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내용은  <영의 식별> 전반부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영의 식별>(갤러허) 서론-5장

티모시 갤러허. <영의 식별>. 김두진 역.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내적 감지의 3가지 유형’을 말하는 17번의 심리적, 도덕적, 영적 감지의 갤러허의 설명에서 심리적 설명에서 ‘의식성찰’이 떠올랐다. 도덕적 감지가 마음에 가장 어려웠다. 행동, 말, 관계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가“(p68)..라는 문장에서 매일 깨어 있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나를 또 돌아보게 된다. 매순간 그렇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신 방법대로 살고 싶어서 어쩌면 나또한 이냐시오의 민감한 영적 감수성이 나의 매일의 목표이다. 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목표에 집중하느라 사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해내던 내가 roaming의 나날을 보내느라 실적이 별로 없고 제한시간에 턱에 닿아 일을 끝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매일을 경험한다.

그래서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간다.

내가 생각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예수님이 선택한 안전지대 안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훈련 중이다.

 

일상 중에도 관상적 태도를 유지하고 싶으나 수시로 본성이 먼저 나타난다.

 

『영신수련』을 읽을 때 너무 단문이어서 이해하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했었고 여러모로 의문도 가고 했던 부분들이 많았다. 『영의 식별』을 구입하면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을 구매 할까 하다가 말았는데 『영의 식별』을 읽으면서 자서전을 근거로 한 설명들 때문에 『영신수련』이 더 이해되고 동의 되었다.

 

[생각해 볼 내용]

주님을 사랑하고 제자로 살아가고 많은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지만, 도덕적 감지(p68-69)가 너무 높을 때도 있는 반면, 수시로 너무 선을 넘어 바닥으로 떨어진 경우들도 보았다. 이러한 경우는 인지의 문제일까? 어릴 때 상처의 문제일까?

 

[생각해 볼 내용]

이냐시오는 계속 세속과 거룩,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거 같다. 나 또한 그런 고민의 과정 중에서 정리된 것이 있어서 ‘이분법’은 인간이 편하자고 만든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냐시오는 그 시대의 철학을 기반으로 생각해서 이분법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지금의 우리도, 거룩과 세속, 선과 악을 열심히 분별하면서 ‘세속’의 것을 피하며 살아야 할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선을 긋는 것도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판단하는거 같아 때로는 불편할 때도 있다.

 

[생각해 볼 내용]

p28의 이냐시오의 ‘민감한 영적 감수성’에 집중하느라 지난 주중 ‘영성지도’ 실습과목 수행 중에 온전한 통로로 민감하고 싶어서 이성을 빼고 머리도 마음도 작동시키지 않았었는데, 통로가 되는게 아니라 혼돈이 되어 버렸다. 결국 피드백 시간에 되돌아 보니 ‘논리’대로 가면 되는 거 였는데 내가 논리를 버리고 진짜 통로가 되겠다고 다 버린거 였다. 이냐시오 자서전에 보면 생각의 길, 정감(감정?)의 길.. 이렇게 가는데, 생각(이성)을 비우는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나의 이성(생각)을 들려서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티모시 갤러허. <영의 식별>.

멈추어야 보이는 것

다시 교회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코로나가 50100명만 넘어도 온 나라가 난리 였는데 지금은 수천, 수 만명이 발생하는데 교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에게 왜 그런 격리의 상황들이 있었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다시 교회들이 문을 여는 이때, 나는 부활절을 기준으로 예배와 공동체에 대해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경희. 멈춤. 동연.

 

마음의 태도.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그 마음의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함을 멈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윗이 궤를 옮겨 오려고 했던 것도(그래서 웃사의 죽음에 하나님께 감히 분을 내었던 것도..), 모방 욕망으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추구하는 것도, 교회에 지체들을 미워하면서도 교회봉사에 열심인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를 직면하여 보는 광야의 시간 없이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있는데 멈춰 있을 때는 달리지 못해서 불안해 하고, 다시 달릴 수 있을 때는 생각 없이 뛴다. 깊은 호흡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모든 것을 멈출 때 욕망이 아닌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는데.... 성령께 내어드릴 시간이 없다.

 

성공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제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쁘고 급할수록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려

상황의 주인 되신 분께,

그리고

이 상황을 허락하신 분께

마음과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최대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 이겨내야 하는게 우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사는 사람을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수가 옳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전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사는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해진다. 모교회 담임목사님이 40일 금식을 하셨다. 금식 전에 금식을 계획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금식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모임 제한도 풀린 이 시점에 담임 목사님은 더욱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전처럼 어렵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광야에서 사선의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결과이다. 40일의 금식을 통한 경험으로, 일상에서도 생명의 매순간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긴 금식의 결과 매순간, 일상에서의 예배(‘라트레이아의 예배’, 23)가 회복되어 코로나가 풀렸다고 달려나가는 다른 교회들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달리지 않고 세대를 거슬러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며 기다릴 용기와 믿음이 생겼다. 멈출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의식성찰

또한 멈추어야 내 갈망의 기저를 볼 수 있다. 333의 의식성찰 시간은 무언가 이루기 위함이아니라 내 마음을 잘 살펴 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시간이다. 혼인 잔치집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저 상황을 말씀드리듯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버지께 그저 말씀드리고 아버지 손에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손에 들려 드렸을 때에 그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와 닿았고, 예화와 말씀 풀이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두 번째 읽었는데도 또 와 닿았다. 르네지라르의 이론과 다윗의 삼하 11-12장의 내용은 이미 수업을 통해 들었어서 더 풍성했다. 슈필라움(자기 틀)에서 스피리추얼 라움(영적자리), 새날을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날인 어둔 밤으로, 길도 물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광야의 자리로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수시로 돌아가는 깊은 호흡의 매일을 삶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래의 내용은 4, 5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4, 5장 내용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4장 영성지도와 신뢰 & 5장 영성지도를 준비하기

  영성지도와 신뢰를 읽으면서 ‘영적 발돋움’의 ‘환대’가 생각이 났다. 책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신뢰하면 환대하게 되고 환대가 가능하다면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또한 "누가 영성지도의 책임자인가"라는 것과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신다"는 것이 모든 상황에서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자존감과 안정감의 뿌리는 온전히 예수님을 향한 신뢰에 있다.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이상미 옮김. 두란노

 

  오랜 시간 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훈련하다가, 선교사가 된 이 후에야 인지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것중에 하나가 이 책에서 말한 ‘나를 신뢰함’인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하나님을 신뢰한 오랜 경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감지하는 다양한 방식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감지하는 ‘나를 신뢰함’도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책의 예에서는 주차장에서 ‘잠시 머무름’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한 방식이라고 했다. 어느 순간 나도 그 훈련에 돌입하면서 사실 행동이 이유 없이 많이 느려졌다. 매번 점검하고 물어보고 확인하고, 상황이 끝나고 나면 또 다시 이건 어떤 경우였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건지, 내 욕심인지, 사탄이 주는 마음인지.. 돌아보고 확인하고, 패턴을 분석한다. 

 

  월, 금요일에 강의를 나간다. 월요일은 2과목 6시간이라 미리 준비해야 해서 가능하면 주일 저녁은 시간을 비워두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 평소에 강의 준비를 못하는 관계로 주일 저녁이라도 강의를 준비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다. 토요일 저녁 평소에 연락 안하던 두 제자와 연락이 되면서 그중 여학생이 주일 저녁에 당장 보자는데 이미 몇 번 미뤄서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원망 했겠지만 그 동안의 패턴 분석이 있는 관계로 조용히) 하나님께 여쭤봤다. ‘이거 제 욕심으로 보는건가요? 압지의 타이밍인가요?’ 만나봐야 안다. 잔뜩 기대하는 마음과 엄청 피곤한 육체로 여학생을 만났는데 내가 던진 처음 질문의 답에서부터 아버지가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일 저녁에 대단히 늦게 집에 들어가면서 강의 준비에 은혜를 구했으나 강의 준비중 약 40%를 제대로 못하고 월요일 강의에 갔다. 이미 학생을 만났을 때 우리의 만남이 압지의 뜻 가운데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 마음 안에는 '제가 순종했으니까 지금 제게 필요한 은혜도 주세요!!!'가 있었다.) 강의에도 은혜가 있기를 구했다. 그런데 두 번째 강의에서 아는 것을 틀리게 말하고 실수하고... 스멀스멀 원망이 올라왔다. 밥도 못 먹고 6시간 연강에 두 번째 강의는 죽 쓰고 나니, 아버지께 심통이 났다. ‘너무 하시는거 아닌가요...’

 

  월요일 저녁 약속장소로 이동 중에 ‘시험 때문에’ 출애굽기 강의를 들으려고 틀었는데 ‘하나님께 순종이 궁극적으로 은총이지만 과정은 고난일수 있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심통 부렸다고 아버지께서 금방 답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은 궁극적으로 은총‘인 것을 알지만 그 신뢰에 자주 금이 가는 것 같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나를 향한 사랑의 확증인 예수님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다. 어쨌거나 나로 하여금 오래 불평하지 못 하도록 강의를 듣게 하시고 저녁식사에서 만난 교회 안다니는 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는 말을 듣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한다. 강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수업이다. 수업 때 실수나 내 생각 대로 안되거나 평안함이 없으면 하나님께 심통을 부린다. 지난번도 마찬가지였는데 믿지 않는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내가 수업 잘 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저 깊은 곳의 나의 욕심을 들여다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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