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내용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후반부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존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2/2, 169-337까지)

19일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26일까지 책을 잡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26일에 생각지 못한 실수로 큰 오해를 받고 아침부터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일이 있었다. 어려운 마음으로 저녁 일정을 취소하고 자숙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책을 끝까지 마무리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최대형 역. 은성 . 2013년.

상황에 메여서 나를 바라보고 소망이 없는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소망은 낙심하지 않으며.. 소망이 부족한 곳에는 사랑도 부족’하다는 책의 마지막 부분과 기도 동역자가 보내준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 시를 함께 보게 되었다최근 리플렉션을 제출할  마다 ‘아..너무 교만한  같다 이렇게 교만모드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어려움 덕에 초점을 다시 아버지께 맞추게 되는거 같다. “오 하나님당신은 아나이다내가 당신 것인 줄을…”

 

책을 빌려보는 관계로(이 당시에 빌려보다가 결국 구매함^^) 컴퓨터로 내용을 정리하며 읽었는데 p168까지는 정리한 내용이3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뒷부분은 읽는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정리한 분량이 5페이지가 되었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목차 (2/2)

순결에서는 대부분 육적인 것을 죄로 정의 하고 풀어갔다. 수도사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역상의 문제였을까…?)

마음이 하나님께 순결한 것, 또 서로에게 신실한 마음도 순결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란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이 교정 수단이라고 제시하는데 최근 몇 년 청년들의 감정을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감정을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밝은 곳에 꺼내놓고 다른 것으로 승화 시키는것이 건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가 달라서 일까…?

 

무감각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면 "어미"와 싸울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어미"이기에 본인이 무감각해졌다는 것만 발견해도 큰 수확이 있을 것 같다. 요즘 관계 안에 무감각에 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대부분 본인들이 원인을 알면서 안풀고 있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장 바꿔놓고 보니 나도 답을 알면서 안 풀고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성령님이 알려주시지만 이렇게 무시하고 사니… 이래서 인간 멘토가 필요한거 같다.(수도사와 수도원장 같은 관계? 하지만 현대에 그런 신실한 믿음의 관계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 이 글을 쓴지 5년 후에 블로그에 올리는 중이다. "가능하다"는 결론을 맺고 그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

 

순종에게서 자라나는 통회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 교만이다라는 정의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학기 초에 내게 있던 많은 은혜들 때문에 어쩌면 내 마음에 교만이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페이퍼를 제출할 때 마다 ‘아? 이상하다?’하고 뭔가 알면서도 안 풀고 넘어갔고 그 무감각이 오늘의 쓰나미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렵지만 이렇게 나로 무감각에서 일어나고 교만에서 나오려는 의지가 생기게 해주신 것에 감사한다.(하지만 마음은 어렵다.^^)

 

겸손과 분별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 했는데 분별은 거의 정념, 죄죽이기의 내용이어서 그럴지 궁금했다.

 

29번째 사다리에 무정념이 정리되어 있어서 도전이 되었다. 분별을 읽는 즈음, 담임목사님과 멘토링할 (금식 같은) 스스로 불편함에 처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주제가 있었는데 중복되는 내용이었어서 책을 읽을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내가 즐거이 선택한 자체가 고난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세상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오늘의 일이 그 열매였다. 진작에 불편함에 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면 실수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이 여러 내게 경고해 주셨는데 내가 반응하지 않은거 같다는 생각이 글쓰는 순간 생각났다. 인간이란 이리 느릴까

 

극도의 피로가 육체의 정욕을 일으킬수 있다는 경고,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포기하는게 흙과 금을 바꾸는 것,

 

기도시간과 나의 일(조급한 마음)을 맞바꾸려는 순간 생각이 나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책읽는 한순간이 아니라 계속 나를 깨워 기도시간에 머물게 하기를 기대한다.

 

2016년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도전 된 말씀이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18:29)”였는데 무정념 부분에서 종말이 되기전에 성에 도착하지 못 한 사람(성을 넘지 못한 사람은) 사막에서 야영해야 하기 때문에 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리가 되었다. 놀라웠다. 몇 년간 뛰어 넘을 생각만 했지 왜 뛰어 넘어야 하는지는 정리가 안됬었는데 유레카!!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

 

                          디히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성(城)에서 나오는 성주(城主)처럼

의연하고 유쾌하며 당당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의 모습은

마치 사령관이나 되는 것처럼

자유롭고 유쾌하며 확고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내 스스로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 불과한가?

마치 새 장엔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갈망하며 병든 나

마치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

빛깔, 꽃, 새들의 노래에 굶주리고

친절한 말과 인간적 친밀함에 목마르고

변덕스런 폭정과 아주 사소한 비방에 분노하여 치를 떨고

근심에 눌리고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사건들을 기다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고

지치고 허탈한 채 기도하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연약하여 이런 것들 모두를 포기할 준비가 된 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인가 아니면 저런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애처롭게 우는 비열한 심약자?

이미 승리한 전투를 앞두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도망치는 패배한 군대,

그것과 나의 내면세계가 다를 바는 무엇이랴?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이런 고독한 질문들로 나를 조롱(嘲弄) 한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글, Dietrich Bonhoeffer / 번역,  김희수 목사 (월드비전선교센터장, 서울북노회)

(퍼옴 : http://www.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omm_essay1&wr_id=10017)

아래의 내용은 10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10장 내용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10장 하나님 체험

  하나님에 대한 오해.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의 청년들을 보고 느낀 것 이었다. 어쩌면 청년 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들 하나님을 두려워했고(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묻기를 피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 더러 갖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기저에는 하나님은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고, 내가 바라는 것을 싫어 하실것이라는 확신”(믿음) 때문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보내신 분이, 자기가 대신 죽으신 분을 믿는 믿음이 완전 기대와 다른 부정적 믿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탄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잘도 속여먹고 잘도 이겼구나...

  10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많은 예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로 삶을 메여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므로 삶이 풍성한(소유의 문제가 아님) 사람들의 예를 많이 기록해 두었다. 책에서 신자가 아닌데 모임 중에 치유된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치유되길 원한다고 앞으로 나갔고, 그에 따라 치유 되었기에 치유에 자신이 행한 몫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선배의 남편은 자신편에서 하나님께 한 행동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낮에 침대위에 뒹굴 거리고 누워있었을 뿐이었고,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기를 옷깃처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때 형부는 알았다. 자기의 불치병이 나은 것을... 그 이후로 형부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평안함이 있었다. 반면, 오래 동안 교회서 자라고 선교사 헌신까지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안이 없이 산다.(생각해 보니 대표적으로 나네...) 나의 틀(유교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아 틀이 너무 많다..)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과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의 차이다. 아이러니 하다. 책에서도 거론 되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는 치유가 항상 동반하는 것 같다.(단지 내 개인의 통계 내용일수도 있겠지만^^)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자연묵상1] 자연묵상으로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이기로 한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길에 떨어진 낙엽들에 눈이 자꾸 가는데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가에 혼자 서있을 수가 없어서 가까운 벤치에 편히 앉았다.(하나님하고 이야기 할때 항상 최대한 집중 할수 있는 편한 자세를 고수한다. 이것도 편견일까^^) 아직 까지도 의문이고 계속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계속 눈물이 낫다는 것이다. 며칠간 계속 되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연묵상2] 몇 년전 비바람이 치는 장백산(백두산)에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 또 들었다. 자연묵상 때에야 왜 그날 그렇게 비바람이 치고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 되었다. 장백산의 여러 등산로 중에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길로 장백산을 갔던 날 엄청 비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쪽 길에는 풀들 사이에 풀보다 더 작게 땅에 붙어 있는 꽃들이 엄청 많았다. 그 무서운 비바람(사람도 날라 갈 것 같고 우비는 다 찢어지는) 속에서 요동없이 땅에 딱 붙어 있는 꽃들을 보며 하나님이 내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다. ‘땅에 딱 붙어 있어. 포복해. 일어나면 다친다. 바닥에 붙어 있어라장백산에서도 내내 감동이 있었는데... 자연묵상의 날 또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자연묵상3] 지난 금요일에 치과에 가서 어금니를 뽑았다. 선교사가 거지인가. 다른 치과 가야 하나. 내가 선교사처럼 안보이나. 내가 뻔히 선교사인 것을 알면서도 뽑기 힘든 어금니를 앞두고 의사샘은 기도하라 했다. 어금니 발치가 처음이라 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압지께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하고 있었고 의사샘 손에 함께하시길 구하며 의사샘 손도 잡았었다.(단지 소리내어 기도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이 두 번만에 뽑았다. 난 압지께 감사했다.(단지 소리내어 안할뿐) 그런데 의사샘은 그 영광을 자기가 갖았다. ‘이거 쉽게 뽑히는거 아니에요. 이거 원래 힘들게 뽑는 거에요. 아무나 이렇게 뽑지 않아요.’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아버지 저 선교사라고 안하고 그냥 직장 다니면서 선교사로 살까바요. 선교사가 거지인가요?’ (치과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던것 같다.) 마구 짜증냈는데 자연묵상 하는 중에 예배시간의 위로가 떠올랐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나의 부르심의 근원, 나의 존재의 근원이신 내 아버지가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하신다. 오늘도...

 

저에게 큰 영향이 있는 성인이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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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빈손. 콘라드 드 메스떼르 저.&nbsp; 가톨릭출판사. 2010.

2.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데레사가 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가장 작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도 모두 다가 갈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은 길로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또한 어린아이의 길이란 마태복음 6:25-32을 근거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과거에 메이지 말고 내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어린아이가 후회와 걱정 없이 지금을 살듯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길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자에게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약속이다. 데레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지켜지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행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1) 겸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에서 어린아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처럼 영적 어린아이의 길겸손의 길이다.

  위대한 성인들처럼 완덕을 구하던 데레사는 완덕이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더불어 생명도, 재능도,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기숙학교 시절 사람의 호감을 살줄 몰라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행복한 무능(無能)’ 이라고 표현하며, 언니들과의 이별을 사람의 애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 할 수 있는 은혜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아픔, 가난, 불완전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또한 수련생들을 도와주는 부수련장으로 섬길 때 자신을 시기하며 타인보다 본인부터 지도하라고 말한 수녀에게 아 수녀님, 수녀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잘 아는 것이 참다운 겸손이다. 데레사는 겸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수투성이다’라고 생각하거나 고백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신뢰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이며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에서 가장 핵심 주제이다.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인지하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엄마에게 달려가 뽀뽀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엄마가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데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신뢰를 알고 있었다. 데레사는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항상 먼저 달려가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데레사가 표현한 예화에서, 임금이 사냥에서 토끼를 잡으려고 사냥개를 풀었는데 토끼가 사냥개를 피해서 왕의 품안에 달려들어서 왕은 그 토끼를 보호하고 친히 먹이를 주며 키웠다는 것이다. 정의(사냥개)가 우리를 쫓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심판주 되신 주님의 팔에서 피난처를 찾으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위험한 순간에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세요.. 소박한 사랑과 신뢰의 길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랍니다.

 

(3) 사랑

  깊은 신뢰가 가능한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영적 어린아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데레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예수님을 맞이하고, 삶속에서 제자로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린다.

 

  이제는 제가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아픈 것이 만약 하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평생 아프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픈 상태로 제 생명이 무척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단 하나의 은혜는 사랑으로 인해서 부서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4) 복음

  인간은 스스로 구원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바램을 이룰 수 없다. 데레사가 성모의 미소로 원인 모를 병에서 회복되고, 성탄절에 10년 동안 기다리던 마음의 건강이 되찾아 진 것처럼 우리는 못 느끼고 있는 사이에 겨자씨 비유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시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 같이 스스로 무언가 하겠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같이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레사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이사야 55:8)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말씀을 근거로, 공로란 많이 행하고 많이 주는 게 아니라, 많이 받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고 해석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들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이 귀여워합니다. 의사들이 수술할 때에는 환자들을 재웁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시 103:14)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우리 본성의 감정과 어긋나는 것입니까! 
은총의 도움 없이는, 그 교훈을 실행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결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신뢰와 사랑으로 갈수 있는 길이며, 겸손으로 가능한 길이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인 복음의 길이다. 데레사의 전체 삶에서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데 데레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가며 작은 데레사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데레사의 편지글들과 자서전을 통해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폴린 언니가 있어서 수녀원에 가려는 열망이 있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께 활짝 열어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깨끗한 영혼이다. 왜 그렇게 빨리 완덕을 바라고 왜 그렇게 빨리 예수님께 가고자 했을까. 그 모든 열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믿고 데레사는 힘을 빼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다. 14세에 가르멜에 들어가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교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15세에야 입소 할 수 있었다. 그 여정이 힘들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여정이 없었더라면 데레사는 엘리베이터 이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임금님인 아빠가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며 더욱 하늘을 소망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작은 고통 하나에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영적으로는 더 어린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수련자들을 맡아 교육하는 부수련장의 업무도 감당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자신을 살폈다.

 

  이러한 데레사의 모습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보여지는 내 모습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며, 가면을 쓴 채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는 데레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드린 것 같이 해야 겠다. 둘째,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가치를 두었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가치가 덜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진짜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데레사는 안정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을 거야혹은 내게 갈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신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할 수 있다는 신뢰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안정감을 두었으므로 자신에게 몰아치는 고난들을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작은 꽃이지만 잔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큰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현대의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뿌리 내린 신뢰가 있어야 겠다.

 

  데레사 자서전의 뒷 부분으로 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면서, 아가서 인용이 많이 나온다.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깊어질수록, 삶에서 점점 더 성숙해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1600년대의 잔느 귀용이 자꾸 생각났다. 일상에서 내면의 대화로 하나님과 소통 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1600년대 잔느 귀용은 이단판정을 받았고, 1800년대 봉쇄 수녀원에 있던 데레사는 교회 박사가 된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기회가 된다면 두 사람의 믿음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싶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안응렬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2021.

앙드레 꽁브 엮음,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편지. 부산 가르멜 여자 수도회 역. 서울: 분도출판사. 2003.

 

[이차자료]

D.H. 워닝. "데레사의 하느님을 향한 旅程-떠남과 만남." 신학과전망. 137(2002): 135146.

윤주현.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의 길에 대하여." 신학전망. 210(2020). 194-219.

자크 필립. 사랑의 엘리베이터. 윤영희 역. 서울: 바오로딸. 2014.

정인숙.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안에 나타난 부모의 모습과 하느님의 형상과의 관계성." 신학과 철학. 15 (2009): 35-66.

정인숙. "소화 데레사를 통해서 본 신비주의 영성." Catholic Theology and Thought. 46(2003): 120-145.

콘라드 드 메스테르,빈손-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대전 가르멜 수녀원 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2019.

 

가톨릭인터넷 굿뉴스 성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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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성녀-리지외의성녀 소화데레사,

https://june.meson.kr/2010/10/santa-teresa-di-lisieux-saint-of-modesty.html, 20211122일 접속.

 

저에게 큰 영향이 있는 성인이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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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본론
  3.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2) 어린 시절
  3.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3.3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신학적 의미
     (1) 겸손
     (2) 신뢰
     (3) 사랑
     (4) 복음
Ⅲ. 결론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로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는 봉쇄 가르멜 수녀로 24세의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얀세니즘이 팽배했던 프랑스에 사랑의 하나님을 회복하게 하는 그녀의 가르침은 신비 체험이나 신학적 난제풀이가 아닌 일상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그 길을 발견했는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녀가 남긴 자서전과 편지들을 통해 관찰해 보고자 한다.

 

주제어 : 리지외 데레사, 영적 어린아이의 길, 작은 꽃(소화), 겸손, 신뢰, 사랑, 복음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편지. 앙드레 꽁부 엮음. 분도

. 서론

  리지외의 데레사는 187312일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5(188849)에 가르멜 수녀로 입회하고, 24(1897930)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년 후 19971019일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데레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 짧은 생을 봉쇄 수도원에서 살던 데레사는 영적 어린아이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교회 박사로 인정되었다.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은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작은 데레사가 성인들처럼 하나님께 도달(완덕)하고 싶은 갈망 중에 찾게 된 길이다. 다른 성인들은 큰 고난이나 성흔들을 받아 하나님께 도달했는데 어리고 작은 자신은 그렇게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완덕의 갈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길을 알려주실 것이라 믿었다. 성경을 읽는 중 잠언과 이사야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온전히 예수님의 팔에 의지해서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신뢰의 길이며, 예수님만 바라보고 인정하는 겸손의 길이며, 신뢰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길이며 이 모든 것을 총괄하여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이루는 복음의 길이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데레사가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그의 가정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로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영적 어린아이의 길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데레사의 영적 어린아이의 길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녀에게서 배우고 현재에 적용할 부분을 고찰해 본다.

 

  데레사는 언니인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의 지시로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있을 때 까지, 자서전을 기록했다. 또한 성심 수녀회에 있는 큰언니 마리와 다른 지인들과의 많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데레사 선종 1년 후 가르멜 수녀회는 관습대로 데레사의 자서전을 비공식 출판해서 여러 가르멜 수녀원으로 보냈는데, 공식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10여년 만에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의 자서전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고 표현했다. 이 당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얀세니즘의 영향으로 정의의 심판관의 이미지였던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데레사의 성물들이 전쟁에서 군인들을 보호하고, 침체되었던 선교지에 생명력이 전해지는 등의 1950년 까지 데레사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가톨릭에서는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사후 50년을 기다리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 선종 26년만인 1923429일 시복을 하고 1925517일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했다. 본 논문에서는 그녀의 자서전과 편지글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 본론

2.1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형성 배경

(1) 데레사의 가정 배경

  아버지 루이 마르탱(1823년생)은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꼼꼼하고 논리적 이었다. 22세에 고독한 삶을 꿈꾸며 수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라틴어를 몰라서 거절당하고 알랑송에서 시계공으로 지내면서, 35세에 젤리 게랭을 만난다. 어머니 젤리 게랭(1831년생)은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던 레이스 기술을 배웠다. 그녀 또한 수도자의 삶을 꿈꾸어 오텔디외 수녀원을 찾아 갔지만 거절 당하고 27세에 마르탱과 결혼하게 된다. 데레사의 부모 두 사람은 모두 수도자 생활을 원했었다. 신혼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고해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들에게서 아홉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다섯 명의 딸이 살아남았고, 네 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어머니 게렝은 종교적 신념이 충실하고 믿음이 깊었으며 일에 열정도 있었다. 작은 일에도 성심을 다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돌보았다. 친척들과 편지로 소식을 자주 나누었는데 많은 서신에서 막내인 데레사의 어린 시절의 정보들이 있다. 데레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할 때, 어머니의 편지를 참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데레사가 4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것은 데레사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된다.

데레사에게는 4명의 언니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던 큰언니 마리는 데레사의 대모였으며, 작은 언니 폴린은 어머니 사후 데레사의 두 번째 엄마가 되었다. 몸이 많이 아팠던 레오니와 데레사의 단짝 친구인 셀린 언니가 있다. 마리는 성모 방문 수녀회로, 폴린(예수의 아녜스 수녀로 데레사에게 자서전을 기록하도록 한 당시 원장 수녀)과 셀린 그리고 데레사는 가르멜 수녀회로 입회한다. 아버지는 말년에 금치산자 판정을 받기 까지 했지만, 201510월에 데레사의 부모도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이름이 올랐다.

 

  (2)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식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부모와의 심리적 관계가 사람들과의 심리적 관계 및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데레사의 부모는 가정에서 기도, 아침 미사, 주일의 저녁 기도 등 일상생활이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마르탱 부인은 병든 하녀를 돌보고 아버지 마르탱은 가난한 사람, 임종 환자를 도왔다.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스스로 자신의 내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눈다. 철 들 때부터 엄마가 돌아가신 때까지 알랑송에서의 생활(1873-1877), 엄마가 돌아가신 4살 반부터 열 네살 까지 뷔소네의 시간, 그리고 열 네살, 크리스마스의 은혜의 시간 이후로 나눈다.

  첫째 시기의 데레사는 밝고 명랑하고 고집이 세고, 괄괄하고 순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데레사는 이 시기에 이미 사물에 대한 판단 수준이 글을 쓰고 있는 23세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표현한다. 큰언니 마리의 말은 절대로 거슬리지 않았고, 둘째 언니 폴린은 자신의 마음의 이상(理想)이었다고 고백한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등장하듯이 자신이 잘못한 것은 항상 모두에게 고백하고, 특히 아빠에게는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마리에게 전하게 해서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백 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어린 데레사에게 있었다. 마르탱 부인의 편지 내용 중에 저번에 데레사는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단다. 아주 얌전하게 굴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 그럼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지옥에 가겠네... 그렇지만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가 천국에 갈 때 같이 올라갈 거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아 줄 텐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붙잡아 가실 수 있겠어?’ 엄마 품에 숨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데레사의 눈에서 똑똑히 보았단다...” 어쩌면 네 살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이 20대에 이야기할 사랑의 엘리베이터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자신의 아빠에게 나의 왕’, ‘사랑하는 임금님이라고 불렀고, 마르탱은 자신의 막내딸인 데레사에게 나의 작은 여왕이라고 애칭했다.

  마르탱 부인의 사후, 데레사의 성격이 변한다. 수줍어 하고 얌전해 졌으며 특히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 져서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어야 편했고 낯선 사람과 함께 있기 힘들었다. 그러기에 가족들은 더욱더 데레사를 잘 보살피려고 했으며, 아버지 마르탱은 예민한 데레사를 섬세하게 보살폈다. 이 시기에는 아빠와 낚시도 하러 다니고, 고해 성사를 기쁘게 하고, 엄마가 가르쳐 준 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렸다. 이러한 관상적 묵상과 기도들로 이때부터 데레사는 이 세상이 귀양지처럼 여겨지고 하늘 나라를 꿈꾸게되고, 참된 본향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8살이 되었을 때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너무 우수해서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2년 만에 학교를 도중 하차 한다. 9살이 되었을 때(188210) 두 번째 엄마인 폴린이 가르멜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고, 자신도 가르멜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해 말부터 두통이 계속 되다가 1883년 부활주일(3) 이후에 아이들은 걸리지 않는 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그해 성령강림 주일(5)즈음, 고통 중에 성모의 미소를 보고 몸이 낫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데레사는 이때의 고통이 자신이 꽤병은 아니었나 하는 마음에 가르멜에 입소해서도 고해 성사를 할 정도였다.

  데레사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깊은 마음의 기도를 했는데 수도원에 입소하면 어떤 이름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기 예수님이 떠올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불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언니를 면회 간 길에 원장 수녀가 데레사에게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이름을 하자고 해서 예수님의 친절한 마음씨를 느꼈다. 독서와 성화(聖畫)보기를 즐기면서 묵상 가운데 점점 더 예수님을 모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영성체를 받은 날에는 갈2:20 말씀을 되뇌었는데, 예수님께서 많은 십자가를 지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이 큰 은혜를 받은 위로로 느꼈다.

1885512살 무렵 피정 동안에 무서운 세심증이 생겼고 그 이후로 약 1년 반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이 무렵 기숙학교를 도중하차 한다. 세심증으로 인해 마리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마음이 편했는데 마리 언니마저 수녀원을 결정하면서, ‘오직 하나 뿐인 벗은 예수님 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데레사는 또래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만은 모든 것을 말했다.

  데레사에게 두 번의 기적은 앞서 기록한 투병중의 성모의 미소와 크리스마스의 은총이다. 데레사의 세심증과 타인에게 섬세한 반응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것 때문에 가족들은 힘든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데레사는 눈물을 흘렸다. 13세였던, 1886년 성탄절에 데레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다 하던 행사를 앞두고 아빠가 내년에는 데레사가 수녀회로 들어가니 , 다행히 올해로 끝이구나!’라고 한 말을 데레사가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데레사는 또 울음을 터뜨리고 크리스마스를 망칠 수 있었으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잃었던 마음의 힘을 되찾아 분위기 좋은 크리스마스를 지낼 수 있었다. 10년 동안 고치고 싶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 이 후로 데레사는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 져서 공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공부와 암송들 속에서 데레사는 여러 계시들을 경험한다.

 

2.2 ‘영적 어린아이의 길의 발견

  저는, ‘아주 작은것 밖에는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는 아주 작은 영혼입니다. 게다가 마음에 많은 평화를 주는 이런 자그마한 희생조차 자주 놓쳐 버립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평화를 좀 덜 누리게 될 것을 참으며 다음에는 더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데레사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하느님, 저는 모두 선택합니다. 반쪽짜리 성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 선택하오니, 저의 의지를 받아주소서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욕구를 불어넣으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작은 나도 성덕을 열망할 수 있어... 하지만 아주 곧고 짧은,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을 통해 하늘에 갈 방법을 찾고 싶어

  위대한 성인들처럼 되고 싶은데 그들처럼 되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서 그들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 올라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데레사는 자신을 많은 꽃 중 작은 꽃,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많은 붓 중에 작은 붓, 발에 밟히는 작은 모래 같다고 표현한다. 예수님 계신 곳 까지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로마 여행 중 보았던 엘리베이터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엘리베이터에 해당하는 말씀을 찾는다. 그녀는 잠언 94누가 아주 작은 자이어거든 내게로 오라라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품으로 자신을 초대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사야 6612-13을 통해서 자신을 하늘에 올려줄 엘리베이터는 예수님의 팔이라고 해석했다. 사랑의 엘리베이터는 예수님께 안기어 은혜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히려 큰 사람이 될 필요가 없이 작은채로 있어야 했고, 점점 작아져야 했다. 이것은, 막내였던 자신의 작음과 약함이 부모님과 언니들의 사랑을 받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했고, 불완전과 작음이 예수님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마르탱 부인의 편지에서 엄마 품에 안겨 천국에 가겠다던 그 꼬마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데레사는 자신의 작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의 바탕이 되며,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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