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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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성경적 견해

창세기 1:31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근거로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초적 견해이다.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에서는 인간의 한계, 육체와 개체성이 죄는 아니며, 죽음이 공포를 만들어내므로 악의 원인이 되지만 죽음 자체가 악은 아니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안에 있으므로 이 또한 악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전체를 실행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있는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부분을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국가 조차도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마태복음 6:27-34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v34)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염려)임을 알려준다.

창조론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유한한 생명의 시간동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없고, 구원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초월성으로 개인의 의식이 최고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며 아무리 의식이 강하더라도 세계 전체를 종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죽음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이 있고, 그러므로 현실의 질서가 악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2) 고전적 견해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관념론과 신비주의와 혼합된 기독교 전통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하다는 성서의 견해와 다르다.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인간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벌로 유한적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이론은 죄의 상징과 결과가 성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죄와 악을 무지와 동일시한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무지가 죄라고 가르쳤고, 글레멘스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과 무지가 무의식적으로 충동질 하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헬레니즘과 성서를 조화시켜 죄의 본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연(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누군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신적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바울의 신학과 니버의 주장

바울의 신학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롬 5:12)라고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를 동일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죽음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음에도,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항상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연결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 불확실성과 의존성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고 의존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38-29절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처럼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죄의 근원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인데 죄를 유발하는 것의 큰 특징은 두려움이다.

 

죽음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랍비 전통에 따라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너는 흙이니”(창3:19)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를 형벌로 해석한다면 혹시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은혜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이 유한적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설명하지만,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었다고 믿게 함으로 인간 실존의 역설을 왜곡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으로서 유한성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을 근거로 한 정통 교리는 헬레니즘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이 기독교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적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 운명의 끝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죄가 아니다.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4.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

니버는 인간의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유혹과 불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가 인간을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구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첫째 마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에서 발생했으며, 둘째 마귀가 인간 타락 전에 먼저 타락했다는 것 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악의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해석 된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마귀에게 유혹된 원인은 인간 안에 탁월함과 연약함, 무한과 유한한 지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무지를 감추려는 노력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불안을 은폐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을 받게 되지만 불안이 죄는 아니다. 단지 불안은 죄를 발생시키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 받기가 쉬운데, 인간의 양면성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모르므로 발생한다.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측정 불가하므로 자신이 존재해야 할 것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완벽에 대한 불안)과 존재해야 할 것으로 존재하지 못 할 것으로 인한 불안(존재의 불안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가운데 자신에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할 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존적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때 육욕(sensuality)에 빠지게 된다.

 

2)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로 교만과 육욕에 대해서 말한다. 더불어 집단적 교만과 개인의 교만을 고려한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를 함께 논해 보고자 한다.

 

A. 교만의 죄

기독교에서는 교만이 근본적인 죄이며 육욕은 교만에서 기원됨을 주장해 왔다. 교만이 죄라는 견해를 인간의 행위와 연관시켜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교만으로 분류했다.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 못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권력의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것을 거짓 안정이라고 했고, 이들에게 있을 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불안감에 기반한 권력의 교만은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힘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삶을 희생하는 죄를 범한다. 권력의 남용, 정복 등으로 표현되는 탐욕은 불안감을 숨기려는 야망의 표현인데, 인간의 야망이 끝이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교만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것이 지적 교만이다. 자신의 지식이 역사를 초월한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교만이며, 이 교만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려 할 때도 지적 교만이 드러난다.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고,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지식이기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여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지적 교만이다. 지적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시간 속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지적 교만과 관련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도덕적 가치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독선적 태도인데, 기준을 자신이 설정하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롭다고 하는 경우는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인종, 민족, 종교, 사회적 갈등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교만은 네 번째의 영적 교만으로 발전된다.

영적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종교적 죄와 관련된다. 자기미화와 신격화와 관계되는데, 본인이 계시를 받았으며, 더 많이 회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의 죄를 가중 시키며, 회개가 교만의 도구가 된다. 가톨릭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가 교만의 도구가 되게 한다. 또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도 자기 신격화의 위험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의 교만이 인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다.

교만과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 신격화는 부정직(기만)과 관계가 있다.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것도 동반하게 된다. 더불어 자아의 연약함을 숨기는 과정에서 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교만과 기만은 자아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

 

B. 육욕(sensuality)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되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죄의 본질을 육욕으로 간주 하려는 것에 니버는 문제를 제기한다. 니버는 육욕과 이기심을 구분하자고 한다. 육욕은 폭식, 술 취함, 성적 향락 등의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기심은 은폐되고 포장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욕이 이기심보다 사회적으로 더 비판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의거하여 육욕의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원적 죄의 결과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형벌이라고 하므로 두사람은 육욕을 죄의 결과이자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욕을 자기 사랑의 근원적 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육욕이 자아의 우상숭배인지 대안적 우상숭배의 발견인지는 분명한 답변이 없다. 종족 보존을 넘어서는 인간의 과도한 성적 충동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충동은 불안한 인간이 불안을 상쇄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성 행위는 내 삶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거나, 타인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적 연합의 절정은 자기 창조성의 절정도 되지만 죄성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는 성이 죄 자체여서가 아니라 성생활이 자기 신격화의 원초적 죄의 도구이면서, 타인을 신격화 함으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격과 무관한 성적 충동은 상업화된 악을 만들 수 있다. 도피를 위한 성적 격정은 그 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육욕은 자아 혹은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함으로 도피를 하려는 노력이고, 죄 때문에 생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무의식적인 실존의 형태로 도피하는 노력이다.

 

C.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 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3)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권력자나 지혜 자나 혹은 선한 자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동일한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약자에 비해 교만과 불의에 책임이 더 크다. 성경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이 드러나고, 교만과 불의에 빠지게 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도 고려된다. 부유한자나 권력이 있는 자 등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아가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수평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더 강한 오만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식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학자로 인정하게 하고, 권력자들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왕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덕으로 위장해서 권력욕을 숨기고, 관대함으로 위장해 불의를 감춘다. 역사 안에서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들의 죄책은 모든 기준을 초월하는 궁극적 분석으로 폭로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5. 결론

니버의 기독교 인간론 분석을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의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면서 죄인 된 인간을 강조했지만 전체적으로 니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므로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근대주의 인간관에서 했던 실수처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양면성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니버 신학의 특징인 역설의 연장이기도 하다.

 

니버가 기독교적 인간론을 근대의 인간론으로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안에서 이미 다른 인간이해들의 문제점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당시, 미국의 현실 가운데 낙관주의적 기독교는 답을 주지 못 했다. 공산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 역시 실망하고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특히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자세하고 깊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유혹당할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죄를 설명한다. 니버의 죄론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 이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위장하고 있는지 인지하게 도와준다.

 

약간 아쉬운 점은 6장의 ‘하나님의 형상’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만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책 전체가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두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하게 해석한 논의들은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 날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인간의 자유와 초월성에 대한 사고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한 한국어 번역이 부분적으로 아쉬웠는데 그 덕에,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니버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니버의 글과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버의 논지는 항상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간관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설의 긴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유혹과 교만을 유발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기대하므로 안정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6. 참고서적

1차 자료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2차 자료

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서울: 복있는 사람, 2019.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Ⅱ』.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장혜선.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거지왕자.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http://m.blog.daum.net/gangseo/12243001. 2020 년 6 월 25 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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