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고상한 욕망_지라르의 렌즈로 본회퍼를 읽다. (이경희)

★ 아래의 내용은  <백투더 클래식> 14장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갈망 살펴보기

르네 지라르의 이론은 타인의 욕망이나 소유를 모방해서 자신도 욕망하는 모방 욕망이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주류가 되는 것이 희생양을 만들어 갈등을 해소 하는 구조에 대해서 말한다.

 

히브리어 어원의 ‘인간’에서 인간이 욕망의 존재이고 그 욕망을 억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욕망을 사용(?) 하도록 하는 헨리 나우웬과 본 회퍼의 이야기로 모방 욕망 보다 자신의 욕망을 바로 보도록,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욕망하도록 권고한다.

 

권혁일 엮음. <백투더 클래식>. 예수전도단

 

아.. 고난에 동참하는 욕망.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교회 사임의 과정이었는데, 결국 시점 등이 문제가 되어 예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은 잘 모르겠고, 여러 가지 상채기 들과 오해들을 남기게 되었다.

 

의에서는 이론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갈망은 무얼까’에 집중하게 된다. 나의 게으름 때문인가, 젊을 때 너무 뛰어다녀서인가...내 갈망의 초점이 ‘하나님과 머물기’로 모아진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사역해야 한다고 한다.(여기서 '사역'이란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육부서에서 일하는 것으로 제한된 의미이다.)  과연 내가 해야 한다는 사역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인가 ‘나의 입신과 세속적 영달을’ 추구하는 걸까.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들로 나의 시간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며칠 전 지인의 지인이 자살했다는 소식, 여전히 전쟁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우크라이나 국민들...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어 아버지와 함께 동역하고 싶은데, 한국 교회의 틀에 나를 ‘맞춰’ 넣으라는 말들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혹시 내 욕망이 내 게으름에서 발로한 건가 싶어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갈망, 기질... 방법.. 인간론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나의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의 복잡 미묘한, 다양한 부분을 프레임화 할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체계나 교회에서 조차 각자의 부르심을 개발하기 보다 프레임 안에 넣으려고 한다.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불편하고 불안하니깐... 각자 부르심을 향한 개인의 갈망을 교회 공동체라는 프레임 안에서 조절하려는 건 아닐까....생각해 보게 되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

다시 교회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코로나가 50100명만 넘어도 온 나라가 난리 였는데 지금은 수천, 수 만명이 발생하는데 교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에게 왜 그런 격리의 상황들이 있었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다시 교회들이 문을 여는 이때, 나는 부활절을 기준으로 예배와 공동체에 대해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경희. 멈춤. 동연.

 

마음의 태도.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그 마음의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함을 멈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윗이 궤를 옮겨 오려고 했던 것도(그래서 웃사의 죽음에 하나님께 감히 분을 내었던 것도..), 모방 욕망으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추구하는 것도, 교회에 지체들을 미워하면서도 교회봉사에 열심인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를 직면하여 보는 광야의 시간 없이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있는데 멈춰 있을 때는 달리지 못해서 불안해 하고, 다시 달릴 수 있을 때는 생각 없이 뛴다. 깊은 호흡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모든 것을 멈출 때 욕망이 아닌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는데.... 성령께 내어드릴 시간이 없다.

 

성공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제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쁘고 급할수록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려

상황의 주인 되신 분께,

그리고

이 상황을 허락하신 분께

마음과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최대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 이겨내야 하는게 우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사는 사람을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수가 옳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전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사는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해진다. 모교회 담임목사님이 40일 금식을 하셨다. 금식 전에 금식을 계획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금식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모임 제한도 풀린 이 시점에 담임 목사님은 더욱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전처럼 어렵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광야에서 사선의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결과이다. 40일의 금식을 통한 경험으로, 일상에서도 생명의 매순간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긴 금식의 결과 매순간, 일상에서의 예배(‘라트레이아의 예배’, 23)가 회복되어 코로나가 풀렸다고 달려나가는 다른 교회들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달리지 않고 세대를 거슬러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며 기다릴 용기와 믿음이 생겼다. 멈출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의식성찰

또한 멈추어야 내 갈망의 기저를 볼 수 있다. 333의 의식성찰 시간은 무언가 이루기 위함이아니라 내 마음을 잘 살펴 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시간이다. 혼인 잔치집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저 상황을 말씀드리듯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버지께 그저 말씀드리고 아버지 손에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손에 들려 드렸을 때에 그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와 닿았고, 예화와 말씀 풀이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두 번째 읽었는데도 또 와 닿았다. 르네지라르의 이론과 다윗의 삼하 11-12장의 내용은 이미 수업을 통해 들었어서 더 풍성했다. 슈필라움(자기 틀)에서 스피리추얼 라움(영적자리), 새날을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날인 어둔 밤으로, 길도 물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광야의 자리로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수시로 돌아가는 깊은 호흡의 매일을 삶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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