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서 본 스데반의 순교와 신화 비교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2.1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2.2 스데반의 순교와 신화 비교
 
Ⅲ. 나가는 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페스트를 퇴치하는 아폴로니우스의 투석 이야기와 비교하여, 사도행전 6-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순교를 본 논문의 배경으로 하고자 한다.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서(6:7) 스데반이 자신들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유대 역사의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7:51-53), 그것에 마음이 찔려 분노하여(7:54) 스데반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3의 길인 자신을 ‘모든 것을 알고 죽는 희생’ (Intelligent victim)에 내어 드림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를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주제어 : 르네 지라르, 모방욕망, 희생양, 신화, 예수 그리스도, 스데반

 

. 들어가는 말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이론으로 스데반의 순교 상황을 보고자한다. 르네 지라르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필로스트라토스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를 소개하며 아폴로니우스가 죄 없는 거지를 에페소스 시민들이 투석함으로 페스트를 퇴치하는 사례를 보인다. 성경 안에서 동일한 투석 상황인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신화와는 다르게 복음이 모방 욕망을 극복한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7절에서 보면,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의 반열에 자기들의 세력인 제사장들 까지 합류하면서, 유대 사회에서 자신들의 안정권의 기반인, 성전과 회당 체제에 영향이 있을 것을 예측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스데반이 성령으로 말함을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6:10) 그가 유대 역사의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 그것에 마음이 찔려 분노하여(7:54) 공회라는 이름으로 집단 폭력 한다. 여기서 스데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3의 길인 자신을 모든 것을 알고 죽는 희생 (Intelligent victim)에 내어 드림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스데반의 사건은 르네 지라르 모방 욕망의 삼각형이론에 근거해 볼 때 유대 근본주의자들주체가 되고, 매개자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대상은 유대사회에서의 기득권과 인기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유대 근본 주의자들은 로마치하의 이스라엘 상황에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사회의 안정이라는 핑계로 그리스도인들을 사회에서 처단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에 서 있던 스데반은 유대 근본주의자들에게 희생양으로 적절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모든 상황을 알면서(7:55-56)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7:60) 죽음을 맞이한다. 다른 문학에서와 같이 희생양 이후의 폭력의 악순환이나 신화화가 아닌 공동체를 살리는 죽음이 된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자리에, 이후에 바울이 될 사울이 있었다고 밝힌다.(7:58)

본 논문에서는 먼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 대해 알아보고, 스데반의 죽음이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관점에서 일어난 일인지 고찰해 본 후, 아폴로니우스의 투석 상황과 비교해 보므로 둘 사이의 차이점으로 신화와 복음의 차이점을 살펴 본다.

 

. 본론

2.1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문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종교학 뿐 아니라 신학과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르네 지라르는 1972폭력과 성스러움출판 전까지는 문학 비평에 집중하다가 그 후부터 철학, 신학 등을 연구하였다. 인간 사회의 폭력 문제에 대한 답을 구약과 신약에서 찾게 되면서 그 자신이 회의주의적 무신론자에서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에 의하면 원시 사회에서부터 인류는 폭력과 연결되어 왔다. 인간 심리 깊은 곳의 모방 동기와 그로 인한 모방 갈등을 폭력의 원인으로 본다. 사람들은 특정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직접적이며 자발적인 욕망이란 없다. 지라르는 이러한 관계를 욕망의 삼각형으로 표현한다. 욕망하는 자기, 욕망의 대상인 타인, 매개된 욕망이다. 자기(모방자)와 타인(피모방자)의 차이가 현저히 나는 경우 둘 사이는 구별되고 사회 질서는 체계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모방자가 피모방자를 완전히 모방하여 둘이 동등하게 되면 짝패(double)가 되어 갈등과 투쟁으로 사회의 질서가 깨지면서, 공동체가 위험에 휩싸이게 된다. 짝패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사회 질서의 붕괴로,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원시사회에서는 희생제의를 만들었다. 힘의 균형이 팽팽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투쟁의 상태에서 공동체는 지배 문화와 다르면서, 비난을 피해갈수 없는 무력한 경계선의 사람, 이방인, 힘없는 자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인 희생양(scapegoat)으로 만든다. 이렇게 공동체의 폭력적 욕구가 한 희생자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희생 기제(the surrogate victim mechanism)라고 부른다.

 

...이 희생양을 매개로 하여 사탄은 사탄을 물리친다.
사탄은 희생양 매커니즘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은 또한 인류 문화를 지배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이 바로 이 살해에 있기 때문이다.
카인의 문화뿐 아니라 모든 인류 문화의 기원에는
결국 악마, 달리 말하면 나쁜 모방이 있다.

-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116.-


이러한 희생양 기제 뒤에는 나쁜 모방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라르는 그것을 악마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집단 폭력의 희생양을 은폐하기 위해 신화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러한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고 희생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을 지라르는 발견하고, ”복음서는 신화의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모든 종교들과 문화의 기원은 감추어져 있는 모방 폭력에 기반 하지만, 성서는 신화들 처럼 살인자들이 나오지만 신화에서처럼 그들의 범죄가 정당화 되지 않고 그들의 죄를 명백히 밝힌다. 이러한 위대한 문학 작품인 성서가 자신을 기독교로 회심하게 만들었다고 지라르는 고백한다. 지라르의 실존적 신앙 고백으로 인해 인문학계에 데리다와 라깡 같은 철학자들 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원시 문명부터 자본주의 사회까지 연구범위가 광범위하다. 지라르 이론을 통해 유럽 철학계의 바티모, 아감벤, 지젝등의 철학자들이 기독교와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지젝이나 바티모 등은 지라르를 통해, 기독교와 자신의 철학 사이 대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지라르는 이렇게 인류학이 신학에까지 확대되는 것은 신학자들이 복음서의 인류학 영역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 스데반의 순교와 신화 비교

스데반의 순교의 나레이션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많아지므로 인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리할 일곱 명을 뽑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점점 많아지고 있고(6:1, 7), 더욱이 제사장들 까지도 예수의 도에 복종하고 있다. 더불어 일곱 명 중에 한명인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서 행하고 있다.(6:8)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할 경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당하지 못하여 이기는 사람이 없기 까지 했다.(6:10) 이러한 배경에서 결국 스데반은 공회라는 이름으로 투석 당한다.(7:60) 스데반은 왜 죽었을까? 스데반의 죽음의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 6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배경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도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유대 지배계급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고, 스데반의 경우도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그들에 의해 대제사장 앞에 끌려와 있다.(7:1) 예수님도 스데반도 공회에 잡히는 과정이 거짓 증거에 근거했다.(6:1-13) 그리고 예수님도 스데반도 죽음 앞에서 도리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있다.(7:60)

 

지라르는 예수님의 죽음이 모방 욕망에 의한 희생적 죽음이지만 희생양 기제를 끊기 위한 순전한 희생양이라고 해석한다. 스데반의 경우도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이론에 따라가 보자.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늘어나 자신들의 안위와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분위기가 위협받을 것을 불안 해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 계급들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증가하여 회당에서 자신들이 아닌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용납 할 수 없었다. 유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안정감과 인기를 위해서 라이벌인 예수의 제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예수를 처리할 때처럼, 거짓말을 해서라도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스데반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삼각형 구도에 욕망하는 자기는 유대지도자들이었고 욕망의 대상인 피모방자는 예수의 제자들이었으며, 매개된 욕망은 예루살렘에서의 인기와 안정된 기득권이었다. 여기에서 예수의 제자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인기에 위협을 느낀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예루살렘 사회의 안정을 위해 회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스데반을 희생양으로 선택한다. 스데반은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7:52)라며 지라르가 말하는 역사에서 반복되다가 예수님까지 살인한 유대 지도자들의 희생양 기제를 밝힌다. 십자가의 승리는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완전한 포기의 결과다.... 이 정도로 예수는 전면적으로 폭력을 포기한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스데반 또한 그들의 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의 사함을 구하며(7:60)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을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 근거한 죽음으로 볼 때, 여기서 한 가지 신화와 비교해 볼 사례가 있다.

 

2세기경 유명한 정신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가 에페소스에서 페스트를 퇴치한 과정을 소개한 책인 필로스트라토스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가 있다. 에페소스에서 페스트가 창궐하고 막을 방법이 없자 유명한 아폴로니우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폴로니우스는 에페소스 사람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 거지 한명이 장님처럼 눈을 껌벅이며 빵 부스러기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아폴로니우스는 거지를 신의 적이라며 거지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고 에페소스 사람들은 자선을 구하는 애처로운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인다는 것에 분노하며 아폴로니우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 이냐고 반문했다. 아폴로니우스는 거지가 모든 신의 적이니 돌을 던지라고 사람들을 몰아붙였고 몇 사람이 거지에게 돌을 던지자 돌을 맞은 거지가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날카롭게 쳐다 보았다. 그 눈을 보고서야 에페소스 사람들은 거지가 악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돌을 던져 거지는 돌 무더기에 쌓이고 그 자리에 수호신의 흉상을 세워주게 된다. 사람을 돌로 죽이는 투석형은 고대 그리스의 오래된 종교 관습인 파르마코스(속죄양)’ 희생양 제의이다. 스데반도 거지도 사회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투석형을 당했다. 신화에서는 가해자들의 입장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석하고 신상을 세웠지만, 성경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스데반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 무고하게 죽었음을 밝힌다.(6:11-13)

철저하게 폭력을 포기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천년이 넘게 생존해 있고, 철저하게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7:56) 스데반의 죽음 바로 앞에 기독교의 이방인 전도의 사도가 될 바울이 있었다.

 

. 나가는 말

스데반의 순교 상황을 분석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이 르네 지라르가 주창한 모방 욕망에 근거한 사건이었는지 고찰하고, 신화적 모방 욕망과 스데반의 순교를 비교했다.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아폴로니우스의 거지도 스데반도 동일하게 모방 욕망의 삼각형 구도 안에서 투석 당했다. 마찬가지로 지라르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모방 욕망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가해자 입장에서 기술되는 신화 읽기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진실을 밝혀 내므로 모방 욕망을 끊어내는 것으로 신화와 복음의 차이점을 읽어 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희생이 아닌, 제의로 읽어낸 서구문화는 기독교를 신화로 만들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 하므로, 기독교 서구문화가 제국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예수님을 철저한 비폭력주의라고 고집하는 경우나, 폭력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 등 지라르의 이론에서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부분들도 있지만 그가 분석한 대로 대부분의 문화와 신화들이 모방 욕망에 뿌리를 두고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계속해서 모방 욕망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짝패가 팽팽해져 무질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회가 동의하는 모방적 만장일치를 통한 희생양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 이다. 예수님을 통해 이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에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폭력을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자발적 희생의 자리에 섬으로 사회에서의 모방 폭력을 드러낼 수 있을까. ‘모방적 만장일치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혼자 옳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폴로니우스의 거지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드는 것이 아닌, 스데반처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진실을 밝히며 희생을 선택 할 수 있을까...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역사 가까이에 있는 김구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자주 국가로 세워지기를 주장했고 미국에도 소련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누군가 타협하지 않고 옳은 것을 고수하고 싸워야 할 것 같은 상황에 김구 선생님은 미국과 소련의 등을 업고(짝패형성) 국가를 세우려는 지인에게 자신의 죽음을 허락한다. 예수님 같은 자발적 희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꿈이 아직 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문화 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의 바램 대로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 아시안 증오범죄 퇴치와 관련하여 백악관에서 바이든과 BTS가 만나는 현시점에 김구 선생님의 희생적 죽음을 생각해 본다. 민족끼리 싸우지 말자고 했던 김구 선생님이 자기민족에게 죽음을 당했으나, 김구 선생님의 문화 선진국의 꿈을 기억하며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2022, 한국의 젊은이 들이 있다.

 

 

참고문헌

 

[일차자료]

지라르, 르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이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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