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8장 영적 여정의 동반자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20대에 영적 공동체로 부터 분리되어 낮에는 직장, 밤에는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나는 영적으로 많이 갈급했다.

 

어쩌면 20대에 청년공동체에서 붕 떠서 바쁘게 보냈을 시간을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있었기에 영적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틈만 나면 말씀을 탐닉했고,

주일에는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그 당시에는 멘토를 하나님이 직접 해 주시는 것 같았다.

작년에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 갑작스럽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20대에 혼자서 광야에서 훈련 받던 내용을 30대에 여러 책들을 통해서 정리해 주셨고,

30대에 또 선교지에서 홀로 훈련 받은 내용을

갑자기 한국에 들어와서 만나는 여러 동역자들을 통해 확인 시켜주셨다.

 

‘당신이 찾는 영적 지도자의 자질과 특성’을 책에서 써 보라고 했다.

인격(예수님을 닮음)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썼다.

 

40대에 만난 멋진 영적인 멘토들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자꾸 걸리는 부분이 ‘인격’이었다.

내게 있던 영적 질문들에 답을 주고

하나님 앞에서 확인 하고자 했던 것들을 검증하게 해준 새로운 멘토(?동역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은 나에게 전해 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을 닮고 싶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 인격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게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려 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방어벽을 만드는데(플래너리 오코너의 말, p194)한 몫을 크게 했다.

 

Y대에 있을 동안 나의 건강하지 못한 인격 때문에

학생들을 힘들게 했던 경험들을 통해서

나의 모난 자아를 보고

점점 더 예수님 닮아가기를 갈망했다.

 

나의 모난 인격과 내게 있는 상처들이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너무 놀랐고 아버지께 죄송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삶과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완벽한 인격을 꿈꾼다는 것이 아니다.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점점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자주 만나면 친해지고,

오래 같이 사는 부부는 닮아가는 것 처럼

나도 하나님을 닮아 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천국)를 갈망하는 매일매일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바램을 매주 만나는 청년들과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모임은 매일 아버지를 더 알아가는 나눔이 된다.

학생의 나눔을 통해 나도 경험해 보지 못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경험하고,

또 나의 증거들로 학생들의 경험 속에 녹아있는 아버지의 뜻을 함께 풀어간다.

 

그래서 영적 여정의 동반자는 쌍방에게 서로 유익이 되는 것 같다.

특별히 멘토링을 받고자 만나는 그 순간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래 못 만났던 친구가 건대에서 시간강사를 한다.

금요일 오후에 공강이 있다고 해서 만났을 때 친구가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어?’ 질문을 하고 시간이 없어서 헤어졌다.

 

지난 주 금요일, 해야 할 숙제가 가득했던 특별한 날 아침,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또 같은 시간에 만나자고 했고

만나자 마자 과거의 비밀을 쏟았다.

나에게도 동일한 아픔이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가 사십이 넘어서야 내 삶 속에 숨겨 놓은 아버지의 뜻을 알면서 치유 되고 있다.

 

아버지께 따지고 떼구루루 구르고 난리 치던 내 모습을 간증했다.

길을 걷던 친구가 길을 멈추고 물었다.

“하나님한테 그래도 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서야 친구는 자기 삶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인도하셨던 족적을 발견했다.

 

마태복음11:28-30말씀을 나누고 메시지 성경으로도 주었다.

그리고 그 날 sns에서의 에세이도 같은 말씀이어서 보내주었다.

그날은 친구를 위한 날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하나님께서 5월초에 내가 건대에서 신림으로 이사 가는 것을 왜 동의하지 않으셨는지...

아버지의 사랑과 열심에(숙제를 못 해도^^) 뛸 듯이 기뻤다.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7장 양심과 의식에 대하여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어릴 때 부터 무엇엔가 쫓기듯 살았다.

항상 바빴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해야 했고, 동시에 두가지일을 하는것은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에 되돌아 보니 어릴때의 불안감이 “내가” 나를 지키고,

“내가” 해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신뢰"에 근거한 결과 였던것 같다.

 

2년전 한학기 안식년 기간동안 나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상처가 크게 있다는것을 인지 한것도 선교지에서 몇년을 보냈던 삼 십대 중반이었다. 그 때부터 내 마음 깊이에 있던 질문을 안식 학기에 하나님께 꺼냈다.

 

“왜 저에게 그런 시련을 허락 하신건가요” 억울하고 속상하고 손해 본것 같은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쉽고 간단하고 빠르게 답해주셨고 나도 너무 쉽게 순응했다.

 

질문에 해주신 답이 계속해서 내가 ‘혹시..’ 하고 묵상하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책으로 응답하신 하나님께 ‘하나님 마음대로 쓰세요’(좋은 모드) 라고 너무 쉽게 순응했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아버지가 더 기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과거에 내 마음이 아프고 불안했다는 것을 인지한 것에서 부터 시작했다.

앞뒤 안보고 달리고, 내힘으로 하던 때는 질문도 의문도 없었고,

나의 상태도 나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무언가 쫓기는 듯한 바쁜 상황에서는 자기 성찰이 힘든것 같다.

그래서 정말 죄송하지만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나를 돌아보는 것이, 숙제를 하는 것보다, 시험보다 우선순위에 있다.

 

내가 얼마나 실수가 많고 상처 투성이 인지,

그래서 매일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참 죄송하다.

 

선교지에 있던 시간도 내가 일하겠다고 뛰어 다닐때는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나를 돌아보고 내 상처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봤을 때,

학생들의 아픈 마음이 보였고,

아이들을 찾아가서 안아줄수 있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느낌’, ’감정’이 없다.

너무 아픈 자기의 느낌을 인지하는 순간

자기가 없어질것 같아서 그 느낌을 버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점 자기의 느낌과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화가 난것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아니라고 하는것이 대표적인 경우인것 같다.

나의 잃어버린 ‘느낌’과 ‘감정’을 찾는데 많이 집중했다.

나를 돌아볼때 내가 왜 그 행동을,

그 생각을 했는지 의식의 뿌리를 찾아가는 훈련을 했고, 하고 있다.

 

오늘도 대학생들과 식사를 하며 내면 깊이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면 깊이 들여다 볼때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이야기의 결말이 그렇게 날때 몇 년간 교회를 안다니던 학생이 하나님하고 이렇게 재미있게 지낼수 있냐고 좋아햇다.

학생들을 단체로 만나다 보니

그들안에 불만과 불신과 분노가 보인다.

호전적이다.

 

내가 먼저 무장해제를 하고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나의 내면을 들춰보였을 때 몇몇 학생들은 함께 무장해제를 시작했다.

거룩한 환대의 시작이었다.

대학생들에게 있는 전반적인 불신과 불안을 보며,

어릴 때 가정에서 불안했던 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사회에 대한 불안한 감정(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 나를 공격한다)이

그런 반응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사건도 단단하게 한몫을 한것 같다.

한국에서 교직에 오래 계셨던 분들은 학생들에게 치를 떤다.

‘요즘 애들 너무 무서워’ 매번 선생님들께 듣는 이야기다.

차마 ‘아이들이 사랑과 안정이 필요해서 그래요’라고 말하지 못 한다.

그분도 아플 테니까.

 

지난주 예상하지 않았던 미술 관람을 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들에 주로 눈이 갔다.

색들이 따뜻했다.

화가의 특징 중 하나는 사물과 물에 투영된 것을 함께 그리는 것 이었다.

망망대해, 하늘과 바다가 이어진 배경에 배 한척이 있는 그림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고 계시는것 같아 눈물이 났다.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6장 자기 비움의 훈련

 

 

나에게 금식은 회개와 자아 죽이기(음성듣기, 하나님께 집중하기)의 의미가 컸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책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금식 명령이라 해석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셨던 것이 자기 능력의 금식이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금식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는 것인, 금식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또 새벽 2시이다. 밤 늦게 까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부터 인가 늦게 까지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최근 두주 월요일이면 밤 늦게 까지 과제를 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사실 오늘 밤도 미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믿음으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잠을 이길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인정 때문이 아니라, 내 편의를 위해 자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의지력이 없어진 내가 이해가 안되면서도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교지에서는 일이나 수업준비를 안하고 ‘그럼 저 잘 테니깐 책임지세요’하고 자버린 후에, 정말 하나님이 자주 책임져 주셨던 기억이 많은데, 한국에 와서는 자버리고 나서 결과가 안좋았다. 특히 히브리어 수업시간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약 이주 전 부터 나에게 연구 과제로 떠오른 주제는 ‘나르시즘’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의 행복과는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사랑’에 근거한 욕심과는 구분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도 정리가 되질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는 심리학의 나르시즘 검사도 받아 봤는데 그것은 그리 관련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사람들이 창조물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제기했다. 그런데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정말 금욕하고 불편하게 산 사람들에게 은혜가 컸다. 그것도 계속 여쭤보고 있다.

 

나의 목표는

특별하게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누리는게 아닌

일상에서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초기 기독교의 영성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처럼 금욕하고 고생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일반인 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게 아닐까?

 

몇 년간의 나를 관찰해보면, 너무 속상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sign과 내가 바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에서 핀트가 안 맞는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일부 있는데 이것인가 저것인가 주저하다 추진하면, 이게 아니고 저것인 경우들이 있었다.

 

최근 분석 결과,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강한 ‘자기사랑’ 이었다.

 

나의 나르시즘 문제를 후배에게 말했더니 나도 나르시즘이 있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나도 모르게 가면을 강하게 쓰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 나를 너무 아끼고 있는 부분들을 점검하고 있다. (너무 많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을 미루고 잔다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자고 싶은 욕심의 가면일까….

 

토요일에 영화 ‘오두막’을 보고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을 정말 존중하시는 분이고,

나를 징계한적이 없으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존감이 확 올라간 것 같았다.

 

그 덕에 아버지께 더 당당하게 여쭤볼 수 있었다.

주일 예배 전에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이 있어서 커피숍에 앉아서 아버지께 물어 봤다.

 

‘왜 나랑 아버지랑 중요한데서 핀트가 안 맞아요?

항상 같이 있으면 서로 마음을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섭섭하다구요…’

집중하고 있는데 음악소리가 들렸다.  

 

“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4장 성령안에 모임 & 5장 안식일 되찾기

 

나는 사람들과 함께 만날 때 에너지가 있고 밝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Y대에 있었던 시간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한국에서 보다 많이 확보 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당시 공중 예배에서 지금 손을 들어야 할 것 같을 때 성령님께 순종하기 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부분이 컸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Y대에 있는 동안 말씀을 보던 시간이 기도가 되고,

기도로 머물렀던 시간이 예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손에서 두손으로,

두손에서

(요즘에는 앉아서 기도하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요즘은 혼자 예배에서 벌떡 일어나던 것이 공중 예배에서도 벌떡 일어나게 되어서 자리를 잡을 때 구석으로 잡거나 일어나기 편한 맨 뒷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처음 두손을 들게 됬던 때는 여러가지로 힘든 상황이었다.  H* 선교회(소속 선교회) 총회로 모임 중에 찬양을 하는데 ‘왕께 만세’를 불렀다. 그때 찬양을 하면서 만세의 의미를 알았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해요.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 이후로 만세가 쉬워졌다. 경배와 찬양의 의미의 만세도 있지만 힘든 시기에 두 손을 들게 되면서 경배의 손들기도 당연히 쉬워졌 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중요성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청년 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들의 믿음의 야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예배가 힘든 이 땅에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 인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전에 당연히 여겨졌던 성경공부도 다양한 영적 모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배 전에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도 중요하고 예배 후에 각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나누고 간증하므로 자신과 타인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는 시간도 중요하다. 

 

공동체에서의 나눔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견고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핸드폰을 이유없이 만지작거릴 시간은 있지만 이러한 모임을 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지난 금요일에 담임 목사님과 면담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말씀에 노출되어 있는 나는 주일 예배 때 부어주시는 은혜가 많다. 하지만 같은 예배이지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담임 목사님은 주중의 시간이 주일 예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말씀을 해 주셨고 책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 부분은 회중이나 인도자나,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새벽 2시이다. 마지막으로 5장 안식일 되찾기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Y대 졸업생 중 대부분이 대학원 생인 관계로 그들이 늦게까지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을 찾으라는 말을 했으면서 지난주는 내가 그렇게 못 살았다.

 

매 순간 아버지께 물어 보며 스케줄을 잡는데, 자기를 꼭 만나는 것이 선교사로서 맞는 것이라는 투의 후배의 말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저 끌려가듯이 만났는데,  5장을 읽으며 그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시간에 많이 쫓겨 살았다.

그만큼 내 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Y대를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며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학습해 주셨다.

 

한국에 와서도 강의 준비를 하는데 기름 부으심이 없어서 ‘왜 그런 가요’ 물어보며 억지로 강의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수강변경으로 강의를 안해도 되는 날이었고 결국 오랜 시간 고생해서 만든 강의안은 그날 필요하지 않았다.

 

만남도, 공부도, 강의도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헛고생이라는 교훈을 또 얻었다.

이 교훈을 너무 자주 배우는 건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 듯싶다.

 

지난 약 3-4년 동안 이루어 주시 길 간구했던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 하여라. …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3장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

 

지난 토요일 까지 중간고사가 있던 관계로 톰슨을 토요일이 지나서 보게 되었다. 책을 보면서 많이 놀랐다.

 

토요일 Y대 졸업생들과의 모임에, 그날은 모두 믿는 학생들만 온 관계로 한 시간 동안은 삶을 나누고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그 이후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기도에 대한 서로의 정의를 들으면서 ‘경청’에 대해 나누고 그날 기도하려고 했던 내용에 대해서 설명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하고 나서 아버지 앞에서 듣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횃불 3층의 기도실에서 듣는 기도를 각자 하고 이후에 나눔 시간을 가졌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지난주 자연 묵상에서는 너무 행복했고 짧은 시간이 아쉬웠었다.

머리속에서 아버지와 나 둘만 생각하며 아버지께 집중하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는 나무 위쪽을 보다 보니 꽃 하늘 꽃, 이렇게만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께 너무 예쁘다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걸음을 멈춰 하늘을 바라보던 그 장면이

횃불 3층의 기도실에서 아버지를 독대하며 앉아 있는 순간에 떠올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꽃길”이 그게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남은 인생을 꽃 길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감사와 감동이 복받쳤다.

 

그리고 그 감사와 감동이 나로 하여금 시도하기 어려운 일을 마음으로 결정하고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면 하겠습니다.’란 고백을 하고, 움직일 힘이 되었다.

 

그 동안 혼자 마음으로 정리하고 있었지만 책이나 설교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을 톰슨 3장에서 발견해서 놀랐다.

강요의 방법으로 동역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동역을 위해 하나님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기도할 때 상상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상상이라기 보다 이미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다 보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표현 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어서 이미지로 기도하다 보니 그 기도제목을 사람들에게 표현할 때 난감한 적이 많았다.

 

이러한 나의 기도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3장에서 언급되었다.

호흡기도에서도 평소에 내가 하던 호흡기도들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검증해주신 것 같아 행복했다.

 

기도 할 때 분심 때문에 힘든 때가 있었다.

20대 후반 고등부 총무를 하고 있을 때 인데, 정시기도를 할 때 마다 고등부에서 할 일들이 생각이 나서 처음엔 대적기도를 하며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다가, 혹시 하나님께서 기도시간에 할 일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생각하며 기도자리에 앉았을 때 떠오르는 것들을 수첩에 모두 적어 놓고 마음이 조용해지면 기도를 시작했었다.

 

주로 묵상기도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우면 기도에 집중이 안되어서 마음에 올라오는 모든 것을 먼저 말씀 드려야 하는데 기도를 마친 후 수첩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고등부에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목록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탄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주시는 sign 이어서 무척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후로는 기도시간에 생각나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거나 혹은 기록하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Y대에서도 전화하고, 만날 학생들을 그렇게 기도시간에 미리 생각나게 하셔서 만났었다.

미리 알려주시는 하나님!!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2장 말씀의 떡 씹기 

 

멘토를 정해야 하는 시기에 자꾸 연락이 오던 (장)목사님이 있었다. 경험이 많으셔서 말이 많으신 분이라 이야기를 듣기 보다 많이 하신다. 영적으로 많은 진보가 있겠지만 교수님이 요구하는 조건에서 약간 벗어날 듯 하여 다른 분을 멘토로 정했었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그런데, 지난 주일에 이분을 만나면서 내적으로 큰 회오리 바람이 쳤다. 그중에 하나가 ‘말씀‘이었다. 학교를 진학하고 강의자리가 생기는 휘몰아 치는 그 시기에,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받아들인 것처럼 나도 그냥 아버지와의 깊은 확인 없이 진학도 강의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1월 이후로는 말씀으로 확증 받으며 움직인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공부에 쫓기지 않고 아버지와의 만남을 최우선에 두고, 그 어떤 것도 우상으로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한 공부였지만 쫓기지는 않았어도 공부의 우선순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왔던 것 같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시즌을 만나며 ’말씀의 떡 씹기‘ 부분이 꼭 나에게 아버지께서 지금 먹여주시는 말씀인 것 같다.

 

말씀을 보거나 독서를 할 때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있다고, 나의 상황과 환경을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듯 말씀하실 때가 참 많았다.

 

교재에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습득하는 첫 단계와 통찰이 있는 두 번째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에 깊이 빠져 들어 읽어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통찰로 들어가는데 학기가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말로는 계속해서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했는데 실제로 나는 말씀 가운데 머무는 시간이 없이 형식적 말씀 읽기, 임무 완수용 책읽기였다.

 

여유 있는 시간과 여유 있는 장소, 나의 일정을 내려놓고 아버지 앞에서 고요히 있어야 했는데 나는 모든 시간에 ‘철저하게 타인’이 되지 못했다. 이번 독서 내용과 목사님과의 만남은 아버지의 열심의 결과 인 것 같다.

 

주중의 QT 본문은 출애굽기 성막 만들기 였다.

말씀을 따라 읽어 가면 대충의 도면을 그릴 수 있고 머릿속으로 상상이 가능하게 하나님께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나의 삶에서도 지금까지 그렇게 인도해 오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얼마 전 초대 교회의 역사를 공부할 때 만해도 고난에 대해서 동의 했다.

 

하지만 지난주 내가 한번 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당했을 때 아버지 앞에서 계속 의아해 했다. 분명히 몇 주 전만 해도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라고 나 스스로 고백했는데 삶속에서 만난 진짜 난관 앞에서 나는 ‘왜 고난이 꼭 있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지난주일 설교와 장목사님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답을 (묻지 않았는데도) 재차 듣게 되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을 디테일 하게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디테일 하게 인도하고 계시고,

나는 순종하면 된다는 믿음이 지금 내게 참 많이 필요한 시기다.

 

제대로 듣고 잘 순종하고 싶다.

이번엔 말로만 ‘듣겠습니다’가 아니고 진짜 아버지 앞에 깊이 머물러 듣고, 누리며 이 시기를 보내고 싶다.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1장 성령 갈망 

 

2016년 2월에 한국에 돌아와서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 후배가 있다.

교회에서 자꾸 상처 받아서 나가 떨어졌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어 매주 교회 같이 가기 위해 아침에 티타임으로 만난 것이 일년이 되도록 매주일 만나게 되었다.

 

한달 벌어 그 돈을 다 술값으로 써도 부족하고 답답해하던 그 친구가 하루에 투잡(two job) 하던것을 접고 오후 시간은 아버지께서 주신 마음에 순종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수입은 이전에 비해 1/3밖에 안되는데

빚도 해결되고

생활도 하나씩 해결되고 있다.

 

술 속에서, 친구들 속에서 찾을 수 없었던 안정감과 행복을

그 후배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안에서 찾게 되었고,

그 에너지로 인해

자기가 이해할 수 없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했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인간의 갈망과 갈증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 인 것 같다.

 

책에서는 영적 갈망의 이유에 대해서 문화적, 개인적, 영적으로 나누어 설명했지만 마지막 영적 요인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우리를 잘못된 생각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두려움 속에 빠지게 만드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호흡 곤란이(책에서는 우리가 영성훈련을 하지 않는 것을, 양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식물에 비유했다.) 우리의 뇌에, 마음에, 육체에 고난을 주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답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영성을 말할 수 없다.

영성을 내면 성찰이 동반된 의미로 본다면, 내면 성찰의 결과는 인격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결국 영성, 영성형성, 영성생활, 영성훈련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사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면서도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권세를 누리셨던 이유는 이 땅에서 계속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추려는 자발적 순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다.

 

나 또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책에서 조심하라고 했던 불순한 동기도 없지 않아 있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 권세를 누리고 싶다.

지금 이 곳에서 지내는 이 어려운 훈련의 시간이(자발적으로 시도하는 훈련) 내 안에 있는 불순한 동기들이 나도 모르게 빠져가는 시간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더 신뢰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때로는 이게 훈련인지 벌인지 아리송 하기도 하고, 내가 오버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지만 예배 때 마다 평안과, 세상에 메이지 않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한다.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힘들지만 이 과정을 통해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고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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