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수도회_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개관

일자 : 2009. 4. 30 (목)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1226년)

-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

-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식 표현) 등으로도 음역

- 13세기 초에 프란체스코회(프란체스코 수도회) 설립으로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끈 교회개혁가

-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파들에서도 존경, 대한 성공회의 수도원 중에도 성 프란시스 수도회라는 성공회수도원이 있다.

-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10월 4일.

- 갈색 수도복에 밧줄 허리띠를 맨 모습

- 상징물은 비둘기·5개의 성흔·프란체스코회 수도복·십자가·해골

 

 

- 1181년 이탈리아의 아시시 출생

-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

- 어머니 피카

- 아버지가 사업상 프랑스로 간 사이 태어나서 산 루피노 대성당에서 조반니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으나 프랑스에서 유래한 프란체스코라고 다시 지어줌

 

교회사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앗시시의 프란시스, 로버트 클라우즈)

  1219년 중동으로 여행하여 이집트의 회교군주(술탄)을 개종시키려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생애의 여러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그림의 왼쪽 맨아래 그림에서 그는 술탄에게 설교하고 있고 그 위의 그림에서 그는 새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작은 형제들’에서 본래의 이상을 고수하던 프란시스는 그의 지도권을 버리고 몬테 알베르니아의 은둔지로 물러갔고 거기서 성흔(stigmata,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상처와 같은 모양의 것이 몸에 나타나는 것)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의 도피처로서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창조된 사물들 가운데서 창조주를 가리키는 사랑의 대상들을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고독한 삶을 즐겼고 새들과 동물들도 그의 설교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성장하는 도시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보통 사람들 중에서 철저한 청빈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존했던 가장숭고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존경을 받고있다.

 

 == 천년의 불확실의 시대(AD500-1500) 인물연구 ==

탁발 수도회_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2/2)

일자 : 2009. 4. 30 (목)

 

 

3. 인물중심의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 [13]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1226년) : 로마가톨릭 수도사

-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식 표현) 등으로도 음역

- 13세기 초에 프란체스코회(프란체스코 수도회) 설립으로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끈 교회개혁가[14]

- 1181년 이탈리아의 아시시 출생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

- 1202년 페루지아 전쟁에서 포로로 1년 생활

- 1204년 아풀리아 군사 원정 참전

- 1207년 아버지와 결별, 빈민 & 교회 재건 시작

- 1208년 마태복음 10:7-10절 말씀으로 정비

- 1209년 수도회 승인 (교황 이노센트 3세)

- 1212년 프란시스 시리아 선교시작, 클레어 수녀회 시작   

- 1216년 도미니크 수도회 시작

- 1219년 이집트의 회교군주(술탄)을 개종시도

- 1219년 프란시스회 북아프리카에 파송   

- 1220년 수도회 지도자 자리 사임           

- 1221년 ~ 기도와 찬송과 명상에 몰두 [15]

- 1226년 10월 3일 사망

- 1228년 성인 칭호 받음

- 1245년 프란시스 수도회 재산 소유 시작

  (엄수파(Rigorists, 스스로 성령파라 부름)들 리더쉽에서 제외되기 시작)

- 1255년 클레어 성인 칭호 받음

- 1256년 어거스틴 수도회 (교황 알렉산더 4세)

- 1540년 예수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4. 동시대 다른 인물과 대조, 비교, 종합

  프란시스와 동시대에 ‘도미니쿠스회’를 창립한 도미니쿠스가 있다. 도미니쿠스회와 프란시스회는 거의 무한한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의 사역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이 크게 강화 되었고 동시에 주교와 일반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축소 되었다. 도미니쿠스는 프란시스에 비해서 조직력은 뛰어났으나 프란시스회의 급속한 성장은 따를 수 없었다. 프란시스회는 대학 도시들에 자리를 잡아 저명한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나 도미니쿠스보다 더 가난한 자들의 수도회로 남았다.[16]

(클라라는 2.2에서 거론됨)

 

5. 선교적, 개인적 적용

  여러 책이나 웹싸이트에서 보아온 프란시스의 유명한 시[17]나 어록들이 있다. 최근 어떤 책[18]에서 “언제나 복음을 전하되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는 프란시스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았다. 짧지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었다.  4년 전부터 자주 들으면서 ‘자아’를 죽이는데 도움이 되던 CCM이 있다. 강명식의 ‘승리’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고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라는 곡이다. 프란시스가 사용한 말과는 약간 차원이 다르지만 바로 이 곡으로 나의 급하고 불 같은 성격이 조금씩 사그라 들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것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다. 어쩌면 그렇게 조금씩 주인되신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한걸음이 되고, 삶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작은 시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내 방법, 내가 급한데로 ‘논쟁’으로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기대하고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많이 필요함을 느꼈고, 프란시스의 말에 많은 동감이 되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 예수님도 결코 논쟁하지 않으셨고 단지 ‘진리를 증거’(요한복음 18:37)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만 하셨다. 나의 삶에서도 많은 말이 아닌 나의 삶으로 ‘진리를 증거’할 수 있기를 이번 과제를 하면서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래본다.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수확이 있었다.

  프란시스의 경건 생활과 그 경험에 대해 자주 접하게 되면서, 그에게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faith mission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안에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된다. ‘탁발 수도승’으로서, 아주 작은 것 조차 소유할 때 생기게 되는 인간의 욕심을 싹부터 잘라버리려던 그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본다.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나의 각오와는 달리, 세상과 비교하면서 나의 각오를 조금씩 타협하면서도 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기대했었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 있던 나를 프란시스의 삶과 얼마전의 큐티(롬12:3-8)말씀과 더불어 다시 세상과 비교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디모데후서 3장과 같이 경건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더라도 프란시스와 같이 경건의 능력이 삶에서 드러나는 한 사람, 그런 선교사가 되고 싶다.

 

 



[1] 세계선교역사, J. 허버트 케인, 기독교 문서 선교회

[3] 기독교 선교 역사 개관, 남전우, (web site download)

[4]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5] 영화를 찾아서 보고 과제를 하려고 찾다가 결국 웹에 있는 일부 만 볼 수 있었다.

[6] 교회사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7]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8] 중세교회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은성출판사

[9] 영화에서는 인노센트 3세가 프란시스의 발에 입맞추며 부와 권력의 횡포를 부린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10] 당시 교황 인노센트3세의 고백과 프란시스 수도회가 승인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의 돈과 명예를 멀리하려는 프란시스의 삶과 그의 흔적들, 당시 대중이 프란시스 개인과 수도회에 보인 존경,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프란시스의 신비한 경험들을 많이 다룬 것 등.

[11] 영화(Brother Sun, Sister Moon)에서는 클레어가 원래 프란시스의 약혼녀였다고 표현되어 있고 ‘예언자적대화의 선교(크리스천헤럴드)’에서는 클레어가 어릴 때부터 영적은사가 있었고, 클레어의 수녀원이 지역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2] http://www.francis.or.kr :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홈페이지

[13] 동시대의 주요한 수도회의 설립 연도 함께 표기 (볼드체)

[14] ‘프란시스 본인은 그런 생각이 있었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는 후대가 내린 평가가 아닌가 한다.

[15] 이 기간 중 성흔(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를 받았고 죽을때 까지 그 상처의 통증이 컸다고 한다.

[16] 기독교회사, 윌리스턴 워커,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7] “평화의 기도”는 모 교회에서 몇 년간 예배의 마지막에 부르기도 했다.

[18] 21세기 제자도 사역핸드북, 스티브&로이스 레이비, 복있는 사람

 

 == 천년의 불확실의 시대(AD500-1500) 인물연구 ==

탁발 수도회_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1/2)

일자 : 2009. 4. 30 (목)

 

1. 인물 선택 이유

  선교 역사 과목에서 맡게 되었던 500-1500년대는 갓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되고 교황권이 확립된 시기에 이어져 있다.

로마제국 내부에서 기독교가 살아 남기만도 힘들다가[1] 500년도 초반(529년)에야 초대교회의 영성과 열정을 되찾고자 베네딕트에 의해서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몽트카지노(Mount Cassino)에서 시작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을 실천하며 자발적 선교 훈련으로 개인영성훈련과 복음전도 활동을 했다.[2] 선교 역사에서 거론되는 콜럼바, 콜럼반, 어거스틴 등 18세기 윌리엄캐리에 의해서 본격 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3] 선교는 대부분 카톨릭의 사제 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그래서 시대를 바꾸어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연구 할까 하다가 ‘타문화 선교 전략’과목에서 이슬람 수업 중, 십자군 전쟁 당시 많은 카톨릭 사제들과 다른 방향을 제시했던 ‘사랑의 사제’인 프란시스와 레이몬드 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가운데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면서 삶에서 복음을 드러내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점점 더 알아 가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담임목사님이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를 자주 언급하셨던 것과 ‘사랑의 사도’라는 그의 명칭이 이번 선교역사에서 인물 탐구로 프란시스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역사적 의의

  프란시스의 삶은 여러 다른 각도에서 많은 의미가 있겠으나 본인은 크게 사랑을 기반으로 한 선교방식(그 당시 이슬람을 대하는 방식)과 탁발수도회(Friars Minor, 겸허한 형제단)의 시작에 의의를 두었다.

 

2.1 사랑의 사도 (이슬람 술탄과의 만남)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군 정신에 사로잡혀 있을 시대에 프란시스는 무슬림에게 다가서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최초의 두 시도인 시리아와 모로코로 가려는 시도는 실패했으나 1219년 ‘성령강림헌장(Whitsun Chapter)’을 재정한 이후로 프란시스는 좀 더 평화적인 선교 방법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그리고는 일부 수도사들을 튀니지와 모로코로 파송하고 자신은 이집트로 가서 십자군의 전선을 뚫고 술탄 알 말릭 알 카밀(Al-Malik al-Kamil)에게 갔다. 술탄은 프란시스가 십자군으로서가 아닌 종교인으로서 자기에게 왔다는 것을 알고 무슬림식으로 예의바르게 영접하고 며칠 동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프란시스의 자상한 이야기를 들은 뒤 그를 십자군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프란시스는 술탄을 개종시키거나 전쟁을 종식시키지는 못 했다. 그러나 적대 관계에 속한 두 사람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4] 이 경험으로 그는 선교사의 태도에 대한 모범과 규훈을 구체화 했는데, 나에게 감명 깊었던 것은 ‘기독교인의 현존(presence)과 증거(witness)는 “논쟁”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문화 선교전략’에서 엄목사님이 실제로 무슬림과 경험했던 이야기에서도 그렇고, 또 내가 섬기고 있는 공산권에서도 “논쟁”이 결코 복음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2.2 탁발 수도회 (Friars Minor)

  조사를 하던 중 “Brother Sun, Sister Moon”이라는 영화가 프란시스의 청년시절 인간적인 모습에 초점을 두어서 제작되었고, 수도회와 그 사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프란시스”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5]

프란시스는 젊은 시절 부자 아버지 아래서 풍족한 가운데 즐기는 삶을 살았다. 또한 기사로서의 삶이 보장되어 있던 중 이웃도시에 전쟁포로 잡혀갔다가 거의 죽은 몸을 끌고 다시 아시시로 돌아와서는 (여러자료에서 프란시스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것에 문둥이와의 만남, 전쟁 참석, 포로생활 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을 칭송하고 자연과 벗삼게 된다.[6] 부자인 아버지는 프란시스가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게 되자 성직자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고 아시시의 주교는 유산을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이에 프란시스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과 신발까지 벗고 성밖으로 나간다. 그는 초기에는 자발적 빈곤과 이를 통해 발견한 기쁨을 추구했다.

  “프란시스, 가서 내 교회를 수리해라!” 프란시스가 성 다미아노의 교회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다가 들은 음성이다. 그는 그 음성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아시시 근교의 예배당을 수리했었다.[7] 그러던 중 마태복음 10장 7-10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가난과 설교를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 한 후에 자기가 처할 곳이 조용한 고독의 장소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법석대는 곳으로 들어가 이들을 교훈하고 빈자와 병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8]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해서 결국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수도회가 창설되게 되었다.

탁발 수도회가 프란시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탁발 수도회의 선구자는 리용 출신의 상인으로서 극도로 청빈한 생활을 실행하였던 수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에 감동하여 스스로 가난과 설교의 길에 나섰던 Peter waldo 라고 한다. 그 주위에 여러 추종자들이 모여들었으나 대주교는 이들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신학자들은 그들의 무식을 조롱하여 이들은 결국 계곡 속으로 들어가고 이후에는 개신교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분위기에서 프란시스 수도회는 왈도파와 흡사하여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프란시스와의 면담에서 그의 요청을 수락하게 된다. [9]

프란시스의 역사적 의의 중의 하나를 탁발 수도승으로 택한 이유는 두 가지 이다. 첫째, 여러 자료들에서 중세의 경건의 대표자[10] 그를 뽑는 것과 둘째, 동일한 지역 아시시에서 클레어 (Clare)[11]라는 여성의 대표적인 수도승이 나타난 것이다.(현재 : Poor Clares, 청빈한 클레어회) 프란시스와 동시대 인물로 알려진 클레어는 프란시스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는 의미로 “작은 식물”로 불리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많은 탁발 수도회들이 생겨났지만 프란시스회는 아직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12] 프란시스의 많은 어록들이 개신교 설교와 책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당대에 선교 활동은 프란시스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활동이 주축이었다.

 

 



[1] 세계선교역사, J. 허버트 케인, 기독교 문서 선교회

[3] 기독교 선교 역사 개관, 남전우, (web site download)

[4]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5] 영화를 찾아서 보고 과제를 하려고 찾다가 결국 웹에 있는 일부 만 볼 수 있었다.

[6] 교회사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7]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스티븐 B. 베반스 & 로저 P. 슈레더, 크리스천헤럴드

[8] 중세교회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은성출판사

[9] 영화에서는 인노센트 3세가 프란시스의 발에 입맞추며 부와 권력의 횡포를 부린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10] 당시 교황 인노센트3세의 고백과 프란시스 수도회가 승인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의 돈과 명예를 멀리하려는 프란시스의 삶과 그의 흔적들, 당시 대중이 프란시스 개인과 수도회에 보인 존경,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프란시스의 신비한 경험들을 많이 다룬 것 등.

[11] 영화(Brother Sun, Sister Moon)에서는 클레어가 원래 프란시스의 약혼녀였다고 표현되어 있고 ‘예언자적대화의 선교(크리스천헤럴드)’에서는 클레어가 어릴 때부터 영적은사가 있었고, 클레어의 수녀원이 지역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2] http://www.francis.or.kr :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홈페이지

[13] 동시대의 주요한 수도회의 설립 연도 함께 표기 (볼드체)

[14] ‘프란시스 본인은 그런 생각이 있었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는 후대가 내린 평가가 아닌가 한다.

[15] 이 기간 중 성흔(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를 받았고 죽을때 까지 그 상처의 통증이 컸다고 한다.

[16] 기독교회사, 윌리스턴 워커,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7] “평화의 기도”는 모 교회에서 몇 년간 예배의 마지막에 부르기도 했다.

[18] 21세기 제자도 사역핸드북, 스티브&로이스 레이비, 복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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