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_<문화의 신학>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 (1/2)

 

*Paul Tillich, 『경계선 위에서』, 김홍규 역(서울: 동연, 2013), 97.

Ⅰ. 서언

  1차 논문에서 이머징 예배(이하 ECM)를 조사하면서 ECM이 포스트모던 문화 안에서 복음의 상황화를 추구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을 보면서, 예배는 어디까지 문화를 수용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소비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세속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을 규명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경계선 신학’이나 ‘문화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는 폴 틸리히의 이론을 살펴봄으로써, 예배의 상황화와 소비자 지향 예배의 경계선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현대의 기독교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들로서, 예배와 문화의 역동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Paul Tillich,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서울: IVP, 2018), 11.

 

폴 틸리히 저.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정재현 해설. IVP. 2018.

Ⅱ. 본론

폴 틸리히를 소개하고, 그의 『경계선 위에서』, 『문화의 신학』에서 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간단히 살펴본다.

 

1. 폴 틸리히

  폴 요한네스 틸리히(Paul Johnnes Tillich)는 1886년, 베를린에서 루터교 목사인 요한네스 오스카 틸리히와 빌헬미나 마틸데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12년 목사안수를 받고 베를린에서 노동자 중심 교회의 부목으로 사역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목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 보도국(Allied propaganda)으로 참전하여,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서 독일의 소식을 전했다. 2개의 세계대전을 겪는 아픔과, 국가로부터 해직당한 첫 번째 교수였음에도, 불안했던 시대에 ‘신성한 본질’을 보고 그것을 기반으로 신학적 분석 작업을 한 자칭 ‘신실한 이상주의’자 였다.

 

  전쟁 후에, 교수와 학자로서의 삶을 살던 중 1933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때, 유대인 동료들을 보호하고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강연을 하고 논문을 쓴 것을 이유로, 비유대인으로는 최초로 나치에 의해 해직된 교수가 되었다. 해직 후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도움으로 47세에, 미국의 유니언신학대학으로 가서 1940년에야 정교수도 되고, 미국 시민권도 받았다. 1955년에는 유니언에서 은퇴하고 하버드대학의 특대 교수로 청빙되어 다양한 전공의 학생을 만났고, 1962년에는 시카고대학교 신학부의 석좌 교수로 있으면서 세계적인 종교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60년의 일본 방문을 통해 동양 종교를 접하면서, 신학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에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고, 59년 ⌜타임⌟지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소개했다. 공개강연도 많았지만 그의 책들이 한몫을 했다. 1951년부터 63년에 출간된 『조직신학』 3권이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시대』, 『경계선 위에서』는 독일어로 쓴 것이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존재의 용기』, 『사랑, 권력, 정의』, 『신앙의 역동성』외에도 많은 설교집들이 있다.

 

  틸리히는 1910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2년 신학 전문직 학위를 취득 하면서 자신이 철학자인지 신학자인지의 정체성과,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해야 했다. 또한 세계대전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과 불안에 대해서 신학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티첼리의 <여덟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들>을 보고 자신이 한 반응에도 신학은 응답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틸리히는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인간미 있는 휴머니스트였으며, 출세가 보장된 상황에서 나치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자신이 자기 사상의 주(註)가 되는 독창적 사상가였다. 틸리히는 ‘경계선’ 개념을 즐겨 사용했다. 머리와 가슴, 이성과 계시, 아테네와 예루살렘, 유럽과 미국..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의 균형을 이루는 노력을 일생동안 했다. 양 극단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로서 여기서 “상관방법론”(method of correlation)이 나왔다.

 

  상관방법론은 “철학이 질문하고 신학이 응답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존재“를 기준으로 “종교는 존재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다루며, 철학은 존재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다룬 다“고 하면서 이러한 학문들은 분리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과 삶을 분리한 이원론적 신학구조에 있다고 보고 문화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발전시킨 것이 문화신학이다.**

 

* 폴 틸리히의 이 이야기는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에서 소개되는 이야기 이다. 짧은 논문인 관계로 틸리히의 예술에 대한 영향을 자세히 논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예술 작품과 작가들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한국 작가를 「LA타임즈」에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의 작가들이 틸리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 행사에 초청 연설을 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다.

**김은혜,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 문화이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선교와 신학」 16(2005), 157-159.

 

2. 종교와 문화

  틸리히는 종교를 믿음의 관점이 아닌 “의식의 깊이 차원”에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다. 문화는 자연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생활양식”이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의 환경과 형식을 갖기 위해 궁극적 관심을 갖게 되고, 각 시대는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관심에 따라 생성되고 변한다. 이러한 궁극적 관심은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 정신생활(“궁극적 관심”)의 한 차원으로 보았고 문화 또한 정신생활의 표현이므로 틸리히에게 있어서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을 “궁극적인 것”화 하여 예술을 멸시하고, 종교에 복종하지 예술은 박해했다. 틸리히의 글에는 미술 작품이 많이 나온다.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인간의 곤경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신교 회화로 정의한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면 이것은 종교 체험일까 문화 체험일까. 체험의 형식은 문화이지만 내용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예술 작품도 그것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종교적 내용(“궁극적 관심”)의 특성이 있다. 그렇다고 종교를 문화의 일부로 볼 수는 없다. 문화의 형식 안에는 ‘의미’가 들어가는데, 이 ‘의미’에는 예술가의 종교적 내용(‘궁극적 관심’)을 포함한 모든 내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는 주종이나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틸리히의 상관방법론이 적용되는데,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종교는 내용 지향적이고, 문화는 형식 지향적이다. 문화는 의미를 표현하므로 종교는 문화의 자율 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문화를 품고, 문화는 종교를 표현하게 된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예술에서 표현 양식의 발달은 종교에게 있어서는 표현의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발전하고 있는 예술의 표현(상징) 양식을 통해 종교가 새롭게 표현 될 수 있으므로 예술의 표현에 대해 종교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 가톨릭이 했던 것처럼, 성속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독일의 루터교회 성례전 개혁 운동(베르노이헨 운동)에서 의식 개혁을 위한 신학의 기초를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집행자들이 예전의 형식에만 몰두하므로 의미를 함께 다루고자 했던 틸리히는 동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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