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9. 2. 18

 

  사역 철학 과제물에 나열된 책들은 많은 흥미를 주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말고는 읽어본 책이 없었어서 비저니어링을 결정하기 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평소에 ‘전방향 리더쉽’을 생각하고  주장하던 터라 ‘CEO도 반한 평사원 리더’라는 제목도 유혹되었었다. 훈련한지 한달인데 그동안 내가 겪거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좋은 책들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 자주 감사가 된다.

 

  내가 섬기고 있는 Y대의 학생들은 한국어 책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기독 서적은 일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책을 구입할 때는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사게 된다. ‘소명’ (오스 기니스) 같은 경우는 나에게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클 것 같아 우선 구입했다. 이번 과제물로는 평소 느헤미야의 사역과 기도에 관심이 많았어서 비저니어링을 선택하게 되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34584

 

  의외의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 하나님께서 내 인격, 성품, 습관, 심지어 목소리 톤과 말의 속도, 걸음걸이 까지 세심하게 하나씩 고치고 계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훈련에 들어온 후에 잔잔한 폭풍이 일고 있다. Y에서 고치시던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깊이 뿌리내려 나도 인식하지 못 할 정도의 나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서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신다.

 

  지난 주중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한 – 내 나름 매우 성경적이고 예수님 닮은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기다리던 – 것들이 ‘틀렷어’라고 문제 제기가 되었다. ‘바꿔야 하나? 하나님 이게 제 고집이에요? 저는 경외함인 줄 알았는게 그게 자유하지 못한 건가요? 진정한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까요?’ 연이은 질문이 지난 목요일부터 계속되었고 난 계속 답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확정한 것 들인데 이렇게 칼이 대어진다면 –세상으로부터 온 화두 였다면 큰 고민이 안 되었을텐데..- 이거 고치라는 싸인이신가요?’ 정말 이렇게 편협하게(고쳐야 하는건가라는 생각)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을 다 뜯어 고쳐야 하는구나… 근데 어려운 거 아시죠?’

 

  문제(? 답?)는 비저니어링을 읽은 것이다. 특히 11장 ‘비판에 대응하기’에서는 ‘나의 예’들이 있었다. 주변의 말들에 비전을 품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포기했다. “스테파니는 그녀의 비전을 포기했다”, “크리스는 그의 비전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순간에 제니의 비전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책 읽은 것 만으로는 부족했을까?

 

  교수님과의 점심 식사자리에서 본인과 가족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의 기준기준 봤을 때) 멋져 보이고 많은 재정이 지원되는 안락하고 대우 받는 여러 자리들을 버리고 이곳 목동으로 오신 이야기를 들었다. ‘부르심’을 따른 교수님 가정의 이야기는 목록에서 사라지려는 내 기도의 제목들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아직까지 교수님 가정의 결정에 대한 의문을 계속 하나님께 제시하고 있지만..). ” 교수와 그 가족은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비판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은 기도하고, 비전의 원천이 어디인지 다시 기억하고, 계획을 보완했다. 계획이 실패할 때 비전을 재고해 보라고 했는데 나의 지난 한 주는 여러가지 상황과 대화속에서 ‘비전을 재고 해 봐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것 같다. ‘비저니어링’이라는 가이드 북과 함께…^^

 

  스테파니 같이 가정을 영적으로 이끌어갈 책임감 있고 성실한, 성숙한 인격의 그리스도인을 만나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이루길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가정의 샘플이 되고 싶다.(물론 나또한 지금 책임감있고 성실한, 성숙한 인격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라면, 성령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육체적 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 도덕적 성적 순결을 지켜갈 수 있다는 것을 – 이 것이 나의 상처에 기인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내 상처는 치유하시고 - 이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작게는 내가 속한 Y의 청년들에게, 내 주변의 외로워 하는 영혼들에게) 샘플로 보여주고 도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대면하여 만나러 가는 그때 “여디디야는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말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도덕적 권위’와 ‘불가해한 삶’은 자동적으로 따라 오게 되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물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 못하고 본능적으로 부도덕하고 가해한 삶을 여전히 살고 있지만 계속 훈련 중) “방해물”들이다.

 

  교수님과 그 가족이 잘 뚫고 나온 ‘기회’라는 방해물과 ‘밝혀 지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런 두려움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된다. 이 부분도 곧 손을 봐주실 것을 기대한다.)은 정말 내 안에서 믿음을 서서히 몰아내는 것 같다. 스테파니나 크리스 같이 눈에 보이는 상황은 없지만 나도 이 맛없는 ‘기회’들과, 가까이 할 가치가 없는 ‘두려움’들에게 “나는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고 의지적으로 큰 소리 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지난주에 문제로 떠올랐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하지만 ‘비저니어링’을 보면서 위의 2가지 비전을 다시 확인 한 것 처럼 그 남아 있는 부분도 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선교훈련에 1월에 들어오게 된 것, 이 책을 결정 하게 인도하신 것, 지난 주에 문제제기를 확실하게 하신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된 것이라는 것을 느끼며 계속 감사하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열심을 보며 내게 맡기신 비전들을 느헤미야처럼 일궈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산둥 수용소(랭던 길키)

 

‘왜 GMTC(한국선교훈련원)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안 한거지?’

내내 질문이었다.

나는 2009년에 GMTC 훈련을 받았고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다. 선교사,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을 꼭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지... 내가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읽기에는 아직 그릇이 안 됬었을 것일까... 그동안 선교지에서 했던 잘못들이 생각나면서 이 책을 읽고 갔다면 실수들을 좀 덜하고 나를 직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의도하지 않게 책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되뇌이고 하는 시간을 갖게 됬다. 마음속으로는 ‘산둥수용소’ 리플렉션을 참 많이 썼는데 기록 할수 없을 때 한 생각들이어서 좋은 글귀들은 다 사라진 듯 하다. 글귀는 사라져도 내용은 마음에 계속 남아있다. 이 책을 읽은 3주간이 또 나에게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다시 객관적으로 나를 자주 바라보는 연습에 노출된 시간이었다.

 

수용소 초반 저자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기에 종교도 가진자들의 여유일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과정은 내가 20대 때 재정적, 물질적 안정감이 없던 시절(생각해 보니 지적 안정감도 없었음), 깊이 고민했었던 과정이었고, 과학(?) 하는 사람으로서 “ ‘실질적인 것’(과학기술 개발, 물질적 필요의 채움)이 중요하지 왜 철학이 중요하다고 하지?”(실사구시, 중국 공산당이 강조하는 것인데 나의 20대 때는 공산당과 사고방식이 비슷했던 것 같다.) 하던 1차적 질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연길에서 10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또 다시 생존의 문제에 봉착했다. 40대가 되어서 다시 성장기 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이상학에 집중하지 않고 ‘부르심’에 집중했다. 나의 생존이 부르심과 연결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안에 존재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처리하는데 약 1년 정도 정리와 구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전에 얼떨결에 신학교에 왔다. 신학교에서의 2년,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연습이 재미있어 진다.

 

수용소에서 더 이상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하나의 사회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부분을 읽을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바라시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들이 있는데(부르심, 안정감있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부모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보다 돈을 잘 벌수 있는 일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red ocean이 생기고 사람들을 소유 가치로 평가하게 된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수용소 사람들은 힘들었겠지만 저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깊이 사유한 사람들은 수용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나 또한 (수용소 만큼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에 집중하려고 다시 한번 노력하면서 자유함을 경험했다.

 

수용소에서 시간이 오랠수록 사람들은 점점 책임이 많은 중요한 자리는 서로 피하려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버지 제가 거기 있었다면요?’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부르심’을 생각했었다. 부르심이 있다면 내가 잘못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수용소 초반에 수녀들과 수도사들을 위주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내가 해야 할 일과 있을 곳을 알게 된다.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화장실 청소를 했을까? 수용소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초기 화장실 작업, 만약 나 혼자라면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말미에 식당이나 행정을 책임지는 일의 경우나 에릭 리들처럼 청소년들을 상대로 사역해야 하는 일들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 한 두명만 주셔도 아버지 뜻이라 생각하고 쉽게 순종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평가하며 그곳의 선교사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자주 ‘내가 지금 거기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수용소 안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타인을 수용할수 있으며, 얼마나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나? 나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만 무게를(가치) 둘 수 있는가?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상황에서의 나의 반응을 계속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길키가 평가하던 선교사들과 내가 다름이 없음을 여러 번 하나님께 회개했다. 어쩌면 그들처럼 나도 하나님의 뜻과 바램, 인류의 공영, 나의 존재의 이유 보다 지금 나의 안위와 내 배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신 지적능력과 언변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격상, 직업상, 강의 시간에 절대 집중한다. 때로 강의 시간에 컴을 쓰시는 분들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가 거슬릴 때가 있다. 짜증이 난다. 그래도 미워하면 안되니깐, 그런데 궁금하니깐 무슨 작업하나 쳐다보면 모니터는 강의와 상관없는 내용들이 있을 때가 있다. 1학년 1학기 때 그 부분을 넘어 가는게 힘들었다. ‘다들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왜 다른 사람(교수님)을 무시하지? 왜 속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들이 불쌍해 보이고 안되 보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음이 평안하다. (시끄러워서 짜증나는 건 압지께 풀고..) 내가 그분들을 정죄한다면 또 수용소의 선교사가 한명 늘어나는 것이 된다.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더 사랑해야 하겠다.

 

책을 읽던 중 나보다 어린 싱글 사역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첫째 나는 질문한 친구보다 정서적으로 외로움을 덜 타는 기질인 것을 솔직히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봉착해 있어서 감정이나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개발되지 않은 것이 나의 단점이자 강점이다.

둘째,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중보기도’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청중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긴장 하고 있는 내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왜 긴장하고 있지? 그냥 내가 하는 기도를 안내 하는건데?’ 하나님 앞에 머물러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청중들 때문에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정리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 여디디야’였다. 내가 한사람 앞에서 강의하건 만명 앞에서 강의하건 나는 ‘지금’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편한 부분이 없다면 내가 떨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그래서 강의 준비를 진짜 열심히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요즘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과 영성을 다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전문성과 영성이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 있으나 만명앞에 있으나 하나님앞에 한사람인 것 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책의 끝부분을 읽었다.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에야 모든 것(자신의 안위/복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이기심, 안정감, 타인과의 비교)에 초월하여 평안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나의 삶이 현재 ‘하나님 안에서 살기’ 연습을 하고 있는 시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완전 몸으로 체득되고 저자와 둘이 논쟁을 벌이 듯 읽었다. 책을 아껴서 읽는 편인데 이번 책은 저자와의 논쟁으로 깨끗하게 읽지 못했지만 자주 읽어야 할 인생 책을 만난 것 같아 감사하다.

 

수용소에서 모두가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할 때 (잠시) 평안이 임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떠오르는 부분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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