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15, 16장을 읽는 동안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14장 기독교 훈련들
횃불에 와서 많은 수확이 있었지만 이번학기 영성형성 과목의 책을 빠지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나에게 은혜가 되었다. 그동안 나의 영적 여정을 검증 해주고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도전을 준다. 항상 감사하다. 책을 읽으므로 그동안 지나왔던 과정들에 대해 ‘확증’을 받고 말로 표현 못하던 부분들에 대해서 글로 보면서 정리가 되었다.
훈련은 전인을 위한 것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위로가 되었다. 사실 신학적으로 근거를 찾지 못한 채, 나의 임상만을 가지고 청년들에게 했던 이야기 들이 이 책에 정리 되어 있어서 감사했다. 항상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아야 한다고 부담 갖는 청년들은 피곤한 몸으로 인해 아버지 앞에 있는 것을 잘 유지 하지 못한다. 대게 기도하다가 잠들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에 많이 죄책감을 느낀다고 나눈다. 그래서 어떤 친구에게는 집에서
가장 편한 장소와 자세로
그렇게 앉아서 아버지께 말을 하라
고 지도해 준적도 있었는데 책에도 딱 그 부분이 나왔다. 책 읽기 전날 만난 A라는 청년도 살이 쪄서 힘들어서 퇴근하고 운동하는데 운동하는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많은 기도를 하게 된다고 했다. 가장 집중하는 기도.. 나 또한 물속에서 홀로 있는 수영하는 시간이나 운동 할 때 아버지께 집중이 푸욱 될 때가 있어서 가장 기도하기,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또한 감정이 상하거나 힘들 때면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께 자주 머물렀고 집중했었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직면 하는 경험들을 했었는데 ‘의지’ 부분에서도 그런 설명이 있었다. 상관도 없는 것들 혹은 아주 옛날 것이 떠오르는 것들을 통해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경험들이 생각났다.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떠오를 때 당황하고 짜증내기도 했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자발적인 훈련"은 정말 유익이 되는 것 같다.
21세 때, 그렇게도 갈망하던 교회에서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청년부 목사님이 정시기도를 제안하셨다. 그때 하던 정시기도를 아직도 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올 때 까지는 30분 이상 아버지 앞에 머물렀는데 한국에 들어와서는 많이 자유하며 그 시간을 누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매일 말씀을 3장씩 꼭 읽었는데 신학교에 와서는 말씀 보다는 다른 책들을 읽느라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 어렵다.
책을 읽기 전날도 몇 년간 나를 피하고 만나지 않던 과기대 졸업생 A와 만났다. A의 영적 상태가 바닥을 치고 진로가 흔들거릴 때 만났었다. 모든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이야기는 안하고 우선 좋은 공동체에 소속해 있기만을 부탁했다. 그리고 A는 온누리 서빙고 중국어 예배에 갔다. 그곳에는 우리학교, 우리학과 졸업생들이 많다. 그 졸업생들은 나를 만나고 있었어서 그 친구들을 통해서 꾸준히 A가 양육을 잘 받고 공동체에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부탁 했었다. 이번에 A는 양육도 받고 여러 가지 아픈 과정들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조금씩 찾아간 것 같았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욕심을 갖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분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영적 진보이다. 또한 A가 어려울 때 티 안나게 A를 돕던 선배들이 이제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다. 이제 A가 그들 옆에서 티 안나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건강한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A도 만남 속에서 자기가 이제 형들을 기도로 도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책을 읽으면서 전날 A와의 만남이 계속 생각났다. 임상과 이론과 실습을 병행케 완벽한 학습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 “영신수련”(영적 분별에 대한 고전, “여러가지 영적 영향력들을 구별하기 위한 이냐시오의 원칙들”, #313,#328)
. 이냐시오의 영적 분별 : 믿음, 소망, 사랑을 증진시킴 ∴ 분별에는 시간이 필요함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
. 원칙의 적용을 제한하는 이유 3가지
① ‘성령의 열매’는 내적 기질 혹은 태도인데 선하지 않고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② 영적 위조품과 진품 구별 난이 : 사단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
③ 내면의 연약함과 하나님과의 얕은 인격적 관계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 분별 가능, 고전2:14-15)
(2)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어야 가능
. 분별력과 관련된 구체적 특성
① 겸손, 복종 : 자신의 결점 고백은 은폐된 죄악 다루는 확실한 방법 (진짜 분별은 진짜 겸손할 때 얻어짐)
② 용기 혹은 담대함 : 절대적 확신 가질 객관적 토대가 없다. ∴구체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알고자 하는 모험을 행하는 태도 (‘정당한 상황이라는 깊은 내적 확인에 기초’한 담대함으로 θ의 뜻 실현)
③ 균형 유지 : 양극단의 오류 사이에서 양극단을 피함. (극과 극은 통함 : 겸손&교만, 금식&과식, 편견&순진)
. 극단적 태도 = 분별력 결여의 증거, 감정이 기형적으로 불균형, 심한 기복
. 편견(선입관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 거부) vs 순진(의심하지 않고 변화 수용)
[토론 질문1] ‘② 용기(담대함)’에서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것은 대단히 극단적인 태도일수 있다. 그런데 ‘③ 균형 유지‘에서 극단적 태도는 분별력 결여의 증거라고 했다. ②번과 ③번은 상충된다. 본인이 이러한 상황을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 해보고 두 가지의 차이점을 토론해보자.
2. 공동체적 분별력 : 세례를 통해 형성된 구속적 공동체에 뿌리 둠 (교회)
∴분별은 신앙 공동체의 일
. 성경을 사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공동체에서 나누고 점검 (공동체와 살아있는 관계 가질 때 하나님 뜻 알 수 있다.)
. 예언의 판단과 분별은 교회 공동체 (고전 14:29, 바울 바나바 파송시 교회 전체금식하고 기도하며 분별, 행13:2)
. 분별을 위해 겸손과 순종, 퀘이커의 ‘침묵 모임’ 공동체적 분별 → 평범한 양무리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겸손하게 듣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인도할 권리가 없다.
[토론 질문2] 책 p298에서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와 살아 있는 관계를 가질 때 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다.’고 말한다. 본인의 삶에서 공동체와 함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경우를 나누어 보자.
3. 영적인 삶의 문제들을 분별하는 것
: 옛 습성이 제거될 때 성장통 및 퇴보 경험하는 공통적 증상(나이테 생성?)
(1) 주의산만과 무미건조 : 운동선수의 슬럼프 같은 ‘경기력 저하’ 기도나 묵상 시 이 부분에 지나친 관심 자제
(2) 과민함: “과장된 도덕적 핑계(율법주의?)에 계속 억압 받을 때”(신경쇠약의 원인) ex) 안전한 극단 선택
. 거룩한 친밀감과 균형이룬 자발적 경외심결여ex) 초보 운전자, 바리새인
(3) 미혹: 특별한 체험(신앙 초기의 ‘사탕과자’)들을 영성의 발전과 혼동 (ex) 자신의 덕에 도취된 수도사의 자살
→ ① 모든 상황 속에서 θ의 뜻을 이루심 신뢰 ② 영적 안내자나 멘토의 도움이 중요 (공동체 통해 검증)
4. 세상에서 영 분별하기
.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손길 분별 난이 (실천의 문제 : 섭리가 역사하는 방법에 동반되는 악의 문제)
.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답 : 다양한 형식으로 반응하도록 부름 받음
→ 섭리의 신비에 대한 적절한 반응 : 깨어있음 (영적 기민함, watchfulness) = 기도 (마 26:41)
. 영적 기민성 : θ이 세상에 현존하는 것을 민감하게 유지, ‘영혼과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통해 생성, 유지
. 분별 : 기도와 행동이 만나는 지점 (하나님께 많은 질문 던지기)
5. 특이한 현상들의 분별
: 특이한 형상에 대해 극단적 경외감 or 극단적 회의주의
. 기독교 전통 : 신중한 태도 – 십자가의 요한, 조나단 에드워즈 “황홀한 체험은 구원 얻는 진정한 증거가 아니다‘
.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i) 진정한 감정&거짓감정, 은혜스러운 감정&자연스러운 감정 구별, 외적 증거와 모습으로 단정할 수 없음
- 특정 방식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유일한 합법적 방법으로 주장하면 안됨.
(ii) 유창한 언어 동반 : 언어는 잎이지 열매가 아니다. (“천로역정“의 ‘수다쟁이‘)
(1) 분별의 신학적 기준 : “신앙과 정서”(조나단 에드워즈), “규칙들(Rules)”(이냐시오)
‘영적이고 은혜스러운’ 감정의 12가지 증거가 확실하지 않을 수 있는 2가지 이유
① 타인의 영적 상태에 대해 절대 확언 할 수 없다. 양과 염소 구별하는 특권은 우리 것이 아님 (ex) 엘리-한나
② ‘은혜안에서 겸손’한 성도들도 자신의 상태 판단 못 할 때가 있음
두 저자의 책에 근거한 분별 방법 제안
① 영적 균형② 인격에 초점(친밀한 사귐을 통해 판단 가능) ③ 현상의 주변 상황 모두 고려
④ 구별하는 증거 :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증진 or 파괴
(2) 특이한 현상들의 본질 이해 : 특이한 현상들을 바른 관점에서 이해하기
① 특이한 현상의 기원 : 하나님인가 사단인가 혹은 특별한 기질, 선천적 특징, 자연적 원인의 결과, 심리적 원인
② 도덕적이고, 신학적 기준에 일치하는가? (성자들의 특이한 경험 : 아시시 프란시스, 아빌라 테레사)
- 경험한 사람이 경건, 균형잡히고, 성숙,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인가? 생활전반에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
③ 사적, 공적 계시 구별 : 십자가의 요한, 사도 바울의 셋째 하늘 경험은 개인적이라 공개하지 않음.
분별
- 그리스도의 몸안에 있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자라, 그 삶을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과정
- 분별 통해 성장, 성장함으로 분별력 향상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분별, 분별하는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
산업과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은행, 행정업무, 쇼핑 등 많은 것들이 편리해지고, 간단하게 처리 할 수 있게 된 반면, 빠르게 증가하는 지식의 발전을 따라잡고, 지식의 발달에 따른 업무량 과다로 현대인들은 더 바빠졌다.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일한 시간만큼 돈으로 보상 받고 있기에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도시의 사람들이 소도시의 사람들보다 시간을 절약하고 바쁘게 순간을 지낸다. 이는 결국 시간은 돈이라는 벤자민 플랭클린의 개념이 일반화 되어 경제가 개인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A)
이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삶을 경제가 통치하도록 개인들의 주권을 경제에게 내어준 것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록 개인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경제에게 주었다. 시간과 경제관념이 엮여 지면서 시간에 쫓기게 되고, 그럴수록 정서적인 문제는 더 많아진다. 가족 간의 불화는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고(B), 개인 정서의 문제는 우울증과 자살률의 증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현대에서 기독교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24시간을 시도하지 못하는 큰 이유는 상기한 대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시간에 지배받고 있는 현대인들이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의 뿌리들을 정리해 보았다.
지식이 풍성하고 완벽 주의적인 성향이 많은 현대인들의 기본적인 성향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상황에 있어야 안정감을 갖고 무언가를 실행해 옮긴다. 기도 또한 삶이 안정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을 잘 배워야 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기도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조용히 삶의 고삐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라고 했다.(D)현대인들은 기도마저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 있으므로, 24시간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사고의 틀을 깨는 과정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2) 시간을 따로 내야 한다.
프랭크 루박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업을 내려놓고, 일상을 포기하고, 시간을 따로 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이것은 우리가 예배와 친교등 교회의 모임이 항상 시간을 따로 내어서 해야 하는 활동이었기에 생길 수 있는 오해이다. 교회의 활동들이 개인 신앙에 많은 진보를 가져오긴 했지만 이러한, 영성과 삶의 분리에도 미친 영향이 크다.
헨리 나우웬은 <영성 수업>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경으로 기도하고, 공동체 안에서 용서하며 경험하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예화들에서는 도제식 학습 등으로 온 종일 스승과 함께 하며 배우는 예화가 있다. 그러나 실습으로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기도와 묵상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따로 두라고 한다.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 영성지도 등을 받으라는 권면이 있다.(E)이 또한 여러모로 시간을 따로 내야 한다.
(3) 마음의 안식처보다 피부로 느껴는 안정감이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의 가치를 중요시 한다. 그러다 보니 보여지는 외모가 중요해서 성형수술도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안정감을 타인에게 둠으로써 생기는 것인데 이로 인한 정서적인 문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결국 나의 안정감을 타인에게서 추구하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보다 보이는 사람, 들리는 음성이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핸드폰 속의 사람들과 영상을 찾게 된다. 현대는, 외롭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기보다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을 찾고 내게 도움을 주는 앱을 찾는 것에 많이 익숙하다.
(4)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모든 이유들 중에 가장 기저에 있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할 것이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나에게 명령하실 것이라는 부정적 믿음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내가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할 것이고, 내가 하려는 것을 반대할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하게 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F)그러기에 프랭크 루박이나 브라더 로렌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풍성한 삶을 산 것 같이 시도하려는 것 자체를 시작하지 못 한다.
(5) 훈련에 필요한 장기적인 대가를 치르기 힘들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연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24시간을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서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 <영성 수업>에서 습관을 만들기 위한 훈련으로 묵상과 기도를 위해 따로 시간과 장소를 준비하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빠른 결과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영적 습관을 만들기 까지의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훈련의 시기에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누군가 위대한 사람을 만날 때 처럼) 내가 미리 준비해야 하고, 따로 시간을 내야한다는 부담과 함께 만남에 따른 빠른 결과가 보이지 않아서 훈련의 시간을 오래 지속하지 못 한다.
프랭크 루박의 훈련은 시간과 장소를 따로 준비하고 따로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는 등의 준비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물론 그도 초반에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인 시그널 언덕을 찾아가긴 했다.) 그러나, <1분 게임>에서 제안한 것처럼 1분 게임을 할 때 치러야 할 대가들이 있다. 매 순간의 인내와 순종, 지인들에게 소문내기와 공동체에서 함께 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가를 치를 마음의 준비를 할 여력조차 현대인들에게 없으므로 1분 게임에서 이길 때 받는 상을 누리지 못한다.(G)
(C) Richard Foster, 『그분 모시고 세상 속으로』, 조계광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11-14.
(D) Richard Foster, 『그분 모시고 세상 속으로』, 13.
(E) Henri Nouwen, 『영성 수업』,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 2007), 9-15.
(F) Henri Nouwen, 『영성 수업』, 85.
(G) Frank C.Laubach, 『프랭크 루박의 1분 게임』.
5. 현대인의 일상에서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기
본 장에서는 프랭크 루박이 제시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24시간을 현대인들의 삶에 적용 하고 시도한 사례를 제시한다. 여러 단체에서 시도한 방법들이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있고 그 상황이 공유된, ‘선한목자교회’의 영성일기 쓰기 사례를 대표적으로 제시한다. 현대인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을 활용하여 영성일기 공동체들을 온라인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적극 활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필자 본인이 실습한 내용들을 정리한다.
1) 공동체에서 영성일기 함께 쓰기 (H)
‘선한목자교회’(유기성 목사)에서는 담임목사가 먼저 프랭크 루박의 실험을 시도했다. 그리고 본인이 영성일기를 쓰기 시작했음을 교인들에게 알렸고, 교회의 각 소그룹 모임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영성일기 쓰기가 전파 되었다.
‘선한목자교회’에서는 공동체에서 영성일기를 쓰는 방법을 현대인에게 맞게 제시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 까지 예수님을 얼마나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때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일기형식으로 기록한다. 하루 중 기억나는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그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나, 무엇을 하셨나 기록한다.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과 불순종 했을 때를 기록한다. 이렇게 자신의 매일을 점검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이 일기를 통해 예수님과 친밀함을 훈련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을 소그룹에서 나누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므로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므로 더욱 예수님과 친밀해 질수 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선한목자교회’에서는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영성일기로 성도들의 은밀한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무절제한 성향이 점차 고쳐진다는 후기를 전한다. 실수를 유발하게 하는 험한 농담이나 두려움, 염려, 교만 등이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의식을 부드럽게 누르므로 혈기나 성질이 부드러워지고, 자아의 죽음이 일상이 된다.
프랭크 루박이 제안했던 것처럼 1분 게임을 한다고 소문을 내고 공동체에서 함께 진행 하라는 제안을 ‘선한목자교회’에서는 소그룹 별로 웹(앱)에서 기도 일기를 쓰는 방법으로 진행하고 있다.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연습 이므로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또한 스마트폰을 이용하므로, 스마트 폰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는 것 대신 내가 느낀 것들을 스마트폰으로 기록한다. 영적으로 둔감하게 하는 영상들을 찾아보는 대신에 타인이 쓴 영성일기를 보며 기도 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일기를 나누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안정감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조금씩 경험하다 보면 ‘하나님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실 거야’ 라는 오해가 점점 없어지고 하나님을 제대로 더 알아가므로 점차 신뢰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스마트폰을 이용한 영성일기 쓰기와 소그룹 모임은 스마트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상황화’로 공동체를 영적으로 더 건강하게 하고 각 개인들은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진다.
2) 개인 실험
최근 4-5년 동안 1분 게임을 혼자서 진행했었지만, 최근 1년 동안 프랭크 루박의 저서들을 다시 읽으면서 집중해서 시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실험을 하면서 ‘개인의 성향’이 대단히 많이 좌우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경우는 성격이 급하고 성취욕이 높고, 일에 집중력이 너무 높고, 생각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실험은 오래전부터 하던 실험이라 책을 읽으며 진행할 때 조금 더 집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관계로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갈 때 주님과 함께 가기보다 나 혼자 달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길을 급히 가다 보면 사람들을 바라보고 축복하는 경우들이 줄고, 나의 표정도 객관적으로 볼 때 긴장해 있는 표정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식할 때 마다 실패한 경우였다. 또한 일이나 과제, 공부를 할 때는(주로 지적(知的) 작업) ‘아버지 함께 해요’라는 모드로 시작 했다가도 혼자 빠져 들어서 허우적 거리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초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성공한 경우들은 주로 사람을 만날 때이다. 지적(知的) 작업과 달리 사람을 만날 때(정서적 작업)는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할 대화가 없어서 조용히 있을 때가 많다. 단둘이 만나도 조용히 있으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나의 생각이 아닌 상대방에게 필요한 대화가 시작된다.또한 길에서 어린 아이나 임신부들을 볼 때면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경우도 성공한 경우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프랭크 루박이 제시한 방법인, 영성일기 정확하게 작성하기, 함께 하는 공동체, 소문 내기를 하지 않고 매일 정확히 퍼센트로 계산하지 못했다. 무엇 보다 매일 쓰는 영성일기가 성장의 큰 원인이 된다.(I)또한 1분 게임에 함께하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한데 함께 하는 공동체 없이 진행 한 것이 진보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I) 김병호, “청소년 기도교육을 위한 “하나님의 기도학교” 여섯 번째 이야기: 기도일기 쓰기,” 「교육교회」477(2018), 31-35. 32-33.
6. 결론
17세기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브라더 로렌스가 한 방식들을 20세기에 자신에게 맞게 시도하고 기록한 프랭크 루박의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들을 연구했다. 또한 21세기인, 현대, 한국에서 이 방법들을 시도한 경우들을 알아보고 필자도 시도한 결과를 나누었다.
기독교에서 영성이란, ‘경험’ 즉 기독교인의 ‘영적인 삶’을 말한다. 학문적으로 ‘기독교영성학’이란, ‘자신이 인식하게 된 3위 일체 하나님을 지향하는,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경험’이라고 샌드라 슈나이더스는 정의한다.(J)결국 기독교 영성에서 ‘경험’, ‘삶’이 없이는 기독교 영성이 표현될 수 없다. ‘일상에서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논할 때 결국 ‘경험’ 없이 이론만으로는 ‘일상’과 ‘영성’을 표현 할 수 없다. 이론만 거론한 논문들은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참고 자료로서 자연스럽게 배제했다. 20세기에, 삶으로 드러난 영성에 집중했을 때 프랭크 루박이 눈에 뜨인 이유는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흔적(경험)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성일기를 쓰는 분들에게도 나타나는 같은 특징들이다.
은밀한 죄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다루므로 삶에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은밀한 죄가 줄어든다. 프랭크 루박 같은 경우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지내며,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그 외로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면서 외로움에 빠져들지 않았다. 또한 모든 회의와 만남에 앞서 기도로 준비하므로 불필요한 실수들을 줄였으며, 떨어져서 지내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로 그들을 향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두려움, 염려, 교만 등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 지므로 일상에서 안정감이 생기고, 그로 인해 성품이 온유해 진다. 또한 프랭크 루박 같은 경우는 자신의 모든 업무에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문맹 퇴치 프로그램, 신학교 운영 등 중요한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이러한 경험은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도를 몇 년간 진행하고 있는 필자의 삶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생각이 많아 두려움이 많던 사람이었으나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는 훈련을 했다.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 안에서 두려움이 점점 사그라들면서, 안정감이 생기면 평안이 나를 다스리면서 성정이 온유해 지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런 사이클이 몇년동안 지속되면서 지인들로부터 많이 온유해 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교학과 학업, 사역을 병행하고 있는데 매일의 스케줄을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생각지 못 했던 결과들을 경험한다. 빠듯한 일정 가운데 갑자기 부담되는 스케줄이 사라지기도 하고,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할 일에 은혜를 주셔서 제시간에 끝내는 경험도 한다. 시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경험하므로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이전보다 시간에 덜 쫓기게 된다.
프랭크 루박에 대해 관심은 많았으나 그동안 못 읽었던 그의 저서와 관련 자료들을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이미 읽었던 책들도 더 깊은 시각을 가지고 다시 읽어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풍성한 시간이었다.
이미 자신과 교회를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한 유기성 목사 외 한국의 다른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어서 실패 사례 뿐 아니라 성공 사례들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프랭크 루박은 홀로 24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시작했으나 현대인의 약한 의지와 바쁜 일상에서는 건강한 공동체가 함께 할 때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삼위 하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성도들에게 공동체가 중요하다.(K)영성 일기를 공동체에서 함께 할 때, 부작용이 발생 할 수 있는 위험도 있겠으나 이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례 연구 등을 통해 남은 역사에서 채워나갈 부분이 되겠다.
마지막으로, 프랭크 루박 개인에 대한 한글 자료가 많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더 자세히 연구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 또한 현대인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부분에 대한 근거 자료를 많이 준비하지 못해 근거가 빈약함을 고백한다. 논문 작성법 강의 전에 작성한 각주에 페이지를 정확히 찾을 수 없어서 페이지를 기록하지 못했다.
‘일상에서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로 접근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연구하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논문들을 보고나서야, 외곬으로만 생각한, 나의 지식과 생각의 얕음을 알게 된 시간이다. 한국에서 최근에 상담과 영성분야에서 같은 주제로 논문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이시고 드러내시는 주님을 더 깊이, 매순간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 즈음에 뉴스를 보고 며칠 동안 울며 다닌 날들이 있었다. 프랭크 루박 처럼 나에게 주어진 선교 대상자들에게 우리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을 내 삶을 통해 잘 소개하게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더 생겼다.
2장을 읽었던 시간은, 영적으로 너무 고갈되어 있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시기였다. 방학중 바쁜 일정으로 하나님과 깊이 단둘이 머무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는데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또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으로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사울왕의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지난주 목사님과 멘토링 때 목사님께 새벽기도 회복 여부에 대해서 문의했는데 다시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신 것이, 최근 나의 상태는 나의 행위로 인한 영적 결과물이라는 ‘죄책감’이 생긴 것 같다. 책에서 ‘기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라도 기꺼이 계속 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구하고자 하는 자발성’(p62)이 영성지도의 본질적 요소라고 했다.
마음이 어려울 때 생각나는 동역자들에게 연락해서 기도 부탁을 한다. 그럼에도 수련회 전날 밤 너무 피곤한 채로 아무것도 못하고 잠들면서 지금으로서의 해결책은 휴학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께 올려 드렸다. 해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한 ‘나의 두려움’인지 휴학에 대한 아버지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검증이 필요했다. 두려움이면 직면하고 아버지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수련회 점심시간에 Y 대 졸업생과 약속이 있었다. 이 친구는 만날 때 마다 자신에게 있었던 영적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 개강이 월요일이었는데 일정이 꼬여서 주일 밤 늦게 까지 강의 준비가 안됬었다. 이 친구에게 기도 부탁을 밤늦게 했는데 그 전까지 이 친구는 최근 자기에게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기와 같아서 싫은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그런지 계속 머리가 아팠었다고 했다. Y대에서 나를 만났을때, 나의 이미지는 학생들이 보기에 1분도 흐트러 트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마져도 그 친구에게 시간이 없다 기도해 달라는 문자를 보내니..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 안하는 네 모습이야’라고 알려주셔서 머리 아픔 없이 꿀잠을 잘수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자유케 해주심에 감사하면서도 그 친구에게 ‘그럼 하나님이 나한테도 하실 말씀이 있을텐데...’ 휴학을 고려하고 있는 상황까지 같이 나누고 기도부탁을 했다. 그리고 수련회 찬양 중 ‘i’m no longer a slave to fear, I am a child of GOD’ 여기서 터졌다. 아버지께서 두려움 때문이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았고, 이제 부르심대로 일어나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다음곡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였다.) 그런데 분과 모임시간에 교수님이 예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못 하시던 분이면 하나님께 그 이미지가 투영되서 하나님이 무얼 주겠냐는 상태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에서 또 터졌다.
나의 믿음의 싸움을 보면 대게 시간과 재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훈련하는 분이냐고 반문할 정도로 그런 간증이 많다. 왜 그 부분만 그렇게 훈련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아빠의 이미지가 하나님께 영향을 못 미쳤다고 평소에 감사했는데 시간과 재정에 관해서는 나를 꽉 묶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의 특별한 훈련의 과정에 대한 답이 공동체 안에서 찾아졌다. 횃불은 나에게 주신 귀한 공동체이다. 이번학기에 더 이상 휴학 질문은 없다. 이번학기도 부르심대로 아버지와 함께 풍성히 누리게 되길 기대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에서 1906년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프로이센 궁정목사였던 할아버지인 가정배경에서 태어났고, 1945년에 사형당했다. 제자의 길과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참모습을 가르쳤다.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모인 고백교회의 목사후보생 교육기관의 책임자로 섬겼었고, 미국에 망명할 기회도 있었으나 독일로 돌아왔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43년에 체포되어 45년에 교수형 당했다. 칼바르트와 니버의 제자로도 알려졌다.
나치의 억압가운데 목사후보생 훈련원과 ‘형제의 집’이 폐쇄된 것이 이 책을 저술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정치, 교회, 개인적으로 긴장이 컸던 상황에서 저자는 4주간의 휴가 중에 이 책을 단숨에 저술하게 되었다.
2. 신도의 공동생활
천재 신학자라는 별명답게 이 책의 단락별 주제가 명확했다.
머리말에서는 간단하게 공동체의 문제는 교회적 책임이고,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만 해결될수 있는 문제임을 밝힌다. 첫장 ‘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영적 공동체와 정신적 공동체를 비교 설명하며 영적 공동체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여서 그런지, 아니면 히틀러가 사회에 보이고 있는 영향 때문인지 정신적 공동체를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명확하고 피부로 와 닿았다.
두 번째 장 ‘함께하는 날’에서는 공동생활의 아침 모임(시편 기도, 찬송, 성서읽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단음으로 함께 부르는 찬송과, 공동체 대표기도의 의미 등에 대해서 동의 하며 읽는 부분이 참 많았다. 식탁 교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신 것을 기억하고 실제 우리의 식탁 교제뿐 아니라 예수님의 성만찬, 하나님나라의 식탁 교제까지를 의미함을 상기시킨다. 식탁 교제를 통해 노동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뿐 아니라 노동의 열매를 주심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와 노동이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한다. ‘프랭크 루박’의 24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것과 통하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노동과 함께 하므로 기도와 노동은 서로에게 시너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말, 행동, 노동은 모두 기도가 된다고 한다. 점심 식사 시간은 짧은 휴식으로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하루를 위한 기도를 한다. 또한 저녁 식탁 교제와 마지막 기도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이 저녁 기도 시간에는 그날 하루의 상처를 치유하고, 잠 들었을 때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기를 구한다.
세 번째 ‘홀로 있는 날’에서는 전적으로 말씀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의 중요성을 말하고 네 번 째‘섬김’은 혀를 훈련하며 지체의 소중함을 발견하라고 조언한다. 공동체를 유지하지 위해서는 구체적 섬김이 필요하다. 마지막 장‘고해와 성만찬’에서는 타인에게 나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성만찬에 참여하라고 한다. 바로 여기서 교회의 기쁨이 완전해 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침시간은 괴롭힘 당하면 안 된다는 말에 대단히 동감했다. (물론 동감한 부분이 참 많은 책이어서 다른 책에 비해서 책에 별표를 마구 긋긴 했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 시간과 저녁에 마무리 하는 양쪽은 정말 나도 사수하고 싶은 시간이다. 저녁시간이 아직 바다가 완전히 고요해지지 않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창조 때 처럼 성령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시간과 같아서 그 시간에 부어지는 은혜가 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아침 시간은 절대 분주해 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공동 기도회 때는 아침 저녁으로 구약 한 장과 신약 반 장 이상을 함께 읽으라고 권면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참 꿈같은 가정 공동체를 상상했다. 자녀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말씀을 봉독하는 마음으로 깊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 아버지 제가 만나는 모든 가정이 이런 가정이, 이런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