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_성서의 인간론으로서의 전인적 인간론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의의 해석이 아닌 전적으로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론을 해석하고자 한 애씀이 있다.
1장에서 말하는 성서에서의 전인적 인간론이란 육체와 영혼을 따로 다루는 이원론이 아닌 육체자체가 인간이고 영혼자체도 인간이라는 전제로 죽음과 부활을 재정의 한다.
구약에서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네페쉬, 빠사르, 루아흐, 레브와 신약에서의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의 단어의 뜻을 고찰하면서 신구약에서 표현된 이 단어들은 모두 제유법적 표현으로 결국 전인적 인간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전인적 인간론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전인적 인간론들은 죽음과 부활에서 다시 이원론적 인간론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전인적 인간론에서의 ‘죽음’은 영혼의 분리가 아닌, ‘전적 죽음 이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가 전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그리스적 죽음과 성서적 죽음의 차이를 설명했다. 죽음을 이렇게 전적 죽음으로 해석하면서 부활과 연결 될 수 있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하지만 신자들은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이는 심판받을 죄인인 옛 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이다.(골3:1-11) 전인적 인간론으로 심판 전후의 인간을 성서적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인적 인간론은 영과 혼의 분리가 아닌, 죽는 전인, 부활하는 전인, 영생하는 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신학에서는 그동안 플라톤에 영향을 받아 해석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성서에 기반을 둔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창3:15-16절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성서적 죽음)이라는 것 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인적 죽음, 전인적 부활과 연결된 다고는 생각 못하고 이 땅에서의 죽음 부분이 약간 애매모호하게 남아있었는데 그 부분에 여명이 비춰진 것 같긴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각에....) 논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부분들도 있고, 신구약에서의 단어 사용례에서는 히브리 사고를 좀 더 강조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헬라와 플라톤의 영향으로 해석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려고 해도 이렇게 무언가 조각 조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 하는게 맞는 것 같다.
(p37) 중간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로핑크라는 학자의 연구에서 저자도 지적했지만 6-7번에서 갑자기 비약이 일어나는거 같다. 중간상태의 로핑크 이론 이후의 설명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 부분과 연결이 되어 이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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