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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존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2/2, ~337까지)

by 말씀묵상과 영성지도 2023. 8. 19.

★ 아래의 내용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후반부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존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2/2, 169-337까지)

19일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26일까지 책을 잡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26일에 생각지 못한 실수로 큰 오해를 받고 아침부터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일이 있었다. 어려운 마음으로 저녁 일정을 취소하고 자숙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책을 끝까지 마무리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최대형 역. 은성 . 2013년.

상황에 메여서 나를 바라보고 소망이 없는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소망은 낙심하지 않으며.. 소망이 부족한 곳에는 사랑도 부족’하다는 책의 마지막 부분과 기도 동역자가 보내준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 시를 함께 보게 되었다최근 리플렉션을 제출할  마다 ‘아..너무 교만한  같다 이렇게 교만모드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어려움 덕에 초점을 다시 아버지께 맞추게 되는거 같다. “오 하나님당신은 아나이다내가 당신 것인 줄을…”

 

책을 빌려보는 관계로(이 당시에 빌려보다가 결국 구매함^^) 컴퓨터로 내용을 정리하며 읽었는데 p168까지는 정리한 내용이3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뒷부분은 읽는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정리한 분량이 5페이지가 되었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목차 (2/2)

순결에서는 대부분 육적인 것을 죄로 정의 하고 풀어갔다. 수도사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번역상의 문제였을까…?)

마음이 하나님께 순결한 것, 또 서로에게 신실한 마음도 순결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란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이 교정 수단이라고 제시하는데 최근 몇 년 청년들의 감정을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감정을 억제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밝은 곳에 꺼내놓고 다른 것으로 승화 시키는것이 건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가 달라서 일까…?

 

무감각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면 "어미"와 싸울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어미"이기에 본인이 무감각해졌다는 것만 발견해도 큰 수확이 있을 것 같다. 요즘 관계 안에 무감각에 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대부분 본인들이 원인을 알면서 안풀고 있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장 바꿔놓고 보니 나도 답을 알면서 안 풀고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성령님이 알려주시지만 이렇게 무시하고 사니… 이래서 인간 멘토가 필요한거 같다.(수도사와 수도원장 같은 관계? 하지만 현대에 그런 신실한 믿음의 관계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 이 글을 쓴지 5년 후에 블로그에 올리는 중이다. "가능하다"는 결론을 맺고 그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

 

순종에게서 자라나는 통회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 교만이다라는 정의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학기 초에 내게 있던 많은 은혜들 때문에 어쩌면 내 마음에 교만이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페이퍼를 제출할 때 마다 ‘아? 이상하다?’하고 뭔가 알면서도 안 풀고 넘어갔고 그 무감각이 오늘의 쓰나미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렵지만 이렇게 나로 무감각에서 일어나고 교만에서 나오려는 의지가 생기게 해주신 것에 감사한다.(하지만 마음은 어렵다.^^)

 

겸손과 분별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 했는데 분별은 거의 정념, 죄죽이기의 내용이어서 그럴지 궁금했다.

 

29번째 사다리에 무정념이 정리되어 있어서 도전이 되었다. 분별을 읽는 즈음, 담임목사님과 멘토링할 (금식 같은) 스스로 불편함에 처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주제가 있었는데 중복되는 내용이었어서 책을 읽을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내가 즐거이 선택한 자체가 고난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세상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오늘의 일이 그 열매였다. 진작에 불편함에 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면 실수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이 여러 내게 경고해 주셨는데 내가 반응하지 않은거 같다는 생각이 글쓰는 순간 생각났다. 인간이란 이리 느릴까

 

극도의 피로가 육체의 정욕을 일으킬수 있다는 경고,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포기하는게 흙과 금을 바꾸는 것,

 

기도시간과 나의 일(조급한 마음)을 맞바꾸려는 순간 생각이 나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책읽는 한순간이 아니라 계속 나를 깨워 기도시간에 머물게 하기를 기대한다.

 

2016년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도전 된 말씀이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18:29)”였는데 무정념 부분에서 종말이 되기전에 성에 도착하지 못 한 사람(성을 넘지 못한 사람은) 사막에서 야영해야 하기 때문에 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리가 되었다. 놀라웠다. 몇 년간 뛰어 넘을 생각만 했지 왜 뛰어 넘어야 하는지는 정리가 안됬었는데 유레카!!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

 

                          디히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성(城)에서 나오는 성주(城主)처럼

의연하고 유쾌하며 당당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의 모습은

마치 사령관이나 되는 것처럼

자유롭고 유쾌하며 확고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내 스스로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 불과한가?

마치 새 장엔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갈망하며 병든 나

마치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

빛깔, 꽃, 새들의 노래에 굶주리고

친절한 말과 인간적 친밀함에 목마르고

변덕스런 폭정과 아주 사소한 비방에 분노하여 치를 떨고

근심에 눌리고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사건들을 기다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고

지치고 허탈한 채 기도하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연약하여 이런 것들 모두를 포기할 준비가 된 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인가 아니면 저런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애처롭게 우는 비열한 심약자?

이미 승리한 전투를 앞두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도망치는 패배한 군대,

그것과 나의 내면세계가 다를 바는 무엇이랴?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이런 고독한 질문들로 나를 조롱(嘲弄) 한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글, Dietrich Bonhoeffer / 번역,  김희수 목사 (월드비전선교센터장, 서울북노회)

(퍼옴 : http://www.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omm_essay1&wr_id=1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