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삶으로 살아라 (2/2)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개인화된 삼위일체’ 부분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 정말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문제 해결식 성경 읽기의 부분은 너무 일상화 되어 있다. 얼마전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나의 필요에 따라 어떤 말씀을 읽고나서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답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결정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려주셨다는 ‘정당성’이 있었다. 급하게 결정하고 나서 다시 그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당황스런 해석이었다. 스스로 참 당황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내가 원하는 생각이 있었어서 전혀 상관없는 본문을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차라리 ‘저는 이게 좋아요. 이러고 싶어요’하고 결정하지.. 정말 내가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말씀으로 답을 받을 때 꼭 동역자들과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정말 내 마음대로 하던지..

 

5장에서는 삼위일체의 음성을 수용적 자세로 듣는 이해력과 습관을 기르라고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 혹은 교부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 오도록 현대 사람들보다 잘 반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현대보다 마음 빼앗기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지금보다 더 깊은 묵상과 통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나도 최대한 아버지의 말씀에 집중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매일, 매순간 하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너무 바쁘다. 나의, 현대인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바쁜 것을 피하고 없애 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둔 수도사이지 일상의 수도사는 될 수 없고 믿음의 공동체에 도전을 줄 수도 없었다. 도피하고 살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똑 같은 깊이로 예수님과 함께 하라는 도전은 도리어 거부감만 주게 된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으로 이 땅의 천국을 이루어 가고 싶다.

 

트럭기사 안토니가 부인에게 한말에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대로 살아야돼. 그래야 이해할수 있어. 밖에서는 도무지 알수 없고, 그 안에 들어가야돼. 아니면 그게 당신 안에 들어오게 하든가” 하지만 부인처럼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안토니 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나도 안토니처럼 살고 싶다.

 

메시지 성경의 서언에서 어떻게 그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는지 알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 유진 피터슨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모습안에서 믿음의 야성을 봤다. 바로 그 야성이, 양들을 사랑하고 아끼느라고 내는 그 화(anger)의 에너지가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내게도 하늘나라 갈 때 까지 그런 생명력 있는 야성이 있기를 바란다.

 

“Let it be with me just as you say”(눅 1:38)

 

나의 카톡의 상태에 써 있는 성경말씀이다. 연변과기대에서 사직하고 한국으로 나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마리아의 고백인 이 말씀을 보며 radical obedience 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아버지 제게 바라시는 radical obedience 는 무엇인가요?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물었던 것 같다. 오래 숙성된 후에, 결국은 radical 하게 아무 이유없이 선교지를 사직하고 나왔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기 시작한지 3년, 여전히 나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어렵지만 마리아의 고백을 매순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마 11:28-30)을 기억하면서 점점 행복해 지고 있다. 연변에 있었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푼수같은 기쁨이다. 때로는 과격하게 때로는 잠잠하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므로 내 안에 세상의 욕심이 점점 하늘나라의 욕심으로 재배치 되어 가는 것 같다. 매일 매일 조금씩 이겠지만 내 삶에 말씀이 더 살아나길 바란다.

 

 

<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삶으로 살아라 (1/2)

유진피터슨의 영성시리즈 중에서 ‘영성독서’에 관한 책으로 소개 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의 말씀을 기반으로 성경 말씀을 나의 삶으로 살아내라고 강력하게 도전하면서 영적 독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구약에서부터 성경이 번역되었던 역사도 더불어 소개한다.

 

머리로 하는 묵상에 머무르지 말고 개와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물고 빨 듯이”, 철저한 순종으로 말씀을 삶으로 살도록 도전한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요한 같이 성경을 흡수하고 성경이 내안에서 작동하도록 먹으라고 한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저자(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인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나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느라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읽는다.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대체’라는 개념으로 이기적 책읽기의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삼위 일체 성부, 성자, 성령은 나의 욕구와, 필요, 느낌이라는 ‘개인화된 삼위일체’로 대체되어 우리 삶을 다스린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경을 폭넓게 읽어서 그 형식을 이해하고, ‘주해’를 통해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잘 들어야 한다. 또한 성경에 순종함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내면화 하므로 거룩한 공동체에서 말씀을 살아내도록 한다.

 

 “2부 렉치오 디비나”를 말씀이 탈인격화 하는 것을 경계하는 독서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렉치오 디비나의 4단계를 소개한다. 렉치오는 은유를 통하여 깊은 의미와 단어의 기원으로 가까이 이끄는 “읽는” 것이다. 메디타티오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한 “묵상”으로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다. 오라티오(“기도”) 하나님의 문법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하나님과 관계하는 언어이다. 콘템플라티오는 성경의 계시에 굴복하여 읽는 것을 살아내는 것으로관상 통해 삶을산다 것이다.

 

“3 한무리의 번역가들에서는 정경화 과정, 성경을 번역했던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람어 번역은 바벨론 유수 이후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히브리어에 정통한 13명의 레위인들이 백성들의 삶을 말씀에 참여시켰다.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완역되는 70인역 성경과 유진 피터슨이메시지성경을 제작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 되었다.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파피루스의 발견은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 코이네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시리아의 우가리트 발굴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살아갔던 문화를 있게 한다. 이스라엘은 다신교인 가나안의 문화에 눌리지 않으면서 문화를 공유하였으며, 그들의 문화를 분별하고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할 있었다. 옥시린쿠스와 우가리트의 발견은 믿음의 선조들의 (다신교 문화에서의) 삶과 성경이 평범한 삶의 언어로 기록 되었음을 알게 한다.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 삶은 회복될 것이다.

너희에게 제대로 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아라.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나는 너희에게 무겁거나 맞지 않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나와 함께 있으면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마 11:28-30, 메시지 성경)

 

‘이 책을 먹으라’를 읽는 동안 곳곳에서 자꾸 생각나는 말씀이었다.

지난 3-4년동안 일부러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통독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도전이 되었던 말씀이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이었고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기를 목표로 했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도전했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말씀을 잘 살아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과 가벼움이 이전보다 내 안에 있다. 말씀을 살아내는 유익을 아주 조금이지만 경험하고 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소개 하고 도전하고 있다. 이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가 자유케 함’을 모두가 경험하도록…

 

역시 유진 피터슨의 표현과 문장은 너무 재미있고 획기적이다. 방대한 읽기 재료를 적재 적소에 활용하고 탁월한 말장난과 디테일한 표현, 분석과 복선은 지겹지 않고 다음 단락을 기대하며 읽게 한다. 언어의 예술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고의 깊이와 또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 많이 부러웠다. 평소에 생각은 해봤지만 물위로 올려서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어보지 못 했던 나의 내면 깊이에 있던 것들을 여러 곳에서 풀어냈다. 읽을 때 마다 놀랐다. 또한 염화 나트륨과 건조 돼지고기 등의 비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너무 잘 써서 한숨에 마구 읽어 내려가면서도 구성에서는 약간 정리가 안 된듯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부분은 주제와 예화에 전적으로 동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동의라기 보다 이해라고 해야 할까…) 왜 이 주제에 이런 예화가 들어갔을까, 번역이 잘 못된것은 아닐까, 고민한 부분도 있다. 어떤 구성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을 여기 저기에 넣은 듯한 생각이 드는 곳도 몇 곳이 있었다. 공학도로써 구조가 딱딱 맞지 않으면 가끔 읽다가 “왜?”하고 막힐 때가 있다. 저자가 나눠 놓은 단락별로 주제잡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내가 이해를 잘 못 한 걸까? 라고 생각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적으로 동의 되기 힘든 조합의 구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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