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_<문화의 신학>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 (2/2)

 

*Paul Tillich, 『경계선 위에서』, 김홍규 역(서울: 동연, 2013), 97.

 

폴 틸리히 저.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정재현 해설. IVP. 2018.

3. 문화의 신학

  3세기 초의 교부인 터툴리안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이며, 학문과 교회가 무슨 공통점이 있는 가'라는 말로 신학과 철학, 종교와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들(플라톤)의 주장이 참되고, 기독교 신앙과 일치한다면 선용하라고 제안했다. 이것은 폴 틸리히가 말하는 ‘문화 신학’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틸리히는 신학을 ‘기독교 믿음의 내용에 대한 방법론적 설명’이라고 정의 한다. 문화의 신학과 교회의 신학(조직 신학)은 둘 다 종교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틸리히는 예술을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 개인이 체험한 것을 표현 한 것이라고 정의 했다. 평생 계속해서 종교와 예술의 상호관계를 강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단지 『예술과 건축에 관하여』를 그의 사후에 딜렌버거가 편집하여 출판 했다.

 

  여기서, 문화의 신학은 문화의 형식에 있는 본질이 종교라고 이해한다. 종교는 인간 활동의 수직선으로 ‘의미’를 향한 정신의 방향이고 문화는 인간 활동의 수평선으로, ‘형태’들을 향한 정신의 방향으로 보면서, 두 가지는 원래 일체였다고 이해한다.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주장하며 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상관관계의 방법’으로 풀어 가는 것이 ‘문화의 신학’이다.

 

  종교의 형식이 문화임을 언어의 예로 설명한다. 성경의 언어는 ‘문화적 창조’의 결과이다. 언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힘으로 누구든지 자신(혹은 소유한 것들)을 언어로 표현 할 수 있다. 세계가 발전함에 따라 언어도 발전한다. 언어는 일상에서 표현과 소통, 문학과 시 그리고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고 소통하는데 사용되고, 종교 언어는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거룩한 언어’와 ‘거룩하지 않은 언어’는 존재 하지 않는다. 종교의 또 다른 형식으로 예술이 있다. 종교 예술에서 작가가 자기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자기의 실제 상황을 잘 표현하는 것을 예술적 정직성의 원리라고 말하면서 종교 예술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종교가 표현되는 문화는 인지 영역이다. ‘기독교 상징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때 현대 철학적 의식의 어떤 요소를 사용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나 철학자가 대답할 때, 그들은 자신에게 계시하는 자신의 전통에 근거해서 대답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을 주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이 대답은 자신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대답으로 선교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문화의 신학‘은 다양한 문화적 영역에서 종교적인 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문화 안에 있는 신학을 발견하고 알리는 것이다. 선교에서 선교사들이 현지의 문화를 관찰하여 복음의 ’상황화‘가 가능하게 되는 지점이다. 김광식은 한국 문화에서 복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연구하면서, 신학을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탈서양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 문화 안에 있는 신학을 발견하기 위해, 전통문화를 신학적으로 해석 하는 것을 시도했다. 틸리히가 분석적 문화 신학자였다면, 김광식은 해석학적 문화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김광식의 해석학적 문화신학으로 이머징 세대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문화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현대의 문화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4. 경계선

  폴 틸리히는 그의 자전적 사상 탐구서인 『경계선 위에서』에서 경계선이 지식을 습득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틸리히는 사상들을 탐구하기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수용하면서 사고해야 했다. 이런 경우, 경계선 위에 서 있을 때 사고하기가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길지 않은 이 책에서는 다양한 단상들이 깊은 사유와 함께 표현된다. 두 기질의 경계, 도시와 시골, 사회 계층의 경계, 현실과 상상, 이론과 실제, 타율과 자율, 신학과 철학, 교회와 사회, 종교와 문화, 본국과 타국 등 본인이 경험하고 고민했던 경계의 상황들이다.

 

  경계선은 양쪽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안정적이지 않다. 편하지 않다.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고, 다양한 형태로 내적 실존의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계선을 넘어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갈수 있는 곳이다.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여 너무 많은 변화를 급하게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현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때 마다 인류는 억지로 그 경계를 넘게 되었다. 자발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간 것이 아니라 항상 억지로 넘어갔다. 종교개혁이 그랬고, 산업혁명이 그랬다.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든 우리들은 이전처럼 현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것인지 경계선에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 안덕원 교수는 예배는 계속 변화해왔다고 말한다. “문화, 교회, 예배 열린마음”을 키워드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예배들이 문화를 어떻게 상대했는지 관찰하라고 한다.

(안덕원, 문화, 예배를 디자인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DyiGFSUa_c, 2021. 5. 25일 접속.)

 

Ⅲ. 결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과 경계선 신학은 우리 일상의 모든 상황을 읽을 때 예민하게 하고 그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궁극적 관심’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한다. 틸리히가 두 번의 전쟁과 독일에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실한 이상주의자‘ 일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신성한 본질’인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안에 상주하고 있는 세대들에게 그 문화의 의미를 읽어주고 그곳에서 ‘궁극적 대상’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먼저 포스트모던 문화의 반대편에 있지 않으면서도, 포스트모던 문화를 알 수 있는 경계선에서 포스트모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 문화의 의미를 알아가야 하겠다. 물론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은 불안정하고 불편하고 힘들다. 어쩌면 살아가는데 발생하는 불안정과 불편의 인정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바른 자세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한계를 넘어 경계선을 밟는 과정은 새로운 문화로 가는 ‘복음의 상황화’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지역이 다른 곳이 문화가 다른 곳이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한 집안에서 조차 다른 문화가 있다. 가정 안에서도 선교를 위해 ‘복음의 상황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 바로 여기서 틸리히의 개방적 신학이 꽃피는 곳이 아닐까 한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화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복음이 전해진다. 포스트모더니티들이 사용하는 문화의 도구가 바로 ‘상징’(예술)이다. 상징을 통해 답변을 주는 것은 틸리히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종교와 문화의 결합으로 양쪽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양쪽을 다 고려해야 하는 문화 신학자는 현재의 문화를 비판하기도 하면서, 현재의 문화 체계를 종교적으로 해석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화 신학은 현재의 문화를 검토하고 명확히 파악해야 자신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다. 일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는 아니지만 ‘만나교회’의 경우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일반적 문화인 ‘흡연’을 인정하고 교회 지하 주차장에 흡연실을 설치했다. 교회에 와서 흡연실을 보고 습관처럼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겠으나, 불을 붙이는 그 순간 담배를 찾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공허함이나 고뇌를 발견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나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환대하는 ‘궁극적 대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만나교회’는 장애 어린이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일층 로비를 놀이 동산 같은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것 또한 어린이들의 문화적 필요(타문화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의 배려로서 두 경우 모두 교회와 상관없을 것 같은 ‘형식’안에 그리스도의 환대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비흡연 교인과 외부인의 사이에서 외부인의 필요를 배려하고 성인과 어린이의 사이에서 어린이의 상황을 배려한 상황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국내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틸리히의 조직신학과 문화신학을 배경으로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문화 목회의 사례들을 연구한 논문도 있다.

 

  무조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고려할 사항들이 많고, 또 틸리히가 속해 있었던 서양, 남자, 중산층 문화에서 틸리히가 보지 못한 부분도 있음을 동의한다. 다만 기독교가 혹은 현재의 기독교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처럼 획일화된 이원론에 빠지는 실수를 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서 세례를 주게 되는 과정이 소개된다. ‘유대인’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열심이 ‘성속’에 관한 틀에 대해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갈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행 10: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사66:2)

 

문화에 대해서 비판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것을 만드시고 허락하신 창조주께 시선을 집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체 삶을 통해,

극단적 형식에 치우진 예배자가 아닌,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사 66:2) 예배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Ⅳ. 후기

  『문화의 신학』에서 적용하고 싶은 부분들의 번역이 이해되지 않아서 논문들을 찾아보다가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지만, 그렇게 찾는 과정 중에 책에서 혼자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논문들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예배에서 상징의 사용 혹은 예술 작품들의 의미의 부분은 영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한번 쯤 정리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문화의 신학』에서 ‘상징과 기호’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배와 관련하여 상징들의 사용의 의미를 틸리히를 통해 더 잘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두 번째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 싶었던 부분이었으나, 책을 잘 소화하지 못 했다. 그래서, 초기에 기획했던 대로, 경계선 신학을 추가하므로 예배(삶)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을 정리하게 되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추천해 주신 논문에서 허호익의 논문은 그 동안 보아왔던 (몇 개 안되는) 다른 논문들보다 틸리히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고, 주로 틸리히에 대한 평가부분이 전반적으로 잘 정리 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광식 관련 논문은 이전에 몇 개 발견했던 논문이었으나, 이 논문에서 중점으로 생각한 선교지는 지역적 구분이 아닌 문화적 구분이어서 고려하지 않았다. 틸리히와 관련해서 국내에서 많이 나타나는 주제였는데 초보인 필자가 간과한 것 같다. 결국  한국에서의 토착화 부분을 이머징 세대에게 적용해 보았다.

 

[참고문헌]

<일차문헌>

Tillich, Paul. 『경계선 위에서』. 김홍규 역. 서울: 동연, 2013.

Tillich, Paul.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 서울: IVP, 2018.

Tillich, Paul. 『조직신학』. 김경수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8.

Tillich, Paul. 『평화 신학』. 신상길, 정성욱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이차문헌>

김산춘. "연구 논문: 폴 틸리히, 예술의 신학." 「미학 예술학 연구」 32 (2010): 227-249.

김은혜.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 문화이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선교와 신학」 16 (2005): 155-176.

손호현.“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 표현주의 모델.“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5(1): 287-312.

신용식. "문화신학의 해석학적 과제에 대한 고찰―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 김광식의 “토착화신학”의 비교 연구." 「한국조직신학논총」 (2021): 73.

안덕원, “문화, 예배를 디자인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DyiGFSUa_c, 2021년 5월 25일 접속.

안덕원. 『우리의 예배를 찾아서』. 서울: 두란노, 2018.

이성윤. “Paul Tillich 신학과 문화목회 방안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경성대학교 대학원, 2011.

이준학. “문학과 종교 그리고 문화의 관계에 대한 학제적 연구.” 「문학과 종교」 11(2): 123-124.

임영금. "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 「한국문화신학회 논문집⌟ 13(2009): 137-158.

허호익.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 ⌜신학과 문화⌟ 10. 204-225.

황민효. "폴 틸리히의 종교신학적 입장에 관한 연구: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경계선에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56.1 (2008): 163-188.

폴 틸리히_<문화의 신학>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 (1/2)

 

*Paul Tillich, 『경계선 위에서』, 김홍규 역(서울: 동연, 2013), 97.

Ⅰ. 서언

  1차 논문에서 이머징 예배(이하 ECM)를 조사하면서 ECM이 포스트모던 문화 안에서 복음의 상황화를 추구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을 보면서, 예배는 어디까지 문화를 수용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소비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세속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을 규명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경계선 신학’이나 ‘문화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는 폴 틸리히의 이론을 살펴봄으로써, 예배의 상황화와 소비자 지향 예배의 경계선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현대의 기독교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들로서, 예배와 문화의 역동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Paul Tillich,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서울: IVP, 2018), 11.

 

폴 틸리히 저. <문화의 신학>. 남성민 역/정재현 해설. IVP. 2018.

Ⅱ. 본론

폴 틸리히를 소개하고, 그의 『경계선 위에서』, 『문화의 신학』에서 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간단히 살펴본다.

 

1. 폴 틸리히

  폴 요한네스 틸리히(Paul Johnnes Tillich)는 1886년, 베를린에서 루터교 목사인 요한네스 오스카 틸리히와 빌헬미나 마틸데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12년 목사안수를 받고 베를린에서 노동자 중심 교회의 부목으로 사역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목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 보도국(Allied propaganda)으로 참전하여,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서 독일의 소식을 전했다. 2개의 세계대전을 겪는 아픔과, 국가로부터 해직당한 첫 번째 교수였음에도, 불안했던 시대에 ‘신성한 본질’을 보고 그것을 기반으로 신학적 분석 작업을 한 자칭 ‘신실한 이상주의’자 였다.

 

  전쟁 후에, 교수와 학자로서의 삶을 살던 중 1933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때, 유대인 동료들을 보호하고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강연을 하고 논문을 쓴 것을 이유로, 비유대인으로는 최초로 나치에 의해 해직된 교수가 되었다. 해직 후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도움으로 47세에, 미국의 유니언신학대학으로 가서 1940년에야 정교수도 되고, 미국 시민권도 받았다. 1955년에는 유니언에서 은퇴하고 하버드대학의 특대 교수로 청빙되어 다양한 전공의 학생을 만났고, 1962년에는 시카고대학교 신학부의 석좌 교수로 있으면서 세계적인 종교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60년의 일본 방문을 통해 동양 종교를 접하면서, 신학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에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고, 59년 ⌜타임⌟지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소개했다. 공개강연도 많았지만 그의 책들이 한몫을 했다. 1951년부터 63년에 출간된 『조직신학』 3권이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시대』, 『경계선 위에서』는 독일어로 쓴 것이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존재의 용기』, 『사랑, 권력, 정의』, 『신앙의 역동성』외에도 많은 설교집들이 있다.

 

  틸리히는 1910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2년 신학 전문직 학위를 취득 하면서 자신이 철학자인지 신학자인지의 정체성과,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해야 했다. 또한 세계대전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과 불안에 대해서 신학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티첼리의 <여덟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들>을 보고 자신이 한 반응에도 신학은 응답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틸리히는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인간미 있는 휴머니스트였으며, 출세가 보장된 상황에서 나치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자신이 자기 사상의 주(註)가 되는 독창적 사상가였다. 틸리히는 ‘경계선’ 개념을 즐겨 사용했다. 머리와 가슴, 이성과 계시, 아테네와 예루살렘, 유럽과 미국..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의 균형을 이루는 노력을 일생동안 했다. 양 극단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로서 여기서 “상관방법론”(method of correlation)이 나왔다.

 

  상관방법론은 “철학이 질문하고 신학이 응답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존재“를 기준으로 “종교는 존재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다루며, 철학은 존재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다룬 다“고 하면서 이러한 학문들은 분리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과 삶을 분리한 이원론적 신학구조에 있다고 보고 문화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발전시킨 것이 문화신학이다.**

 

* 폴 틸리히의 이 이야기는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에서 소개되는 이야기 이다. 짧은 논문인 관계로 틸리히의 예술에 대한 영향을 자세히 논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예술 작품과 작가들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한국 작가를 「LA타임즈」에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의 작가들이 틸리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 행사에 초청 연설을 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다.

**김은혜,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 문화이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선교와 신학」 16(2005), 157-159.

 

2. 종교와 문화

  틸리히는 종교를 믿음의 관점이 아닌 “의식의 깊이 차원”에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다. 문화는 자연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생활양식”이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의 환경과 형식을 갖기 위해 궁극적 관심을 갖게 되고, 각 시대는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관심에 따라 생성되고 변한다. 이러한 궁극적 관심은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 정신생활(“궁극적 관심”)의 한 차원으로 보았고 문화 또한 정신생활의 표현이므로 틸리히에게 있어서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을 “궁극적인 것”화 하여 예술을 멸시하고, 종교에 복종하지 예술은 박해했다. 틸리히의 글에는 미술 작품이 많이 나온다.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인간의 곤경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신교 회화로 정의한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면 이것은 종교 체험일까 문화 체험일까. 체험의 형식은 문화이지만 내용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예술 작품도 그것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종교적 내용(“궁극적 관심”)의 특성이 있다. 그렇다고 종교를 문화의 일부로 볼 수는 없다. 문화의 형식 안에는 ‘의미’가 들어가는데, 이 ‘의미’에는 예술가의 종교적 내용(‘궁극적 관심’)을 포함한 모든 내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는 주종이나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틸리히의 상관방법론이 적용되는데,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종교는 내용 지향적이고, 문화는 형식 지향적이다. 문화는 의미를 표현하므로 종교는 문화의 자율 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문화를 품고, 문화는 종교를 표현하게 된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예술에서 표현 양식의 발달은 종교에게 있어서는 표현의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발전하고 있는 예술의 표현(상징) 양식을 통해 종교가 새롭게 표현 될 수 있으므로 예술의 표현에 대해 종교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 가톨릭이 했던 것처럼, 성속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독일의 루터교회 성례전 개혁 운동(베르노이헨 운동)에서 의식 개혁을 위한 신학의 기초를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집행자들이 예전의 형식에만 몰두하므로 의미를 함께 다루고자 했던 틸리히는 동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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