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는 인간 이해를 가장 심층적으로 탐구한 신학자 이며, 실존적 물음과 계시적 대답을 연관 짓는 상관관계 방법론과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집중한 문화의 신학, 경계선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론에서 물음은 ‘실존적 소외’이고 대답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은 신학적 대답인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본질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이며 실존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다.(257) 그래서 실존은 소외의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전이’한 것으로 해석한다.(258)
‘창조와 타락은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실존이 현실화 될 때 본질로부터 분리 되기 때문이다.(260) 타락의 결과로 실존적 소외상태가 되고 이는 불신앙, 교만, 욕망으로 묘사된다.(261) 죄(소외)의 결과 자기-파괴구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악‘이며 이것으로 자아와 세계의 상실이 발생한다.(262)
인간의 유한성은 실존적 소외 속에서 자기-파괴로 변형된다. 유한성은 비존재(죽음)을 악의 화신으로 만든다. 소외의 결과로 고난, 고독, 의심, 무의미가 발생한다. 고독한 존재는 자기파괴나 타자파괴로 발전한다.(264) 여기서 ’구원‘은 소외와 죽음의 극복으로 본질과의 재연합이며, 화해이며, 소외를 극복하는 존재의 치유로 해석한다.(276) 바로 그 화해를 위한 새로운 존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결과인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다.(265-267) 그리스도는 치유와 구원의 궁극적 기준이다.(277) 또한 그리스도의 존재가 사역이고 그 사역이 그의 존재(새로운 존재)가 된다.(278)
새로운 존재란 실존 속에 있는 본질적 존재이며, 본질과 실존사이 분열을 극복한 존재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함으로 성령에 의해 단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수 있다.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에 대한 종속’으로 상징이 사건과 결합하여 상징화된 것이고, 부활은 ‘실존적 소외에 대한 승리’로 부활의 경험에서 사건과 결합하며 사건화된 것이다.
속죄는 객관적 요소(신적행위)와 주관적 요소(인간적행위)가 모두 필수적인데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으로 주-객 통일적 사건이며 중생(참여), 칭의(받아들임), 성화(변화) 모두 그렇다.(279)
문화의 신학과 경계선 신학으로 틸리히를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10장을 발표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 장을 읽으며 인간론에 대해서는 틸리히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게다가 이렇게 내용이 어려울 줄이야.. 개념 설명에는 이해 못하겠다고 썻다가 개념에 따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는 것 같았다가 두 번째 읽으면서 정리할 때는 또 모르는 것 같았다가 글로 다시 정리하면서는 안다고 착각했다가...
틸리히의 깊이있는 정리에 기존에 틸리히에게 느꼈던 매력보다 더 크게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틸리히와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해서 소논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틸리히를 좀 미리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틸리히의 이론이 너무 깊다. 지금 읽은 교재중에 틸리히(10장)에서 가장 많이 줄을 쳤다. 과연 틸리히에서 내가 인간론의 주제를 찾고 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상담학에서도 폴 틸리히 연구가 국내에 논문으로 몇 개 있긴 했다.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도 2003년에 있었는데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잘 모르는데 논문 주제를 잡을 수 있을지.. 공부는 할수록 어려워지고 작아진다...
에밀 브루너를 읽으며 만남(관계), 모순, 책임, 위로부터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떠오른다.
들어가는 말에서 최신기술들을 거론하면서 시작하시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복잡한 인간에 대해 ‘인간론’이라고 대 놓고 책을 쓴 신학자는 (교과서에서 제공한 정보들을 근거로 볼 때) 에밀 브루너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연과학, 철학, 신학적 관점을 종합(231)하면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더 분석하기 힘들어진 시점에 ⌜모순속의 인간(그리스도교 인간론)⌟은 말씀중심의 신학, 책임적 존재로서 인간, 기원과 종말을 포함하는 신학의 관점으로 저술되었고, 9장에서는 종말에 비추어본 책임적 존재의 주제를 다루었다.
부버의 ‘나’와 ‘너’의 ‘만남’ 기반으로 한 ‘만남으로서의 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되려는 모습과 실제 모습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분리되어 있어 관계적 존재이지만 모순 속에 있다. 관계적 존재의 인간에 기반해서 ‘위로부터’ 규정되는 존재이다. 타락이후에도 인간에게 은총과 소통의 가능성이 남아있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답하는 존재로서 관계적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235)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고 단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원의를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234)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며 그들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다.(238) 더불어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양심’을 고려했던 본인도 이 부분에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브루너의 요약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관계’, ‘공동체’, ‘계시 중심’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말의 빛에 서있는 존재’에서, 칼 바르트의 영원과 죽음을 설명한 부분이 떠올랐고, 관계의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존재로 설명한 부분도 비슷했다. 하나님의 형상(235)이 관계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240)이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마음과 영에서 영을 인격으로 보고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개인으로 살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실존을 말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물론 앞의 많은 신학자들이 따로 많이 언급했겠지만), 에밀 브루너에게서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제도 아닌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몇 주동안 만났던 신학자들과의 만남이 계속 올라와서 자꾸 정리하고 싶어서 시간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호모데우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에밀 브루너 같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질문]
.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이미 (위로부터) 질문이 주어진 존재로서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중예정설은 부인한다고 했는데 예정설과 맥이 통하는 곳일 까?
. (223) 브루너 신학의 핵심구조중 하나인 ‘성서적 인격주의’는 계시를 “나와 하나님(당신)의 만남이라는 개념” 혹은 “인격적인 하나님(it 이 아닌)“으로 해석해도 될까?
. 마음, 영(인격, 240), 지성.. 등은 강조하는데 몸에 대한 언급은 ‘일시적이며 인간의 죄 된 실존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과학과 연결시키는 부분 밖에 없던 것 같다.(243-244)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 슐라이어마허(1768-1834, 독일)에 의해 시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보편 해석학)
. 식민주의, 산업화, 세계대전으로 의문시 됨 (인간의 야만성)
■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루너, 폴 틸리히, 니버 형제 (라인홀드 니버 1892-1971)
. 하나님의 계시 강조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년 스위스 바젤 출생 (1968년 82세, 바젤 사망)
.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 스위스 자펜빌 교구 목사
. 1914년 독일의 스승들이 전쟁에 찬성하면서 자유주의와 결별
. 1918년(1922년) ⌜로마서 주석(2판)⌟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
. 독일 대학에서 교직 중 나치로 인해 1935년 스위스 바젤 대학 신학교수
. 1962년 은퇴
. ⌜교회 교의학⌟(1921-1959), ⌜복음주의 신학 입문⌟(1962)
. 말씀의 신학자, 계시 중심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칼 바르트
■ 아돌프 슐라터(1852-1938) 독일 개신교 내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독일 신학자 니체로부터도 배웠으나 그것이 학문적 엄밀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동시에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옹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적 성품을 지닌 교수(불트만, 하르낙과 동시대)로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해 보여준 통찰과 본보기를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가 따랐다.(개혁신학 용어 사전, p72)
1. 들어가는 말
. 칼 바르트 : 20세기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 (대표적 업적)
.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
.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 그리스도 중심적 교의학 전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강조 ∴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시했다는 평가
→ ⌜교회교의학⌟Ⅲ/2 인간론 할애 했으나 ‘인간’ 독립적 주제로 나타나지는 않음
. 인간 : (1) 불완전한 피조물 (2) 자기 기만적인 죄인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인간을 알수 있음.
(1)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된 인간 :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2)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개방된 관계적 구조 가진 존재 :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3) 통일체(영혼+몸)로 창조 세계에 참여 :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4) 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 :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2. 근대의 ‘절대적 인간’비판
. 18세기 절대적 인간 : 이성, 합리, 계몽주의 시대 과학 혁명, 기술발전, 자연정복 등
. 절대주의 시대 :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18세기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이면에 ‘절대주의’)
. 절대주의 : “인간 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 위에 기초한 삶의 시스템... ”(p195)
. 절대주의 인간 : “잠재력..절대적이라고 스스로 간주한다.... 절대적 인간은 18세기의 인간이다.”(p195)
. 절대주의의 영향력 : 인간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학문, 정치, 문화, 신학에도 ‘인간화’의 흔적 남김
. 인간화 : “하나님을 제거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절대 권력을 가진 인간의 자기의식 영역에 포함하고... 실재를 내적으로 경험되고 이해되는 실재로 변환”
. 개인주의화 : “인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의미...하나님 밖의 모든 것에 행사하는 감춰진 권위를 받았음을 의미.. ” (p196)
. 인간화의 영향 (유럽) : 문화 개신교주의(서유럽 자유주의 신학) 등장 배경
. 교파의 민족주의화
. 교회의 부르주아화
. 신앙의 사사(私事)화(개인주의화에 상응하는)
. 학문으로서 신학의 정체성 변화
∴ ‘신학적 인간론‘의 변화
.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언어와 논리로 인간 본성 이해 하려 함
. 진리 판단 기준이 ‘인간 경험’에 권위 부여하는 인간론적 패러다임
⇒ 세계대전, 식민주의, 사업화 등 비인간적 광기로 절대주의의 붕괴
⇒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등장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 절대적 인간 VS 피조물 인간 → 바르트의 독특성 : 인간론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
(1) 피조물 인간의 본성
(2)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3) 인간이 창조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 질문하고, 현대의 인간학적 도전을 함께 대화 할 수 있는 개방적 신학적 틀 제안
. 바르트의 다른 철학의 인간론 분석 (p198)
특징/중요점
한계
자연주의
피조물 중 하나
다른 피조물 사이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함
관념론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
하나님의 존재를 잘 성명하지 못함
실존주의
초월의 존재
자기 폐쇄적인 자아상을 만듦
유신론
타자와의 만남의 존재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실패
∴ 추론이나 관찰로 꿰뚫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말씀으로만 알려 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계시됩니다. 그분 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 성서 : 하나님의 피조물
.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께 묶여 있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먼저 묶으심
∴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론의 기초로 삼음
(1) 인간에 대한 현실적, 포괄적, 참된 이해 가능
(2) 철학은 각자의 방법론으로 특정 부분을 설명하지만, 계시에서 시작하지 않으므로 인간 본성까지 다룰 수 없음 (비판적 건설적 대화)
. 인간론의 시작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 (신적결정)
→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서
(1) 참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신실한 파트너
(2)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파트너
. 신적결정 :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응하도록 창조
. 관계의 유비(類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결정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신앙의 유비)하게 된다.
. 관계의 유비에서 나사렛 예수와 피조물 인간사이의 다층적 인간론 구조
(1) 예수그리스도 : 하나님과 인간을 향함 – 영혼과 몸 – 시간의 주님으로 역사에 나타내심
정말 방대한 양의 내용들을 짧은 지면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신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또한 2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하느라고 고생했을 저자들에게도 고맙긴 한데 고민이 되는 문장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 의문이 남는 부분들이 많았다. 정말 인간론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를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은 『시크릿 Secret』 (론다 번, 2007)이었다. 요즘에는 비슷한 종류의 책이 더 많이, 더 자세히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우주’랑 관련된 책들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가브리엘 번스타인, 2018) 등으로 유튜브에도 많은 비슷한 맥락의 많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슐라이어마허를 기반으로 하는 걸까?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사실 『시크릿 Secret』을 한국에서 처음 보고 선교지로 들어갈 때 전도용으로 사용하려고 여러 권 사가지고 갔다. 그리고 학생들과 이 책으로 토론하면서 무신론 기반인 선교지에서 우주를 활용해서 유신론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했다.(선교지 같은 무신론 기반 세계는 우선 유신론으로 들어가야 예수님 설명이 된다.) 그러다가 한국 기독교 사이트에서 『시크릿』을 엄청 비판하는 글을 읽고 놀랐다. ‘이거 하나님 대신 우주라고 쓴 건데 왜 이걸 전도에 사용안하지?’ 나에겐 의문만 남았다. 당시 신학을 안했던 나는 목사님들이 쓰지 말라니깐 사용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더 이상 전도의 도구로 이 책을 쓸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와 토론할 기회나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7장을 읽으며 슐라이어마허 또한 ‘우주’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게 하려 했다는 부분을 읽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크릿』도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도 모두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사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한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구] 슐라이어마허에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찾았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부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속’인 예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왜 필요한지.. 슐라이어마허를 더 연구해 봐야 할것 같다.
[연구]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역사적 예수’란 해석학(?)에서 예수님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셨던 분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실존하셨던 예수를 강조하는 말로 본인은 해석했다.(p187 명제 9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목사님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로 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기독교 입장에서 부정적인?)였을까? 아직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단어의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쪽이었을까 갸우뚱 되었다.
[연구]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을까? 공격을 받았을 것 같긴 한데...
신학서적이나 철학 서적이나 읽다보면 무조건 수긍이 가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직 넓고 큰 시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논리의 빈약한 부분이나 이상한 부분을 못 찾아 내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지만 이러다 보면 견고하고 건강한 뿌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조직신학과 철학을 평생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칼뱅을 여러 관점에서 보면서 다양하게 평가하는데 저자는 그 모든 의견을 모아 칼뱅을 삼위일체 신학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칼뱅의 신론은 인간론이며, 인간론은 신론이다. 칼뱅의 이러한 인간론을 죄와 관계된 인간 이해로 인간의 상태를 무흠, 부패, 은혜, 영광의 4중 상태론에서 다룬다.
칼뱅은 인간의 영혼도 모든 창조물과 같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영혼으로 영적 세계에 참여하고, 육체로 감각 세계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4중 상태론중 무흠(순전한)의 상태란 타락하기 이전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불순종했고 다음 상태인 부패 상태의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다른 피조물, 순전한 상태의 자기 자신, 그리고 타자와의 4중 소외가 발생했다. 죄란 본성의 부패로 유전되며, 전인격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은 부패 상태이며 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인간은 자발적,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캘빈은 인간이 선천적,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정의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용하며 죄와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는 타락 이후 상실 됬지만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죄를 짓는 자유가 남아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그는 전적 부패를 주장하며 지상의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성령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고 고귀한 존재로, 긍정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중적 지식은 타락 전 무흠의 상태를 아는 것과 자신이 순전한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아는 두 가지 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 지식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인간의 악한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어 소멸되는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 또한 성령은 신자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돕는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어 처음 창조시기보다 더 좋은 상태가 된다. 여기가 은혜 상태이며 죄를 지을 수 없음에 참여함으로 선택할 수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광의 상태에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은 의지에 은총이 부여되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영적이며 부재로 현존하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찬에서도 영적임재설을 주장한다. 또한 신자의 개인 종말인 죽음과 보편 종말인 몸의 부활을 구별하여 죽음은 죄와의 결별이며,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중간상태에서 쉼을 누리며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칼뱅이 말하는 영광의 상태는 은혜의 완성된 상태로서 은혜에 사는 이들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므로, 미래의 소망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상태와 분리된 영광의 상태는 위험하다.
[토론] (p131, 아래서5줄) “은총 있을 때는 선을 없을 때는 악을 선택하는”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른 이론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예정론의 맥락일까? 이글에서만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악하게 내버려두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듯...
루터는 개혁의 선두에서 인간론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가망 없고, 스스로 불안을 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펼친다.(‘신학적 인간론’)
1536년 『인간에 관하여』에서, 4-19는 철학적 논제이고 20-31은 신학적 논의로 구분되어 진행하면서, 로마서 3:28절의 ‘사람’을 그의 인간론의 기초로 삼는다.
(3. 이성의 동물) 먼저 스콜라 철학에서 처럼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 철학은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서만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정의에 루터는 ‘감추고 우상을 만들고 꾸며댈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4. 신학적 인간학) ‘인간론’의 시작은 스콜라주의와 같게 했으나 다른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에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에서는 은총의 효력이 남아 노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으며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 이다. 자기를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 아래서 가능하다. 인간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 루터의 신학적 인간론의 기반은 로마서 3:28절 이다.
(5.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에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이다. 관계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이성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은 이웃과의 관계까지 깨어진다. 루터에게 ‘죄’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뜨리는 본성“이다. 율법아래서 인간은 죄인이지만 복음으로 인해 의로운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점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도 거론된 부분이지만 이러한 믿음의 전환은 평생의 과정이며 방향이다.
(6. 종교적 존재) 칸트는 순수한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으며, 다윈 또한 진화론은 신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몰아냈다. 루터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신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구부러져 탐욕에 빠진 존재”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관계가 있다.
(7.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에게는 ‘칭의론’이 핵심이라 할 수 있으나 루터는 ‘칭의’를 “죄인을 자유케하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칭의론’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언제나 사랑이 뒤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웃 안에 산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종교 행위보다 내면의 양심과 신앙을 강조했으므로 자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칭의는 자유와 사랑의 조화로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루터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 같은데 미세한 차이점들을 공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4년 동안 히포의 주교로 활동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에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인간에 대해서 본장에서는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니교, 아카데미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을 거치고,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등과 논쟁하며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2장에서는 『고백록』의 구조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기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는 인간의 틀로 인간 이해를 풀어간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에 의해 훼손 되고 은총으로 다시 형성 될 수 있지만, 상실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악은 선의 결핍(존재의 결핍)이며, 모든 존재는 다 선하므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여기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체로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서 발견 되고, 영혼이 생명의 주요 요소이며, 사유의 중심이라고 보면서 “육체를 다스리는 데 적합한 합리적 실체”로 정의한다. 처음에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회심 과정에서 점차 이원론을 버리게 된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영혼을 육체보다 탁월하게 보지만,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멸이 행복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정신을 깊게 탐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안의 정신에 속하는데,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삼위일체)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해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정욕과 습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치유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고백록』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을 향하도록’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심오한 분”(p61)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좋다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탐험이 출발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을 탐구하는데 정신이 신적 조명(은총)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게(p65) 되지만, 부활(불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직관에 도달하는 종말에 완벽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는 신학, 철학, 심리학적으로 큰 영향을 남겼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경향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와 종말론적 전망에서의 재해석도 필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더 깊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은혜와 인간 선택의 시작점이 항상 애매모호함으로 남는다. 실천적 신학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항상 질문으로 남는다.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의의 해석이 아닌 전적으로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론을 해석하고자 한 애씀이 있다.
1장에서 말하는 성서에서의 전인적 인간론이란 육체와 영혼을 따로 다루는 이원론이 아닌 육체자체가 인간이고 영혼자체도 인간이라는 전제로 죽음과 부활을 재정의 한다.
구약에서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네페쉬, 빠사르, 루아흐, 레브와 신약에서의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의 단어의 뜻을 고찰하면서 신구약에서 표현된 이 단어들은 모두 제유법적 표현으로 결국 전인적 인간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전인적 인간론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전인적 인간론들은 죽음과 부활에서 다시 이원론적 인간론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전인적 인간론에서의 ‘죽음’은 영혼의 분리가 아닌, ‘전적 죽음 이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가 전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그리스적 죽음과 성서적 죽음의 차이를 설명했다. 죽음을 이렇게 전적 죽음으로 해석하면서 부활과 연결 될 수 있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하지만 신자들은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이는 심판받을 죄인인 옛 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이다.(골3:1-11) 전인적 인간론으로 심판 전후의 인간을 성서적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인적 인간론은 영과 혼의 분리가 아닌, 죽는 전인, 부활하는 전인, 영생하는 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신학에서는 그동안 플라톤에 영향을 받아 해석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성서에 기반을 둔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창3:15-16절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성서적 죽음)이라는 것 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인적 죽음, 전인적 부활과 연결된 다고는 생각 못하고 이 땅에서의 죽음 부분이 약간 애매모호하게 남아있었는데 그 부분에 여명이 비춰진 것 같긴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각에....) 논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부분들도 있고, 신구약에서의 단어 사용례에서는 히브리 사고를 좀 더 강조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으로 해석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려고 해도 이렇게 무언가 조각 조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 하는게 맞는 것 같다.
(p37) 중간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로핑크라는 학자의 연구에서 저자도 지적했지만 6-7번에서 갑자기 비약이 일어나는거 같다. 중간상태의 로핑크 이론 이후의 설명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 부분과 연결이 되어 이해 되었다.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3. 해방 영성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4. 페미니스트 영성
5. 화해의 영성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8. 동방 정교회 영성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운동,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10. 결론
4. 페미니스트 영성 (1880년대 시작)
.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광범위하게 영향 끼친 해방주의 영성의 다른 형태
(1) 서유럽, 북아메리카의 투표, 재산, 대학 학위 획득위한 여성운동
(2) 유럽의 정치적 혼란 및 미국 민권운동에서 여성의 두드러진 역할
(3) 1970~80년대 학문 분야로 등장 →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 영성에 영향
. 대표 신학자 : (북아메리카) 샌드라 슈나이더스(영성에 민감한 성서연구), 조안 왈스키 콘, 로즈메리 류터, 엘리자베스 존슨(삼위 일체 신학에 대한 정교한 재해석), 캐서린 다크먼(『영신수련』의 여성들의 연구), 앤 카, 도로테 죌레, (독일) 엘리자베트 몰트만 웬델, (영국) 메리 그레이, 그레이스 잔첸(고전의 재해석, 기독교 신비주의 연구)
. 페미니스트 영성 근본 주장
(1) 영적 실행에 대한 접근법이 성차에 의해 영향 받는다.
. 성차 : 생물학적 성, 주어진 문화, 역사, 시대 안에서 구성되는 방법
(2) 인간성과 가치가 훼손되는 근본적인 방식의 확인 : 전통적 영성의 중요한 요소들에 의해 제한됨
(3)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이해, 제자직의 실행에 대한 대안적 방법 재구성
. 재구성의 방법
A. 경험의 타당성을 우선으로 신학의 기초를 확증 : 하나님을 경험 할 때 하나님 깨닫기 시작 → 여성의 경험과 방법의 구체적인 특징이 영적 지혜의 핵심 원천
B. 성경과 전통의 빛으로 경험을 성찰
4.1 여성주의 영성 : 아프리카계 미국인
4.2 무제리스타 영성 : 라틴, 히스패닉 여성
. 이사시-디아스 : 윤리학으로 신학 전공하여 대학교수(쿠바 난민), 가톨릭에서 여성 서품위한 운동에 관여, 진정한 영성은 구체적 관계와 정의 위한 투쟁에 몰두하는 능력에 의해서 측정
5. 화해의 영성 : 기독교 신앙의 중심, 영성의 중심
. 전쟁, 후기 식민주의, 인종 갈등, 사회 정의와 해방 등으로 화해가 중요주제
. 존 드 구루취(남아프리카 신학자) : 화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의 영감이며 초점’
. 화해의 수평적 차원 :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타자’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갈등의 극복 시도)
. 샬롬 : 영적, 물질적 조화와 웰빙의 상태 ∴ 부정의와 불화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위한 기독교 사역
(1) 마틴 루터 킹, 하워드 서먼(신비주의자, 급진적 사회적 행동의 영성을 발전시킴 : 기도와 고난이 기반)
(2)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예수회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 과학과 종교의 조화 노력
. 종교적 영역에서의 화해 이슈
(1) 20c 초 기독교 에큐메니즘
(2) 20c 세계화 과정에 태어난 종교간 대화 VS 폐쇄적인 기독교 영성의 영향력 증가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 기독교 에큐메니즘 : 기독교 세계화와 교회의 정체성과 영성의 중심에 공동 선교가 있음의 이해
(1) 1910년 에든버러 선교 대회
(2) 세계교회 협의회 설립 (1948) vs 유엔 설립
(3) 가톨릭교회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1960년대에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
. 로제 슈츠(개혁 교회 목사)의 떼제 공동체 (1940) : 기독교 에큐메니즘과 인간 화해의 영적 토대 가운데 상징적
. 배경 : 프랑스와 독일 사이 유대인 난민 도우려는 소명으로 수도원 모델로 매일 기도하는 일과 시작
. 1944년 화해의 선교에 헌신 : 범유럽 평화 → 종교, 사회, 세계적 전망
. 초기에는 개신교에서 가톨릭 회원 들어온 이후로 광범위 기독교 출신의 100여명의 회원
. 특징 『떼제 규칙』 (1953) : 관상과 사회적 참여의 연결 실습
(1) 공동생활 안에서 화해의 가능성, 고통 증거 (각자 종교의 순전성 유지)
(2) ‘잠정성’ : 신앙적 민감성으로 굳어진 태도와 고정 방식에 대해 이끄시는 하나님 방법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 하나의 큰 재단 대신 세계에 필요한 곳에 잠정적으로 작은 규모 공동체 이식
(3) 적극적 참여와 관상적 삶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헌신, 사회 정의와 화해 위한 투쟁
(4) 청년들을 위한 순례와 영적 탐험의 장소 (EX) 반복 찬미, 영적 안내 등으로 화해 분위기 조성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 종교간 대화 : 기독교&불교, 기독교&힌두교 → 토마스 머튼 : 수도원 생활은 종교간 만남과 영적 실천의 경험을 나누는 유익한 상황
. 베네딕트회 데샤네 : 요가에 친숙, 명상중 신체의사용 회복에 기여
. 베네딕트회 존 메인 :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고대 기독교 수도원 실행 하시 관계발견 (존 카시안)
. 예수회 회원들이 일본 선의 권위자가 되어 선불교와의 대화에 참여
. 인도에서의 모델들
(1) (영국)베네딕트회 비드 그리피스 : 인도 영성 발전을 위한 대표적 기독교 집단
. 관상 공동체의 비전 → 서양의 합리주의에 맞서 직관적, 관상적 삶의 회복에 중점
. 이전 예수회 회원들이 설립한 아쉬람(암자, 샨티바남이라는 장소)에서 생을 마감
. 기독교와 힌두교 관계에 특별한 접근 방식 사용 : 양쪽 다 이해
. 아드바이딕 : 보편적 조화와 통일성 강조하는 교리
. 신성 안에 있는 궁극적 단일성에 대한 믿음과 삼위일체 교리 (불가해한 통일성이 구별 속에 균형)
→ 힌두교는 개인이 절대 정체성과 완전 하나가 된다고 보지만 기독교는 절대자의 깊음 안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관상적 과정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
(2) 샨티바남 : 힌두교 아쉬람에 영감 받아 생활양식과 예배를 인도식 모델에 적용한 기독교 공동체
. 환경과 예배는 모두 인도식
. 기독교, 힌두교 방문자들에게 모두 인기
8. 동방 정교회 영성
: 아토스산의 수도원 개혁과 러시아 영성의 중요인물들로 혁명 전후
. 아토스 산 : 그리스 마케도니아 산악 반도, 남성 수도원 정착지
. 헤지카즘(정교회 관상 전통)이 발전 → 1917년 러시아 혁명 결과로 수도원 감소 → 쇠퇴 → 세계대전 후 서방내에서 정교회 영성에 대한 관심 증가, 1960년대 그리스어 『필로칼리아』 → 아토스로 초심자들의 유입
. 러시아 영성 : 정치, 사회적 영향
1) 성 요한 (1829-1909) : 혁명 이전 정교회 평신도에게 중요한 영향
(1) 매일의 성체성사는 삶의 중심이므로 평신도가 성찬에 참여하도록 함
(2) 자선이 참된 기독교 경건의 본질 : 소외 계층위한 사역으로 표현
(3) 개인기도의 실천을 세밀하게 기획하여 해박한 영적 일기를 남김
2) 블라디미르 로스키 (1903-1958) : 평신도 신학자,
. 러시아신학연구소(파리) 설립,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 신화(神化)를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고,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
. 신비주의와 신학은 떨어질 수 없고, 기도와 전례는 신학의 토대, 신학은 신앙생활 발전에 관한 것
3) 마더 마리아 스코츠소바 (1891-1945) : 러시아 귀족 출신, 문학가, 수녀, 2차 세계 대전 순교
. 러시아에서 파리로 망명, 이혼 후 수도원 서원
. 지적, 종교적 토론의 중심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곳
.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레지스탕스가 되어 유대인 도피 돕다가 1945년에 가스처형
. 20c후반 이후로 정교회의 세계화 : 유럽의 종교, 영적 주류의 일부가 될 듯
→ 전례와 신비신학의 중요성을 알려줌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 영성의 민주화 : 성직자나 수사들 같은 종교 권력과 영적 엘리트만의 영성이 아님
9.1 피정 운동
. 기원 : 예수님이 휴식과 기도 위해 제자들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신 신약의 기록
. 『영신수련』 이후 제도화된 피정 개념, 17C 피정의 집, 19C 중반부터 성공회에서 피정 시작, 20C 미국의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 → 사제들이 설교하는 다수를 위한 단체 피정
. 영적 안내 : 타인의 안내, 멘토, 동반자 역할을 하는 광범위한 영적 안내
. 기원 : 초기 수도원 때부터 기원 → 중세 고해신부의 역할로 제도화 → 16C 트렌트에서 제도화
. 비제도적 형태의 영적 안내 : 바론 폰 휘겔(가톨릭)과 에블린 언더힐(성공회) 같은 평신도
. 갱신 :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피정과 영적 안내의 민주화 (진정한 영적 안내는 하나님의 은사)
9.2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 기원 : 사도행전 성령 감동에서 셰이커 까지 발전
. 오순절 교회 : 1906년 LA 아주사 거리 윌리엄 시모어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부터 시작
. 핵심요소 : 성령세례(방언), 예언의 은사 및 해석
.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성령님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심
. 과도하게 형식적, 건조하고 지성적 신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령 충만의 경험이 정서적 형식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었다.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3. 해방 영성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4. 페미니스트 영성
5. 화해의 영성
6. 에큐메니컬 영성 : 떼제
7. 영성과 종교간 대화 : 비드 그리피스
8. 동방 정교회 영성
9. 영성의 민주화 : 피정 운동,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
10. 결론
[서론]
. 20C는 다방면으로 변화의 시기로, 포스트모더니티 시대로 불림
. 모더니티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자신감) → 정돈된 세계관, 인간 발전에 대한 믿음, 낙관주의 출현
. 배경 : 계몽주의 시대, 산업 혁명의 진보로 강화된 세계관
. 위기 : 진화론, 마르크스의 도전, 심리학의 탄생, 세계대전, 전체주의,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 변화 : 유럽의 종말, 소련의 상승과 하락, 식민주의 종식, 유엔 유럽 연합 등 국제 기구 설립, 국제 여행, 통신 혁명
. 포스트 모더니티 : 단순한 낙관주의가 통하지 않는 문화, 고정된 사고와 행동 체계 붕괴, 다원적 이해,
1. 영성에 대한 영향
. 20C 상황의 변화는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끼침,
(1) 유럽에서의 제도적 종교 감소 ← 신뢰 상실의 결과
(2)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를 구분 짓던 경계 붕괴 :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종교간 대화로 확장
(3) 기독교는 진정한 세계적인 종교가 됨
. 20C의 다양성 안에서 기독교 영성의 분위기 드러내는 소수 인물과 운동 추려보기
2. 예언적-비판적 유형
* 주석 :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에서는 연대기별로,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수덕적-수도원적, 신비적, 능동적-실천적, 예언적-비판적 유형이다.
. 20C 영성의 특징 : 영성에 대한
(1) 신비적 접근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SBNR)
(2) 예언적-정치적 접근에 대한 추구가 두드러짐
[토론]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적 특징들을 종합한 것,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부름, 정적주의적 해석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사회적으로 비판적 영성을 옹호하여 종교나 국가 권력과 갈등이 있거나 주변부에 밀려난다.
. 샤를 드 푸코, 에블린 언더힐, 디트리히 본회퍼, 시몬 베유, 도러시 데이, 토마스 머튼
2.1 샤를 드 푸코 (1858-1916, 프랑스-사막-알제리, 샤를 드 예수 수사)
. 1901년 이후 영성에 영향
. 귀족, 쾌락주의, 불명예 제대 후 모로코 탐험
. 영적 안내자 아베 위블랭에 의해 회심 후 (시토회) 영적 절박함으로 나사렛에서 은수사로, 클라라 수녀원의 정원사, 사제 서품 받은 후 사하라 사막 베니 수도원을 거쳐 알제리의 투아레그족과 함께 살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사전 만들고, 문화를 배우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삶, 묵상기도에 근거하여 홀로 관상적 삶을 살다 프랑스 식민 세력에 대항한 베두인에 의해 비극적 살해
. 새로운 수도 공동체 설립에 열망 있었으나 사후에 새로운 영적 운동에 대한 영감이 되어 사후 발전
→ (예수의 작은 형제회, 자매회) 세계대전 후, 4-5명씩 개발 도상국이나 가난한 지역에서 이웃과 함께 그들을 위해 사는 ‘관상적 환대의 현존’의 삶(공동기도와 침묵으로 시작과 끝, 생계 유지)
2.2 에블린 언더힐 (1875-1941, 영국, 성공회-가톨릭)
.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비주의 저자, 신비주의에 ‘대중적’이해 촉진 및 전달이 목표
. 영국 피정 운동 개척자, 국교회 첫 여성 유력자, 세계대전 사이에 성공회 영성 유지
. 사회주의에 대한 교감, 영성의 사회적, 윤리적 차원 주장, 헌신적 평화주의자
. 국교회에서 태어나 성공회 교인이 되고, 가톨릭 평신도 지성인 바론 폰 휘겔(신비주의 작가, 모더니스트, 신학과 영성을 현대와 대화하게 하려고 노력함 p266) 에게 영성지도 받음
2.3 디트리히 본회퍼 (1906-1945, 독일, 루터교, 나치의 정치적 순교자, 예언적-비판적 영성의 대표 예)
. 20세기 영성과 신학의 연결 대표인물
. 가톨릭 : 칼라너,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 개신교 : 위르겐 몰트만, 판넨베르크,
. 성공회 : 로완 윌리암스
. 『값비싼 제자직』 : 독일 교회가 루터의 기본 신학과 영적 통찰을 훼손한다고 독일 교회에 비판적,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자의 희생적 의무로부터 분리(정치 참여 없는 독일 기독교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 기도와 공동체의 훈련이 있는 삶 +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는 것
. 영국 미르필드(성공회 수도 공동체) 영향으로 핑켄발데에 수도 공동체 설립, 비공식 신학교 설립
. 『성도의 공동생활』 훈련 : 루터교회가 상실한 중요한 영적 도구의 회복 열정, 정기적 성경읽기 묵상
. “종교성 없는 기독교”, “미친 운전사가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운전사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 사는 삶
2.4 시몬 베유 (1909-1943, 프랑스 유대인, 기독교 경계선의 무세례자)
. 1938년 조지 허버트의 시 “사랑은 나에게 환대하라고 명령했다”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적 체험
. 1942년 도미 후 런던에서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영양실조로 사망
. 『뿌리내림』, 『신을 기다리며』(‘주의(attention) 영성’ : 주의력은 기도의 핵심, 고통 받는 이웃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능력의 핵심,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주의력) 경향, 구원은 기다림)
.‘자아’
. 자기 내어줌으로 온전해 지고 자율적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
. 진실한 자아의 발견 : 삼위일체의 자기 포기 안에서 발견
. 참된 자아의 창조 : 성령이 영혼 안에 떨어진 씨앗이 되면 그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 희생의 영성 발생 ∴ 그리스도 십자가 참여는 타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도록 부름 받은 것
. 프랑스의 동료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살다가 영양실조로 사망
. 기독교는 고통에 대처하는 초자연적 도구
2.5 도러시 데이 (1897-1980, 미국)
. 사회 정의의 영성을 촉진시키는데 가장 영향 끼친 인물
. 노동 운동가, 언론인, 임신 중에 가톨릭 개종하므로 대인관계 단절
. 급진적 정치는 소외를 드러내고,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 해결책을 제시함 (사욕 없는 사랑과 포괄적 공동체)
. 피터 모린(프랑스 철학자)의 영적 조언, 독서 지도 → ⌜가톨릭 노동자⌟ 운동 시작 (1933)
. 그리스도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도록 나타나야 하는 분으로 사회 정의가 핵심이 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영성
. 환대의 집 : 자발적 가난 수용한 회원(평신도)들, 성찬과 공동 기도가 생활 규칙 중심, 공식 교회 승인 없음 ← 베네딕트 『수도규칙』, 프란체스코의 자발적 가난, 리지유의 테레사의 “작은 길”
2.6 토마스 머튼 (1915-1968, 프랑스, 로마 가톨릭, 루이스 신부)
. 2차 세계 대전 중 아내와 자녀 사망 → 가톨릭 개종, 시토회(테라피스트) 입회 → 겟세마네 수도원
. 영성과 신학의 재통합, 현대인 위한 관상, 수도 생활, 기독교 신비 전통 명료한 소개, 문학적 재능있는 저자, 에큐메니컬 우정, 기독교와 불교간 대화에 공헌, 사회 정의와 세계평화 문제에 대한 헌신
. 『칠층산』(1948),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1966) 세계를 관찰하는 탐구자, 방랑자의 삶
. 자서전식 글쓰기, 거짓 자아로부터 진정한 자아로 가는 여정에 대한 몰두, 개인주의에 맞서 타자와 교제와 연대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삶의 양식 재해석 (1960년대초 두 번째 회심)
∴ 영적 삶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관상적 자각
i) 철저한 독거의 삶으로 은수 생활
ii) 예언자적 입장을 강화한 저작 : 민권운동지지, 냉전 비판, 베트남 전 반대 로비
iii) 아시아 종교(불교)에 대한 관심
3. 해방 영성
. 사회 정의에 관심 갖는 영성 (20C에 발생)
. 로마 가톨릭에서 사회 교육 시작 : 1891년 레오 13세의 노동회칙, 1931년 비오 11세 회칙에서 강화 1960년대 초 요한 23세 ‘시대의 징조 읽기’, 1971년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모든 사역, 선교 및 영성의 핵심에 정의가 있다는 것을 확립 → 교회의 선교 중심에 사회 분석이 중요함을 지적
. 해방 신학과 영성의 특징 (1960년대 후반 라틴 아메리카 ~ 1970년대 발전)
. 불의한 구조에 대한 비판과 극복하려는 투쟁에 근거한 성찰과 실천
. 이러한 실천이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이며 사회 정의를 촉진시킨다
. 특정 범주의 사람들의 존엄성 손상시키는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 경제적 빈곤, 인종 문제, 성 불평등, 지구 환경 책임 문제
. 핵심 : 성경(새로운 출애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견되는 죽음에 대한 승리)
영적 지도는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장하는 것을 도울 목적으로 영적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관계를 맺는 단순한 관계 같지만, 인간관계는 성장하거나 약해 질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의식 성찰을 통해 의도적으로 선택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원인을 인식하지 못 한 채 변화가 발생한다.
영적 지도자는 피지도자와의 관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관리이다. 영성지도에서 ‘관리’는 영신수련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검토나 조직적 발전이 없었다.
심리나 정신분석학 분야의 관리 이론과 실천을 적용하고 있다. 관리의 초점은 관리를 받는 사람에게 맞추어지고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성장에 맞추어 진다.
1. 영적 지도에서의 관리
1) 목적 : (p218) 피지도자가 하나님 체험을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도와주는 능력 키워주기
A.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B. 영적지도자가 더 효율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돕고
C. B를 막는 저항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
“영적지도자의 개인적 성장을 돕는 것” : 영적 지도자를 유능하게 되도록 도와주는 것
. 관리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경우
(1) 특정한 피지도자로 인한 문제
(2) 영적 지도를 잘하고 있다는 확인
(3) 관리자의 영적 지도 방법 알기 위해
2) 방식 : 영적 지도 하는 방식과 유사 (체험과 믿음의 삶에 초점 맞춤)
(1) 체험 : 영적 지도자의 영적 지도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2) 믿음의 삶 : 피지도자를 향한 영적 지도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믿음에 초점
3) 관계에서 중요한 것 : 신뢰
.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모험 (결핍, 평가에 대한 두려움) : 성령, 자신, 관리자를 신뢰 해야 함
(1) 관리자 : 영적 지도자에게 질문할 때 화를 내거나 지적할 가능성 있음
(2) 영적 지도자 : 관리자에게 화를 내거나 방어적 태도, 장점과 한계까지 관리자에게 노출 → 하나님과 관리자와 깊이 있는 관계 맺어야 건강
4) 협력관계형성에 필요한 전제조건 : 동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성장 추구한다는데 동의)
. 예 : 영적지도자로서 개인적 성장과 자신에 대한 확신 가지는 것 → 6주 이후 안정권
(관리자) 체험을 표현하도록 돕기, 영적 지도자의 저항 느낌
(영적 지도자) 관리자의 조급함, 직선적 표현 → 내면의 두려움과 믿음의 부족 직면, 인정
2. 관리에서 발생 할 수 있는 문제
1) 저항과 전이 반응
- 저항을 파악하여 대처하므로 도리어 도움이 된다.
- 개방과 경이의 태도 : 심문하는 태도에 반대되고, 성장하려는 분위기 조성
- 관상적 태도의 초대 : 영적 지도자의 동요, 감정 쉽게 감지 (i-message, p216-217)
. 감정을 다루는데 익숙한 피지도자들은 과거 경험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감정들을 말해주고, 회기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관련된 감정들을 새로이 경험하기도 함
. 그러나 피지도자가 과거 감정을 말하는데 머물기를 원하고, 현재감정을 표현하는 위험을 피하려 할 때 ‘그 일에 대해 지금 무엇을 느끼시나요?’물어보므로 현재 순간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새로운 기회를 주도록 한다.
. 감정 또한 혼돈 야기 가능 : 너무 한쪽에 묶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함 (피지도자, 리에네우스)
→ 경험의 단면만을 진리의 유일한 길로 삼고, 하나님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의 위험함 (어떤 것을 우위에 두고 의식적인 선택을 할 때 그것에 압도당하고 갇힌다.)
. 한 없는 눈물을 흘리는 피지도자의 경우의 예에서 “생각에 매몰된 사람에게 감정에 눈뜨게 하고, 감정에 매몰된 사람에게 생각에 눈뜨게 하는 것이 중요”
2) 지도자들이 경험하는 감정들
. 감정은 내면 뿐 아니라 회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주의가 필요한 감정이 있을 경우, 감정은 회기 동안 다시 떠오르는데 피지도자의 이야기 안에서 연관성을 분별해야 한다. (ex) 할아버지와 강둑 걷는 소년 : 잠시 슬픔, 강한 슬픔, 계속 슬픔 (161)
3) 수퍼비전에서의 감정들
. 회기의 특정 순간 경험했던 감정들을 기억하는 것이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됨
a. 아무 감정 없는 것도 검토 필요
b. 회기동안 일어난 감정을 불신하는 지도자들의 경우 이유를 찾아보기
. 회기 중 경험한 감정 분별하기 위한 노력에는 열매가 있다. (혐오감의 예, 162)
A. 지도자의 삶과 관련된 것인지
B. 회기 중에 일어난 일과 관련된 것인지
C. 피지도자와 나의 관계와 관련된 것인지
D. 앞 3개의 조합인지
5. 생각들
. 영성지도에서 생각 사용법 : 피지도자가 ‘자기 생각에 갇혀’있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피지도자가 경험하는 생각들 (by 칼 라너) : 이미 경험했으나 말로 표현해 보지 못한 영역
. 피지도자는 자기 경험, 아는 지식을 아무 감정 없이 다 말할 수 있다.
. 자기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과정에 참여하면 하나님 경험이 찾아옴 : 피지도자들이 경험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로 풀어내려 애쓰고, 느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묘사하려 애쓸 때 신비와 발견의 세계에 들어간다. 영성지도에 놀라움과 경외의 순간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 임재 경험)
2) 영성지도자가 경험하는 생각들
. 지도자의 다른 소명에 따른 반응을 하고 싶어지는 유혹 (교사, 의사, 부모..) → 주의를 흩뜨리는 여러 생각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분주해질 때
a. 모든 생각을 내쫓아 버리는 반응으로 피지도자에게 도움이 될 생각을 놓쳐버린다.
. 지도자에게 올라오는 많은 생각 중 어떤 것이 피지도자와 하나님께 반응에 도움이 되는지 결정하는 것 : 지도자에게 필요한 분별 기술 (166)
b. 해석을 하는 경우 : 지도자들은 의미하는 바에 대한 확고부동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단지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 말 것.
3) 슈퍼비전에서의 생각들
. 생각, 개념, 설명, 이론, 규칙, 해석, 교리 설명으로 가득찬 회기 : 지도자의 반응을 탐색하고 실제 대화를 할 수 있는 전략 학습 가능 → 대화중에 끼어들어 피지도자의 경험과 연관시키기
. 해석들로 가득찬 회기
a.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지도자에게 물어볼 수 있음.
b. 해석이 중요했는지 함께 분별해 보기
c. 수퍼바이저와 지도자가 역할극 해보기
d. 지도자들이 열린 해석을 내리는 기술 연습하도록 훈련하기
e. 해석을 마음에 간직한 채 반응 제시하는 기술 연습하기
6.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경험들
. 감각, 감정, 생각에 자신을 개방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더 잘 의식하게 되며, 한 가지 이상의 차원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경험
. 이미지와 은유, ‘아하!’의 이해의 순간, 갈망을 휘젓는 일등이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문을 제공
1)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피지도자들의 경험들
. 피지도자들이 경험할 때 지도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 신체, 기분, 에너지의 변화, 한숨, 눈물, 침묵 등 (기질에 따라 다른 반응)
2)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영성지도자들의 경험들
. 영성지도자가 경험할 경우 나눌 것인지, 어떻게 나눌 것인지 분별 필요
. 나눌 경우 에너지가 지도자로 옮겨지지 않도록 할 것
. 피지도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주제로 넘어 갈 것
3) 수퍼비전에서 동시에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경험들
. 피지도자들을 침묵 속에 있게 하거나, 경험의 다양한 차원을 강조해 주거나, 경험을 마무리하고 원래 대화로 돌아가기
.살아 가는 모든 순간은 기적이다.호흡,배변 등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전에는 기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의식할 때나 의식하지 못할 때나 우리 삶과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계시다”(144)
∴모든 것을 채우시고 보존하시는하나님과의 관계,자신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경이와 은혜이다.
이렇듯 우리 몸의 생리학적 요소들 뿐 아니라자신의 경험과 세상에 대한 경험들역시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과 경험을 관상적으로 보기.
.주제:세상과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 여러 방법을 탐색하고 이런 이해가
(1)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
.모든 범주의 인간 관계에 있는 모든 차원의 경험 포괄하는 영성지도 모델
(2)영성지도 수퍼비전 실습에 대한 이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
.경험:생각,감정,감각 모두 하나님께서 의사소통하실 때 사용하시는 차원이다.(163)
1. 가정들
1)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한 핵심 가정
.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나 자신, 우리, 세상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임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증거한다. 성육신은 악의 존재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에 계속 참석해야 할 필요성도 인정한다.
. 인간이 그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일상과 세상 속에 현존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
. 지적, 정서적, 신체적 반응을 더 의식하게 될수록 세상 속에 계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능력이 자라고, 하나님의 통치에 더 풍성히 참여하게 된다.
2) 수퍼비전에 관한 가정
. 수퍼비전의 목적 : 영성지도자들을 도와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도록
. 수퍼비전의 초점 : 각 회기는 영성지도자들의 특정 지도 회기에 대한 구체적 사실 다루기
. 수퍼바이저들은 자신의 신체, 정신, 감정 등을 도구로 회기와 관련된 동력들과 조화 이름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이 회기와 관련된 동력들을 잘 인식하고, 지도자의 심리 상태와 경험들이 동력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 수퍼비전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회기에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 하기 위해 노력하게 돕는다.
. 수퍼바이저들은 역할극, 예시 통해 배울수 있도록 기술들을 몸소 보이기도 한다.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과 함께 협의 질문들을 놓고 논의한다.
. 수퍼바이저들은 지도자들이 잘하고 있는 부분을 인식하고 기뻐할수 있도록 돕는다.
2. 인간 경험의 차원들 : 감각, 감정, 생각, 융합
“세상은 하나님의 장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
.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1) 우리 관계가 우리에게 도전하고 움직여 가는 곳
(2)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곳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믿음의 렌즈로 세상을 볼 때,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세상에 참여할 때 거룩을 감지하고 반응할수 있다. → 타인과 동시에 자기의 인식(?) : 친구와 이야기, 산책, 그림 감상 등... 하나님 경험
“인간의 경험을 영적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타자들에게 현존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바로 이런 능력”(칼 라너)
. 공동체, 사람, 예술 작품, 자연과 관계중의 상호작용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호출
. 그 당시이든 회상의 시간이든 시선이 하나님께 이끌리고 있음을 감지할 때 자신을 더 풍성히 알게 되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자기 인식 능력이 자람)한다.
→ 임재를 의식적으로 더 경험하고, 풍성한 믿음을 향유하게 됨
. 수퍼비전 받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시선을 둠과 동시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경험을 파악할 수단(?)들 파악(중요한 질문들) : 몸, 감정, 정신 등에서 어떤 정보를 감지할 수 있는가? 혹은 피지도자들의 특징을 아는가? 그들의 몸, 정신, 감정에서 어떤 것을 감지하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가? (150)
→ 몸은 이러한 탐색의 과정을 통해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므로, 몸은 임재를 구하는 민감한 도구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셨는데... 때로는 "내가 너의 열망을 안다"는 듯이 주제 넘게 행동했던 상황들을 되돌아 보게 했다. 책에서는 육체적 장애 부분에 대해 주로 거론 한 것 같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정서적 장애를 가진 경우들이 있고 나 또한 유사한 장애가 있기에 장애를 가진 타인을 잘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열망을 다 안다는 듯 주제 넘게 실수 하는 경우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나 또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시절이 있어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너무 현실에 틀에 박힌 내 스키마적 기도를 한 때를 떠올린다. 정말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영성지도자의 역할 같다.
돌보는 사람이 돌봄을 받는 사람과 얼마나 조화하느냐에 따라 그 질이 결정된다는(347)말에 2016년에 뇌졸중 제자의 훈련을 돕던 시기가 생각난다. 내가 먼저 내안에 스트레스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처리 하지 않은 상태로 타인을 돕겠다고 나섰던 경우이다. 결국 제자를 잘 도와사회에 복귀하긴 했지만 우리 둘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어쩌면 내안에 처리되지 않은 스트레스들이 제자를 돕는 돌봄 상황에서 비인격적으로 발현되었을 꺼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비행중에 사고가 났을때, 산소 마스크를 보호자가 먼저 써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의 영성지도 또한 어쩌면 영성지도자들이 넘어야 할 산인 것 같다. 자신은 항상 안정적인 장소에서 피지도자를 맞았다면 피지도자는 그 장소가 안정적이 되기 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영성지도자가 어디서나 환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훈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더 관상적으로 만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나 다워지는 연습은 어디에서건 마음을 놓고 경청하는 영성지도자로 준비되는 과정에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장애피지도자의 경우는 p350에서처럼 피지도자에게 편하고 불편한 것을 미리 말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지도자가 실수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안전장치인 듯 하다. 이는 장애가 아닌 경우에도 중요한 부분인 듯 하다. 사람마다 아킬레스 건은 다르니까...
영성지도 수퍼비전을 주제로 책을 읽으면서 이번 장에서처럼 지도자와 수퍼바이저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이 감동스럽고,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p370에서 저자가 수퍼바이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영성지도 시간에 자신의 모습을 창을 통해 바라보는 부분이 꼭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 수퍼바이저는 영성지도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분에서 내 마음에 희망이 느껴졌다. 나는 나를 잘 모르지만 영성지도를 통해, 그리고 영성지도 수퍼비전을 통해 내안에 인지하지 못하는 나를 다양한 상황에서 인지하고 알 수 있게 해주어서 내가 더 이 땅에서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마 11:29-30, 메시지성경) 익힐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최근 대한민국에도 해외 유입인력이 엄청 많아지면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사람들이 많이 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도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이 (특히나 노동자로 왔을 때) 힘들꺼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사회가 꿈을 찾아온 그분들을 잘 안아주고 바르게 인도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9장에 있는 내용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좀 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은 또 내가 앞서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림에 살 때 낮에 도림천에 나가보면 외국인 어린 엄마들이 아가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고, 그들끼리 마실 나온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공부 할 때는 또 다르게 생각하는 나의 이중 잣대를 발견했다.
책에서는 다중문화에서 오는 공동 문화개념을 이야기 했는데, 요즘은 같은 20대 안에서도 문화가 다른 것 같다. 20대 후반들과 나눈 이야기 중에 누군가는 호감을 갖게 되고 누군가는 비호감을 갖게 되는 경험을 했었다. 그래서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이 다문화 상황에서 뿐 아니라 동질 집단이라 생각되는 가운데서 진행 해봐도 서로 참 다른 문화에 있음을 인지하게 도와줄 것 같다.
공동문화를 정의하고 가치와 행동양식을 탐색하고 내가 가진 특권과 억압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공동문화는 학습된 생활양식이라고 했는데 (p311, 313.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문화권 내에서라도 서로의 다른 점과 유사점을 찾아보는 것이 첫걸음 이다.
공동 문화 지도를 그리고 핵심 문화를 정의하고 핵심 가치관과 행동 목록을 정리해 보는 것은 그동안 당연하게 해왔던 자신의 일상을 분석해 보고 객관적으로 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 그래서 공동문화 지도에서 내적 갈등 영역이 밝혀 질수 있는 것 같다.(p319, 자기인식)
얼마 전 만난 제자가 나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했다. 너무 뉴스도 문화도 관심 없고 신학과 공부에 치우쳐서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하나님 아닌 것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누군가는 좀 하나님 쪽으로 치우쳐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책에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가치 인식하기”(p321)가 있었다.
나는 내가 가치를 두는 것에 나의 모든 시간을 쓰기로 한 것이고,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책을 근거한다면) 뛰어난 인간이 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특권과 억압에서 억압을 인지 못하는 것도 불쌍하지만,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p327) 슬픈일 이라는 생각을 했다. 감사 할 수 없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으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배우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도 슬프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인이 보기에 더 누리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 우울증에 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히틀러가 있고, 자신의 특권을 남용하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 할 수 있는데 문화 지도를 그리는 것은 자신을 직면하는 도구가 되는 것 같다. 직면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책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문화의 기원을 탐색할 때 하나님과 더 친밀해진다고 표현한다.(p340)
문화는 안경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영성지도를 하다보면 분명히 피지도자를 내 시각에 맞춰보려고 하므로 그를 관상적으로 보는 것에 방해가 될 것 이다. 최대한 내 안에 틀을 확장하고 안경이 하나님의 안경이 되도록 하여 어떤 피지도자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피지도자가 알아갈 수 있는 그런 영적 동반자가 되고 싶다.
두 개의 차원을 대단히 복잡하게 설명했는데 뒷부분의 예화에서 개념이 거의 잡혔던 것 같다. (그래도 어떤 부분은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고...)
안드레아와 메리의 대화록을 읽으며 이상한 부분을 못 느꼈다. 아트가 295페이지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다시 가서 읽어 보았다... 메리의 조급함이 내안에도 있음을 느꼈다. 나의 이슈도 항상 ‘조급함’이었다... 머물러 있기 보다 달리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영성지도를 실습하면서 많이 직면하게 된 부분이고 나 자신을 알아가게 된 부분이다.
불안정한 가운데 누리는 안정감.
수퍼비전의 하이라이트는 메리가 안드레아에게 갈등 상황을 열어주어 진짜 안드레아가 ‘착한 이미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으로서 관계에 있어서 직면하는 연습을 많이 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악역을 많이 했지만, 그래서 가장 많이 싸웠던 학번과 10년이 넘도록 가장 자주 연락하고 친하게 지낸다. 갈등을 자주 만나봐야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긴장하거나 화내지 않고 이성적으로 반응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메리 안에 이런 부분을 발견한 것이 신기하고 메리를 통해서 선교지에 있을 동안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머무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 나도 영성지도자의 자리에 있다면 매일 ‘성과’가 있는 영성지도를 위해 피지도자에게 자유를 주지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안드레아의 그 작은 사례에서 이렇게 많은 역동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발을 못 뺄 것 같다.
한국 안에 아직 영성 지도가 많이 보편화 되지 않은 상황이라 법적 자료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초반에 영성 지도의 길을 닦고 계신 많은 교수님들이 힘써야 할 부분이 참 많겠다는 생각도 들고, 선구자의 자리가 쉽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 외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참 많다는 생각도 들고, 지역적으로 혹은 분야적으로(특히나 횃불트리니티 출신으로 영성지도 분야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어서 사례에 나오는 일들이 발생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예측이 들었다. 서로 조심해야 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잘 소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성지도 시작 할 때(2회기) 작성하는 서류를 꼼꼼히 잘 만들어야 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교회에서 인사할 때 공동체 내에서 허그는 가능하지만, 영성 지도시에 허그는 하지 않는 다는, 무언가 피지도자들에게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지도자가 최선을 다해야 겠다. 가장 당황했던 부분이 ‘비밀보장 및 익명성’부분이었다. 작은 사회에서 진행되는 영성 지도와 수퍼비전으로 인해 인력들의 교차지점(지인들이 연결될수 있음. 한다리 건너 지인)이 있다는 것은 항상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도덕적 문제와 위탁의 부분(246-249)은 가능하면 그런 경우들이 안생기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하며 읽었다. 참 경계가 애매모호 할 수 있는 부분이겠다.
[토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을 읽으면서도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을 돌아볼 때도 믿음과 심리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 또한 심리적, 인성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말씀의 사역(개인적 해석)이나 편협한 기도 등이 발생하지만 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것 같다. 지도자가 인지하고 알 때 영성지도로 알려 줘야 하는지(직접화법 아니고)? 혹은 영성지도 식으로 알려주려고 할 때, 문제 되는 부분에 피지도자가 머물려고 하지 않고 다른 쪽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는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