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6장 자기 비움의 훈련

 

 

나에게 금식은 회개와 자아 죽이기(음성듣기, 하나님께 집중하기)의 의미가 컸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책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금식 명령이라 해석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셨던 것이 자기 능력의 금식이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금식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는 것인, 금식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또 새벽 2시이다. 밤 늦게 까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부터 인가 늦게 까지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최근 두주 월요일이면 밤 늦게 까지 과제를 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사실 오늘 밤도 미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믿음으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잠을 이길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인정 때문이 아니라, 내 편의를 위해 자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의지력이 없어진 내가 이해가 안되면서도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교지에서는 일이나 수업준비를 안하고 ‘그럼 저 잘 테니깐 책임지세요’하고 자버린 후에, 정말 하나님이 자주 책임져 주셨던 기억이 많은데, 한국에 와서는 자버리고 나서 결과가 안좋았다. 특히 히브리어 수업시간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약 이주 전 부터 나에게 연구 과제로 떠오른 주제는 ‘나르시즘’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의 행복과는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사랑’에 근거한 욕심과는 구분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도 정리가 되질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는 심리학의 나르시즘 검사도 받아 봤는데 그것은 그리 관련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사람들이 창조물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제기했다. 그런데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정말 금욕하고 불편하게 산 사람들에게 은혜가 컸다. 그것도 계속 여쭤보고 있다.

 

나의 목표는

특별하게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누리는게 아닌

일상에서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초기 기독교의 영성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처럼 금욕하고 고생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일반인 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게 아닐까?

 

몇 년간의 나를 관찰해보면, 너무 속상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sign과 내가 바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에서 핀트가 안 맞는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일부 있는데 이것인가 저것인가 주저하다 추진하면, 이게 아니고 저것인 경우들이 있었다.

 

최근 분석 결과,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강한 ‘자기사랑’ 이었다.

 

나의 나르시즘 문제를 후배에게 말했더니 나도 나르시즘이 있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나도 모르게 가면을 강하게 쓰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 나를 너무 아끼고 있는 부분들을 점검하고 있다. (너무 많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을 미루고 잔다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자고 싶은 욕심의 가면일까….

 

토요일에 영화 ‘오두막’을 보고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을 정말 존중하시는 분이고,

나를 징계한적이 없으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존감이 확 올라간 것 같았다.

 

그 덕에 아버지께 더 당당하게 여쭤볼 수 있었다.

주일 예배 전에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이 있어서 커피숍에 앉아서 아버지께 물어 봤다.

 

‘왜 나랑 아버지랑 중요한데서 핀트가 안 맞아요?

항상 같이 있으면 서로 마음을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섭섭하다구요…’

집중하고 있는데 음악소리가 들렸다.  

 

“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제4장 성령안에 모임 & 5장 안식일 되찾기

 

나는 사람들과 함께 만날 때 에너지가 있고 밝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Y대에 있었던 시간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한국에서 보다 많이 확보 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당시 공중 예배에서 지금 손을 들어야 할 것 같을 때 성령님께 순종하기 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부분이 컸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메조리 톰슨. <영성형성 훈련의 이론과 실천>. 최대형 역. 은성.

 

Y대에 있는 동안 말씀을 보던 시간이 기도가 되고,

기도로 머물렀던 시간이 예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손에서 두손으로,

두손에서

(요즘에는 앉아서 기도하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요즘은 혼자 예배에서 벌떡 일어나던 것이 공중 예배에서도 벌떡 일어나게 되어서 자리를 잡을 때 구석으로 잡거나 일어나기 편한 맨 뒷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처음 두손을 들게 됬던 때는 여러가지로 힘든 상황이었다.  H* 선교회(소속 선교회) 총회로 모임 중에 찬양을 하는데 ‘왕께 만세’를 불렀다. 그때 찬양을 하면서 만세의 의미를 알았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해요.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 이후로 만세가 쉬워졌다. 경배와 찬양의 의미의 만세도 있지만 힘든 시기에 두 손을 들게 되면서 경배의 손들기도 당연히 쉬워졌 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중요성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청년 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들의 믿음의 야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예배가 힘든 이 땅에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 인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전에 당연히 여겨졌던 성경공부도 다양한 영적 모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배 전에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도 중요하고 예배 후에 각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나누고 간증하므로 자신과 타인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는 시간도 중요하다. 

 

공동체에서의 나눔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견고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핸드폰을 이유없이 만지작거릴 시간은 있지만 이러한 모임을 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지난 금요일에 담임 목사님과 면담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말씀에 노출되어 있는 나는 주일 예배 때 부어주시는 은혜가 많다. 하지만 같은 예배이지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담임 목사님은 주중의 시간이 주일 예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말씀을 해 주셨고 책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 부분은 회중이나 인도자나,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새벽 2시이다. 마지막으로 5장 안식일 되찾기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Y대 졸업생 중 대부분이 대학원 생인 관계로 그들이 늦게까지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을 찾으라는 말을 했으면서 지난주는 내가 그렇게 못 살았다.

 

매 순간 아버지께 물어 보며 스케줄을 잡는데, 자기를 꼭 만나는 것이 선교사로서 맞는 것이라는 투의 후배의 말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저 끌려가듯이 만났는데,  5장을 읽으며 그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시간에 많이 쫓겨 살았다.

그만큼 내 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Y대를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며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학습해 주셨다.

 

한국에 와서도 강의 준비를 하는데 기름 부으심이 없어서 ‘왜 그런 가요’ 물어보며 억지로 강의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수강변경으로 강의를 안해도 되는 날이었고 결국 오랜 시간 고생해서 만든 강의안은 그날 필요하지 않았다.

 

만남도, 공부도, 강의도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헛고생이라는 교훈을 또 얻었다.

이 교훈을 너무 자주 배우는 건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 듯싶다.

 

지난 약 3-4년 동안 이루어 주시 길 간구했던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 하여라. …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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