씀에 집중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매일, 매순간 하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너무 바쁘다. 나의, 현대인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바쁜 것을 피하고 없애 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둔 수도사이지 일상의 수도사는 될 수 없고 믿음의 공동체에 도전을 줄 수도 없었다. 도피하고 살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똑 같은 깊이로 예수님과 함께 하라는 도전은 도리어 거부감만 주게 된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으로 이 땅의 천국을 이루어 가고 싶다.

 

트럭기사 안토니가 부인에게 한말에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대로 살아야돼. 그래야 이해할수 있어. 밖에서는 도무지 알수 없고, 그 안에 들어가야돼. 아니면 그게 당신 안에 들어오게 하든가” 하지만 부인처럼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안토니 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나도 안토니처럼 살고 싶다.

 

메시지 성경의 서언에서 어떻게 그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는지 알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 유진 피터슨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모습안에서 믿음의 야성을 봤다. 바로 그 야성이, 양들을 사랑하고 아끼느라고 내는 그 화(anger)의 에너지가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내게도 하늘나라 갈 때 까지 그런 생명력 있는 야성이 있기를 바란다.

 

“Let it be with me just as you say”(눅 1:38)

 

나의 카톡의 상태에 써 있는 성경말씀이다. 연변과기대에서 사직하고 한국으로 나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마리아의 고백인 이 말씀을 보며 radical obedience 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아버지 제게 바라시는 radical obedience 는 무엇인가요?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물었던 것 같다. 오래 숙성된 후에, 결국은 radical 하게 아무 이유없이 선교지를 사직하고 나왔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기 시작한지 3년, 여전히 나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어렵지만 마리아의 고백을 매순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마 11:28-30)을 기억하면서 점점 행복해 지고 있다. 연변에 있었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푼수같은 기쁨이다. 때로는 과격하게 때로는 잠잠하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므로 내 안에 세상의 욕심이 점점 하늘나라의 욕심으로 재배치 되어 가는 것 같다. 매일 매일 조금씩 이겠지만 내 삶에 말씀이 더 살아나길 바란다.

 

 

<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삶으로 살아라 (1/2)

유진피터슨의 영성시리즈 중에서 ‘영성독서’에 관한 책으로 소개 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의 말씀을 기반으로 성경 말씀을 나의 삶으로 살아내라고 강력하게 도전하면서 영적 독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구약에서부터 성경이 번역되었던 역사도 더불어 소개한다.

 

머리로 하는 묵상에 머무르지 말고 개와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물고 빨 듯이”, 철저한 순종으로 말씀을 삶으로 살도록 도전한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요한 같이 성경을 흡수하고 성경이 내안에서 작동하도록 먹으라고 한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저자(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인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나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느라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읽는다.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대체’라는 개념으로 이기적 책읽기의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삼위 일체 성부, 성자, 성령은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라는 ‘개인화된 삼위일체’로 대체되어 우리 삶을 다스린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경을 폭넓게 읽어서 그 형식을 이해하고, ‘주해’를 통해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잘 들어야 한다. 또한 성경에 순종함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내면화 하므로 거룩한 공동체에서 말씀을 살아내도록 한다.

 

 “2부 렉치오 디비나”를 말씀이 탈인격화 하는 것을 경계하는 독서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렉치오 디비나의 4단계를 소개한다. 렉치오는 은유를 통하여 깊은 의미와 단어의 기원으로 가까이 이끄는 “읽는” 것이다. 메디타티오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한 “묵상”으로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다. 오라티오(“기도”) 하나님의 문법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하나님과 관계하는 언어이다. 콘템플라티오는 성경의 계시에 굴복하여 읽는 것을 살아내는 것으로관상 통해 삶을산다 것이다.

 

“3 한무리의 번역가들에서는 정경화 과정, 성경을 번역했던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람어 번역은 바벨론 유수 이후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히브리어에 정통한 13명의 레위인들이 백성들의 삶을 말씀에 참여시켰다.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완역되는 70인역 성경과 유진 피터슨이메시지성경을 제작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 되었다.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파피루스의 발견은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 코이네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시리아의 우가리트 발굴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살아갔던 문화를 있게 한다. 이스라엘은 다신교인 가나안의 문화에 눌리지 않으면서 문화를 공유하였으며, 그들의 문화를 분별하고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할 있었다. 옥시린쿠스와 우가리트의 발견은 믿음의 선조들의 (다신교 문화에서의) 삶과 성경이 평범한 삶의 언어로 기록 되었음을 알게 한다.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 삶은 회복될 것이다.

너희에게 제대로 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아라.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나는 너희에게 무겁거나 맞지 않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나와 함께 있으면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마 11:28-30, 메시지 성경)

 

‘이 책을 먹으라’를 읽는 동안 곳곳에서 자꾸 생각나는 말씀이었다.

지난 3-4년동안 일부러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통독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도전이 되었던 말씀이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이었고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기를 목표로 했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도전했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말씀을 잘 살아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과 가벼움이 이전보다 내 안에 있다. 말씀을 살아내는 유익을 아주 조금이지만 경험하고 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소개 하고 도전하고 있다. 이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가 자유케 함’을 모두가 경험하도록…

 

역시 유진 피터슨의 표현과 문장은 너무 재미있고 획기적이다. 방대한 읽기 재료를 적재 적소에 활용하고 탁월한 말장난과 디테일한 표현, 분석과 복선은 지겹지 않고 다음 단락을 기대하며 읽게 한다. 언어의 예술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고의 깊이와 또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 많이 부러웠다. 평소에 생각은 해봤지만 물위로 올려서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어보지 못 했던 나의 내면 깊이에 있던 것들을 여러 곳에서 풀어냈다. 읽을 때 마다 놀랐다. 또한 염화 나트륨과 건조 돼지고기 등의 비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너무 잘 써서 한숨에 마구 읽어 내려가면서도 구성에서는 약간 정리가 안 된듯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부분은 주제와 예화에 전적으로 동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동의라기 보다 이해라고 해야 할까…) 왜 이 주제에 이런 예화가 들어갔을까, 번역이 잘 못된것은 아닐까, 고민한 부분도 있다. 어떤 구성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을 여기 저기에 넣은 듯한 생각이 드는 곳도 몇 곳이 있었다. 공학도로써 구조가 딱딱 맞지 않으면 가끔 읽다가 “왜?”하고 막힐 때가 있다. 저자가 나눠 놓은 단락별로 주제잡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내가 이해를 잘 못 한 걸까? 라고 생각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적으로 동의 되기 힘든 조합의 구성도 있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 스탠리 존스 ) (2/2)

 

스탠리 존스, 김상근 역,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이 책의 중심내용으로 말하고 있는 상기의 세 가지는 간디가 기독교인들에게 제시한 네 가지를 포괄한다.

간디는 기독교인들에게

 

첫째, 예수님 처럼 살아라,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타협하지 말라,

셋째 사랑을 강조하라,

넷째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하고

그것들 안에서 장점을 찾을 때 타종교와 문화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다

 

고 제안한다. 책의 후반부에 가면 스텐리 존스는 힌두교를 연구하고 이해하여, 힌두교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해 진다는 논지를 편다. 그 뿐만 아니라 힌두교 학자도 유사한 결론을 도출한다.

 

처음 하는 북리뷰라서 여러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정확한 정보 공유를 위해 스터디를 같이 했으면 더 비평적으로 읽고, 나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독자인 내가 저자나 대상국가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읽는 도중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옮긴이의 말’에 저자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것을 모르고 저자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봤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 했는데, 이 책과 저자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내가 교만한 것인가, 책을 제대로 이해 못 했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그 이후로 책 읽는 속도가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대단하다고 하는 것인가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목요 채플’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대로 살고 있지 않고, 그 당시 서구 우월주의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 선교하고 있던 상황에서 저자의 발언이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피선교 국가였던 국가의 기독교인들이 볼 때 (예 : 지금의 한국 기독교인들) 이상해 보이는 과거의 선교 방식이 그 당시에는 보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수업시간에도 교수님이 여러 번 말씀 하셨다. 어쩌면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본질을 흐리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GMTC에서 선교훈련을 받을 때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선교지에서 필요한 자원은 선교지에서’라는 말로 필요한 것이 현지에서 조달된다는 뜻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필요한 인력과 재정이 선교국이나 선교사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현지에서 조달되는 경우들이 있다. 저자도 집단 토론이나 집회를 위한 비용, 장소 혹은 주최를 현지에서 감당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며 ‘선교지에서 필요한 자원은 선교지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러한 저자의 간증이 많은 이들이 선교에 도전할 수 있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본 서의 저술 당시 인도가 거의 복음화 될 것 같은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을 읽던 동학들 모두 지금 인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인도의 복음화 현황을 찾아 봤다. 세계기도정보(2010) 자료에 근거하면, 인도의 범기독교는 5.8%로, 7101만명이다. 1984년 부터는 선교사 비자도 없애 버려서 합법적으로 선교사가 입국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2]

 

저자가 책을 쓰던 시기는 인도에 민족주의가 성행하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자인 간디의 말이 인도인들에게 영향이 컸다. 간디가 그들 중에 있을 때는 민족주의 운동이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간디가 감옥에 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운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도인들 곁에 작은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저자에게 고백한 것 처럼 ‘예수님이 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까이에 기독교 아닌 타종교가 있다면 곧 그들에게 동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런 인도인들의 분위기를 알았던 저자가 더욱 더 인도인 중에 살고 있는 예수를 강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복음화에 대해 너무 고무적으로 쓴 저자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쩌면 믿음의 고백 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 믿음의 거장을 대단하게 만드는 본이 되는 것 같다. 나도 나의 선교 대상자들을 향한 저자와 같은 믿음과 기대의 시각으로 항상 바라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저자가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것처럼, 시간과 마음의 가장 우선 순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두고 살수 있길 바란다.

 

 


[1] 규장 (kyujang@kyujang.com) , “ “일어나라" 말씀에 "예스"로 일어나다,”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029,  2017 년 5 월 14 일 접속.

[2] KCM , “ Asia India Mission Map,” 「KCM」,

view-source:http://kcm.co.kr/mission/map/Asia/India/,  2017 년 5 월 13 일 접속.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 스탠리 존스 ) (1/2)

 

스텐리 존스가 인도의 선교사로 18년 동안 섬기던 시점에 쓴 책이다. 저자가 쓴 29권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씌여 졌고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의 선교 초기에는 인도의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층 계급민을 위주로 선교를 했다. 인도 지식인들의 요청으로 선교의 방향을 지식인, 지도자 계층에도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힌두교인 인도 문화내에서 예수님께 반응하는 놀라운 인도인들을 경험한다. 더불어 인도인들 안에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님 처럼 살아야 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스탠리 존스, 김상근 역,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스텐리 존스는 1907년 스물 네 살에 인도에 처음 발을 딛고, 1973년 여든 아홉 살에 인도에서 생을 마쳤다. 저자가 사역하던 시기는 인도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본서에서 그들과 교제하는 예화들이 많이 나온다. 시대가 인물을 나은 걸까. 스텐리 존스 또한 1938년에 「타임」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했다.

 

스텐리 존스가 쓴 책들 중에는 「순례자의 노래」, 「원탁의 그리스도」,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하나님의 예스」 등이 있다. 1972년 여든 여덟 살에 저자가 뇌졸증 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쓴 책이 「하나님의 예스」이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를 읽으면서 스텐리 존스를 평가하는 놀라운 수식어 만큼이나 그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스」가 쓰여진 배경과 내용을 보면서[1] 저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신령한 고통은 기쁨을 낳는다”는 그의 고백에 절대 동의 한다. 말년에 본인에게 닥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맨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하루에 두 시간씩 명상(?)과 기도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보고서야 그동안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가 이해가 되었다.

 

그는 그저 논쟁 잘 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그가 책에서 고백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전 한 것 이었다.

강연에 쓸 원고를 준비하느라 책상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 논지는 기독교인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수양을 통해 인격적 완성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존경한다. 닮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게 이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이는 인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주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논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간증으로 전해진다고 주장한다. 내 삶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나눌 때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고, 도전하는 것이 간증이다. 저자는 논쟁이 아닌 간증으로 전도하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자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다. 관계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이다. 너와 나 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종교 사이에 미움과 반목이 아닌, 오래 참고 이해하는, 안아주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일성수와 세례의 문제는 뒤로하고 네 마음에 예수님이 인정이 되는가 물어본다. 형식의 짐을 지어 주기 보다 본질을 전하고자 하는 사역자의 사랑의 마음이 보인다. 사랑으로 하는 배려의 또 다른 예는 ‘기도’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무례하게 주면 기분이 나쁘다. 최근에도 많은 선교사님들이 비기독교인들과 헤어질 때 ‘제가 기도 하고 마칠께요’하고 무턱대고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한마디는 인도 뿐 아니라 내가 있던 중국에서도 거절 받지 않던 질문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사랑의 예로, 저자는 책에서 인도를 사랑한다고 여러 번 표현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부분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보다, ‘나는 인도의 양자이다’라고 표현한 곳이었다. ‘낮아짐’과 ‘타인에게 나의 소유권을 넘김’은 정말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그냥 넘겨버린 예수님의 사랑인 것 같다.

나는 ‘C국의 딸’이라고 생각해 적은 없던 것 같다. 그저 C족 선교사들 사이에서 C족 영역에 있는 선교사들을 ‘신C족’이라고는 했다. C족 학생들이 ‘교수님도 C족이에요?’하며 장난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결코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새로운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과 이어지는 주제로 선교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그들이 이해 가능 하게 그들의 몸짓(문화)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장한다. 1938년 탐바람 국제선교협회(IMC) 총회에서 스텐리 존스가 반박했던 주제인 ‘서구 문화 중심’의 기독교를 지양하고 각 문화에 맞게 해석하고 제시하는 복음을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과정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입고 있는 서구 문화가 기독교인 것 인냥,  선교지 사람들이 서구문화를 따르기를 강요했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서양 귀신이라며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스텐리 존스는 이부분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자리(HERE & NOW)에 계시다고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저 인도인이 예수님 이라고 말한다. 룽기를 입은 예수님이 인도의 길을 걷고 계시고, 갓을 쓴 예수님이 조선의 길을 걷고 계신데 선교사들은 무조건 양복에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에 우리가 성공적인 선교사라고 평가하는 허드슨 테일러나, 로띠문 같은 선교사들은 자신의 삶을 현지화, 상황화 하여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 갔고 그들에게 문화보다는 복음을, 형식 보다는 본질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1] 규장 (kyujang@kyujang.com) , “ “일어나라" 말씀에 "예스"로 일어나다,”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029,  2017 년 5 월 14 일 접속.

[2] KCM , “ Asia India Mission Map,” 「KCM」,

view-source:http://kcm.co.kr/mission/map/Asia/India/,  2017 년 5 월 13 일 접속.

여디디야 편지(2010. 08)

 

안녕하세요. 한국에서의 한달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지난 한달간의 소식과 개학전 까지의 일정을 전해드립니다.

 

보고

♥ 개인

1. 지난 7월 10일에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귀한 보금자리를 허락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 한 달 동안 모 교회(수*교회)에서 많은 충전을 하고 돌아갑니다. 특히 고등부 수련회에 참석한 것이 가장 큰 은혜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현장에 함께 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 건강검진 결과 약간의 골다공증으로 판정되었습니다. 현재 상황으로는 종합영양제를 섭취하고 운동을 하면 다시 정상 수치가 될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나이에 비해 좀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많이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견된 것에 감사합니다. 지난학기 손과 발의 통증의 이유를 알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4. 생각지 못 했던 노트북을 주셨습니다. 사양이 낮아서 강의 준비에 약간 지장이 있었지만 아버지께서 필요하시면 주실 것 이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출국 전날에 새 컴퓨터를 주셨습니다. 큰 금액을 선뜻 내어주신 손길과 수고하며 컴퓨터를 구입해주신 모든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 P

- 저는 방학동안 아무일도 못하고 지냈는데 학교에서는 많은 분들이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의 방법으로 이룰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부르신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손모음 부탁드립니다.

 

♥ Y

- 10학번 신입생들이 원서 접수를 했습니다. 8월부터는 신입생들의 군사훈련이 시작됩니다.

 

기도 제목

1. 일정

8/2 - 8/7 : Y 계산기 학과 07학번 졸업여행 (대*)

8/8 - 8/14 : HOPE 권역별 총회 (말레이지아)

8/30 (월) : 개강

 

여행 일정가운데 피곤치 않고 안전사고 없도록 손모아 주세요.

개강을 앞두고 아직 수업준비가 안 되었는데 짧은 기간동안 수업준비의 기름부으심을 구합니다...

(1학년의 ‘컴퓨터과학개론’, 3-4학년의 ‘Data Mining')

 

2. 수*교회 : 20년간 시무하시던 담임목사님께서 안식년 후 은퇴를 하시고, 하반기 중에 새로운 담임목사님이 오시게 됩니다. 준비하시는 장로님들 위해,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되어 준비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 대로 준비된 목사님이 오시면 좋겠습니다.

8/11-14일 동안 청년부의 수련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시간되고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3. HOPE 선교회

  (1) 앞으로 2년 후에 만들어질 사무실을 위한 재정과 계획

  (2) 8월 8 - 14일 까지의 총회의 준비와 총회기간동안 더욱 큰 은혜와 발전이 있도록

 

4. Y : 10학번 학생들이 8월 군사훈련기간동안 건강하도록, 신입생들의 수가 부족하지 않고 넉넉히 입학생들이 들어올수 있도록 손모음 부탁드립니다.

 

5. P : 제가 지금 함부로 자세히 나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의 열심히 아닌 아버지의 열심히 모든일들이 진행되고 하나님만 영광받으시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6. 개인 : 2주간의 여행일정 동안 더욱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고 있는 가정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답변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길 구하고 있습니다...

 

9월 학기 수업할 2과목을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름부으심과 지혜를 구합니다. 또 충분히 준비할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주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위에나 추위에나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선 한사람으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동역자님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동역에 감사드리며...

 

2010. 8. 2

여디디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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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예배학입문> 8장 '성만찬 성례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지, 교수님들이 커리큘럼을 잘 짠건지 8장 내용을 보면서 그동안 예배학 때 배운 것(읽은 것 포함)과 교회사 시간에 배운 것들이 머릿속에서 함께 움직여져서 감사하는 책읽기 시간이었다.

 

한편, 너무 재미있어서 자세히 읽으면서 출판사가 나에게 주지 않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의 책을 너무 성의 없이 출판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내가 아는 분이 번역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출판사에 오타와 중복번역 부분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제임스 화이트, 정장복 외 옮김, <기독교예배학 입문>

 

성만찬에 대해서 크게 수행방법, 성만찬의 경험, 목회를 위한 조언으로 크게 세부분으로 설명하였다. 세 가지 주제 중에서 수행 방법에 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 이지만, 요즘 배우고 있는 초대교회 때 이야기부터 가장 최근 1989년의 정보까지 정리가 되고 있어서 한눈에 성만찬 방법에 대한 역사를 훑은 것 같다.

 

성만찬의 이해 부분에서는 1975년 브릴리오트가 제시한 감사, 교제, 기념(의미), 희생제사, 신비(임재)의 5가지와 성만찬의 두 가지 의미(성령의 사역, 종말론적 사건)가 추가 되어 정리되었다. ‘성령의 사역으로의 성만찬‘의 의미는 알고 있었는데 ’종말론적 사건으로의 성만찬‘이라는 말은 ’왜 아무도 나에게 이 의미는 안 알려 준거지?‘(알려줬는데 모르고 있었던 걸까?) 하며 읽기를 멈추고 조용히 머무르게 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초대교회처럼 성만찬의 경험 보다 지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1982년 에큐메니칼 문서를 정리한 자료에서도 신비(임재) 부분을 다른 4가지와는 다른 논조로 설명한 것 같아 보인다. 목회적인 부분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건축의 배경, 자리 배치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서 이 책이 정말 ’예배’의 모든 부분을 다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페이지 마다 질문들이 있었지만, 글을 쓰려고 정리하는 상황에서는 큰 숲을 보는 것 같다. 학문의 깊이가 깊지 않아서 단어 정의에 혼돈이 많았다. 책 한권으로 성만찬과 관계된 ‘용어’들을 다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뒷부분으로 가서는 역자가 단어에 대해서 설명을 붙여주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었지만 앞부분에서는 번역이 꼬여있는데다가 모르는 용어를 여러 단어로 표현 하는 바람에 이해하는데 힘들었고, 일부분은 이해를 포기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이쪽 분야의 학문의 짧음과, 깊이 공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시 한 번 경험 했다. 반면에 교회사 시간에 만났던 교부들, 회의들, 시대 배경이 나올 때는 많이 반가웠고 교회사에서 의문이 있었던 부분들의 의문이 해결되기도 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성만찬(주의 만찬)과 애찬(love feast, agape)의 개념과 배경을 좀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책 268-269)

 여디디야 편지(2010. 06)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언 26:14)

 

 

성화를 위한거듭난 성품을 향한 노력이 내재 되어 있는 부지런함이 아닌 그저 바쁜 일상의 반복은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과 같은 영적 게으름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한학기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습니다... 매일 아침 아버지를 향해 집중하는 시간보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시간이 많았던그래서 더 뛰어다니는 시간동안 한편으로는 괴로워하고 한편으로는 은혜를 누리는 학기였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6월 24일 목요일 06급, 저에게는 첫 졸업생이 졸업을 하였습니다. 사은회때도 졸업식때도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 아이들 어디서든지 아버지의 자녀로서 누리면서 살게 해 주세요...’

 

보고

♥ Y대 컴퓨터전자통신학부 계산기학과 (Y CECOM)

- P껀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이번학기는 1학년의 ‘C언어‘ 한과목이 맡겨졌었습니다. 작년 9월 화면에 글씨 하나 출력하는 것도 어렵다던 학생들이, 6월에는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아이들이 전공을 좋아하게 되고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해주신 여러분께, 이들에게 지혜주시고 열정주신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Y에서 배운 전공 지식이 아버지께 영광돌리는 귀한 도구되길 기대합니다!!

 

- 이번학기는 ‘MT 학기‘!!

한달에 두번씩 MT를 가기도 하고, 여학생 모임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06 여학생들에게는 마음을 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06여학생의 마지막 모임은 세족식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발을 씻기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이 아이들에게 느껴지기를...

 

♥ P

- ‘엎치락 뒤치락‘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던 한학기 였습니다. 당장 이번주에 강의팀이 들어간다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팀원들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로 정보가 나갈 경우 또 총장님이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에 그 모든 변화의 정보가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더 했습니다. 게다가 PM 이셨던 부총장님이 갑작스런 3차신경통 증상으로 팀 전체가 숙연해 지기도 했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되신 분이 아버지이시기에

하나님.. 모든 상황 속 에서 당신만을 기대합니다.

 

♥ 개인

- 학기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한국에 나갈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곳 저곳 건강의 이상신호가 계속 왔어서 어쩔수 없이 수면과 휴식과 운동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며 지냈습니다. 마지막 수업 때는 저절로 ‘감사합니다!!’가 나왔습니다...또 필요에 따라 약을 공급하신 아버지의 신실한 손길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방학중에 성경공부하던 2명 학생이 완주하고 계속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으려고 노력하며 학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한*은 오늘(25일)에 상* 직장으로 떠났고요, 최*석이는 다음학기 한국유학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인도하심을 누리며, 예수의 강한군사 되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기도 제목

1. 남북의 상황 : 상황을 보면 사랑할 수 없지만, 서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남북관계 뿐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기^^)

 

2. P대 :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33:15)”

매번 바뀌는 상황속에 휘둘리지 않고 아버지께 기쁘게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팀원, 대한민국 되도록..

3. Y대 :

  (1) 재정 부족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사람을 의지 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서 하실일 기대 하길!!

  (2) 10학번 신입생들 8월 입학 예정, 아버지께서 보내신 학생들이 꼭 오고(학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음), 학교를 가득 채우도록^^

  (3) 점점 늘어나고 있는 한국학생들(유학생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후회 없이 지내고 중국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만 끼치도록..

 

4. 수업준비 : 1학년의 ‘컴퓨터과학개론’, 3-4학년의 ‘Data Mining'을 맡게 되었습니다. 두 과목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과목입니다. 기름부심으로 학생들에게 가장 적합한 수업 준비를 할 수 있도록..

 

5. 할머니, 부모님, 동생들 건강, 동생 결혼식: 동생이 결혼을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 주인되시고 다스리시는 결혼식, 그리고 그 가정이 되길 축복해 주세요^^

 

6. HOPE 선교회

  (1) 앞으로 2년 후에 만들어질 사무실을 위한 재정과 계획

  (2) 8월 8 - 14일 까지의 총회의 준비와 총회기간동안 더욱 큰 은혜와 발전이 있도록

 

7. 수*교회 : 교역자분(특히 담임목사님의 건강)들과 모든 성도들의 영과 육이 건강하고 더욱 하나님과 깊이 만남을 갖을 수 있도록..

 

8. 개인 : 이번방학은 동생결혼식과 수업준비, 그리고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2010. 6. 26

여디디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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