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미래를 다루면서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한 죄의 문제가 화두가 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황을 직면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데 현실을 직면하지 않음으로 과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류의 문제도 직면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계속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과 ‘죄’의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흙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죄’는 신학적 개념으로서 이 단어가 발생된 이유는 선조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결국 오래된 이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을 행할 수 도 있고 ‘죄’로 인해 악도 행할 수 있다는 둘 사이의 긴장을 간직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순진한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휴머니즘의 현재 의미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 대신 인간의 성취와 열망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시기 휴머니즘의 기원은 기독교에 근거한 문화와 교육 운동이었다. 현대의 휴머니즘(세속 휴머니즘)이 포괄하는 신무신론은 하나님은 악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주장하며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런 종교를 만들어 낸 인간의 비합리성과 부도덕함을 더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문제의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좀 더 정의롭고 인도적으로 살게 되려면 교육이 모종의 답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그러나 교육만으로 죄인인 인간의 성향을 조절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인간의 본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므로 인간을 상품화 하거나 착취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GDP가 상승하고 과학이 더 발전하는 진보를 경험할수록 인간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다윈의 선택 번식 개념이나 트랜스휴머니즘(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간 변화론을 주장하는 운동), 기후 조정 등이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결과가 좋기만 하지는 않다. 또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화와 죽음을 피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가 있다.
결론
저자는 맺는말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유한함으로 첫째, 인간은 위대한 존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은 무언가 볼 수는 있지만 전체를 명확히 다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만과 만족의 양면을 다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이다. 둘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적인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현대 시대는 계속해서 바뀌므로 확실한 것이 없는 불안하고 복잡한 상태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최소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셋째, 우리가 아는 것이 많을지라도 아직도 알아야 할(발견해야 할)것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우리의 시각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발코니가 아닌 길 위에 있다. 우리는 ‘컴컴한 강물 위’에서 항해 하는 ‘기이한 작은 배’임을 잊지 말자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22세에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2년 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패커의 제자로 캐나다의 리전트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을 가르쳤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변증학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사제이면서 기독교 신학자 이다.과학적 무신론자였던 그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무신론을 대표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기독교를 변증하는 기독 지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논중 한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이란 무엇인가』 『C. S. LEWIS』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복 있는 사람),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기독교 변증』(국제제자훈련원),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IVP),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도킨스의 신』(SFC) 등이 있다.
본서의 기획은 2015년 이언 램지 과학과 종교 센터의 콘퍼런스에서 기조 강연한 내용을 기초로, 컨퍼런스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추가하여 책으로 구성한 것이다. 컨퍼런스에서는 인류학, 생물학, 철학, 심리학, 신학 전문가들이 ‘인간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를 논했다.
많지 않은 분량의 책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3개장 12개의 흐름으로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인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해 최대한 예의와 존중을 하려는 노력이 보이며, 실제로 저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책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과학과 신학을 섭렵하는 변증가로서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고 상대의 논지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는 저자의 지혜가 놀랍다. 또한 논증을 위해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책들을 거론하고 있으며, 전문 서적 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 한다. 대부분의 이론들에 대해서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편집에 있어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의 영어이름과 생존시기를 밝혀 주어서 독자들이 시대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도 돋보였다.
서론
철학에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는 ‘생의 의미‘에 대해 저자는 과학과 종교에서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안내한다. 과학 조차도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 살만 루슈디의 이론을 수용하여 인간 내면의 영적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각 개인의 삶은 표현된다. 이러한 의미의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종교의 능력을 인식한다면, 과학과 신앙을 함께 엮어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과 신학 두 분야를 소재로 인간의 정체와 의미에 대해, 인간 본질의 ‘큰 그림’을 전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힌다. 첫 번째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번째 생의 의미에 대해, 세 번째 미래에 대해 논한다.
1.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이 왜 그렇게 ‘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몰두하는 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의 본질은 물리, 화학, 생물, 사회적 차원으로 구성되어있고 또한 각 차원은 복잡한 실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간단히 말 할 수 없지만 우선 이 책에서는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인간의 본질과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인류학 연구를 사용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현재까지 영향력 있었다고 알려진 4가지 이론을 제시함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중요성에 주목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르네상스의 서막을 알린 『 인간 존엄에 관한 연설 』 에서 창의성을 강조한 지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입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보호막 안에 감금되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하기에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해방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이리스 머독의 관점이다. 네 번째는 인간 유전자의 기질이 이기적이므로 이기심 성향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이기심(탐욕)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해석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관점이다. 네 가지 관점은 인간의 본질 뿐 아니라 각 관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이 제기 된다. 답은 없고 질문만 생성되는 상황에서 저자는 중요한 질문들로 되돌아가보자고 제안하며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2. 생生의 의미에 대해
생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탐구에 초점을 맞춰 존 알렉산더 매케이의 ‘발코니와 길’과 C.S.루이스의 『 순례자의 귀향 』 을 예로 들면서 인간을 길 위에서 ‘큰 그림’을 찾는 순례자로 표현한다. 의미를 찾는 동물로서 ‘의미’란 것이 인간의 번영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종교와 과학 분야에서 이야기 한다. 종교에서는 인간에게 경험과 삶을 해석 할 ‘틀’을 제공하여 주므로 의미를 분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여 더 큰 무언가와 관계 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에서 의미의 문제에서는 제한된 지침만 줄 수 있다는 것을 19세기 이성의 시대를 통해 경험했다. 그러므로 ‘생의 의미’의 문제는 과학의 답변 능력을 넘어서는 질문이다. 또한 우리가 중요시하는 ‘사실’은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는 재해석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실’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지식의 소재로서의 ‘사실’이 해석되고 이해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이야기이다. 카를 융은 ‘인간의 경험과 행동의 기저가 되는 어떤 “보편적 심리구조”가 있다’고 했다. 한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 심리구조”를 형성하는데 이야기가 사용 되는데, 예를 들면 ‘신화’는 의미를 전달하고 이성에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창작해 낼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톨킨은 말한다.
우리가 장대한 이야기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에 참여 할 때 이다. 장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해석해 주는 의미의 틀이 되는데,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은 신봉자들이 그 이야기에 참여할 때 이야기의 진행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기독교의 이야기 안으로 내가 들어가겠다는 결단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잠시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다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며 ‘대안적 가설들’에 대해 말한다. ‘의미’라는 것을 인간이 조작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이 생긴 이유는 어떤 직관에 의해 신념이 먼저 채택되고 그 후에야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것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진지하게 보자고 한다. 그의 가설을 무시한다면 자신의 세계관이 그의 가설을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상상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파헤친다. 토마스 네이글의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그런 우주를 원치 않는다’는 글로 포이어바흐의 가설을 표현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편히 쉴수 없습니다.’ 문장으로 자신의 이론을 나타낸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욕망의 논리’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욕망은 하나님은 우리가 발견하고 만나야 할 분으로 만들며, 토마스 네이글의 경우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워줄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니체, 자크 데리다, 리처드 로티 등이 의미와 도덕은 자신의 기대에 따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자는 사회규범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기득권자에 의해서 조작되기 쉽다고 밝힌다. 결국 평가의 준거는 한 사회의 합의와 관행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가 만들어낸 준거로 우리가 만들어 낸 의미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의미에 대해서는 ‘객관적 근거가 있되 적용은 주관적으로’ 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미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의미를 이해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쇠렌 키에르케고르) 개인적으로 체험하므로, 인간이 진리와 만났을 때 내면이 변화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와 루이스의 주장이며, 저자 본인도 이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예로 든다. 이와 같이 생의 의미 혹은 목적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영역 내에 있지 않지만 찾으려고 하면 발견될 것이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존로크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신이 없다는 도킨스나 저자의 신념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발코니에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설명도 가능하고 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C.S.루이스의 『 고통의 문제 』 와 『 헤아려본 슬픔 』 을 예로 들면서 추상적 개념(신학)과 사실적 경험(경건)의 차이를 설명한다. 바로 이것이 발코니에 있는 것과 길 위에 있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인간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저자는 ‘세계의 의미’로 화두를 돌린다.
의미의 문제가 시작되는 곳은 호기심이다. 자연(세계)을 궁금해 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과학으로 가서 관찰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되어서 연구하다 보면 때로는 경이감을 잃게 되기도 하고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보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계시‘에 의해 우리의 이성이 보완 될 수 있다. ’계시‘는 우리 힘으로는 알아낼 수 없지만 우리의 현실을 납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큰 그림‘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을 창조하신 분의 아름다움까지 알수 있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고전적 개념이다. 도킨스와의 논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준다.
세계를 이야기 하면서 자연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시야를 우주로 돌린다. 우주의 기원과, 인간이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는가(편안한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주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암시한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시는 여행자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가 길에서도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살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향하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