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내용은  <영적분별의 길> 4, 5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영적분별의 길> 4장 기억의 안내 & 5장 직관적 지식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분별의 길>. 이강학 역. 좋은씨앗

4장 “기억의 안내”를 읽으며, 지난 주 분별 시간에 수업과 상관없이 2년 전의 11월이 떠오르며, 지난주 갑작스런 진로 변경이 2년 전과 똑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을 깨닳았다.

 

‘톰’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비슷할 것 같다. 2년 전에도 영성지도와 영적 분별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고, 그 당시 주변에서 교회사역을 이야기 했을 때 저항감이 있었으나 영성지도 시간을 통해 러브콜 있으면 가겠다고 했는데 정말 먼저 연락 온 곳이 있어서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래서 ‘제도적 교회는 내 부르심이 아니다’를 확신했는데 2021년 11월 또 다른 곳에서 러브콜이 왔다. 내게는 2년 전의 기억으로 저항이 있었고 그래서 지원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딱 2일간의 일정으로 러브콜, 영성지도, 원서접수, 면접이 이어지고 지원한 부서가 아닌 새로운 부서로 합격했다. 그리고 화요일 분별 수업시간이 끝나면서 내안에 2019년과 2021년의 11월이 오버랩 되었다.

 

내안에 저항이 커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2년의 시간을 기다리시고, 21년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나의 마음을 만지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 교회가 "현재 나의 부르심의 자리"임을 인지하고 동의하게 되었다. 2년 전에도 이 책을 읽었음에도 기억의 실습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지만, 지난주 성찬식에서도 지난주 수업에서도 저절로 기억을 통한 은혜를 누린 것 같다.

 

직관적 사람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훈련을 많이 하고(스스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표였을 것 같다^^) 삽질도 많이 해서 현재는 S수치가 많이 줄어든 S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있는 S의 성향이 자주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고 관계 가운데 실수를 자주 유발하기도 한다. 때로는 직관이 있을 때 조차도 그것을 의심하고 분석하는 나를 본다. 다행히 책(p154)에서 솔크의 경우에서도 과학적 연구나 철학, 신학적 성찰이 수반된 이성의 추론 작용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두 번째 문장에서도 ‘직관에만 의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과연 직관만으로 의사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에 어떻게 따를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질문] S의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이분법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직관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책에서도 다른 정보들을(p154) 고려해서 의사 결정하라고 하지만 직관만으로 빠르게 의사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에 어떻게 따를 수 있을지... 

 
* 위의 글을 쓴지 2년 후 : 지금에 와서는 위의 질문이 그렇게 크게 동의되지 않게 되었다.

 

★ 아래의 내용은  <영적분별의 길> 2장을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영적분별의 길> 2장 영적 분별의 기초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분별의 길>. 이강학 역. 좋은씨앗

목요일 “영성지도“ 수업시간에 피지도자로 실습을 했다. 지도자는 상담전공 선생님이었는데 정확히 ”양가 감정“의 존재를 알아내게 도와주셨다. 사실 영성지도를 끝내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많았는데 영적 분별 과제를 읽으며 여러모로 정리하고 돌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높은 불안지수를 더 수시로 확인하고 관찰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책에서의 실습을 통해서 진짜 나의 ‘갈망’을 더 관찰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 이었다. 분별을 위해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 불편심과 부르심의 파악, 더 큰 갈망도 중요하지만 이번 주 나의 주제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경험이 가장 부각되었던 것 같다.

 

마음의 갈망 찾기 실습에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 번의 반복된 질문에서 비슷한 갈망이 나왔다. 어쩌면 그래서 내 안에 양가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 길로 갈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갈망 아래에 더 근본적인 갈망’의 탐색의 과정이 있었기에 앞의 두 질문에서 비슷한 대답을 한 것 같다. 목요일 영성지도 수업니 끝나고 나서 78-79페이지의 내용이 많이 위로가 되었고 나를 볼 수 있는 명확한 문장들이 많이 보였다. 

 

“갈망 들 중 가치가 있는 것”,

“서로 충돌하는 온갖 갈망의 덩어리”라는 표현이

나의 양가 감정 때문에

스스로 정죄하려는 자세에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로

바뀔 수 있었다.

(개인사 기억하기 실습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보기”)

 

최근 4-5년의 여정은 진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씨름하고 탐색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부르심을 입은 공동 창조자이지만, 양가 감정이 존재하는 죄인이다. 어쩌면 이것이 불안의 요인일수 있으면서도, ‘완벽’하다는 착각을 하지 않게 하는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피조물이기에 항상 위태 하지만 안정을 구하지 않고 그 위태로움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편향되지 않으려고(불편) 아버지께 시선을 집중하며, 부르심을 따라 공동창조자로서의 자유함을 누리고 싶다.

 

[생각 해 볼 부분]

“우리의 수단과(모든 다른 피조물들) 목적(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 이라는 부분에서 좀 불편해서 오래 머물렀다. ‘다른 피조물들’이라 함은 사람을 포함한 것 일 텐데.. 사람조차도 우리가 ‘수단’으로 대해야 할 것인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라서 그런 의미라면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 으로 해석한다면 약간 불편한 부분이 남는다.. 표현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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