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나)의 틀에 하나님을 끼여 맞추고 그것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내가) 기도하면서 갖는 환상인 것 같다.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도 단지 나의 느낌이 우선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에 근거한 임재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소리를 잠재우고 아버지를 깊이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작가가 말 한 대로 말씀을 읽고, 침묵가운데 머물고, 영적인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해 질 때 상처 입은 내가 치유자가 되고 상처 투성이인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작가는 영적 안내자로서 헤시카주의(p168)의 영성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헤시카주의의 순례자였던 농부는 자기 입에서 나오던 반복적인 기도에서 마음이 말하는 것에 깊기 귀 기울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함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분주함과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내 마음 깊이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집단들을 만들어내고 찾는 것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답이겠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살길이라고 알려줄 만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지난주 예배학의 과제가 안덕원 교수님이 본인의 스승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 제출하는 것이었다.
딱딱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던 예배학 수업이 내가 아버지께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맞습니까‘라고 하던 질문을 멈추고 웃게 만든 수업이었다.
그 과목의 주 교재를 쓴 분에대해 그 직속 제자가 쓴 글을 보면서 학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보다 후대들의 평가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그 글을 보면서 그제야 내가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배우는 과목에 투자하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고 자료를 만드는데 기름부으심이 없이 많은 시간이 들은 이유를 멘토와의 이야기 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은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 서있었던 내 마음의 자세가 문제였다.
MDiv 과정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공부에 기름부으심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3시간밖에 못자고 밥도 한 끼밖에 못 먹는 강행군속에서도 밤 10시까지 하는 수업에 한 번도 졸은 적이 없고 책을 읽을 때는 (전공과 다르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하기 위한 전공 수업준비는 (처음 가르치는 과목이라 공부할게 많긴 하지만..)
너무 은혜가 없고 매말라서 수업준비 할 때 마다 힘들었다.
예배학 숙제 읽기와 나의 ’강의의 고난’의 핵심은 주인이 ‘타인’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에는 밤 12시까지 하던 수업준비가 오늘은 7시경에 끝났다. 오늘 수업준비가 완벽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준비하는 과정이 예배였다.(전공 준비하면서 속상해서 운거 말고 이렇게 울어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든 삶과 순간에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더 집중하므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고 싶다. 거룩한 습관들이 내 삶에 뿌리 내리게 되면 참 좋겠다.
4장 초반에서 이야기 하는 만남에서의 긴장, 공포와 적개심이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요즘(한국 입국 2년차, 서울) 길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과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내용이다.
2001년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가 그런 적개심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이 내용을 모르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고독을 즐기며 주님과의 밀회를 우선시 하게 된 요즘 나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남에서의 긴장과 공포가 아니라 처음 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내 마음의 자리와 여유인 '환대'가 아닌가 싶다.
성인의 무릎밖에 키가 안 되는 아가가 걸어가고 있는데 아가와 상관없이 자기 길을 급히 가다가 아가를 넘어뜨릴 뻔한 아주머니 (아주머니 말로는 아들에게 우편물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아들이 중요했던 거다.)를 향해서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나를 보고 놀랐다.
5장 환대의 형태에는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치유자와 환자를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Y대(선교지의 대학)를 떠나서 일년만에 다시 학생들 앞에 서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데 책의 이 부분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10여 년전 한국의 대학생들 앞에 설 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무언가 주어야 한다'는 몰입에 빠져서 여유 없는 주인, 혹은 손님을 혼자 둔 주인이었던 것 같다.
Y대에서의 10년을 지내고, 홀로 조용히 아무것도 안하고 아버지 앞에 머무는 일 년을 지내고 난 후, 지금 학생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을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나에게 생긴 것 같다.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시간과 여유를 주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여유를 드리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 같다.
6장의 생각과 마음의 가난과 연약함을 자랑함은, 책을 처음 읽은 2001년에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고 물음표를 남발했던 부분이다. 이제는 책을 읽으며 그 물음표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2016년 한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늘의 비밀들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가난을 경험하게 하시고
더 낮아지게 하심으로
하늘나라와
더 가깝게 인도 해주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작년 한해를 돌아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큐티 본문이 출애굽기이다. 23장부터의 이번 주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며 만남(예배)을 준비하게 하신다. 매번 매일 큐티를 통해 ‘내가 할게, 내가 알려줄게’ 하시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시간동안은 혼자 분주하고 불안하다가 말씀을 떠올리며 평안을 되찾고 그 리듬을 타기(마11:28-30, 메시지성경)를 반복했던 한주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계속 ‘함께 가자’(아2:13)고 말씀 하시는 아버지께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다.
2001년 당시 나의 성격을 보여주듯이 빼족한 볼펜으로 자로 대어 줄을 긋고 포스트잇으로 중요부분에 표시를 해놓은 것이 보였다.
2017년의 나는 노란색 두꺼운 색연필로 삐뚤거리며 책에 줄은 긋고 있었고, 보고서에 남길만한 주요한 부분의 책장을 접어놓고 있었다.
나의 영적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헨리 나우웬의 책을 다시 보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큰 외로움을 아버지 앞에서의 깊은 고독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20대 때는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보호 경계선’(p33)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다. 친밀함과 자유 함이 함께 할 때 더욱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감.. 어쩌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유하지 못하고 스스로 묵여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마음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음에도 나 스스로는 인간이 만든 규칙과 철학을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처럼 묶여 있었고 그래서 더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만 머물렀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청년들의 외로움들을 보며, 외로움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들을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기 가게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서, 매체에서 답을 찾으려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헨리의 제자가 고백한 것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은 내가 바로 지금 성령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내가 먼저 그것일 잊지 않길 기도한다.
지난 주중 세계기독교 역사 수업의 과제로 초기 기독교시대의 책을 읽고 reflection 작성과 수업을 거치면서 작년 10월 부터 집중해 있던 말세 기독교인들의 고난과 믿음에 집중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친구들과 본 영화 ‘silence’, 금요심야와 청년 예배에서의 메시지가 모두 동일하였다. 말세를 준비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아버지께서 바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내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일 것이라는 마음에 지금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요즘 강의준비와 횃불의 수업과 숙제를 해야 하는 바로 지금(here), 나에게(now) 동일한 믿음으로 살 수 있겠냐고 아버지께서 물으시는 것 같다.
MDiv를 마무리하는 시점부터 계속해서 내 안에 죄를, 악을 보게 하시는 거 같았다. 어쩌면 그 전까지는 타인을 향한 무한한 정죄모드였다면 이제 그 모든 정죄들이 사실은 나를 향해, 나에게 알려주는 것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되돌아 봄이 있었다.
타인에게 무언가 불편한 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그 부분에 민감한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더 이상 타인들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점검하는, 나를 알아가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귀한 시간이 계속 되고 있다. 오십이 다 되가는 시기에 이제 조금씩 나를 알아간다.
Th.M. 입학 당시, 내안에 나를 더 알고 하나님을 알길 바라는 갈망이 있었다.(그때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그 내용이 있는 것도 몰랐다. MDiv는 워밍업이었던 것 같다.)
선교지에서 주로 60대-80대 연세가 많으신 교수님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이 듦’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어떤 교수님은 무조건 함께 하고 싶은 분이 계셨고 어떤 교수님은 학생들까지도 도망 다닐 정도로 피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따뜻하고 포용하시는 교수님들과 매사에 불만인 교수님들 중에(우리는 다 선교사였다.) 같이 하고 싶은 분은 당연히 전자이다. 매일 아침 출근 직전 거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잘 늙게, 잘 나이 들게 해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오던 나의 30대... 그 기도를 잊지 않고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말씀묵상
개인영성지도 시간 매주 묵상 본문이 나의 타이밍과 너무 맞았다. 말씀을 반복해서 깊이 묵상하는 즐거움과 그 깊은 맛을 이제야 본 것 같다. 이번학기 큰 수확이다. 가장 큰 수확은 간음한 여인 묵상이었다. 그 부분의 묵상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과목에서 또 그 본문에 대해 깊게 연구한 자료를 읽으며(르네 지라르) 이번학기의 반 정도를 그 본문에 머물게 되었다. 갑작스런 교회 사임 이후로 내가 모르던 나를 알게 되었고, 한 번도 간음한 여인의 자리에서 묵상해보지 못했던 내가 그 자리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자리에 서보지 못했던 내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질문을 받아 보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이사야처럼 제가 가겠다고 제가 하겠다고 손 번쩍 들었을 내가 이제는 ‘같이 해주신다면...’의 겸손한 모드가 되었다. 사실 겸손에도 이르지 못한 땅굴 모드인 것 같기는 하다. 아직 이전처럼 이것저것 하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약간의 대인 기피증까지 생긴 것 같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개인 영성지도 수업을 들으며 매주 말씀과 깊은 만남으로 나를 알게 해주신 시간을 갖게 해주신 것이 참 많이 감사하다. 말씀 묵상을 통해 그냥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을 또한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밭에 숨긴 보화를 발견한 사람 마냥 세상의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는데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저간다.
마음 한 편엔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온통 집중하고 싶으면서도 물질적인 것(특히 잠자는 곳과 먹는 것)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물 잘 나와서 씻는 것만 잘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선교지에서도 샤워할 때 마다 이렇게 매일 씻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잠자는 곳과 먹는 것이 너무 중요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무방비 상태로 오신 예수님이 계속 이동하셔야 하는 그 상황에서 알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비슷한 삶으로의 초대가 담겨있다’고 하신 것을 묵상하면서 ‘혹시..’하고 느꼈던 것과 동일해서 또 유레카!! 내가 느끼는 것이 학문적으로 다 정리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제대로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그 이후로 다른 과목에서 “십자가의 승리는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완전한 포기의 결과다.... 이 정도로 예수는 전면적으로 폭력을 포기한 것이다.“ 를 읽으며 무방비 상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사역 중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는 무방비 상태셨고(세금내야 해서 물고기 잡으라 하시고... 마 17:27) 오실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까지 자신을 방비하지 않으시고 저항하지 않으신 삶을 생각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비슷한 삶으로의 초대가 담겨있다.’
지금 까지 처럼 내가 힘주고, 미리 준비하던 삶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여시는, 인도하시는 삶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마음이 든다. 구유 안에 있는 아기 예수님처럼 사는 삶의 진입로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뭔가 자꾸 하나님 외에 다른 재정적 안전장치를 만들고 싶어하는 나를 본다. 이제는 가롯 유다의 모습까지 내 안에 있음을...
공동체 속에 나
내가 영성지도 받을 때는 도리어 기록을 못하고, 다른 분들이 받을 때 열심히 기록했다. 같은 본문으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묵상에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하시는 일을 보았다. 학기 초부터 계속 내안의 죄를 발견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고 어떤 학생이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을 했어서, 한주 내내 내 안의 악을 발견 하게 하심이 그런 의미냐고 하나님 앞에 많이 머물렀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쯤 교수님이 지나가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자신의 죄를 더 보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다른 학생들은 그 말씀을 기억을 못하던데 나는 한주 내내 여쭤봤어서 그런가 입학할 때 내안에 갈망인 “나를 알고 싶고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것과 연결이 되어서 완전 유레카였다. 정말 스쳐지나가듯 하시는 교수님의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답이었다.
줌에서 공동체 전체가 얼굴이 보였는데 내가 나눔 할 때 마다 일부러 시선을 산만하게 하시고, 표정이 부정적인 동학이 있었다. 나누면서 자꾸 거슬려서 그냥 고개 숙이고 영성일지 쓴 것을 읽었는데 교수님이 그냥 다 읽지는 말라고 하셨다. 교수님을 보고 말하면 화면에 어수선한 표정이 보여서 나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가장 피크가 “예수님의 사랑에 뭐 라고 반응하겠느냐”고 교수님이 질문하셨을 때였다. 이미 내 마음이 그 프로세스가 진행된 상황이었지만 (교수님이 물어보셔서 완전 놀랐지만...) 거기서 타인을 의식하고 제대로 대답 할 수 없었다. 결국 수업 후 나를 돌아보고 교수님께 솔직하게 따로 연락을 드렸고, 그 다음 주부터는 지도 받지 않는 사람은 화면을 끄도록 부탁드렸었다. 비참여자들이 화면을 껏 던 날 좀 집중할 수 있었고 깊은 묵상까지 나눌 수 있었다. 교수님도 이제야 좀 정리된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한 학기를 돌아보니 다른 수업에서도 나의 나눔에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분이 보일 때 마다 내가 횡설수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학기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타인의 시선에 대단히 메여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리고 다음 주 수퍼 비전 시간에 교수님이 피지도자가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는 진실을 피하려고 하거나 저항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또 유레카 였다. ‘아! 개인영성지도 시간에 나에게 그런 저항이 있었구나!!’ 교수님이 나에게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표현을 안 하셨었는데 비참여자들이 화면을 끈날 처음으로 내말이 정리되어 들렸다고 해주셨고 그 다음 주에 다른 분의 수퍼 비전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나눌 때 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으셨던 분이 설사 그런 의도가 없었을 지라도 그런 오해(?)를 통해서 나는 나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다른 과목에서 나눌 때 신경 쓰지 않고 편히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이후의 삶의 부르심을 알려주시는 듯 하다. 그래서 무언가 하려고 하기보다 잘 듣고 잘 보고 싶다. 잘 머물러, 매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을 닮고 싶고 그렇게 살다가 그 곁에 머물고 싶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문이 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이성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Ⅳ.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
본문에서는 『종교론』에서의 직관과 감정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영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는 개인의 경험과 체험을 자신의 신학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데 직관은 종교 체험에 핵심적 전제이며, 감정은 직관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심리학, 종교학,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의 경험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직관과 감정을 거론하게 된 계기를 칸트의 인식론으로 본다. 인식 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로 직관과 감정을 제시하며, 직관은 종교 체험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토대의 기초가 되며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종교 체험에 관한 핵심적 전제가 된다. 독일어에서 슐라이어마허가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直觀)은 ‘철학의 용어로,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거나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등의 생각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6년 셀링(F. Schelling)에 의해 직관이 인간의 지적 기능으로 밝혀지면서 슐라이어마허가 직관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종교를 형이상학으로부터 구분하기 어렵게 되므로 『기독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그의 후기신학에서는 직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론』에서의 직관은 피히테와 셸링의 ‘지적 직관’과 대조하여 ‘감성적 직관’으로 규정한다고 최신한은 설명한다.
『종교론』의 둘째 강연인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직관에 대해 주로 다룬다. “종교는 우주의 영원하고 이상적인 내용과 본질에 대한, 그리고 무한자와 시간적인 존재(유한자) 가운데 있는 영원자에 대한 경건한 직관이며 느낌이다.”라고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한다.
감정 없는 직관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러한 직관은 올바른 근원도, 올바른 힘도 소유할 수 없다. 직관 없는 감정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은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서로 분리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무엇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 무엇인 것이다. 모든 감각적 지각이 나타나는 저 비밀스런 순간은 직관과 감정이 아직 분리되기 전에 있으며, 여기서 감각과 그 대상은 ..서로에게 흘러들어가 하나가된다... 이 얼마나 묘사하기 어려우며 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버리는지 나는 안다.
이러한 설명 후에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데, 편집자인 오토는 이 부분을 슐라이어마허의 영원자의 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라고 설명한다.
... 이 순간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 자체이다. 빠르고도 신비스럽게 한 형상과 한 사건이 우주의 형상으로 전개된다. 이 현상이 형성됨과 같이 나의 영혼은 늘 찾아오던 사랑스런 형태로 피해 들어간다... 성스러운 존재 그 자체와 같이 포용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눕는다. 이 순간 나는 이 무한한 세계의 영혼이다.
이렇게 무한자와의 계시나 대면인 종교는 신을 기술하는 형이상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종교만의 고유한 자리로 서기 위해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에 속할 수 없다. 이는 종교를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만 도덕적인 종교라고 주장한 칸트에 대한 반박으로도 해석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기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려고 한다.
위의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에서와 같이 『종교론』에서 말하는 직관은 우주에 대한 수동적 형태로서, 우주는 라틴어“Universum"로, 세계전체(Weltall-모든 세계)로 번역된다. (이러한 의미로 범신론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그는 ”만물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범신론의 오해로 부터 벗어난다.)
창세기를 예로 들어 신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을 걸어도 그가 신에게 화답하지 않았기에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직관의 주체는 능동적 활동성을 가진 우주이며, 개별적이고, 구별되고, 직접적인 지각으로 존재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신’대신 사용하는 ‘우주’개념은 스피노자의 ‘실체’와 관계가 있다고도 해석한다. 그가 ‘신’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사용하는 신 개념이 도리어 사고를 협소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신한은 ‘우주’가 ‘신’개념을 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주’는 ‘신’ 개념을 넘어서는 진정한 ‘무한자’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 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우주와 관계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사고와 의지로는 신에게 도달 할 수 없지만 신의 영역에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직관과 감정이며, 그 것 또한 순간적으로 접촉되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도 없으며, 직관하는 개인은 무한자의 일부만 파악 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종교의 경지는 유한자와 무한자가 접촉하는 바로 이 순간이다. 진정한 생명은 유한자가 무한자와 함께 있을 때 가능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이 유무한의 합일의 순간은 감성적이다.
스피노자의 합일은 이성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성적 직관이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이면서도 고차원적이다. 또한 칸트의 이론적 직관을 능가하는 체험적 직관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감 능력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한다.(오토는 보편적인 모든 사람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한자를 직관하려는 욕구를 상실한 이는 어떠한 시금석도 소유하지 못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매 순간 우리에게 계시된다...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관과 감정이 모든 곳에서 흘러 넘치고 있으므로 겸손과 인내로 모두에게 관용적이어야 하며,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감정의 강도, 갈망이 간절할수록 중단됨 없이 무한자에게 사로잡히게 되므로 경건한 감정을 길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직관들 중 자연과 인간성 영역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개하고 독자들에게 종교를 먼저 소유하고, 그 종교를 의식해보라고 제안하므로 마무리한다.
감정에 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리했던 것들과 유사하게, 경외, 겸손, 사랑, 감사, 연민, 통회 등의 감정들을 대표적으로 말하면서 이외의 다른 모든 감정들도 종교라고 말한다. “감정이 종교의 가장 고결한 부분”인데 이러한 고결한 감정들이 생길 때 그것을 도덕의 자리에 내어주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주를 직관하면서 생기는 의식으로 직관이 무한자를 향해 개방되었다면, 감정은 직관이 심정에 남기는 흔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감정은 유한자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유한자 입장에서는 도덕적 행위로 인한 자발적 동기가 작동하지 않는 순수하게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이런 행위를 유발하려고 하고 충동질한다면 미신으로 빠지게 될 것을 경고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종교가 “교리적인 종교”가 아니고 “철저한 가슴의 종교”이며, 그에게 있어 교회는 “모든 인간 제도들과 관심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야한다”고 고백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 였던 그의 상황에서, 교리중심의 기독교로 인해 지식인들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기독교를 바르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종교는 맹목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초월적 체험이고, 그 초월적 체험을 통해 늘 무한자를 향해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영성”의 창시자인 샌드라 슈나이더스가 말하는 영성의 정의와도 맥이 통한다.
Ⅴ. 나가는 말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으로 종교를 규정하고 『기독교신앙』에서 경건한 심정과 절대 의존 감정으로 신앙을 전개하므로 슐라이어마허는 ‘경건한 감정’의 신학자가 된다. ‘기독교 영성’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기독교 신학자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단지 부흥현상의 관찰과 분석 차원에서 감정을 다루었다면, 기독교(종교)와 신앙의 정의 차원에서 경험과 감정을 강조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기독교 영성에서 강조하는 경험과 ‘영성지도’에서 주요한 도구인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발견하였다. 앞으로 기독교 영성분야에서,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하여 연구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교양인’이 누구일까에 집중 하기 보다,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에서 교양인들의 무시를 받은 신앙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던 그의 열망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절대자와의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spiritual but not religion)라는 작금의 세대에게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 많이 오해되어 있는 슐라이어마허의 이론이 제대로 한국 교회에 소개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꾸준히 슐라이어마허를 소개해 오신 많은 신학자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종교론』에서 “세계를 직관하고 종교를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은 먼저 인간성을 발견해야”, “인간성 자체는 여러분에게 고유한 우주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성 자체가 우주에 관계하고 개별자와 일자 사이의 중간자이면서 무한자에 이르는 휴식처라는 표현으로 인간성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연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2007년 한국에서 출판된 론다 번의 『시크릿』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우주의 기운’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부류의 책들에서 말하는 ‘우주’가 슐라이어마허의 ‘우주’개념과 연결되어 있는지 조사해 보고 싶다. 슐라이어마허의 ‘우주’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같다고 했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조금 더 깊이 알기위해서는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아마 스피노자를 공부하다 보면, 론다 번이나 가브리엘 번스타인 등의 우주의 에너지와 관련된 책들과 맛닿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용어의 정의를 하고 진행하고 싶었는데 너무 다룰 것들이 많아서 일일이 정의하지 못하고 진행한 부분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논문을 접하면서 (이전에 교수님이 한번 지적하신,) 주제가 자주 산으로 가기도 했다. 실은 『기독교신앙』에서 ‘절대 의존 감정’까지 정리하던 도중에 포기했다. 너무 모르는 분야라 방대한 모든 부분을 알고 싶어 하던 나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여 논문의 질이 많이 떨어진 부분이 아쉽다. 국내의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독일어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번 슐라이어마허의 책을 읽으면서 왜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의 글에 대한, 이러저러한 다양한 해석을 읽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영감 있는 설교자로 주목 받았던” 그가 설교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생한 표현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독일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된 기간이었다.
몇 년 동안 슐라이어마허를 한번 공부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신학교 최종 졸업하는 마지막 학기에 처음으로 인간론 수업에서 정식으로 소개를 받고 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학교와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슐라이어마허, 『기독교신앙』, 최신한 역. 서울: 한길사. 2006.
슐라이어마허. 『종교론』. 최신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차자료]
Green, Barbara. “기독교 영성에서의 구약,” Arthur Holder, 『기독교 영성 연구』, 권택조 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문이 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이성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들어가는 말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 Berkeley)에서 기독교 영성학 박사과정 프로토콜의 기초를 닦은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Schneiders)는 영성의 정의를 “한 개인이 인식하는 궁극적 가치의 지평을 향한 자기 초월을 통하여, 삶의 통합을 위한 과제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험”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성에는 경험이 수반된다. 경험들이 쌓여 관계가 형성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민감한 도구들로 몸, 감정, 정신 등이 있다. 기독교 전통가운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영성지도’가 있다. 이는 어떤 개인이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의사 전달 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렇게 의사 전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고, 그 관계에 뿌리를 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타인이 개인에게 베푸는 도움이다. 영성지도에서는 개인의 기도, 말씀 묵상 등을 가지고 진행하기도 하지만 경험의 도구가 되는 몸, 감정, 정신들과 관련된 정보들을 중요하게 다룬다. 영적 지도에서 피지도자가 느낀 감정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해석과 교리 배후에 있는 인간의 경험과 느낌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개신교 최초의 신학자이다. 본인이 전공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의 ‘영성 지도’에서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전의 논문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했고, 이번에는 신과의 관계를 직관과 감정으로 풀어낸 슐라이어마허를 연구하고자 한다.
영미권의 청교도 기반의 칼빈주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에서 두 번의 대부흥을 경험하며 참된 신앙을 이루는 여러 가지 마음의 정서들을 『신앙과 정서(The Relgious Affections)』에서 제시한다. 청교도 신학자로서, 기독교의 탄탄한 교리들과 미국 대부흥의 현장을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참된 신앙의 정서와 거짓된 신앙의 정서들을 분류한다. 에드워즈는 정서란 감정과 의지가 내포된 의미로 행위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일반 부흥사들 같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하버드의 진보적 학자들처럼 메마르지도 않았던 그는 그 둘의 긴장 관계 속에서 감정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인간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내적 감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상의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탄탄한 신학위에서 기독교에서 감정의 역할에 대해서 논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국가 종교상황에서 교리적, 형식적이 아닌 실제적 믿음의 도전으로 신학에서 감정을 화두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에서 말하는 직관과 감정에 대해 알아보면서 기독교 영성과 슐라이어마허와의 접점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Ⅱ. 슐라이어마허의 생애
칼 바르트는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무엇이 그의 견해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슐라이어마허는 너무 함축적으로 말을 해서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평가된다. 그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찰스 하지(구 프린스턴 교수, 1797-1878) 또한 그의 사상이 너무 애매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도 했고, 60년 넘게 슐라이어마허 신학을 연구했던 칼 바르트도 그의 신학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할 정도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 국내에서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입장은 주재용, 최신한 등이 있으며, 개혁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부류는 목창균, 박형룡, 서철원 등의 보수 정통 신학자들이 있다. 본문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가족 배경과 성장과정, 그의 업적 등을 살펴본다.
배경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혹은 슐라이에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개혁교회 목회자 집안에 1768년에 태어 났다. 조부인 다니엘 슐라이어마허 목사는 샤움부르크의 궁정설교자였으며, 경건주의 운동을 지지했고 아버지 고틀리프 아돌프 슐라이어마허 또한 경건주의 설교자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경건주의에 대해 의심하면서 계몽주의적 관점을 가졌으며 군목으로 활동했다. 외조부와 외증조부 또한 베를린의 궁정설교자였으며, 외삼촌은 할레 대학교 신학부 교수였다. 슐라이어마허의 두 번째 이름은 조부, 세 번째 이름은 외삼촌 사무엘 에른스트 티모테우스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부친이 모라비안 공동체와의 교제를 통해 신앙적인 각성을 먼저 체험하고 1783년(약 14세 때)에 가족모두와 함께 7주간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 슐라이어마허는 회심을 체험한다. 15세에 니스키의 모라비안 교단의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철저한 경건 훈련으로 깊은 종교적 감화를 받는다. 기숙학교 입학 전 11주 준비과정동안 중요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냉철한 사람을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로 만들어주는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실체를 체득한다. 종교론에서 발견되는 ‘개인성’에 대한 강조는 개인의 내적 체험과 새로운 내면의 형성을 중시했던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청소년기의 경험에 토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학업과 업적
1785년 9월에 모라비안 교단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재학 중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비판정신에 눈을 뜨면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1787년 봄부터 할례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다. 그는 에버하르트에게 그리스 철학, 고전 문헌학,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배우면서 1788년과 1789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하고,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1789년 할레 대학 졸업 후 신앙이 흔들리고 건강도 안 좋은 상황에서 1차 목사고시를 치르고 1793년까지 백작집의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신앙도 회복되어 1794년에 2차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개혁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1796년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원목으로 부임하면서 목사고시 시험 감독관이면서 앞으로 자신의 책의 검열관이 될 쟈크, 슐라이어마허에게 영향을 끼친 동료 설교자 슈팔딩, 편지로 계속 정신적 교제를 나누게 되는 문학 살롱의 헨리에테 헤르츠, 슐라이어마허에게 학문적 자극을 주는 슐레겔 등을 만나게 된다. 슐레겔등과 베를린 낭만주의 모임과 밀접한 교분을 쌓으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독일어로 옮길 시도도 하게 되고 1799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종교론』의 열매도 맺게 된다. 『종교론』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사상이 잘 나타나있다.
1802년에 시골 도시의 개혁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독일어로 번역하므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 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고, 독일의 플라톤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플라톤 연구는 슐라이어마허 개인적으로 독창적 사상형성에 영향을 미쳐 기계론적 윤리관을 거부하고 낭만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1804년에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와 설교자로 부임하고 1806년에 『성탄축제』를 저술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프러시아 침공으로 할레대학을 폐쇄하자 1807년에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가 1808년 베를린 대학교의 건립과 관련하여 대학을 강의 중점 학교와 연구 중점 아카데미의 매개 기관으로 규정하는 『독일적 의미의 대학에 관한 단상』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중요설립자로 기여하여 1810년에 신학부의 초대학장이 된다. 1809년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로 지명되었고,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초빙된다. 1834년 2월 12일에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기 열흘 전까지 이 교회에서 설교자로 섬긴다.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와 철학부에서 강의하면서, 피히테와 헤겔의 강의보다 학생들에게 더 인기 있었다. 1821년에는 개신교 신학의 역사에 획을 그은 『기독교신앙』을 발표한다. 이렇게 교수, 학술원 회원, 설교자 외에도 정치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프로이센 개혁에 앞장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1808년에는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는 민중봉기를 준비하기도 했고 프로이센 궁정의 밀사 업무를 하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도 영향을 끼쳐 공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프로이센 교육개혁에 관한 평가서를 작성한다. 『프로이센 신문』의 공동편집자이기도 했던 그는 1813년 검열과 관련하여 정부와 갈등도 있었고 학생운동이후는 경찰의 요주의 인물까지 된다. 그의 개혁은 교회에서도 전개되어 ‘개혁교회와 루터 교회의 통합’, ‘개신교 교회제도의 개혁’, ‘예배개혁’의 세 가지 방향에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개신교회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현실정치와 교회정치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매주 삼위일체 교회의 교단을 지켰으며 대학에서도 책임시간 이상의 강의를 하고 학술회에서도 철학과 신학의 연구영역을 계속 넓혀가며, 심도있는 연구 결과를 제출했다. 그는 진정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고 평가된다.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과 성만찬을 나누며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하여 “이 성서의 말씀에 나는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내 신앙의 근거이다.”라고 고백했다. 『기독교신앙』, 『독백』, 『성탄축제』, 『신학 연구서술』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 『해석학』, 『윤리학』, 『심리학』, 『미학』 등은 강의록으로 유고로 출판되어 철학과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Ⅲ. 『종교론』
『종교론』은 1799년에 처음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 이후로 1806년, 1821년, 1831년의 3번의 개정을 거쳤다. 한국에서는 최신한이 초판의 루돌프 오토가 편집한 책을 번역하였고, 필자는 그 책을 참고하였다. 오토의 편집 본에는 매 문단마다 편집자의 주석이 있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많이 준다.
『종교론』은 서문이 없다. 그 당시의 프로이센의 분위기는 기독교서적을 검열하는 시대였다. 『종교론』은 5개의 강연으로 이루어져있는데 2개의 강연까지는 슐레겔, 노발리스, 헨리에테 헬츠 등 낭만주의 친구들과 베를린에 있을 때 작성했다.
3번째 강연부터는 당시 왕이자 국가종교의 수장인 빌헬름 3세가 출석하던 교회에 목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지역으로 이주했다. 국가종교를 반대하는 입장의 글을 쓰며 국가종교의 수장과 함께 있는 것에 많은 심리적 압박이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지지해주던 낭만주의 친구들과 자유롭게 토론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헨리에테와의 편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론』의 두 번째 강연까지의 색채와 이후의 강연의 색채, 혹은 1799년 초판과 1806년 이후로 그의 생애를 나누기도 한다. 앞부분은 반기독교적인 낭만주의적 슐라이어마허이고, 뒷부분은 친기독교적이라 평가되는 플라톤적인 슐라이어마허이다. 부제가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제의 “교양인”이 비기독교적 지성인들인지, 국가 종교적 기독교인들인지, 낭만주의자 친구들을 말하는 것인지 해석이 다양하다.
국가의 검열을 피하면서도 출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수사학적 표현들이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검열을 했던 쟈크 마저도 처음에는 그의 『종교론』을 긍정하는 입장이었으나 1800년과 1801년 사이에는 자신의 평가를 뒤집었다.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친구들도 슐라이어마허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신학의 대표자 격인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도 해석을 난해해 하는 것을 처음 읽은 필자가 해석하는 것은 시도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맛본 사람으로서 『종교론』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의 해석학은 어쩌면 자신의 저서인 『종교론』을 읽을 때 자신의 해석학을 따라서 읽어야 이해가 될 것 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결국 다섯째 강연을 마치고 그는 서문 쓰는 것을 포기한다. “서문”에는 자신의 진실한 결론을 말해야 하므로 “서문”을 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종교론』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맞도록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성경적 견해
창세기 1:31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근거로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초적 견해이다.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에서는 인간의 한계, 육체와 개체성이 죄는 아니며, 죽음이 공포를 만들어내므로 악의 원인이 되지만 죽음 자체가 악은 아니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안에 있으므로 이 또한 악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전체를 실행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있는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부분을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국가 조차도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마태복음 6:27-34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v34)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염려)임을 알려준다.
창조론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유한한 생명의 시간동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없고, 구원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초월성으로 개인의 의식이 최고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며 아무리 의식이 강하더라도 세계 전체를 종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죽음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이 있고, 그러므로 현실의 질서가 악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2) 고전적 견해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관념론과 신비주의와 혼합된 기독교 전통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하다는 성서의 견해와 다르다.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인간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벌로 유한적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이론은 죄의 상징과 결과가 성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죄와 악을 무지와 동일시한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무지가 죄라고 가르쳤고, 글레멘스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과 무지가 무의식적으로 충동질 하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헬레니즘과 성서를 조화시켜 죄의 본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연(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누군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신적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바울의 신학과 니버의 주장
바울의 신학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롬 5:12)라고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를 동일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죽음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음에도,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항상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연결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 불확실성과 의존성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고 의존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38-29절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처럼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죄의 근원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인데 죄를 유발하는 것의 큰 특징은 두려움이다.
죽음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랍비 전통에 따라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너는 흙이니”(창3:19)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를 형벌로 해석한다면 혹시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은혜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이 유한적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설명하지만,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었다고 믿게 함으로 인간 실존의 역설을 왜곡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으로서 유한성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을 근거로 한 정통 교리는 헬레니즘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이 기독교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적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 운명의 끝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죄가 아니다.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4.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
니버는 인간의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유혹과 불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가 인간을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구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첫째 마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에서 발생했으며, 둘째 마귀가 인간 타락 전에 먼저 타락했다는 것 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악의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해석 된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마귀에게 유혹된 원인은 인간 안에 탁월함과 연약함, 무한과 유한한 지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무지를 감추려는 노력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불안을 은폐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을 받게 되지만 불안이 죄는 아니다. 단지 불안은 죄를 발생시키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 받기가 쉬운데, 인간의 양면성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모르므로 발생한다.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측정 불가하므로 자신이 존재해야 할 것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완벽에 대한 불안)과 존재해야 할 것으로 존재하지 못 할 것으로 인한 불안(존재의 불안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가운데 자신에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할 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존적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때 육욕(sensuality)에 빠지게 된다.
2)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로 교만과 육욕에 대해서 말한다. 더불어 집단적 교만과 개인의 교만을 고려한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를 함께 논해 보고자 한다.
A. 교만의 죄
기독교에서는 교만이 근본적인 죄이며 육욕은 교만에서 기원됨을 주장해 왔다. 교만이 죄라는 견해를 인간의 행위와 연관시켜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교만으로 분류했다.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 못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권력의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것을 거짓 안정이라고 했고, 이들에게 있을 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불안감에 기반한 권력의 교만은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힘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삶을 희생하는 죄를 범한다. 권력의 남용, 정복 등으로 표현되는 탐욕은 불안감을 숨기려는 야망의 표현인데, 인간의 야망이 끝이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교만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것이 지적 교만이다. 자신의 지식이 역사를 초월한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교만이며, 이 교만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려 할 때도 지적 교만이 드러난다.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고,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지식이기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여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지적 교만이다. 지적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시간 속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지적 교만과 관련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도덕적 가치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독선적 태도인데, 기준을 자신이 설정하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롭다고 하는 경우는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인종, 민족, 종교, 사회적 갈등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교만은 네 번째의 영적 교만으로 발전된다.
영적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종교적 죄와 관련된다. 자기미화와 신격화와 관계되는데, 본인이 계시를 받았으며, 더 많이 회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의 죄를 가중 시키며, 회개가 교만의 도구가 된다. 가톨릭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가 교만의 도구가 되게 한다. 또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도 자기 신격화의 위험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의 교만이 인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다.
교만과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 신격화는 부정직(기만)과 관계가 있다.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것도 동반하게 된다. 더불어 자아의 연약함을 숨기는 과정에서 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교만과 기만은 자아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
B. 육욕(sensuality)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되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죄의 본질을 육욕으로 간주 하려는 것에 니버는 문제를 제기한다. 니버는 육욕과 이기심을 구분하자고 한다. 육욕은 폭식, 술 취함, 성적 향락 등의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기심은 은폐되고 포장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욕이 이기심보다 사회적으로 더 비판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의거하여 육욕의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원적 죄의 결과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형벌이라고 하므로 두사람은 육욕을 죄의 결과이자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욕을 자기 사랑의 근원적 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육욕이 자아의 우상숭배인지 대안적 우상숭배의 발견인지는 분명한 답변이 없다. 종족 보존을 넘어서는 인간의 과도한 성적 충동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충동은 불안한 인간이 불안을 상쇄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성 행위는 내 삶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거나, 타인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적 연합의 절정은 자기 창조성의 절정도 되지만 죄성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는 성이 죄 자체여서가 아니라 성생활이 자기 신격화의 원초적 죄의 도구이면서, 타인을 신격화 함으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격과 무관한 성적 충동은 상업화된 악을 만들 수 있다. 도피를 위한 성적 격정은 그 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육욕은 자아 혹은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함으로 도피를 하려는 노력이고, 죄 때문에 생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무의식적인 실존의 형태로 도피하는 노력이다.
C.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 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3)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권력자나 지혜 자나 혹은 선한 자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동일한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약자에 비해 교만과 불의에 책임이 더 크다. 성경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이 드러나고, 교만과 불의에 빠지게 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도 고려된다. 부유한자나 권력이 있는 자 등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아가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수평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더 강한 오만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식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학자로 인정하게 하고, 권력자들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왕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덕으로 위장해서 권력욕을 숨기고, 관대함으로 위장해 불의를 감춘다. 역사 안에서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들의 죄책은 모든 기준을 초월하는 궁극적 분석으로 폭로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5. 결론
니버의 기독교 인간론 분석을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의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면서 죄인 된 인간을 강조했지만 전체적으로 니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므로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근대주의 인간관에서 했던 실수처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양면성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니버 신학의 특징인 역설의 연장이기도 하다.
니버가 기독교적 인간론을 근대의 인간론으로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안에서 이미 다른 인간이해들의 문제점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당시, 미국의 현실 가운데 낙관주의적 기독교는 답을 주지 못 했다. 공산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 역시 실망하고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특히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자세하고 깊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유혹당할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죄를 설명한다. 니버의 죄론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 이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위장하고 있는지 인지하게 도와준다.
약간 아쉬운 점은 6장의 ‘하나님의 형상’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만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책 전체가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두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하게 해석한 논의들은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 날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인간의 자유와 초월성에 대한 사고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한 한국어 번역이 부분적으로 아쉬웠는데 그 덕에,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니버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니버의 글과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버의 논지는 항상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간관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설의 긴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유혹과 교만을 유발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기대하므로 안정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1. 서론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문화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 기독교적, 근대적 개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정리되면서 혼란들을 야기했다. 고전적 인간관은 그리스 철학을 전제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반이 된다. 이성적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합리주의와 육체를 악으로, 마음은 선한 것으로 양분하는 이원론 그리고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스토아 철학이 바탕이 된 개념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인간 개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초월성을 가진 인간 개념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하는 인간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근대적 인간관은 자연주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사상이 되면서 고전적 개념과 기독교적 개념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생명력과 존재 양식을 초월하는 해석 원리 없이 부분적 진리들이 끝없이 논쟁하는 혼란을 야기했다. 근대적 인간관의 두 번째 혼란은 자연의 산물이면서 정신의 산물인 인간의 개체성의 근거를 없애 버린 것이다. 세 번째 혼란은 근대적 인간관이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함으로 악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다룬 것이다.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세 가지 혼란이 발생한 원인은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편협(이성이거나 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맞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근대성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존재양식, 개체성, 악의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한다. 이는 근대적 인간론에서 당면한 혼란이다.
혼란 중 첫째는 인간 본성의 생명력과 그 존재양식에 대한 해석 원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은 창세기 1: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두 번째 혼란인 인간의 개체성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과 유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은 정신의 산물이며,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산물로써 인간의 개체성을 형성한다.
세 번째 혼란은 낙관적으로 해석한 악의 문제였다.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성서적 근거,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비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칼뱅과 루터의 이론을 살펴보고 니버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막스 셀러의 이론을 보면서 니버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개념을 정리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크게 기독교적 견해와 고전적 견해, 그리고 바울의 신학에 나타난 견해와 그에 대한 니버의 주장을 본다.
셋째, 죄인으로서의 인간에서는 죄의 기원과 죄의 형태 그리고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을 정리해 봄으로 니버의 인간론을 마무리 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1) 성서적 근거
인간에 대해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증언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 도덕성, 종교성, 언어 능력, 자유 등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범주로 연구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중요하게 보는 히브리 사상이 드러나 있다. 히브리어에서 ‘숨’이라는 의미의 ‘라우흐’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기관의 특수한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라우흐’(숨)에 의해 생기를 받았다. 히브리어의 ‘네페쉬’(바람)는 인간의 피 속에 있다고 믿어졌는데, 영혼이나 마음(ψυχή)을 포함한 인간 안에 있는 생명과 동일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양성경에서 라우흐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정신으로서 영혼과 구분되는 프뉴마(πνεῦμα)가 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것 처럼 정신과 영혼도 개념들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 철학에서 합리적을 이성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 누스(νοῦς)와 구별하여 정신을 지칭하는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에게 있는 ‘상대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 성경에서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토대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지성적인 관점에서 정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몸, 영혼, 정신, 영혼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으며, 정신은 신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신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정신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고자 하는 신학에서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프뉴마(πνεῦμα)와 사르크스(σάρξ)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의 정신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사르크스(σάρξ)는 육체 보다 죄의 근원을 의미함으로 사용했다.
2)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던 중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합리적 피조물로 보는 것 이었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플라톤의 합리주의에 성서적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사람에게도 있어서 사랑이 하나님 형상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했다. 오리게네스 또한 플라톤 주의의 영향으로 가득차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전생의 타락을 속죄하는 타락한 천상의 정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성서적 개념이 포함된 설명을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아니고 지성적인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천사들이 인간보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형상”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신학자로 인정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을 포함하는 그 이상의 것 으로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혼의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축복을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이 있었으나, 그들과 기독교와의 조화를 최선의 상태로 공유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아의식의 신비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초월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인 기억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초월의 힘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적 신앙에 기반 하여, 기독교적 계시를 강조하므로 자아의식을 신격화하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초월능력은 자신의 너머를 지향하게 하지만, 스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 영역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해 이렇게 명확히 진술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임에도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들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칼뱅과 루터 두 사람을 주요하게 다룬다. 칼뱅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그들을 능가하는 인간의 탁월한 본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영혼을 총체적 인간이라고 정의하지 않지만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구조라는 것과 원래는 완전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는 두 관점에서 정의 한다. 이성은 의지의 자발적 결정(self-determination)과 초월성을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이성이 가지는 초월성이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마음이다. 또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의지도 인간에게 있으므로 인간은 원래 고상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성, 오성,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칼뱅은 히브리적 인간 이해에 근거하여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몸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거한다고 했다. 더불어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향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고 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이론의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루터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마음 또는 지성과 의지”이상의 어떤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였으나 죄에 의해 손상되었으므로 현재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며 이에 더하여 루터는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에 치중했다.
5) 막스 셀러와 니버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 ~ 1928년)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정립하고 ‘철학적 인간학’, ‘지식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문화 사회학의 시조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누스’(νοῦς)와 구별되는 단어인 독일어의 ‘정신’(Geist)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정신’(Geist)은 이성이라는 뜻 뿐 아니라 원인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이해 방식도 포함하고, 정서적 능력과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셸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의 독특한 자질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과 자유를 초월하며 시공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셸러는 원숭이와 에디슨을 비교했는데 이에 대해 니버는 기술적 지성이 추상화 능력과 일반화 능력에 의존하는데 이 두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초월적 능력에서 유래되므로 원숭이는 에디슨의 기술적 지성에 다다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셸러가 이성을 초월하는 정신(Geist)을 강조 하고 정신(Geist)이 이성을 포함한다는 것에 니버도 동의하는 바이다.
셸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자기 결정력을 말한다. 자기 결정력은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한한 존재 가능성을 가지지고 무언가 선택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설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 다 계시하므로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 했지만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 안에 존재했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인간은 자유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풀어갈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 할 경우,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논리적 일관성을 의미의 원리로 할 경우 의미를 합리와 동일시 하려는 모든 것은 이성의 신격화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인간 안에서 작용되어지므로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신앙을 통해 이해되는데, 신앙은 이성에 종속 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진다. 반면, 우상숭배의 죄를 피하고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게 하는 초월적 시각이 인간에게 있다. 이러한 유한성과 자기초월의 양면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피조물의 교리로, 자유와 자기 초월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 두 가지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 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1)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이 다른 견해들과 다른 부분이다.
(1) [생명력과 형식] “하나님의 형상“교리에서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2) [개체성] 인간의 유한성이 악의 근원이 아니며, 인간의 신성과 피조성이 통일됨을 본질로 하므로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3) [인간의 본성]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이다. 이 결과로 불확실성을 더 악화시키게 된다.
2) 기독교적 인간관의 논리를 분명하게 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검토하고
3)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이 제시하는 것들이 적합함을 입증함으로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
1. 성서적 근거 Biblical Basis of the Doctrines : 창세기 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토대 없음.
. 구약성경에서는 육체(라우흐, 숨)와 영혼(네페쉬, 바람)이 통일성을 이루는 히브리 사상이 표현된다.
. 신약성경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프뉴마 : 성령, 정신)과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 사도바울 : 프뉴마(자연적 능력 이상의 어떤 것 의미)와 사르크스(죄의 근원)를 대비해서 사용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몸이 아니라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인간 정신에 있는 자기 초월 능력에 관심을 두었다. ‘기억’이 시간과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을 기술하면서 자아의 한계는 자아 밖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자아의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가까워 질수 있다고 표현하고, 신비주의도 공유하지만 성서에 바탕을 두므로 자아의식이 하나님을 지향한다. 그는 계시를 강조하고 자신 너머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련성과 차이) 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으로 보고 이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데 까지 이르는 능력과 삶을 창조자에게 복종하므로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 칼뱅은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아담이 창조자의 탁월함을 닮았을 때의 완전성(원래는 완전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고 했다.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 인간을 이해하여(히브리 인간 이해) ‘인간의 몸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 루터는 원죄론 재정립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지금은 상실되었음을 입증하는데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형상은 죄에 의해 손상되고 더럽혀 졌다고 주장했다.
.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데 인간의 합리적 능력 이상을 암시하는 영향을 주었다.
. 막스 셀러는 ’누스‘와 구별하여 ’Geist(정신)‘을 사용하여 사유능력, 개념 파악 등의 독특한 이해방식과 정서적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Geist(정신)‘는 인간의 본성과 독특한 자질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순환과정을 초월하는 것 뿐 아니라 절대적 목표를 선택하는 것으로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선택의 자유“ 이상(이하)의 자유를 갖는다.
궁극적 실체에 못 미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한되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자연(창조)에 의해 자신에게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도 선택 할 수 없다.
.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절대자이며 영원한 인격체 이며, 자신이 가장 추상적이지만 가장 구체적인 자유라고 했다.
. 니버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다 계시하듯이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한 이후 십자가 죽음에서 사랑이 구현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 인간은 자유(정신, 의식)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구축할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의 문제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한다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자연의 인과율은 하위 원리중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인과율을 통해서만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세계는 기계적 통일성에 의해 이해되는데, 기계적 통일성은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또 다른 예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합리적 원리는 인과율보다는 어느 정도 고차원적이긴 하지만 의미를 합리성과 동일시 하려는 모든 노력은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의 교리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 피조물로서의 인간 The Doctrine of Man as Creature
. 피조물이 선하다는 기독교의 견해는 창1:31(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절 말씀에 기초 하고 있다. 또한 삶과 역사에 관한 성서의 모든 해석은 창조된 세계는 그의 유한성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유한성, 의존성,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므로 존경과 겸손함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것들은 악이 아니다.
. 인간 삶의 단편성이 악은 아니다. 단편들이 전체와 연결되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 악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의지할 때 발생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와 유한성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수 있다.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은 유한성이나 의존성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 신약에서는 피조물의 유한성과 의존성이 강조되는 것은 (도덕적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하는 것은 신적 통일성과 영원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와의 절대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 기독교적 인간관 안에서 창조론의 중요성은 개체성에 관한 견해에서 나타난다. 개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피조물이지만 그 생애동안 가능성을 완전히 성취 할 수 없고 여전히 의존적이다.
. 기독교 사상에서 자아의 유한, 의존적, 불완전한 근본적 특성과 자아가 본질적으로 선함을 일관되게 견지하지는 않았다.
(1) 초기에는 관념론과 신비주의 오류를 기독교 사상과 혼합했다. 오리게네스는 인간이 타락의 대가로 가변적이고 유한적이게 되었고 성욕을 죄의 상징과 결과로 간주했다. 성욕이 육욕적 본능 일 뿐 아니라 생식이 유한한 실존에 필연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의 불완전함이 그들의 불충분성과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며 인간 본성이 자연환경과 필연성에 의해 제한되고 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
(2) 그 영향으로 헬레니즘 기독교의 이단들에 의해 주장된 양성생식이 타락의 결과라는 것은 현대 그리스 정교회에 까지 이어진다.
(3)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4) 성경은 유한성을 악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죽음은 죄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는 대부분 영적인 죽음을 표현한 것(엡2:1, 고전15:56)임에도 헬레니즘의 이원론과 유사한 점들이 있다.
. “죽음”에 대해 성경이 특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의 운명의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삶의 완성을 바라는(부활의 소망) 기독교는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과 같다.
. 죄의 원인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 아니라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 있다. (7장으로의 연결)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을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 인간관에는 여러 개념들(A)이 합쳐지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와 혼란(B)들이 발생했다. 문제들을 3가지로 요약하고 2장~4장 까지에서 다룬다.(p.64)
기독교적 인간관이 근대의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 5-6장이다.(p.73)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합치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죄다.(p.80) 책의 목적중의 하나는 죄에 대한 기독교의 의미를 분석하고 양심의 가책이 기독교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본성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위상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역설가운데 있다. (p.63)
[keyword] 계시, 창조자, 심판자, 죄인, 구원자, 화해, 그리스도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3가지 문제는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1) 편협(이성or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2) 형이상학적 견해로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즉 자유와 필연성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유한한 한계 때문에 신비주의가 계속 등장했다.
5장. 기독교적 인간관의 적합성
1.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Individual and General Revelation 개별적(개인적)인 일반계시
2. 계시로서의 창조 Creation as Revelation
3. 역사적이고 특수한 계시 Historical and Special Revelation 역사적인 특별계시
1. 개별적(개인적)인 일반계시 Individual and General Revelation
. 기독교를 예언자적 종교, 묵시적 종교, 계시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계시종교는 개인적, 사회-역사적 경험(역사)을 통해서 세상의 기초가 되는 영원한 목적과 의지를 드러낼 것이 기대된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계시종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세계초월성과 세계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 신비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신비를 깊이 통찰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한하고 역사적인 세계에 자신을 계시한다.
. 계시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동시에 강조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의 관계가 설명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본질적으로 선(善)하다는 것을 이해 할수 있다.
. 이러한 계시는 양면적인데, 1) (일반)인격적-개인적인 경험과 2) (공적)사회적-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공적 계시가 없다면 개인적 경험은 검증되지 않은 감정에 불과하다. 특수한 개별적 계시가 없다면 공적이고 역사적 계시는 개인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상호보완)
. 슐라이마허는 하나님 경험을 절대적인 의존 경험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님 경험의 측면은우리가 우리들 자신 저편으로부터 관찰되고, 명령되고, 심판되고, 인정받는다는 인격적 느낌이다.
인간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개인의 경험들은 ‘양심’과 관련이 있다. 양심은 사회적 의무와 판단 혹은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의무와 판단일수도 있다. 이에 대한 성서적 해석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명령, 의무감, 심판받는 느낌 같은)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인데, 인간에게 요구하고 심판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다. 보편적 경험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성경적 신앙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성경적 신앙이 전제 된다면 경험의 주체가 하나님이 라는 것은 경험의 모든 요인들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유일한 토대가 된다. 인간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관점이 없다.
우리가 다른 인격체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분석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의 필요성과 성격을 유비적으로 알 수 있다. ‘너’와의 관계에서 ‘너’가 우리에게 ‘말’해서 분명 해 질 때 까지는 이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는 말로 인해
(1) 동물적 존재와는 다른 영역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 알려주고
(2)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인격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경험된 실체(‘너’)가 그 자체로 주체라면, 그 실체가 주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 속성을 경험한 우리는 단순히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특수한 경험을 밝혀내는 원리가 “계시”이다. ’너’로 만나는 하나님이 그의 속성에 관한 특별한 계시들로 확증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해 될 수 없다.
. 구체적인 계시(specific revelations)들은 특정한/특별한(particular)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특정한/특별한(particular) 구원사적 관점에서 보면 구체적인(specific)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목적을 드러내 보여주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s)이다.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에 의한 해석의 원리가 없으면 일반계시는 개인을 향한 평가나 ‘최선의 자아’ 경험으로 왜곡된다. (In Biblical faith these specific revelation are apprehended in th contest of a particular history of salvation in which specific historical events become special revelations of the character of God and of His purpose. Without the principle of interpretation furnished by this “special revelation” the general experience or the general revelation involved in conscience becomes falsified, because it is explained as facing his won “best self”. (p.220) )
. 기독교 신앙이 인간 이해를 위해 중요한 이유 :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대면할 때 인간의 실상과 자유를 깨닫게 되며,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육체를 평가 절하하며,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악을 다루지 못하는 인간이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2. 계시로서의 창조 Creation as Revelation
. 인간 의식 안에서 전적 타자와 대면하는 경험의 3요소는 의존감정, 심판의 경험, 화해의 갈망인데 여기서 창조자, 심판자,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이 정의된다.
(1) [의존감정/창조자] 절대적 권위에 대한 존경심과 존재의 궁극적 근원(실체)에 대한 감정으로 창조자와 창조라는 개념으로 하는 ‘일반’계시에 의해 보완된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당신’이 전 세계의 근원이자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2) [심판의 경험/심판자] 도덕적 의무감과, 신 앞에서 느끼는 도덕적 무가치성을 말한다. 이는 역사에서 예언자적-성서적 심판 개념으로부터 보완된다.
(3) [화해 갈망/구원자] 심판 이후에 화해를 갈망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관계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본질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는 결정적 계시인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다. 인간이 화해는 갈망하지만 화해의 집행은 하나님 편에 있다.
. 하나님의 계시의 세 가지 유형들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정의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존되어 있다.
.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계시의 범주에 속한다. 온 세계는 어떤 존재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롬1:20) 창조에 대한 설명은 계시론을 위한 토대가 된다.
3. 역사적인 특별계시 Historical and Special Revelation (특별계시)
개인 경험과 세계에서 계시된 초월적 하나님은 성서의 역사적 계시가 형성된 토대이다. 역사적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의 속성과 관련(심판자, 구원자)된다.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신앙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고, 신앙의 눈은 개인적인 도덕적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것을 발견한다. 도덕적 경험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된 도덕적 의무감으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 인간에게 가해지는 심판과 반역으로 생긴 하나님과 인간 사이 화해의 필요성으로 구성된다.
도덕적 의무감은 하나님과 백성사이 언약에 뿌리가 있다. 인간 역사에 대한 성서의 근본적인 견해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을 악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악의 본질은 자신의 연약함, 유한성,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능력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과 피조물의 한계를 넘는 덕과 지식을 가장하려는 것에 있다. 인간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이 세계를 초월하고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식이 완전하다고 과대평가하며 존재에 대해 자만한 것이 죄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시 하려는 유혹에 빠진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이나 심판의 도구인 각 제국들이나..) 역사의 대재앙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교만을 징계하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예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의 죄를 처벌하면서 동시에 치료 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가?(심판과 자비의 문제)
→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적 계시 :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심판과 자비와 관련된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한다. (대속과 칭의) 대속은 하나님의 ‘신적 자발성’으로 인간에게 먼저 화해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자유가 스스로 ‘신적 희생’을 선택함으로 인간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다. 하나님의 자유
* 창조자, 심판자 하나님은 일상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일반계시를 통해 알려져 있다.
* 구원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따라서 심판을 초월하는 사랑과, 인간의 죄를 대속할 방도가 있다는 특별계시이다. 특별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속성이 이해되면,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코로나 상황 같은 개인의 일상적 경험에서 이 속성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시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걸어오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의 말이라는 확신”이다.
*결론
. 근대의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와 자기 초월은 시간과 자연을 넘어서므로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어떤 규범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은 “궁극적 실체의 본성“(하나님)에서만 진정한 규범을 발견 할 수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계시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가 동시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계시로 간주된다.
.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1) 인간의 죄 문제 이며, 인간이
(2) 자연의 변화의 과정을 피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육신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계시) 화해 이다.
그러므로 대속과 칭의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 이해에 절대적 전제이다.
. 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 단명했는가? 근대에 시간-영원의 차원을 제거하였고, 성서에서 중요시 하는 죄가 성서적 관점을 더 어렵게 함으로 근대에 성서적 인간관의 관점들이 발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서적 인간관의 의미 정리가 먼저 필요하다. (6장으로의 연결)
인류의 미래를 다루면서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한 죄의 문제가 화두가 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황을 직면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데 현실을 직면하지 않음으로 과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류의 문제도 직면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계속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과 ‘죄’의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흙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죄’는 신학적 개념으로서 이 단어가 발생된 이유는 선조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결국 오래된 이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을 행할 수 도 있고 ‘죄’로 인해 악도 행할 수 있다는 둘 사이의 긴장을 간직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순진한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휴머니즘의 현재 의미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 대신 인간의 성취와 열망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시기 휴머니즘의 기원은 기독교에 근거한 문화와 교육 운동이었다. 현대의 휴머니즘(세속 휴머니즘)이 포괄하는 신무신론은 하나님은 악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주장하며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런 종교를 만들어 낸 인간의 비합리성과 부도덕함을 더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문제의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좀 더 정의롭고 인도적으로 살게 되려면 교육이 모종의 답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그러나 교육만으로 죄인인 인간의 성향을 조절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인간의 본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므로 인간을 상품화 하거나 착취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GDP가 상승하고 과학이 더 발전하는 진보를 경험할수록 인간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다윈의 선택 번식 개념이나 트랜스휴머니즘(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간 변화론을 주장하는 운동), 기후 조정 등이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결과가 좋기만 하지는 않다. 또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화와 죽음을 피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가 있다.
결론
저자는 맺는말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유한함으로 첫째, 인간은 위대한 존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은 무언가 볼 수는 있지만 전체를 명확히 다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만과 만족의 양면을 다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이다. 둘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적인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현대 시대는 계속해서 바뀌므로 확실한 것이 없는 불안하고 복잡한 상태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최소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셋째, 우리가 아는 것이 많을지라도 아직도 알아야 할(발견해야 할)것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우리의 시각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발코니가 아닌 길 위에 있다. 우리는 ‘컴컴한 강물 위’에서 항해 하는 ‘기이한 작은 배’임을 잊지 말자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22세에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2년 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패커의 제자로 캐나다의 리전트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을 가르쳤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변증학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사제이면서 기독교 신학자 이다.과학적 무신론자였던 그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무신론을 대표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기독교를 변증하는 기독 지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논중 한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이란 무엇인가』 『C. S. LEWIS』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복 있는 사람),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기독교 변증』(국제제자훈련원),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IVP),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도킨스의 신』(SFC) 등이 있다.
본서의 기획은 2015년 이언 램지 과학과 종교 센터의 콘퍼런스에서 기조 강연한 내용을 기초로, 컨퍼런스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추가하여 책으로 구성한 것이다. 컨퍼런스에서는 인류학, 생물학, 철학, 심리학, 신학 전문가들이 ‘인간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를 논했다.
많지 않은 분량의 책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3개장 12개의 흐름으로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인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해 최대한 예의와 존중을 하려는 노력이 보이며, 실제로 저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책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과학과 신학을 섭렵하는 변증가로서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고 상대의 논지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는 저자의 지혜가 놀랍다. 또한 논증을 위해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책들을 거론하고 있으며, 전문 서적 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 한다. 대부분의 이론들에 대해서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편집에 있어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의 영어이름과 생존시기를 밝혀 주어서 독자들이 시대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도 돋보였다.
서론
철학에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는 ‘생의 의미‘에 대해 저자는 과학과 종교에서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안내한다. 과학 조차도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 살만 루슈디의 이론을 수용하여 인간 내면의 영적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각 개인의 삶은 표현된다. 이러한 의미의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종교의 능력을 인식한다면, 과학과 신앙을 함께 엮어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과 신학 두 분야를 소재로 인간의 정체와 의미에 대해, 인간 본질의 ‘큰 그림’을 전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힌다. 첫 번째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번째 생의 의미에 대해, 세 번째 미래에 대해 논한다.
1.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이 왜 그렇게 ‘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몰두하는 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의 본질은 물리, 화학, 생물, 사회적 차원으로 구성되어있고 또한 각 차원은 복잡한 실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간단히 말 할 수 없지만 우선 이 책에서는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인간의 본질과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인류학 연구를 사용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현재까지 영향력 있었다고 알려진 4가지 이론을 제시함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중요성에 주목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르네상스의 서막을 알린 『 인간 존엄에 관한 연설 』 에서 창의성을 강조한 지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입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보호막 안에 감금되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하기에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해방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이리스 머독의 관점이다. 네 번째는 인간 유전자의 기질이 이기적이므로 이기심 성향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이기심(탐욕)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해석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관점이다. 네 가지 관점은 인간의 본질 뿐 아니라 각 관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이 제기 된다. 답은 없고 질문만 생성되는 상황에서 저자는 중요한 질문들로 되돌아가보자고 제안하며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2. 생生의 의미에 대해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춰 존 알렉산더 매케이의 ‘발코니와 길’과 C.S.루이스의 『 순례자의 귀향 』 을 예로 들면서 인간을 길 위에서 ‘큰 그림’을 찾는 순례자로 표현한다. 의미를 찾는 동물로서 ‘의미’란 것이 인간의 번영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종교와 과학 분야에서 이야기 한다. 종교에서는 인간에게 경험과 삶을 해석 할 ‘틀’을 제공하여 주므로 의미를 분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여 더 큰 무언가와 관계 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에서 의미의 문제에서는 제한된 지침만 줄 수 있다는 것을 19세기 이성의 시대를 통해 경험했다. 그러므로 ‘생의 의미’의 문제는 과학의 답변 능력을 넘어서는 질문이다. 또한 우리가 중요시하는 ‘사실’은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는 재해석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실’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지식의 소재로서의 ‘사실’이 해석되고 이해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이야기이다. 카를 융은 ‘인간의 경험과 행동의 기저가 되는 어떤 “보편적 심리구조”가 있다’고 했다. 한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 심리구조”를 형성하는데 이야기가 사용 되는데, 예를 들면 ‘신화’는 의미를 전달하고 이성에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창작해 낼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톨킨은 말한다.
우리가 장대한 이야기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에 참여 할 때 이다. 장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해석해 주는 의미의 틀이 되는데,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은 신봉자들이 그 이야기에 참여할 때 이야기의 진행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기독교의 이야기 안으로 내가 들어가겠다는 결단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잠시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다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며 ‘대안적 가설들’에 대해 말한다. ‘의미’라는 것을 인간이 조작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이 생긴 이유는 어떤 직관에 의해 신념이 먼저 채택되고 그 후에야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것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진지하게 보자고 한다. 그의 가설을 무시한다면 자신의 세계관이 그의 가설을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상상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파헤친다. 토마스 네이글의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그런 우주를 원치 않는다’는 글로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표현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편히 쉴수 없습니다.’ 문장으로 자신의 이론을 나타낸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욕망의 논리’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욕망은 하나님은 우리가 발견하고 만나야 할 분으로 만들며, 토마스 네이글의 경우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워줄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니체, 자크 데리다, 리처드 로티 등이 의미와 도덕은 자신의 기대에 따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자는 사회규범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기득권자에 의해서 조작되기 쉽다고 밝힌다. 결국 평가의 준거는 한 사회의 합의와 관행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가 만들어낸 준거로 우리가 만들어 낸 의미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의미에 대해서는 ‘객관적 근거가 있되 적용은 주관적으로’ 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미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의미를 이해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쇠렌 키에르케고르) 개인적으로 체험하므로, 인간이 진리와 만났을 때 내면이 변화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와 루이스의 주장이며, 저자 본인도 이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예로 든다. 이와 같이 생의 의미 혹은 목적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영역 내에 있지 않지만 찾으려고 하면 발견될 것이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존로크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신이 없다는 도킨스나 저자의 신념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발코니에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설명도 가능하고 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C.S.루이스의 『 고통의 문제 』 와 『 헤아려본 슬픔 』 을 예로 들면서 추상적 개념(신학)과 사실적 경험(경건)의 차이를 설명한다. 바로 이것이 발코니에 있는 것과 길 위에 있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인간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저자는 ‘세계의 의미’로 화두를 돌린다.
의미의 문제가 시작되는 곳은 호기심이다. 자연(세계)을 궁금해 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과학으로 가서 관찰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되어서 연구하다 보면 때로는 경이감을 잃게 되기도 하고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보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계시‘에 의해 우리의 이성이 보완 될 수 있다. ’계시‘는 우리 힘으로는 알아낼 수 없지만 우리의 현실을 납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큰 그림‘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을 창조하신 분의 아름다움까지 알수 있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고전적 개념이다. 도킨스와의 논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준다.
세계를 이야기 하면서 자연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시야를 우주로 돌린다. 우주의 기원과, 인간이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는가(편안한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암시한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시는 여행자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가 길에서도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살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향하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학 연구 중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를 ‘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한다. 신학적 인간학은 신과의 관계 안에서 규명되며 인간 존재의 기원을 신에 두고,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의 위상을 갖지만,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며 죽음에 이르는 유한성의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특별한 위치가 있지만 또한 인간은 모두가 죄인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가 신학적 인간학의 공통 특징이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학은 전통적 신학적 인간 이해가 남성 중심적으로 위계질서를 정당화 하면서 여성을 비하, 차별, 억압, 공적 영역에서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해가 자연과 연관되어 자연을 착취하고 남용하거나 그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옹호해왔다고 비판한다.
하나님 형상인 인간을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가부장주의적인 신학적 인간론이 여성의 정체성을 남성의 아래 두었다. 가부장주의적 신학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등한 피조물로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이 관계에는 오직 사랑과 배려의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적 세계관 이후로 하나님과 세계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으로 관심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철학자들은 지식위에 신의 자리를 마련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와 의심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근본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라는 기본 명제를 발견하고, 인간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식론적 주체, 지식의 대상으로서 세계는 객체인 이원론으로 구분했다. 그 위에 칸트는 ‘초월적 이성’, 헤겔은 ‘절대 이성’으로 이성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영적인 남성과 육적인 여성으로 구분하면서, 근대이후는 물질적인 여성의 위상과 자연에 대한 인식은 더 격하되었다.
여성∙생태 신학적 인간론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은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 인간의 ‘영적인 몸’ 혹은 ‘육화된 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상호 관계 맺을 수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죄의 원인은 ‘관계의 왜곡’(로즈마리 류터)이며 관계를 파괴하는 억압, 착취, 전쟁 등 파괴적 관계를 죄라고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여성과 남성으로, 곧 관계적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정체성은 관계성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페리코레시스’로 서로의 위격 안에서 인격체로 내주하시며 돌보는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신다. 사랑과 배려와 환대의 관계적 하나님과 같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동료 인간과 자연세계와 관계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초대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자연 세계 역시 하나님의 관계적 방식으로 배려하고 돌보아야 한다.
옳은 말씀만 하고 있지만, 이 관점을 남성 신학자(몰트만 ?)들이 말하지 않고 여성∙생태신학분야에서 크게 거론된다는 것이 신학에서 조차도(모든 학문이 마찬가지 겠지만..)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13장 위르겐 몰트만의 인간 이해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해를 중심으로]
이미 창조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인적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지만 인간의 두려움과 관계의 왜곡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비극으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중재자임을 말하는 것이고, 창1:28에 근거하여 피조물을 지배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도 강조한다.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인자(人子)는 인간을 인간적인 존재로 해방하므로 그의 나라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된다. 이것은 이 땅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된다.
교회는 예수의 인간성을 그의 수난에서 보고, 자신의 새로운 인간성을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받는다. 인자는 인간의 고통과 죄악과 심판을 친히 감당함으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에게 세계 지배를 넘겨주셨다. 세상에서 추방된 자들이 인자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아둘람 공동체가 생각났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나타나는 몰트만의 ‘하나님 형상’은 창조시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으로부터 ‘그의 형상이 되도록’ 인간을 규정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결정 되었으며,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죄인이며,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형상이라고 정리한다. 인간은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속성이 아니라 인간 전체, 인류 공동체, 자연과 연결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얼굴에 집약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므로 ‘관상학적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는 생육의 축복을 위한 성적인 구별과 사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귐 속에서 체험되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이들은 예수의 뒤를 따름으로 메시아적 형태로 자란다. 칭의는 영화의 현재적 시작이고 영화는 칭의의 미래적 완성으로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있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하나님은 선택, 소명, 칭의, 영화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이면서 임무,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인간은 이과정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 되라는 인간의 종말론적 소명이 인간을 종말론적인 새 창조로 인도한다.(소명-칭의-성화-영화의 단계)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특정 본질이나 기능이 아닌 ‘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고 종말론적 특징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창조되었다.(선물이면서 과제) 그러므로 이 땅 위에 현현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본다.
특이하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인식되는 부분을 얼굴이라고 했고(347),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인간학적 장소를 성적차이와 사귐(347, 348)으로 본 것이, 관계로 해석한 것과 비슷하지만 느낌상으로 크게 다르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형상을 되어져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므로 부분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는 듯 하다. 짧은 지면에 깊은 이론들을 소개하시느라 고생하신 저자들의 노고가 귀하고 감사하다.
판넨베르크의 가장 큰 공헌은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 안에서 인간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신학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신학이 타학문에서도 보편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학을 ‘기초-신학적 인간학’이라고 하여 타학문의 방법론과 인간에 관한 연구결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역사-신학적으로 개념화(298) 하여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하며,(296-297) 부활을 통해 예수안에서 인간의 운명이 실현되었다.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 부활에 대한 소망 안에서 살수 있으며, 고유한 인격성에 도달하는 것은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참여로 가능하다.(305)
쉘러, 플레스너,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의 인간 본성에 관한 개념을 수용하여, 인간을 ‘세계 개방적 존재’로 규정하고 세계 개방성의 근거를 신(Gott)로부터 찾는다. 그러므로 세계 개방성은 핵심은 ‘신 개방성’이고 세계 개방성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형성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인간 운명 및 본성의 완성이다.(294) 인간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과 연결된다.
쉘러의 세계 개방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헤르더의 인간 이해인 철학적 인간학을 토대로 신학적 인간학을 설립했다. 헤르더는 미숙함에서 형성의 과정을 통과하는 성장하는 인간인데 이것을 ‘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한다.(296-297) 동시에 인간은 ‘죄인’이다. 판넨베르크는 죄를 욕망(죄의 형식, 결과)과 동일시 한다. 세계 개방성과 자기 중심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이지만 이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극복된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두려는 욕망에 끌릴 때 죄의 힘이 인간을 지배한다. 죄와 죽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므로 죽음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이다.(295) 인간의 운명의 완성은 미래의 희망을 통해서 가능하다. 희망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며,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므로 희망이 가능하다. 이것은 예수의 순종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구원의 미래와 연결된다.(307)
하나하나 보면 떨어져 있는 개념 같은데 결국 세계 개방성-신개방성-죄인-되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자기 중심-그리스도에게 자기를 내어드림-성령의 활동-구원(희망)이 쭈욱 연결되는 그림이 그려졌다. 디테일 부분에서는 군데군데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지만 아마도 짧은 지면에 표현하느라 거론되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의 인간이해는 기독교 영성의 개념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어서 반가웠다. 기독교 영성(이전의 ‘영성신학‘)의 문자적 정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영성 훈련에 참여할 때 얻는 경험과 그에 대한 개인, 공동체적 반응”이다. “4. 인간과 역사”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간의 선취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부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스스로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훈련하므로 경험하게 되는 기독교 영성과 동일한 언어로 표현되는 부분이 반가웠다. 조금더 연구해보고 싶었으나, 2002년 한국방문 공개 강연회 자료를 나중에 읽어보는 것으로 반가움을 달래야 할 듯 하다.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는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영성훈련과 대화를 통해 돕는 사역입니다. <영성지도자 과정>은 목회자, 사모, 선교사 및 일반 성도들이 영성지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영성지도자 과정>은 목회자, 사모, 선교사 및 일반 성도들을 영성지도자로 양성하여 각 사역지에서 영성지도 사역을 통해 다른 기독교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합니다. <영성지도자 과정>의 대상은 <영성형성 과정> 또는 그에 준하는 프로그램을 수료한 목회자, 사모, 선교사 및 일반 성도들입니다.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은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성형성 과정>은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이해하고 실습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 이해를 가장 심층적으로 탐구한 신학자 이며, 실존적 물음과 계시적 대답을 연관 짓는 상관관계 방법론과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집중한 문화의 신학, 경계선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론에서 물음은 ‘실존적 소외’이고 대답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실존적 소외 속에 있는 인간’은 신학적 대답인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본질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이며 실존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다.(257) 그래서 실존은 소외의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전이’한 것으로 해석한다.(258)
‘창조와 타락은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실존이 현실화 될 때 본질로부터 분리 되기 때문이다.(260) 타락의 결과로 실존적 소외상태가 되고 이는 불신앙, 교만, 욕망으로 묘사된다.(261) 죄(소외)의 결과 자기-파괴구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악‘이며 이것으로 자아와 세계의 상실이 발생한다.(262)
인간의 유한성은 실존적 소외 속에서 자기-파괴로 변형된다. 유한성은 비존재(죽음)을 악의 화신으로 만든다. 소외의 결과로 고난, 고독, 의심, 무의미가 발생한다. 고독한 존재는 자기파괴나 타자파괴로 발전한다.(264) 여기서 ’구원‘은 소외와 죽음의 극복으로 본질과의 재연합이며, 화해이며, 소외를 극복하는 존재의 치유로 해석한다.(276) 바로 그 화해를 위한 새로운 존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결과인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다.(265-267) 그리스도는 치유와 구원의 궁극적 기준이다.(277) 또한 그리스도의 존재가 사역이고 그 사역이 그의 존재(새로운 존재)가 된다.(278)
새로운 존재란 실존 속에 있는 본질적 존재이며, 본질과 실존사이 분열을 극복한 존재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함으로 성령에 의해 단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수 있다.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에 대한 종속’으로 상징이 사건과 결합하여 상징화된 것이고, 부활은 ‘실존적 소외에 대한 승리’로 부활의 경험에서 사건과 결합하며 사건화된 것이다.
속죄는 객관적 요소(신적행위)와 주관적 요소(인간적행위)가 모두 필수적인데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으로 주-객 통일적 사건이며 중생(참여), 칭의(받아들임), 성화(변화) 모두 그렇다.(279)
문화의 신학과 경계선 신학으로 틸리히를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10장을 발표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 장을 읽으며 인간론에 대해서는 틸리히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게다가 이렇게 내용이 어려울 줄이야.. 개념 설명에는 이해 못하겠다고 썻다가 개념에 따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는 것 같았다가 두 번째 읽으면서 정리할 때는 또 모르는 것 같았다가 글로 다시 정리하면서는 안다고 착각했다가...
틸리히의 깊이있는 정리에 기존에 틸리히에게 느꼈던 매력보다 더 크게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틸리히와 슐라이어마허와 관련해서 소논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틸리히를 좀 미리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틸리히의 이론이 너무 깊다. 지금 읽은 교재중에 틸리히(10장)에서 가장 많이 줄을 쳤다. 과연 틸리히에서 내가 인간론의 주제를 찾고 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상담학에서도 폴 틸리히 연구가 국내에 논문으로 몇 개 있긴 했다.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도 2003년에 있었는데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잘 모르는데 논문 주제를 잡을 수 있을지.. 공부는 할수록 어려워지고 작아진다...
에밀 브루너를 읽으며 만남(관계), 모순, 책임, 위로부터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떠오른다.
들어가는 말에서 최신기술들을 거론하면서 시작하시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복잡한 인간에 대해 ‘인간론’이라고 대 놓고 책을 쓴 신학자는 (교과서에서 제공한 정보들을 근거로 볼 때) 에밀 브루너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연과학, 철학, 신학적 관점을 종합(231)하면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더 분석하기 힘들어진 시점에 ⌜모순속의 인간(그리스도교 인간론)⌟은 말씀중심의 신학, 책임적 존재로서 인간, 기원과 종말을 포함하는 신학의 관점으로 저술되었고, 9장에서는 종말에 비추어본 책임적 존재의 주제를 다루었다.
부버의 ‘나’와 ‘너’의 ‘만남’ 기반으로 한 ‘만남으로서의 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되려는 모습과 실제 모습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분리되어 있어 관계적 존재이지만 모순 속에 있다. 관계적 존재의 인간에 기반해서 ‘위로부터’ 규정되는 존재이다. 타락이후에도 인간에게 은총과 소통의 가능성이 남아있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답하는 존재로서 관계적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235)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고 단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원의를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234)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며 그들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다.(238) 더불어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양심’을 고려했던 본인도 이 부분에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브루너의 요약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관계’, ‘공동체’, ‘계시 중심’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말의 빛에 서있는 존재’에서, 칼 바르트의 영원과 죽음을 설명한 부분이 떠올랐고, 관계의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존재로 설명한 부분도 비슷했다. 하나님의 형상(235)이 관계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240)이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마음과 영에서 영을 인격으로 보고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개인으로 살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실존을 말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물론 앞의 많은 신학자들이 따로 많이 언급했겠지만), 에밀 브루너에게서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제도 아닌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몇 주동안 만났던 신학자들과의 만남이 계속 올라와서 자꾸 정리하고 싶어서 시간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호모데우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에밀 브루너 같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질문]
.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이미 (위로부터) 질문이 주어진 존재로서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중예정설은 부인한다고 했는데 예정설과 맥이 통하는 곳일 까?
. (223) 브루너 신학의 핵심구조중 하나인 ‘성서적 인격주의’는 계시를 “나와 하나님(당신)의 만남이라는 개념” 혹은 “인격적인 하나님(it 이 아닌)“으로 해석해도 될까?
. 마음, 영(인격, 240), 지성.. 등은 강조하는데 몸에 대한 언급은 ‘일시적이며 인간의 죄 된 실존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과학과 연결시키는 부분 밖에 없던 것 같다.(243-244)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 슐라이어마허(1768-1834, 독일)에 의해 시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보편 해석학)
. 식민주의, 산업화, 세계대전으로 의문시 됨 (인간의 야만성)
■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루너, 폴 틸리히, 니버 형제 (라인홀드 니버 1892-1971)
. 하나님의 계시 강조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년 스위스 바젤 출생 (1968년 82세, 바젤 사망)
.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 스위스 자펜빌 교구 목사
. 1914년 독일의 스승들이 전쟁에 찬성하면서 자유주의와 결별
. 1918년(1922년) ⌜로마서 주석(2판)⌟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
. 독일 대학에서 교직 중 나치로 인해 1935년 스위스 바젤 대학 신학교수
. 1962년 은퇴
. ⌜교회 교의학⌟(1921-1959), ⌜복음주의 신학 입문⌟(1962)
. 말씀의 신학자, 계시 중심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칼 바르트
■ 아돌프 슐라터(1852-1938) 독일 개신교 내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독일 신학자 니체로부터도 배웠으나 그것이 학문적 엄밀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동시에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옹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적 성품을 지닌 교수(불트만, 하르낙과 동시대)로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해 보여준 통찰과 본보기를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가 따랐다.(개혁신학 용어 사전, p72)
1. 들어가는 말
. 칼 바르트 : 20세기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 (대표적 업적)
.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
.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 그리스도 중심적 교의학 전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 강조 ∴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시했다는 평가
→ ⌜교회교의학⌟Ⅲ/2 인간론 할애 했으나 ‘인간’ 독립적 주제로 나타나지는 않음
. 인간 : (1) 불완전한 피조물 (2) 자기 기만적인 죄인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인간을 알수 있음.
(1)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 선택된 인간 :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2)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개방된 관계적 구조 가진 존재 : 4. 만남과 관계의 존재로서
(3) 통일체(영혼+몸)로 창조 세계에 참여 : 5.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 인간
(4) 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 : 6.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
2. 근대의 ‘절대적 인간’비판
. 18세기 절대적 인간 : 이성, 합리, 계몽주의 시대 과학 혁명, 기술발전, 자연정복 등
. 절대주의 시대 :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18세기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이면에 ‘절대주의’)
. 절대주의 : “인간 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 위에 기초한 삶의 시스템... ”(p195)
. 절대주의 인간 : “잠재력..절대적이라고 스스로 간주한다.... 절대적 인간은 18세기의 인간이다.”(p195)
. 절대주의의 영향력 : 인간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학문, 정치, 문화, 신학에도 ‘인간화’의 흔적 남김
. 인간화 : “하나님을 제거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절대 권력을 가진 인간의 자기의식 영역에 포함하고... 실재를 내적으로 경험되고 이해되는 실재로 변환”
. 개인주의화 : “인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의미...하나님 밖의 모든 것에 행사하는 감춰진 권위를 받았음을 의미.. ” (p196)
. 인간화의 영향 (유럽) : 문화 개신교주의(서유럽 자유주의 신학) 등장 배경
. 교파의 민족주의화
. 교회의 부르주아화
. 신앙의 사사(私事)화(개인주의화에 상응하는)
. 학문으로서 신학의 정체성 변화
∴ ‘신학적 인간론‘의 변화
.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언어와 논리로 인간 본성 이해 하려 함
. 진리 판단 기준이 ‘인간 경험’에 권위 부여하는 인간론적 패러다임
⇒ 세계대전, 식민주의, 사업화 등 비인간적 광기로 절대주의의 붕괴
⇒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등장
3. 인간 현상을 넘어 참 인간의 본성으로
. 절대적 인간 VS 피조물 인간 → 바르트의 독특성 : 인간론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
(1) 피조물 인간의 본성
(2)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3) 인간이 창조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 질문하고, 현대의 인간학적 도전을 함께 대화 할 수 있는 개방적 신학적 틀 제안
. 바르트의 다른 철학의 인간론 분석 (p198)
특징/중요점
한계
자연주의
피조물 중 하나
다른 피조물 사이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함
관념론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
하나님의 존재를 잘 성명하지 못함
실존주의
초월의 존재
자기 폐쇄적인 자아상을 만듦
유신론
타자와의 만남의 존재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실패
∴ 추론이나 관찰로 꿰뚫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말씀으로만 알려 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계시됩니다. 그분 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 성서 : 하나님의 피조물
.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께 묶여 있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먼저 묶으심
∴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론의 기초로 삼음
(1) 인간에 대한 현실적, 포괄적, 참된 이해 가능
(2) 철학은 각자의 방법론으로 특정 부분을 설명하지만, 계시에서 시작하지 않으므로 인간 본성까지 다룰 수 없음 (비판적 건설적 대화)
. 인간론의 시작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 (신적결정)
→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서
(1) 참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신실한 파트너
(2)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파트너
. 신적결정 :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응하도록 창조
. 관계의 유비(類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결정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신앙의 유비)하게 된다.
. 관계의 유비에서 나사렛 예수와 피조물 인간사이의 다층적 인간론 구조
(1) 예수그리스도 : 하나님과 인간을 향함 – 영혼과 몸 – 시간의 주님으로 역사에 나타내심
정말 방대한 양의 내용들을 짧은 지면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신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또한 2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하느라고 고생했을 저자들에게도 고맙긴 한데 고민이 되는 문장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 의문이 남는 부분들이 많았다. 정말 인간론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슐라이어마허를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은 『시크릿 Secret』 (론다 번, 2007)이었다. 요즘에는 비슷한 종류의 책이 더 많이, 더 자세히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우주’랑 관련된 책들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가브리엘 번스타인, 2018) 등으로 유튜브에도 많은 비슷한 맥락의 많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슐라이어마허를 기반으로 하는 걸까?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사실 『시크릿 Secret』을 한국에서 처음 보고 선교지로 들어갈 때 전도용으로 사용하려고 여러 권 사가지고 갔다. 그리고 학생들과 이 책으로 토론하면서 무신론 기반인 선교지에서 우주를 활용해서 유신론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했다.(선교지 같은 무신론 기반 세계는 우선 유신론으로 들어가야 예수님 설명이 된다.) 그러다가 한국 기독교 사이트에서 『시크릿』을 엄청 비판하는 글을 읽고 놀랐다. ‘이거 하나님 대신 우주라고 쓴 건데 왜 이걸 전도에 사용안하지?’ 나에겐 의문만 남았다. 당시 신학을 안했던 나는 목사님들이 쓰지 말라니깐 사용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더 이상 전도의 도구로 이 책을 쓸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와 토론할 기회나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7장을 읽으며 슐라이어마허 또한 ‘우주’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게 하려 했다는 부분을 읽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크릿』도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도 모두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사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한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구] 슐라이어마허에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찾았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부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속’인 예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왜 필요한지.. 슐라이어마허를 더 연구해 봐야 할것 같다.
[연구]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역사적 예수’란 해석학(?)에서 예수님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셨던 분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실존하셨던 예수를 강조하는 말로 본인은 해석했다.(p187 명제 9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목사님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로 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기독교 입장에서 부정적인?)였을까? 아직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단어의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쪽이었을까 갸우뚱 되었다.
[연구]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을까? 공격을 받았을 것 같긴 한데...
신학서적이나 철학 서적이나 읽다보면 무조건 수긍이 가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직 넓고 큰 시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논리의 빈약한 부분이나 이상한 부분을 못 찾아 내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지만 이러다 보면 견고하고 건강한 뿌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조직신학과 철학을 평생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칼뱅을 여러 관점에서 보면서 다양하게 평가하는데 저자는 그 모든 의견을 모아 칼뱅을 삼위일체 신학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칼뱅의 신론은 인간론이며, 인간론은 신론이다. 칼뱅의 이러한 인간론을 죄와 관계된 인간 이해로 인간의 상태를 무흠, 부패, 은혜, 영광의 4중 상태론에서 다룬다.
칼뱅은 인간의 영혼도 모든 창조물과 같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영혼으로 영적 세계에 참여하고, 육체로 감각 세계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4중 상태론중 무흠(순전한)의 상태란 타락하기 이전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불순종했고 다음 상태인 부패 상태의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다른 피조물, 순전한 상태의 자기 자신, 그리고 타자와의 4중 소외가 발생했다. 죄란 본성의 부패로 유전되며, 전인격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은 부패 상태이며 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인간은 자발적,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캘빈은 인간이 선천적,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정의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용하며 죄와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는 타락 이후 상실 됬지만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죄를 짓는 자유가 남아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그는 전적 부패를 주장하며 지상의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성령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고 고귀한 존재로, 긍정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중적 지식은 타락 전 무흠의 상태를 아는 것과 자신이 순전한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아는 두 가지 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 지식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인간의 악한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어 소멸되는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 또한 성령은 신자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돕는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어 처음 창조시기보다 더 좋은 상태가 된다. 여기가 은혜 상태이며 죄를 지을 수 없음에 참여함으로 선택할 수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광의 상태에서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은 의지에 은총이 부여되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영적이며 부재로 현존하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찬에서도 영적임재설을 주장한다. 또한 신자의 개인 종말인 죽음과 보편 종말인 몸의 부활을 구별하여 죽음은 죄와의 결별이며,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중간상태에서 쉼을 누리며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칼뱅이 말하는 영광의 상태는 은혜의 완성된 상태로서 은혜에 사는 이들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므로, 미래의 소망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상태와 분리된 영광의 상태는 위험하다.
[토론] (p131, 아래서5줄) “은총 있을 때는 선을 없을 때는 악을 선택하는”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른 이론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예정론의 맥락일까? 이글에서만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악하게 내버려두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듯...
루터는 개혁의 선두에서 인간론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가망 없고, 스스로 불안을 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펼친다.(‘신학적 인간론’)
1536년 『인간에 관하여』에서, 4-19는 철학적 논제이고 20-31은 신학적 논의로 구분되어 진행하면서, 로마서 3:28절의 ‘사람’을 그의 인간론의 기초로 삼는다.
(3. 이성의 동물) 먼저 스콜라 철학에서 처럼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 철학은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서만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정의에 루터는 ‘감추고 우상을 만들고 꾸며댈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4. 신학적 인간학) ‘인간론’의 시작은 스콜라주의와 같게 했으나 다른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에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에서는 은총의 효력이 남아 노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으며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 이다. 자기를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 아래서 가능하다. 인간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 루터의 신학적 인간론의 기반은 로마서 3:28절 이다.
(5.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에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이다. 관계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이성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은 이웃과의 관계까지 깨어진다. 루터에게 ‘죄’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뜨리는 본성“이다. 율법아래서 인간은 죄인이지만 복음으로 인해 의로운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점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도 거론된 부분이지만 이러한 믿음의 전환은 평생의 과정이며 방향이다.
(6. 종교적 존재) 칸트는 순수한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으며, 다윈 또한 진화론은 신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몰아냈다. 루터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신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구부러져 탐욕에 빠진 존재”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관계가 있다.
(7.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에게는 ‘칭의론’이 핵심이라 할 수 있으나 루터는 ‘칭의’를 “죄인을 자유케하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칭의론’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언제나 사랑이 뒤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웃 안에 산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종교 행위보다 내면의 양심과 신앙을 강조했으므로 자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칭의는 자유와 사랑의 조화로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루터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 같은데 미세한 차이점들을 공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4년 동안 히포의 주교로 활동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에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인간에 대해서 본장에서는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니교, 아카데미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을 거치고,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등과 논쟁하며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2장에서는 『고백록』의 구조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기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는 인간의 틀로 인간 이해를 풀어간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에 의해 훼손 되고 은총으로 다시 형성 될 수 있지만, 상실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악은 선의 결핍(존재의 결핍)이며, 모든 존재는 다 선하므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여기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체로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서 발견 되고, 영혼이 생명의 주요 요소이며, 사유의 중심이라고 보면서 “육체를 다스리는 데 적합한 합리적 실체”로 정의한다. 처음에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회심 과정에서 점차 이원론을 버리게 된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영혼을 육체보다 탁월하게 보지만,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불멸이 행복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정신을 깊게 탐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안의 정신에 속하는데,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삼위일체)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타락해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정욕과 습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치유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고백록』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을 향하도록’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심오한 분”(p61)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좋다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탐험이 출발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을 탐구하는데 정신이 신적 조명(은총)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게(p65) 되지만, 부활(불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직관에 도달하는 종말에 완벽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이해는 신학, 철학, 심리학적으로 큰 영향을 남겼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경향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와 종말론적 전망에서의 재해석도 필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더 깊이 읽어봐야 알겠지만, 은혜와 인간 선택의 시작점이 항상 애매모호함으로 남는다. 실천적 신학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항상 질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