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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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성경적 견해

창세기 1:31절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근거로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초적 견해이다.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에서는 인간의 한계, 육체와 개체성이 죄는 아니며, 죽음이 공포를 만들어내므로 악의 원인이 되지만 죽음 자체가 악은 아니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안에 있으므로 이 또한 악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전체를 실행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있는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부분을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국가 조차도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마태복음 6:27-34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v34)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염려)임을 알려준다.

창조론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유한한 생명의 시간동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없고, 구원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초월성으로 개인의 의식이 최고 단계에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며 아무리 의식이 강하더라도 세계 전체를 종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실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죽음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이 있고, 그러므로 현실의 질서가 악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2) 고전적 견해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관념론과 신비주의와 혼합된 기독교 전통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하다는 성서의 견해와 다르다. 죄와 악을 가변성과 무지와 동일시 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적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인간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벌로 유한적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이론은 죄의 상징과 결과가 성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죄와 악을 무지와 동일시한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무지가 죄라고 가르쳤고, 글레멘스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과 무지가 무의식적으로 충동질 하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헬레니즘과 성서를 조화시켜 죄의 본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연(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누군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신적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 바울의 신학과 니버의 주장

바울의 신학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롬 5:12)라고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죄를 동일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죽음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음에도,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항상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연결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 불확실성과 의존성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고 의존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38-29절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처럼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죄의 근원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고전 15:56)인데 죄를 유발하는 것의 큰 특징은 두려움이다.

 

죽음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랍비 전통에 따라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너는 흙이니”(창3:19)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를 형벌로 해석한다면 혹시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은혜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이 유한적이면서도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설명하지만,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었다고 믿게 함으로 인간 실존의 역설을 왜곡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으로서 유한성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을 근거로 한 정통 교리는 헬레니즘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관점이 기독교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적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이 인간 운명의 끝은 아니다. 시간에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 너머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악하지 않다는 성서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죄가 아니다. 그 유한성을 거부하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4.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의 기원

니버는 인간의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유혹과 불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가 인간을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데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구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첫째 마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에서 발생했으며, 둘째 마귀가 인간 타락 전에 먼저 타락했다는 것 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악의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해석 된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마귀에게 유혹된 원인은 인간 안에 탁월함과 연약함, 무한과 유한한 지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무지를 감추려는 노력 혹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불안을 은폐하려는 노력에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을 받게 되지만 불안이 죄는 아니다. 단지 불안은 죄를 발생시키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할 때 유혹 받기가 쉬운데, 인간의 양면성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모르므로 발생한다.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측정 불가하므로 자신이 존재해야 할 것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완벽에 대한 불안)과 존재해야 할 것으로 존재하지 못 할 것으로 인한 불안(존재의 불안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가운데 자신에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할 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존적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때 육욕(sensuality)에 빠지게 된다.

 

2)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로 교만과 육욕에 대해서 말한다. 더불어 집단적 교만과 개인의 교만을 고려한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를 함께 논해 보고자 한다.

 

A. 교만의 죄

기독교에서는 교만이 근본적인 죄이며 육욕은 교만에서 기원됨을 주장해 왔다. 교만이 죄라는 견해를 인간의 행위와 연관시켜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교만으로 분류했다.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 못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권력의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것을 거짓 안정이라고 했고, 이들에게 있을 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불안감에 기반한 권력의 교만은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힘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삶을 희생하는 죄를 범한다. 권력의 남용, 정복 등으로 표현되는 탐욕은 불안감을 숨기려는 야망의 표현인데, 인간의 야망이 끝이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교만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것이 지적 교만이다. 자신의 지식이 역사를 초월한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교만이며, 이 교만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려 할 때도 지적 교만이 드러난다. 모든 지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고,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지식이기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여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지적 교만이다. 지적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시간 속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지적 교만과 관련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도덕적 가치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독선적 태도인데, 기준을 자신이 설정하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구원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롭다고 하는 경우는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인종, 민족, 종교, 사회적 갈등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교만은 네 번째의 영적 교만으로 발전된다.

영적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종교적 죄와 관련된다. 자기미화와 신격화와 관계되는데, 본인이 계시를 받았으며, 더 많이 회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의 죄를 가중 시키며, 회개가 교만의 도구가 된다. 가톨릭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가 교만의 도구가 되게 한다. 또한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도 자기 신격화의 위험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의 교만이 인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다.

교만과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 신격화는 부정직(기만)과 관계가 있다. 기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타인을 속이는 것도 동반하게 된다. 더불어 자아의 연약함을 숨기는 과정에서 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교만과 기만은 자아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

 

B. 육욕(sensuality)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되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죄의 본질을 육욕으로 간주 하려는 것에 니버는 문제를 제기한다. 니버는 육욕과 이기심을 구분하자고 한다. 육욕은 폭식, 술 취함, 성적 향락 등의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기심은 은폐되고 포장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욕이 이기심보다 사회적으로 더 비판을 받는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의거하여 육욕의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원적 죄의 결과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형벌이라고 하므로 두사람은 육욕을 죄의 결과이자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육욕을 자기 사랑의 근원적 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육욕이 자아의 우상숭배인지 대안적 우상숭배의 발견인지는 분명한 답변이 없다. 종족 보존을 넘어서는 인간의 과도한 성적 충동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충동은 불안한 인간이 불안을 상쇄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성 행위는 내 삶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거나, 타인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적 연합의 절정은 자기 창조성의 절정도 되지만 죄성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는 성이 죄 자체여서가 아니라 성생활이 자기 신격화의 원초적 죄의 도구이면서, 타인을 신격화 함으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격과 무관한 성적 충동은 상업화된 악을 만들 수 있다. 도피를 위한 성적 격정은 그 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육욕은 자아 혹은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함으로 도피를 하려는 노력이고, 죄 때문에 생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무의식적인 실존의 형태로 도피하는 노력이다.

 

C.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 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3)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권력자나 지혜 자나 혹은 선한 자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지적, 영적,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동일한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약자에 비해 교만과 불의에 책임이 더 크다. 성경에서는 죄책의 차등성이 드러나고, 교만과 불의에 빠지게 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도 고려된다. 부유한자나 권력이 있는 자 등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아가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수평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더 강한 오만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식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학자로 인정하게 하고, 권력자들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왕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덕으로 위장해서 권력욕을 숨기고, 관대함으로 위장해 불의를 감춘다. 역사 안에서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들의 죄책은 모든 기준을 초월하는 궁극적 분석으로 폭로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5. 결론

니버의 기독교 인간론 분석을 위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의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6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많은 부분을 할애 하면서 죄인 된 인간을 강조했지만 전체적으로 니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므로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근대주의 인간관에서 했던 실수처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양면성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니버 신학의 특징인 역설의 연장이기도 하다.

 

니버가 기독교적 인간론을 근대의 인간론으로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그의 체험 안에서 이미 다른 인간이해들의 문제점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당시, 미국의 현실 가운데 낙관주의적 기독교는 답을 주지 못 했다. 공산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 역시 실망하고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특히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자세하고 깊다.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인간은 유혹당할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죄를 설명한다. 니버의 죄론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 이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위장하고 있는지 인지하게 도와준다.

 

약간 아쉬운 점은 6장의 ‘하나님의 형상’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만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책 전체가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두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하게 해석한 논의들은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 날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인간의 자유와 초월성에 대한 사고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한 한국어 번역이 부분적으로 아쉬웠는데 그 덕에,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니버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니버의 글과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버의 논지는 항상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간관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설의 긴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유혹과 교만을 유발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기대하므로 안정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6. 참고서적

1차 자료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2차 자료

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 서울: 복있는 사람, 2019.

니버, 라인홀드.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Ⅱ』. 오희천 역. 서울: 종문화사, 2013.

장혜선.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거지왕자.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http://m.blog.daum.net/gangseo/12243001. 2020 년 6 월 25 일 접속.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인간의 본성과 운명 Ⅰ> 6~8장을 중심으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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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3. 피조물로서의 인간

4. 죄인으로서의 인간 

5. 결론

6. 참고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부분이 있으나, 피조물이므로 발생하게 되는 의존성, 자연계 안에서의 유한성이 있는 존재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저항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악이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의 6장에서 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7~8장에서 다루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내용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키워드 : 라인홀드 니버,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초월, 피조물, 유한성, 죄

 

1. 서론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문화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근대 문화가 기독교적 인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 기독교적, 근대적 개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정리되면서 혼란들을 야기했다. 고전적 인간관은 그리스 철학을 전제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반이 된다. 이성적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합리주의와 육체를 악으로, 마음은 선한 것으로 양분하는 이원론 그리고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스토아 철학이 바탕이 된 개념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인간 개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초월성을 가진 인간 개념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하는 인간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근대적 인간관은 자연주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사상이 되면서 고전적 개념과 기독교적 개념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생명력과 존재 양식을 초월하는 해석 원리 없이 부분적 진리들이 끝없이 논쟁하는 혼란을 야기했다. 근대적 인간관의 두 번째 혼란은 자연의 산물이면서 정신의 산물인 인간의 개체성의 근거를 없애 버린 것이다. 세 번째 혼란은 근대적 인간관이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함으로 악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다룬 것이다.

 

근대사상에서 인간 이해의 세 가지 혼란이 발생한 원인은

첫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편협(이성이거나 생명력)하게 생각하거나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체성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둘째는 인간의 능력이 이해되고 표현되고 발견 될 수 있는 총체적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체적 환경은 영원과 시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인간 환경의 일부 인 “영원성은 변하는 인간 존재의 변하지 않는 원천이다.” 인간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지만,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써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므로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영원성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원성을 알 수는 없다.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유한한 세계의 일부이므로 자신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해를 초월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력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만이 형식과 질서의 “원리”일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원리에 맞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근대성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 실존에 관한 존재양식, 개체성, 악의 3가지 관점을 상호 연관선상에서 해석한다. 이는 근대적 인간론에서 당면한 혼란이다.

 

혼란 중 첫째는 인간 본성의 생명력과 그 존재양식에 대한 해석 원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적 인간관은 창세기 1: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자기 초월 능력을 강조한다.

 

두 번째 혼란인 인간의 개체성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과 유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은 정신의 산물이며,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산물로써 인간의 개체성을 형성한다.

 

세 번째 혼란은 낙관적으로 해석한 악의 문제였다.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인간의 악은 자신의 의존성, 유한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결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피조물로서의 인간,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성서적 근거,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비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칼뱅과 루터의 이론을 살펴보고 니버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막스 셀러의 이론을 보면서 니버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개념을 정리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크게 기독교적 견해와 고전적 견해, 그리고 바울의 신학에 나타난 견해와 그에 대한 니버의 주장을 본다.

 

셋째, 죄인으로서의 인간에서는 죄의 기원과 죄의 형태 그리고 죄의 균등성과 죄책의 차등성을 정리해 봄으로 니버의 인간론을 마무리 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1) 성서적 근거

인간에 대해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증언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 도덕성, 종교성, 언어 능력, 자유 등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범주로 연구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중요하게 보는 히브리 사상이 드러나 있다. 히브리어에서 ‘숨’이라는 의미의 ‘라우흐’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기관의 특수한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라우흐’(숨)에 의해 생기를 받았다. 히브리어의 ‘네페쉬’(바람)는 인간의 피 속에 있다고 믿어졌는데, 영혼이나 마음(ψυχή)을 포함한 인간 안에 있는 생명과 동일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양성경에서 라우흐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정신으로서 영혼과 구분되는 프뉴마(πνεῦμα)가 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것 처럼 정신과 영혼도 개념들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 철학에서 합리적을 이성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 누스(νοῦς)와 구별하여 정신을 지칭하는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에게 있는 ‘상대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 성경에서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토대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지성적인 관점에서 정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몸, 영혼, 정신, 영혼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으며, 정신은 신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신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정신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고자 하는 신학에서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프뉴마(πνεῦμα)와 사르크스(σάρξ)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의 정신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사르크스(σάρξ)는 육체 보다 죄의 근원을 의미함으로 사용했다.

 

2)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던 중세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합리적 피조물로 보는 것 이었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플라톤의 합리주의에 성서적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사람에게도 있어서 사랑이 하나님 형상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했다. 오리게네스 또한 플라톤 주의의 영향으로 가득차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전생의 타락을 속죄하는 타락한 천상의 정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성서적 개념이 포함된 설명을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아니고 지성적인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천사들이 인간보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형상” 기독교적 인간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신학자로 인정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합리적 능력을 포함하는 그 이상의 것 으로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혼의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축복을 성취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이 있었으나, 그들과 기독교와의 조화를 최선의 상태로 공유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아의식의 신비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초월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인 기억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초월의 힘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적 신앙에 기반 하여, 기독교적 계시를 강조하므로 자아의식을 신격화하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초월능력은 자신의 너머를 지향하게 하지만, 스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 영역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우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해 이렇게 명확히 진술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임에도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들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칼뱅과 루터 두 사람을 주요하게 다룬다. 칼뱅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그들을 능가하는 인간의 탁월한 본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영혼을 총체적 인간이라고 정의하지 않지만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구조라는 것과 원래는 완전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속성이라는 두 관점에서 정의 한다. 이성은 의지의 자발적 결정(self-determination)과 초월성을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이성이 가지는 초월성이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마음이다. 또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의지도 인간에게 있으므로 인간은 원래 고상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성, 오성,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칼뱅은 히브리적 인간 이해에 근거하여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몸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거한다고 했다. 더불어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향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고 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이론의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루터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마음 또는 지성과 의지”이상의 어떤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였으나 죄에 의해 손상되었으므로 현재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며 이에 더하여 루터는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에 치중했다.

 

5) 막스 셀러와 니버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 ~ 1928년)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정립하고 ‘철학적 인간학’, ‘지식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문화 사회학의 시조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누스’(νοῦς)와 구별되는 단어인 독일어의 ‘정신’(Geist)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정신’(Geist)은 이성이라는 뜻 뿐 아니라 원인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이해 방식도 포함하고, 정서적 능력과 의지적 능력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셸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의 독특한 자질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과 자유를 초월하며 시공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셸러는 원숭이와 에디슨을 비교했는데 이에 대해 니버는 기술적 지성이 추상화 능력과 일반화 능력에 의존하는데 이 두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초월적 능력에서 유래되므로 원숭이는 에디슨의 기술적 지성에 다다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셸러가 이성을 초월하는 정신(Geist)을 강조 하고 정신(Geist)이 이성을 포함한다는 것에 니버도 동의하는 바이다.

 

셸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자기 결정력을 말한다. 자기 결정력은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한한 존재 가능성을 가지지고 무언가 선택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설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둘 다 계시하므로 인간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 역사의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 안에서 존재 했지만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 안에 존재했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이다.

 

인간은 자유와 자신을 초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의 원천’과 열쇠 없이는 의미를 풀어갈 수 없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인 의미는 이성을 초월한다.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그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위의 원리를 의미의 원리로 사용 할 경우, 인간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논리적 일관성을 의미의 원리로 할 경우 의미를 합리와 동일시 하려는 모든 것은 이성의 신격화이다. 이성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성과 논리의 법칙들은 인간 안에서 작용되어지므로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결국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신앙을 통해 이해되는데, 신앙은 이성에 종속 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진다. 반면, 우상숭배의 죄를 피하고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게 하는 초월적 시각이 인간에게 있다. 이러한 유한성과 자기초월의 양면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피조물의 교리로, 자유와 자기 초월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 두 가지를 상호 연관적으로 고려 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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