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다이아몬드> 4장. 체험이라는 칼끝

 

바라봅니다.

 

눈 감으면 내 안에 하나님 바라보고

눈 뜨면 세상 속에 하나님 바라봅니다.

 

내 안에 계신 주 날 사랑한다 하시고

세상 속에 하나님 서로 사랑하라 하시네

 

눈 감으면 내 안에 하나님 바라보고

눈 뜨면 세상 속에 하나님 바라봅니다.

- 이강학 -

 

리처드 로어 저. < 불멸의 다이아몬드>. 김준우 역.&nbsp; 한국기독교연구소. 2017.

 

1. 종교적 상징(은유)의 의미

. 종교는 개인적 의미와 진리를 가르쳐 준다.

. 개인적 진리(깊고 영원한 의미, 영원한 철학 전통) : 상징, 은유, 성스러운 이야기 같은 보편적인 지혜로운 전통에서 찾아짐

(ex) 부활 : 종교적 은유 (보편적 진리 주장)

∴ 은유

(1) 은유는 신비에 정직(의미가 깊어서 ‘끝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하므로 종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 예수님의 은유 사용 (명료하지 않은(할 수 없는) 영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탁월한 은유 사용[1])

   (ex) (요 10:16) ‘다른 양’ →오직 한 떼

         (요 17:21-23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타자성을 극복해야 이루어짐

(2) 많은 의미를 내포함 (문자 : 의미의 가장 낮은 최소한의 단계)

(3) 은유에서 긴장과 갈등 발생

(4) 단순한 상징은 ‘현관’ : 겸손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다가가기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상징의 세계를 읽어낼 능력)

 

. 겸손하고 공경하는 자세 : 내면의 모든 공간을 동시에 열어놓는 어려운 과업

- 토마스 머튼의 부처이야기 (그림자와 겉모양 너머에 도달)

. 놀라운 실상을 발견하기 위한 연륜의 필요 (반사 작용(묵상의 반대)은 에고 중심, 자기 기준)

. 과학자들 조차도 은유 필요하다고 인정

 

상징 : 실체를 체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상징 없이는 체험을 체험하지 못한다.

     (時와 전례(liturgy)는 경험을 정의하지 않고 그 자체를 준다.)

. 상징의 역할 : 삶의 핵심적 의미를 새로운 틀속에서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게 함

   . 포스트 모던에서는 사물이 의미가 없는 세계라고 하므로 사람들은 매우 외롭다. 사람들은 의미 없이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상징은 의미를 주는 힘이 있음(매일 아침 일어나게 만드는 “의미” – 종교가 해야 할 역할)

. 의미 : 개념 이전 단계, 말에 예속되지 않으므로 비합리적으로 보일수 있지만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상징으로 드러나고 간파되기를 기다린다. (ex) 석양, 게르니카 : 느끼는 감정이 살아있음과 연결되어 있고, 진실함을 느끼게 됨→위안과 만족이 일어남 (카타르시스, 정서적 정화(성사))

 

. 보편적 은유 : 나무, 물, 동물, 인간의 나체상 – 다른방식이지만 사람들에게 작용(해석)

  - ‘우리를 저 너머로 인도’ (훌륭한 종교의 역할)

    (ex) ‘인격’ : 하나님과의 인격적 주고받음을 가능하게 함

      ∴ 하나님의 실재를 열기 위해 필요한 은유

. 종교가 은유와 상징의 진리를 알았으나 계몽주의 이후 부터는 합리적, 증명 할 수 있는 것을 ‘실재’와 혼동하기 시작함 (계몽주의를 통한 퇴보)

. 종교가 대세의 흐름에 따라 합리적이려고 하는 노력이 ‘묵상’이라는 대안적 의식을 상실하게 함

→ 의식보다 높은 초 합리적이며 초 인격적, 그 자체가 초월적인 단계에 접근하는 길을 잃어러긴 경우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적 믿음 체계에 대한 대부분의 내적 체험을 상실했다”(렉시오디비나?) : 오늘날 종교의 문제 핵심이며 올 세대에게 심각한 문제

→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신론 : 체제가 선택한 논리와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자기폐쇄적인 합리적 체제

. “보편적” 개념은 나의 특성이 없는 것으로 에고(개인 혹은 집단)는 자기 집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보편”보다는 특별, 우월, 개별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 타자와 연결시키는 것 대신 계산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진짜 자기를 찾는 일 대신 논쟁하기를 더 좋아한다.

 

. 부활 : 효과적인 상징, 인간의 마음이 추구하며 갈망하는 위대하며 아름다운 것

. 죽음에서 해방되는 보편적 패턴

. 그리스도의 신비 :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 풍성하신 분 (거대한 우주 뿐 아니라 불결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포용함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풍성함도 포함)

   . 그리스도 : 하나님의 몸, 물질화된 하나님의 이름

      (1) 부활한 그리스도 : 역사의 예수

      (2) 영원한(우주적) 그리스도 : 삼라만상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세상의 구주, 알파와 오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주적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예수의 의미를 작게 만듦 : 부족신

   .  우주적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을 뿐 아니라, 인간적 (몸의, 일상의) 경험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므로 놓치는 것들이 많다.

      ∴ 일상, 일상의 경험 속에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체험이라는 칼끝’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슴의 부활 혹은 역사 자체의 부활이 일어나도록 만들지 않음

   .  그리스도의 신비가 진짜 자기의 전체 여정(신적 잉태, 사랑받는 자의 지위, 십자가를 거쳐 부활에 이르는)을 위한 지도가 됨(그리스도의 여정=진짜 나의 여정으로 해석됨?) - 칼융(p105)

 

. 부활 : 변하지 않는 것, 보편적인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부활 (p106하~)

. 가짜 자기는 매 순간 마다 닥치는 문제들과 스스로 만든 목표들에 의해 힘을 얻고

. 진자 자기는 일치와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것, 깊이 공명하는 것(의미)를 필요로 한다.

 

. 비이분법적 의식 : 실상을 분열되지 않은 방식으로 보는 것 (ex : 삶과 죽음은 전체의 부분)

   -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목표를 참사람의 운명이라 부르셨다. 그의 이러한 삶이 우리 모두를 위한 대표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1] 사람에 따라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꺼이 오해를 감수하심

 

2. 호흡(입김)과 진흙의 춤

. 호흡과 단순한 진흙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나의 드라마가 영원히 시작되었다. 물질과 정신이 한데 묶여졌다. 신적인 것과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서로 침투하고 서로 드러낸다. 무형의 일자가 ‘아담’의 형태를 취하면서, 자신이 잠시 동안 취했던 자아를 내려놓으므로 무형의 일자로 되돌아 가게(죽음처럼 보이지만 승천) 한다. “내가 너희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요14:3) →부활 : 개체로 태어나 다시 하나님에게(존재의 근거) 되돌아 간다는 진리

∴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며 생명을 감사할수 있게 한다.

. 그리스도가 역사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 바깥에잇는 신적 대상을 찾도록 배워왔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신적인 목표를 실현 하는 것이 부활(종교적 변형=형태의 변화)이다.

→ 진짜 자기의 최종적 모습 : 예수님과 하나님이 모두 선하며, 일치(합일)해 있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누리는 존재

 

3. 우리의 종착지

. 부활

   - 성육신의 논리적 결론이자 완전한 결말

   -  세상, 육신, 물질이 영원한 진리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  입증할 기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체험해야 하는 온전함이다.

   -  한 순간이 모든 순간들의 의미를 계시하는 때

. 부활하신 그리스도

   -  인간의 최종적, 완전한 운명에 대한 이콘

   -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보증 ∴소망으로 뜻깊은 삶을 살수 있다.

. 예수님의 상처

   -  사람임을 알려주심

   -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지만 부활후에도 여전히 상처가 있음

→ 예수님이 인간의 영역을 떠나시지 않았다는 것 (상처를 주고 받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부활

   -  목숨보다 큰 존재 자체, 천국을 위해 창조됨

   -  부활의 상징과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문자적 의미를 뛰어 넘어 부활을 이해

   -  “영원한 의미를 갖는 현재의 삶” : 선한 삶과 사랑의 삶 (영원)

   -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부활 시키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믿음’이라기 보다 관찰과 교육

 

. 생명은 ‘원복’의 장소로부터 왔기 때문에 멋지 곳으로 향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개별적 인생과 영원한 생명 사이에 “변화”와 “십자가”가 개입되어야 한다. (갱신 앞에 존재하는 상실 ∴상실의 아픔을 헤치고 길을 헤쳐나간 모델(예수님)이 필요)

. 구원은 처음부터 주어진 약속으로 앞을 향해, 안에서부터 밖을 향해 주어진 약속(진화) : 하나님의 신비는 모든 이전 단계를 품으며(악, 죽음, 죄까지도..) 위대하게 펼쳐진다.

→ 위험을 감수하시는 하나님 vs 안전, 효율, 통제에 자로잡힌 인간(=권태, 죽음을 의미)

. 이러한 하나님의 적극적 방향성을 알게 되면

    (믿음) 그 흐름과 함께 나아 갈수 있으며

    (소망) 그 흐름에서 쉬는 것을 배우며

    (사랑) 그 흐름속에서 산다.(평생)

 

4. 영적 원리 : 사랑과 진리

(1) 사랑만이 큰 진리를 맡을 수 있다.

. 사랑 외의 모든 태도들은 진실을 죽이고 난도질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일치를 찾아야 하며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 가슴속에서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기도의 출발점(성 테오판)

. 기도외에 합리적 정신, 신학, 체험이라는 조정 장치는 진리와 능력을 왜곡시키며 파괴

 

(2) 진리

.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아름답고 치유하는 것

. 아름다운 영혼은 선함의 조화를 인지한다.

. 그리스도인들의 분노와 멸시(=퇴보)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침잠한 것이 아니다.

. 성육신은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육화되기를 원한다. 선함을 간직하고, 진실함으로 흔들어 놓고, 아름다움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 부활 : 우리를 초대하며 유혹하는 네온사인, 죽음이 아니라 사랑(영생의 다른 이름)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밝은 빛이며 유혹.

.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현실 : 사랑은 세상을 온전한 사랑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사랑이 항상 승리한다.

. 체험의 차원에서 자기 앎과 하나님 닮이 같은 앎으로 체험되며,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간가. (ex. 친밀함) ∴어떤 하나를 아는 방식이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방식이다.

. 가장 깊고 참된 자기에 대한 추리의 체험과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서로 간에 옳은 체험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며, 서로간에 아름다운 체험이라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나의 정직한 체험이라는 칼 끝(히4:12, 말씀, 진리) 없이는 두 체험 가운데 어느 것도 진실하게 나아가지 못함

*정직한 체험 : 우리를 베어내고 찢어서 양쪽 방향으로 멀어지게 함. ∴두려워 할 것이 없음

 

 

 

여디디야 편지(2007. 07)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엇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애굽기 20:2)

 

 

“왕” .... 겨울 방학동안 수업준비를 못 한 관계로 학기의 시작인 3월이 저에겐 참 힘든 시기였습니다. 전쟁과 같은 개강 2주를 보내고... 3월 셋째주에 새벽예배를 인도하시는 분이 십계명을 2주 동안 하시겠다며 출애굽기 20:1-3절을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질책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염려“함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되시지 않음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설교자의 말씀이 학기 내내 제 맘을 울려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저의 ”왕“의 자리로 모시는 훈련을 하는 한 학기였습니다...

 

" 내가 앉아있던 그 자리 그곳에 이제는 당신이 계시네

나의 왕 나의 안에 계시니 이제는 당신의 자리에 앉으소서

나의 왕 내안에 계시니 이제는 당신만 옳습니다."

(CCM, 동방현주 “왕” 중에서..)

 

 

안녕하세요..

지난 2월 P workshop을 잘 마치고 2월 24일에 학교로 되돌아 왔습니다. 처음타는 비행기도 아니고 Y에 처음오는 것도 아닌데..이륙하는 비행기안에서 바퀴가 들려올려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며 주주룩 쏟아졌습니다..

 

“하나님..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그래서 아버지께 순종하며 떠납니다..

저의 작은 순종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대한민국을 살려주세요....

제가 순종하여 떠나겠습니다. 이 나라를 살려주세요..“

 

생각할수록 가슴아픈 S과 N이 하나됨을 아버지께 소원하며 가족과 헤어질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주루룩 주루룩 흘리며 창 아래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떠났습니다...

 

새벽마다 예배를 마친후에 정문(때론 본관)까지 갔다가 다시 숙사로 옵니다. 본관앞에서 바라보는 Y시내, 숙사에서 공학관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Y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버지.. 저 C국 사랑하는가 봐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이 우릴 향한 사랑은 자기 몸을 내어주기까지 했는데.. 과연 내가 C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C국을 위해서 내 목숨도, 시간도, 삶도 내놓을 수 있다는 걸까... 저도 모르게 “C국을 사랑합니다..‘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양다리 인가 봅니다.. 대한민국도 사랑하고 C국도 사랑하고... 목숨이 여러개 여야 겠어요^^

  

1. P 프로젝트...

사랑, 기다림.. 하나...또 다시 미뤄졌습니다. P Project 팀은 “양치기 소년”이 되었습니다. 한학기씩 미루던 학교 개교가 또 미뤄졌습니다. 학교건물은 9월이면 완공이 될 예정이지만 산 넘어 산입니다. 대외적으로 말 못 할 상황들,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점점 더 생기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점점 더 학교를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들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또 그 반면에 재정이 채워지지 않아 공사현장에서 놀고 있는 외국인 노임자(이들 입장에서 P현장은 해외출장)들이 생기고 있습니다....“이유가 뭘까요...”

 

학교가 또 미뤄진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요?.. 매순간 깊이 묵상하면서 “사랑없는 나, 헌신없는 크리스찬, 순종없는 교회, 준비되지 않은 남한...” 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순종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용서는 아버지가 하시고 사람은 무조건 사랑만 하기...”

 

S과 N이 하나되기 위해 준비되는 P...

기도부담을 받은 우리가 먼저, 바로 옆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 이해되지 않는 N도, N의 동족도....이기적인 것 같은 탈N들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하고 섬기는 훈련 열심히 해요^^

 

2. Y

E1, E2...교육은 E1과 E2로 나뉘어 집니다. 대학에서 당연히 해야 할 E와 Y 교직원이 추가로 추구하는 E가 있습니다.

Infrastructure...현재 학교의 재정이 많이 부족합니다. P의 공사현장에 재정이 없는 관계로 모든 재정이 공사현장으로 보내지기도 해서 Y담당직원들이 아주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기획실과 재무과의 분위기는 여전히 가볍지 않습니다.) 총장님은 열심히 뛰어다니십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 만나시고, 외국인들에게 정보주시고 관리해야 할 사람들을 한움큼씩 넘겨 주시고, 매달 학교로 불러들이십니다.(물론 여행경비는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겁니다^^) 하지만 손님들 초대하고, 정보주고, 영접하고... 참 많은 Y교수(P Prj. 팀 위주)들이 뒷 감당을 합니다. 그 “잡일”들이 만만치 않지만 이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두 학교의 재정을 채우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어떤 교수님들은 E2에만 집중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분이 E2사역에 신경쓰지 않으면 후원금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다른일 줄이라고 언질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후원자들에게 열매를 보여줘야 한다고요...(사실상 매학기 3-5명의 학생에게 영접시키고 계십니다. 제가 항상 부러워하는 분^^) 하지만 학교 재정이 없어서 학교가 운영되지 못한다면(infra) E1도 E2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단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심기워 져야 하고 누군가는 열심히 E2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여지는 것, 드러나는 것과 상관없이 열심히 맡겨진 것에 충성하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졸업을 앞둔 크리스찬 학생과 몇 차례에 걸쳐 깊은 만남을 갖게 하시고 필요한 나눔을 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리더이면서도 큐티도 말씀도 기도도 생활화 되지 않았던 그 친구가 지난 반학기 동안 자기 스스로 훈련하는 것을 시작하였고 7월에 마지막 만날 때 까지도 잘 훈련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C국전역으로 퍼져가는 많은 크리스찬 학생들이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리더가 되어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C국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고]

- 2월의 P Workshop을 감사히 마치고 그 진행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함께 협력하기로 하셔서 각 학부에 필요한 사람들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 7/6-7일의 P ICT Workshop을 위해 7/4일에 입국해서 현재 대전에 와있습니다. 다음주는 e-learning에 필요한 정보를 ICU(정보통신대학)에서 배우기 위해 계속 대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 Y에서 2과목의 수업을 은혜로 마쳤습니다. 항상 학기말엔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아이들에게 좀더 좋은 질의 수업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음식알러지가 있었는데 지난 4월 어느날 지도학생들과 학생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몸이 이상해서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서 그날 밤 ‘순교’에 대해 많이 기도했었습니다.(^^) 모두 토해내고 다음날 살았는데 1.5일정도 아무일도 못 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위쪽에 통증이 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 지난 겨울방학 동안 지도학생들 중 제 요구에 따라 공부했던 학생들이 전공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이번 여름방학도 제 요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신뢰가 쌓일 때 복음은 저절로 전해지겠지요?

 

[기도제목]

1. 여름방학....다음학기 수업준비와 9월에 있을 Y 15주년 기념행사 관련된 관련자료와 문서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수업준비도 자료 준비도 아버지의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할수 없습니다.

 

2. 학생....많은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교수님 우리학교 왜 왔어요?”란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아직 성급히 이야기 안하게 됩니다. 아이들과 깊은 만남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또한 순종하며 아버지가 주시는 말씀들을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지도학생들이 7월엔 영어와 여름학기, 8월엔 전공공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잘 할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주세요^^(여학생 려, 남학생 관*, 권*, 성*, 관*의 여자친구 예*)

 

3. 신입생과의 만남...9월이 새학기이고 신입생들이 옵니다. 입시기간동안 교직원들이 많은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학생들...꼭 오도록...

 

4 수업준비....9월학기 수업준비를 생가하면 가슴이 뜁니다. 수업결정에 변수가 많았는데(신입, 안식년, 교환교수...등) 결국 최종결정은 1학년이 듣는 전공 2과목을 모두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전공의 기초(3개 언어-중, 한, 영-의 전공용어)와 마음밭의 기초를 공부와 기도로 한학기동안 잘 섬겨야 겠습니다. 아버지가 부어주시는 지혜로 잘 준비하고 감당하고 체력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 부탁합니다.

 

5. 가족.....막내동생이 4학년1학기동안 재정을 준비해서 지난 6/29일에 뉴질랜드에 백만원정도를 들고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이미 학원비를 내고 재정이 없어서 이번주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막내가 더 영적으로 성숙하고 아버지를 깊이 만나는 시간되고 영어도 제대로 배워 올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만남의 축복(하나님과 깊은 교제 포함^^)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많은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둘째 동생과 할머니, 부모님의 영육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2007. 7. 8

여디디야 드림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디디야 편지(2007. 12)  (0) 2023.11.29
여디디야 편지(2007. 08)  (0) 2023.11.28
여디디야 편지(2007. 01)  (1) 2023.11.25
여디디야 편지(2006. 08)  (0) 2023.11.24
여디디야 편지 (2006. 06)  (0) 2023.11.23

저에게 큰 영향이 있는 성인이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더보기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빈손. 콘라드 드 메스떼르 저.&nbsp; 가톨릭출판사. 2010.

2.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데레사가 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가장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도 모두 다가 갈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은 길로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마태복음 6:25-32을 근거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과거에 메이지 말고 내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어린아이가 후회와 걱정 없이 지금을 살듯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길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자에게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다. 데레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지켜지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행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1) 겸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에서 어린아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처럼 영적 어린아이의 길겸손의 길이다.

  위대한 성인들처럼 완덕을 구하던 데레사는 완덕이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더불어 생명도, 재능도,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기숙학교 시절 사람의 호감을 살줄 몰라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행복한 무능(無能)’ 이라고 표현하며, 언니들과의 이별을 사람의 애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 할 수 있는 은혜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아픔, 가난, 불완전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또한 수련생들을 도와주는 부수련장으로 섬길 때 자신을 시기하며 타인보다 본인부터 지도하라고 말한 수녀에게 아 수녀님, 수녀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잘 아는 것이 참다운 겸손이다. 데레사는 겸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수투성이다’라고 생각하거나 고백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신뢰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이며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에서 가장 핵심 주제이다.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인지하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엄마에게 달려가 뽀뽀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엄마가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데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신뢰를 알고 있었다. 데레사는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항상 먼저 달려가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데레사가 표현한 예화에서, 임금이 사냥에서 토끼를 잡으려고 사냥개를 풀었는데 토끼가 사냥개를 피해서 왕의 품안에 달려들어서 왕은 그 토끼를 보호하고 친히 먹이를 주며 키웠다는 것이다. 정의(사냥개)가 우리를 쫓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심판주 되신 주님의 팔에서 피난처를 찾으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위험한 순간에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세요.. 소박한 사랑과 신뢰의 길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랍니다.

 

(3) 사랑

  깊은 신뢰가 가능한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영적 어린아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데레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예수님을 맞이하고, 삶속에서 제자로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린다.

 

  이제는 제가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아픈 것이 만약 하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평생 아프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픈 상태로 제 생명이 무척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단 하나의 은혜는 사랑으로 인해서 부서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4) 복음

  인간은 스스로 구원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바램을 이룰 수 없다. 데레사가 성모의 미소로 원인 모를 병에서 회복되고, 성탄절에 10년 동안 기다리던 마음의 건강이 되찾아 진 것처럼 우리는 못 느끼고 있는 사이에 겨자씨 비유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시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 같이 스스로 무언가 하겠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같이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레사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이사야 55:8)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말씀을 근거로, 공로란 많이 행하고 많이 주는 게 아니라, 많이 받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고 해석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들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이 귀여워합니다. 의사들이 수술할 때에는 환자들을 재웁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시 103:14)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우리 본성의 감정과 어긋나는 것입니까! 
은총의 도움 없이는, 그 교훈을 실행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결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신뢰와 사랑으로 갈수 있는 길이며, 겸손으로 가능한 길이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인 복음의 길이다. 데레사의 전체 삶에서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데 데레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가며 작은 데레사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데레사의 편지글들과 자서전을 통해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폴린 언니가 있어서 수녀원에 가려는 열망이 있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께 활짝 열어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깨끗한 영혼이다. 왜 그렇게 빨리 완덕을 바라고 왜 그렇게 빨리 예수님께 가고자 했을까. 그 모든 열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믿고 데레사는 힘을 빼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다. 14세에 가르멜에 들어가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교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15세에야 입소 할 수 있었다. 그 여정이 힘들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여정이 없었더라면 데레사는 엘리베이터 이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임금님인 아빠가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며 더욱 하늘을 소망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작은 고통 하나에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영적으로는 더 어린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수련자들을 맡아 교육하는 부수련장의 업무도 감당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자신을 살폈다.

 

  이러한 데레사의 모습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보여지는 내 모습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며, 가면을 쓴 채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는 데레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드린 것 같이 해야 겠다. 둘째,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가치를 두었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가치가 덜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진짜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데레사는 안정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을 거야혹은 내게 갈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신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할 수 있다는 신뢰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안정감을 두었으므로 자신에게 몰아치는 고난들을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작은 꽃이지만 잔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큰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현대의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뿌리 내린 신뢰가 있어야 겠다.

 

  데레사 자서전의 뒷 부분으로 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면서, 아가서 인용이 많이 나온다.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깊어질수록, 삶에서 점점 더 성숙해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1600년대의 잔느 귀용이 자꾸 생각났다. 일상에서 내면의 대화로 하나님과 소통 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1600년대 잔느 귀용은 이단판정을 받았고, 1800년대 봉쇄 수녀원에 있던 데레사는 교회 박사가 된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기회가 된다면 두 사람의 믿음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안응렬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2021.

앙드레 꽁브 엮음,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편지. 부산 가르멜 여자 수도회 역. 서울: 분도출판사. 2003.

 

[이차자료]

D.H. 워닝. "데레사의 하느님을 향한 旅程-떠남과 만남." 신학과전망. 137(2002): 135146.

윤주현.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의 길에 대하여." 신학전망. 210(2020). 194-219.

자크 필립. 사랑의 엘리베이터. 윤영희 역. 서울: 바오로딸. 2014.

정인숙.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안에 나타난 부모의 모습과 하느님의 형상과의 관계성." 신학과 철학. 15 (2009): 35-66.

정인숙. "소화 데레사를 통해서 본 신비주의 영성." Catholic Theology and Thought. 46(2003): 120-145.

콘라드 드 메스테르,빈손-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대전 가르멜 수녀원 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2019.

 

가톨릭인터넷 굿뉴스 성인목록,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saint&today=&today_tmp=&ctxtCommand=&ctxtLogOn=&ctxtSexcode=&ctxtChukday=&ctxtGaladay=&Orggubun=101&ctxtHigh=&ctxtLow=&ctxtChecked=Checked&oldrow=&curpage=1&ctxtOrder=name1%2Cgaladaym%2Cgaladayd&ctxtOrderType=&ctxtSaintId=249&ctxtSCode=&ctxtSearchNm=&ctxtChukmm=10&ctxtChukdd=1&ctxtPosition=&ctxtCity=&PSIZE=20, 20211126일 접속.

 

겸손의 성녀-리지외의성녀 소화데레사,

https://june.meson.kr/2010/10/santa-teresa-di-lisieux-saint-of-modesty.html, 20211122일 접속.

 

저에게 큰 영향이 있는 성인이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더보기
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로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는 봉쇄 가르멜 수녀로 24세의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얀세니즘이 팽배했던 프랑스에 사랑의 하나님을 회복하게 하는 그녀의 가르침은 신비 체험이나 신학적 난제풀이가 아닌 일상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그 길을 발견했는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녀가 남긴 자서전과 편지들을 통해 관찰해 보고자 한다.

 

주제어 : 리지외 데레사, 영적 어린아이의 길, 작은 꽃(소화), 겸손, 신뢰, 사랑, 복음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편지. 앙드레 꽁부 엮음. 분도

. 서론

  리지외의 데레사는 187312일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5(188849)에 가르멜 수녀로 입회하고, 24(1897930)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년 후 19971019일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데레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 짧은 생을 봉쇄 수도원에서 살던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교회 박사로 인정되었다.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작은 데레사가 성인들처럼 하나님께 도달(완덕)하고 싶은 갈망 중에 찾게 된 길이다. 다른 성인들은 큰 고난이나 성흔들을 받아 하나님께 도달했는데 어리고 작은 자신은 그렇게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완덕의 갈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길을 알려주실 것이라 믿었다. 성경을 읽는 중 잠언과 이사야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온전히 예수님의 팔에 의지해서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신뢰의 길이며, 예수님만 바라보고 인정하는 겸손의 길이며, 신뢰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길이며 이 모든 것을 총괄하여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이루는 복음의 길이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데레사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그의 가정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로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녀에게서 배우고 현재에 적용할 부분을 고찰해 본다.

 

  데레사는 언니인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의 지시로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있을 때 까지, 자서전을 기록했다. 또한 성심 수녀회에 있는 큰언니 마리와 다른 지인들과의 많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데레사 선종 1년 후 가르멜 수녀회는 관습대로 데레사의 자서전을 비공식 출판해서 여러 가르멜 수녀원으로 보냈는데, 공식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10여년 만에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의 자서전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고 표현했다. 이 당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얀세니즘의 영향으로 정의의 심판관의 이미지였던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데레사의 성물들이 전쟁에서 군인들을 보호하고, 침체되었던 선교지에 생명력이 전해지는 등의 1950년 까지 데레사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가톨릭에서는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사후 50년을 기다리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 선종 26년만인 1923429일 시복을 하고 1925517일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했다. 본 논문에서는 그녀의 자서전과 편지글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 본론

2.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아버지 루이 마르탱(1823년생)은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꼼꼼하고 논리적 이었다. 22세에 고독한 삶을 꿈꾸며 수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라틴어를 몰라서 거절당하고 알랑송에서 시계공으로 지내면서, 35세에 젤리 게랭을 만난다. 어머니 젤리 게랭(1831년생)은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던 레이스 기술을 배웠다. 그녀 또한 수도자의 삶을 꿈꾸어 오텔디외 수녀원을 찾아 갔지만 거절 당하고 27세에 마르탱과 결혼하게 된다. 데레사의 부모 두 사람은 모두 수도자 생활을 원했었다. 신혼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고해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들에게서 아홉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다섯 명의 딸이 살아남았고, 네 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어머니 게렝은 종교적 신념이 충실하고 믿음이 깊었으며 일에 열정도 있었다. 작은 일에도 성심을 다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돌보았다. 친척들과 편지로 소식을 자주 나누었는데 많은 서신에서 막내인 데레사의 어린 시절의 정보들이 있다. 데레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할 때, 어머니의 편지를 참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데레사가 4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것은 데레사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된다.

데레사에게는 4명의 언니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던 큰언니 마리는 데레사의 대모였으며, 작은 언니 폴린은 어머니 사후 데레사의 두 번째 엄마가 되었다. 몸이 많이 아팠던 레오니와 데레사의 단짝 친구인 셀린 언니가 있다. 마리는 성모 방문 수녀회로, 폴린(예수의 아녜스 수녀로 데레사에게 자서전을 기록하도록 한 당시 원장 수녀)과 셀린 그리고 데레사는 가르멜 수녀회로 입회한다. 아버지는 말년에 금치산자 판정을 받기 까지 했지만, 201510월에 데레사의 부모도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이름이 올랐다.

 

  (2)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식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부모와의 심리적 관계가 사람들과의 심리적 관계 및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데레사의 부모는 가정에서 기도, 아침 미사, 주일의 저녁 기도 등 일상생활이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마르탱 부인은 병든 하녀를 돌보고 아버지 마르탱은 가난한 사람, 임종 환자를 도왔다.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스스로 자신의 내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눈다. 철 들 때부터 엄마가 돌아가신 때까지 알랑송에서의 생활(1873-1877), 엄마가 돌아가신 4살 반부터 열 네살 까지 뷔소네의 시간, 그리고 열 네살, 크리스마스의 은혜의 시간 이후로 나눈다.

  첫째 시기의 데레사는 밝고 명랑하고 고집이 세고, 괄괄하고 순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데레사는 이 시기에 이미 사물에 대한 판단 수준이 글을 쓰고 있는 23세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표현한다. 큰언니 마리의 말은 절대로 거슬리지 않았고, 둘째 언니 폴린은 자신의 마음의 이상(理想)이었다고 고백한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등장하듯이 자신이 잘못한 것은 항상 모두에게 고백하고, 특히 아빠에게는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마리에게 전하게 해서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백 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어린 데레사에게 있었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 내용 중에 저번에 데레사는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단다. 아주 얌전하게 굴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 그럼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지옥에 가겠네... 그렇지만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가 천국에 갈 때 같이 올라갈 거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아 줄 텐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붙잡아 가실 수 있겠어?’ 엄마 품에 숨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데레사의 눈에서 똑똑히 보았단다...” 어쩌면 네 살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이 20대에 이야기할 사랑의 엘리베이터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자신의 아빠에게 나의 왕’, ‘사랑하는 임금님이라고 불렀고, 마르탱은 자신의 막내딸인 데레사에게 나의 작은 여왕이라고 애칭했다.

  마르탱 부인의 사후, 데레사의 성격이 변한다. 수줍어 하고 얌전해 졌으며 특히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 져서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어야 편했고 낯선 사람과 함께 있기 힘들었다. 그러기에 가족들은 더욱더 데레사를 잘 보살피려고 했으며, 아버지 마르탱은 예민한 데레사를 섬세하게 보살폈다. 이 시기에는 아빠와 낚시도 하러 다니고, 고해 성사를 기쁘게 하고, 엄마가 가르쳐 준 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렸다. 이러한 관상적 묵상과 기도들로 이때부터 데레사는 이 세상이 귀양지처럼 여겨지고 하늘 나라를 꿈꾸게되고, 참된 본향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8살이 되었을 때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너무 우수해서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2년 만에 학교를 도중 하차 한다. 9살이 되었을 때(188210) 두 번째 엄마인 폴린이 가르멜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고, 자신도 가르멜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해 말부터 두통이 계속 되다가 1883년 부활주일(3) 이후에 아이들은 걸리지 않는 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그해 성령강림 주일(5)즈음, 고통 중에 성모의 미소를 보고 몸이 낫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데레사는 이때의 고통이 자신이 꽤병은 아니었나 하는 마음에 가르멜에 입소해서도 고해 성사를 할 정도였다.

  데레사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깊은 마음의 기도를 했는데 수도원에 입소하면 어떤 이름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기 예수님이 떠올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불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언니를 면회 간 길에 원장 수녀가 데레사에게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이름을 하자고 해서 예수님의 친절한 마음씨를 느꼈다. 독서와 성화(聖畫)보기를 즐기면서 묵상 가운데 점점 더 예수님을 모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영성체를 받은 날에는 갈2:20 말씀을 되뇌었는데, 예수님께서 많은 십자가를 지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이 큰 은혜를 받은 위로로 느꼈다.

1885512살 무렵 피정 동안에 무서운 세심증이 생겼고 그 이후로 약 1년 반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이 무렵 기숙학교를 도중하차 한다. 세심증으로 인해 마리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마음이 편했는데 마리 언니마저 수녀원을 결정하면서, ‘오직 하나 뿐인 벗은 예수님 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데레사는 또래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만은 모든 것을 말했다.

  데레사에게 두 번의 기적은 앞서 기록한 투병중의 성모의 미소와 크리스마스의 은총이다. 데레사의 세심증과 타인에게 섬세한 반응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것 때문에 가족들은 힘든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데레사는 눈물을 흘렸다. 13세였던, 1886년 성탄절에 데레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다 하던 행사를 앞두고 아빠가 내년에는 데레사가 수녀회로 들어가니 , 다행히 올해로 끝이구나!’라고 한 말을 데레사가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데레사는 또 울음을 터뜨리고 크리스마스를 망칠 수 있었으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잃었던 마음의 힘을 되찾아 분위기 좋은 크리스마스를 지낼 수 있었다. 10년 동안 고치고 싶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 이 후로 데레사는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 져서 공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공부와 암송들 속에서 데레사는 여러 계시들을 경험한다.

 

2.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저는, ‘아주 작은것 밖에는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는 아주 작은 영혼입니다. 게다가 마음에 많은 평화를 주는 이런 자그마한 희생조차 자주 놓쳐 버립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평화를 좀 덜 누리게 될 것을 참으며 다음에는 더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데레사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하느님, 저는 모두 선택합니다. 반쪽짜리 성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 선택하오니, 저의 의지를 받아주소서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욕구를 불어넣으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작은 나도 성덕을 열망할 수 있어... 하지만 아주 곧고 짧은,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을 통해 하늘에 갈 방법을 찾고 싶어

  위대한 성인들처럼 되고 싶은데 그들처럼 되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서 그들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 올라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데레사는 자신을 많은 꽃 중 작은 꽃,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많은 붓 중에 작은 붓, 발에 밟히는 작은 모래 같다고 표현한다. 예수님 계신 곳 까지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로마 여행 중 보았던 엘리베이터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엘리베이터에 해당하는 말씀을 찾는다. 그녀는 잠언 94누가 아주 작은 자이어거든 내게로 오라라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품으로 자신을 초대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사야 6612-13을 통해서 자신을 하늘에 올려줄 엘리베이터는 예수님의 팔이라고 해석했다. 사랑의 엘리베이터는 예수님께 안기어 은혜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히려 큰 사람이 될 필요가 없이 작은채로 있어야 했고, 점점 작아져야 했다. 이것은, 막내였던 자신의 작음과 약함이 부모님과 언니들의 사랑을 받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했고, 불완전과 작음이 예수님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엄마 품에 안겨 천국에 가겠다던 그 꼬마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데레사는 자신의 작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의 바탕이 되며,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