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3부

 

<신앙과 정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3부를 자세히 읽으면서 정말 속도를 내어서 읽을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하며 읽었다. 그중에 가장 큰 수확은 그동안 계속 읽고 싶었던 책인데 왜 이제야 자세히 읽게 되었을까 답을 찾은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지평서원.

지난 선교의 10년과 한국에 입국해서의 4년은 내 안에 하나님 보다 강하게 있었던 프레임(틀)을 깨는 시기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이하 저자)는 같은 증상(?)이라도 다른 경우들이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증상에 대해서 다양하게 해석하므로,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중간 중간 저자의 프레임(?)이 보였고, 계속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더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없었던 거 같다. 아마 나의 틀이 깨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라면 저자의 글에 무조건 동의한다고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저자는 대부분의 경우 잘 정의하려고 하지만 정의되지 않은 많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지난주에 발제 하셨던 목사님이 참고하셨던 것처럼 다른 번역본을 같이 봐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자의 방대한 독서 분량과 성경 말씀의 활용은 놀라웠다. 나에게도 이렇게 적재적소에 말씀들로 증거하고 해석 할 수 있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한편 어떤 부분은 저자가 성경 본문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역시나 문화 안에서 해석(예를 들어 몸을 경시하고 영혼이 중요하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음.)되어 질 수밖에 없는 기독교를 생각하며, 나 또한 문화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요즘 너무 논문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저자가 이론이나 말씀의 받침 없이 (혹은 일부분 편협하게 해석한 서적을 근거로 하여) 본인의 논지를 무조건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3부의 1장에서는 ‘말씀이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 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다행히 내 생애에서는 나 혼자만 떠오른 말씀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여러 번 거론이 되면서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확인되어 그 말씀들이 나를 견고히 하는 통로가 되었다.(석사 논문 작성 때 오병이어 말씀, 선교 훈련 후 선교지 2차 파송 전 여호수아 말씀) 저자의 시대에 그런 경우는 없었는지 사례에서 그런 부분을 내심 기대하다가 없어서 아쉬웠다. 역시 신앙 경험은 귀를 열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님을 더 광대하게 경험하는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질문] 영성지도자로서 떠오르는 것을 조심스럽게 나누도록 배웠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신앙과 정서>를 읽으면서 계속 영성지도를 할 때 과연 영성지도자로서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 아래의 내용은  <신앙과 정서> 1, 2부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1, 2부

지난 학기 소논문을 신앙 정서와 상담심리학과 관련하여 작성하던 관계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과 논문을 참고하게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 어쩌면 그는 가장 차가운 기독교 지성의 선봉이 었는데, 그가 부흥의 한가운데서 가장 뜨거운 가슴을 연구하고 표현한 것 같다. 물론 그의 표현 도구들은 여전히 차가워 보이는데(기술 형식이나 구조 등) 내용은 정말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지평서원.

에드워즈는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연구하였다. 1720년 에드워즈는 뉴턴이나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 “원자에 대하여”(Of Atoms, 1722), “존재에 대하여”(Of Being, 1722), “마음”(The Mind, 1724) 등의 과학적 저술을 했고, 존 로크의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식들은 감각이나 경험으로 만들어 진다고 했다. 과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인해, 예방접종을 적극적으로 함으로, 1758년 1월 뉴저지 대학 학장으로 취임한지 한달 만에 천연두 예방 접종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지금 시대(2021년 현재, 코로나 당시)에 너무 나도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이다.

 

지난 학기 논문을 준비 할 때도 ‘정서’의 정의에서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한국에서 번역된 두 개의 책도 속 시원한 개념을 설명 할 수 없었다. 이후의 내용들을 보고 한국어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1장만 3번째 읽는 것 같다. 왜 읽어도 읽어도 새롭게 줄칠 부분들이 계속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1장 “정서의 본질과 신앙에서의 정서의 중요성에 관하여”에서는 “마음의 정서(affections of mind)”란 무엇인지 정의하고, 참된 신앙의 큰 부분을 이루는 여러 가지 정서들과 교리에서 추정해 낸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참된 신앙의 큰 부분을 이루는 여러 가지 정서“를 설명하는데 10가지로 분류를 하고 있고 특히나 그중 4번째인 “참된 신앙의 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정서“는 9가지의 정서들을 분류하고 설명한다. 바로 이런 부분이 서두에서 언급한 ”차가운“이라고 표현한 이유이다. 정서들을 분류하고 갈갈이 찢어서 자리매김을 했다. 왠만한 심리학자들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일까? 두번의 부흥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기도와 연구를 했을지 상상이 간다.

 

과학적 지식을 기저에 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성적인 부분을 측량할 단어들이 없어서 많은 부분 “바른 정서”나 “참된 신앙”등의 용어를 사용하므로, 이에 대해 명확히 정의를 안 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은 읽을 때 마다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요즘 몸의 반응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저자가 몸을 무시하는 부분들은 살짝 불편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nbsp; <신앙과 정서>.

 

[질문1] p22에서부터 나오는 사탄이 사용하는 ‘이 방법’ 이라는 것은 참 신앙과 모조 신앙이 구별되지 않은 채 혼재 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질문2] 몸과 마음에 관한 질문. p38) 1번째 줄, ‘사람의 몸은.. 사랑, 증오, 기쁨, 슬픔, 두려움, 소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라고 했으나 단정 할 수 없는 이유는 p73 아래서 두 번째 줄 “체질이 마음의 현재 기분을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p64 아래서 두 번 째 단락 처음에 “몸의 정서”와“영혼의 정서”를 나누었는데, 몸은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몸의 정서”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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