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7-9장 하나님을 향한 발돔음

 

유한한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까?

자기(나)의 틀에 하나님을 끼여 맞추고 그것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내가) 기도하면서 갖는 환상인 것 같다.

 

헨리 나우웬. <영적발돋움>. 이상미 역. 두란노.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도 단지 나의 느낌이 우선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에 근거한 임재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소리를 잠재우고 아버지를 깊이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작가가 말 한 대로 말씀을 읽고, 침묵가운데 머물고, 영적인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해 질 때 상처 입은 내가 치유자가 되고 상처 투성이인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작가는 영적 안내자로서 헤시카주의(p168)의 영성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헤시카주의의 순례자였던 농부는 자기 입에서 나오던 반복적인 기도에서 마음이 말하는 것에 깊기 귀 기울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함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분주함과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내 마음 깊이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집단들을 만들어내고 찾는 것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답이겠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살길이라고 알려줄 만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지난주 예배학의 과제가 안덕원 교수님이 본인의 스승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 제출하는 것이었다.

딱딱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던 예배학 수업이 내가 아버지께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맞습니까‘라고 하던 질문을 멈추고 웃게 만든 수업이었다.

 

그 과목의 주 교재를 쓴 분에대해 그 직속 제자가 쓴 글을 보면서 학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보다 후대들의 평가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그 글을 보면서 그제야 내가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배우는 과목에 투자하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고 자료를 만드는데 기름부으심이 없이 많은 시간이 들은 이유를 멘토와의 이야기 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은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 서있었던 내 마음의 자세가 문제였다.

 

MDiv 과정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공부에 기름부으심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3시간밖에 못자고 밥도 한 끼밖에 못 먹는 강행군속에서도 밤 10시까지 하는 수업에 한 번도 졸은 적이 없고 책을 읽을 때는 (전공과 다르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하기 위한 전공 수업준비는 (처음 가르치는 과목이라 공부할게 많긴 하지만..)

너무 은혜가 없고 매말라서 수업준비 할 때 마다 힘들었다.

 

예배학 숙제 읽기와 나의 ’강의의 고난’의 핵심은 주인이 ‘타인’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에는 밤 12시까지 하던 수업준비가 오늘은 7시경에 끝났다. 오늘 수업준비가 완벽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준비하는 과정이 예배였다.(전공 준비하면서 속상해서 운거 말고 이렇게 울어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든 삶과 순간에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더 집중하므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고 싶다. 거룩한 습관들이 내 삶에 뿌리 내리게 되면 참 좋겠다.

헨리 나우웬<영적 발돋움> 1-3장 자아를 향한 발돋움

 

‘2001년 11월 시립대 중앙도서관에서 엄마의 책 중‘.

나의 오래된 헨리 나우웬의 ’영적발돋움‘맨 앞장에 씌어 있는 내용이다.

 

헨리 나우웬. <영적발돋움>. 이상미 역. 두란노.

 

 

  2001년 당시 나의 성격을 보여주듯이 빼족한 볼펜으로 자로 대어 줄을 긋고 포스트잇으로 중요부분에 표시를 해놓은 것이 보였다.

 

  2017년의 나는 노란색 두꺼운 색연필로 삐뚤거리며 책에 줄은 긋고 있었고, 보고서에 남길만한 주요한 부분의 책장을 접어놓고 있었다.

 

 

  나의 영적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헨리 나우웬의 책을 다시 보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큰 외로움을 아버지 앞에서의 깊은 고독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20대 때는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보호 경계선’(p33)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다. 친밀함과 자유 함이 함께 할 때 더욱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감.. 어쩌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유하지 못하고 스스로 묵여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마음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음에도 나 스스로는 인간이 만든 규칙과 철학을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처럼 묶여 있었고 그래서 더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만 머물렀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청년들의 외로움들을 보며, 외로움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들을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기 가게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서, 매체에서 답을 찾으려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헨리의 제자가 고백한 것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은 내가 바로 지금 성령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내가 먼저 그것일 잊지 않길 기도한다.

 

  지난 주중 세계기독교 역사 수업의 과제로 초기 기독교시대의 책을 읽고 reflection 작성과 수업을 거치면서 작년 10월 부터 집중해 있던 말세 기독교인들의 고난과 믿음에 집중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친구들과 본 영화 ‘silence’, 금요심야와 청년 예배에서의 메시지가 모두 동일하였다. 말세를 준비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아버지께서 바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내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일 것이라는 마음에 지금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요즘 강의준비와 횃불의 수업과 숙제를 해야 하는 바로 지금(here), 나에게(now) 동일한 믿음으로 살 수 있겠냐고 아버지께서 물으시는 것 같다.

 

‘아버지

지금 이 시간 믿음으로 한 순간 한 순간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께서 제게 선물하신 순교라 생각하며

기쁘게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게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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