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깨운다 (옥한흠)

오정현 목사님이나 강준민 목사님의 문체는 어릴 때부터 읽어서 그런지 대단히 익숙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좀 불편함이 있었다. 옥한흠 목사님 저서를 처음 읽는 이유도 있겠지만 오래된 책들 같은 경우 많이 재편집해서 내는데 오래된 문체나 표현 방식이 나에게 불편했던 걸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기록한 것을 훑어보면서 때로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이 불편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으니 불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편협함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었을 상황들이 생각났다. ‘편협’ 말고도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을 살폈다.

 

모든 저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근거자료를 들이댄다. 저자도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근거로 정리하고 많은 자료들을 보였는데 왜 나는 불편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 반론도 참 많았고, 의문도 참 많았다. 동의도 많았는데 전자가 더 많았서 그런지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있다. 이 글도 일주일이 지나면서 계속 퇴고 하고 있다.

 

평신도와 목회자를 평민과 귀족(?) 같은 개념으로 자꾸 나누는 부분들이 생각났고, 훈련 노하우 및 여러 가지 방법론을 설명한 곳에서 기도하고 구하는 솔루션은 하나도 없고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인본주의 적인 방법들을 제시하신 것 같았다.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선배님을 너무 비평하며 읽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방법들은 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안 먹히는 방법이다.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약간 비인격적(?, 그시대에는 맞았겠지만..)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불편했다. 그리고 자꾸 ‘인본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었다. 그래서 또 불편했다. 존경하고 싶은 분에게서 자꾸 안좋은 부분을 보게 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한국교회가 부흥을 하던 시기에 한국 교회를 비판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단하는 건강한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잘하고 있을 때 자아비판 하기는 힘드니깐. 물론 책에서 진단한 문제점은 지금도 여전히 문제인 것 같다. 1980년대 책이 쓰여지고 나서 지금까지 3허-허수, 허세(교인 많은데 세상에 영향력이 없음), 허상(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아 불신자와 구별이 없음)-는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허상 부분을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했다. 허세와 허상을 전체 크리스찬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고 평신도의 문제로 국한한 것이 불편한 마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읽는 내내 자꾸 마음에서 반론이 올라와서 책 읽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동의되는 책은 속도가 엄청 빠른데 한 달을 다 되어 가도록 3부 초반 까지 밖에 못 읽었었다. 4부는 실전의 이야기라(여전히 반론이 일어나는 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속도가 빨라져서 다행이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훑을 뿐 아니라 ‘제자도’의 정당성과 ‘평신도’에 초점 맞추기 위해 초대교회의 설명들이 있었다. 그런데 적용 부분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이 (특별히 목회자가, 그리고 평신도 리더가) 노력해야한다는 강조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불편했고 물음표를 날렸다. 살아계시다면 마나서 여쭤볼텐데..

 

교회의 존재 이유를 예배라고 정의함은 다른 수업에서도 계속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제자훈련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평신도가 날마다 사회에서 성과속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을 가르치는 것” 이라고 쓰셨는데 사실상 책의 내용에서는 ‘사회에서... 제사장으로의 소명’을 수행하는 부분보다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교회의 봉사자를 키우기 위한 제자훈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가 되고, 정말 크리스찬들이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 원하며, 인격이 예수님 닮도록 한다는 취지와 다른 결과들이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앞 세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리더를 너무 중요시한 리더 중심의 교육이었다.

 

책 읽는 내내 내가 연변에서 하던 TEE 성경공부가 생각났다. 물론 리더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모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선생님이 되고 학생이 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위해 기도 하게 되며,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모임이 TEE였다. 저자가 말한 제자 훈련과의 차이점은 목회자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옥목사님이 살아계시다면 기도하며 훈련하고 훈련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개정판을 내시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부분은 시대적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부정적 발언에 마음 상하는 분이 없기를...^^

산둥 수용소(랭던 길키)

 

‘왜 GMTC(한국선교훈련원)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안 한거지?’

내내 질문이었다.

나는 2009년에 GMTC 훈련을 받았고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다. 선교사,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을 꼭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지... 내가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읽기에는 아직 그릇이 안 됬었을 것일까... 그동안 선교지에서 했던 잘못들이 생각나면서 이 책을 읽고 갔다면 실수들을 좀 덜하고 나를 직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의도하지 않게 책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되뇌이고 하는 시간을 갖게 됬다. 마음속으로는 ‘산둥수용소’ 리플렉션을 참 많이 썼는데 기록 할수 없을 때 한 생각들이어서 좋은 글귀들은 다 사라진 듯 하다. 글귀는 사라져도 내용은 마음에 계속 남아있다. 이 책을 읽은 3주간이 또 나에게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다시 객관적으로 나를 자주 바라보는 연습에 노출된 시간이었다.

 

수용소 초반 저자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기에 종교도 가진자들의 여유일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과정은 내가 20대 때 재정적, 물질적 안정감이 없던 시절(생각해 보니 지적 안정감도 없었음), 깊이 고민했었던 과정이었고, 과학(?) 하는 사람으로서 “ ‘실질적인 것’(과학기술 개발, 물질적 필요의 채움)이 중요하지 왜 철학이 중요하다고 하지?”(실사구시, 중국 공산당이 강조하는 것인데 나의 20대 때는 공산당과 사고방식이 비슷했던 것 같다.) 하던 1차적 질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연길에서 10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또 다시 생존의 문제에 봉착했다. 40대가 되어서 다시 성장기 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이상학에 집중하지 않고 ‘부르심’에 집중했다. 나의 생존이 부르심과 연결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안에 존재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처리하는데 약 1년 정도 정리와 구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전에 얼떨결에 신학교에 왔다. 신학교에서의 2년,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연습이 재미있어 진다.

 

수용소에서 더 이상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하나의 사회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부분을 읽을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바라시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들이 있는데(부르심, 안정감있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부모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보다 돈을 잘 벌수 있는 일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red ocean이 생기고 사람들을 소유 가치로 평가하게 된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수용소 사람들은 힘들었겠지만 저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깊이 사유한 사람들은 수용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나 또한 (수용소 만큼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에 집중하려고 다시 한번 노력하면서 자유함을 경험했다.

 

수용소에서 시간이 오랠수록 사람들은 점점 책임이 많은 중요한 자리는 서로 피하려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버지 제가 거기 있었다면요?’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부르심’을 생각했었다. 부르심이 있다면 내가 잘못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수용소 초반에 수녀들과 수도사들을 위주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머물 때 내가 해야 할 일과 있을 곳을 알게 된다. 과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화장실 청소를 했을까? 수용소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초기 화장실 작업, 만약 나 혼자라면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말미에 식당이나 행정을 책임지는 일의 경우나 에릭 리들처럼 청소년들을 상대로 사역해야 하는 일들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 한 두명만 주셔도 아버지 뜻이라 생각하고 쉽게 순종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평가하며 그곳의 선교사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자주 ‘내가 지금 거기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수용소 안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타인을 수용할수 있으며, 얼마나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나? 나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만 무게를(가치) 둘 수 있는가?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상황에서의 나의 반응을 계속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길키가 평가하던 선교사들과 내가 다름이 없음을 여러 번 하나님께 회개했다. 어쩌면 그들처럼 나도 하나님의 뜻과 바램, 인류의 공영, 나의 존재의 이유 보다 지금 나의 안위와 내 배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신 지적능력과 언변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격상, 직업상, 강의 시간에 절대 집중한다. 때로 강의 시간에 컴을 쓰시는 분들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가 거슬릴 때가 있다. 짜증이 난다. 그래도 미워하면 안되니깐, 그런데 궁금하니깐 무슨 작업하나 쳐다보면 모니터는 강의와 상관없는 내용들이 있을 때가 있다. 1학년 1학기 때 그 부분을 넘어 가는게 힘들었다. ‘다들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왜 다른 사람(교수님)을 무시하지? 왜 속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들이 불쌍해 보이고 안되 보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음이 평안하다. (시끄러워서 짜증나는 건 압지께 풀고..) 내가 그분들을 정죄한다면 또 수용소의 선교사가 한명 늘어나는 것이 된다.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더 사랑해야 하겠다.

 

책을 읽던 중 나보다 어린 싱글 사역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첫째 나는 질문한 친구보다 정서적으로 외로움을 덜 타는 기질인 것을 솔직히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생존’의 문제에 봉착해 있어서 감정이나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개발되지 않은 것이 나의 단점이자 강점이다.

둘째,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중보기도’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청중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긴장 하고 있는 내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왜 긴장하고 있지? 그냥 내가 하는 기도를 안내 하는건데?’ 하나님 앞에 머물러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청중들 때문에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정리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 여디디야’였다. 내가 한사람 앞에서 강의하건 만명 앞에서 강의하건 나는 ‘지금’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편한 부분이 없다면 내가 떨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그래서 강의 준비를 진짜 열심히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요즘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과 영성을 다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전문성과 영성이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 있으나 만명앞에 있으나 하나님앞에 한사람인 것 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책의 끝부분을 읽었다.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에야 모든 것(자신의 안위/복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이기심, 안정감, 타인과의 비교)에 초월하여 평안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나의 삶이 현재 ‘하나님 안에서 살기’ 연습을 하고 있는 시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완전 몸으로 체득되고 저자와 둘이 논쟁을 벌이 듯 읽었다. 책을 아껴서 읽는 편인데 이번 책은 저자와의 논쟁으로 깨끗하게 읽지 못했지만 자주 읽어야 할 인생 책을 만난 것 같아 감사하다.

 

수용소에서 모두가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할 때 (잠시) 평안이 임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떠오르는 부분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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