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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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2 경교의 기원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3.2 원나라 때의 경교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4.2 원나라 때의 경교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5.2 외부적 원인

6. 마치는 말

7. 참고도서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845년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으로 불교를 탄압할 뿐 아니라 세 종류의 오랑케 종교인 이슬람, 조로아스트교, 네스토리안을 강제로 환속 했다. 기독교인은 대략 2천 여명의 사제를 환속시키고 불교는 약 26만의 불승을 강제로 환속했다. 이후 878년 황소의 난 때는 많이 목숨을 잃었다. 네스토리안은 대략 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송나라로 이어지면서 중국인들이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회복의 일환으로 ‘고유 종교 부흥운동’을 함으로 외래 종교를 소멸시킨 이유도 있었다. 더불어 750년 이후 해양 실크로드의 주도권이 이슬람에게 넘어가면서 수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네스토리안의 교세는 줄고 이슬람이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독교내 외세의 지원도 줄어들면서 네스토리안은 점차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타슈켄트 동북쪽의 이시크 쿨 호수에서 600여개의 네스토리안 비석들이 발견 되므로 네스토리안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향했을 것으로 예상 된다. 여기에는 시리아어로 씌어진 것으로부터 투르크어 까지 858년부터 1345년까지의 네스토리안 기독교 정보를 발견 할 수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초기의 네스토리안 공동체는 시리아어를 사용하다가 소그드어를 사용하고 점차적으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사무엘 H. 마펫, 김인수 역, 『아시아 기독교회사』,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4.2 원나라 때의 경교

  원나라때 경교가 다시 활발해 진 이유 중에 하나는 몽골제국과 원나라가 모든 종교에 관용정책을 편 이유도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쫓겨나서 중앙 아시아에서 생명력을 키운 경교가 원나라와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모든 종교에 관대 했기 때문에 원나라 세조 이후에 티벳의 라마 불교가 중국에 영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지배 종교로 정착되었다.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상기의 자료와 시리아 교회의 선교 방법을 보면 계속해서 시리아 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중국내에서 외래 종교로 남아서 토착화 되지 못한 것이 경교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로 크게 손꼽힌다. 또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내용에서 보았을 때 타종교의 요소들이 너무 많이 침입되었다. 물론 초기 번역자들이 도교나 불교의 용어를 채택하므로 상황화하여 번역 하려고 노력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佛) 또는 “천존”(天尊)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상황화를 벗어나는 심한 신학적 타협이었다. 또한 선교 방법론에 있어서 지나친 정교밀착(政敎密着)이 있었다. 당대나 원대의 황실과의 지나친 밀착이 교세를 확대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또한 교세가 죽는데도 큰 영향이 있었다. 경교가 정교밀착(政敎密着) 상황에 있었기에 원대에서 경교가 사라진 원인에 하나로 대두 되는 것은 가족의 개종이다. 기독교 일가족이 중국내에서 성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인 유교로 넘어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경교로 지낸 웅구트족은 칭키스칸의 동족으로 지배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내에서 사회적 상향(上向)을 유지하기 위해 유교화 되었다.

 

5.2 외부적 원인

  경교가 중국에서 두 번이나 쇄퇴하게된 사회적 원인으로 첫 번째는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한 전멸과 기독교 공동체의 붕괴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불교 인데도, 불교는 아직까지 중국에 남아있다. 두 번째 원인은 상기에서 기술한 송나라때 내부지향적인 종교분위기 조성으로 인한 것이다. 당나라때 외부 유입 종교로서 경교가 인정되고 황실에서의 위상이 높아 되면서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있었다. 송나라때 ‘고유 종교의 부흥운동’에 의해 경교가 소멸되었다. 내부적 요인에서 언급한대로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토착화에 집중했다면 송나라때의 이런 상황에서 경교가 살아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슬람의 등장으로 수로가 막혀서 더 이상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교류가 없던 것도 경교 쇠퇴의 원인이 될수 있었다.

 

6. 마치는 말

  경교의 기원과 종말은 더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분야였다. 경교가 두 번이나 중국내에서 사라진 이유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 오랜 시간동안 외래 종교로 남아서 토착화 되지 못함

. 상황화를 훨씬 벗어난 신학적 타협과 표현의 토착화 (예) 하나님의 이름

. 타종교의 요소들과 융화나 타협이 과도했음

. 황실과의 지나친 밀착을 통한 교세 확대 추구 (정교밀착)

.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한 전멸, 공동체 붕괴 (불교의 경우 살아남음)

.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자존심과 체면과 긍지 회복의 일환으로 ‘고유 종교의 부흥운동’에 의해 소멸 시킴(민족적 자긍심에 의해 희생됨)

. 중국으로 오는 외래인들 중 네스토리안은 줄고 이슬람이 많아짐 (네스토리안 교세 줄어듦, 외세 지원도 줄어들면서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도피)

. 중앙 아시아로 전파 과정 중 각 부족의 소수 민족 종교로 탈바꿈

 

  본 연구와 조직신학 수업을 통해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심각한 오해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속에 복잡한 의문들은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네스토리우스에 관련된 책 한권 안 읽고 다른 사람들이 쓰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내가 아는 것처럼 말 한 것도 많이 창피하다. 그러나 또 책한권 제대로 안 읽어보시고 글을 쓰신 분들도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 사무엘 마펫의 책이 가치있는 고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들에서 찾지 못한 자세한 내용들을 마펫의 책에서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계속해서 생기는 질문은 중앙 아시아로 간 네스토리안 공동체는 시리아어로부터 점차 그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리아 교회 선교 방법과 관련된 자료에서 시리아 교회가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시리아어와 현지 어를 모두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라반 바르 사우마도 여러 개 언어를 했다.) 중앙 아시아로 쫓겨 나갈 때는 이미 중국에서 200년을 지난 시간이었는데 그 동안도 계속 시리아어를 공용으로 사용한 것인지 궁금했다.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으로 인해 경교가 전멸되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수(數)적으로 봤을 때 불교가 받은 타격은 더 컸다 그러나 아직도 불교는 남아있다. 이유는 무얼까? 차이점은 무얼까?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위해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이기지 않으셨다. 40일 금식 후 광야에서 사탄이 유혹하지 않아도 드실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사람의 입장이 되어 고스란히 고난을 감당하는 것을 선택하심으로 승리하셨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교의 중국 진출의 역사에서 (고난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황실의 힘을 빌어 성장 했을 때 황실의 쇠퇴와 함께 경교도 쇠퇴했음을 보게 된다. 더불어 네스토리안이 된 가족들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위해 유교로 넘어가는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자신의 유익에 따라 황실과 손잡고 의지한 모습이 그대로 답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알게 되면서 나또한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원하시지 않은, 주시지 않은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보고 선교사들이, 목회자들이 배워야 하겠다. 무조건 팽창하는 것이, 거대해지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선교에서 항상 대두되는 문제 이지만 어디까지 상황화 하고 어디부터 현지에 이양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첫번 선교사들의 번역의 문제가 있었겠지만 동일한 번역의 문제가 이후에도 계속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추측이 든다. 당나라에서 중앙 아시아 초원으로 네스토리안들이 퍼저 나갈 때 웅구트 족과 같은 열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경우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기독교가 심하게 상황화 하는 바람에 결국은 그들의 종교와 융합되거나 변형되었다.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깨어 있어 항상 주님과 함께 함으로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지혜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것 밖에는, 항상 은혜를 구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상황을 다시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대에는 기독교를 향한 타종교와 문화의 공격 또한 무시 못 한다. 보이지 않는 큰 적이 힘이 세다고 좌절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선택 할 것이 죽음 뿐이라면 주님을 신뢰하며 죽을 수 있는 초대 기독교의 영성.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길 바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 사람 편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하나님만을 갈망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겠다. 나를 비롯한 기독교 사역자들이 오직 주님만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응원한다.

 

  더 깊이 많이 공부하고 제대로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언어의 장애(외국어 실력 부족)와 체력의 부족으로 깊이 공부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7. 참고도서

(1) 김상근,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왜 중국에서 사라졌는가?,” 「신학논단」 43, 2006.2,

(2) 사무엘 마펫, 『아시아 기독교회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 이장식, 『아시아고대 기독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4) 이재화,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고대교회 - 망각과 투쟁의 역사, 랍반 바르 사우마의 생애를 중심으로,” 「Muslim-Christian Encounter」 10(2), 2017.9,

(5) 이현모. "경교는 실패한 선교 모델인가?." 복음과 실천 43.1 (2009).

(6)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7) 편집부, "이야기 교회사/ 경교로 불려진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 교육」 (통권401호(2002년 10월)),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8) 김광수, “경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293, 2018년 11월 24일 방문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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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2 경교의 기원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3.2 원나라 때의 경교

4. 사라진 경교

    4.1 당나라 때의 경교

    4.2 원나라 때의 경교

5. 경교가 사라진 원인의 고찰

    5.1 내부적 원인

    5.2 외부적 원인

6. 마치는 말

7. 참고도서

 

1. 시작하는 말

  아시아 교회사를 수강하면서 알지 못하던 많은 기독교의 역사들을 알게 되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열심히 찾아가면서 매주 읽기 자료를 읽었고, 이어진 강의 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려지지 않았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알로펜의 이야기나 라반 사우만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였고, 강의를 들은 후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니,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자료들을 보게 되었다.(물론 강의시간에도 교수님이 언급하셨다.) 600년대에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자료가 남아있다니.. 그렇다면 그 전에도 들어올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특히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를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는데 계속 의문이 남았다. 그 기원을 찾아 보고 싶었으나 학기말의 페이퍼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중국에서 경교의 흥망성쇠를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경교와 네스토리안의 관계를 조금씩 알아갈 계획이다.

 

  수강 신청할 때 한 치의 고민도 안하고 아시아 교회사를 선택했는데 그 배후에 이렇게 나의 학구열을 자극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아시아 교회사는 고전 자료가 아니고는 최근의 도서로 출판된 것이 많지 않아서 강의로 듣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과제를 하면서 한국인이 쓴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나 다른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여러 책과 논문을 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 본다.

 

사무엘 H. 마펫, 김인수 역, 『아시아 기독교회사』,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용어에 대해서는 중국내에서는 네스토리안 보다는 경교라는 말이 (개인적으로) 익숙해서 주로 경교라고 했다.(물론 중국내에서는 3가지 명칭으로 불렸기에 통일해서 네스토리안이라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경교人일 경우는 네스토리안이 편하므로 중국내에 있는 경교人의 경우는 네스토리안이라고 했다. 용어를 섞어 사용함으로 인해 이해해에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2. 경교의 기원

  국내에 나와 있는 동방 기독교자료나 아시아 기독교 자료들은 경교에 대해서 아래의 두 가지 내용으로 소개한다. 네스토리우스의 후예들이 시련과 박해 속에서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중앙아시아로 향했다는 주장과 네스토리우스 사건 이후로 정치적인 문제로 동방 시리아 교회가 로마 제국내의 교회들과 결별한 이후의 교회들을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2.1 네스토리우스의 후예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381∼451)가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주장하고 마리아 신모설을 반대한 이유로 이단으로 몰렸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이집트에서 유배 생활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따르던 사람들이 페르시아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을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5] 조금더 자세한 내용으로는 페르시아의 열정적인 대감독 바르사우마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페르시아에 네스토리우스의 신앙고백을 공포하므로 페르시아 교회가 네스토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로마제국내의 교회들이 동서 분열이 일어나기도 훨씬 전에 사산왕조 영내에 있는 동방 교회는 로마제국 교회와 나뉜다. 이러한 시리아 교회는 동방 시리아 교회(이하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교회로 나누는데, 동방 경교는 중앙아시아, 중국 등으로 동진한 경우이고, 서방 시리아 교회는 페르시아, 터키, 중근동에 현재까지 활동 중인 시리아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 동진한 동방 경교는 왜 사라졌으며 서방 시리아 교회는 어떻게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공부해 보는것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2.2 여러 이름의 중국 기독교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시기인 16세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와 중국 안에서 파사교(波斯敎), 경교(景敎), 에르케운(也里可溫)이라고 불렸던 기독교 신앙공동체 전체를 통칭하여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사교(波斯敎), 경교(景敎), 에르케운(也里可溫)의 문헌들을 연구해 봤을 때 이들이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연구이다. 도리어 상기한 중국의 기독교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전 ‘원시 기독교’의 모습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 마테오 리치 이전에 전해진 기독교를 통칭해서 부를 때 네스토리우스와 상관없이 네스토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중국에서의 확장

3.1 당나라 때의 경교

  635년 페르시아 시리아 교회에서 파송된 알로펜이 당 수도 장안에 도착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당태종의 적극적 지원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교회를 건립하고 21명의 사제들이 활동했다. 고종때는 경교 사원이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685년부터 섭정했던 불교도인 측천무후에 의해 경교는 첫 번 시련을 경험한다. 이후 713년에는 도교에 의해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현종 즉위 이후에는 아라비아로부터 기독교 사절단이 입국하기도 하는등 중흥을 이룬다. 그러던 중 756년에 당나라 황실의 문제거리였던 안록산의 난을 정벌하는 과정에 경교인 이사 장군이 공을 세운다. 또한 이사 장군은 티벳군대의 공격으로 당대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다. 이것으로 황실에서는 경교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이었으며, 바로 이때 이사 장군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건립을 계획한다. 그는 경교 선교의 150여년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이것이 중국 고대 교회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 이다. 이 비문은 주교였던 경정(景淨)이 작성했으며 실재로 경정(景淨)의 존재는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이 된다.

 

3.2 원나라 때의 경교

  경교는 9세기 후반부터 중국에서 사라지고 경교인들은 중앙아시아로 도주하면서, 소그드인과 투르크인에 의해 유지되기 시작했다. 744년에서 842년까지 중앙아시아 평원을 지배했던 위그루는 마니교가 국교였고, 이후 케레이트와 나이만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이들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경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 전체를 재패했을 때는 이미 칭기스칸의 민족인 웅구트 족은 기독교였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중국에서 도피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개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칭기스칸이 세력을 확장하고 쿠빌라이칸이 원나라를 세울 때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있이었고 그들은 에르케운(也里可溫)으로 불렸다. 원나라의 황실이 기독교이므로 경교는 다시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13세기 중반 유럽의 수도회 신부들이 원나라에 도착했을때 네스토리안과 다양한 접촉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네스토리안 존재와 활동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제국과 원나라는 경교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용 정책을 폈기 때문에 경교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2에서 계속)

 

[참고도서]

(1) 김상근,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왜 중국에서 사라졌는가?,” 「신학논단」 43, 2006.2,

(2) 사무엘 마펫, 『아시아 기독교회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 이장식, 『아시아고대 기독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4) 이재화, “동방 경교와 서방 시리아 고대교회 - 망각과 투쟁의 역사, 랍반 바르 사우마의 생애를 중심으로,” 「Muslim-Christian Encounter」 10(2), 2017.9,

(5) 이현모. "경교는 실패한 선교 모델인가?." 복음과 실천 43.1 (2009).

(6)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7) 편집부, "이야기 교회사/ 경교로 불려진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 교육」 (통권401호(2002년 10월)),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8) 김광수, “경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293, 2018년 11월 24일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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